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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鏡道]1.하중부(河中府)는 지금의 길주(吉州)

한부울 2011. 3. 16. 17:53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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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鏡道]

1.하중부(河中府)는 지금의 길주(吉州)이고,

江西省(領十三府。一直隸州。一州。七十六縣)。

○吉安府(名吉州。領九縣)廬陵(高昌。附府)泰和(西昌)吉水(文江)永豐(陽豐)安福(平都)龍泉(泉江)萬安(遂興)永新(廣興)蓮花廳(琴水)永寧(勝業)-地輿名目(一十九省)

○平陽府(名平河。領一州。十縣)臨汾(白馬。附府)洪洞(禽昌)浮山(神山)岳陽(安澤)曲沃(沃國)翼城(北)太平(東敬)襄陵(乾壁)汾西([((巨-匚)@一)/((└@矢)*匕)]縣)鄉寧(北屈)吉州(耿州)-地輿名目(一十九省)


충청도 하중부(河中府)는 직산(稷山)

함경도 하중부(河中府)는 길주(吉州)

 

 


吉州

隋开皇十年(590年)置,治庐陵县(今江西育水县东北),唐永淳元年(682年)移治今江西省吉安市。因吉水得名。

唐辖境相当今江西省新干、万安两县间赣江流域及安福、永新等县地。

北宋初分东北部置临江军,属江南西路,辖境缩小。

元至元十四年(1277年)改为吉州路。

宋时在州南永和镇烧造的白、黑两种吉州窑,和宋末的碎器窑,均称佳品。

金明昌元年(1190年)改耿州置,治吉乡县(今山西吉县)。属河东南路。

辖境相当今山西省吉县、乡宁等县地。元至元二年(1265年)吉乡县省入州。

属晋宁路。

清雍正二年(1724年)升为直隶州,属山西省。

辖境扩至蒲县等地。

乾隆三十七年(1772年)降为散州,不辖县。属平阳府。

1912年改为吉县。


耿州,金天德三年(1151年)改慈州置,治吉乡县(今山西吉县)。辖境相当今山西省乡宁、吉县等县地。明昌元年(1190年)改为吉州。

 

 


河中府-撒馬爾罕

Sogdian: "Stone Fort" or "Rock Town"

Persian theories claim that Samarkand derives its name from the Old Persian asmara, "stone", "rock", and Sogdian kand, "fort", "town". Or more closely refers to the meaning: "SAMAR"-"Yard" and "KAND"-"Sugar Cubes" from Persian language.

제2차 고당전쟁 때는 고구려인들이 동맹세력을 찾기위해 이 곳에 머무르기도 했다

撒马尔罕(乌茲別克语:Samarqand)是中亞地區的歷史名城,也是伊斯蘭學術中心,現在是乌兹别克斯坦的舊都兼第二大城市、撒马尔罕州的首府,有人口40萬,現任總統伊斯拉木·卡里莫夫生於此城

Samar意为“肥沃”,qand意为“土地”,撒馬爾罕意为“肥沃的土地”;耶律楚材说:“寻思干者西人云肥也,以地土肥饶故名之.


歷史撒马尔罕建立于公元前3世纪的西汉时期。由于地处絲綢之路上中国和中东的交界處,使當地成為兩地貨物的交流地,並促使當地經濟繁盛。


《魏书》称为悉万斤,《隋书·西域记》称为康国,唐慧超《往五天竺国传》作康国,屬昭武九姓之一,唐杜环《经行记〉作康国、萨末建,《新唐书》称为康国、萨秣建,元耶律楚材《西游录》作寻思干,《长春真人西游记》作邪米思干,《元史》作薛迷思加,明陈诚《西域番国志》、《明史》、明严从简《殊域周咨录》均作撒马儿罕。


歷史

撒马尔罕曾經是花剌子模的首都。當年成吉思汗攻打撒马尔罕之時,8天後破城。

所以在撒马尔罕陷落之後,成吉思汗下令屠城。

和伊斯蘭教長有關係的五萬人可留在城內。

其他不出城的格殺勿論。

下令把十萬康里人處死,其他人用二十萬第納爾贖金免死。

这里人口多是說突厥語的塔吉克人(因「颯秣鞬」本即突厥語辞彙),唐時突厥化,苏联时乌兹别克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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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함길도 ⊙ 길주목(吉州牧)

사(使)가 1인이니,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겸하게 되고, 판관(判官)이 1인이니, 길주도 중익 병마(吉州道中翼兵馬)를 겸한다.

