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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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道]
7.요동진(遼東鎭)은 의주(義州)이고,
盛京省(領二府。四州。八縣。轄寧古塔。黑龍江)。
○錦州府(名遼西。領二州。二縣)錦縣(名徒河附郭)寧遠州(集寧)廣寧縣(險[泳-永+實])義州(同昌)岫巖城(新[言*受])-地輿名目(一十九省)
임하필기에서 말한 요동(遼東)이라고 하는 것은 어딘지 확실하지 않는 요를 기준으로 분명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을 나누었을 것인데 그에 따른 요동(遼東)을 말한 것으로서 금주부(錦州府-名遼西)는 분명 요서(遼西)임을 알 수 있고 그 위치 가까운 곳에 의주(義州)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청사고지리지나 대륙재편25사에서는 요서(遼西)에 있었을 금주부(錦州府)를 요동(遼東)으로 한정짓고 지금 북경주위에 위치 한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지금 알고자 하는 성경성과 봉천성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과 봉천은 금주와 함께 위치하여야 하고 요서에 위치하여야 함을 알 수 있다.
《한서》에 조선강역을 기록한 것을 보면 구이(九夷)가 점점 성하여 중국에 들어가 사는 자가 있자, 이때부터 유주와 영주 땅은 다시 동이가 사는 곳이 되었다. 주(周)의 초기에 단군의 세대가 쇠하고 기자가 다시 그 땅에 봉해졌으니, 요서(遼西)인 지금의 의주(義州)ㆍ광녕(廣寧)으로부터 요동 전 지역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그 강역이었다 한 기록이다.
요서(遼西)가 조선의 강역이라 했으니 금주부(錦州府)를 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난다.
청사고지리지나 25사는 1912년경부터 편집되어 그들 마음대로 지명 이동시켰을 가능성이 있어 그에 의거한 현재 위치는 별 의미가 없다고 보여져 위치도를 올리지 않았다.
錦州府,清康熙四年(1665年)改廣寧府置,治錦縣(今遼寧錦州市)。
光緒時轄境約今遼寧省錦州、北寧、黑山、綏中、興城、台安、葫蘆島、義縣等市縣地。屬奉天省。1913年廢。
錦州市
历史沿革
锦州历史悠久。据考古发掘证明,自远古以来,锦州这块土地上就有人类劳动生息,历代相传,人烟不绝,并与中原文化有着密切联系。
夏、商、周奴隶社会时期,这里属冀、幽二州地。
春秋时期属燕地,战国时属燕辽西郡地。
秦、西城市景点照片(11张)汉时分属辽西、辽东郡地,东汉时大部属辽东属国。
三国时属幽州昌黎郡地,晋代属平州昌黎郡地。
隋代时西部属柳城(今朝阳)郡地,东部属燕郡地城市景点照片2(20张)。
唐代初属营州(今朝阳)总管府辖,后属安东都护府辖,废府后归平卢节度使辖。辽代分属中京道和东京道辖。
公元911-926年,辽太祖耶律阿保机“以汉俘建锦州”,锦州之名始于此时。
金代改辽道制为路制,当时属北京路辖,元代分属大宁路和广宁府路辖。
明代建军卫制,下设卫所,当时置广宁卫,广宁前、后、左、右、中(今锦州)屯卫,以及义州卫、宁远卫,先属辽东都指挥使司,后属辽东巡抚辖。
清康熙元年并广宁中、左、右、三屯卫为锦县;康熙三年设广宁府,不久撤销;康熙四年设锦川府。
中华民国成立后废府设县,当时各县属奉天省辽沈道辖;1928年废除道制,
1929年省改名辽宁,当时各县直隶辽宁省:
1931年“九·一八”事变后,各县皆属伪奉大省;1934年设锦州省,管辖各县;
1937年口伪政权施行市制,始设锦州市,中县分治,伪省、市、县公署皆驻锦州。抗日战争胜利后,共产党曾一度建立辽西专员公署和锦州市政府。
1948年10月锦州解放后,属热河省热东专署辖,
1949年1 月成立辽西省,省政府驻锦州;
1954年8 月辽东辽西省合并为辽宁省,锦州市为省辖市,以后两次成立锦州专区, 1968年专区撤销后实行市领导县体制至今。
1968年專區撤銷後成為遼寧省的一個地級市
薊山紀程卷之二
渡灣
○癸亥十二月 初七日 戊辰
낮에 흐리고 바람이 붐. 유하보(流河堡) 4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대황기보(大黃旗堡) 32리를 가서 묵었다.
주류하(周流河)
一名距流河。古之遼水也。箕子受封於周國。河爲界。又公孫淵屯兵自固。司馬懿潛師渡其北者卽此河。而唐太宗東征時。鋪土作橋云。過河二里。又渡一小水。卽河之支流。或曰。自此分遼野東西。万曆間。築河堡。而今則築城於舊址。城內有驛丞治之。河以西。屬錦州廣寧縣。
일명 거류하(距流河)라고 하는데 옛날의 요수(遼水)다. 기자(箕子)가 주(周) 나라에서 봉지(封地)를 받았는데 주류하를 경계로 획정했다. 또 공손연(公孫淵)이 군대를 주둔시켜 자기 세력을 굳혔는데 사마의(司馬懿)가 그 북쪽으로 건너갔다고 하는 곳이 곧 이 강이다.
그리고 당 태종(唐太宗)이 동정(東征)할 때 흙을 깔아서 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강을 지나 2리 되는 곳에 또 작은 물 하나를 건넜는데 곧 이 강의 지류(支流)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곳에서부터 요(遼)의 들판이 동서(東西)로 나뉜다.’ 한다. 만력(萬曆) 연간에 강의 보루를 구축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다 성을 쌓았다. 성안에는 역승(驛丞)이 있어 그곳을 다스린다. 강에서 서쪽은 금주(錦州) 광녕현(廣寧縣)에 속한다.
