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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鏡道]4.침주부(郴州府)는 영흥(永興)

한부울 2011. 3. 16. 18:16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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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鏡道]

4.침주부(郴州府)는 영흥(永興)이고,

湖南省(領九府。七州。六十四縣)。

郴州(名敦州領五縣)永興(高亭)宜章(義章)興寧(漢寧)桂陽(汝城)桂東(嚴溪)-地輿名目(一十九省)

 

 

 


郴州府,中国古代行政区划名。明洪武元年(1368年)改郴州路置,治郴阳县(今湖南郴州市)。属湖广省。辖境相当今湖南省郴州市永兴、宜章等县以东、以南地区。九年降为郴州直隶州。

历史沿革

秦(公元前221~207年)置郴县、临武邑、鄙邑、耒县。

西汉元鼎四年(前113),桂阳郡辖郴、临武、南平、便、耒阳、桂阳、阳山、阴山、曲江、含氵匡、浈阳等11县。新始建国元年(9),王莽称帝,改桂阳郡为南平郡,改郴县为宣风、临武为大武、便县为便屏、曲江为除虏、浈阳为基武,并移郡治于耒阳(改名南平亭)。东汉建武中(一说十一年,即公元35年)还郡治于郴县,恢复郡县原名。永和元年(136),分郴县地置汉宁县,省阴山县。

三国吴建兴元年(252),改汉宁为阳安县。甘露元年(265),分南境曲江、桂阳、阳山、含氵匡、浈阳县置始兴郡,度属交州,桂阳郡则余6县。(见《郴州地区建置沿革表》)

晋太康元年(280),阳安县更名晋宁。建兴三年(315),陶侃分郴县地立平阳郡领平阳县,始一分为二郡。升平二年(359),析晋宁县地置汝城县。

南朝梁天监六年(507),初置郴县,不久撤销;耒阳县度属湘东。陈天嘉元年(560),以桂阳郡之汝城县置卢阳郡领卢阳县,则一地三郡。

隋开皇九年(589),三郡合为郴州,平阳县、便县均省入郴县。大业三年(607),南平省入临武县,晋宁县更名晋兴。大业十三年(617),析郴县南为义章县,分郴县西复置平阳县。

唐武德四年(621),复置南平县。贞观元年(627),卢阳县更名义昌。咸享三年(672),晋兴县更名资兴。如意、长寿元年(692),分义章南置高平县。开元十三年(725),分郴北置安陵县,此时桂阳郡领9县。开元二十三年(735),改桂阳郡为郴州,高平县省入义章,徙义章县治于高平旧址。天宝元年(742),始称郴州桂阳郡,安陵县改名高亭,八月,南平县改名蓝山。乾元元年(758),郴州移治于平阳县。贞元二十年(804),置桂阳监于平阳,专理采铜铸钱。元和十五年(820),郴州还治于郴县。

后唐同光三年(925),义昌县更名郴义。后晋天福元年(936),改郴州为敦州,郴县为敦化,资兴为资兴寨、属敦化县,省平阳县入桂阳监。天福四年(939),省临武县入桂阳监。后汉乾礻右 三年(950),郴州、郴县复名,资兴县恢复县制,改名泰县。

宋乾德元年(963),设郴州军。太平兴国元年(976),泰县并入郴县,郴义县改名桂阳,义章县改名宜章。景德二年(1005),蓝山县划入桂阳监。天禧三年(1019),复置平阳县属桂阳监。熙宁六年(1073),高亭县改名永兴。绍兴三年(1133),桂阳监升为桂阳军。绍兴十年(1140),复置临武县属桂阳军。嘉定二年(1209),析郴县之资兴、程水二乡置资兴县,属郴州军。嘉定四年(1211),析桂阳县之零陵、宜城二乡置桂东县,郴州军辖6县。绍定二年(1229)资兴县改名兴宁,徙县治于管子濠。

