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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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근세기에 영역적인 면으로 볼 때 크게 두번의 지명 옮기기가 있었다고 보는데 지금 이 지도에 나타나는 지명은 첫번째가 아닌 두번째 옮김의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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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鏡道]
5.광신부(廣信府)는 영풍(永豐)이다.
江西省(領十三府。一直隸州。一州。七十六縣)。
○廣信府(名信州。領七縣)上饒(南屏。附府)玉山(懷玉)弋陽(葛陽)貴溪(薌溪)鉛山(鵝湖)廣豐(二巖)興安(橫峰)-地輿名目(一十九省)
广信府,
元末至清末的行政区划名,治所在今江西省上饶市信州区。
元顺帝至正二十年(公元1360年),朱元璋部将胡大海攻取信州路,改为广信府,管辖上饶、玉山(在今江西省玉山县古城镇)、弋阳(今江西省弋阳县)、贵溪(今江西省贵溪市)、永丰(今江西广丰县)五县,隶江浙行省。
明太祖洪武四年(1371),因广信府隶浙漕运不便,改隶江西行省。辖境大致为今信江流域各县。
清末广信府辖:上饶、玉山、弋阳、贵溪、铅山(今江西省铅山县)、广丰(今江西省广丰县)、兴安(今江西省横峰县)共7县。
中华民国二年(1912),广信府废。下轄各縣直屬於江西省。
永丰
历史文化悠久。永丰县人杰地灵,英才辈出,素有"文章节义之邦"之美誉。
于北宋至元年(1054年)建县,九百多年来,其秀丽的山水和纯朴的民风,孕育了"唐宋八大家"阳修,北民瞻,元朝文学家刘鹗,明朝状元曾棨、罗伦,兵部尚书聂豹,清朝状元刘绎,解放军上将郭林祥等为代表的一大批贤人志士,是"庐陵文化"的发源地之一。
北宋至和元年(1054年)置县。
据《今县释名》:“本吴阳城县,晋改阳丰,宋改今名,有永丰山。
旧传山生石乳,赤则岁旱,白则年丰,因名永丰县,有永丰溪。”
兴安(意思是“山岭”)位于内蒙古自治区东北部,是内蒙古自治区下辖的一个盟。
历史清代為奉天省所屬,民國後為遼寧省所轄。
918事變後日軍進攻東北,最後成為滿洲國的領土。
抗日戰爭勝利後自遼寧省劃出改屬新設的遼北省。
1947年共產黨在此地(烏蘭浩特市)宣佈成立内蒙古自治政府,中共建制後撤遼北省歸內蒙古自治區至今。
興安盟,中國內蒙古自治區下轄的一個盟。
興安縣,中國廣西壯族自治區下轄的一個縣。
興安省,中華民國行政區劃的一省,已經併入中華人民共和國內蒙古自治區。
興安屯墾區,中華民國東北政務委員會私設的一個省級特別區,已經併入中華人民共和國內蒙古自治區。
興安總省,滿洲國的一總省,已經併入中華人民共和國內蒙古自治區。
興安省 (越南),越南的一個省。
興安市,越南興安省的省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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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안변 도호부(安邊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영흥도 좌익 병마(永興道左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구려의 천성군(淺城郡)이었는데,【일명 비렬홀군(比列忽郡)이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7년 병자【양(梁)나라 대평(大平) 원년.】에 비렬주(比列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이 삭정군(朔定郡)으로 고쳤다. 고려에 이르러 등주(登州)로 고쳐,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종(高宗) 때에 정평(定平) 이남의 여러 성(城)이 몽고의 침략을 받아, 강릉도(江陵道) 양주(襄州)에 옮겨 있었다가, 다시 간성(杆城)에 옮긴 지 거의 40년이 되어서 충렬왕(忠烈王) 24년 무술【원나라 성종(成宗) 대덕(大德) 2년.】에 각기 본성(本城)으로 돌아갔다. 본조 태종 3년 계미에 부인(府人)들이 조사의(趙思義)를 따라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감무(監務)로 강등시켰다가, 이듬해에 다시 구호(舊號)로 회복시켰다. 속현(屬縣)이 8이니, 문산현(文山縣)은 본래 고구려의 가지달현(加支達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청산현(靑山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문산(汶山)으로 고쳤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익곡현(翼谷縣)은 본래 고구려의 어지탄현(於支呑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익계현(翊谿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서곡현(瑞谷縣)은 본래 고구려의 경곡현(谷縣)이었는데,【일명 수을탄(首乙呑)이라 한다.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위의 3현은 신라 때 모두 삭정군(朔庭郡)에 속(屬)하였다. 학포현(鶴浦縣)은 본래 고구려의 곡포현(鵠浦縣)이었는데,【일명 고의포(古衣浦)라고 한다.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금양군(金壤郡)에 붙였으며, 파천현(派川縣)은 본래 고구려의 기연현(岐淵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금양군(金壤郡)에 붙이었다. 〈또 하나는〉 위산현(衛山縣)이다. 위의 3현의 이름은 고려와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복령현(福令縣)은 옛 문적에 혹은 복령향(福寧鄕)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복평향(福平鄕)이라 하기도 하였으며, 영풍현(永豊縣)은 본래 증대이(甑大伊)이었는데, 고려 목종(穆宗) 4년 신축【송나라 진종(眞宗) 함평(咸平) 4년.】에 성을 쌓고 진(鎭)을 두었다가, 뒤에 현(縣)으로 고쳤다.