水口風花細皺紋 나루터 바람 물결무늬가 아름답고
一天如蓋漭無垠 온 하늘 뚜껑같이 아득하고 끝이 없다
派沈太子河頭石 물줄기는 태자하 가의 돌을 파묻고
泡滅公孫壘上雲 물거품 공손 보루 구름 삼킨다
散地村閻紅返照 흩어져 있는 촌락 반조가 붉은데
匝城杞柳翠橫分 성 둘러싼 구기 버들 푸르름 갈랐다
伊州怨女尋何夢 이주의 원녀가 무슨 꿈을 찾고 있어
翻怕流鶑曉枕聞 꾀꼬리 우는 소리 새벽 베개에 들릴까 두려워하겠지
동사강목 부록 하권
발해국 군현고(渤海國郡縣考)
《문헌통고》에,
발해는 바로 고구려의 옛땅 곧, 영주(營州)의 2천리인데, 남쪽으로 신라에 접하여 이하(泥河)로 경계를 하였으며 -아마 지금의 덕원(德源)인 듯하다.-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거란(契丹)이다.”
하였다.
○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에는,
“발해국의 남해(南海)ㆍ부여(扶餘)ㆍ책성(柵城)ㆍ압록(鴨綠) 등 4부(府)는 모두 고구려의 옛땅이다. 신라의 정천군(井泉郡)-지금의 덕원(德源)-으로부터 책성부(柵城府)에 이르는 거리는 대범 39역(驛)이다.”
하였다.
【안】 당의 제도에서 30리에 역을 두었으니 39역은 곧 1천 1백 70리가 된다. 지금 《당서》로 주본을 삼고 《성경지》로 주를 달되, 《당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성경지》로 보충하고, 그 중에 미상한 것은 궐하였으니 그 대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에 의하면, 그 나라에는 5경(京), 15부(府), 62주(州)가 있었다.
○ 숙신(肅愼)의 옛땅으로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지금의 혼동강 서쪽에 있다. 를 삼아 용주(龍州)지금은 미상ㆍ호주(湖州)ㆍ발주(渤州)이상 2주(州)는 모두 지금의 영길주(永吉州) 땅이다.
○ 주 안에는 또 무창(武昌)ㆍ정무(定武) 등 2현(縣)이 있는데 발해(渤海)가 설치한 것이다.
등 3주(州)를 거느렸다.
○ 그 남쪽으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지금의 광녕(廣寧)ㆍ의주(義州) 지경이다. 를 삼아 노주(盧州)지금의 개평(蓋平)ㆍ영해(寧海) 지경이다.
발해(渤海)-발하슈호이다.
The present name of the lake originates from the word "balkas(발카스)" of Tatar, Kazakh and Southern Altai(남알타이) languages which means "tussocks in a swamp(늪 풀숲)".
발해(渤海) 시원지라고 판단되는 발하슈호Lake Balkhash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라고 하면서 세운 나라 대신국(大辰國), 또는 대진국(大震國/大振國)이라 칭하였으나 이후 발해(渤海)로 바꾸었다.
발해의 어원은 바다 해(海)를 발(originates)하는 뜻이 강하다.
발하슈호(巴爾喀什湖 :Lake Balkhash)
古稱夷播海
발하슈호를 옛날에 칭하던 이파해(夷播海)는 이(夷)족을 퍼뜨리는 바다란 뜻이다.
즉 근원지란 말이다.
파(播)뿌리다-파 1. 퍼뜨리다. 전파하다. 방송하다.
발하슈 호는 아랄 해 다음으로 큰 호수로 카스피 해와 아랄해를 포함하는 분지의 일부이다.
발해(渤海)
大荒西經云 : 西海之南, 流沙之濱, 有大山, 名曰昆侖之丘..
海內西經云 : 河水出東北隅, 以行其北, 西南又入渤海.. 又出海外, 即西而北, 入禹所導積石山.
是山海經有西海.. 亦名渤海, 漢時謂之蒲昌海..
説文 : ' 泑澤, 在昆侖虚下'.. 即蒲昌海也, 亦謂之西海..[尚書今古文注疏002권-虞夏書·皋陶謨第二中]
대황서경(大荒西經)이 이르기를 : 서해(西海)의 남쪽과 류사(流沙)의 끝에는 큰 산이 있으니, 이름은 곤륜(昆侖)의 언덕이다.
해내서경(海內西經)이 이르기를 : 하수(황하)의 상류는 (곤륜산) 동북쪽 모퉁이에 나와 흐르며, 그 북쪽으로 운행하고, 서남쪽으로 또 발해(渤海)에 흘러들어간다..
또 해외에서 나와 흐르며, 즉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꺾어 흐르고, 우(禹) 임금이 소도하는 적석산(積石山)으로 흘러들어간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서해가 있으니 옳다. 역시 이름은 발해(渤海)이라고 하고, 한나라(漢) 당시 포창해(蒲昌海)이라고 불렸다.
설문(説文)에 따르면 : 유택(泑澤)은 곤륜산(昆侖山)의 틈 아래에 위치한다.
즉 포창해(蒲昌海)이다. 역시 서해(西海)이라고 한다.
따라서 포창해(蒲昌海)는 발해(渤海)이며, 서해(西海)이라고 했다.
蒲昌海 : 今罗布泊的古称,又称盐泽。
발해(渤海)는 애초부터 현재 한반도(韓半島)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바다가 아니었고 현 감숙성(甘肅省) 서북부의 돈황(敦煌) 구역에 접하는 지명이었다.
括地志云 : 蒲昌海一名泑澤, 一名鹽澤, 亦名輔日海, 亦名穿蘭, 亦名臨海, 在沙州西南.. 玉門關在沙州壽昌縣西六里.(大苑列傳)
다 상세한 기록을 근거로 하여 발해(渤海)의 위치를 찾아보면 사주(沙州 : 敦煌)의 서남쪽에 위치하는 유택(泑澤)이며 염택(鹽澤)이라고 했다. 재미있게도 발해(渤海)의 또 다른 이름인 임해(臨海)가 포창해(蒲昌海)에 해당하고 있다.[우리역사의 비밀-玄朝.2010.10.05]
동사강목 부록 하권
고구려강역고(高句麗疆域考)
《당서》에는,
“동쪽은 신라에 접하고, 남쪽은 백제에 접하고, 서북쪽은 요하를 건너 영주(營州)에 접했다.”하였는데,
【안】 당(唐)의 영주는 지금의 성경(盛京)인 금주(錦州)이다.
