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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지진(朝鮮地震)-Ⅱ
(천명인:한부울)무단복제금지 링크가능
[6]현종개수실록 9년무신(1668,강희 7)10월13일 (무인)
상이 양심합에 나아 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 및 약방제조를 인견하였다.
이 당시 사은사 행차 때에 구매한, 산동(山東)무원(撫院)·강남(江南) 등 세 성(省)에 지진 변이(地震變異)가 일어난데 대한 문서 및 희봉구(喜峰口) 몽고부락이 배반한 사정에 대한 글을 올렸는데,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내 보이며 이르기를, “담성(郯城) 한 주(州)에 지진이 일어나 깔려 죽은 자가 1천여 명이나 된다.”하였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511.512-515p)
1.Beypazari AD 1668 August earthquakes 베이파자르 BeypazarI. 왕의 시장이란 뜻
베이파자르 BeypazarI
2.Bolu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보루(Bolu)
3.Cachete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카체테(Cachete)
4.Coujam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코우잠
5.Derben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데르밴(Derben)
6.Gelgiras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겔기라스(Gelgiras)
7.Haci Hamza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하즈함자(Haci Hamza)
8.Istanbul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이스탄불
9.Kastamonu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카스타모누(Kastamonu)
10.Kefalonia AD 1668 earthquake
케팔로니아(Kefalonia)
11.Kochişar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코치사르(Kochişar)
12.Listrien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리스트리엔
13.Merzifon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메르지폰(Merzifon)
14.Nabuzzio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나부지오(Nabuzzio)
15.North Anatolian fault zone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북아나톨리언 단층대(斷層帶)(North Anatolian fault zone)
16.Osmançik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오스만지크
오스만치크(Osmançik)
17.Samsun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삼순(Samsun)
흑해 연안의 중앙부, 키질이르마크강(江)과 예실이르마크강 두 하구의 중간에 있다. 내륙과는 철도로, 연안부와는 자동차도로로 연결된다. 온화한 지중해성기후를 이루며, 부근은 국내에서 가장 풍부한 농산물지역을 이룬다. 특히 잎담배는 터키의 명산물로 알려져 있으며, 질과 양에서 국내 제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잎담배를 비롯한 곡물·콩·과일·양모 등을 집산하여 수출한다.
BC 6세기에 그리스의 식민도시 아미소스로서 건설되었으며, 당시부터 중요한 통상로가 되어왔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4세기경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있다가 폰투스 왕국령이 되었으나 폰투스 왕국의 몰락으로 로마 제국에 귀속되었다. 12세기에 셀주크투르크령(領), 1419년 오스만투르크령으로 편입되었다. 1919년 케말 아타튀르크가 공화국 건설을 위해 독립군을 인솔하여 상륙하였으며, 시내의 광장에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있다. 그 밖에 이슬람교사원·박물관 등이 있다. 앙카라 ·시바스와는 철도·도로로 연결되어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18.Tokat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토카트(Tokat)
19.Zara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자라(Zara)
20.Amasya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아마시아(Amasya)
삼순 남서쪽 예실강(江) 연안에 있는 농산물 집산지이다. 고대 폰투스 왕국의 수도였으며,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이 태어난 곳이다. 주변지역에서는 밀·보리·사탕무·목화·잎담배 등이 생산되고, 포도·오렌지·레몬 등의 과수재배가 성하다. 그 밖에 양 ·산양 등의 사육이 활발하다. 시내에서는 타일·직조·시멘트 등의 산업이 이루어진다. 중세 건물로는 이슬람교 사원이 남아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21.Anatolia northern,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아나톨리아 북방
22.Ankara AD 1668 earthquakes
앙카라(Ankara)
옛날에는 앙고라로도 불렀다. 소(小)아시아 아나톨리아 고원의 북쪽 기슭에 있으며, 해발고도 800∼1,000m의 사카리아강 상류인 앙카라강 연안에 있다. 아나톨리아 전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통로에 있으므로 도시로서의 기원은 고대 히타이트시대에서부터 비롯된다.