예전에는 삼해양(三海陽)이라 하였는데,【일명 해양(海洋)이라 한다. 】오랫동안 야인(野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 정해에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이 군사 17만 명을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장군(將軍)을 나누어 보내어서 지역의 경계를 획정(畫定)하여, 동쪽으로 화관령(火串嶺)까지, 북쪽으로 궁한령(弓漢嶺)까지, 서쪽으로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를 우리 나라의 강토(疆土)로 삼고, 화관산(火串山) 아래에 성곽(城郭) 9백 52간(間)을 쌓고 이름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복주(福州)’라고 하고,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9백 52간을 쌓고 이름을 ‘영주(英州)’라 하고, 궁한촌(弓漢村)에 6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길주(吉州)’라고 하였는데, 길주가 북쪽에 있고, 웅주가 남쪽에 있다. 3년 무자 2월에 또 공험진(公險鎭)에 성을 쌓고 이택(李澤)으로써 함주 대도독부사(咸州大都督府使)를 삼아서, 비로소 영주(英州)·복주(福州)·웅주(雄州)·길주(吉州)의 4주(州)와 공험진(公險鎭)의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윤관(尹瓘)이 북계(北界)에 여러 성(城)을 쌓고 남계(南界)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는데, 함주(咸州)를 ‘진동군(鎭東軍)’이라 하여 1만 3천 호(戶)를 두고, 영주(英州)를 ‘안령군(安嶺軍)’이라 하고, 웅주(雄州)를 ‘영해군(寧海軍)’이라 하여 각각 1만 호(戶)를 두고, 길주(吉州)·복주(福州)·의주(宜州)의 3주(州)에는 각각 7천 호(戶)를 두었고, 공험진(公險鎭)·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 3진(鎭)에는 각각 5천 호(戶)를 두었다. 4년 기축에 동계(東界)의 숭령진(崇寧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의 3진(鎭)과 영주(英州)·복주(福州)의 두 주성(州城)을 철폐하고, 또 함주(咸州)·웅주(雄州) 2주(州)와 선화진(宣化鎭)의 성(城)을 철폐하였다. 6년 신묘에 중성(中城)을 주(州)에 쌓고, 산성(山城)을 공험진(公險鎭)에 쌓았다. 공양왕(恭讓王) 2년 경오【명나라 홍무(洪武) 23년.】에 웅주(雄州)·길주(吉州) 등처에 관군민 만호부(管軍民萬戶府)를 두었으며, 본조 태조(太祖) 7년 무인에 길주목(吉州牧)으로 고쳤다. 예전에는 주치(州治)가 서지위(西之委)에 있었으나, 지금은 부서평(夫瑞坪) 남쪽으로 옮겼는데, 구치(舊治)와의 거리가 40리이다.

원산(圓山)【주의 북쪽에 있는데, 본주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는다. 】장덕산(長德山)【주의 동쪽에 있다. 】부서천(浮瑞川)【주의 서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78리, 서쪽으로 백두산(白頭山)의 내맥(來脈)인 대산(大山)에 이르기 90리인데, 갑산(甲山)과 접경(接境)이 되며, 남쪽으로 단천(端川) 마천령(磨天嶺)에 이르기 91리, 북쪽으로 경성(鏡城) 운가위(雲加委)의 대천(大川)에 이르기 89리이다.

호수가 1천 6백 73호요, 인구가 1만 4천 8백 19명이다. 군정은 익속군(翼屬軍)이 5백 7명, 수성군(守城軍)이 50명이다.

성(姓)이 2이니, 최(崔)·이(李)【대원(大元)에서 왔다. 】이다.