元至元十三年(1276),改军为路,郴县改名郴阳。

明洪武元年(1368),改路为府,蓝山县复归郴州府,府辖7县;桂阳府辖常宁、耒阳2州及平阳、临武2县。次年,蓝山复归桂阳府;常宁、耒阳均复为县,度属衡州府。洪武九年(1376),撤销桂阳府,平阳、临武、蓝山3县归衡州府辖;郴州撤府设直隶州,郴阳县并入郴州,辖5县。洪武十三年(1380),升平阳县为桂阳州,仍辖2县,隶于衡州府。崇祯十二年(1639),析桂阳州西南之禾仓堡置嘉禾县,并析临武县上乡八里属该县。

清康熙十七年(1678),吴三桂称帝于衡州,改桂阳为义昌县、桂阳州为南平州。次年均复原名。雍正十年(1732),桂阳州改属州为直隶州,与郴州直隶州并列。

中华民国元年(1912),废府、州,存道、县。次年2月,桂阳县复名汝城。9月,郴州直隶州改为郴县,桂阳直隶州改为桂阳县。民国3年1月,因兴宁县与广东兴宁县重名,故复名资兴县。11年,撤销道制,存省、县两级。26年12月,设置湖南省第八行政督察区。29年,改第八区为第三区,辖郴、资兴、桂东、汝城、宜章、临武、蓝山、嘉禾、桂阳、永兴10县,


永興历史沿革

宋熙宁六年(1073年)以“永世兴旺”之意定名永兴县,沿袭至今。   

汉高祖五年(公元前202),始置便县。治设便江右岸,今县城东南隅。治所东依梧桐山,南邻先农坛(今自来水公司门前侧),西傍便江,北近化龙桥,治无城墙。南北朝宋永初元年(420),撤便县并入郴县,置治历期622年。   

陈永定三年(559),复置便县,治设旧址。隋开皇九年(589),便县再度并入郴县。第二次置治历期30年。   

唐开元十三年(725),析郴县北四乡置安陵县,县治设今高亭乡政府东侧的古城村,筑城墙高1.5丈,周长1华里。唐天宝元年(742),更名高亭县,县治移至今高亭乡政府西侧,历期348年。   

宋熙宁六年(1073),定名永兴县。治所迁回旧便县原址北侧,沿袭至今。治所东靠梧桐山,南邻化龙桥,西傍便江,北抵太平寺(今永兴一中厨房附近)。始无城墙,明天顺元年(1457)初筑土垣。正德七至十二年(1512~1517)改筑砖石结构城墙,设有5道城门及城楼,后屡遭兵燹、水患,经多次修复。   

明代,全县分为金陵、长庆、永兴、延道4乡,下辖12里统20都。金陵乡辖金陵、平乐、平陵3里,统一、二、三、六共4都;长庆乡辖崇贤、崇义、高亭3里,统九、十、十二、十四共4都;永兴乡辖千箱、开道、招携3里,统十三、上十五、下十五、十六、十七共5都;延道乡辖逢阳、液武、潦水3里,统左坊、右坊、上十八、下十八、下十九、二十共7都。弘治年间,全县裁并为16里(即都),里设保甲。   

