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慶尙道]1.진정부(眞定府)는 지금의 진주(晉州)

한부울 2011. 3. 16. 14:19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

[慶尙道]

1.진정부(眞定府)는 지금의 진주(晉州)이고, (眞定府와 正定府)


경상도 진정부(眞定府) 진주(晉州)

황해도 진정부(眞定府) 평산(平山)

평안도 진정부(眞定府) 정주(定州)


直隸省(十一府。六直隸州。十九州。一百二十四縣)。 

正定府(名恒山。領一州。十三縣)正定(東垣。附府)獲鹿(鹿泉)井陘(威州)阜平(泜州)欒城(開縣)行唐(玉亭)靈壽(燕州)平山(蒲吾)元氏(槐渠)贊皇(房子)晉州(鼓城)無極(魏昌)[蒿/木]城(廉州)新樂(新市)-地輿名目(一十九省)

 

 

 

[恒山]


真定府,中国古代行政区划名。五代唐改镇州置,其后省复多变。宋治真定县(今河北正定县),辖境相当今河北省井隆、元氏、栾城、藁城、新乐、行唐、阜平之间地。为真定府路治。宋、金时为河北西路治。元改为真定路,明洪武初复为府。辖境东部扩至今定州、深州及南宫等市境。清雍正元年(1723年)改为正定府

古有“花花真定府,锦绣太原城”之说,系出于宋、元时代的北方民谚。“花花美定府”,“花花”即“华华”,《广韵·麻韵》“花,华俗,今通用”《广雅·释草》“花,华也”,全句犹言繁华的真(正)定府。

真定府,即今河北正定县,在石家庄崛起以前,千百年间一直是华北大平原中部最富饶最繁华的大都会。人们习惯上之所以将“锦绣太原城”与“花花真定府”联句,系出于正定太原——这古来驰名天下的井陉口内外两大都会,不独地理上恰恰处在一条东西平行线上,而且互为山西高原与华北大平原往还唯一大道—今天更为石(正)太铁路的起点与终点。

在五代十国时期,镇州(今正定)属赵。北宋至道年间(995-997年),分辖区为15路,河北路是其中之一,治所大名府(今大名东),熙宁时(1068-1077年)分为东西两路,东路治所在大名府,西路治所在真定府,辖境约以今白洋淀向南,子牙河、滏阳河为东西分界线。


晉州,

中國古代行政區劃名。

(1)北魏建義元年(528年)以唐州改置,治白馬城(今山西臨汾市)。北齊後廢。唐武德元年(618年)又以平陽郡改置,治臨汾縣(今臨汾市西南)。天寶元年(742年)復為平陽郡,乾元元年(758年)又為晉州。五代移治今臨汾市。北宋政和六年(1116年)升為平陽府。唐轄境約當今山西省臨汾、霍州、汾西、洪洞、浮山、安澤等市縣地。產礬。唐置礬官,宋有煉礬務。

(2)南朝梁大寶元年(550年)置,治懷寧縣(今安徽潛山縣)。轄境約相當今湖北省黃梅和安徽省宿松、望江、太湖、潛山等縣及桐城市部分地。北齊天保六年(555年)改為江州。南朝陳太建五年(573年)復為晉州。隋開皇初又改熙州。

(3)北周置,治絳縣(今山西絳縣南)。轄境相當今山西省曲沃、絳縣、侯馬等市縣一帶。建德五年(576年)廢。

(4)金興定四年(1220年)置,治西張寨(今山西壽陽縣西)。屬太原府。元時廢。

(5)元成吉思汗十年(1215年)置,治鼓城(今河北晉州市晉州鎮)。轄境相當今河北省晉州、安平、饒陽、武強等市縣。元屬真定路。明屬真定府。清雍正後不轄縣。1913年改為晉縣。


晉州歷史 

晉州市有2500余年文字可考的歷史。

春秋初期 ,白狄在今晉州市十裏鋪村附近建小諸侯國--鼓國,子爵,都鼓聚(今十裏鋪村)。鼓聚有昔陽亭。周景王十五年(公元前530年),晉國大臣荀吳率軍隊偽裝和齊國軍隊會盟,向鮮虞國(今正定縣新城鋪附近)借道,趁機包圍了鼓國都城。一直圍困三個月,鼓國人食竭力盡。晉軍攻克鼓國,未殺一人,俘獲鼓國國君鳶(革是),返回晉國,向宗廟獻功之後,歸晉國所轄。周景王二十四年(公元前521年),鼓國背叛晉國重歸鮮虞國。次年六月,晉國荀吳率軍攻取東陽(今邢臺市)派兵繞道帶著兵器藏在昔陽門外,偷襲鼓國成功。又將鼓國國君鳶(革是)俘獲,押回晉國;並派晉國大夫涉佗駐守鼓國。自此鼓國又歸晉國。

戰國時期,晉州市境內設城邑下曲陽(今鼓城村附近)、昔陽(今十裏鋪村)。後燕國、齊國、趙國先後攻佔過昔陽。 

王政二十六年(公元前221年),晉州市境屬巨鹿郡(郡治今河北省平鄉縣西南)。 

西漢元始二年(公元2年),晉州市境置三縣:下曲陽、臨平、安鄉。下曲陽縣為都慰治,在今鼓城村附近。三縣均屬冀州刺只部巨鹿郡。西漢末年,劉秀兩次攻佔下曲陽縣。新朝,王莽分巨鹿為合成郡,郡治在下曲陽,邳彤任卒正。