간전(墾田)이 1만 2천 8백 33결이요,【논은 다만 3백 35결이다. 】토의(土宜)는 오곡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곰가죽·아양사슴가죽·삵가죽[狸皮]·여우가죽·잇[紅花]·지초요, 약재는 곰쓸개·사향(麝香)·오미자·장군풀[大黃]·당귀(當歸)·인삼·방풍(防風)·복령·대왕풀[白芨]·택칠(澤漆)·붓꽃[馬藺花]·바디나물뿌리[前胡]이요, 토산(土産)은 사철(沙鐵)【주의 동남쪽 40리 되는 다신포항(多信浦項)의 바닷가에서 난다. 】·백반(白磻)【주의 동쪽 1백 리 되는 태진변(太津邊)의 석고(石庫)에서 난다. 】·녹반(綠磻)【주의 동쪽 5리 되는 별난대산(別難台山)에서 나는데, 하품이다. 】·담비가죽·서피[鼠皮]·족제비털·대구·연어·송어·황어·행어·방어·수이지어(愁伊只魚)·전복·다시마·미역·곤포(昆布)·느타리·석이(石茸)이다. 염분(鹽盆)이 27개요,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주의 남쪽 약수동(藥水洞)에 있고, 하나는 주의 동쪽 가차관동(加次串洞)에 있다.

읍성(邑城)【둘레가 1천 5백 66보(步)이다. 】다신산 석성(多信山石城)이 주의 남쪽에 있고,【이름을 강성(江城)이라 하며, 둘레가 1천 2백 보이다. 안에 군창(軍倉)이 있고, 못이 13이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아니한다. 】석성(石城)은 다신산(多信山)의 동남쪽 평지(平地)에 있고,【둘레가 7백 51보(步)이다. 】영평 고성(永平古城)이 주의 북쪽에 있다.【지극히 높고 험준하며, 둘레가 9백 75보(步)이다. 안에 큰 못이 1, 보통 못이 2, 작은 못이 1이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아니한다. 관사(官舍)의 옛터가 둘이 있는데, 섬돌과 주춧돌이 아직 남아 있고, 민가[私家]의 옛터가 1백 48이 있다. 】온천(溫泉)이 3이요,【하나는 주의 동북쪽 60리 되는 약수동(藥水洞)에 있고 하나는 주의 서남쪽 60리 되는 화통리(火㷁里)에 있고, 하나는 주의 북쪽 20리 되는 약수현(藥水峴)에 있다. 】역(驛)이 5이니, 임명(臨溟)·약수(藥水)·명원(明原)【우리 태조 7년 무인에 비로소 두었다. 】·영동(嶺東)【우리 태종 14년 갑오에 비로소 두었다. 】·웅평(雄平)【금상(今上) 4년 임인에 비로소 두었다. 】이다. 봉화가 9곳이니, 팔하(八下)【북쪽으로 경성(鏡城) 주촌(朱村)에 응하고, 남쪽으로 이마퇴(泥亇退)에 응한다. 】·이마퇴(泥亇退)【남쪽으로 장항(獐項)에 응한다. 】·장항(獐項)【남쪽으로 고점(古岾)에 응한다. 】·고점(古岾)【남쪽으로 약수(藥水)에 응한다. 】·약수(藥水)【남쪽으로 신읍(新邑)에 응하고, 북쪽으로 녹반암(綠磻巖)에 응한다. 】·녹반암(綠磻巖)【남쪽으로 산성(山城)에 응한다. 】·산성(山城)【남쪽으로 고영(古營)에 응한다. 】·고영(古營)【남쪽으로 기이동(岐伊洞)에 응한다. 】·기이동(岐伊洞)이다.【남쪽으로 단천(端川) 호례(好禮)에 응한다. 】해도(海島)가 2이니, 양도(羊島)【주의 동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20리다. 】·난도(卵島)【양도(羊島) 남쪽 60리에 있는데, 봄·가을에 안변(安邊) 관원으로 하여금 망제(望祭)를 지내게 한다. 뭇새들이 알을 낳아 기르는데, 읍(邑)의 사람들이 4, 5월 사이에 배를 타고 가서 알을 거둔다. 】이다.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1이니, 경원(慶源)이요, 군(郡)이 3이니, 단천(端川)·갑산(甲山)·경성(鏡城)이다.

