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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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鏡道]
3.천수부(天水府)는 회령(會寧)이고,
甘肅省(領九府。六直隸州。三廳。七州。五十縣)。
○鞏昌府(名襄武。領一州。八縣)隴甫(源道。附府)安定(定西)會寧(屈吳)通渭(平襄)漳縣(武陽)寧遠(新興)伏羌(當亭)西和(水南)岷州(赤水)洮州廳(臨潭)-地輿名目(一十九省)
[평안도]4.천수부(天水府)는 영원(寧遠)
[함경도]3.천수부(天水府)는 회령(會寧)
天水
历史沿革
早在春秋时,秦国即在这里置邽县,与冀县(今甘谷县)同为中国设县之始,后历称上邽县、成纪县、秦州。汉武帝时分陇西郡设天水郡,因而有天水之名,东汉、三国期间改称汉阳郡,西晋时改回“天水”,民国初年撤秦州而设天水县,天水之名沿用至今。
天水”,是当地历史上使用时间最长的地名。
最早始于汉武帝元鼎三年(前114年)。
天水得名,源于“天河注水”的美丽传说。
远在三千多年前,天水地区人烟稠密,屋宇毗连,“山水灵秀,林木密茂”。
可是,到了秦末汉初,长期的征战、厮杀加上连年的干旱,使当是繁华、富饶的上城变得残垣断壁,民不聊生。
传说,在一天夜里,正当人们进入梦乡的时候,忽然天空狂风呼啸,雷电交加,随着一道金光闪耀,地上现出红光。顿时,大地连续震动,在轰隆隆巨响声中,地面裂开一条大缝。
只见天上河水倾泻而下,注入裂开的大缝中,于是形成一湖,名曰“天水湖”。
此湖水位稳定,水质纯净,甘冽醇厚,“春不涸,夏不溢,四季滢然”。
当时人说这湖与天河相通,又叫它“天水井”。
后来,这个传说被汉武帝听到了,他就命令把要新设的郡建在上邽北城的湖旁,起名“天水郡”。
从此,有了“天水”之名。
1949年8月3日,天水县解放。8月15日,天水分区行政督察区成立,辖天水、甘谷、武山、徽县、两当、通渭、秦安、清水8县。
同年12月,天水分区改称天水专区。
1950年2月,析天水县置天水市
清水县
地名由来:宋《太平寰宇记》有“废上邽县,本邽戎地,秦伐邽戎而置县,属陇西郡,今(宋)为清水县理所。”西汉武帝元鼎二年(前115年),在古陇坂通道,析上邽县(南移天水市区)置清水与陇(今张家川)两县,属天水郡;清水县以上陇“清泉四注”得名。《水经·渭水注》:“(清)水导源东北陇山,二源俱发,西南出陇口,合成一水。西南流,历细野峡,逕清池谷。又逕清水县故城东。”县因清水而得名。(中国地名语源词典)
历史沿革:秦武公十年(前688年)伐邽戎,在全国始置上邽县,据有县北及中部之地。秦惠公五年(前395年)伐绵诸部族,据有县南之地。秦昭王二十七年(前280年),置陇西郡辖上邽县、绵诸道至西汉初。宋《太平寰宇记》有“废上邽县,本邽戎地,秦伐邽戎而置县,属陇西郡,今(宋)为清水县理所。”西汉武帝元鼎二年(前115年),在古陇坂通道,析上邽县(南移天水市区)置清水与陇(今张家川)两县,属天水郡;清水县以上陇“清泉四注”得名。东汉因隗嚣战乱,省清水入陇属汉阳郡。三国复清水县入陇,属魏置渭北广魏郡。晋代清水属秦州略阳郡。南北朝北魏时置清水郡,辖清水、伯阳(今北道区伯阳乡)两县。隋初废郡,更伯阳为秦岭县。唐武德四年(621年)在清水县置邽州,六年(623年)并入秦州。贞观十七年(643年)省秦岭入清水县。唐开元二十二年(734年)清水古城震毁。广德元年(763年)吐蕃陷清水出县东大震关。大中二年(848年)收复,改属凤翔府,县治移河南上邽镇(即今城处)。五代清水自前蜀经后唐至周,名为陇右道秦州府所辖,实为吐蕃割据。北宋击吐蕃后清水隶秦凤路秦州府。太平兴国二年(977年),秦州经略使曹玮在牛头河南岸,笔架峰下筑清水城设治至今。金人攻秦陇,清水金据。南宋以县北卧牛山下改冶坊寨置县(今黄门乡王店村),冶坊县城址尚存。宝庆三年(1227年)蒙古主成吉思汗从六盘山率军抵清水县西江(今牛头河),逝于清水城西萨里川(今红堡乡)。元灭金宋,并冶坊入清水。元、明两代均属陕西行省巩昌府秦州所辖。清康熙七年(1668年)归甘肃布政司,雍正七年(1729年)改属秦州直隶州。1912年属渭川道,道废属甘肃第四行政专署。1949年7月31日后,属甘肃省天水地区行政公署。1953年划县北部置张家川回族自治区。1958年清、张并为清水回族自治县。1961年又分设清水、张家川两县至今。1985年改市管县体制,属天水市。