東漢建武四年(公元28年)四月,劉秀在臨平鄉(今晉州市古城寨)派兵鎮壓農民起義軍。後省臨平、安鄉二縣,入下曲陽縣。東漢中平元年(公元184年)二月,在河北大地上爆發了歷史上有名的黃巾大起義。張角和其弟張梁、張寶等在廣宗(今威縣東)、下曲陽、巨鹿(今平鄉縣)等地率數十萬農民起義軍燒官府,殺官吏,劫聚邑。州郡縣官吏逃亡,潰不成軍。僅僅十多天時間,“天下響應,京師震動”。六月,董卓率官軍在下曲陽進攻農民起義軍,被黃巾軍打得大敗。董早晨被撤,皇甫嵩就任鎮壓黃巾軍的主帥。此時,張角病死。十月,張梁率黃巾軍同官軍在廣宗決戰,張梁英勇戰死。農民軍8萬多人被官軍殺。皇甫嵩和巨鹿郡太守郭典命官宮將農民起義軍屍體集于下曲陽城南紫城(今東子城、西子城一帶),封土為丘,名京觀。 

三國時期,統治階級的混戰給社會帶來巨大的破壞,現曲陽一帶深受其害。曹操平定河北,下曲陽屬冀州刺史部巨鹿郡。 

北朝北魏時期,下曲陽縣改名曲陽縣,屬巨鹿郡。巨鹿郡治所由癭陶(今寧晉縣西南)移到曲陽縣(今晉州市鼓城村附近)。這時,巨鹿郡轄曲陽高城(今蒿城市西南)、梟(今辛集市東南)三肥。 

北朝北齊天保二年(公元551年),北齊大臣魏收奉命撰寫《魏書》,至天保五年(公元554年)完成,計130卷。為中國二十四史之一。其中的《釋老志》為他首創,有重要史料價值。北齊時省曲陽縣入高城縣(今蒿城市),屬巨鹿郡,郡治所仍在原曲陽縣。 

開皇十六年(公元596年),從高城縣分置昔陽縣,治所在原下曲陽縣舊址東2.5公裏處,即今日的晉州市區。開皇十八年(公元598年),昔陽縣改稱鼓城縣。 

唐代初期,鼓城縣一帶戰事不斷。武德五年(公元622年)三月,農民起義實業界首領劉黑闥遣其弟劉十善和行臺張君立率軍一萬,在鼓城縣(今晉州市治所)襲擊唐幽州總管李藝。貞觀十年(公元636年),唐大臣,著名政治家、史學家魏徵(晉州市趙魏村人)領銜監修的《隋書》撰寫完成,計85卷。敘事從隋文帝開皇元年(公元581年)代周建隋始,至恭帝義寧二年(公元618年)隋滅亡止,記載了隋朝38年的歷史,對隋煬帝的殘暴統治作了較真實的揭露,對隋末農民起義的起因、經過及不可抗拒的威力也有較詳記載。魏徵提出的“兼聽則明,偏信則暗”,至今仍有深刻社會意義。唐天寶十五年(公元765年),史思明軍由鼓城縣攻入博陵郡(今定州市)。唐大順二年(公元892年)七月,李克用軍徵討鎮州(今正定縣),大肆搶掠鼓城縣。次年三月,李克用軍渡滹沱河,攻克鼓城等用。 

五代時,鼓城一帶,戰亂不止,經濟凋蔽。契丹耶律德光軍幾次攻克鼓城等縣。 


成吉思汗十年(公元1215年),置晉州,治所在鼓城縣治(晉州市區),轄鼓城一縣。窩闊臺十年(公元1238年,撤晉州,置鼓城縣,轄鼓城、安平饒陽、武強四縣。忽必烈中統二年(公元1261年)六月,于鼓城縣治復置晉州,轄縣未變。元代,晉州經濟有一定發展。但水災、蝗災、震災交替發生,饑民遍野。元至正二十年(公元1360年),農民起義軍紅巾軍佔據鼓城縣魏氏莊、李氏莊、劉氏莊等地(今馬坊營、呂家營、楊家營一帶)。

洪武二年(公元1369年),省鼓城用勁入晉州。晉州轄安平、饒陽、武強三縣。明建文三年(公元1401年)燕王朱棣“靖難之師”和明軍在晉州滹沱河兩岸數次交戰。百姓流離失所,幸存者十之二三,社會經濟遭到嚴重破壞。明永樂年間數次移山西洪洞縣民來充實晉州。後晉州經濟漸次復蘇。 

清代,晉州戰事、水、旱、地震、蝗蟲等災害時有發生,農民生活困苦。清雍正二年(公元1724年),升晉州為直隸州,轄無極、蒿城二縣;原轄安平、饒陽、武強歸屬深州。雍正十二年(公元1734年),晉州改為散州,屬正定府,不轄縣;無極、蒿城歸屬正定府。清人著作家樓底楊 驊、龍頭苑世亨著作頗豐,時有威名。清末民初著作家東留章李翰如撰有文集28卷和民國《晉縣志》、《晉縣鄉土志》,1916年獲總統贈匾。

1913年,改晉州為晉縣。1926年,中共晉縣地方黨組織建立,在其領導下,全縣人民為爭取民族解放、人民富裕進行了艱苦卓絕的鬥爭,取得了抗日戰爭的勝利。解放戰爭中,晉縣成為後方基地。晉縣民眾積極參軍參戰,支援前線,出動民工數萬人次,取得解放戰爭的勝利;並順利完成土地改革,貧苦農民有了自己的土寺。在長期革命鬥爭中,3000多名晉縣優秀兒女獻出了寶貴的生命。