民国元年(1912),永兴属湖南省衡永郴桂道。

民国3年(1914),改属衡阳道。  

民国11年(1922),道制废除,为省直辖县。

民国17年(1928)春,县治原貌全废。   

民国26年(1937),省设行政督察区,属第八行政督察区。   

民国29年(1940),改属第三行政督察区。

民国33年(1944)12月,日机轰炸县城,县政府先后迁往鲤鱼塘和太和寺边。

民国34年(1945)8月抗战胜利,县政府迁回县城。   

1949年永兴解放。县城在原址基础上重修新建,城区不断向四周扩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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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영흥 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영흥도 중익 병마(永興道中翼兵馬)를 겸하고, 판관(判官)이 1인이니, 영흥도 중익 병마 단련 판관(兵馬團練判官)을 겸한다.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서 장령진(長嶺鎭)이라 일컬었는데, 혹은 당문(唐文)이라【옛 문적에는 당(唐)이 당(堂)으로 되었다. 】일컫기도 하고,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초에 화주(和州)로 되었고, 광종(光宗) 6년 을묘【주(周)나라 세종(世宗) 현덕(顯德) 2년.】에 비로소 성보(城堡)를 쌓았으며,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화주(和州)·안변 도호부(安邊都護府)로 고치었다가, 현종(顯宗) 9년 무오에 화주 방어사(和州防禦使)로 강등하여 본영(本營)을 삼았다. 고종(高宗) 때 등주(登州)에 합쳐 그대로 화주 방어사(和州防禦使)라 일컬었는데, 뒤에 원나라에 속(屬)하게 되어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에 군사를 보내어 수복하고 화주목(和州牧)을 삼았고, 18년 기유에 화령부(和寧府)로 승격시켜 부윤(府尹)·소윤(少尹)·판관(判官)을 두었으며, 이듬해 경술(庚戌)에 토관(土官) 각 아문(衙門)을 두고 모두 인신(印信)을 주었다. 본조 태조(太祖) 2년 계유【명나라 홍무(洪武) 26년.】에 외가(外家)인 최씨(崔氏)네가 부(府)의 영흥진(永興鎭)에 우거(寓居)하였다 하여 영흥부(永興府)로 고쳤으며, 태종(太宗) 3년 계미【홍무 36년.】에 부인(府人)들이 조사의(趙思義)를 따라 난리를 일으켰으므로, 군(郡)으로 강등시켰다가, 이듬해 갑신에 다시 영흥부로 하였으며 16년 병신에 함주목(咸州牧)을 승격시켜 함흥부(咸興府)로 삼았다가, 곧 화주목(和州牧)으로 강등하여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을 두고, 토관(土官)을 파하였다. 금상(今上) 8년 병오【선덕(宣德) 원년. 】2월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사(社)가 5이니, 평천사(平川社)는 본래 영흥진(永興鎭)이었는데,【예전에는 관방수(關防戍)라고 칭하였다. 】고려 문종(文宗) 15년 신축【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6년.】에 비로소 성보(城堡)를 쌓았고, 본조 태조(太祖) 2년 계유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정변사(靜邊社)는 본래 정변진(靜邊鎭)이었는데, 현종(顯宗) 22년 신미【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9년.】에 비로소 진(鎭)을 두었고, 정종(靖宗) 5년 기묘【보원(寶元) 2년.】에 성(城)을 쌓았다. 영인사(寧仁社)는 본래 영인진(寧仁鎭)이었는데, 태조(太祖) 6년 정축【명나라 홍무(洪武) 30년.】에 모두 폐하여 사(社)로 삼았다. 장평사(長平社)는 본래 장평진(長平鎭)이었는데,【예전에는 고질달(古叱達)이라 하였다. 】광종(光宗) 20년 기사【송나라 태조 개보(開寶) 2년.】에 비로소 진성(鎭城)을 쌓았고, 공민왕(恭愍王) 6년 정유【원나라 지정(至正) 17년.】에 현(縣)으로 고쳐서 영(令)을 두었다. 요덕사(耀德社)는 본래 요덕진(耀德鎭)이었는데,【일명 현덕진(顯德鎭)이다. 】현종(顯宗) 14년 계해【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원년.】에 성(城)을 쌓았고, 공민왕 6년 정유(丁酉)에 현(縣)으로 고쳤다가, 20년 신해【명나라 홍무(洪武) 4년.】에 모두 폐하여 사(社)로 하였다.