《성경지》를 상고하면,
“의주(義州) 광녕(廣寧) 이동, 개원(開原) 이남의 요동 전역이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다.”하였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요동군고(遼東郡考)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제 환공(齊桓公)이 산융(山戎)을 치려 할 때에 관중(管仲)의 말에 따라 요수(遼水)를 건넜다.”
하였으니, 요(遼)라는 이름이 있은 지 오래다. 먼 옛날에는 동이(東夷)의 땅이었기 때문에 우(禹)의 발자취가 우갈석(右碣石)에 이르렀으며,
“도이(島夷)는 피복(皮服)을 바쳤다.”
하였는데, 도이는 우리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이므로 그 형상이 섬[島]과 같기 때문이다. 《한서》에 또,
“조선은 바다 가운데 있으니, 월(越)의 상(象)이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순(舜)의 덕교(德敎)가 퍼짐에 이르러 동이(東夷) 중에 귀화한 자가 더욱 많았다. 그러므로 기주(冀州) 동북의 땅으로 유주(幽州)를 삼았으니 지금의 요하(遼河) 이서가 바로 그곳이요, 청주(靑州) 동북 바다 건너의 땅을 영주(營州)로 삼았으니 지금의 요하 이동이 바로 그곳이다. 2주(州)를 설치한 것은 대개 이맥(夷貊)을 붙잡아 매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상(夏商) 적에 구이(九夷)가 점점 성하여 중국에 들어가 사는 자가 있자, 이때부터 유주와 영주 땅은 다시 동이가 사는 곳이 되었다.
주(周)의 초기에 단군의 세대가 쇠하고 기자가 다시 그 땅에 봉해졌으니, 요서(遼西)인 지금의 의주(義州)ㆍ광녕(廣寧)으로부터 요동 전 지역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그 강역이었다. 중국의 지리지를 상고하면 알 수가 있다.
同昌縣 西晉置,唐沒入吐魯番,后收复,又廢,故治在今甘肅文縣西徼外。
南朝梁置平川縣,北周改曰同昌,隋又改為歸仁,故治在今四川巴中縣江。
遼置,元廢,故治在今遼宁省義縣北。[中國古代地名大詞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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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의주목(義州牧)
사(使) 1인. 본도 중익 병마(本道中翼兵馬)를 겸한다. 판관(判官) 1인. 역시 중익 병마를 겸한다. 역학 훈도(譯學訓導) 1인.
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 또는 화의(和義)인데, 문종(文宗) 8년 갑오【송나라 인종(仁宗) 지화(至和) 원년.】에 글안(契丹)이 비로소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였다가 포주(抱州)로 고쳤고, 예종(睿宗) 12년 정유【송나라 휘종(徽宗) 정화(政和) 7년.】에 여진(女眞)이 요(遼)를 쳐서 차지하매,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도통(都統) 야률영(耶律寧) 등과 더불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도망해 와서 우리 영덕성(寧德城)에 이문(移文)하여, 내원(來遠)·포주(抱州)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순하므로, 우리 군사가 그 성(城)에 들어가서 병장(兵仗)과 전곡(錢穀)을 수습하니, 왕이 기뻐하여 포주(抱州)를 고쳐서 의주 방어사(義州防禦使)로 삼고, 남계(南界)의 인민들을 추쇄(推刷)하여 이를 채워서, 압록강으로 경계를 하고 관방(關防)을 두었다. 고종(高宗) 8년 신사【송나라 영종(寧宗) 가정(嘉定) 14년.】에 함신(咸新)으로 고치고, 공민왕(恭愍王) 15년 병신【순제(順帝) 지정(至正) 19년.】에 의주 방어사(義州防禦使)로 승격시켜 목(牧)으로 삼았고, 18년 기유【명나라 홍무(洪武) 2년.】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어 좌정(左精)·우정(右精)·충신(忠信)·의용(義勇)의 4군(軍)을 설치하고, 상·부천호(上副千戶)가 이를 주장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2년 임오에 비로소 판관(判官)을 두었고, 무자년에 정주(靜州)와 위원진(威遠鎭)을 내속(來屬)시켰다.
대천(大川)은 압록강(鴨綠江)이다.【주(州) 서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삭주(朔州)에 이르기 97리, 서쪽으로 압록강 암림곶(暗林串)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인산(麟山)에 이르기 23리, 북쪽으로 압록강에 의거한다.
호수가 5백 31호, 인구가 1천 4백 98명이며, 군정(軍丁)은 익군(翼軍)이 3백 36명, 수성군(守城軍)이 21명이다.
입진성(入鎭姓)이 1이니, 장(張)【화령(化寧). 】이요, 위원(威遠)의 입진성(入鎭姓)이 5이니, 백(白)【배주(白州). 】·임(任)·유(柳)·노(盧)【풍주(豊州). 】·서(徐)【광양(光陽). 】이며, 정주(靜州)의 입진성(入鎭姓)이 5이니, 김(金)【연안(延安). 】·윤(尹)·김(金)【평산(平山). 】·김(金)【김해(金海). 】·조(趙)【충주(忠州). 】이다.
간전(墾田)이 7천 1백 78결이다.【논은 겨우 20결이다. 】땅이 많이 메마르며,【압록강 가는 땅이 기름지다. 】기후는 차고, 풍속은 사냥의 이(利)를 좋아한다. 토의(土宜)는 기장·피·콩·보리·뽕나무·삼[麻]·닥나무·왕골이요, 토공(土貢)은 여우가죽·삵가죽·수달피·옻·지초이며, 약재(藥材)는 검화뿌리껍질[白蘚皮]·시호(柴胡)·흰바곳[白附子]·궁궁이[芎藭]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주(州) 동쪽 횡산리(橫山里)에 있다.【하품이다. 】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2천 8백 20보(步)이며, 안에 우물과 샘이 많다. 】관(館)이 1이니, 의순(義順)이다. 관방(關防)이 14곳이니, 내량직사(內梁直四)·구룡연(九龍淵)·삼기오강(三岐吾江)·의순관 서구자(義順館西口子)·십고동중(十庫洞中)·수구(水口)·방산(方山)·금동전동중(金同田洞中)·청수(淸水)·여타탄중(驢駝灘中)·구령(仇寧)·검동도(儉同島)·암림곶(暗林串)·미륵당(彌勒堂)이요, 봉화가 6곳이니, 성내(城內)의 통군정(統軍亭)【동쪽으로 수구(水口)에 응하고, 남쪽으로 위원(威遠) 고성(古城)에 응한다. 】·수구(水口)【동쪽으로 금동전동중에 응한다. 】·금동전동중(金同田洞中)【동쪽으로 여타탄중에 응한다. 】·여타탄중(驢駝灘中)【동쪽으로 연평(延平)에 응한다. 】·연평(延平)【동쪽으로 창성(昌城) 갑파회(甲波回)에 응한다. 】·위원 고성(威遠古城)【남쪽으로 인산(麟山) 도산(刀山)에 응한다. 】이다.