************************************

세종지리지

⊙ 진주목(晉州牧)

백제 거렬성(居列城)인데, 신라 문무왕 2년 계해에【바로 당(唐) 고종(高宗) 용삭(龍朔) 3년이다. 】이를 탈취하여 주(州)를 만들고, 신문왕(神文王) 4년 을유에【바로 당(唐)나라 수공(垂拱) 원년이다. 】거렬주(居列州)를 올려서 청주(菁州)로 하고 총관(摠管)을 두었으며,【거렬(居列)은 일명(一名)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강주(康州)로 고치고,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청주(菁州)로 하였다. 고려 태조가 또 강주(康州)로 고쳤고, 성종 2년 계미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으니, 바로 그 하나이다. 을미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이름을 진주 정해군 절도사(晉州定海軍節度使)로 하였는데, 현종 3년 임자에 절도사(節度使)를 폐하고 안무사(安撫使)로 고쳤다가, 무오년에 진주목(晉州牧)으로 정하여 8목(牧)의 하나로 삼았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 임신에 현비(顯妃) 강씨(康氏)의 내향(內鄕)인 까닭으로 올려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를 삼았고, 태종 2년 임오에 도로 진주목(晉州牧)으로 하였다. 속현(屬縣)이 3이니, 반성(班城),【삼국 시대의 칭호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영선(永善)은 본디 일선현(一善縣)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상선(尙善)으로 고쳐서 고성군(固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악양(岳陽)은 본디 소다사현(小多沙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하동군(河東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위의 세 현은 현종 무오년에 모두 본주(本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부곡(部曲)이 2이니, 화개곡(花開谷)·살천곡(薩川谷)이다.【위의 두 부곡의 장(長)은 모두 머리를 깎아서 ‘승수(僧首)’라고 일컬었는데, 방언(方言)의 소리가 변하여 지금은 시내(矢乃)가 되었다. 】

명산(名山)은 지리산(智異山)이 주(州) 서쪽에 있다.【일명(一名) 두류산(頭流山)이다. 대천왕사(大天王祠)가 있다. 】옥산(玉山)은 주(州) 서쪽에 있다.【가뭄을 만날 때마다 산 위에서 제사를 베풀고 섶[柴]을 태우면, 곧 비가 온다. 】본주(本州)의 성황(城隍)【국초(國初)에는 춘추(春秋)로 향과 축문을 내려서 제사를 행하였는데, 지금은 다만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행하게 한다. 】대천(大川)은 남강(南江)과【그 근원이 둘이니, 하나는 지리산 북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와, 주(州)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두치진(豆恥津)이다.【그 근원이 둘이니, 하나는 지리산 서남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전라도 구례(求禮)에서 나온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함안(咸安)에 이르기 46리, 서쪽으로 전라도 구례(求禮)에 이르기 1백 2리, 남쪽으로 고성(固城)에 이르기 45리, 북쪽으로 진성(珍城)에 이르기 28리다.

본주(本州)의 호수는 1천 6백 28호, 인구가 5천 9백 6명이요, 반성(班城)의 호수는 2백 77호, 인구가 6백 87명이요, 영선(永善)의 호수는 2백 54호, 인구가 7백 48명이요, 악양(岳陽)의 호수는 60 단(單) 1호, 인구가 1백 80 단(單) 1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74명, 영진군(營鎭軍)이 1백 88명, 선군(船軍)이 9백 75명이다.

