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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지진(朝鮮地震)-Ⅲ

한부울 2012. 1. 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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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지진(朝鮮地震)-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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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영조 1년 을사(1725,옹정 3)

10월5일(기사)전주(全州)·순창(淳昌)등 읍(邑)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10월18일 (임오)강화부(江華府)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12월16일 (기묘)황해도(黃海道) 장연현(長淵縣)에 지진(地震)이 있었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547p)

1.Istanbul AD 1725 July-August earthquake(이스탄불)

 

 

2.Zakynthos AD 1725 February 8 earthquake

 

                                                       자퀸토스(Zakynthos)

 

자킨토스 또는 자퀸토스(Zakynthos, 베네토어: Zacinto, 이탈리아어: Zante)는 그리스 이오니아 제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면적은 410 km2이고 해안선은 약 123km이다. 이 섬의 이름은 전설에 나오는 아르카디아인 추장 다르다노스의 아들인 자퀸토스에서 유래되었다. 자킨토스 섬은 관광 산업이 발달하였다.

 

1725年8月1日(清雍正三年六月二十三日)四川康定(30.0°N,101.9°E)M7(震中烈度9)

 

                                                        사천성 강정(四川康定)

 

[11]

(1)영조 9년 계축(1733,옹정11) 3월28일(기유)경상도 웅천(熊川)·창원(昌原)·김해(金海)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장주(漳州)에서 9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2)영조9년계축(1733,옹정11)11월15일(임진)-공홍도(公洪道)의문의(文義)·청산(靑山)·보은(報恩)·연기(燕岐)등 여러읍(邑)에 지진(地震)이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멈췄는데, 집이 크게 흔들리고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549-550p)

1.Aegean Sea AD 1733 December earthquakes

 

                                                    에게 해(Aegean Sea )

 

고대에 "에게"라는 이름에 대해 수많은 설이 있었다. 대개는 그리스의 한 도시이던 아이가이 혹은 이 바다에서 죽었다는 아마조네스의 여왕 아이게아(Aegea)의 이름을 땄다고도 하며, 혹은 백 개의 손을 가진 브리아레오스의 다른 이름인 "바다 염소" 아이가이온(Aigaion)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하며, 특히 아테네인들 사이에서는 테세우스의 아버지인 아이게우스가 아들이 죽은 줄 착각하고 이 바다에 투신하여 그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또 한 가지는, "파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낱말 "아이게스"(알렉산드리아의 헤쉬키오스는 "염소"의 은유적 표현으로 썼다)에서 나왔다고도 하는데, 그리하여 "파도치는 바다"란 뜻이 된다. "해안"을 뜻한다.

 

그리스어로는 아이가이온 펠라고스(Aigaion Pelagos)라고 한다. 남북길이 640km, 동서길이 320km이다. 대소 400개의 섬이 산재해 있으며 다도해라고도 불린다. 군도(群島)를 뜻하는 아르키펠라고(Archipelago)라는 명칭도 처음에는 에게해에 대해서만 사용되었다.

 

에게라는 명칭은 전설상의 아테네왕 아이게우스, 또는 해신(海神) 포세이돈의 성지(聖地) 아이가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가 에게해의 섬들을 범람한 나일강 수면에 점점이 떠 있는 취락에 비유했듯이 도서(島嶼)의 대부분은 파쇄(破碎)되어 침수한 구육괴(舊陸塊)의 정상부에 해당하며, 동서방향의 신기 조산대 몇 줄기가 이를 꿰뚫고 있다. 따라서 해저의 지형도 복잡하며, 수심이 2,300m 정도로 깊은 곳도 있고, 수십m에 불과한 얕은 곳도 있다. 그러나 섬을 따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으며 해역 전체가 아시아와 유럽의 접촉점에 위치하고 고대문명이 꽃핀 이집트에도 가까웠기 때문에, BC 1500년경부터 이 해역을 중심으로 한 에게문명이 생겨났으며, 고대 후기에는 그리스문화의 중심부가 되었다. 플라톤이 연못 둘레에 있는 개구리에 비유했던 것처럼 그리스인은 이 바다의 연안을 생활무대로 삼았다. 그러나 북동부로는 다르다넬스해협을 통하여 마르마라해 ·흑해와도 이어지는 해역 교통상의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주변 민족들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일찍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던 델로스섬을 비롯하여 여러 섬들이 누리던 문화는 이제 보잘것 없이 쇠퇴하였다. 주민도 고대 그리스인의 후예는 적고 대부분이 혼혈이며 영세 농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밀 ·포도 ·무화과 외에 산호 ·해면(海綿)이 산출된다.