관할[所領]은 목(牧)이 1이니, 정주(定州)요, 군(郡)이 7이니, 인산(麟山)·용천(龍川)·철산(鐵山)·곽산(郭山)·수천(隨川)·선천(宣川)·가산(嘉山)이요, 현(縣)이 1이니, 정녕(定寧)이다.
【영인본】 5책 688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평안도 / 의주목 / 정주목
○ 지리지 / 평안도 / 의주목 / 인산군
○ 지리지 / 평안도 / 의주목 / 용천군
○ 지리지 / 평안도 / 의주목 / 철산군
○ 지리지 / 평안도 / 의주목 / 곽산군
○ 지리지 / 평안도 / 의주목 / 수천군
○ 지리지 / 평안도 / 의주목 / 선천군
○ 지리지 / 평안도 / 의주목 / 가산군
○ 지리지 / 평안도 / 의주목 / 정녕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의주목(義州牧)
동쪽은 삭주부(朔州府) 경계까지 1백 16리, 귀성부(龜城府) 경계까지 82리이고, 남쪽은 용천군(龍川郡) 경계까지 60리, 같은 군의 경계에 있는 양책관(良策館)까지 66리, 철산군(鐵山郡)경계까지 79리이고, 서쪽은 압록강(鴨綠江)까지 14리이고, 북쪽은 같은 강까지 2리이며, 서울에서는 1천 1백 86리 떨어져 있다.
[건치연혁]본래 고려의 용만현(龍灣縣)인데, 화의(和義)라고도 불렀다. 처음에는 거란(契丹)이 압록강 동쪽 기슭에 성을 두고 보주(保州)라고 일컬었고, 문종 때에 거란이 또 궁구문(弓口門)을 설치하고 포주(抱州) 일명 파주(把州). 라고 일컬었는데, 예종 12년에 요(遼)의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도통(都統) 야율녕(耶律寧) 등과 금(金)의 군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 도망해 와서 우리 영덕성(寧德城)에 문서를 보내어 내원성(來遠城) 및 포주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속하므로 우리 군사가 그 성에 들어가서 병기ㆍ돈ㆍ곡물을 수습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의주 방어사(義州防禦使)로 고치고 남계(南界)의 인호(人戶)를 덜어다가 채워서 그제서야 다시 압록강으로 경계를 하고 관방(關防)을 두었다. 인종 4년에 금(金)이 또한 주(州)를 가지고서 귀속하였다. 고종 8년에는 반역하였으므로 낮추어서 함신(咸新)이라고 일컬었다가 곧 옛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공민왕 15년에 승격해서 목(牧)으로 하였고, 18년에 만호부(萬戶府)를 두어 좌정(左精)ㆍ우정(右精)ㆍ충신(忠信)ㆍ의용(義勇)의 4군(軍)을 설치하고, 각각 상천호(上千戶)ㆍ부천호(副千戶)를 두어 관장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 2년에 비로소 판관(判官)을 두고 정주(靜州)와 위원진(威遠鎭)으로 내속하고, 세조 때에 진(鎭)을 두었다.
[풍속]풍기(風氣)가 굳세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사냥[畋獵]을 좋아한다. 지지(地志).
[형승]압록강이 천연적인 도랑을 이루고 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낙랑(樂浪)이 지경을 나누었다. 기순(祁順)의 시에서.
[산천]송산(松山) 주에서 동으로 30리 떨어져 있는 진산이다. 미라산(彌羅山) 주에서 남으로 1백 리 떨어져 있다. 본래는 용천군의 땅이었는데, 성화(成化) 12년에 갈라 주에 붙였다. 어전(魚箭 고기 잡는 기구, 통발)이 2군데 있는데, 하나는 용천군 사자도(獅子島)의 남쪽에, 하나는 북쪽에 있다. 염분(鹽盆)이 2군데 있다. 백마산(白馬山) 주에서 남으로 30리 떨어져 있다. 민간에 전하기를 흰 용마(龍馬)가 나와서 논 까닭에 이름지었다고 한다. 마두산(馬頭山) 주에서 남으로 80리 떨어져 있다. 화엄산(華嚴山)ㆍ천마산(天磨山) 모두 고정녕(古定寧)의 북쪽에 있는데, 주에서 1백 50리 떨어져 있다. 천마산은 삭주(朔州)에 또 나온다. 판막현(板幕峴) 주에서 동북으로 1백 16리 떨어져 있다. 가두등현(加豆等峴) 주에서 동으로 50리 떨어져 있다. 진병곶(鎭兵串) 주에서 남으로 50리 떨어져 있다. 바다 주의 남쪽에 있다. 구룡연(九龍淵) 주에서 북으로 8리 떨어져 있다. 못의 남쪽에 토성(土城) 터가 있는데, 둘레가 6백 척이다. 민간에 전하기를, 합단(哈丹)ㆍ지단(指丹) 형제 중 한 사람은 못 위에 있는 토성에 살고 있으며, 한 사람은 주성(州城) 안에 살고 있는데, 정주 호장(戶長) 김유간(金裕幹)이 꾀로써 쫓아내려고 거짓말로, “우리나라가 어느 날 밤에 너희들을 섬멸하려고 한다.” 하고, 그 밤에 이르러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설치해 놓고서 보게 하였더니, 합단 등이 그럴 듯하다 하여 곧 성을 비우고 강을 건너 도망하였다. 