학성산(鶴城山)【부의 동쪽에 있는데, 본부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여긴다. 】명산(名山)은 오압산(烏鴨山)이다.【일명 황룡산(黃龍山)이라 한다. 부의 동쪽에 있는데, 지극히 높고 험준하며, 남쪽으로 철령(鐵嶺)에 연해 있다. 산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비가 오든지, 가물든지 하여도 넘치거나 마르지 아니한다. 여기에 빌면 자주 징험이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강원도 흡곡현(歙谷縣)에 이르기 65리, 서쪽으로 평강현 분수령(分水嶺)에 이르기 1백 20리, 남쪽으로 회양(淮陽) 철령(鐵嶺)에 이르기 57리, 북쪽으로 의천(宜川)5237) 에 이르기 18리이다.
지릉(智陵)은 익조 강혜 성익 대왕(翼祖康惠聖惠大王)을 장사지냈다.【서곡현(瑞谷縣) 봉룡역(奉龍驛)의 북동(北洞) 감산(坎山)에 있는데, 임좌 병향(壬坐丙向)이다. 표석(表石)을 세우고 능지기[陵直]와 권무(權務) 2인(人)을 두고, 또 수호군(守護軍) 5호(戶)를 두어, 각기 전지 2결씩을 주었다. 】
호수가 1천 30호요, 인구가 3천 9백 97명이다. 군정은 익속군(翼屬軍)이 2백 59명, 선군(船軍)이 1백 50명, 수성군(守城軍)이 49명이다.
본부(本部)의 토성(土姓)이 10이니, 한(韓)·전(全)·노(盧)·상(桑)·손(孫)·최(崔)·김(金)·장(張)·윤(尹)·형(邢)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임(任)·허(許)요, 입성(入姓)이 1이니, 송(宋)이다. 서곡현(瑞谷縣)의 성(姓)이 8이니, 길(吉)·전(田)·현(玄)·원(元)·김(金)·장(張)·손(孫)·유(劉)요, 위산현(衛山縣)의 성이 6이니, 방(芳)【어떤 문부에는 방(方)으로 되었다. 】·나(羅)·한(韓)·임(任)·채(蔡)·오(吳)이며, 익곡현(翼谷縣)의 성이 6이니, 이·신(辛)【옛 문적에는 신(申)으로 되었다. 】·한(韓)·경(敬)·안(安)·방(芳)【어떤 문부에는 방(方)으로 되었다. 】이며, 철원수(鐵垣戍)의 성이 1이니, 방(芳)이요, 파천현(派川縣)의 성이 5이니, 홍(洪)·김(金)·전(全)·이(李)·양(陽)【옛 문적에는 양(楊)으로 되었다. 】이며, 문산현(文山縣)의 성이 3이니, 허(許)·박(朴)·노(盧)요, 상음현(霜陰縣)의 성이 3이니, 김(金)·오(吳)·양(陽)이며, 화등수(禾登戍)의 내성(來姓)이 1이니, 최(崔)【동주(東州). 】요, 입성(入姓)이 4이니, 송(宋)【기성(岐城). 】·김(金)【풍양(豊壤). 】·유(劉)·임(林)【상음(霜陰). 】이며, 학포현(鶴浦縣)의 성이 3이니, 양(陽)·이(李)·맹(孟)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인(印)이며, 압융수(押戎戍)의【옛 문적에는 압(壓)으로 되었다. 】성이 8이니, 맹(孟)·양(陽)·남(南)·손(孫)·김·이(李)·송(宋)·전(田)이요, 복령현(福令縣)의 성이 4이니, 최(崔)·윤(尹)·송(宋)·이(李)이며, 영풍현(永豊縣)의 망입성(亡入姓)이 16이니, 혁(赫)·임(林)·오(吳)【개주(開州). 】·오(吳)【안협(安峽)·영평(鈴平)·이천(伊川)·오서아(烏西兒)·금마(金馬)·봉주(鳳州). 】·임(林)【동주(東州)·천령(川寧). 】·만(萬)【어떤 문부에는 우(禹)로 되었다. 해주(海州). 】·혁(赫)·임(林)【토산(兎山). 】·오(吳)·우(禹)【황주(黃州). 】·강(康)·한(韓)·임(林)【곡주(谷州). 】·혁(赫)【견주(見州). 】·방(芳)【어떤 문부에는 방(方)으로 되었다. 해주(海州). 】·유(劉)【염주(鹽州). 】이다. 인물은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안천 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이다.【이 분이 신의 왕후(神懿王后)를 낳아서 태조(太祖)의 배필이 되게 하여, 공정 대왕(恭靖大王)과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을 탄생하게 하였다. 묘(墓)는 부의 속현(屬縣) 익곡(翼谷)의 북쪽에 있다. 】