본주(本州)의 토성(土姓)이 4이니, 정(鄭)·하(河)·강(姜)·소(蘇)이요, 입주(立州) 후(後)의 성(姓)이 3이니, 유(柳)·임(任)·강(康)이며, 속성(續姓)이 2이니, 김(金)【예주(禮州)에서 왔다. 】·박(朴)【근본은 알 수 없다. 】이다. 반성(班城)의 성이 4이니, 옥(玉)·성(成)·형(邢)·주(周)이요, 속성이 1이니, 김(金)이다.【고성(固城)에서 왔다. 】영선(永善)의 성이 3이니, 임(林)·임(任)·양(陽)이요, 악양(岳陽)의 성이 5이니, 도(陶)·오(吳)·임(任)·손(孫)·박이며, 속성이 1이니, 김이다.【김해에서 왔다. 이상 세 현의 속성은 지금 모두 향리가 되었다. 】없어진 복산(福山)·송자(松慈) 2향(鄕)의 성이 1이니, 문(文)이다. 인물(人物)은 지중추원사 병부 상서(知中樞院事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고려 현종 때 사람이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하윤(河崙)【본조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묘(墓)는 주(州)에서 25리 동쪽 동방산(桐旁山)에 있다. 】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풍속은 부유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간전(墾田)이 1만 2천 7백 30결이다.【논이 조금 적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메밀·감·배·석류·뽕나무·삼[麻]·목면(木綿)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녹포(鹿胞)·문어·은구어·표고버섯·석이(石茸)·송이버섯·지초·작설다(雀舌茶)·자리[席]·죽피방석(竹皮方席)·가는 대[篠]·왕대[簜]·칠·종이·돼지털·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수달피(水獺皮)·산달피(山獺皮)이며,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이요, 토산(土産)은 우무[牛毛]·세모(細毛)·청각(靑角)·미역·해삼이다. 어량(魚梁)이 2이니, 하나는 김양촌(金陽村)에 있고, 하나는 강주포(江州浦)에 있다. 염소(鹽所)가 1이니, 곤양(昆陽) 경계에 있다.【본주 사람이 내왕하면서 구워 온다. 】자기소(磁器所)가 3이니, 하나는 주(州) 북쪽 목제리(目堤里)에 있고, 하나는 주(州) 서쪽 중전리(中全里)에 있고, 하나는 주(州) 동쪽 월아리(月牙里)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주(州) 동쪽 유등곡(柳等谷)에 있고, 하나는 주(州) 남쪽 반룡진(盤龍津)에 있다.【오로지 누른 옹기만을 만드는데, 하품이다. 】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2천 6보인데, 안에 못이 3, 우물 3이 있다. 】송대산 석성(松臺山石城)은 주(州) 동쪽 35리에 있다.【높고 험하며, 둘레가 7백 6보인데, 안에 샘 2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봉명루(鳳鳴樓)는 객사(客舍) 남쪽에 있고, 촉석루(矗石樓)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벼랑[石崖] 위에 있다. 역(驛)이 10이니, 조촌(村)·평거(平居)·정수(正守)·평사(平沙)·소남 신역(召南新驛)·금량 신역(金良新驛)·말문 신역(末文新驛)【모두 주(州) 경계에 있다. 】·영선 신역(永善新驛)·부다(富多)【반성(班城)에 있다. 】·신역(新驛)이 주(州) 경계에 있다. 적량(赤梁)은 주(州) 서쪽 창선도(彰善島)에 있다.【주(州)에서 80리 거리인데 수군 만호가 수어한다. 】봉화가 5곳이니 망진산(望津山)은 주(州) 남쪽에 있다.【남쪽으로 사천(泗川) 성황당(城隍堂)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제산(光濟山)에 응한다. 】광제산(光濟山)【북쪽으로 단계현(丹溪縣) 입암(笠岩)에 응한다. 】각산향 주산(角山鄕主山)은 주(州) 남쪽에 있다.【동쪽으로 고성(固城) 좌이산(佐耳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사천(泗川) 침지(針枝)에 응하며, 남쪽으로 금량 부곡(金良部曲) 양둔산(陽芚山)에 응한다. 】양둔산(陽芚山)【남쪽으로는 남해도(南海道) 망운산(望雲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주(本州) 계화산(桂花山)에 응한다. 】계화산(桂花山)【서쪽으로 전라도 건대산(件代山)에 응한다. 】단속사(斷俗寺)는 주(州) 서쪽 42리에 있고,【선종(禪宗)에 속하며, 급전(給田)이 1백 50결이다. 절에 《한창려집(韓昌黎集)》 및 고려 《이상국집판(李相國集板)》 판(板)이 있다. 】쌍계사(雙溪寺)는 주(州) 서쪽 화개곡(花開谷)에 있다.【전우(殿宇)는 허물어졌고 신라 때에 창건한 조사전(祖師殿)만이 있다. 절 앞에 문(門)처럼 생긴 돌이 있는데, 최치원이 그 위에 쓰기를,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어제 쓴 것과 같이 분명하다. 동변(東邊)의 한 돌에는 ‘쌍계’ 두 자를 새기고, 서변(西邊)의 한 돌에는 ‘석문’ 두 자를 새겼다. 】흥선도(興善島)는 본디 고려 유질 부곡(有疾部曲)인데,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고, 충선왕(忠宣王) 초에 왕의 혐명(嫌名)5075) 을 피하여 흥선(興善)으로 고쳤는데, 왜적으로 인해 인물(人物)이 전망(全亡)한 까닭으로 지금은 직촌(直村)을 삼았다. 수로(水路)로 10리이다.【백성들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짓는다. 】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2이니, 김해(金海)·창원(昌原)이요, 군(郡)이 3이니, 함안(咸安)·함양(咸陽)·곤남(昆南)이며, 현(縣)이 12이니, 고성(固城)·거제(巨濟)·사천(泗川)·거창(居昌)·하동(河東)·진성(珍城)·칠원(漆原)·산음(山陰)·안음(安陰)·삼가(三嘉)·의령(宜寧)·진해(鎭海)이다.

【영인본】 5책 649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김해 도호부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창원 도호부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함안군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함양군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곤남군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고성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거제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사천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거창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하동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진성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칠원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산음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안음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삼가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의령현

○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진해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진주목(晉州牧) 

동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67리이고, 진해현(鎭海縣) 경계까지 79리이고, 남쪽으로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 28리이고, 고성현(固城縣) 경계까지 66리이고, 서쪽으로 단성현(丹城縣) 경계까지 38리이고, 곤양군(昆陽郡) 경계까지 27리이고, 하동현(河東縣) 경계까지 67리이고, 전라도 광양현(光陽縣) 경계까지 94리이고, 북쪽으로 삼가현(三嘉縣) 경계까지 45리이고, 의령현 경계까지는 40리이고, 단성현 경계까지 4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66리이다.

[건치연혁]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은 강주(康州)라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정주(菁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는 또 강주라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는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에 진주라 고쳐서 절도사를 설치하고, 정해군(定海軍)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안무사(安撫使)로 고쳤고,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 세조조(世祖朝)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반성현(班城縣) 주의 동쪽 52리에 있다. 고려 현종 때 본주에 내속시켰다. 일명 편월(片月)이고, 창름(倉廩)이 있다. 영선현(永善縣) 주의 동남쪽 48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일선현(一善縣)인데 경덕왕이 상선(尙善)이라 고쳐서 고성군(固城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악양현(岳陽縣) 주 서쪽 1백 2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하동군에 예속시켰던 것인데 고려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신증』 정덕(正德) 무인년에 악양현과 화개현(花開縣)은 진주와 거리가 멀어서, 백성들이 관곡(官穀) 출납에 노고가 많다 하여 여기에다 창(倉)을 설치하였다. 살천부곡(薩川部曲) 주 서쪽 81리에 있다. 부곡의 장(長)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僧首)라 부른다. 화개부곡(花開部曲) 합포(陜浦)라 하기도 한다. 주 서쪽 1백 26리에 있다. 부곡의 장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라 부른다.