그러나 강 위에는 타고 건너갈 배가 없었으므로 김유간이 마음에 이상히 여겨 자세히 보니 강 북쪽 근변에 철우(鐵牛)를 잠겨[沈] 세우고 또 쇠사슬로 남쪽 강가의 바윗돌 사이에 고정시키니 그 소의 등[背]을 부교(浮橋)로 삼아 건너는 것이었다. 김유간이 곧 다리를 파괴하여 다시 건너오지 못하도록 하였고, 영락(永樂) 무자년에 주성(州城)을 쌓을 때에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 쇠사슬을 건져서 성문(城門)의 자물쇠[鎖鑰]를 만들고, 그 철우는 못의 모래 속으로 침몰되었으므로 다시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신룡(神龍)이 진인(眞人)과 같으니 그 변화를 어찌 측량할 수 있으랴. 하늘을 오르내리기 일순간인데, 이 창산(蒼山) 곁에 자리잡았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가득한 푸른 물은 몇 백 길이뇨, 옥거울이 티끌 받아들이지 않았네. 신물(神物)이 정말 그 속에 있음직하니, 때때로 못 가운데 하얀 기운 있네. 영단(靈壇)을 물가에다 누가 쌓았나, 북 치고 춤추며 빌기를 지금껏 하네. 굴원(屈原)처럼 구가(九歌)를 짓지 못해 한스럽구나, 물속에 어린옥(魚鱗屋)만 보일 뿐일세.” 하였다. 압록강(鴨綠江) 주의 서북쪽에 있는데, 마자(馬訾) 또는 청하(靑河) 또는 용만(龍灣)이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요동도사(遼東都司)와 거리가 5백 60리며, 그 근원은 만주(滿洲) 땅의 백두산에서 나오고, 수백 리를 남으로 흘러서 함경도의 갑산(甲山)ㆍ삼수(三水)를 거쳐 본도의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ㆍ자성(慈城)을 지나서, 강계(江界)와 위원(渭源)의 지경에 이르러 독로강(禿魯江)과 합치고, 이산군(理山郡)의 산양회(山羊會)에 이르러 포주강(蒲洲江 근원이 건주위(建州衛)에서 나왔다.)과 합치고, 아이보(阿耳堡)에 이르러 동건강(童巾江)과 합치고, 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소삭주(小朔州)를 거쳐서 주의 북쪽에 있는 오적도(於亦島)의 동쪽에 이르러 3파로 나뉘어서, 하나는 남으로 흘러 맴돌아 모여서 구룡연이 되는데 이름이 압록강이다. 그 물빛이 오리의 머리같이 푸르므로 이름 지었고,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그 가운데로 흐르므로 소서강(小西江)이라 하였다.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하나로 합쳤다가 수청량(水靑梁)에 이르러 또 두 가닥으로 나뉘어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 압록강의 서북쪽에 있다.)과 합치고 하나는 남으로 흘러 대강(大江)이 되고, 위화도(威化島)를 둘러 암림곶(暗林串)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흘러 미륵당(彌勒堂)에 이르고 다시 적강과 합쳐서 대총강(大摠江)이 되어 서해(西海)로 들어간다.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여진(女眞)이 사는 곳에 압록강이 있다.” 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천하에 세 군데에 큰 강이 있으니 황하(黃河)ㆍ장강(長江 양자강(楊子江))ㆍ압록이라 하는데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 《송사(宋史)》에, “고려가 압록강으로 한계를 삼았다. 강의 넓이가 3백 보이고, 그 동쪽에는 바닷물이 맑아서 열 길 물속이 내려다 보이고, 동남쪽으로는 명주(明州)와 바라보이며 물이 다 파랗다.” 하였다. 대명(大明)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시에, “압록강 맑은 물이 봉토(封土)의 한계를 그었는데, 폭력(暴力) 없고 사기(詐欺) 그쳐 평화를 즐기었네. 망명한 죄인(罪人)을 받지 않아 천 년의 복이요, 예의(禮義)를 모두 닦아 백세의 공일세. 한(漢) 나라가 친 것은 기록에 밝혀 있고, 요(遼) 나라가 친 것은 자취로써 알겠네. 정회(情懷)가 하늘 복판까지 닿았으니, 물은 풍파 없고 수자리에는 일 없네.” 하였다. ○ 명 나라의 중 원암(圓庵)이 천자의 명을 받아 지은 시에, “싸늘한 강 한 줄기 물이 고요하게 흐르니, 압록이 아득한데 저녁 바람 드날리네. 근원은 백산(白山)에 비롯하여 멀리 흘러나왔고, 형세는 창해(蒼海)와 나누어 허공[鴻濛]에 닿았구나. 논밭에 흘러드니 백성들 기뻐하고, 뱃길이 편리하니 객로(客路)가 트였구나. 임금의 은혜 물결 곳곳에 흡족하니, 온 천지가 모두 다 영토 안에 들었네.” 하였다. ○ 권근(權近)이 천자의 명을 받아 지은 시에, “변방 고을 쓸쓸한데 나무 늙었고, 한 줄기 긴 강은 요양(遼陽)을 가로막았네. 황풍(皇風 천자의 덕화)은 중국과 조선을 가리지 않는데, 지리(地理)는 어찌하여 피차(彼此)를 구별하랴. 물결은 조각배를 흔드는 것 맡겨두고 천일(天日)이 하황(遐荒 멀고 거친 곳, 미개한 곳)까지 비추는 것을 기쁘게 보겠네. 