간전(墾田)이 1만 3천 9백 57결이요,【논은 10분의 1이 못된다. 】토의(土宜)는 기장[黍]·피[稷]·콩·벼·조·삼[麻]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사슴뿔·잇[紅花]·지초·밀[黃蠟]·소유(酥油)요, 약재는 곰쓸개[熊膽]·우황(牛黃)·모란뿌리껍질[牧丹皮]·안식향(安息香)·오미자(五味子)·복령·대왕풀[白芨]·당귀(當歸)·방풍(防風)·흰바곳[白附子]·인삼이요, 토산(土産)은 금(金)【복령현(福令縣) 남쪽 15리의 심천(深川)에서 난다. 】·족제비털·송어·고등어·연어·굴[石花]·바닷조개[海蛤]·전복이다. 어량(魚梁)이 1곳이니, 부(府)의 남쪽 내[南川]에 있다. 염분(鹽盆)이 24개이다.
학성산 석성(鶴城山石城)이 부의 동쪽에 있다.【둘레가 1천 1백 80보(步)이다. 안에 군창(軍倉)이 있고, 우물이 2, 샘이 4가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아니한다. 】온천(溫泉)이 1이요,【영풍현(永豊縣) 관문리(關門里)에 있다. 】역(驛)이 10이니, 삭안(朔安)·봉룡(奉龍)【예전에는 보룡(寶龍)이라 하였다. 】·상음(霜陰)【예전에는 살한현(薩寒縣)이었는데, 뒤에 상음현(霜陰縣)으로 고쳤다. 지금은 역으로 삼았다. 】·고산(高山)【옛 이름은 고산(孤山)이니, 위산현(衛山縣)에 있다. 】·신역(新驛)【복령현(福令縣)에 있다. 】·남산(南山)【예전에는 남산(藍山)이라 하였는데, 문산현에 있다. 】·조양(照陽)【서곡현(瑞谷縣)에 있다. 】·화등(火燈)【예전에는 화등(禾登)이라 하였는데, 학포현(鶴浦縣)에 있다. 】·요지(要知)【예전에는 요지(瑤地)라 하였는데, 학포현에 있다. 】·신풍(新豊)【예전에는 원심(源深)이라 하였는데, 파천현(派川縣)에 있다. 】이다. 요해(要害)는 철령(鐵嶺)【부의 남쪽 위산현에 있다. 】·관문(關門)【부의 서쪽 영풍현에 있다. 】·검봉산(劎峯山)【부의 동남쪽 파천현에 있다. 】이다. 봉화가 5곳이니, 산성(山城)【북쪽으로 의천(宜川) 견산(見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진사원(進士院)에 응하고, 남쪽으로 사개현(沙介峴)에 응한다. 】·사개현【남쪽으로 철령에 응한다. 】·철령(鐵嶺)【남쪽으로 강원도 회양부(淮陽府)의 은계(銀溪)에 응한다. 】·진사원(進士院)【남쪽으로 학포현 강현(船峴)에 응한다. 】·강현(船峴)【남쪽으로 강원도 흡곡현(歙谷縣)의 제공포(提控浦)에 응한다. 】이다. 석왕사(釋王寺)【부의 서쪽에 있는데, 선종(禪宗) 고 천태종 별사(古天台宗別社)에 붙이고, 전지 2백 50결과 종[奴] 19명을 주었다. 】익곡현(翼谷縣) 남쪽에 풍류산(風流山)이 있는데, 그 위에 못이 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공중에서 음악소리가 들렸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서곡현(瑞谷縣) 남쪽에 안점(鞍岾)이 있는데, 그 위에 쌍소나무[雙松]가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예전에 어떤 사람이 북녘에 끌려와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당시 임신 중에 있었던 그의〉 아들이 생장(生長)하여서 양식을 지고 가다가 아버지를 이곳에서 만났다. 서로 껴안고 통곡하고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부자(父子)의 형상을 점상(岾上)의 바윗돌에 그리고 나서 함께 죽었으므로, 그대로 여기에 묻었는데, 소나무가 무덤 위에 났다.”고 한다. 해도(海島)가 1이니, 국도(國島)이다.【부의 동북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0리쯤 된다. 동남쪽으로 석벽(石壁)이 깎은 듯이 서 있으며, 그 아래에 두 굴(窟)이 있는데, 큰 굴은 얕으나, 작은 굴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바닷물이 그 가운데를 통하므로, 배를 타고 굴안을 드나든다. 굴안의 돌은 기둥처럼 깎아 세운 듯하고, 여기저기 오색 칠을 한 것 같다. 좌우 벼랑에는 좌석(座石) 천여 개가 있다. 】
