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동간(東干)혁명으로 본 간도(間島)와 만주문제

한부울 2011. 5. 25. 16:38

회민봉기-염군봉기(捻軍起義)와 둥간혁명(東干) http://blog.daum.net/han0114/17049430 

동학(東學) http://blog.daum.net/han0114/17045951 

************************************

동간(東干)혁명으로 본 간도(間島)와 만주문제


동간혁명(東干, Dungan revolt)은 (1648~1878)까지 230년간 회족과 위구르 이슬람 회교 반란을 말한다.

근세기에 들어 1862년에 섬서성과 감숙성으로 회민(回民)봉기가 발생하자 동쪽 투르키스탄의 회족(回族) 사이에 “청 군벌이 우리들에 대한 학살준비를 시작하고 있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1863년 3월 17일에 학살소문에 자극된 수정진(水定鎮) 근교의 삼도하(三道河)의 회민 200명이 이리(伊犁)지방의 9진지중 하나인 탑늑기성(塔勒奇城)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야크브·베크(Yakub Beg, 1820-1877.5.16)에 의해 동쪽 투르키스탄(Turkestan)은 통일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야크브·베크가 청 군벌 좌종당에게 패하면서 급사(急死)한다.


우리는 동간혁명이 일어난 곳,

동쪽 간(干)이란 지명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위 설명에도 나오지만 동쪽 투르키스탄(Turkestan)을 동간(東干)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쨌든 투르키스탄(Turkestan)이 간(干)이라 했음을 알 수 있으며 동간(東干)이 있으니 분명 서간(西干)도 있어야 맞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1)투르키스탄(터키어: Türkistan)은 "투르크족의 땅(페르시아어 : 스탄)"이라는 뜻을 가진 중앙아시아의 지역이다. 사마르칸트, 부하라, 타슈켄트와 같은 오래된 도시를 포함한다.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구 소비에트 연방 영토인 서 투르키스탄과 중국영토인 동 투르키스탄(新疆維吾爾自治區)으로 나뉜다.

투르크족은 과거 동북아시아에 살던 돌궐족으로 서쪽으로 이주하여 중앙아시아와 지금의 터키에까지 이르렀다. 터키의 옛이름이 오스만투르크라고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터키의 역사 시간에는 동북아시아에서 이주해온 민족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1998년에 러시아에서 서 투르키스탄이 독립했다.[위키]


(2)투르키스탄 또는 투르케스탄(Turkestan이라고도 표기한다)은 ‘터키인의 땅’을 뜻하는 이란어이며, 동 ·서 투르키스탄으로 구분된다. 동투르키스탄은 중국의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를 구성하고, 서투르키스탄에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등이 포함된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지역은 인도유럽 인종, 또는 이란계 인종(이란의 인도유럽계 인종)의 거주지였으나 동투르키스탄은 돌궐(突厥)의 지배와 웨이우얼인의 서방 진출(9세기 중엽)이 이루어진 후인 12세기 말경 완전히 투르크화하였다. 서투르키스탄은 티무르 제국(1369∼1508)의 지배를 거쳐 남러시아의 킵차크 한국의 자손인 우즈베크족이 이들을 멸망시키고 시르다리아강 이남의 비옥한 땅에서 정착생활에 들어간 이후 투르크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도시에는 아직도 이란인이 남아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3)중공자료에 의하면 東干人(自称:回族)은 동안(東岸)이라고도 하는데 근세기 신흥민족(新興民族)으로서 원래 감숙(甘肅), 협서(陝西), 사천(四川)지방의 회족(回族)이라 하였고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백년전 회족(回族)이 중앙아시아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분명 간(干)은 투르키스탄이며 중앙아시아를 통칭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동시에 동간(東干)과 서간(西干)이 존재하였음도 알 수 있다.


동간혁명(1648~1878) 230년간 회족과 위구르 이슬람 회교 반란기간이라 하는데 이상하게도 1648년 동간혁명이 최초 발생한 다음해에 인조(仁祖, 1595년~1649년, 16대 재위기간: 1623년~1649년)가 죽고 효종이 등극한다.

213년후 철종이 1862년 섬서성과 감숙성에서 회민(回民)봉기가 발생한 다음해 죽는 것과 같다.

기록에 의한 시차가 있지만 인조가 중앙아시아 동간혁명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조선왕조의 특이한 계보인데


조선시대 계보를 보면 크게 나누어 전기 태조이성계 계보와 후기 16대 인조계보로 나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태조이성계는 회교를 인정하였다고 보이고 16대 인조는 회교를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같은 조선왕이라도 종교관이 달랐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고 반도사가 말하고 있는 전통적 숭유억불정책이란 사실과 상당한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태조이성계 계보는 다시 나누어 2대 정종계보와 3대 태종계보로 나누면서 15대 전기 왕 모두를 3대 태종계보로 잇는다.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3대 태종(이방원)은 상당한 국력을 과시하고 왜구 일본 사신들이 열대지방에서 나는 공물을 들고 분주하게 들락거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그들이 태종을 사이 (四夷:東夷, 西戎, 南蛮, 北狄)를 다스리는 중국황제라고 칭한 것을 기록으로 확인 할 수가 있다.

일단 초기 태조이성계와 종교관 다르다고 여겨지는 후기 16대 인조계보는 17대 효종계보와 인평대군계보로 나누고 후기 왕들 모두는 17대 효종계보가 직계가 된다.