BC 25년에는 로마제국의 지배에 속하고 앙키라라고 불렀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세워진 신전과 욕탕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 뒤 페르시아·아라비아·셀주크투르크·십자군 등에 의하여 점령·지배되었고, 14세기 후반부터는 오스만투르크에 속하여 아나톨리아 지방의 대상무역(隊商貿易)의 지방적 중심으로서 번영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뒤에는 터키를 재건하기 위하여 케말 아타튀르크(파샤)가 이끄는 국민군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1923년의 공화국 성립과 더불어 수도인 이스탄불을 대신하여 새로운 수도로서 발족하였다.
1925년 이후는 신시가의 건설과 함께 근대적 도시로서 크게 발전을 하였다. 앙카라는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뉘어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구시가는 북동부의 앙카라 구릉에 있는 오스만시대의 앙카라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좁고 정비되지 않은 통로와 바자르(시장)를 중심으로 가옥이 밀집해 있으며, 시내에는 많은 사원과 히타이트박물관(고고학박물관)·민속박물관이 있고, 부근에는 선사시대와 고대, 또는 비잔틴시대 등의 유적도 풍부하다. 구시가의 남쪽에는 도시계획에 바탕을 둔 정연한 신시가가 자리잡고 있다. 중앙을 관통하는 아타튀르크 거리 연변에 국회의사당을 비롯하여 관공서·은행·오페라하우스 등 근대적 건축이 이어져 있고, 앙카라대학도 있다. 그 밖에 시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릉에는 케말 아타튀르크의 무덤이 있다. 앙카라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공업으로는 시멘트 ·금속 등의 공장 외에 트럭공장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앙카라는 고대에 프리기아인들의 풍요한 도시였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왕도(王道)가 이곳을 지나갔다. 그 후 기원전 232년경 갈라티아 지방에 정착한 켈트인의 일파인 텍토사게스(라틴어 Tectosages)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189년에는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가 앙카라를 점령하여 갈라티아인들에 대한 군사활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기원전 63년에는 폼페이우스가 다른 텍토사게스 영토와 함께 한 수장 아래 두어 한동안 자치가 이루어지다가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앙카라를 로마 제국의 갈라티아주 수도로 삼았다.
이때 앙카라의 주민구성은 그리스인, 유대인, 로마인, 로마화된 켈트인들을 포함하고 그리스어가 사용되었으나 그리스화된 헬레니즘 도시가 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기원후 19년경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앙카라를 도시가 아니라 요새라고 불러 그리스·로마 도시 수준의 공공시설 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암시하고 있다.
비문이나 주화에 남겨진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당시 앙카라의 문화는 켈트 바탕에 로마의 사상과 관습이 얹힌 형태였다고 여겨진다. 150년경에야 진정한 헬레니즘이 싹트기 시작한다. 기독교가 북쪽이나 서북쪽으로부터 전파된 시기는 이르면 1세기 정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192년 처음 기록이 남아있는 안키라 교회를 사도 바울로가 세웠다는 증거는 없고 그가 갈라티아 북부에 다녀갔다는 증거도 없다.단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갈라디아교회와 사도 바울로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앙카라의 위상은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제국의 국제 도시가 되고 나서야 가까운 지리조건 덕에 크게 올라갔다. 그후 중세에도 앙카라는 여전히 중요한 도시로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였을 때는 페르시아인들과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1073년에는 셀주크 튀르크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십자군 원정을 온 툴루즈의 레이몽 4세가 1101년 셀주크 튀르크를 몰아냈으나 비잔틴 제국은 앙카라를 지배할 만한 힘이 없어 그 후 셀주크 튀르크와 다른 경쟁 세력들은 앙카라를 두고 서로 싸웠다.