관할[所領]은 군(郡)이 1이니, 의천(宜川)이요, 현(縣)이 1이니, 용진(龍津)이다.
【영인본】 5책 696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함길도 / 안변 도호부 / 의천군
○ 지리지 / 함길도 / 안변 도호부 / 용진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동쪽으로 강원도 흡곡현(歙谷縣) 경계까지 95리이며 남쪽으로는 동도(同道) 이천현(伊川縣) 경계까지 88리요, 동도 회양부(淮陽府) 경계까지 85리이며 서쪽으로는 관내 영풍현(永豐縣) 경계까지 90리이고, 강원도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1백 5리이며 북쪽으로는 덕원부(德源府) 경계까지 25리이요, 서울과의 거리는 5백 84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의 비열홀군(比列忽郡)이었는데 일명 천성(淺城)이라고도 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7년에 비열주(比列州)로 하고는 군주(君主)를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 때에 삭정군(朔庭郡)으로 고쳤다. 고려에 이르러 등주(登州)로 고쳐 성종(成宗) 14년에는 단련사(團練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9년에는 등주 안변도호부(登州安邊都護府)라 고쳤다. 고종(高宗) 때에 정평(定平) 이남의 모든 읍성(邑城)이 몽고(蒙古) 군병에게 침입당하여 강릉도(江陵道) 양주(襄州)로 옮겼다가 다시 간성(杆城)으로 옮긴 지 거의 40년인 충렬왕(忠烈王) 24년에 각기 본성으로 돌아갔었다. 본조 태종(太宗) 3년 이 고을 사람인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켜 감무(監務)로 격하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도호부로 환원되었다.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설치하였고, 성종(成宗) 2년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는데 중종 4년에 다시 격하시켜 도호부가 되었다.
[속현]학포현(鶴浦縣) 본부 동쪽 6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곡포현(鵠浦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금양군(金壤郡)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본부로 예속시킨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따른 것이다. 영풍현(永豐縣) 본부 서쪽 90리에 있다. 본래 증대이(甑大伊)었는데 고려 목종(穆宗) 4년에 성을 쌓고 진(鎭)을 두었으며, 뒤에 현(縣)으로 고쳐 본부에 예속되어 온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진관(鎭管) 도호부(都護府) 1개소 덕원(德源). 군(郡) 1개소 문천(文川).
[형승]곡산(鵠山)을 앞으로 대하고 제학(鯷壑)을 아래로 굽어본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앞으로 곡산을 대하니 펀펀하기 책상 같고, 아래로 제학을 굽어보니 아득하여 술잔같이 보인다.” 하였다.