 

현재의 해안선은 기원전 4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 시대인 후기 빙하시대(약 기원전 16,000년)의 절정 때 전체 해수면은 130m 낮아 에게 해 북부의 상당수는 물이 많은 거대한 해안 평야였다. 최초로 인간이 이 곳을 점유한 뒤에도 오늘날의 밀로스 섬과 같은 곳은 그리스 본토와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의 해안 배치는 빙하시대 이후 해발 고도가 이후 3,000년여 년간 높아지던 기원전 7,000년에 나타났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 그리스와 에게 해의 문명은 에게 해 문명으로 일컫는다. 고대에 이 바다는 크리티 섬의 미노아 문명과 펠로폰네소스의 미케네 문명 이 두 고대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19세기에는 러시아가 이 해역을 발판으로 남하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소아시아 반도에 가까운 동해안 부근의 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섬들이 그리스에 속하지만, 후진국 그리스의 정치력으로는 모든 섬에 대한 정령(政令) 전달에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다도해 통치가 매우 곤란하다. 최남단의 큰 섬 크레타섬 등의 주민도 대부분이 맨발로 살고 있다. 주된 섬으로는 중앙부의 키클라데스제도(델로스섬이 중심), 동부의 스포라데스제도, 도데카니소스제도(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이탈리아가 반환하였음), 남부의 크레타섬 등이 있다. 아테네 ·피레우스로부터 항공기 ·관광선을 이용하여 에게해의 경치를 즐길 수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피리 레이스의 에게 해 지도.그 뒤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을 비롯한 수많은 도시국가가 출현했다. 플라톤은 에게 해 주변에 사는 그리스인들을 이르러 "연못가의 개구리들처럼" 살고 있다고 묘사했다. 에게 해는 나중에 페르시아와 로마의 침략을 받았으며, 비잔티움 제국, 베네치아,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에게 해는 민주주의의 고향이며, 그 해상 항로는 동부 지중해의 여러 다양한 문명의 교류 수단이 되었다.

 

2.Amorgos, AD 1733 December 23 earthquake

 

                                                           아모르고스(Amorgos)

 

아모르고스섬(Amorgos Island)

길이 18km, 넓이 7km로 좁고 대부분이 산악지형인 섬의 중심도시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항구 카타폴라(Katapola)와 아이기알리(Aigiali), 동쪽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해발 400m의 산 정상에 위치하는 호라(Chora 또는 Hora)로 섬 주민 대부분이 중심 도시에 거주한다. 카타폴라와 아이기알리 항구에는 낙소스(Naxos)와 피레우스로부터도 페리가 운행된다.

 

청동기시대 초기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섬에는 고대 타워의 잔해와 고대무덤, 석조 기계, 명각, 꽃병과 다른 고대 유물 등이 섬 곳곳에 남아 있으며 아모르고스섬의 고대 문명이 발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스피(Aspis)에는 아프로디테여신의 고대 신전이 있다. 특히 섬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 11세기 비잔틴시대에 건축된 호로비오스타(Horoviosta 또는 Chozoviotissa)수도원이 해안절벽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에 섬에는 세 개의 도시가 존재하였는데 아르케시니(Arkesini)와 미노아(Minoa), 아이기알리(Aigiali :Ormos Aiyalis)로 이 도시들은 자연적인 항구와 만이 있는 해안가에 위치하였다. 아르케시네는 오늘날의 카스트리(Castri) 부근이고 미노아는 카타폴라(Katapola)의 북쪽부근이며 아이기알리는 토라리아(Tholaria)와 스트룸보스(Stroumvos)의 북동쪽 부근이다. 관광지로 유명하고 속이 비치는 천으로 만들어진 지역의 전통 가운 아모르기나(amorgina)를 생산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3.Chios AD 1733 December 23 earthquake