【영인본】 5책 697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함길도 / 길주목 / 경원 도호부

○ 지리지 / 함길도 / 길주목 / 단천군

○ 지리지 / 함길도 / 길주목 / 갑산군

○ 지리지 / 함길도 / 길주목 / 경성군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길성현(吉城縣)

동쪽은 명천현(明川縣) 경계까지 10리, 북쪽은 명천현의 경계까지 32리, 남쪽은 바다까지 1백 27리, 서쪽은 단천군(端川郡) 경계까지 1백 19리, 서울까지는 1천 4백 64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점령되었다가,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을 보내어 군대 17만을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내고, 지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동쪽은 화관령(火串嶺)까지, 북쪽은 궁한령(弓漢嶺), 서쪽은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를 우리의 영토로 만들고, 궁한촌(弓漢村)에다 6백 70칸을 쌓고 길주(吉州)라고 이름 붙였다. 3년에 방어사(防禦使)을 두었고, 6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바로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와서 이 지역이 원(元) 나라에 편입되어 해양(海洋)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 삼해양이라고도 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註)에, “해양(海洋)은 땅 이름인데, 지금은 길주(吉州)에 있다. 해양에서 북쪽으로 50리를 가면 태신(泰神)이요, 태신에서 동쪽으로 60리를 가면 적알발(的遏發)이다. 해양ㆍ태신ㆍ적알발의 3개소에는 모두 맹안(猛安)이 있는데, 속설에 이것을 3해양(三海洋)이라 한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수복되었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길주등처관군민만호부(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하고, 영주(英州) 및 선화(宣化) 등의 진(鎭)을 모두 이 주(州)에 예속시켰다. 우리 왕조 태조(太祖) 7년에 길주목(吉州牧)으로 고쳤다가, 세조(世祖) 13년에 이시애(李施愛)가 이 주(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고, 예종(睿宗) 원년에 강등하여 현(縣)으로 만들어 현재의 명칭으로 고치고 주(州)의 북쪽인 영평(永平) 등의 지역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明川縣)을 설치하였다.

[산천]원산(圓山) 두리산(豆里山)이라고도 한다. 현의 서쪽 2백 95리에 있다. 동쪽에는 또 소두리산이 있다. 마천령(磨天嶺) 현의 서쪽 1백 30리에 있다. 장백산(長白山) 현의 서쪽 1백 16리에 있다. 경성부 항목에 상세하다. 성불산(成佛山) 현의 서쪽 45리에 있다. 도산(刀山) 현의 서쪽 44리에 있다. 장덕산(長德山)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설봉산(雪峯山) 현의 서쪽 72리에 있다. 바다 현의 동쪽 57리와 남쪽 1백 27리에 있다. 임명천(臨溟川) 현의 남쪽 62리에 있다. 근원이 덕만동(德萬洞)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부서천(浮瑞川)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근원이 두리산에서 나와 사하북(斜下北)에서 나오는 물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사하동천(斜下洞川) 현의 서쪽 6리에 있다. 부서천(浮瑞川)과 합류한다. 유진(楡津) 현의 남쪽 70리에 있다. 벌장포(伐長浦) 현의 남쪽 82리에 있다. 다신포(多信浦) 현의 동쪽 50리에 있다. 바로 부서천의 하류인데,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쌍포(雙浦) 현의 남쪽 78리에 있다. 상세한 것은 쌍개원(雙介院)의 주에 있다. 화통동 온천(火筒洞溫泉) 현의 서쪽 91리에 있다. 약수리 온천(藥水里溫泉)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대사동 온천(大寺洞溫泉) 현의 서쪽 45리에 있다. 건자개동 온천(乾者介洞溫泉) 현의 서쪽 13리에 있다.