[산천]학성산(鶴城山) 본부 동쪽 5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그 형상이 학(鶴) 모양과 흡사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검봉산(劍峯山) 본부 서남쪽 35리에 있다. 본명은 설봉산(雪峯山)인데 산 위에 세 개의 석봉(石峯)이 높이 있기 때문에 속칭 검봉이라 한다. 오압산(烏鴨山) 일명 황룡산(黃龍山)이라고도 하며 본부 동쪽 60리에 있는데, 극히 높고 남쪽으로 철령(鐵嶺)과 연해 있다. 산마루에 못[池]이 있는데 날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매양 그 감응이 있다 하며, 골짜기 속에 또 아홉 개의 못[淵]이 있다. 백운산(白雲山) 본부 동쪽 10리에 있다. 풍류산(風流山) 익곡현(翼谷縣)에 있는데 남쪽으로 90리 거리에 있다. 그 위에 못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공중에서 때로 음악소리가 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했다는 것이다. 철령(鐵嶺) 본부 남쪽 83리에 있다. 고려 때에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철관(鐵關)이라 불렀다. ○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철령(鐵嶺)의 산은 높아 칼날과도 같은데, 동쪽으로 바다 하늘을 바라보니 아득하기만 하다. 가을바람은 유난스러이 양쪽 귀밑을 불어 스치는데, 말을 몰아 오늘 아침에 북녘 변방에 왔노라.” 하였다. ○ 변중량(卞仲良)의 시에, “철관성(鐵關城) 아랫길은 멀리도 뻗었는데, 안계(眼界)에 가득히 들어오는 노을과 물결엔 해도 기울었구나. 남으로 가고 북으로 오는 사이에 봄은 저물려 하는데, 가는 곳마다 말머리에 해당화(海棠花)가 피었네.” 하였다. 『신증』 남곤(南袞)이 절도사(節度使) 이장곤(李長坤)을 보내는 부(賦)에, “등주(登州) 남쪽과 연성(連城) 북녘에 큰 산들이 깎아지른 듯 하늘로 치솟으니, 그 산세가 국토를 가로질렀다. 장백산(長白山)에 뿌리를 박고 뻗어나가 남으로 수천 리를 달려와서 넓게 모였다. 그 길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당시에는 다만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이 보일 뿐이라, 우공(愚公)은 머뭇거리다가 도로 물러가고, 거령(巨靈)도 손바닥만 어루만지다가 피해 갔다네. 인가와는 서로 막혀 통하지 않았고, 풍기(風氣)조차도 다른 구역과 막혀 있었으리. 도무지 알 수 없는 일 어느 연대(年代)에 있었는지. 새[鳥]나 넘는 이 길을 찾아 뚫었단 말인가. 처음엔 실 같은 외줄기 숲 밖으로 빙빙 돌더니, 점점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암석 사이로 서리었다네. 인마(人馬)가 이미 통하게 됨에 따라 평탄한 큰 길을 개척하였고, 고려(高麗) 때엔 이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철관(鐵關)이라 불렀다네. 아, 슬프다, 백이(百二) 험한 요새지에서 몇 왕대(王代)의 분쟁을 겪었던고, 나는 상상하건대, 윤관(尹瓘)이 북정(北征)할 때 예왕(睿王) 같은 영명한 임금을 만나 누대(累代)에 쌓였던 분한(憤恨)을 일거에 소탕(掃蕩) 숙청(肅淸)하려고 생각하였다네. 위봉(威鳳)이 절월(節鉞)을 받고 장춘(長春 땅 이름)에 군사를 주둔하고는, 10만 대군을 몰아 천리 밖에 원정할 적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군사를 쓰던 효릉(峭陵)을 흘겨보고 한신(韓信)이 행군하였던 정형(井陘)을 밟아 들어가니, 원수(元帥)가 관문(關門)을 떠나기도 전에 그 위엄이 이미 오랑캐 땅에 떨치었는지라, 달아나는 적병을 추격하여 파지(巴只 땅 이름)까지 나가고, 땅을 개척하여 아홉 개의 성(城)을 쌓음에 이르렀다. 개가(凱歌)를 부르며 돌아오매, 고갯길도 평탄하였으니 그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던가. 국세가 쇠퇴함에 미쳐서 조휘(趙暉)ㆍ탁청(卓靑)의 역적이 있어 나라를 배반하고 오랑캐 원(元) 나라에 붙어 화령(和寧) 땅을 훔쳐서 웅거(雄據)하니, 의관(衣冠)이 관문을 경계로 한계를 그었고 반쪽 변방의 초목이 오랑캐에게 더럽힘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내안(乃顔)의 잔당이 흉악하게 침입하여 개원령(開元嶺)을 넘어 화주(和州)ㆍ등주(登州)를 노략하여 사람을 죽여 양식을 삼으니 어린아이들이 남지 않았다. 