 

                                                                 키오스(Chios)

 

부근의 작은 섬들을 합쳐서 키오스주(州)를 이루며 주도(州都)는 키오스. 면적 831km2. 인구 약 5만(1990). 소(小)아시아 반도의 서쪽 끝, 카라부룸반도에 위치하며 두 지점 사이에는 8∼20km의 좁은 수도(水道)가 있다. 섬은 남북이 길고, 북부에는 1,200m의 산지가 솟아 있다. 남쪽은 평탄하여 과일 등이 생산된다. 델로스동맹(同盟)에 속해 있었으며, 시인 호메로스의 출생지라고도 한다.[네이버 백과사전]

 

4.Paros AD 1733 December earthquakes

 

                                                            파로스(Paros)

 

위치 - 그리스 키클라데스 제도

파로스 섬은 낙소스 섬 바로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는 미코노스 섬, 남쪽에는 이오스, 산토리니 섬이 있다. 페리를 이용해서 이들 섬으로 이동할 수 있다. 파로스 섬은 아테네에서 비행기를 이용하거나 피레우스에서 배를 이용해 갈 수 있다. 파로스 섬 서쪽에 안티파로스 섬이 붙어 있다.

 

섬의 북쪽에 아폴론 신전 유적이 있다. 파로스도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무역, 식민지 개척에 열중했다. 에게해 북쪽의 타소스 섬을 개척해서 흑해로 가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타소스에서 금광을 개발해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품질이 우수한 대리석을 외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파로스 섬도 페르시아, 아테네, 로마, 비잔틴, 베네치아, 투르크의 지배를 받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파리키아는 파로스 섬 서쪽에 자리한 항구도시로 파로스를 드나드는 여객선이 정박한다. 이곳에서 섬의 각지를 연결하는 버스가 다닌다. 산토리니, 미코노스와 마찬가지로 파로스 섬에도 하얀집들이 많다. 마르첼로 해변과 크리오스 해변은 파리키아에서 가깝다. 아기아 에리니 해변은 파리키아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공항과 알리키 마을이 나온다. 에카톤타필리아니는 성모승천 축제가 성대하게 열리는 아름다운 그리스 정교회 교회다. 파로스 섬의 동남쪽에 자리한 피소 리바디, 골든 비치가 유명하다. 마르피사에는 성 안토니 수도원이 있다. 섬 중앙에 레프케스 마을이 있다. 나우사는 섬의 북동쪽에 자리한 항구도시다. 주변에 모나스티리, 산타 마리아 해변이 아름답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파로스의 등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근처에 있었다.

 

5.Samos AD 1733 December 23 earthquake

 

                                                            사모스(Samos)

 

현재의 터키의 서남쪽의 육지로부터 약 2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섬의 크기는 472.5제곱킬로미터이며 동서로 폭은 약 43킬로미터, 남북으로는 약 13킬로미터에 달한다. 섬의 중심부에는 사화산 케르키스 산(고대 그리스어로는 케르케테아스 산, 고도는 1,433미터에서 1,450미터 사이 수치가 주어진다)이 솟아 있으다. 섬의 중심도시이자 사모수 주의 주도는 항구도시인 사모스이다. 이 도시의 옛 명칭은 바시(Βαθύ)로 지금도 구 시가는 바시로 불린다. 피타고라스의 이름을 딴 피사고리오(Πυθαγόρειο, 옛 이름은 티가니)도 주요 항구도시이다.