누가 이 발길 바쁜 뜻을 알랴, 천자 말씀 받들어 우리 님께 아뢰려네. ○ 나라에는 지경이 험한 곳 있네, 하늘이 주어 지리(地利)도 웅걸(雄傑)하도다. 세 강물 하도 깊어 헤아릴 길 없는데, 이 한 길[道] 멀어서 통하기 어렵네. 강이 넓어 물결이 바다에 잇달았고, 바람에 파도 일어 하늘에 잇닿았네. 작은 배 화살같이 빠르니, 탈없이 건넌 것은 사공의 덕일세.” 하였다. ○ 명 나라의 중 보흡(溥洽)의 시에, “압록강 가을 물결 바닥까지 맑은데, 도도(滔滔)히 흘러내려 고금의 정(情)이 끝없네, 항번(降幡 항복하는 표시로 내어 거는 기)은 마침내는 평양에 왔음을 보았고, 수책(受幘)은 한갖 작은 성을 쌓았음을 들었네. 새벽 배 떠나가자 서릿기운 하얗고, 맑은 물에 말 먹이매 눈송[雪花]이 밝구나. 뉘라서 이 강물을 천참(天塹 천연적인 도랑)이라 했던가, 가없는 경해(鯨海 고래가 노는 큰 바다) 또한 이미 평정해졌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의주는 우리나라 문호(門戶)이어서, 예로부터 중요한 관방(關防)이네. 장성(長城)은 어느 해에 쌓았는가, 꾸불꾸불 산 언덕을 따랐네. 넓고 넓은 말갈(靺鞨)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흘러 봉강(封疆)을 경계지었네. 내가 벌써 천 리를 떠나왔는데, 여기 와서 이렇게 머뭇거리네. 내일 아침 강 건너 떠나가면, 요동 벌판에 하늘이 망망하리라.”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그럭저럭 오고 보니, 압강(鴨江) 가일세, 물색(物色)은 그전대로 고국이건만, 이상하다 서로 만나는 것 모두 새롭고, 신시(新詩)는 태반이나 화언(華言 중화의 말) 섞였구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임금의 명 받들고 천자 뵈러 떠나와 가는 길 탐을 내어서 밤에 얼음 건너네. 깊은 곳 다다라서는 마음 졸여 떨리고, 얇은 곳을 밟으면 얼음 깨지는 소리 들리네. 사신의 법도 고루 알지 못하니, 임금의 은혜 갚을 길 없네. 수달피 갖옷[貂裘]은 가는 길에 떨어져가니, 내일 새벽 또 일찍 일어나야지.”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남풍이 객로(客路)에 불어주고, 석양이 고국땅을 비춰 주누나. 가랑비에 물결소리 들리는데, 넓은 둑에 풀빛이 싸늘하구나. 북쪽으로 가면 만리 통하고, 동쪽으로 가면 삼한(三韓)에 닿네. 사마(駟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내 낯엔 부끄러움 가득하구나.”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일찍이 압록강을 들었었는데, 오늘에야 강 가운데 지나는구나. 벼랑진 강기슭은 천 길 넓이요, 단단한 얼음장은 열 길 깊일세. 잘도 가누나 동국(東國) 말[馬]은 튼튼도 하네. 마중나온 원인(遠人 먼 곳 사람. 여기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의바르네. 지경을 달리하니 이하(夷夏 이는 우리나라, 하는 중국) 갈렸지, 청산(靑山)이야 예 이제가 마찬가질세.”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압록강 멀리 만경(萬頃) 물결은 오늘 아침 또다시 사신[使星]을 싣고 지나네. 물새들 있는 곳에 바람 물결 고요하고, 물가 풀꽃 있는 곳에 비와 이슬이 많구나. 계수나무 노가 물길 타니 깃과 같이 가볍고, 운산(雲山)이 보이는데 소라같이 푸르구나. 봉지(鳳池)와 용소(龍沼)를 떠난 지 오래인데, 머리 돌리니 그 감개를 어찌하랴.”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산 경치 강 물결을 익히 봤는데, 황홀한 훈풍(薰風) 사월(四月)이 지났네. 강가에 오니 벌써 조신(潮信) 빠른 줄 알겠고, 지름길 많은 것 싫지 않구나. 농부는 삿갓 쓰고 밭을 매는데, 해객(海客)은 배를 타고 조개와 소라를 줍네. 조각배로 월남(越南)하니 풍경 좋으니, 지나는 길 야정(野情)이 없을 수 있나.”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낙랑의 나뉜 지경 요(遼)까지 닿았는데, 이 한 강이 가로질러 멀리멀리 푸르네. 장백산(長白山)에 비롯하여 산을 깊이 파면서, 동영(東瀛)으로 흘러서 바닷물과 섞이네. 양편 물가 산광(山光)은 갠 날에 옥을 담갔고, 사시(四時)의 운영(雲影)은 차[冷]게 하늘 적셨네. 행인(行人)은 어별(魚鼈)을 부를 필요 없구나, 굳은 얼음 스스로 다리를 만들었네.” 하였다. ○ 왕창(王敞)의 시에, “물이 깊은 긴 강의 만경(萬頃)에 가을인데, 누선(樓船)은 누가 보내 사두(沙頭)에서 기다리나. 물결 깨며 날아 넘기 특히 좋아하고, 채찍 던져 물 끊다니 믿을 수 없네. 정모(旌旄)에 바람 부니 적치(赤幟)가 나부끼고, 융막(戎幕)에 밤이 차[寒]니 청유(靑油)를 꼈구나. 동주(銅柱) 세워 분계를 멀리할 필요 없네, 저편 기슭 인가들이 바로 의주이네.” 하였다.