[풍속]습속이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넉넉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모두 《지리지(地理志)》에 있다.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서로 잇따랐다 하륜(河崙)의 〈촉석루기(矗石樓記)〉에 있다. 학문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하연(河演)의 〈사교당기(四敎堂記)〉에 있다.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이 일에 부지런하고 아들과 손자가 효도에 힘을 다한다 하륜의 〈촉석루기〉에 있다.

[형승]영남 제일이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진양의 시내와 산의 훌륭한 경치는 영남에서 제일이다.” 하였다. 큰 산과 큰 강 이첨(李詹)의 서문에, “인물이 나서 국가에 도움 되게 하는 이는, 큰 산과 큰 강의 성하고 맑은 정기로 된 것이 많다.” 하였다. 동방의 육해(陸海)이다. 예전 사람이 진양을 평하기를, “진양은 동방의 육해이다. 수산물과 토산물을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영남 여러 주의 반이다.” 하였다. 비봉산(飛鳳山)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望晉山)이 남쪽에서 읍한다. 하륜의 〈봉명루기(鳳鳴樓記)〉에, “비봉산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 긴 강이 그 사이에 흐르는데 동쪽과 서쪽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렀다.” 하였다.

[산천]비봉산 주 북쪽 1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지리산(智異山) 주 서쪽 1백 리에 있다. 상봉(上峯)을 천왕봉(天王峯)이라 하는데, 남원부(南原府)편에 자세히 적었다. 산 북쪽은 함양군 경계이다.

○ 고려 때에 명사가 이 산에 숨어 살았는데, 지조가 높고 행실이 깨끗하여 세상 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그때 임금이 듣고 사신을 보내 맞아오려 하니, 사례하기를, “외신(外臣)이 아는 것이 없사오니 왕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다음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사신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보니 벽에다가, “한 마디 임금의 말씀 골에 들어오니, 이름이 인간에 떨어진 줄 비로소 알았네.”라는 한 구를 적어두고 북쪽 바라지를 통해 도망쳐 버렸다. 후세 사람들은 한유한(韓惟漢)이 아니었던가 의심한다. 《고려사》에, “유한이 여러 대로 서울에 살았으나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최충헌(崔忠獻)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고,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가 버렸다. 맑은 수양과 굳은 절조로써 외인과 교제하지 아니하니, 세상에서 그의 풍치를 높게 여겼다. 나라에서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고 깊은 골짜기로 옮겨가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 고려 김부의(金富儀)의 시에, “험한 곳을 지나 태화봉(太華峯)에 오를까 의심되더니, 돌아오는 길에 도리어 석양이 붉음을 겁내네. 우연히 왕사(王事)로 인해 세상밖에 노닐지만, 도리어 당년의 양차공(楊次公)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고려 김돈중(金敦中)의 시에, “오르고 올라 최상봉에 이르러, 진세를 돌아보니 한 조각만하구나. 노을 속에 배회하여 그윽한 정취를 얻었으니, 풍류는 진(晉) 나라 양공(羊公)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네.” 하였다.

○ 고려 중 정명(靜明)이 벗을 전송하는 시에, “그대는 곧 바로 천 봉우리 속에 들어갔다 하니, 몇 겹의 연기와 노을속에 있겠네.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가신 길 아득하니, 다른 해 어느 곳에서 그대 자취 찾을고.”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두류산(頭流山)이 가장 크다. 신선이 표피자리 깔았네. 나무 끝에 두 다리가 날고, 구름 속에 반신(半身)만 내놓네. 사람들은 삼무(三武)에게 곤란 당했음을 기롱하고, 혹은 진(秦) 나라를 피했다고 말하네. 어찌 그윽하게 살 곳이 없어, 풍진 속에 백발이 새로워졌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내 들으니, 백두산이 남으로 와서 바다에 닿아 뿌리가 서리었다네. 멀고 멀리 3천 리에 멧부리가 연했는데, 험한 곳은 모두 관문(關門)으로 되었다네. 구불거리다가 정기가 모여 갑자기 솟아났는데, 천궁(天宮)이 정상에 있어 제사를 누리네. 천궁이 하늘과 한 자도 안 되는 거리여서, 뭇 산을 당기고 뭇 물 삼킨다네. 바람과 구름이 부벼대서 나무가 못 크고, 응달엔 6월에야 눈이 처음 녹는다네. 천태산(天台山)이 4만 8천 장이라지만, 이 산과 견주면 하늘과 땅이로세. 유인(幽人)이 은거하여 이 속을 다니면서 만 구렁 솔바람 소리 모두 다 겪었네. 문득 선부(仙府)를 찾아 옥피리를 부노라니, 그 소리 완연히 봉황 울음 같아라.” 하였다.