 

고대에 이오니아 문화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540년경에 세워진 헤라 신전인 헤라이온이 유명한 건축물이다. 사모스 섬에 관련된 인물로는 피타고라스와 아이소포스(이솝)이 유명하다. 담배, 사모스 포도주, 꿀, 올리브유, 감귤류, 말린 무화과 열매, 아몬드가 생산된다. 포도주에는 머스캣 포도가 사용된다. 사모스 포도주는 사모스 섬의 전통적인 특산물로 고대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아직도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는 고급 포도주라는 평판을 유지하고 있다.[위키]

 

지중해(에게해) 크루즈 기항지 사모스(Samos)/그리스

사모스(Samos)는 지중해 동부 에게해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그리스 섬으로 터키의 서남쪽 육지로 부터 약 2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인구는 약 42,000명, 섬의 크기는 472,5km2으로 동서로는 43km, 남북으로는 약 13km에 달한다. 섬의 중심부에는 해발 1450미터의 케르키스 산 이 있다. 사모스주의 수도는 사모스 시로 옛 명칭은 바시(Βαθ?)로 지금도 구 시가는 바시로 불린다.

피타고라스의 이름은 딴 피사고리오(Pithagoreio)도 주요 항구 도시이다.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피타고라스의 고향이기도 하다.

사모스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전통적인 특산물로 고대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아직도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는 고급 포도주로 평판을 유지하고 있다. 고대에는 이오니아(Ionian) 문화의 중심지 였으며, 기원전 540년 경에 세워진 헤라(Hera: 제우스[Zeus]신의 부인) 신전인

헤라이온(Heraion)은 유명한 건축물이다. 서기 4세기경 에 있었던 지진에 의해 파괴 되었고 지금은 그 잔해들이 남아있다.

 

6.Seriphos, AD 1733 December 23 earthquake

 

                                                         세리포스(Seriphos)

 

면적 75㎢이며, 에게해의 그리스에 있는 섬. 키클라데스제도의 서쪽, 키트노스섬의 남쪽, 시프노스섬의 북서쪽에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가 외손자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神託)을 받고, 자신의 딸 다나에와 손자 페르세우스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는데, 이들 모자가 닿은 곳이 바로 세리포스섬이라고 한다.

 

20세기에 들어 광산이 개발되었고, 독일의 그로만(Groman) 가에서 이 섬의 남자들을 고용하여 착취하였다. 이 광산은 근로 여건이 유럽에서 가장 열악하여 현장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사람이 수천 명으로 추정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광부들이 파업을 결행하였고, 그로만가의 요청으로 그리스 방위군이 파견되어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를 지켜보던 광부의 아내들이 돌로 방위군을 공격하여 몰살시켰고, 섬은 해방구가 되었다. 파업 지도부는 광부들의 자치단체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프랑스 해군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그로만 가는 광산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한 뒤 근로환경 개선과 하루 8시간 노동의 원칙을 보장하였다. 파업을 이끌었던 콘스탄티노스 스페라스(Constantinos Speras)는 아테네로 돌아간 뒤 공산당 과격파에 암살당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7.Siphnos, AD 1733 December 23 earthquake

델포이의 아폴로 성역에 그리스의 각 도시가 세운 보고의 하나로, 시프노스(Siphnos) 섬으로부터 봉헌된 것. B.C. 525년, 그 시의 패배 직전에 세워진 화려한 건물(5.5x8.3m)로, 당시의 이오니아 건축양식을 잘 전해준다. 정면 2체(體)의 카리아티드, 동(東)페디멘트의 고부조『아폴로와 헤라클레스의 성정(聖鼎)싸움』, 건물 전체에 둘려진 프리즈 부조가 남아있고 연대가 분명한 이오니아 계 미술로서 귀중하다. 가장 중요한 프리즈의 부조는 동쪽 정면의 『트로이 전쟁과 여러 신의 평정』, 남면의 『디오스크로이에 의한 레우키포스 딸들의 유괴』, 서면의 『파리스의 심판』, 북면의 『기간트마키아』로 되어 있다. 조각은 모두 현지의 미술관에 수장되어 있다.