아타튀르크 묘1356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2대 王 오르한 1세가 앙카라를 정복하였다. 튀르크족의 지도자인 정복자 티무르 대제가 아나톨리아 원정 때 앙카라를 포위 공격했으나 1403년에 앙카라는 다시 오스만의 지배하에 돌아와서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의 종반 무렵, 현재의 터키 지방은 오스만 술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리스 군의 침공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터키 민족주의 지도자 케말 파샤(후의 케말 아타튀르크)는 그의 저항운동 본부를 1919년 앙카라에 세웠다(터키 독립전쟁 참조).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고 앙카라가 이스탄불(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신 터키의 수도로 정해졌다.[위키]
23.Asarcik AD 1668 August 17 earthquake
아사르치크(Asarcik)
1668年7月25日(清康熙七年六月甲申)山东郯城(34.8°N,118.5°E)M81/2(震中烈度≥11)
산동성 담성(山东郯城)
[7]숙종 9년 계해(1683,강희 22)
1월15일 (정사)충청도(忠淸道)충원(忠原)의 달천(達川) 상류(上流)가 이틀 동안 물의 흐름이 끊어졌다. 강원도(江原道)의 강릉(江陵)·삼척(三陟)·평해(平海)·울진(蔚珍)·평창(平昌)과 경상도(慶尙道)의 안동(安東)·청송(靑松)·진보(眞寶)등지에서 지진(地震)이 있었으므로 해괴제(解怪祭)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1월18일 (경신)전라도(全羅道)의 무주(茂朱)·금산(錦山)·용담(龍潭) 등의 세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으므로 도신(道臣)이 이를 알렸다.
2월2일 (갑술)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郡)의 돌샘(石泉)이 흐름을 끊었고, 안동(安東)·청송(靑松)·진보(眞寶) 등의 고을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521p)
1.Etropole AD 1682–1683 repairs to church
에트로폴(Etropole)
1683年11月22日(清康熙二十二年十月壬寅)山西原平附近(38.7°N,112.7°E)M7(震中烈度9)
산서성 원평(山西原平)
[8]숙종 21년 을해(1695,강희 34)
3월24일 (을유) 3월26일 (정해)충청도 결성(結城) 지방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7월13일 (계유)충청도(忠淸道)의 서산(瑞山)등지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8월7일 (병신)전라도(全羅道)정읍(井邑) 등 세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11월14일 (임신)평안도(平安道)영변부(寧邊府)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12월29일 (정사)경상도(慶尙道)의 안음(安陰)과 전라도(全羅道)의 함열(咸悅) 등지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527p)
1.Kozani, AD 1695 September 26 earthquake
코자니(Kozani)
핀도스 산맥의 동쪽 기슭 해발고도 720m 지점에 있는 상업 도시이다. 카스토리아·플로리나·살로니카·라리사 등 그리스 북부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로의 결절점으로,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활기를 띤다. 중세 투르크 점령시대에 건설되었고,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다. 18∼19세기에는 그리스인으로만 구성된 이 도시의 주민들 사이에 그리스어(語)의 정화 등 애국적인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옛 가옥과 시가가 보존되어 그리스에서도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 섬유·농기구 공업이 발달하였고 시의 북쪽에서는 석탄을 산출하며 동쪽 교외에는 수력발전소가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2.Servia, AD 1695 September 26 earthquake
세르비아(Serbia)
정식명칭은 세르비아공화국(Republic of Serbia)이다. 동쪽으로는 루마니아, 남동쪽으로는 불가리아, 북쪽으로는 헝가리, 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남쪽으로는 알바니아,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1998년 코소보-메토히야(Kosovo and Metohia) 자치주에서 세르비아 정부군이 알바니아계에 대한 무자비한 인종청소작전을 펼친 코소보 사태가 일어나 한때 국제사회에서 완전 고립되기도 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강대국들이 알바니아계의 독립을 지지하는 가운데 코소보 자치주는 2004년부터 유엔코소보임시행정부(UNMIK;UN Interim Administration Mission in Kosovo) 직할 통치 아래 있다가 2008년 2월 17일 분리독립을 선언하였다. 행정구역은 29개 행정구(okrug)와 1개 수도(베오그라드)로 이루어져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9세기에 최초의 세르비아 왕국이 세워졌고, 9세기 말에 라슈카에서 흥성했다.:200~201 14세기 중엽에는 스테판 두샨(재위:1331~1355)이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석권하는 등 세력을 떨쳤으나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고:201,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결국 당시 이들의 중심지였던 보스니아는 동서양의 상반되는 세력에 오랫동안 굴복해야 했으며 12세기의 보고밀파와 같은 이단종파가 널리 전파되었다.:201 19세기, 세르비아인들은 집요한 독립 전쟁 끝에 1881년에 독립을 달성하였다(세르비아 왕국).