성력산(聖歷山)【부의 서쪽에 있는데, 부의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고 있다. 】국태산(國泰山)【부의 서쪽에 있다. 꼭대기에 돌우물[石井]이 있는데, 구멍이 좁으나, 샘이 깊다.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 】오령(烏嶺)【부의 서쪽에 있는데, 위에 호종탑(胡宗塔)이 있다. 】병풍산(屛風山)【부의 서쪽에 있다. 그 위는 펑퍼짐하고 넓어서, 사람이 살 수 있으며, 가운데에 못이 있는데, 사람이 살면 항상 비의 재앙이 있다. 】대천은 비류수(沸流水)와【부의 서쪽 정변사(靜邊社)에 있다. 그 근원인 물구멍[水穴]은 지름이 5척 3촌이고, 깊이는 으늑하여 헤아릴 수 없는데, 〈물이〉 치솟아 나와 흘러서 내가 된다. 봄·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서 제사를 지내는데, 소사(小祀)이다. 】용흥강(龍興江)이다.【부의 동쪽에 있는데, 옛 이름은 횡강(橫江)이다.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일찍이 봉명 사신(奉命使臣)이 되어 이곳에 이르니, 도순문사(都巡問使) 강회백(姜淮伯)이 강의 중류(中流)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청하기를, “본부는 도조(度祖)·환조(桓祖)가 살던 땅이고, 태조(太祖)가 탄생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 강은 아직도 이름이 없으니, 하나의 허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하윤이 이에 용흥(龍興)으로 명명(命名)하였다. 그 근원이 4가 있으니, 하나는 비류수에서 나오고, 하나는 평안도 희천(熙川) 지경 마여 대령(馬餘大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맹산(孟山) 지경 애전 대령(艾田大嶺)에서 나와 송어탄(松魚灘)에 이르러서 합치며, 하나는 양덕(陽德) 지경에서 나와 차대령(次大嶺)을 지나 고암(庫岩)에 이르러 송어탄(松魚灘)과 합하는데, 이름을 횡천(橫川)이라 한다. 주(州)와 85리 떨어져서 용신당(龍神堂)을 지나 진정사(鎭靜寺)의 서쪽 절벽(絶壁) 아래에 이르는데, 이름을 창경연(鶬鶊淵)이라 한다. 그 아래에 넓은 여울이 있고, 여울 가운데에 백마석(白馬石)이 있는데, 모양이 백마(白馬)처럼 생겼으며, 돌의 잠기고 드러나는 것으로써 물의 얕고 깊음을 안다. 읍성(邑城)의 북쪽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44리, 서쪽으로 평안도 맹산현(孟山縣) 장평 대령(長平大嶺)에 이르기 1백 45리, 남쪽으로 고원군(高原郡) 사박지천(沙朴只川)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장곡현(長谷縣) 고성 관문(古城關門)에 이르기 17리이다.

준원전(濬源殿)【부의 동남쪽 흑석산(黑石山)에 있으니, 곧 우리 환조(桓祖)의 옛 집으로서, 태조(太祖)가 탄생한 곳이다. 태조의 쉬용(晬容)을 모셨다. 】