 

                                                          시프노스(Siphnos)

 

1733年8月2日(清雍正十一年六月二十三日)云南东川紫牛坡(26.3°N,103.1°E)M73/4(震中烈度10)

 

                                            운남성 동천 자오파(云南东川紫牛坡)

 

[12]헌종12년 병오(1846,도광 26) 6월13일(병인) 지진(地震)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660-662p)

1.Aleppo AD 1846 earthquakes

 

                                                                 알레포(Aleppo)

 

알레포-인구 약 154만 2천(1994). 아라비아 이름은 할라브(Halab)이다. 해발고도 400m의 고원에 위치하기 때문에 기후는 대륙성이지만 살기에 무난하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에 비가 오며, 연강수량은 400mm이다. 이스탄불~바그다드 철도가 통과하고, 베이루트 ·다마스쿠스와도 철도 ·도로로 연결되었으며, 예로부터 동서교통의 요지가 되어 무역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다. 목화의 대집산지이며, 견직물과 면직물의 제조 및 식품가공 ·양모 ·담배 ·시멘트 ·방적 등의 공업이 성하다.

 

시내에는 시리아대학의 분교를 비롯하여 라스샴라와 마리에서 출토된 유물을 간직한 박물관이 있으며, 옛 시가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오리엔트풍의 큰 시장과 12세기에 건조된 비잔틴 시대의 성채가 있다. 이슬람 교회도 많으며 최대의 것은 715년에 건조된 자미자카리야이다. 또 알피르다우스 교회(낙원의 교실)는 시리아의 중세 건축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유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주요 수출품은 이제 주변 영역의 농산물인데 주로 밀, 목화, 피스타치오, 올리브, 양이다.

 

2.Asia Minor AD 1846 March 28 earthquake 소아시아(Asia Minor)

 

아나톨리아(Anatolia, 터키어: Anadolu)는 서남아시아의 한 지역으로, 오늘날 터키 영토의 대부분을 이루는 넓은 고원 지대를 말한다. 아나톨리아는 이전에는 소아시아(Asia Minor)라고 불렸다. 이 지방의 북쪽에는 흑해, 북동쪽에는 캅카스, 남동쪽에는 이란 고원, 남쪽에는 지중해, 서쪽에는 에게 해가 있다. 아나톨리아는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문명의 터전이었다. 아카드, 아시리아, 히타이트, 아르메니아, 로마,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제국는 아나톨리아에 있었던 중요한 나라들이었다.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수많은 충돌과 문화적 교차로가 된 곳이기도 하다.

 

지리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의 삼면은 흑해, 에게 해, 지중해와 접하고 있다. 아나톨리아의 북쪽과 동쪽에는 산이 더 험하다. 흑해와 에게 해가 이어지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차나칼레 해협 사이에 마르마라 해가 있다. 마르마라 해 북쪽은 유럽 대륙이며, 보스포루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던 지점이다.

 

이 지역의 유구한 역사 덕분에 인구 역시 매우 다양하다. 아나톨리아 남동부에 주요 무슬림 소수 집단을 이루고 있는 쿠르드족이나 아나톨리아 남쪽에 주로 사는 아랍인 외에도 아나톨리아 각지에 알바니아인, 보스니아인, 유대인, 그루지야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이 소수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다.

 

'아나톨리아'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아나톨레'(Aνατολή)에서 나온 말로, "동쪽" 혹은 문자 그대로 "해돋이"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 말이 지칭하는 정확한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달랐으나, 원래 소아시아 해안의 이오니아 식민지만 일컫는 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중부 아나톨리아 고원에는 아나톨리콘 테마가 있었다.

 

