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仙果) 반도(蟠桃)가 난 덕원도호부는? http://blog.daum.net/han0114/17049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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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총관부에 얽힌 티무르와 이성계
쌍성총관부는 발라스부(Barlas)이다.
우리는 반도사의 늪에서 언제쯤 해방이 될까?
우리가 1945년 분명 해방이 되었다.
하지만 영토적으로 해방이 되었다고 하겠지만 역사적으로는 해방 된 것이 아니다.
반도사를 우리의 역사로 알고 있는 한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쌍성총관부!
이 쌍성총관부가 한반도에 있었는가?
절대 아니다.
반도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1374) 5년 1356년 음력 4월 몽골지배체제에서 확실하게 벗어나 비로소 자립의 왕조로 다시 태어났음을 상징하던 것으로 근 100년간 몽골에게 점령당한 쌍성총관부를 다시 찾았던 시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쌍성총관부가 과연 한반도 함경도 남부에 있었다는 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무엇보다도 티무르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는
1360년 동(東)차가타이한국의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 1329-1363 동(東)차가타이한국 모굴리스탄 한국Moghulistan, Mughalistan의 초대 칸)가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종하여 발라스부의 옛 영지를 하사 받았다 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매우 흡사한 일이다.
고려 공민왕이 1356년에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다 하였고 4년 뒤 1360년에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에게 옛 영지인 발라스부를 하사받았다고 하고 있다.
옛 영지(領地)라 함은 바로 티무르 자신의 선조가 대대로 이어오던 천호(千戶)영지였던 것이다.
반도사 기록을 보면
공민왕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유인우(柳仁雨)에게 몽골이 빼앗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공격을 명령했다. 이때 고려인의 후손으로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던 이성계와 그의 부친 이자춘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다. 이를 계기로 이자춘 부자(父子)와,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 등이 고려 정계에 등장했다. 라고 나온다.
고려 공민왕이 동(東)차가타이한국의 초대 칸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 1329-1363)인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고려인의 후손으로 쌍성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천호작위(千夫之长)를 세습하던 이성계와 그의 부친 이자춘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다는 이야기와 티무르가 몽골귀족 신분으로서 발라스부를 옛 영지로 삼고 있었던 곳을 동(東)차가타이한국 초대 칸인 투글루크 티무르에게 복종하면서 차가타이를 배신한 대가로 하사받았다는 사실과 같다라고 할 수 있다.
딱 맞아 떨어지는 사실이다.
이 발라스부(Barlas tribe)는 전통적으로 발사스족이 거주한 곳이고 징기스칸 이전에는 몽고(Mongol)부족에 속하는 하나의 씨족으로서 몽고부족의 최초의 가한(可汗)이 된 카불 칸의 형제로 보르지긴(Borjigin, 패아지근)씨로 연결되는 유력가계라고 하였다.
티무르는 몽고 칸 왕족가계의 출신인 것이고 바로 이성계와 같은 몽골귀족출신인 것이다.
이러한 출신성분도 티무르와 이성계가 같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쌍성총관부는 분명 발라스부이다.
그렇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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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사의 쌍성총관부 설명이다.
고려의 동계(東界:동북면) 지역은 특수지방 행정구역으로 고려의 타처에서 온 유이민(流移民)과 여진사람들이 섞여살던 곳이었다. 그런데 몽골이 고려를 침입해오자 1258년(고종 45) 12월 이곳 사람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반란을 일으켜 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가지고 몽골에 항복했다. 그러자 몽골은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摠管), 탁청을 천호(千戶)로 임명하여 등주(登州:안변)·정주(定州:정평)·장주(長州:장곡)·예주(預州:예원)·고주(高州:고원)·문주(文州:문천)·의주(宜州:덕원)·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을 통치함으로써 동계지역은 쌍성총관부에 예속되지 않은 명주지방으로만 한정되었다. 그 뒤 쌍성총관부는 총관과 천호를 조휘와 탁청의 일족에게 세습시켜가며 100여년간 통치를 했다. 그런데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실시할 때 추밀원 부사(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이 반격했으나, 조휘의 손자인 조돈(趙暾)과 이 지역에 토착해 있던 이자춘(李子春)이 고려군에 협력해왔다. 그리하여 고려가 그 지역을 탈환하고 쌍성총관부를 폐지했으며,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했다.[야후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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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의 진위는 고사하고 한반도에 이 쌍성총관부를 함경(함길)도 남부에 끼워 넣기 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여 씁쓸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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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夫之长