중국 감숙성 천수(天水)
734年天水地震基本参数
천수天水는 감숙성甘肅省 동부에 위치한 소도시이자 감숙성의 실크로드를 여는 첫 번째 도시로 서안에서 서쪽으로 328㎞, 난주蘭州에서 동쪽으로 350㎞ 떨어져 있어 서안과 난주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설화에 따르면 기원전 114년 한무제 한무제때 대지가 진동하여 갈라지더니 땅속에서 붉은 빛이 솟아나 하늘의 번개와 뒤섞였으며 이 때 하늘의 물이 땅의 갈라진 곳에 내려와서 호수가 되었다고 하여 그곳의 이름을 천수라 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창건 설화가 아닐지라도 천수는 위하渭河강가에 위치해 있어 수자원이 풍부하고 풍경이 수려하여 ‘소강남小江南’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秦(B.C. 221~207)의 근원지이기도 한 천수는 이처럼 풍부한 자원과 그에 따라 발달된 농업, 황하와의 연결에 따른 교통의 요지로서의 역할 등으로 통일국가의 저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천수는 감숙성의 제2의 공업도시이며 동서로 접해있는 북도北道와 진성秦城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어 기차역을 중심으로 교통은 북도에 주요한 번화가는 진성에 밀집해 있다. 고도古都를 자랑하는 도시이니만큼 역사적 유적도 다양한테 천수의 남동쪽에 위치한 맥적산麥積山석굴이나 시내에 있는 복희묘伏羲廟, 도교사원인 옥천관玉泉關, 한의 명장 이광 李廣(B.C. 183~119)의 묘 등이 대표적이다
岷州-西魏置,在今甘肃岷县一带。唐后期入吐蕃。北宋熙宁时复置岷州。南宋为西和州,改治白石(今西和)。元仍于今岷县置岷州。民国为县。
历史沿革
南北朝时期,“岷州”成为今天岷县的称谓首次出现,直至1913年不再使用。(图为岷州主街道,英国探险家威廉·珀道姆摄于1911年5月) 1911年5月 岷州街道
秦—南北朝
公元前623年(秦穆公三十七年),岷县进入秦国版图
公元前221年(始皇二十六年),统一中国,秦朝的疆域“西至临洮羌中”(《史记秦始皇本纪》),临洮即今岷县,羌中即今甘南。临洮县为今岷县境内设县之始。
秦亡汉兴,汉承秦制。汉代今岷县地区为陇西郡下辖的临洮县,并设有南部都尉。 延至南北朝时期,于公元445年,设临洮郡,治所在今岷县,下辖赤水(在今岷县境内梅川一带)、石门(北魏孝文帝太和九年即485年置;在今卓尼县石门乡)、龙城(太和十年即486年置,在今岷县西北古城一带)三县。
南北朝—南宋
魏文帝大统十年,即公元544年,始设岷州,并设同和郡,改原临洮县为溢乐县,岷州、同和郡治所在溢乐县(今岷县),因境内有岷山,故名岷州。辖区规模相当于今岷县、宕昌一带。
公元583年(隋文帝开皇三年),废设岷州,改西魏溢乐县复为临洮县(今岷县)辖于临洮郡。
公元742年(唐天宝元年),改隋置岷州为和政郡。肃宗乾元元年,即公元758年复置岷州,领溢乐(今岷县)、祐川、和政(均在今岷县境内)3县。
“安史之乱”后,吐蕃势力渐强,乘机侵入陇右。肃宗上元二年(761年)吐蕃攻陷岷州。在300多年的历史时期为吐蕃占据,直至北宋中期“熙河之役”期间复归中央王朝统属。
公元1073年(北宋熙宁六年),王韶收复岷州,岷州下辖三县、五寨、三堡、一监,分别为:祐川县(今岷县境内)、大覃县、长道县,临江寨、荔川寨、麻川寨、闾川寨、宕昌寨。遮阳堡、谷藏堡、铁城堡。滔山铸钱监。
南宋初移岷州治于白石镇,后因“岷州”之“岷”字犯金太祖完颜旻名讳,遂改为“和州”但安徽也有和州,于是改称西和州。
元代至今
南宋以后岷州地方多为西番所居,公元1271年(元世祖至元八年),划岷州归脱思麻路(今安多藏区)所辖,吐蕃等处宣慰使脱思麻路治岷州(今岷县),辖岷州,领铁州(治今岷县维新乡元山坪)。“路”为元代第二级建制。
公元1378年(明洪武十一年),在今岷县设岷州卫,,领西固城守御千户所(在今舟曲)。统属于陕西都指挥司。