조선시대 마지막 왕인 고종은 유일한 방계(傍系)로서 바로 인평대군계보이다.


위 계보 이음을 보면 분명 회교반란과 상당한 연관성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태조 이성계가 티무르제국과 연관되고 연산군까지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중종 이후는 무굴제국과 연계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간도협약(間島協約:1909)과 이리조약(伊犁條約:1881)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리조약체결 연도가 미국에서 근대조선(Modern cho-sen, 1392-1881 AD)이 망한 시기라고 하는 1881년과 일치한다.


간도협약(間島協約)

간도협약(間島協約)은 일본군벌이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상태에서 1909년 9월 4일 청군벌과 체결한 조약이며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에 대한 철도부설권등을 일본군벌이 가져가는 대신에, 간도를 청군벌의 영토로 인정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 조약으로 간도에 대한 대한제국의 영유권 주장은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협약내용

1.한ㆍ청의 국경을 확정

2.용정촌, 국자가, 두도구, 백초구에 일본의 영사관이나 영사관 분관을 설치

3.도문강 이북의 간지에 있어서 한국민 거주를 승준

4.간도 지방 거주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권 관할

5.간도 거주 한국인의 재산은 청나라인과 동등하게 보호

6.일본은 길회선(연길~회령 간 철도) 부설권 획득

7.청은 간도에 설립한 통감부 등을 철수하고 일본은 영사관을 설치


이리조약(伊犁條約)=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

이리(동간)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청(淸)나라 사이에 맺어진 조약. 1864년 청나라 신장[新疆(신강)]에서 이슬람교도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 반란을 틈타서 코칸트한국(汗國)의 야쿠브베크장군이 카슈가르에 침입하여 정권을 세웠으며, 청나라의 세력을 몰아냄과 동시에 영국·오스만투르크와 제휴하려고 했다. 러시아는 이리지방의 러시아인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리에 출병, 점령했으며 청나라의 철수 요구에 응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이리사건이다. 1878년 청나라는 신장을 탈환하고, 러시아에 이리의 반환을 요구하기 위해서 숭후(崇厚)를 대사로 파견해 회담에 임했으며, 크림반도의 리바디아에서 조약을 맺었다. 이것이 1879년의 리바디아조약(제1차 이리조약)이다. 내용은 러시아가 이리를 반환하고, 그 대가로 청나라는 이리 서부지방을 러시아에 할양한다는 것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숭후의 굴욕적인 조약에 분노하여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조약의 비준을 거부하였으며 양국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로 청나라는 1881년 증기택(曾紀澤)을 대사로 파견하여 개정(改訂) 이리조약(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의해서 청나라는 이리지구의 대부분을 되찾았으나 자이산호(湖) 주변지역을 러시아에게 할양하였고 배상금 900만 루블을 지불하기로 했다. 이 조약 역시 청나라에게는 불리한 조약이었으며, 이 조약에 의해 오늘의 중국과 카자흐스탄의 이리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이 두 조약은 한반도 대한제국과 대륙조선이 근세기 역사 음모세력(북양군벌과 왜구군벌)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분리되면서 2중적으로 발생 할 수밖에 없는 형태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해야 맞고

결국 대륙조선의 영토에서 벌어진 조약임에도 전혀 다른 사건처럼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동간(東干)과 서간(西干)이라고 하는 간(干)자는 분명 중앙아시아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간도(間島)의 간 역시 중앙아시아의 동간, 서간인 간(干)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간(干)이 근세기 일제 왜구군벌, 북양군벌에 의하여 간(間)으로 둔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한반도, 열도를 포함하고 간도(間島)라고 표현되는 극동지역은 전역이 대륙조선 함경도, 함길도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干)이 간(間)으로 둔갑함으로 인하여 결국 동양 오리엔트가 극동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고 동시에 삼한영역과 역사마저 한반도로 쪼그라든 것이다.

 

다음 중국어사전을 보면

둔간(屯墾)

주둔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다.

개간(开垦) 개간(開墾)하다. 황무지(荒蕪地)를 일구어 논과 밭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킴.


干 [gàn]   

줄기, 맡다-간

[번체]幹 

줄기. (사물의) 주체. (사물의) 중요 부분.


骨干。 - 핵심.

干 [gān]  

방패, 마르다-간

[번체] 乾

마르다. 건조하다. [수분이 없거나 매우 적음을 형용함]. ↔[湿]


下雨天,衣服干得了吗。 - 비가 오는 날에 옷이 마를 수 있을까

干[gān]  

방패(防牌), 마르다-간

干戈。 - 방패와 창.


전통적으로 삼한의 역사가 중앙아시아를 근거로 하였다면 분명 방패라고 지칭된 간(干)자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보이고 더 나아가 황무지를 개간하여 이룬 땅이라는 귀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간(干)을 우리 영역에 쓰여진 지명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간도(間島)란 땅은 중앙아시아에서 찾아야 맞다.


왜군벌인 일제가 마음대로 간(干)을 교묘하게 간(間)으로 바꿔 바다에 있어야 할 섬도(島)와 묶어 실제의 영역인 중원(中原:중앙아시아)에서 극동으로 강제적으로 지명 이동시키면서 한반도 대한제국을 만든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물론 만주 역시 이러한 지명이동과 같은 식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