관군이 적의 그림자만 보아도 뿔뿔이 달아나 주력이 무너지고, 추악한 그들은 북을 울리며 관문으로 들어왔다. 정수기(鄭守琪)와 나유(羅裕)는 또한 어떤 사람이드냐. 무슨 낯으로 밝은 해를 보았던가. 비록 생명을 보전코저 나라를 저버렸다지만 어찌 나라가 멸망하고도 몸이 온전할 수 있다던가. 천험(天險)의 성곽을 버리고 지키지 않아서 백만의 병력이 흉악한 적의 손에 섬멸되고 말았네. 또한 기강이 해이함을 볼 수 있으며, 나라의 운명도 이로 인하여 쇠퇴하였다. 지금까지도 한 떨기 나뭇가지 첩첩한 낙엽마저 그 분통한 빛을 띠고 있으리니 오히려 그 당시를 위하여 간사한 무리들을 베고 싶구나. 성인이 풍패(豐沛)에서 일어나시니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케 하는 큰 뜻을 두시었네. 철관(鐵關) 서쪽에 살기(殺氣)가 가득한지라 잔악한 무리들을 제거하여 동한(東韓)의 안녕을 되찾았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고 산하를 다 차지하였으니, 옛날의 외적들 있던 곳이 이제는 지경 안에 있게 되었다. 누가 동봉(東封)의 일환(一丸)을 빌려 관방(關防)을 헐어버리고 다시 기찰(譏察)함이 없이 다만 지나가는 길손들의 한가로운 모습만 보게 하였나. 아, 산천은 변함이 없으니 성패의 길이 다르고 험준 견고함은 예와 같아도 흥하고 쇠한 자취가 다른 것이 어찌 그 시세(時勢)의 이롭고 불리함이 사람이 모사를 잘하고 못하는 데 연유하고,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이 나라 세력의 강하고 약함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그 나라를 굳게 함은 산하의 험준함으로써 하지 아니하니, 형세의 이로움이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다. 덕을 닦지 않으면 한 배 가운데의 사람도 적국이 되나니, 위후(魏侯)의 아름다운 강산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금중(禁中)의 염파(廉頗)ㆍ이목(李牧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명장)이 족히 당(唐) 나라의 국위를 떨친다는 것이다. 오직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한 나라의 장성(長城)이 되는 것은 고금이 같으니, 고려 때 상고해 보더라도 자명한 일이다. 내가 그대의 가는 것을 전송(餞送)하려 울퉁불퉁한 높은 고갯길을 올라가니, 돌아가는 구름은 빽빽하게 응결하여 찬 비를 재촉해 좔좔 퍼붓는구나. 긴 칼 빼어들고 휘파람 불어 이별에 어지러운 이 마음을 끊었노라. 어찌하면 그대와 더불어 꽁무니를 수레로 삼아 신마(神馬)를 몰아서 큰 사막을 넘고, 푸른 연하(煙霞)를 헤치며 백두산(白頭山)의 정상에 올라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를 어루만지고, 바다에 임하여 푸른 물결을 잔질하여 가슴 가운데에 불평을 씻고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징초(徵招)의 악장(樂章)을 연주하며 돌아와 호월일가(胡越一家)의 가사(歌詞)를 임에게 바쳐볼까.” 하였다. 법호현(法乎峴) 본부 동쪽 20리에 있다. 노리현(老里峴) 본부 서쪽 55리에 있다. 고개 위에 장성(長城)을 쌓았고 연대(煙臺)가 있는데 옛날에 관방(關防)으로 쓰이던 곳이다. 이 길은 황해도에 통한다. 바다 동쪽 30리에 있다. 또 본부 북쪽 20리에도 있다. 온천(溫泉) 본부 서남북 1백 57리에 있다. 남대천(南大川) 본부 서남북 5리에 있는데, 근원이 강원도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와 북으로 흘러 익곡현(益谷縣)을 지나서 또 동북쪽으로 흘러 부평(富坪)에 이르러 심천(深川)이 되고, 서쪽 5리에 이르러 관도(官渡)가 되었는데 흐름이 느려져서 물이 고여 회수(匯水)를 이루었다. 동쪽 언덕이 불쑥 솟아 거북 형상과 같아서 속칭 용당(龍堂)이라 이르는데 그 앞에 흰모래가 평평하게 깔려 있어 경치를 이루었으며 동북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국도(國島) 본부 동쪽 60리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섬이 해안에서 10리쯤 떨어져 있다. 서남 모퉁이로부터 들어가 물가에 흰모래가 흰 비단 같고 그 아래에 평지가 5ㆍ6묘(畝) 가량 된다. 