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당시 이 나라 출신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를 암살함에 따라 한 달 후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그 당시 작은 나라였던 몬테네그로 왕국은 세르비아를 도와주는 동생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집요한 침략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는 계속 승리하였다. 그러나 1916년 2월엔 세르비아 또한 점령되었다(몬테네그로는 항복). 1918년이 되어서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빼앗긴 땅을 수복하게 되었으며 1920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나치에 협력한 크로아티아인에 의해 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이 이루어졌다. 소련군의 지원 아래에 1943년에 영토를 수복, 이 땅에 인민 공화국이 세워졌다(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티토사후 동구권의 민주혁명 및 민족주의의 대두에 따라 1992년,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차례로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연방의 중추적 국가였던 세르비아가 이에 반발하여, 특히 인접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인이 많이 살고 있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전쟁은 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 정화 등 많은 반인륜적 잔인행위가 저질러졌고, 나토와 미국의 군사개입이 있었다. 2003년 2월에는 신 유고 연방마저 해체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되었으나, 2006년 5월 몬테네그로가 분리 독립 투표에서 독립 찬성률이 55.4%로 독립이 가결되었다. 같은 해 6월 4일에는 몬테네그로 의회가 독립을 공식 선언함으로써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해체, 세르비아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한편, 세르비아는 2006년부터 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 되었다. 2007년 1월 21일에는 코소보의 운명을 결정할 총선이 시작되었다. 이 총선에서 세르비아 급진당이 승리하였으나 과반수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2008년 2월 17일 코소보는 세르비아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다.[위키]
미국-세르비아 [Servia]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브랙스턴카운티에 있는 지명이다.
설비아 [Servia]
미국 인디애나주 워배시카운티에 있는 자치구이다.
3.Sivas AD 1695 January 11 earthquake
시바스(Sivas)
키질이르마크강의 상류부 해발고도 1,275m, 앙카라의 동쪽 약 350km의 지점에 위치한다. 소아시아 동부의 교통요지로 농산물을 집산하는 중요한 상업중심지이다.
히타이트 시대에 건설되었다고 하며, 고대명은 세바스티아이다. 셀주크투르크 시대의 사적이 많으며, 15세기 초에는 오스만령(領)이 되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터키 독립전쟁 당시에는 민족항전회의의 개최지였다. 겨울이 춥기 때문에 농업은 발달하지 않았지만 제분·금속·시멘트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네이버 백과사전]
4.Velventos, AD 1695 September 26 earthquake
벨벤토스(Velventos)
1695年5月18日(清康熙三十四年四月丁酉)山西临汾(36.0°N,110.5°E)M73/4(震中烈度10)
산서임분(山西临汾)
[9]숙종 44년 무술(1718,강희 57)
9월14일 (기축)강원도(江原道)영월부(寧越府)에서 이날 유시(酉時)에 불빛이 동방(東方)에서 일어나면서 별이 떨어졌는데, 소리가 있었다. 경상도(慶尙道) 영양(英陽)·안동(安東)·청송(靑松)·진보(眞寶)등의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그리고 충청도(忠淸道)공주(公州)·직산(稷山)·단양(丹陽)·문의(文義)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542-543p)
1.Bulgaria AD 1718 June 16 earthquakes불가리아(Bulgaria)
동부 유럽 발칸반도의 남동부에 있는 나라로서 터키와 접경한다. 터키의 동유럽 진출 통로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에 1396년부터 500년간 오스만투르크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1878년 러시아· 투르크 전쟁 결과 자치공국이 되었고 1908년 불가리아 왕국으로 독립하였다. 1945년 공산당이 집권하고 1946년 왕정제를 폐지하여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되었다가 1989년 동유럽 민주화의 영향으로 공산정권이 붕괴된 후 1991년 신헌법을 채택하여 불가리아 공화국이 되었다.