아나톨리아 지방에 사람이 거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9000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 아나톨리아 지방의 꼰야 시 근처에 위치한 도시 차탈휘위크의 발굴로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초기 도시 취락이 발달하였음이 드러났다. 약 9000년 전에 돌연히 등장한 차탈휘위크인들은 선사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농경 정착민으로 당시 그들은 가축을 사육하는 동시에 차탈휘위크 일대의 풍요로운 늪지대에서 수렵과 채집을 병행하였으며 기원전 약 6000년 경 이후에는 흑요석을 가공하여 광역적인 판매망을 형성하였다. 또한 그들은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100년 이상 된 가옥을 매몰하고 그 위에 새로운 집을 짓고 지붕으로 출입하는 방식의 주택과 취락을 건설하였다.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양탄자를 짜고 토기 및 공예품을 제조하는 기술 뿐 아니라 물자 운반과 관련된 표시물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인근의 발전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고고학계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기원전 약 3000년을 전후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에게해와 그리스 북부 지역을 거쳐 발칸반도에 이르기까지 이주해 갔으며, 청동기시대 (기원전 약 2000년)을 전후로 도시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아마 히타이트 왕국이 융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철기 전기시대 (기원전 약 1200년경)에 이르러 히타이트 문명의 도시들은 북쪽에서 들어온 다른 부족들에 의해 정복되거나 파괴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으며 기원전 10세기 이후에는 고대 그리스의 동북부 지역의 프리기아가 소아시아의 패권을 잡은 것으로 여겨지며, 기원전 7~8세기부터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소아시아의 에게해 연안에 숱한 식민 도시를 건설하므로서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페르시아 제국은 소아시아 내륙으로부터 세력을 확장하여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패권을 다투게 된다.[위키]

 

3.Thessaloniki AD 1846 September 21 earthquake

 

                                                     테살로니키(Thessaloniki)

 

테살로니키-그리스 북부 에게해에 임한 마케도니아 지방의 도시. B.C. 315년 마케도니아 왕 카산드로스(Kasandros, 재위 B.C. 316~B.C. 297)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그의 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로마 제국 지배하에서 번영. 사도 바울도 선교여행 중 여기에 들려, 서간 『테살로니카 서(書) 』를 보냈다. 300년경, 로마황제 갈레리우스 (Galerius, 재위 305~311)는 많은 건물을 지었고 많은 부조로 장식된 『갈레리우스의 문』과 궁전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비잔틴 시대에는 제국 제2의 도시로서 정치 ∙ 문화 양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13세기에는 십자군이 일으킨 프랑크 왕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그 후 다시 비잔틴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 1423년 약체화된 제국은 시를 베네치아 지배하에 빼앗기고 그후 7년 후에는 터키 점령하에 들어갔으나, 1912년 그리스 독립과 함께 그리스 제2도시로서 현재에 이름. 고대 말기의 유적 외에 특히 비잔틴 시대 건축미술의 보고로서, 현존하는 중요한 성당에 아기오스 게오르기오스(4세기), 오시오스 다비드 (5세기 중순), 아히로피토스(470경), 아기오스 ∙ 디 ∙ 데미트리오스 (5~8세기), 아기아소피아 (8~10세기), 파나기아 하르키온(1028경), 아기오스 ∙니콜라오스∙오르파노스(14세기), 아기 아포스툴리 (14세기) 등이 있다. 시의 육지쪽 고대(高台)에는 5세기에서 4세기에 축조된 비잔틴 시대의 시벽(市壁)과 문, 탑의 일부가 남아 있다. 고고미술관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수집한 선사시대로부터 비잔틴시대까지의 중요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기원전 315년 마케도니아의 왕 카산드로스가 건설한 이 도시는 그의 부인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의 이름을 따서 테살로니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원전 168년 마케도니아 왕국이 로마 공화정에 의해 멸망하자 테살로니키는 로마의 도시가 되었고 로마 속주였던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갈레리우스의 개선문이후 테살로니키는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의 중요한 상업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사도 바울로가 이 도시의 교회에 보낸 두통의 편지는 기독교 신약성서에 포함되었다. (데살로니가전서, 후서)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당시에는 지역 수비대장이 인기있는 전차 경기 선수를 옥에 가둔 것을 계기로 일어난 테살로니키 주민들의 폭동을 황제의 명령을 받은 로마군들이 진압하면서 테살로니키 주민들을 학살하는 일이 있었다.