千户
金初设置,为世袭军职,即女真语猛安之意译。统领谋克,隶属於万户。元代相沿,其军制千户设“千夫之长”,亦隶属於万户。千户所统领百户所:统兵七百以上称上千户所;兵五百以上称中千户所;兵三百以上称下千户所,各设“达鲁花赤”一员,千户一员。明代卫所兵制亦设千户所,千户为一所之长官。驻重要府州,统兵1,120人,分为十个百户所。
相沿-답습(踏襲)하다
简介
千户,官名,金朝始置,为世袭军职。初专授予汉人降臣,后也用以称女真军事组织猛安。蒙古成吉思汗建国后封功臣,也用此名,又称千夫长,共九十五人。元朝于各路设千户所,置千户为长官,隶属于万户,下领百户。以统兵数量分为上、中、下三等。七百人以上为上千户所,五百人以上为中千户所,三百人以上为下千户所。明朝沿置为千户所长官,正五品。隶属于卫,下设百户。千户所一人掌印,一人佥书,称管军,并有“试”与“实授”之别。清朝于西北、西南等少数民族土官中置千户一职,正五品,管理所辖部族及士兵。
千户制
蒙古汗国和元朝国家体制。成吉思汗即位后,建立千户制,将全国的人民和土地划分为95个千户,由大汗分别授予与共同建国的贵戚、功臣,任命他们为千户的那颜(首领),使之世袭管领。千户下分为若干百户,百户下为十户。这种分法史称“领户分封制”或“千户分封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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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1330-1374, 재위 1351-1374)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실시할 때 추밀원 부사(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을 공격하게 했다란 내용을 보면
공민왕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유인우(柳仁雨)에게 몽골이 빼앗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공격을 명령했다.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반원 개혁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때 고려인의 후손으로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던 이성계와 그의 부친 이자춘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다. 이를 계기로 이자춘 부자(父子)와,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 등이 고려 정계에 등장했다.[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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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Tīmūr/Taymūr 1336-1405:재위1370-1405)-1360년 동(東)차가타이한국의 투글루크 티무르(Tughlugh Timur, 1329-1363 東차가타이 한국, 모굴리스탄 한국의 초대 칸)가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종하여 발라스부의 옛 영지를 하사 받았다. 그러나 곧 동(東)차가타이한국을 배신하고, 카라우나스(Qara'unas) 부의 아미르 후사인(Husayn)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하여 본거지로써 사마르칸드를 손에 넣었다.
그 후 패권을 둘러싸고 후사인과 대립하여 1369년에 후사인의 본거지 발흐(Bactra)를 공격해 후사인을 죽이고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의 패권을 장악한 뒤 1370년에 후사인이 내세운 칸인 카불 샤를 처형하고 그 대신에 오고타이의 후예 슈르가드미슈 란 왕자를 칸으로 옹립하였다. 그해 후사인의 과부로써 징기스칸의 자손이기도 한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여 징기스칸 가문의 사위(후르갱, kürügän)를 자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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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인(Husayn)은 1360년부터 1369년까지 차가타이한국의 카라운(Qara'unas:Afghanistan and eastern Persia)부를 다스렸던 아미르였다. 티무르의 처남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1358년, 카라운부의 아미르이자 실질적인 차가타이한국의 지배자였던 압둘라(Abdullah)가 솔더스부(Suldus tribe)의 부얀 솔더스(Buyan Suldus)와 발라스부(Barlas tribe)의 하지 벡(Hajji Beg)에 의해 쫓겨나자 후사인 역시 다른 곳으로 망명했다.
2년 후인 1360년, 모굴리스탄 한국의 투글루그 티무르가 트란속시아나(現 우즈베키스탄 지역)를 정복하자 트란속시아나(Transoxiana)로 돌아와 발라스부의 새로운 아미르 티무르와 동맹을 맺고 솔더스부(Suldus tribe)의 부얀 솔더스(Buyan Suldus)를 격파했다. 패한 부얀 솔더스는 자신의 영토를 포기하고 도망쳤다. 부얀 솔더스가 도망친 뒤 후사인은 차가타이 한국에서의 종주권을 주장했다.
1년 뒤 1361년, 투글루그 티무르가 트란속시아나(Transoxiana)를 침입하자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도망쳤다. 하지만 투글루그 티무르가 부얀 솔더스를 비롯한 여러 아미르들을 처형한 뒤 자신의 아들 일리아스 호자를 남겨두고 떠나자 자신의 영토로 복귀하였다. 2년 뒤인 1363년엔 발라스부의 티무르와 동맹을 맺고 일리아스 호자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일리아스 호자는 2년 뒤인 1365년에 다시 트란속시아나를 침입했지만 트란속시아나를 장악하는데 실패하고 소득없이 철수하였다.
모굴리스탄의 칸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후사인은 트란속시아나(Transoxiana)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고 아딜 술탄(Adil Sultan)과 카불 샤(Khabul Shah)같은 명목상의 칸들을 옹립하여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오랜 동맹자였던 발라스부(Barlas tribe)의 티무르와 사이가 틀어졌고 결국 1369년에 티무르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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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스(Barlas)부
일리하[Ili River]
발라스(Barlas)는, 중앙 유라시아에서 활동한 부족 집단.