公元1730年(清雍正八年),岷州卫改称岷州,属巩昌府(治今陇西县)所辖。
公元1913年(民国2年2月),改岷州为岷县。民国时,曾为甘肃省第一行政督察专员公署驻地。
中华人民共和国建国后,一度属武都地区,八十年代划归定西地区。今为定西市所辖。
伏羌
唐改冀县为伏羌。后入吐蕃。元仍为县,民国改为甘谷县,属甘肃。
会宁
是历史文化古城。
会宁“地控三边,县居四塞”,是古丝绸之路重镇,素有“秦陇锁钥”之称。
早在新石器时代,这里就有人类生息繁衍。
自汉武帝元鼎三年(公元前114年)设置祖厉县,已有2100多年的历史。
古城会宁,城辟四门,东为“东胜门”,西为“西律门”,南为“通宁门”,北为“安静门”。
城郭形如凤凰展翅,故有“凤城”之称。秦始皇、郭文普、 汉武帝、林则徐、左宗棠、谭嗣同等曾到过会宁,留下了戍边足迹,翰墨诗赋。
会宁县
早在新石器时代就有人类活动。
《禹贡》雍州之域,殷周为西羌所居,战国至秦属北地郡。
西汉于会宁境内置祖厉县,属安定郡(祖厉音嗟赖,以祖厉河而定名),治所在今县北郭城驿镇有祖厉县故城遗址。
公元前一一二年,汉武帝西巡到此。
《汉书.武帝记》载;“(元鼎)五年冬十月,行幸雍,祠五畴,遂逾陇,登崆峒,西临祖厉河而还”。王莽时祖厉县改为乡礼县。
东汉初,废乡礼,复为祖厉县。
安帝永初五年(111年),迁县治于今会宁县会师镇南十里铺村窝铺村民小组厉河之滨,属凉州刺史部武威郡。
两汉时期,会宁地居“丝绸之路”北线,用兵河西之孔道。
魏晋以来,会宁之地陷于荒芜。南北朝时期,西魏废帝二年(553年),周太祖为西魏相时,置会州会宁县,治所在今靖远县东北。
《元和志》载:“后周太祖为西魏相,来巡,会师于此,土人张信謦资犒军,太祖大悦,因置州以会宁为名”。
会宁县“周太祖置会宁县,属会州。
”会宁县自西魏得名,至今已有1400多年的历史。北周属高平郡乌兰县。
隋属平凉郡会宁县,后改凉川县。唐属会州会宁郡,所辖会宁、乌兰二县。
宋属会州敷川县。金属会州保川县。又置西宁县,属秦州,治所在今会宁县翟家所乡张城堡村有西宁故城遗址。此地宋时称“甘泉堡”。
宋宣和中(1120年)尝置刺羌城于此。贞右四年十月(1216年)西宁县升为西宁州,仍属会州。
元顺帝至正七年(1347年),并县入州,属巩昌路,隶陕西行省。元顺帝至正十二年(1352年),因会宁地震严重,“诏改会州为会宁州”。
明洪武二年(1369年)始置今之会宁县,隶陕西布政司巩昌路。
会宁县名从此沿用,历经明、清两代,至今600多年历史。
清隶属甘肃布政使司巩昌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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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함길도⊙ 회령 도호부(會寧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진절세자(鎭節制使)가 이를 겸하고, 판관(判官)이 1인이니, 경원도 우익 병마(慶源道右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려(高麗)의 땅이었다. 속칭(俗稱) 오음회(吾音會)라 하는데, 호언(胡言)으로는 알목하(斡木河)이다.【‘회(會)’자를 취(取)하여서 부(府)의 이름으로 하였다.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가 땅이 비어 있는 것을 틈타서 들어와 살았다. 세종 15년에 올적합(兀狄哈)이 맹가(猛哥)의 부자(父子)를 살해하여, 알목하(斡木河)에 추장(酋長)이 없어졌다. 