○ 이륙(李陸)의 〈유산기(遊山記)〉에, “지리산은 또 두류산이라 칭한다. 영남ㆍ호남 사이에 웅거하여서 높이와 넓이가 몇 백 리인지를 모른다. 목 하나, 부 하나, 군 둘, 현 다섯, 속읍 넷이 산을 둘러 있는데, 동쪽은 진주ㆍ단성이고, 남쪽은 곤양ㆍ하동ㆍ살천ㆍ적량(赤良)ㆍ화개ㆍ악양이며, 서쪽은 남원ㆍ구례ㆍ광양이고, 북쪽은 함양ㆍ산음이다. 높은 봉우리가 둘이 있는데, 동쪽은 천왕봉이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으로서 서로 거리가 백여 리나 되는데, 항상 구름에 가려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와서 서쪽에 향적사(香積寺)가 있고, 또 서쪽으로 50리쯤에 가섭대(迦葉臺)가 있다. 대의 남쪽에 영신사(靈神寺)가 있으며, 서쪽으로 20여 리를 내려오면 넓게 트인 땅이 있는데, 편평하고 비옥하여 가로 세로의 넓이가 모두 6ㆍ7리 됨직하다. 간간히 하습(下濕)하여서 곡식 심기에 알맞다. 늙은 잣나무가 하늘에 치솟았으며, 낙엽이 쌓여서 정갱이까지 빠진다. 복판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끝이 없어 완전히 하나의 평야(平野)이다. 빙빙 둘러 남으로 내려오면, 시내를 따라 의신(義神)ㆍ신흥(新興)ㆍ쌍계(雙溪)의 세 절이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서 20리 지점에 칠불사(七佛寺)가 있다. 쌍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佛日菴)이 있고, 그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널판지로 덮었고, 거주하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를 사용했으나 거주하는 중은 한두 명에 불과하니, 산세가 아주 험준하여 사람 사는 마을과 서로 닿지 않았으므로, 높은 선사가 아니면 안주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물의 근원은 영신사 작은 샘물로부터 이 신흥사 앞에 와서는, 벌써 큰 냇물이 되어 섬진강(蟾津江)에 흘러드는데, 여기를 화개동천(花開洞天)이라 한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천불암(千佛庵)ㆍ법계사(法戒寺)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자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임했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져서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 또 두 물이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하나는 법계사 밑에서 나오며, 살천(薩川)에서 합쳐져 하나로 되어 소남진(召南津) 아래쪽으로 흘러 들어서 진주를 둘러 동쪽으로 가는데, 이것을 정천강(菁川江)이라 한다. 소남진이란 것은 산 북쪽 물이 동쪽을 돌아 오다가 단성현(丹城縣)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인 것이다. 살천촌(薩川村)에서 20여 리를 가면 보암사(普庵寺)가 있다. 살천촌 앞쪽을 내산이라 하고, 바깥쪽을 외산이라 한다. 보암사에서 바로 올라가 빠른 걸음으로 하루 반이면 천왕봉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돌 벼랑이 가파르고 험하여 길을 찾을 수 없고, 또 느티나무와 노송나무가 하늘을 가렸으며, 밑에는 가는 대가 촘촘하고, 간혹 말라 죽은 나무가 천 길 벼랑에 걸쳐 있는데 껍질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또 폭포가 멀리 구름 끝으로부터 그 사이에 내리쏟아 길이를 측량할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발길을 돌리지 못하겠고, 돌아보면 뒤를 볼 수 없다. 수십 개 나무를 베어야 비로소 한 자 넓이의 하늘을 볼 수 있다.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가끔 돌을 주워, 바위 위에 두고 길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벼랑과 골짜기 사이에는 얼음과 눈이 여름을 지나도 녹지 않는다. 6월에 서리가 처음 내리고 7월이면 눈이 오고 8월이면 얼음이 크게 언다. 첫 겨울이 되면 눈이 몹시 와서 골과 구렁이 모두 편평하여지므로 사람이 왕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산에 사는 사람들이 가을에 들어갔다가 늦은 봄이라야 비로소 산에서 내려온다. 혹 산 아래에는 뇌성과 번개가 크게 치면서 비가 와도, 산 위에는 날씨가 청명하여 한 점 구름도 없기도 하니, 대개 산이 높아서 하늘에 가까우므로 기후가 평지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대체로 산 밑에는 감과 밤나무가 많고, 조금 위에는 모두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 지대를 지나면 삼나무와 노송나무이다. 절반은 말라 죽어서 푸른 것과 흰 것이 서로 섞여져 있으며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맨 위에는 철쭉꽃만 있을 뿐인데, 나무 높이가 한 자 길이가 채 못 된다. 맛있는 나물과 진귀한 과실이 딴 산보다 많아서 산에 가까운 수십 고을이 모두 그 이익을 입는다.”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이 김종직(金宗直)의 〈두류록(頭流錄)〉 끝에 쓴 시에, “위태롭게 높도다. 산이 둥그스름하며 넓게 퍼졌음이여.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 하늘에 닿았네. 뿌리가 몇 천 백 리나 서리었는지 내 모르거니와, 우뚝하게 하늘 동남쪽에 중진(重鎭)이로다. 원기가 발설되고 천기가 뱉었다 머금었다 한다. 구름과 연기가 침침하게 중턱을 감췄고, 그윽한 골짜기엔 아름다운 나무가 많다. 처음 숲 기슭을 좇아 참 취미를 찾아서 선경을 샅샅이 깊이 더듬었네. 벼랑에 달린 나는 폭포가 비같이 쏟아지며, 우레처럼 아래로 깊은 못을 진동시킨다. 산이 깊을수록 물이 맑으니, 맑은 그림자가 쪽빛보다 푸르다. 몸이 최고봉에 오르니 뭇 멧부리가 쇠못을 꽂은 것 같구나. 손으로 은하수를 만질 듯 하늘과 가까운데, 하늘 바람이 머리털을 불어 차게 흩날린다. 부상(扶桑)과 약목(若木)은 어디쯤인가. 푸른 바다 만리에 맑은 이내 뜨고 큰 물결이 어지럽게 부딪쳐 신기루 빛이 서로 잠기네. 퇴계(椎髻)와 훼복(卉服)이 바다를 건너 잇따라오니, 성군의 덕화가 멀리 미쳤음을 볼 수 있네. 아래로 보니 수십 주(州)의 인간들이 아득하게 굼틀거리는 어린 누에 같다. 산의 높음은 더할 수 없고, 산 속은 즐겁기도 하다. 흔들거리는 패다(貝多) 잎이고, 펄럭거리는 우발담(優鉢曇) 꽃이라. 아름다운 꽃과 이상한 나무 다투어 피는데, 봄바람이 일렁거리니 향기가 그윽하다. 진기하고 이상한 이름 모를 새가 푸른 날개로 너울너울 춤춘다. 푸른 이끼가 길에 가득하니 속인(俗人)의 발자취 없어지고, 그윽한 바위 끊어진 벼랑에 붙여 감실(龕室) 열렸네. 은은한 절을 우러러보니, 찬란한 단청이 눈부셔라. 당간의 깃발은 아득하게 비치고 종과 북소리 은은하게 들린다. 이 속에 마땅히 은거한 군자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털의 팽조(彭祖)ㆍ노자가 많으리라. 구절장(九節杖) 짚고, 부용관(芙蓉冠) 쓰고, 쌍성(雙成 서왕모의 시녀)이 말고삐 끌고 왕모(王母)가 말을 몰리라. 구하(九霞)의 푸른 술을 마시고, 동정(洞庭)의 누런 감자로 안주한다. 영지와 요초가 나날이 자라고, 푸른 이무기 검은 사슴의 잠이 한창이라. 달밤 숲이 침침한데 신령스런 바람소리는 헌원(軒轅)이 풍악을 벌여서 관함(官函)을 두드리는 듯, 고운(孤雲)이 도를 듣고 그 지경에 웅경(熊輕) 조신(鳥伸)의 묘한 법 배운 지 오래였다. 커다란 필적이 푸른 절벽에 비치니, 천재에 미담을 남겼네. 세상 사람은 무엇 때문에 부귀만 생각하고 술에 빠지는가. 그대는 거기에 돌아가 누웠으니, 구름 숲은 본성이 달게 여기던 바이네. 내 지금 속세의 그물에 떨어졌으니, 허덕거림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마음으로는 그대와 함께 소원대로 좋은 땅 가리어 띠 암자 얽고 싶었네. 작은 관록을 탐내어 능히 가지 못하고, 고생스럽게 파리처럼 구하며, 동어(鮦魚)처럼 탐낸다. 한 몸의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나니, 둥근 자루를 모난 구멍에 끼움과 무엇이 다르랴. 그대는 하늘 위에 학이요, 나는 언덕에 메추라기라. 몸을 기울여 남쪽을 바라보니, 조심하는 마음에 속이 타는 듯하네. 어찌하면 칡덩굴 부여잡고 새삼 덩굴 넘어뜨리며, 상상 꼭대기에서 긴 휘파람 불어 호연한 기운이 천지와 아울러 셋이 될꼬.” 하였다. 청학동(靑鶴洞) 지리산 속에 있다. 주에서는 서쪽으로 1백 47리의 거리이다.