호수가 2천 1백 91호요, 인구가 8천 5백 24명이다. 군정은 익속군(翼屬軍)이 6백 40명, 선군(船軍)이 1백 21명, 수성군(守城軍)이 64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22이니, 최(崔)·장(張)·김(金)·석(石)·이(李)·박(朴)·길(吉)·송(宋)·한(韓)·민(閔)·유(劉)·정(鄭)·노(盧)·방(邦)·호(扈)·고(固)·안(安)·척(拓)·우(禹)·손(孫)·심(沈)·위(魏)요, 내성(來姓)이 2이니, 고(高)·용(龍)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주(周)이다. 영흥진(永興鎭)의 망입성(亡入姓)이 17이니, 최(崔)【다인(多仁)·이안(利安)·직산(稷山)·영통(永通). 】·김(金)·최(崔)【춘주(春州). 】·박(朴)【영통(永通). 】·김(金)·한(韓)【진위(振威). 】·조(曺)【사천(沙川). 】·전(全)【진주(晉州)·동주(東州). 】·손(孫)【안협(安峽). 】·강(康)【율곶(栗串). 】·안(安)【용강(龍岡). 】·고(高)【금주(衿州). 】·노(盧)【금성(金城). 】·서(徐)【음죽(陰竹). 】·허(許)【평강(平康). 】·유(劉)【배주(白州). 】·김(金)【해주(海州). 】이요,【위의 17성은 지금 모두 없다. 】속성(續姓)은 2이니, 유(劉)·최(崔)이다. 정변진(靜邊鎭)의 토성(土姓)이 6이니, 윤(尹)·김(金)·고(高)·연(延)·박(朴)·문(文)이요, 내성(來姓)이 3이니, 백(白)·오(吳)·석(石)이요, 촌락 망성(村落亡姓)이 9이니, 이(李)·노(盧)·조(趙)·한(韓)·위(魏)·원(元)·임(任)·유(柳)·심(沈)이다. 영인진(寧仁鎭)의 망입성(亡入姓)이 13이니, 김(金)【울주(蔚州). 】·안(安)【흥주(興州). 】·전(全)【평강(平康). 】·임(林)【통구(通口). 】·신(申)【구고(九皐). 】·한(韓)【곡주(谷州). 】·방(芳)【위산(衛山). 】·오(吳)【흡곡(歙谷). 】·정(鄭)【애수(隘守). 】·채(蔡)【진명(鎭溟). 】·우(禹)【요덕(耀德). 】·정(鄭)·김(金)【고주(高州). 】이다. 장평진(長平鎭)의 망입성(亡入姓)이 16이니, 손(孫)【이천(伊川). 】·공(公)【하음(河陰). 】·한(韓)【곡주(谷州). 】·황(黃)【평택(平澤). 】·이(李)·광(光)【해주(海州). 】·이(李)·유(劉)【영주(永州). 】·상(桑)【평해(平海). 】·정(鄭)【청주(淸州). 】·김(金)【통구(通口)·홍천(洪川)·울주(蔚州). 】·박(朴)【지례(知禮). 】·유(柳)【남원(南原)·곤명(昆明). 】·오(吳)【수안(遂安). 】·송(宋)【평강(平康). 】·윤(尹)【수덕(守德). 】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손(孫)이다. 요덕진(耀德鎭)의 망입성(亡入姓)이 16이니, 김(金)·노(盧)·양(梁)·백(白)【배주(白州). 】·우(禹)·안(安)·노(盧)【곡주(谷州). 】·윤(尹)【협계(俠溪). 】·우(禹)【양암(陽嵓). 】·박(朴)·한(韓)【평강(平康). 】·최(崔)【해주. 】·김(金)·유(柳)【염주(鹽州). 】·용(龍)【덕수(德水). 】·한(韓)【이천(伊川). 】이다. 인물은 증 판문하부사(贈判門下府事) 영흥백(永興伯) 정효공(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이다.【이분이 의혜 왕후(懿惠王后)를 낳아 환조(桓祖)의 배필이 되게 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탄생하게 하였다. 묘(墓)가 부의 동남쪽 도존산(道存山)에 있다. 】

간전(墾田)이 1만 5백 29결이요,【논이 겨우 5백 70결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麻]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삵가죽·여우가죽·잇[紅花]·지초요, 약재는 사향(麝香)·모란뿌리껍질·오미자·오배자(五倍子)·장군풀[大黃]·당귀(當歸)·대왕풀[白芨]·방풍(防風)·인삼이요, 토산(土産)은 금(金)【부의 북쪽 25리 되는 문해령(文解嶺)의 동쪽 5리쯤의 대동(大洞)에서 난다. 】·족제비털[黃毛]·대구·연어·고등어이다. 염분(鹽盆)이 22이다.

읍 석성(邑石城)이 부의 서쪽 성력산(聖歷山)에 있고,【둘레가 9백 87보(步)이며, 안에 군창(軍倉)이 있고, 우물이 1, 못이 1이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아니한다. 】산성(山城)이 부의 서북쪽 정변사(靜邊社)에 있고,【둘레가 1천 8백 보(步)인데, 서북쪽은 돌로 쌓고, 동남쪽은 천연의 벼랑으로 되어 있다. 안에 군창(軍倉)이 있고, 우물이 1, 못이 1이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아니한다. 속칭 명산성(冥山城)이라고 한다. 】옛 석성(石城) 터가 부의 서쪽에 있다. 온천(溫泉)이 1이요,【부의 동쪽 2리되는 독지사(禿旨社)에 있다. 】역(驛)이 1이니, 화원(和原)이요,【예전에 청산(靑山)·통화(通和)의 2역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이곳에 합쳤다. 】