세종 16년 봄에 드디어 석막(石幕)의 영북진(寧北鎭)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기고, 바로 알목하가 서쪽으로 동량 야인(東良野人)과 인접하고, 북쪽으로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에 해당하며, 또 알타리 유종(斡朶里遺種)이 살고 있다 하여, 특별히 벽성(壁城)을 설치하고서, 본진(本鎭)의 절제사로 하여금 이를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땅이 영북(寧北)과의 거리가 매우 멀리 떨어져서, 성원(聲援)이 너무나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 여름에 따로 진(鎭)을 알목하에 설치하고, 풍산(豊山)·원산(圓山)·세곡(細谷)·유동(宥洞)·고랑기(高郞岐)·아산(阿山)·옛 부거[古富居]·부회환(釜回還) 등지로써 경계를 삼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차임(差任)하였다가, 겨울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켜 절제사(節制使)로써 이를 진수(鎭守)하게 하고, 판관(判官)과 토관(土官)을 두었다.
대천(大川)은 두만강(豆滿江)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백 50리, 서쪽으로 운두성(雲頭城)에 이르기 35리, 남쪽으로 부령(富寧) 지경에 이르기 75리, 북쪽으로 종성(鍾城) 지경에 이르기 35리이다.
호수가 6백 24호요, 인구가 2천 1백 57명이다. 군정은 갑사(甲士)가 25명이요, 정군(正軍)이 6백 95명이다.
땅이 기름진 곳이 많고, 메마른 곳이 적으며, 기후가 몹시 춥고, 풍속이 검소(儉素)와 강용(强勇)을 숭상한다. 간전(墾田)이 3천 8백 53결이요,【논은 다만 12결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모맥(牟麥)이다. 토산(土産)은 노루·사슴·다시마이요, 약재는 삽주덩이뿌리[白朮]·버들옷[大戟]·오독도기[茹]·황경나무껍질[黃蘗皮]·바곳[草烏頭]·흰바곳·외나물뿌리[地楡]·끼절가리뿌리[升麻]·칡뿌리·작약(芍藥)·범부채[射干]·장군풀[大黃]·방풍(防風)·도라지·창포(菖蒲)·질경이씨[車前子]·새삼씨[兎絲子]·대왕풀[白芷]·할미꽃뿌리·오갈피·멧미나리[柴胡]·족두리풀뿌리[細辛]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 도기소(陶器所)가 2이며, 염소(鹽所)가 1이다.【부의 동남쪽 대호야곶(大好也串)에 있다. 】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8천 1백 38척이다. 안에 샘이 9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참(站)이 4이니, 회수(懷綏)·풍산(豊山)·영안(寧安)·역산(櫟山)이요, 험조처(險阻處)가 2이니, 운두성(雲頭城)【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옛 산성[古山城]이요,【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연대(烟臺)가 13이니, 북면(北面) 하을개(下乙介)【북쪽으로 종성(鍾城)에 응하고, 남쪽으로 고령 북봉(高嶺北峯)에 응한다. 】·고령 북봉(高嶺北峯)【남쪽으로 고령 전봉(高嶺前峯)에 응한다. 】·고령 전봉(高嶺前峯)【남쪽으로 오롱초(吾弄草)에 응한다. 】·오릉초(吾弄草)【남쪽으로 오산(鰲山)에 응한다. 】·오산(鰲山)【남쪽으로 부 동우(府東隅)에 응한다. 】·부 동우(府東隅)【남쪽으로 영안(永安)에 응한다. 】·영안(永安)【남쪽으로 염통(念通)에 응한다. 】·염통(念通)【남쪽으로 전괘(錢掛)에 응한다. 】·전괘(錢掛)【남쪽으로 부령(富寧) 고봉(高峯)에 응한다. 】·서면(西面) 보화(保和)【동쪽으로 보을하(甫乙下)에 응한다. 】·보을하(甫乙下)【동쪽으로 독산(禿山)에 응한다. 】·독산(禿山)【동쪽으로 관문(關門)에 응한다. 】·관문(關門)이다.【동쪽으로 부 동우(府東隅)에 응한다. 】