○ 이인로의 《파한집》에, “지리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하게 잇따라서 대방군(帶方郡)에 와서는 수천 리를 서리어 맺히었는데, 산을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이다. 한 달이 넘게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늙은이들이 서로 전해 오는 말에, ‘그 안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여, 엎드려서 몇리를 지나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된다. 사방이 모두 옥토여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푸른 학이 그 안에 서식하는 까닭에 이렇게 청학동이라 부른다. 옛날 속세를 피한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한다. 지난날 나는 최상국(崔相國) 아무와 함께 이 속세를 떠나 길이 숨을 뜻이 있어서 청학동을 찾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장차 대롱[竹籠]에 송아지 두세 마리씩을 담아가지고 들어만 가면, 속세와 서로 상관하지 않아도 되리라.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유숙하니, 지나는 곳마다 선경 아닌 데가 없었다. 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났고 만 구렁 물이 다투어 흐른다. 대 울타리 초가 지붕에 복숭아꽃이 가렸다 비쳤다 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청학동이란 것은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나는 바위에다가 시를 적기를, ‘두류산 멀고 저녁 구름 낮으막한데, 만 구렁 천 바위가 회계(會稽)와 같네. 지팡이 끌며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을 격해서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린다. 누대는 아득히 삼신산이 멀고, 이끼 끼어 네 글자가 쓰인 것이 희미하네. 신선이 있는 곳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했다.” 하였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둥그런 지리산을 바라다 보니 만겹 구름에 항상 침침하여라. 뿌리가 백여 리 서리어 산세가 절로 빼어나니, 뭇 구렁이 감히 겨루지 못한다네. 층층한 멧부리와 가파른 돌벽은 기세가 뒤섞였고, 성긴 소나무와 푸른 잣나무는 차갑게 우거졌다. 시내가 감돌고 골이 굴러 별천지 되었는데, 한 구역 좋은 경치는 참으로 별천지로세. 사람 없어지고 세상 변해도 물은 제대로 흐르며, 초목이 우거져서 동서가 아득하다. 지금도 푸른 학은 홀로 깃드니, 벼랑에 붙은 한 가닥 길이 겨우 통하리. 좋은 밭 비옥한 땅이 편평하기 상과 같은데, 넘어진 담과 무너진 길이 쑥대 속에 묻혔구나. 숲이 깊으니 닭과 개 다니는 것 안 보이고, 해 지니 원숭이 울음만 들린다. 아마도 옛날에 은자가 살던 곳, 사람은 신선되고 산은 비었는가. 신선이 있고 없음은 논할 것 없고, 다만 높은 사람이 속세 벗어났음을 사랑한다. 나도 여기에 집 짓고 숨어서 해마다 요초 캐며 생을 마치고 싶다. 천태산(天台山) 지나간 일은 참으로 허황하고, 무릉도원 유적도 다시 몽롱하다. 장부의 출처를 어찌 구차하게 하랴. 제 몸만 맑게 하고 인륜을 어지럽힘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내 지금 노래 지으매 뜻이 무궁하니, 그날에 시 남긴 늙은이 우습기도 하여라.” 하였다.