징기스칸 이전에는 몽고(Mongol)부족에 속하는 하나의 씨족으로 『元朝秘史』에 의하면 그 시조 카츄리는 몽고부족의 최초의 한(可汗, Khan, 汗)이 된 카불 칸의 형제로 보르지긴(Borjigin, 패아지근)씨에게 연결되는 유력 가계였다. 카츄리의 자손은 카불칸의 자손 키야트 씨족에 따라, 키야트씨의 징기스칸을 시중든 카라체르·노얀(Qasar Noyan)은 몽고제국의 천인대장(千人隊長)=천호(千戶)수장이 되어, 징기스칸의 차남 차가타이(Chagatai Khan)의 우르스(Ulus, 영지)에 배속되었다. 13세기 중순에 차가타이·우르스(Ulus)가 이리강(伊犁河, Ili River)의 계곡에 이르고 게다가 14세기에 차가타이·한국을 형성하여 중앙아시아의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자 발라스(Barlas)부도 흩어졌다.
14 세기 중순, 서차가타이·한국의 샤흐리사브즈(Shahrisabz)에 있던 발라스부의 소귀족으로, 카라체르·노얀의 5대 자손에 해당하는 티무르는, 차가타이·한국 재편의 움직임을 타 두각을 나타내, 1360년에 발라스부의 아미르(Amir, 총독)가 되었다. 티무르는 1370년까지 서 투르키스탄의 각지에서 할거 하는 제 부족을 제압하고 서차가타이·한의 영토를 통일해, 티무르왕조를 건설한다. 티무르왕조는 발라스(Barlas)부족에서 나왔기 때문에, 징기스칸의 부계 자손이 아니면 즉위 할 수 없는 한(khan)의 지위에 들지 못하고, 징기스칸의 자손을 보호한다는 명목상의 한(khan)에 세워 스스로는 징기스칸의 자손과 결혼하여 왕가의 사위(아미르·큐레겐)의 자격을 기초로 지배의 정통화했다.
샤흐리사브즈(Shahrisabz)
티무르왕조의 치하에서는, 이 체제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여러가지의 전설도 만들어졌다. 연대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몽고의 트메네이·하안(『元朝秘史』의Tonbina Sechen Khan)에게는, 카츄리와 카불의 두 명의 아들이 있어 아버지의 트메네이는 남동생의 카불과 그 자손이 한 정도를 계승해, 형(오빠)의 카츄리와 그 자손은 한의 아래에서 행정과 군사를 맡도록(듯이) 정해 두 명에게 맹세를 실시하게 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 카불의 자손인 징기스칸가는 한으로서 즉위 할 권리를 가지지만, 카불의 자손인 티무르가가 선조의 맹세에 따라 행정과 군사의 전권을 잡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 발라스부의 티무르가는, 징기스칸가에 뒤잇는 고귀한 집안인 것이 주장되었다.
16 세기 초에 티무르왕조가 멸해진 후에도, 티무르가의 왕자 바부르(Babur, 1483-1530:재위1526-1530)는 인도로 옮겨 무굴제국(1526-1858)을 세웠으므로, 무굴제국으로서 계속되었다. 무굴제국에서도 발라스(Barlas)부는 징기스칸가와 대등하게 고귀한 가계로 취급되어 왕가의 정통성이 주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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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1162-1227:재위1206-1227)은 1201년 자다란 부족의 자무카(札木合, Jamuqa, ?-1206)를, 이어 타타르(Tatars)·케레이트(克烈, Kerait)부족을 멸하고 군제를 개혁한 뒤 다시 서방의 알타이 방면을 근거지로 하는 나이만부족을 무찔러 마침내 1204년 몽골 초원을 통일하였다.
즉위하던 해 국제(國制)인 씨족공동체를 해체, 새로이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제(千戶制)를 제국기반으로 삼았다. 또 천호나 백호(百戶)·십호(十戶)의 장(長) 자제 1만 명을 모아 케식텐(Keshigten:친위병)이라는 친위대를 결성하고 특권을 부여, 몽골유목군단의 최정예부대로 만들었으며 코릴타(Khurita)라 불리는 철저한 참여민주주의를 만들어 체제정비를 했다.
이듬해부터 서하(西夏)를 침공하고(1205, 1207∼1208, 1209∼1210), 1211년 이후 몽골족의 숙명적인 적 금(金)을 토벌, 그 수도인 중도(中都;지금의 北京)에 입성하였다(1215). 19년에는 이슬람세계의 패자(覇者) 호라즘국에 파견한 사절이 살해되자 서쪽정벌(西征)에 올라 자신은 오트랄(otrar)·부하라(Buhara)등의 도시를 공략하였고, 제베와 수부타이(Subtai, 速不台)가 인솔한 별군(別軍)은 호라즘국의 왕 무하마드(Ala ad-Din Muhammad II, 1200-1220)를 카스피해상의 섬으로 내몰아 굶어 죽게 하였다(1220). 또 카프카스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 출동, 러시아 각지의 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무찌르고(1223), 크림을 정복한 뒤 본군에 합류하였다. 본군은 앞서 발흐(Bactra)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Jalal ad-Din Mingburnu1220-1231)과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격파하였다(1221). 이런 과정에서 제국영토는 급격히 확대되었다. 그러나 혹서를 이기지 못해 철군을 결정, 차가타이·오고타이군과 합류하여 귀국하였다(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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