 

이 도시는 6세기와 7세기에 여러 차례 야만족의 공격을 받았다. 732년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가 성상(聖像)의 숭배를 금지한 지 2년 만에 로마 교황의 지배권으로부터 분리시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 종속되도록 했다. 그러나 성상파괴주의자인 레오 황제와 그 후계자들이 성상파괴를 자행하는 동안 테살로니키는 성상을 옹호하였고, 성상과 예술품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힘이 약해지는 수세기 동안 불가르족, 노르만족, 라틴인들이 이 도시를 침략하고 파괴행위를 벌였다. 오스만 투르크에게 계속 시달림을 받다가 1423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양도되었으나 1430년에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점령되었다. 이후 테사로니키는 계속 투르크의 도시로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계속 남아 있다가 20세기에 들어서 그리스군에게 정복되어 1913년 부쿠레슈티 협정에 따라 그리스에 양도되었다.[위키]

 

4.Samos AD 1846 July 3 earthquake 사모스(Samos)

 

5.Pamisos valley AD 1846 June 10 earthquakes

 

                                                   파미소스 계곡(Pamisos valley)

 

6.Mytilene AD 1846 earthquakes

 

                                                           마틸레네(Mytilene)

 

마틸레네-섬의 남동해안에 위치하여 좋은 항구를 가졌다. 주민 대부분은 아이올리스인(人)으로, 서정시인 사포와 알카이오스가 이곳에서 살았다. BC 5세기 초 이오니아반란에 참가하였고, 그 뒤 델로스동맹에도 참가하였다. BC 428년, BC 412년에 각각 동맹에서 탈퇴하였기 때문에 아테네 공격을 받아 함대를 잃고, 도시는 거의 파괴되었다. 그러나 BC 4세기 다시 아테네의 충실한 동맹시가 되었고, 이어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에는 안티고노스·리시마코스·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지배를 받았다. 능란한 외교술로써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BC 80년 무거운 세금부과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그 뒤 폼페이우스에 의해 해방되었다. 중세에는 투르크인·베네치아인·제노바인 등이 비잔틴제국과 이 섬의 영유(領有)를 둘러싸고 다투었으며, 1912년 그리스 영토가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7.Micromani, AD 1846 June 10 earthquakes

 

                                                         미크로마니(Micromani)

 

메세니아(messenia)라고도 한다. 동쪽은 타이게토스산맥에 의해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아르카디아 ·엘리스 지방과 접한다. 파미소스강(江) 유역의 기름진 메시니아 반도는 예로부터 중요한 곳으로, 현재는 올리브 재배를 비롯하여 무화과 ·생사 ·건포도 등이 생산된다. 후기 청동기시대에는 서부 메시니아의 필로스를 중심으로 왕국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제1회 메시니아전쟁으로 메시니아의 평야부를 빼앗겼으며, 원주민은 생산물의 절반을 바치는 헬롯(helot:농노)으로 전락했다. BC 7세기 후반에 메시니아인들은 아르고스 ·아르카디아의 가세(加勢)를 얻어 스파르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2회 메시니아전쟁에서 진압되었다. 스파르타로부터 해방된 것은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가 펠로폰네소스에 침입한 BC 369년이었으며, 새 주도(主都) 메시니아가 건설되었다.[네이버 백과사전]

 

8.Messinia AD 1846 June 10 earthquakes-메세니아(messenia)

Micromani,

1.Kalamata

2.Mani

3.Messini

4.Oichalia

5.Pylos-Nestoras

6.Trifylia

 

9.Kalamata AD 1846 June 10 earthquakes

 

                                                            칼라마타(Kalamata)

 

칼라마이(Kalámai)라고도 한다. 메시니아만(灣)에 면한 공업 도시이다. 주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집산·가공이 활발하며 올리브유·포도주가 유명하다. 수륙교통의 중심지로 이탈리아의 메시나로 통하는 기지로 이용된다. 시의 북동쪽에 있는 옛 성은 13세기초 프랑스 십자군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1825년 그리스 독립전쟁 중에는 투르크의 장군 이브라힘 파샤에 의하여 대약탈이 이루어진 곳이다. 근교에는 파라이의 유적이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10.Izmir AD 1846 earthquakes

 

 

11.Istanbul AD 1846 November 29 earthquake

 

 

12.Hellenic Arc AD 1846 March 28 earthquake

 

 

13.Gelibolu AD 1846 September 19 earthquake

 

 

                                                         겔리보루(Gelibolu)

 

겔리보루-이스탄불 남서쪽 200km 지점, 다르다넬스 해협 동쪽 끝에 있다. 터키어로는 겔리볼루(Gelibolu), 영어로는 갈리폴리(Gallipoli)라 부른다.