목장(牧場)이 1이니, 말응도(末應島)이다.【부의 동쪽 90리에 있는데, 국마(國馬) 1백 2필을 방목(放牧)한다. 】요해(要害)는 마여령(馬餘嶺)【부의 서쪽에 있다. 】·장성 관문(長城關門)이다.【부의 북쪽에 있다. 】봉화가 2곳이니, 옛 영인(寧仁)【북쪽으로 예원(預原) 원정현(元定峴)에 응하고, 남쪽으로 진수(鎭戍)에 응한다. 】·진수(鎭戍)이다.【서남쪽으로 고원(高原) 웅망산(熊望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용진(龍津) 유점(楡岾)에 응한다. 】해도가 3이니, 대도도(大都島)【부의 동쪽에 있는데, 옛날 피란처(避亂處)였으므로 토성(土城)을 쌓았던 터가 있다. 육지와의 거리가 6리이다. 】·모도(茅島)【부의 동쪽 대도도(大都島) 남쪽 10리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3리이다. 】웅도(熊島)【부의 동쪽, 대도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5리이며, 봄·가을에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이다.【위의 3섬[島]에는 각각 농호(農戶) 1, 2호씩이 있다. 】

관할[所領]은 군(郡)이 3이니, 고원(高原)·문천(文川)·예원(預原)이다.

【영인본】 5책 694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함길도 / 영흥 대도호부 / 고원군

○ 지리지 / 함길도 / 영흥 대도호부 / 문천군

○ 지리지 / 함길도 / 영흥 대도호부 / 예원군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

동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50리, 남쪽으로는 고원군(高原郡) 경계까지 14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맹산현(孟山縣) 경계까지 2백 25리, 평안도 영원군(寧遠郡) 경계까지 2백 10리, 북쪽으로는 정평부(定平府) 경계까지 2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2리이다.

[건치연혁]본래는 고구려의 장령진(長嶺鎭)으로, 혹은 당문(唐文) 당(唐) 자는 당(堂) 자로도 썼다. 이라 일컫기도 했고, 혹은 박평군(博平郡)이라 일컫기도 하였는데, 고려 초기에 화주(和州)로 되었고, 광종 6년에 비로소 성보(城堡)를 쌓았으며, 성종 14년에 화주안변도호부(和州安邊都護府)로 고쳤다. 현종 9년에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로 강등하여 본영(本營)으로 삼았는데, 고종 때에 조휘(趙暉)ㆍ탁청(卓靑)이 병마사(兵馬使)를 살해하고 온 고을과 더불어 반역하여 원 나라에 귀부(歸附)하니, 원 나라에서 이에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등주(登州)와 병합하였으나, 그대로 방어사(防禦使)라 일컫다가, 뒤에 통주(通州)와 병합하였다. 충렬왕 때에 예전대로 복구하였는데, 공민왕 5년에 군병을 보내어 이를 수복(收復)하고 화주목(和州牧)으로 하였고, 18년에 화령부(和寧府)로 승격시켜 부윤(府尹)ㆍ소윤(少尹)ㆍ판관(判官)을 두었으며, 이듬해에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본조 태조 2년에 영흥진(永興鎭)이 외할아버지 최씨(崔氏)의 관향이라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府)로 만들었고, 태종 3년에 본부 사람들이 조사의(趙思義)를 따라서 반란을 계획하였다 하여 군(郡)으로 강등시켰다가, 이듬해에 전대로 회복시켰으며, 16년에 다시 화주목으로 강등하여 목사(牧使)와 판관을 두고 토관을 혁파하였다. 세종 8년에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로 고쳤고, 세조 때에 진(鎭)을 설치하였으며, 성종 원년에 관찰사의 본영을 이곳으로 옮기고 부로 승격하였는데, 전하(중종) 4년에 다시 관찰사의 본영을 함흥부로 옮기고 대도호부로 강등시켰다.