[토산]사(絲)ㆍ삼[麻]. 철(鐵) 다신포에서 산출된다. 사향(麝香)ㆍ녹용(鹿茸)ㆍ영양(羚羊)ㆍ오미자ㆍ지치[紫草], 녹반(綠礬) 현의 북쪽 10리에서 산출된다. 꿀ㆍ인삼ㆍ대구[大口魚]ㆍ문어(文魚)ㆍ연어(鰱魚)ㆍ송어(松魚)ㆍ황어(黃魚)ㆍ은어[銀口魚]ㆍ고등어[古刀魚]ㆍ점복[鰒]ㆍ조개ㆍ홍합ㆍ홍어(洪魚)ㆍ삼치[麻魚]ㆍ방어(魴魚)ㆍ임연수어(臨淵水魚)ㆍ자해(紫蟹)ㆍ게ㆍ해삼(海蔘)ㆍ고리마(古里麻)ㆍ미역[藿]ㆍ곤포(昆布)ㆍ다시마[塔士麻]ㆍ해달(海獺)ㆍ수달(水獺)ㆍ섬소(蟾酥)ㆍ청서(靑鼠)ㆍ담비[貂]ㆍ화피(樺皮)ㆍ소금. 『신증』 홍화(紅花), 백토(白土) 서북쪽인 최세동(崔世洞)에서 산출된다. 송이, 사철(沙鐵) 서재동(西齋洞)에서 산출되는데, 주(州)의 서쪽 40리에 있다.

[불우]덕수암(德水庵) 옛적엔 향수사(香水寺)라고 하였다. 장수사(長壽寺) 모두 성불산(成佛山)에 있다. 복흥사(復興寺) 설봉산(雪峯山)에 있다.

[고적]옛 웅주[古雄州] 고려 예종(睿宗) 3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쫓아내어 화관령(火串嶺) 밑에다 성을 쌓고, 행랑(行廊) 9백 92칸을 짓고 영해군 웅주 방어사(寧海軍雄州防禦使)를 설치했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지역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수복되어 공양왕(恭讓王) 2년에 길주(吉州)에 병합되었다. ○ 《고려사(高麗史)》에는, “길주(吉州)는 북쪽에 있고, 웅주(雄州)는 남쪽에 있다.” 하였으나,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옛 영주[古英州] 윤관(尹瓘)이 여진을 쫓아내고 몽라골령(蒙羅骨嶺) 밑에 성을 쌓고 행랑 9백 90칸을 짓고, 안령군 영주 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를 설치했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여진에 돌려주었다. 공민왕 때에 수복되어 공양왕 2년에 길주(吉州)에 병합시켰다.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 윤관(尹瓘)이 병마령할(兵馬鈴轄)인 임언(林彦)을 시켜 그 사실을 기록하여 영주(英州) 관청의 벽에 써 붙이게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맹자(孟子)》에, ‘약한 것은 진실로 강한 것을 대항하지 못하며, 작은 것은 진실로 큰 것을 대항하지 못한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오래전부터 외우고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 그 뜻을 확신하였다. 여진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강약과 다소의 실정이 뚜렷이 다른데도 우리의 변경을 넘보아 오다가, 숙종(肅宗) 10년에 틈을 타서 난리를 일으켜 우리의 군대와 백성을 많이 죽였으며, 그중에 잡혀 노예가 된 자도 많았다. 숙종께서는 군대를 정돈하여 대의(大義)를 내세워서 이를 토벌하려다가 아깝게도 그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영원히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임금께서 왕위를 이어 받들어 3년상을 다 마치고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한 부락이었다. 개마산(蓋馬山)의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우리에게 조공 받치는 직무를 닦아오면서 우리 선왕의 은택을 깊이 받아 왔었다. 그런데 하룻동안에 배반하여 무도한 짓을 자행하였으므로, 아버지께서는 매우 이를 분하게 여기셨다. 일찍이 들으니, 옛 사람이 큰 효도라고 하는 것은 어버이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지금 다행히 3년상을 다 마치고 처음으로 국사를 담당하게 되었으니, 정의의 깃발을 들고 무도한 놈을 쳐부셔서 선왕의 수치를 한꺼번에 씻어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곧바로 수사도 중서시랑 평장사(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서, 정예 군대 30만 명을 거느리고 토벌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니 윤공은 업적이 뚜렷하였다. 그는 일찍이 유신(庾信)씨를 사모하여 이르기를, ‘유신(庾信)은 6월에 강물이 얼어서 삼군(三軍)을 건너게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니라 지극한 정성뿐이다. 나는 또한 어떠한 사람인가.’ 하였는데, 그의 지극한 정성으로 감동되어 신비하고 기이한 행적이 여러 번 알려졌었다. 오공(吳公)은 현재 중요한 명망을 가진 분이다. 성격이 삼가며 조심하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신중히 생각하여 그의 좋은 계책과 큰 계획은 실시하여 잘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두 분은 일찍부터 이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임금의 명령을 듣고 분개하며 격려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갔다. 군대가 출발하는 날에 직접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여러 사람들에게 맹세를 선포하기도 전에 눈물이 솟아나 턱으로 흘러내렸다. 이를 본 사람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미 적의 지역에 들어서자 삼군(三軍)이 힘을 내어 소리치며 들어가니, 한 사람이 백 명을 당해 낼 수 있었다. 마른 가지를 꺾으며 대[竹]를 쪼개는 것보다도 더 쉽게 되어, 머리를 베인 수가 6천여 명이며, 활과 화살을 싣고 진 앞에 나와서 항복한 자가 5천여 명이었고, 우리의 기세를 바라보고는 넋을 잃고 극북(極北) 지역으로 도망쳐버린 자 역시 헤아릴 수 없었다. 아아, 여진은 우둔하며 어리석어서 강하고 약함과 많고 적음의 정세를 헤아리지 않고 멸망을 스스로 이렇게 불러들였도다.