정식명칭은 불가리아 공화국(Republic of Bulgaria)이다. 북쪽은 도나우강을 국경으로 루마니아와 접하고, 동쪽은 흑해, 남쪽은 터키와 그리스, 서쪽은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2001년 798만 명이던 인구가 2006년 738만 명으로 줄어 들었고, 인구증가율은 -0.86%로 세계에서 인구증가율이 낮은 나라에 속한다. 발칸반도에 있는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평화적으로 민주화된 나라이다. 200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였고, 2007년 유럽연합(EU)에 가입했다. 행정구역은 28개주(oblast)로 이루어져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665년에 고대 불가리아를 세움
(불가리아 정부는 이를 불가리아의 조상임을 주장하고 있다)
10세기 초에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시메온 1세 황제가 나와 5차례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떨침
1395년에서 190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1879년,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 상태에서 불가리아 공국이 세워짐
1908년, 불가리아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1915년에서 1918년까지는 동맹국에 가담하여 패전 남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마케도니아 지방은 그리스 왕국에 할양하고 남부 트라키아는 터키와 그리스에게 분할됨
1941년, 히틀러의 강요로 동맹국에 참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약 34만의 불가리아군이 전사하였다.
1944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중립국이 됨. 소련군의 침공으로 9월 9일, 조국 전선 정부(후에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수립으로 나치 독일에 선전 포고하고 연합국으로 전환.
1947년 시메온 2세(훗날 불가리아 공화국 총리를 맡게되었음. 2001년~2005년)가 소련군에 폐위당하여 공산국가인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성립
1989년, 35년간 불가리아를 통치한 토도르 지프코프 공산당 서기장이 퇴진하는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민주화됨(루마니아 혁명과는 달리 유혈혁명이 아니었으므로, 푸른 혁명이라고 불린다.)
2007년 1월 1일에 루마니아와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되었다.[위키]
2.Cyprus AD 1718 <December 12 earthquake
키프러스(Cyprus)
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나라로 소아시아와 인접해있다.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후 1925년 로잔조약으로 영국의 정식 직할식민지가 되었지만 그리스와 터키의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1959년 영국이 런던에서 미국의 중재 아래 키프로스 독립협정에 서명하였다. 그후 1960년 8월 16일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정식명칭은 키프로스공화국(Republic of Cyprus)이다. 지중해에서 세번째로 큰 키프로스섬이 전국토이며,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세 대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지난 역사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계 주민과 터키계 주민으로 국민이 구성되어있다. 양자의 상이한 문화적 배경 때문에 갈등이 깊어진 가운데 그리스의 단독 지배를 노골화하자 터키계의 북키프로스가 '북키프로스 터키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여 사실상 2개 국가로 분열되어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그리스계가 다수인 현 키프로스공화국만 인정하고 있고 '북키프로스 터키공화국'은 터키를 제외하고는 승인하지 않고 있다.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을 등에 엎고 쿠데타로 친그리스 정부가 수립된 후, 터키계 주민 보호를 이유로 파견된 터키군 3만 5000여 명이 북키프로스에 주둔 중이다. 유엔은 두 지역 사이에 완충지대를 설정해 놓고 평화와 타협을 중재하고 있지만 수도 니코시아의 북키프로스에의 접근성을 거부하여 긴장이 감돌고 있다. 행정구역은 6개주(district)로 되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고대:키프로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아도니스가 태어난 곳이며, 키뉘라스 왕과 테우크로스, 퓌그말리온의 고향이기도 하다.[15] 이 곳에서 처음으로 인간 활동 흔적이 남은 곳은 남부 해안의 아이토크렘노스(Aetokremnos)로, 기원전 10,000년경에 이 섬에서 사람들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기원전 8200년경에 마을 공동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첫 인간의 등장은 키프로스 난쟁이 하마와 키프로스의 난쟁이 코끼리의 멸종과 서로 관련이 있다.
신석기 시대에 섬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비롯하여, 인구와 정착지의 이동이 몇차례 전개 되었으며, 기원전 3800년경에 지진이 일어나 취락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사람들이 이 섬으로 들어왔는데, 이 시기의 것으로 발견된 유물 가운데는 질 높은 철기가 드물지만, 소아시아에서 온 일부 사람들은 발전된 철기 가공 기술이 있었다. 기원전 2400년경 아나톨리아인들이 키프로스에 오면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케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1600년경에 키프로스에 처음으로 왔는데, 이 시기 정착지는 섬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다른 그리스인 집단들이 기원전 1100~1050년경에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부터 키프로스는 그리스의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되었다. 기원전 8세기에는 오늘날 라르나카와 살라미스 근처의 '콰르트-하다쉬트'("새 도시") 등 일부 페니키아 식민시도 들어섰다.