토관(土官)은, 동반(東班)이 도검사 도위(都檢司都尉)가 1인【정6품. 】, 주례사사(注禮司使)가 1인【종5품. 】, 도검사 부위(都檢司副尉)가 1인【정6품. 】, 장학서(掌學署)·전창서(典倉署)의 승(丞)이 각각 1인【종6품. 】, 도검사 전록(都檢司典錄)이 1인【정7품. 】, 지후서(支候署)·영조국(營造局)·대빈서(待賓署)의 주부(注簿)가 각각 1인【종7품. 】, 지후서 직장(支候署直長)이 1인【정8품. 】, 장식서(掌食署)·대빈서(待賓署)의 직장(直長)이 각각 1인, 장금서(掌禁署)·장의국(掌醫局)의 승(丞)이 각각 1인,【모두 종8품이다. 】지후서 녹사(支候署錄事)가 1인【정9품. 】, 영조국(營造局)·장식서(掌食署)·대빈서(待賓署)·장온서(掌醞署)의 녹사가 각각 1인, 장금서 부승(掌禁署副丞)이 1인이요,【모두 종9품이다. 】서반(西班)이 회원위(懷遠衛) 일령(一領) 사직(司直)이 2인,【정5품·종5품 각각 1인이다. 】부사직(副司直)이 5인,【정6품 2인, 종6품 3인이다. 】사정(司正)이 5인,【정7품 2인, 종7품 3인이다. 】부사정(副司正) 6인,【정8품 2인, 종8품 4인이다. 】사용(司勇)이 8인,【정9품·종9품이 각각 4인이다. 】대장(隊長)이 5인【종9품. 】, 대부(隊副)가 7인【종3품. 】, 이령(二領) 사직(司直)이 3인【종5품. 】, 부사직(副司直)이 3인,【종6품. 】, 사정(司正)이 5인【종7품. 】, 부사정(副司正)이 5인【종8품. 】사용(司勇)이 7인,【정9품 3인, 종9품 4인이다. 】대장(隊長)이 5인【종9품. 】, 대부(隊副)가 8인【종9품. 】이다.【본부의 토관(土官) 중 동반 6품 1, 7품 1, 8품 2, 9품 2와 서반 사직(司直) 2, 부사직 2, 사정(司正) 3, 부사정 3, 사용(司勇) 5, 대장(隊長) 3, 대부(隊副) 5의 체아(遞兒) 무릇 29를 종성부(鍾城府) 서반에 나누어 주는데, 그대로 회원위(懷遠衛)라고 일컫는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회령도호부(會寧都護府)
동쪽은 바다까지 1백 49리, 남쪽은 부령부(富寧府)의 경계까지 68리, 서쪽은 두만강까지 6리, 북쪽은 종성부(鍾城府) 경계까지 30리, 서울과의 거리는 1천 9백 21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의 영토였다. 오랑캐의 말로 알목하(斡木河)라 한다 오음회(吾音會)라고도 한다. 우리 왕조 태종(太宗) 때에 알타리의 동맹가 첨목아(童孟哥帖木兒)가 빈 틈을 타서 들어와 거주하였다. 세종(世宗) 15년에 올적합(兀狄哈)이 맹가(孟哥)의 부자를 죽이니 알목하(斡木河)에는 추장이 없어졌다. 16년에 마침내 석막(石幕)에 있는 영북진(寧北鎭)을 백안수소(伯顔愁所)에 옮기고, 바로 알목하의 서북 지역이 적(賊)의 요충 지대에 해당하며 또한 알타리(斡朶里)의 남아 있는 종족들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특별히 성보(城堡)를 설치하여 영북진 절제사(寧北鎭節制使)가 이곳을 겸하여 관할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은 진(鎭)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서 정보와 응원이 잘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해 여름에 따로 알목하(斡木河)에다 진(鎭)을 설치하고, 풍산(豐山)ㆍ원산(圓山)ㆍ세곡(細谷)ㆍ유동(宥洞)ㆍ고랑기(高郞岐)ㆍ아산(阿山)ㆍ고부거(古富居)ㆍ부회환(釜回還) 등의 지역까지를 경계로 삼고 회령진(會寧鎭)이라 하고, 첨절제사(僉節制使)) 두었다가 겨울에 승격하여 도호부사(都護府使)를 만들고 판관(判官)과 토관(土官)을 두었다. 23년에 종성(鍾城)의 오롱초(吾弄草)의 서쪽 지역을 떼어다가 여기에 소속시켰다.