옥강(玉江) 주에서 동북으로 60리 떨어져 있다.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천마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여자산(呂子山)에서 나와서 산양천(山羊遷)에 이르러 합쳤고, 다시 50리를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가며, 강 가운데에서 담청옥(淡靑玉)이 나 붙여진 이름이다. 고진강(古津江) 주에서 동남으로 36리 떨어져 있다. 그 근원이 셋인데, 하나는 천마산의 동남에서 나오고, 하나는 그 서남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보광산(普光山)의 북쪽에서 나와서 미륵당(彌勒堂)에 이르러 모두 합쳐서 고정령을 거쳐 10여 리 내려가서 광화도(廣化島)에 이르러 이 강이 되고, 다시 남으로 흘러서 고령주(古寧州)를 거쳐 고린산에 이르러 서쪽으로 흘러서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천순(天順) 연간에 서장관(書狀官) 강기수(姜耆壽)가 익사(溺死)하였으므로 서장강(書狀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적도(於赤島) 난자도(蘭子島)의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7리이다. 그 안이 평평하고 넓어서 밭 60여 두둑을 일구었다. 검동도(黔同島) 주에서 서쪽으로 15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압록강이 여기에 이르러서 세 갈래로 나뉘는데 이 섬이 두 섬 사이에 있으며, 삼씨량(三氏梁)이 있다. 모든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 섬의 북쪽을 거치는데 중국 서울로 가는 사신이 입조(入朝)하는 길이기도 하다. 위화도(威化島) 검동도의 아래에 있는데, 둘레가 40리이다. 검동도와 위화도 두 섬 사이를 압록강의 지류가 가로막고 있는데 굴포(掘浦)라고 일컫고 주성(州城)에서 25리 떨어졌다. 위의 세 섬들은 그 땅이 모두 기름지고 넉넉하여서 백성들이 많이 개간해 경작했었는데, 천순 5년 신사에 농민들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에게 잡혀가 그 뒤부터는 관(官)에서 개간을 금하였다. ○ 고려의 신우(辛禑)가 요양(遼陽)을 치기를 꾀하여 평양에 주둔해서 여러 도(道)의 군사와 민중을 감독해 징집하여 10만을 일컬었다. 우리 태조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좌군 우군이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주둔하는데, 도중에서 도망병이 계속되니 우(禑)가 곳곳마다 죽이라고 명령하였어도 막을 수 없었다. 우가 환자(宦者) 김완(金完)을 보내어 진군할 것을 독령(督令)하거늘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만약 상국(上國)의 지경을 침범한다면 천자에게 죄를 얻어 나라와 백성에게 재앙이 곧 올 것이니, 어찌 경(卿)들과 임금을 뵙고 친히 화(禍)와 복(福)을 아뢰고, 임금 곁의 나쁜 사람들을 제거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을까 보냐.” 하니, 여러 장수가 모두 이르기를, “우리 동방의 사직(社稷)이 편안하고 위태한 것은 공(公)의 한 몸에 달려 있는데, 어찌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래서 군사를 돌려 압록강을 건넜는데, 태조가 흰 말을 타고 붉은 활과 흰 깃 화살을 가지고서 물가에 서서 여러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는데, 모든 군사 가운데에서 바라보고 서로 이르기를, “고금, 그리고 앞으로 올 세상에서도 어찌 이러한 인물이 있겠느냐.” 하였다. 당시에 장마가 며칠 내렸어도 물이 넘치지 않았는데 돌아오는 군사가 겨우 다 물 기슭에 건너자 큰물이 몰려와서 온 섬이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난자도(蘭子島) 위화도의 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0리이다. 수위(水位)가 내려가면 육지에 이어진다. 조몰정도(鳥沒亭島) 주에서 서쪽으로 7리 떨어져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진병지(鎭兵池) 인산진성(麟山鎭城)의 남쪽에 있다. 임덕지(臨德池) 고린산에 있다. 노토동(老土洞) 이하는 모두 압록강 밖의 땅에 속한다. 감창동(甘昌洞)ㆍ손양동(孫梁洞)ㆍ신호수동(申胡水洞)ㆍ금창동(金昌洞)ㆍ마자산(馬子山)ㆍ다양동(多陽洞)ㆍ파사포(婆娑鋪)ㆍ사오랑산(沙吾郞山)ㆍ형제산(兄弟山)ㆍ대모성(大母城)ㆍ권두산(權豆山)ㆍ소창산(小昌山)ㆍ대창산(大昌山)ㆍ송골산(松鶻山).
[토산]사(絲)ㆍ삼[麻]ㆍ꿀[蜂蜜]ㆍ누치[訥魚]ㆍ숭어ㆍ은어[銀口魚]ㆍ쏘가리[錦鱗魚]ㆍ농어, 석류황(石硫黃) 객사(客舍)의 뜰 안에 난다. 담청옥(淡靑玉)ㆍ부석[水泡石]ㆍ백지(白芷)ㆍ애끼찌[弓幹木]ㆍ게[蟹].
[불우]미륵사(彌勒寺)ㆍ금강사(金剛寺) 모두 송산에 있다. 관음굴(觀音窟)ㆍ보라사(寶羅寺) 모두 마두산에 있다. 불장사(佛藏寺) 천마산에 있다.
[고적]국내성(國內城)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교외의 돼지[郊豕]가 달아났는데, 임금이 장생(掌牲) 설지(薜支)에게 명하여 쫓게 하니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잡아서 국내의 인가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臣)이 돼지를 쫓아 국내에 이르러서 그 산수(山水)를 보니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五穀)에 알맞고 또한 미록(麋鹿) 어별(魚鼈)의 자산(資産)이 많습니다. 서울을 옮긴다면 백성에게 이로움이 무궁할 뿐 아니라 또한 병란의 걱정을 면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친히 가서 지세(地勢)를 보고, 22년 겨울에 임금이 국내에 서울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고서 4백 25년을 지냈으며, 장수왕이 평양으로 서울을 옮겼다. ○ 지금 상고하건대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에, “인주(麟州)에 장성(長城) 터가 있는데, 덕종 때에 유소(柳韶)가 쌓은 것이며, 주(州)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였고, 또 병지(兵志)에,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 경계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였으니 국내성은 마땅히 옛 인주의 지경 안에 있을 것이다.” 하였으며, 김부식(金富軾)의 고구려지(高句麗志)에는 이르기를, “국내성이 꼭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땅히 압록강 이북의 한(漢)의 현도군(玄菟郡) 경계, 요(遼)의 동경(東京)인 요양(遼陽)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분명하지 않으나, 임시로 정의 설을 좇아 여기에 붙인다. 고정주(古靜州) 주의 남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고려의 송산현이었는데, 덕종 2년에 성을 쌓고 정주진(靜州鎭)이라 하고서 백성 1천 호(戶)를 옮겨서 채웠고, 문종 31년에 또 내지(內地)의 백성 백 호를 옮겼다. 성의 둘레는 1만 2천 6백 10척이었으며, 본조 태종 2년에 주를 폐하고 의주에 내속(來屬)시켰으며, 세종 때에 또 석성(石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7백 70척이고 안에는 5개의 우물이 있다. 