키프로스는 이집트의 지배를 잠시 받다가 기원전 709년에 아시리아에 정복되었으며, 기원전 545년에는 페르시아 영토가 되었다. 오네실로스가 이끄는 키프로스 사람들은 기원전 499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한 이오니아 도시의 반란에 동참했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키프로스 섬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나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키프로스는 완전히 헬레니즘화되었으나, 기원전 58년 로마에 병합되었다.
45년 예수의 제자 파울루스와 바르나바가 키프로스에 건너와 그리스도교 복음을 전하였다. 키프로스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동맹하여 로마 제국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수천 명의 유대인이 죽고 나머지 유대인은 키프로스에서 추방당하였다.
중세:카트린느 코로나로, 키프로스의 여왕.395년 키프로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가,[17] 649년 아랍인에 섬을 내어주었고 966년에야 다시 섬을 요구하게 된다. 제3차 십자군 당시 1191년에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를 점령하여 사라센인에게서 비교적 안전한 주요 보급 기지로 이용하였다. 자신의 왕국을 잃었던 뤼지냥의 기가 성전 기사단에게서 섬을 매입하였다.
카트린느 코르나로 여왕이 퇴위하여 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키프로스를 장악하였다. 여왕은 자크 2세의 미망인으로, 키프로스 왕국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베네치아는 키프로스를 상업 중개지로 이용하였으며, 오늘날 키프로스의 수도인 레프코시아를 이내 유명한 베네치아 성벽으로 요새화하였다.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키프로스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1539년 오스만 제국은 레메소스를 파괴하고 악명을 떨쳤는데, 베네치아는 암모호스토스와 레프코시아, 키레니아를 요새화하였다.
오스만 제국과 대영 제국의 지배:1570년 오스만 제국의 피얄레 파샤가 이끄는 60,000명의 대규모 군대가 레프코시아와 암모호스토스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물리치고 키프로스를 정복하였다. 레프코시아 사람 20,000명이 처형되었으며, 모든 교회와 공공 건물, 궁궐이 약탈당하였다.[18] 오스만 제국은 키프로스 섬에 밀레트 제도를 시행하여, 종교 기관이 非무슬림 소수집단을 다스리도록 허용하였으며, 동방 정교회을 이들 기관과 그리스도 교도 키프로스인의 중개자로 삼아 정치ㆍ경제상의 권력도 부여하였다. 무거운 세금 때문에 1572년에서 1668년까지 대략 28번의 반란이 일어나 술탄이 개입해야 하였다. 1831년 오스만 제국에서 첫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남자의 수만 세었는데, 무슬림은 14,983명, 그리스도교도는 29,190명이었다.[19] 1872년 키프로스의 인구는 144,000명으로 늘었는데, 그 가운데 무슬림은 44,000명이고, 그리스도 교도가 100,000명이었다.
피리 레이스의 지도 중 키프로스.터키-러시아 전쟁((1877–1878) 이후 1878년 이 섬의 행정권(주권이 아닌)은 대영제국에 양도되었다. 대영제국에 있어 키프로스는 자국 식민지 통로에 자리잡은 군사 요충지였다. 1906년 암모호스토스항이 완공되자 키프로스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를 바라보는 해군 요충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편에 서자 영국은 키프로스를 병합하였다.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신생 터키 공화국은 키프로스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1925년 키프로스는 영국의 왕령식민지(Crown colony)로 선언되었다.
1950년 동방 정교회는 터키계 키프로스인 집단이 참가를 거부하는 가운데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90%가 넘는 지지로 '통합(Ένωσις)', 즉 그리스와 통합하는데 찬성하였다. 영국 당국은 헌법을 제정하여 제한적인 자치권을 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결국 철회되었다. 1955년 키프로스 전사 민족단(Εθνική Οργάνωσις Κυπρίων Αγωνιστών, EOKA)이 창설되어 무장 투쟁으로 독립하여 그리스와 통합하고자 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에 맞서 터키계 키프로스인들이 터키 저항단(Türk Mukavemet Teşkilatı, TMT)을 조직하여 국가 분할을 요구하였다.