【풍속】 바람이 매우 차가우며 검소와 용맹을 숭상한다 모두 《지지(地志)》에 있다. 여행하는 사람은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부적(府籍)》에 있다. ○ 5개소의 진(鎭)의 풍속이 모두 이와 같다.
[산천]오산(鰲山) 부의 서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두만강(豆滿江)가에 있다. 원산(圓山)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염통산(念通山)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상문령(上門嶺)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하문령(下門嶺) 부의 서쪽 6리에 있다. 죽포령(竹苞嶺)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갈파령[加乙坡嶺] 부의 동쪽 85리에 있다. 고개 위에 갈랫길 셋이 있다. 쌍개암(雙介巖) 부의 남쪽 1백 43리에 있다. 높이가 10여 장(丈)이다. 중간에 구멍 둘이 있어서 물이 언제나 솟아난다. 오랑캐는 구멍을 쌍개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동쪽 1리쯤 되는 곳에 또 바위가 바닷가에서 마주보고 있는데 양쪽 벼랑이 천 척이나 되며, 위에 깊은 못이 있는데 가물 때에 비오게 해달라고 빌면 효험이 있다. 우라한현(于羅漢峴) 부의 서남쪽 45리에 있다, 백두산의 남쪽 지맥이다. 전괘현(錢掛峴) 부의 동남쪽 79리인 부령부(富寧府)와의 경계에 있다. 바다 부의 동쪽 1백 49리에 있다. 팔을하천(八乙下川) 부의 북쪽 1리에 있다. 근원이 원산(圓山)에서 나와 부의 북쪽인 오산(鰲山) 밑을 경유하여 두만강(豆滿江)의 삼기(三岐)로 들어간다. 풍산천(豐山川)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전괘현(錢掛峴)의 여러 골짜기에서 나와 풍산보(豐山堡)를 경유하고, 부의 성 서쪽을 경유하여 알목하(斡木河)가 되어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두만강(豆滿江) 부의 북쪽에 있다. 진주지(眞珠池) 부의 동쪽 1백 48리인 고랑기이(高郞岐伊)에 있다. 진주가 산출된다. 백두산(白頭山)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다. 부의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거리에 있다. 산이 모두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2백 리요, 가로는 천 리에 뻗쳐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鴨綠江),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松花江)과 혼동강(混同江), 동북으로 흐르는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豆滿江)이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 라고 했는데, 아마 속평강(速平江)을 가리킨 듯하다. 다음은 모두 두만강 밖에 사는 야인(野人)의 지역이다. 고라이(古羅耳)ㆍ사오이동(沙吾耳洞)ㆍ상가하(常家下)ㆍ아적랑이(阿赤郞耳)ㆍ하다가사(下多家舍)ㆍ벌인(伐引)ㆍ무을계(無乙界)ㆍ상동량(上東良)ㆍ중동량(中東良)ㆍ하동량(下東良)ㆍ어후강(魚厚江)ㆍ후훈(厚訓)ㆍ박가천(朴加遷)ㆍ검천(檢天). 『신증』 역산천(櫟山川) 부의 남쪽 1백 40리에 있다. 근원이 가을파동(加乙坡洞)에서 나와 역산(櫟山)을 경유하여 보제원천(菩提院川)이 되어서 동남쪽에서 합류하여 바다에 들어간다.