그 모양이 마치 반쪽의 담벽같이 되어 있고, 가운데에 집터가 있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중이 살던 곳이라 한다. 그 위엔 산이 고리같이 둘러 있는데 산세가 그다지 높지 않고 덩굴진 풀들이 덮여 있고 또 수목도 없어서 보기에는 한 흙언덕에 불과하다. 배를 타고 조금 서쪽으로 가면 높고 낮은 언덕들이 점점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그 높은 언덕의 돌들은 모두 직방(直方)형으로 되어 즐비하게 벽같이 서 있고, 그 낮은 언덕의 돌들은 모두 평평하게 원형으로 늘어서 있고 한 돌 위에 한 사람이 앉을 만한 정도의 것들이다. 그러나 가지런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백 보를 더 가면 그 벼랑의 높이가 수백 척 가량 되고, 그 돌이 백색으로 방직(方直)과 장단(長短)이 한결같이 같으며, 한 개마다 그 정상(頂上)에 조그마한 돌을 이고 있는 것이 마치 화표주(華表柱)의 머리같이 되어 있어 낯을 들고 보면 두렵고 놀랄 만한 것이 있다. 한 개의 조그마한 굴이 있어 배를 저어 들어가니 점점 좁아져서 배를 드릴 수 없게 되고 그 굴속을 바라보니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고 그 좌우에 얽혀 선 돌들이 겉면에 비하여 한결 가지런하게 있었으며, 그 뒤 돌의 각부(脚部)가 늘어진 것도 모두 펀펀하고 반듯하여 바둑판처럼 되어 있는데 하나하나가 톱으로 끊은 것 같았다. 이것으로 본다면 다만 겉면만 이 같은 것이 아니고 온 섬이 곧 한 묶음의 방석(方石)의 줄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굴속의 날카로운 암석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배를 돌려 북으로 가니 또 한 면이 병풍을 둘러친 것같이 되어 있는 것이 있어, 배를 버리고 내려가 배회하며 잡고 올라보니 대개 돌과 굴이 서로 다름이 없고 그 절벽이 그다지 높지 않고 그 아래가 약간 평탄한 데다가 그 둥근 돌들이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약 1천 명의 인원이 앉을 만한 것이어서 유람객들이 반드시 이곳에서 휴식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머물러 술 마시고 있었는데 바람이 일지나 않을까 염려도 되고 또 화식(火食)하는 속인들의 머무를 곳이 아니어서 절벽을 끼고 동남쪽으로 또 수백 보를 가면 절벽의 돌이 약간 달라지고 바야흐로 철망(鐵網)을 이루어 물을 담고 이에 깎이어 조금 둥글게 되었는데, 돌의 길이가 5ㆍ60척(尺)으로 한 가닥이 다른 한 가닥과 같아서 한 면이 모두 이와 같으니 사람들이 이를 철망석(鐵網石)이라 이른다. 이것이 국도의 대개이다.”라고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푸른 바다의 한 가닥 물이 거울 같은 호수를 이루었는데, 푸른 봉우리가 사면을 둘러싸고 물은 평평하게 깔렸네, 간직한 별다른 섬이 이미 진세(塵世)의 땅이 아니거늘, 그 위에 높은 누대 있어 그림을 이루었네. 물결 속으로 해가 비치니 한 자가 넘는 잉어가 뛰어 놀고, 모랫가에 비가 개이니 한 쌍의 오리가 희롱한다. 백년 전 선배(先輩)의 풍류는 흐터져 간 곳이 없는데, 오직 저 장송(長松)만이 늙어도 마르지 않고 있구나.” 하였다. ○ 신선(神仙)의 섬이 육오(六鰲)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의아해 바라보니, 망망(茫茫)한 갈 길이 구름과 물결에 막혀 있네, 물에 뜬 한 송이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바닷속에 꽂힌 수많은 괴석(怪石)들이 높이 솟았구나. 조망(眺望) 속에 시력(視力)이 다해 끊어지니 이 몸에 새 날개를 갖추지 못한 것이 한스럽고, 바닷길을 건너보니 목숨이 행여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될까 두렵다. 물가 돌에 가득히 낀 이끼 위엔 마른 나뭇잎들이 흩어져 있고, 언덕을 몰아치는 바람 앞에 조그만 배가 흔들리네. 노 젖는데 지친 사공 더운 땀을 흘리고, 준비한 술자리는 가난한 고을에서 고혈(膏血)을 마저 짜낸 것이리라. 어찌 하면 이 동해물을 훨씬 불게 하여, 기이(奇異)한 지경을 모두 삼켜 이 노고를 면하게 할까. 여도(女島) 국도(國島) 북쪽 본부와 30리 거리에 있다. 압융관(壓戎串) 본부 동쪽 5리에 있다.