독립:1960년 16일 8월 키프로스는 영국, 그리스, 터키가 맺은 취리히 및 런던 협정으로 독립을 얻었다. 영국은 아크로티리와 데켈리아에 두 군사 지역만 보유하고, 정부 공직과 공무는 두 민족에게 할당을 두고, 터키계 소수 집단에 영구 거부권을 부여하며, 의회와 행정부에 30% 비중을 보장하고, 세 국가의 모국 보장권을 부여하였다.
1963년 내부 분쟁이 일어났는데, 부분적으로 두 "모국"(그리스와 터키)이 뒤에서 도와주기도 하였다. 일부 지역의 터키계 키프로스인은 보호 구역으로 물러갔으며,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의 지도자 마카리오스 3세 대주교는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개헌을 요구하였다. 국제 연합이 개입하여 급박한 시점에 키프로스 국제연합군(UNICYP)이 파견되었다.
3.Izmir AD 1718 earthquake
이즈미르(Izmir)
이스탄불의 남서쪽 336km, 에게해(海)에 면한 터키 제3의 대도시로 예전에는 스미르나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이며 BC 627년 리디아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BC 3세기에 재건되어 로마시대까지 번영하였다. 중세 비잔틴·십자군·아랍·투르크 간에 쟁탈이 거듭되었으나 그리스 문화의 한 중심으로 그리스상인에 의하여 무역이 성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이 지방에 침입한 그리스군(軍)에 의해서 파괴되고 그리스령이 되었으나 1923년 터키에게 반환되었다. 주변일대에 곡물·목화·올리브·야채·잎담배·과실과, 견직·양탄자를 생산하는 배후지(背後地)를 끼고 있는데다가 비누·면직물·염색공업이 활발하여 상공업 중심지이다.
또한, 제1의 수출무역항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도시에는 2개의 철도역이 있으며 북쪽과 남동쪽으로부터의 철도종점이 되고 있다. 이스탄불과는 국내항공이 통하고 있으며 아테네로 연장 서비스도 하고 있다. 고대의 아고라에서 대리석의 열주(列柱),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像) 등이 발굴되었고, 파구스의 언덕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장(武將)이 축조한 성새가 있다. 국립도서관·에게대학 등이 있고, 호메로스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4.Lefkosia, Cyprus AD 1718 <December 12 earthquake
레프코시아(Lefkosia)
니코시아(Nicosia)는 키프러스 섬의 중앙부에 있으며, 주위에 비옥한 메사오리아 평야를 끼고 있다. 이미 10세기에 키프로스섬의 주도(主都)가 되었으며, 유럽과 아시아와의 경계에 있어 동 ·서 양 민족의 분쟁터가 되어왔다. 따라서 문화와 생활양식에도 동 ·서의 양 요소가 섞여 있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또 섬을 동서로 달리는 간선도로의 중앙에 있으며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와 이어지는 국제공항도 있어 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밀 ·포도 ·올리브 ·육우 ·양 등 농축산물의 집산 및 가공업을 비롯하여 피혁 ·섬유 ·담배 ·제분 ·청량음료 ·제과 등의 공업이 활발하며, 정치 ·상업 ·경공업의 중심지를 이룬다.