고인주(古麟州) 주의 남쪽 35리다. 본래는 고려의 영제현(靈蹄縣)이었는데, 현종 9년에 인주 방어사(麟州防禦使) 고을로 일컫고, 21년에 토성(土城)을 쌓았는데 속칭 조여(鳥餘)라 하며 둘레가 1만 1천 1백 척이며, 영평진(永平鎭)의 백성을 옮겨서 채웠다. 고종 8년에 반역하였으므로 낮추어 함인(含仁)이라고 일컬었다가 뒤에 지군사(知郡事) 고을로 고쳤으며 본조에서 주를 폐하여 내속시켰고, 세종 때에 인산진을 두었다. 고영주(古靈州) 주의 남쪽 55리에 있다. 본래는 고려의 흥화진(興化鎭)이었는데, 현종 23년에 영주로 승격시켜서 방어사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주를 폐하여 내속시켰다. 토성 터가 있는데, 둘레가 2천 5백 80척이다. ○ 고려 현종 원년에 거란(契丹)의 임금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강조(康兆)를 토벌하려고 흥화진을 에워싸매 양규(楊規)가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호부 낭중(戶部郎中) 정성(鄭城), 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主簿) 이수화(李秀和), 판관(判官) 늠희령(廩羲令) 장경(張顥)과 더불어 성에 틀어박혀 굳게 지켰는데, 거란 임금이 거짓으로 강조의 글을 써서 흥화진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거늘 양규가 이르기를, “나는 왕명(王命)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을 받지 않았다.” 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뒤에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내침(來侵)하매 강감찬(姜邯贊)으로 서북면 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를 삼고 대장군(大將軍) 강민첨(姜民瞻)으로 부장(副將)을 삼았다. 군사 20만 8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에 주둔하고, 흥화진에 가서 선기병(選騎兵) 1만 2천 명을 산골짜기 가운데에 매복시키고, 큰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서 성의 동쪽에 있는 큰 강을 막고 기다렸다가, 적이 이르자 막은 것을 트고 복병을 일으켜서 크게 패배시켰다. 고정녕현(古定寧縣) 주의 동남쪽 25리에 있다. 아조(我朝) 태종 5년에 비로소 현령(縣令)을 두었고, 세종 27년에 방산으로 옮기고 높여서 군(郡)으로 하였고, 세조 원년에 옛 읍(邑)으로 환원하였다가 2년에 현을 폐하고 내속시켰다. 군창(軍倉)이 있다. 고위원진(古威遠鎭) 주의 남쪽 25리에 있다. 고려 현종 20년에 유소를 보내어 옛 석성을 수리하고 위성진을 두니 흥화진의 서북쪽에 있는데, 성의 둘레가 4천 8백 40척이고, 안에는 7개의 우물이 있다. 고영덕진(古寧德鎭) 주의 동남쪽 40리다. 고려 현종 21년에 토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천 12척이고 안에는 12개의 우물이 있다. 문종이 거란 흥종의 휘(諱)를 피해 영덕성(寧德城)이라고 개칭하니, 진(鎭) 자가 진(眞 거란 흥종의 휘)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본조에서는 정녕현(定寧縣)이라고 고쳤다가 뒤에 현을 없애고 내속시켰다. ○ 고려 고종 4년에 금(金)의 내원성(來遠城)이 이첩(移牒)하여 이르기를, “반적(叛賊) 만노(萬奴)가 본래 거란과 한 마음이라 만약 군사를 아울러 귀국(貴國)을 내침한다면 그 걱정이 적지 않으며, 또한 귀국에게 격퇴당하면 반드시 우리나라로 달아나 돌아올 것이니, 실지로 귀국을 침범하거든 꼭 급히 알려 주시면 우리가 곧 출군(出軍) 엄호(掩護)하여 공격하겠습니다.” 하니, 영덕성이 회첩(回牒)하여 이르기를,“거란병이 일찍이 우리나라 지경에 들어왔다가 여러 번 좌절되었는데, 만약 만노가 이어서 이른다면 우리 군력(軍力)이 나뉠까 두렵고, 거란의 구적(寇賊)이 다시 세력을 떨치어 상국(上國)을 침범한다면 일이 잠깐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라 알리기에 미칠 수 없을 것이니, 청하건대 미리 병마를 베풀어서 만노를 막아 우리 읍에 이르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 읍이 또한 거란병을 막는다면 상국에 이르지 못하게 할 수 있으리다.” 하였다. 고영삭진(古寧朔鎭) 주의 동쪽 1백 20리에 있다. 고려 문종이 안의진(安義鎭)의 진자농장(榛子農場)에 성을 쌓고 영삭진이라 하여 변방 적의 요충(要衝)을 진압하였다. 성의 둘레가 7천 7백 60척이었는데, 지금은 토성의 남긴 자리만 있으며, 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다. 고정융진(古定戎鎭) 주의 동쪽 80리에 있다. 유소가 또한 흥화진 북쪽에 있는 옛 석벽(石壁)을 수리하여 정융진을 두고 영평성(永平城)의 백성을 옮겨서 채웠으며, 토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7천 7백 92척이고 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으며, 속칭 임천성(臨川城)이다. 고연평성(古延平城) 주의 동남쪽 8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천 8백 87척이고, 안에는 13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고연주성(古延州城) 주의 동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백 80척이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옥강성(玉江城) 옥강의 동쪽 기슭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백 20척이고, 사면이 절벽인 가운데에 못이 있다. 전문령고성(箭門嶺古城) 주의 동남쪽 20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1천 6백 10척이고, 안에는 62개의 우물이 있다. 가미성(嘉彌城) 주의 북쪽 1백 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3백 척이고, 우물이나 샘이 없다. 장성(長城) 고려 덕종 2년에 평장사(平章事) 유소에게 명하여 북쪽 변경의 관방(關防)을 창설하였는데, 주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의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색(淸塞)ㆍ평로(平虜)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4성에 걸치고,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다달아 동쪽으로 바다에 가까이 붙었다. 연무(延袤 연은 동서, 무는 남북, 즉 넓이, 넓음, 길게 뻗음의 뜻) 1천여 리를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25척씩이며, 속칭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한다. 주의 동쪽 옥강리(玉江里)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3백 2보(步)이고, 구룡연의 북쪽에 있는 것은 길이가 4백 11보이다. 고동보(庫洞堡)ㆍ삼기보(三岐堡) 주의 북쪽에 있다. 검동보(黔同堡) 곧 검동도이다. 암림보(暗林堡)ㆍ미륵당보(彌勒堂堡) 주의 서남쪽 40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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