이 지방은 3백 리인데 동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북은 개마산(蓋馬山)이 사이에 놓였고, 남쪽은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연접되었다.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우리의 백성을 안주시킬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고구려의 소유였으므로 그 옛적에 세운 비석(碑石)과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대개 고구려가 과거에 잃었던 것을 지금 임금께서 뒤에 와서 찾았으니, 어찌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여기에다 새로 여섯 곳의 성을 설치하였는데, 첫째는 진동군 함주대도독부(鎭東軍咸州大都督府)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1천 9백 48호이고, 둘째는 안령군 영주 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1천 2백 38호이고, 셋째는 영해군 웅주 방어사(寧海軍雄州防禦使)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1천 4백 36호이고, 넷째는 길주 방어사(吉州防禦使)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6백 80호이고, 다섯째는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6백 32호이며, 여섯째는 공험진 방어사(公嶮鎭防禦使)인데, 군대와 민간인이 5백 32호이다. 그들 중에서 관직이 있고 훌륭한 역량이 있어 그 책임을 맡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그 지방을 진무시키기로 하였다. 이것은 《시경(詩經)》에 이른바, ‘여기에서 울타리가 되며 여기에서 임금의 교화를 펴서 왕실을 보호한다.’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편하게 베개를 높이 베고 동쪽 지역에 대한 걱정이 없게 되었다. 원수가 나에게 이르기를, ‘옛적에 당(唐) 나라의 정승인 배진공(裵晉公)이 회서(淮西)에 출정하여 그곳을 평정하고, 막객(幕客)인 한유(韓愈)가 여기에 비문을 지어서 그 사실을 널리 전하였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이 헌종(憲宗)의 영걸함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덕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의 덕을 노래하며 칭송하였다. 이제 그대가 다행히 이 일에 참가하여 그 전말을 상세히 아니, 이를 기록하여 우리 임금께서 과거에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위대한 업적을 영원한 후대까지 전하게 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임언은 명을 받고 붓을 들어 이렇게 기록한다.” 하였다.

옛 선화진[古宣化鎭] 이것도 윤관(尹瓘)이 설치한 것이다. 예종(睿宗) 4년에 성을 철수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수복하여 길주(吉州)에 병합하였다. 다신산성(多信山城) 현의 남쪽 31리에 있는데 강성(江城)이라고 부른다. 둘레가 1만 5천 75척, 높이 16척이다. 안에 못이 10개가 있다. 옛적에는 군창이 있어서 식량을 많이 저장했었는데, 이시애(李施愛)의 군대가 패할 때에 태워버리고 갔다. 산 아래에 또 돌로 쌓은 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8백 5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는데, 속칭 오포성(吾布城)이라고 부른다. 소파온 고성(所波溫古城) 현의 남쪽 89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2천 20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산성(山城) 현의 남쪽 3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4백 5척, 높이 8척이다. 지금은 반쯤 허물어졌다. 태신 고성(泰神古城) 현의 남쪽 51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3천 1백 27척이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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