시가지는 15∼16세기 베네치아령(領) 시대의 성벽으로 둘려 있고, 20세기에 건설된 신시가가 주변에 펼쳐져 있다. 구시가지에서는 중세의 자취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성(聖)소피아 대성당, 성니콜라스 성당, 대주교궁, 사원, 터키 총독궁 등이 남아있고 프로스민예박물관과 고고학박물관이 있다. 특히 12∼14세기에 건립된 교회당은 현재도 이슬람교 사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그리스정교의 일파인 키프로스 성당의 대교구청도 있다. 1960년 독립과 함께 수도가 되었으나, 1975년 2월 이후 터키계 주민과 그리스계 주민이 대립 ·분열하면서 분단되어 니코시아도 남 ·북으로 분할되었다.[네이버 백과사전]
원형의 성벽이 니코시아에 위치해 있고 독립 이전부터 키프로스의 수도였다. 1974년 터키계 키프로스 주민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 터키군의 키프로스 출병으로 인해 마을의 북쪽을 지배하는 터키계 공화국인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과 남쪽을 지배하는 그리스계 공화국인 키프로스 공화국(독립 이래 그리스계 주도의 키프로스 정부이며 국제적으로 승인된 키프로스를 대표한다)으로 분단된 도시가 되었으며 북키프로스도 니코시아를 수도로 정하고 있다.[위키]
5.Maritsa AD 1718 June 16 earthquakes
마리차(Maritsa)
마리차강(Maritsa river)-길이는 522km, 유역 면적은 약 5만 3000km2이다. 소피아의 남동쪽 약 60km 지점에 있는 무살라산(2,925m)에서 발원하여, 불가리아 남부의 비옥한 평야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을 이루면서 에게해로 흘러든다. 터키의 에디르네까지 항행할 수 있으며, 툰자강 ·아르다강 등 많은 지류가 있다. 연안은 풍요한 농지로, 밀 · 포도 ·쌀 ·목화 등을 산출한다.[네이버 백과사전]
6.Patmos, AD 1718 February 13 earthquake
파트모스(Patmos)
에베소의 남서쪽 90km, 에게해의 스포라데스에 속하는 작은 섬이다. 남북 길이 16km, 동서길이 9km, 면적 40㎢, 해안은 60km에 이른다. 2000년 현재 인구는 약 2,500명이다. 지표는 모두 화성암으로 이루어져 불모지이고 밀이나 포도나무의 재배가 약간 이루어진다. 산은 높지 않고 최고봉인 일리아스도 269m이지만 전망은 매우 아름답다.
로마제국시대에 종교·정치범을 귀양 보냈던 유배지였다. 《요한의 묵시록》의 저자인 요한이 로마의 도미시아누스 박해 시대 유배가서 《요한의 묵시록》을 기록한 장소로 알려진 섬이다. 요한은 18개월 동안 있었는데, 이곳에서 《요한의 묵시록》을 썼다.
이 시기를 대개 94~96년경으로 추측한다. 현재 이곳에는 밧모섬의 중심지인 호라 마을에 요한 수도원이 있고, 《요한의 묵시록》을 썼다는 요한의 동굴, 1713년경에 세원진 밧모 희랍정교회 신학교, 이곳에 요한이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세례터가 있다. 성지 순례의 코스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네이버 백과사전]
미국-패트모스 [Patmos]
미국 미시시피주 샤키카운티에 있는 지명이다.
패트모스 [Patmos]
미국 아칸소주 헴스테드 카운티(Hempstead County)에 있는 타운. 관련항목 헴스테드 카운티
7.Plovdiv AD 1718 June 16 earthquakes
플로브디프(Plovdiv)
불가리아 제2의 도시이며,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불가리아 남부의 중심부인 마리차강(江)에 접해 있다.
트라키아 시대에 동쪽 3개의 언덕 주위에 풀푸데바라고 불리는 고대 거주지가 형성된 뒤, 기원전 342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름도 필리포폴리스로 바뀌었다.
이후 로마제국 점령기의 트리몬티움을 거쳐 1365년 오스만투르크제국에 점령되면서 필리베로 불리기 시작해 1885년 불가리아에 합병될 때까지 투르크의 지배 아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현재의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하였고, 1989년 11월에는 민주화 시위를 통해 불가리아인민공화국을 불가리아공화국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공업도시로 식품·화학·섬유·기계·자동차·담배 등의 공업이 이루어지며, 인쇄 산업도 활발하다. 근교에서는 야채·포도·쌀 등의 농산물이 재배된다. 유럽의 대표적인 고대도시로 알렉산드로스대왕 시대에 건설된 역사 유적을 비롯해 로마의 원형경기장과 원형극장이 있다. 그 밖에 산타마리아성당, 고고학 박물관, 불가리아의 각종 민속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민속박물관, 바로크 양식의 건물 등 곳곳에 역사 유적이 흩어져 있다.
또 맥주·식품·요리·빵 등 식료품 산업이 발달해 해마다 전시회가 열리고, 특히 인쇄박람회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네이버 백과사전]
1718年6月19日(清康熙五十七年五月二十一日)甘肃通渭南(35.0°N,105.3°E)M71/2(震中烈度10)
감숙성 통위 남쪽(甘肃通渭南)
**********************************조선지진 3 계속... 무단복제금지(천명인:한부울) 링크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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