중세 이래 상업 중심지로 발전하여 곡류시장으로 알려진 곳이며, 곡류·피혁·치즈 등을 수출하고, 제분공업도 발달하였다. 그 밖에 어업과 통조림공업도 성하다.

이곳은 고대 갈리폴리스의 땅으로 14세기 이래 터키령이 되었다. 그 후 1853∼1856년의 크림전쟁,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흑해의 관문에 위치한 탓으로 군사적 요지를 이루었다.

로마시대와 비잔틴 제국시대의 요새·유적·고분 등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이스탄불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14.Foça AD 1846 February 17 earthquake 터키해군기지

 

                                                                 포카(Foça)

 

15.Egypt AD 1846 March 28 earthquake

 

16.Eastern Mediterranean AD 1846 March 28 earthquake

 

17.Dubrovnik AD 1846 July 8 earthquake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아드리아해의 진주로 불리는 아름다운 해안 도시이다. 7세기에 도시가 만들어져 라구사(Ragusa) 공화국이 되어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경쟁한 아드리아 해안 유일의 해상무역 도시국가였다.

 

9세기부터 발칸과 이탈리아의 무역 중심지로 막강한 富(부)를 축적했으며, 11∼13세기에는 금·은의 수출항으로 번영하였다. 십자군 전쟁 뒤 베네치아 군주 아래 있다가(1205~1358)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때 도시가 요새화되고 지협의 각 측에 2개의 항구가 세워졌다.

 

15∼16세기에 무역의 전성기를 맞았고 엄격한 사회 계급 체계를 유지하며 유럽에서 처음으로 노예 매매제를 폐지(1416)하는 등 높은 의식을 가진 도시였다. 1667년 큰 지진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때 다시 옛날의 번영을 누렸다.

 

1815년 빈 의회 결의안에 의해 오스트리아 제국(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합병되었다가 1918년 세르비아-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

 

1991년 10월,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군이 3개월에 걸쳐 총 공격을 해와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1994년 구시가지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1999년부터 도시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성채, 왕궁, 수도원, 교회 등 역사적인 기념물 가운데 가장 크게 손상된 건물들이 복원되었고 옛 명성을 되찾을 만큼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7월 10일부터 8월 25일까지 열리는 여름 축제도 다시 개최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달마티아 문학의 중심지로 크로아티아 문학의 일부를 이룬다. 식품·포도주·올리브유 등의 생산이 성하다. [네이버 백과사전]

 

인구는 약 5만명이며 크로아티아인이 전체의 88.39% (2001년 기준)을 차지한다. 예로부터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불렸다. 일찍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로 13세기부터 지중해 세계의 중심도시였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쌓은 구시가의 성벽(Stari Grad)은 1979년 UNESCO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557년 지진으로 인해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아름다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교회, 수도원, 궁전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인해 이 아름다운 도시도 많은 피해를 입었고, 아직도 그때의 파편과 총탄 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유럽의 많은 학자들이 이곳으로 달려와 인간방패(두브로브니크의 친구들)의 역할을 해 주지 않았다면 이곳은 폐허만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18.Chalkis AD 1846 November earthquake

 

                                                             칼키스(Chalkis)

 

영어로는 Chalcis, Chalkis라고 쓴다. 에보이아섬의 서해안 중앙부, 아테네 북쪽 56km 지점에 위치한다. BC 7세기 페니키아 시대에 건설된 항구가 지금까지 항구도시로서 번영하고 있다. 당시에는 북쪽의 칼키디키(칼키스라는 명칭에서 유래한다)와 이탈리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본토와는 다리로 연결되고 교통·무역의 중심지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19.Cairo AD 1846 June 15 earthquakes 카이로(Cairo)

 

 

1846年8月4日(清道光二十六年六月十三日)黄海(33.5°N,122.0°E)M7(震中烈度无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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