[산천]성력산(聖歷山) 본부 서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검산(劒山) 본부 서북쪽 90리에 있으며, 그 위에 못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 한다. 국태산(國泰山) 본부 서쪽 15리에 있다. 산 위에 석정(石井)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 한다. 병풍산(屛風山) 본부 서쪽 60리에 있다. 그 위가 펀펀하고 넓어서 사람이 살만하며, 그 가운데에 못이 있는데 혹 사람이 들어와 살기만 하면 항상 비가 내리는 재앙이 있다 한다. 태박산(太博山) 본부 서쪽 35리에 있는데, 웅장하게 10여 리가 구불구불 꺽여 있다. 애전현(艾田峴) 본부 서쪽 1백 80리 지점이 되는 평안도 맹산현(孟山縣) 경계에 있는데, 옛날에는 맹주현(孟州峴)이라 했다. 오령(烏嶺) 본부 서쪽 30리에 있다. 위에 석탑(石塔)이 있는데, 속칭 호종탑(胡宗塔)이라 한다. 광성령(光城嶺) 본부 동쪽 30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험하다. 장평령(長平嶺) 본부 서쪽 2백 25리 지점이 되는 평안도 맹산현 경계에 있다. 진술산(鎭戌山) 본부 동쪽 45리에 있는데, 돌 성의 옛터가 있다. 죽전령(竹田嶺) 본부 서쪽 1백 80리에 있다. 마유령(馬踰嶺) 본부 서북쪽 2백 10리 지점이 되는 평안도 희천군(熙川郡) 경계에 있는데, 군사상의 요해지(要害地)이다. 농암동(籠岩洞) 본부 동쪽 15리에 있다. 산창동(山倉洞) 본부 서쪽 70리 지점에 있다. 바다 본부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비류수(沸流水) 정변사(靜邊社)에 있다. 본부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그 근원의 물구멍의 원경(圓徑)이 5척 3촌이나 되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데, 물이 솟아나와 냇물이 되어 용흥강(龍興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용흥강 본부 동북쪽 2리에 있으니, 옛 이름은 횡강(橫江)이다. 그 근원이 넷이 있는데, 하나는 비류수이고, 하나는 마유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애전현에서 나오며, 하나는 양덕현(陽德縣) 경계의 거차령(居次嶺)에서 나오는데, 고암(庫岩)에 이르러 송어탄(松魚灘)과 합류해서는 횡천(橫川)이라 하고, 용신당(龍神堂)을 지나 진정사(鎭靜寺) 서쪽 절벽 아래에 이르러서는 창경연(鶬鶊淵)이라 부르는데, 아래에 넓은 여울이 있고, 그 가운데에는 흰 돌이 있어 형상이 흰 말과 같으며, 그 돌이 잠기고 드러나는 것으로써 물의 깊이를 안다고 한다. 읍성(邑城)의 동북쪽을 지나서 이 강이 되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하륜(河崙)이 사명을 받들고 이곳에 이르니, 도순문사(都巡問使) 강회백(姜淮伯)이 강 중류에 술자리를 벌여 놓고 청하여 말하기를, “본부는 곧 도조(度祖)ㆍ환조(桓祖)가 거주하던 땅이며, 태조가 이곳에서 태어나셨는데도 아직 그 명칭이 없으니, 또한 하나의 유감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하륜이 비로소 용흥(龍興)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웅도(熊島) 본부 동남쪽 95리에 있는데, 그 둘레가 15리이다. 저도(猪島) 본부 동쪽으로 70리 떨어진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저도(大猪島) 본부 동쪽 60리에 있다. 모도(茅島) 본부 동쪽 1백 60리에 있다. 말응도(末應島) 흑도(黑島)라고도 한다. 본부 동쪽 90리 지점에 육지와 연해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담천(潭泉) 본부 동쪽 15리에 있다. 물이 약간 미지근하고 짠데, 이 물에 목욕하고서 병이 나은 자가 많았다 한다.

[토산]사(絲)ㆍ삼, 죽전(竹箭) 우리 세조 때에 강원도에서 배로 대나무 뿌리를 싣고 와서 저도에 심었다. 철 산창동(山倉洞)에서 난다. 납 본부 동쪽 독지사(禿旨社)에서 난다. 오미자ㆍ지치ㆍ안식향ㆍ인삼ㆍ송이ㆍ복령ㆍ꿀ㆍ여항어ㆍ숭어ㆍ삼치ㆍ연어ㆍ게ㆍ은어ㆍ송어ㆍ홍합ㆍ넙치ㆍ황어ㆍ홍어ㆍ빙어ㆍ청어ㆍ전복ㆍ방어ㆍ굴ㆍ조개ㆍ도루묵ㆍ고등어ㆍ해삼ㆍ미역ㆍ소금

[불우]안불사(安佛寺) 광성령(光城嶺) 동쪽에 있다. 원명사(圓明寺) 검산(劍山)에 있다. 진정사(鎭靜寺) 태박산(太博山)에 있다. 보현사(普賢寺) 국태산(國泰山)에 있다.