[토산]철(鐵) 부의 동쪽 60리인 활동(闊洞)에서 산출된다. 삼[麻]ㆍ인삼ㆍ오미자ㆍ대구[大口魚]ㆍ문어(文魚)ㆍ송어(松魚)ㆍ연어(鰱魚)ㆍ홍합(紅蛤)ㆍ조개[蛤]ㆍ미역[藿]ㆍ곤포(昆布)ㆍ다시마[塔士麻]ㆍ소금ㆍ방어(魴魚)ㆍ삼치[麻魚]ㆍ청어(靑魚)ㆍ해삼(海蔘)ㆍ담비[貂]ㆍ청서(靑鼠).
[고적]공험진(公嶮鎭) 고령진(高嶺鎭)에서 두만강을 건너 고라이(古羅耳)를 넘고, 오동참(五童站)ㆍ영소참(英所站)을 경유하여 소하강(蘇下江)에 이르는데, 강가에 공험진(公嶮鎭)의 옛터가 있다. 남쪽은 구주(具州)ㆍ탐주(探州), 북쪽은 견주(堅州)와 연접되어 있다. ○ 《고려사 지리지(高麗史地理志)》에 보면, “공험진(公嶮鎭)은 예종(睿宗) 3년에 성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고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6년에 산성을 쌓았다.” 하였고, 주(注)에 공주(孔州)라고도 하며, 광주(匡州)라고도 한다. 선춘령(先春嶺)의 동남쪽, 백두산(白頭山)의 동북쪽에 있다 하였고, 또 소하강(蘇下江)가에 있다고도 하였다. 지금 경원(慶源)을 공주(孔州)로 본다면 아마도 선춘령의 동남쪽, 백두산의 동북쪽이며, 소하강 가에 있다는 말이 옳을 듯하다. 그러나 조사할 수가 없다. 또 《지리지(地理志)》에는, “통태(通泰)ㆍ평융(平戎)ㆍ종녕(宗寧)ㆍ진양(鎭陽) 등의 진(鎭)에 모두 예종(睿宗) 3년에 성을 쌓았다가 4년에 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했으나 그 지점이 어디 있는지 이제 조사할 수가 없다. 선춘령(先春嶺) 두만강 북쪽 7백 리에 있다. 윤관(尹瓘)이 토지를 확장하여 여기까지 와서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고 드디어 비석을 영(嶺) 위에 세우고, ‘고려의 국경’이라고 새겼다. 비석의 사면에 모두 글씨가 있었는데 모두 오랑캐들이 지워버렸다. 운두성(雲頭城) 부의 서쪽 50리에 있다. 돌로 쌓은 성이 둘레 1만 7천 40척이다. 안에 개천 하나와 우물 한 군데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원산보(圓山堡) 부의 서쪽 3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2만여 척이며 안에 개천 둘과 못 셋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영북보(寧北堡)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옹희보(雍熙堡) 부의 북쪽 31리에 있다. 이풍보(利豐堡) 부의 남쪽에 있다. 『신증』 산성(山城) 부의 동쪽 30리에 있고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9백 80척이다. 안에 못 2개소가 있다. 비를 오게 해달라고 빌면 효험이 있으며 일반이 용연(龍淵)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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