[토산]사(絲)ㆍ삼[麻]ㆍ지치[紫草]ㆍ송이[松蕈], 죽전(竹箭) 압융관에서 난다. 오미자(五味子)ㆍ인삼(人蔘)ㆍ안식향(安息香)ㆍ복령(茯苓)ㆍ모향(茅香)ㆍ영양(羚羊)ㆍ사향(麝香), 배[梨] 석왕사(釋王寺)에서 나므로 세칭 석왕배[釋王梨]라 한다. 꿀[蜂蜜]ㆍ홍어(洪魚)ㆍ게[蟹]ㆍ송어(松魚)ㆍ연어(鰱魚)ㆍ삼치[麻魚]ㆍ전복[鰒]ㆍ은어[銀口魚]ㆍ홍합(紅蛤)ㆍ숭어[秀魚]ㆍ빙어[瓜魚]ㆍ청어(靑魚)ㆍ도루묵[銀魚]ㆍ여항어(餘項魚)ㆍ넙치[廣魚]ㆍ고리마(高里麻)ㆍ해삼(海蔘)ㆍ소유(酥油)ㆍ굴[石花]ㆍ고등어[古刀魚]ㆍ소금[鹽]ㆍ조개[蛤].
[불우]석왕사(釋王寺) 태조(太祖)가 잠저(潛邸) 때에 세웠다. 양로사(養老寺) 모두 설봉산(雪峯山)에 있다. 가지사(迦智寺)ㆍ 계정암(戒淨菴)ㆍ광덕사(廣德寺)ㆍ보현사(普賢寺) 모두 오압산(烏鴨山)에 있다. 백운사(白雲寺)ㆍ석보사(石寶寺) 모두 백운산(白雲山)에 있다.
[고적]문산 폐현(文山廢縣) 본부 남쪽 30리에 있다. 본시 고구려의 가지달현(加之達縣)이었는데, 신라 때 청산(菁山)으로 고쳐 삭정군(朔庭郡)의 속현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 다시 문산현(汶山縣)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그대로 소속해 두었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것인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익곡 폐현(翼谷廢縣) 본부 남쪽 65리에 있다. 본시 고구려의 오지탄현(於支呑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익계(翊溪)로 고쳐 삭정군(朔庭郡)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붙여 둔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서곡 폐현(瑞谷廢縣) 본부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경곡현(谷縣)으로 일명 수을탄(首乙呑)이라고도 하였는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삭정군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현종 9년에도 그대로 붙여 두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파천 폐현(派川廢縣) 본부 동쪽 95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기연현(岐淵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내속시켰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위산 폐현(衛山廢縣) 본부 남쪽 52리에 있다. 고구려 때의 칭호는 미상이다. 고려 현종 9년에 붙여 온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복령 폐현(福令廢縣) 영(令) 자는 영(靈) 자로도 썼는데 본부 서쪽 30리에 있다. 혹은 복녕향(福寧鄕)이라 일컬었고, 혹은 복평향(福平鄕)이라 호칭하였다. 상음 폐현(霜陰廢縣) 본부 동쪽 30리에 있다. 본시 고구려의 살한현(薩寒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삭정군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 그대로 붙여 왔고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학포교(鶴浦橋) 학포현(鶴浦縣)에 있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우리 태조(太祖)가 마침 졸고 있다가 이 다리에 이르러서 말이 실족해 떨어지니 태조가 내려 서서 두 손으로 말의 귀와 갈기를 잡으니 말은 공중에 매달리고 얽혀 있는 것이 놓지 않는지라 사람을 시켜 찯던 칼을 빼어 안장을 끊어버리게 한 뒤에 놓으니, 말이 물에 잠겼다가 다시 떠올라 나왔다. 안점(鞍岾) 서곡현(瑞谷縣) 남쪽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 한 남자가 북녘 장성(長城)의 사역장으로 갈 때 그 아내가 임신중인 것을 알고 갔었다. 사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쌀을 지고 가는 한 남자를 만나 그 고향을 물으니,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마침내 서로 붙들고 통곡하고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부자(父子)의 형상을 바윗돌에 그리고는 드디어 함께 죽어버려 이곳에 장사했다.” 한다. 압융수(壓戎戍) 즉 벽융관(壁戎串)이다. 철원수(鐵垣戍) 본부 동쪽 파천사(派川社) 바다 어귀에 조그마한 석성(石城)이 있는데 세칭 수성(戍城)이라 한다. 강원도 흡곡현(歙谷縣) 지경에 있다. 향등수(香登戍) 본부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신증』 낭성포 폐진(浪城浦廢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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