[고적]평주진(平州鎭) 본부 서북쪽 70리에 있다. 본래는 영흥진(永興鎭)으로, 고려 문종 15년에 비로소 성보(城堡)를 쌓았는데, 본조 태조 2년에 본부를 영흥부로 고치고, 인하여 그 진(鎭)의 이름을 평주라 고친 것이다. 그 성의 기초가 아직도 남아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변방의 성이 푸른 산기슭을 의지해 있는데, 가을이 깊으니 그 기운 유달리 맑구나. 이슬 맺힌 뜰에는 노란 국화가 울고, 바람 부는 난간에는 붉게 물든 나뭇잎들이 우는구나. 한 구비 시냇물이 마음을 한결 맑게 해주고, 천겹 산봉우리에 눈이 더욱 밝아오네. 다만 흘러가는 세월이 너무나 빨라서, 얼굴이 쉬이 변하는 것이 한스럽구나.” 하였다. 정변진(靜邊鎭) 본부 동쪽 60리에 있는데, 돌성의 옛터가 있다. 고려 현종 22년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고, 정종 5년에 성을 쌓았다. ○ 김극기의 시에, “우뚝한 정자 사면의 전망도 먼데, 아로새긴 대마루와 채색한 난간이 찬란하기도 하다. 노래하는 미희(美姬)가 술을 권하매 술병이 자주 비워지고, 취한 나그네가 시를 쓰니 글자가 반이나 비뚤어졌네. 옥창이 처마를 침범하는 듯 자줏빛 대가 가지런히 서 있고, 금비녀가 뜰 곁에 있는 듯 황국(黃菊)이 떨어져 있구나. 담 너머로 멀리 단풍나무를 바라보니, 어느 곳의 수풀이 사씨(謝氏)의 집 같은가.” 하였다. 영인진(寧仁鎭) 본부 동쪽 60리에 있으며, 청원(淸源)이라고도 하는데, 본조 태조(太祖) 6년에 성을 쌓았다. 장평진(長平鎭)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본래는 장평진으로 옛날에는 고질달(古叱達)이라 일컬었는데, 고려 광종 20년에 비로소 성을 쌓고, 공민왕 6년에 현(縣)으로 고쳐 영(令)을 두었다. 요덕진(耀德鎭) 본부 서쪽 1백 20리에 있다. 본래는 현덕진(顯德鎭)으로 고려 현종 14년에 성을 쌓았으며, 공민왕이 현(縣)으로 고쳤다. ○ 이상은 현재 모두 폐하여 사(社)로 만들었다. ○ 사(社)라는 것은 이(里)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본도 사람들이 이(里)라고 칭하는 것은 모두 사(社)인 것이다. 북루(北樓) 김극기의 시에, “나무와 바위가 쌓인 가운데 울긋불긋한 정자, 붉은 티끌은 일어나지 않고 녹음만 짙구나. 물은 두 갈래로 흘러 제비꼬리같이 나뉘어지고, 산은 두서너 봉우리 솟아 자라가 머리를 든 듯, 대 이슬 뿌려 개인 낮에도 비를 이루고, 솔바람 불어 더운 철에도 가을같구나. 누가 능히 달 아래에서 유곤(劉琨)의 휘파람 불어, 오랑캐의 혼백이 놀래어 북녘 땅으로 도망가게 하려나.” 하였다. 희우루(喜雨樓)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참담한 가을빛 속에 변방의 해가 잠기고, 어둠침침한 바다 기운이 숲 안개와 섞여 있네. 천리 시야 안에 농상(農桑)이 풍요하니, 옛날의 강포(强暴)한 자들이 몇 번이나 잘못을 뉘우쳤는고.” 하였다. 고철옹성(古鐵甕城) 본부 서쪽 2백 10리 지점에 있다. 토축(土築)으로, 본래 평안도 맹산현(孟山縣) 경계에 있던 것을 본부로 이속시킨 것인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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