옥산(玉山) 주 서쪽 55리에 있다. 우산(牛山) 주 서쪽 65리에 있다. 지리산의 남쪽 기슭인데, 형상이 소가 엎드린 것과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고려 때에 장군 강민첨(姜民瞻)이 이 산에다가 우방(牛房)ㆍ모방(茅房)의 두 절을 창건하였는데, 모방에는 민첨의 화상이 남아있다. 망진산(望晉山) 주 남쪽 6리에 있다. 영봉산(靈鳳山) 반성현(班城縣) 동쪽에 있다. 집현산(集賢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단성현(丹城縣) 편에도 나왔다. 월아산(月牙山 달엄산) 월아 부곡에 있다. 와룡산(臥龍山) 주 남쪽 60리에 있다. 사천현(泗川縣) 편에도 나왔다. 송대산(松臺山) 주 동쪽 42리에 있다. 바다 주 남쪽 60리에 있다. 흥선도(興善島) 주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남강(南江) 주 남쪽 1리에 있다. 강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지리산 운봉현(雲峯縣) 경계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주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의령현(宜寧縣) 경계에서 정암진(鼎巖津)이 된다.

○ 최함일(崔咸一)의 시에, “오리들이 쌍쌍으로 물 차고 날며, 영산홍(暎山紅)이 유리 같은 푸른 물에 거꾸로 비친다. 화공이 그려내기 어려운 가지가지 의미는, 서생의 한 수 시에 다 들어가네.” 하였다.

섬진(蟾津) 악양현(岳陽縣) 서쪽에 있는데 주에서는 93리이다. 지리산 서남쪽 물이 구례현 용왕연(龍王淵)과 합쳐서 여기에 와서 섬진이 되며, 동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운당진(雲堂津) 주의 동쪽 15리에 있으니, 남강 하류이다. 소남진(召南津) 주 서쪽 29리에 있으며 단성현 신안진(新安津)의 하류이다. 반룡포(盤龍浦) 주 남쪽 79리에 있으며, 바다 개펄이다. 정천(菁川) 주 서쪽 3리에 있으니, 곧 남강 상류이다. 구라량(仇羅梁) 주 남쪽 60리에 있으며 바닷가 개펄이다. 흥선도에 들어가는 자는 여기를 경유하여야 한다. 금산지(金山池) 주 동쪽 20리에 있다. 부지(釜池) 주 북쪽 3리에 있다. 가차례지(加次禮池) 가차례 부곡에 있다.

『신증』 방어산(防禦山) 반성현 북쪽 15리에 있다. 방아산[帖山]이라고도 하는데, 속음이 비슷하다. 급암(鈒巖) 악양현 강변에 있다. 어선이 항상 여기에 정박한다.

촉석강(矗石江) 누선이 있다.

○ 조위(曺偉)의 시에, “누 밑에 긴 강 백길이 맑은데, 채색 배 비스듬히 끌며 거울 속에 흐른다. 해는 모든 집의 발 그림자를 흔들고, 바람은 10리 피리소리를 전한다. 산 아지랑이는 아른아른 절벽에서 나고, 물빛이 일렁거려 높은 성을 움직이네. 지척의 홍진길에 머리 돌리니, 갈매기 한 마리 가벼이 뜨는 것 부러워라.” 하였다.

강주포(江州浦) 사천현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김양포(金陽浦) 곤양군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토산]닥종이[楮]ㆍ감ㆍ차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에 대렴(大廉)이 당(唐) 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면서 차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게 하였더니, 성덕왕(聖德王) 때에 비로소 무성하였다. ○ 하연(河演)의 신다(新茶) 시에, “진지(晉池) 풍미(風味)는 섣달 앞의 봄인데, 지리산 가에 초목이 새롭다. 금가루ㆍ옥 싸라기 달일수록 더욱 좋아, 깨끗한 빛깔과 빼어난 향기 맛이 더욱 진기하다.” 하였다. 대구(大口)ㆍ미역ㆍ잣[海松子]ㆍ청각(靑角)ㆍ해삼ㆍ꿀[蜂蜜]ㆍ전복[鰒]ㆍ생강ㆍ송이[松蕈]ㆍ석류ㆍ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옻ㆍ죽전(竹箭) 망진산ㆍ적량(赤良)ㆍ청암(靑巖)ㆍ급암ㆍ영선(永善) 등에서 산출한다. 매실. 『신증』 웅담ㆍ녹용ㆍ오미자ㆍ대ㆍ문어ㆍ낙지[絡締]ㆍ조기[石首魚].

[불우]단속사(斷俗寺) 지리산 동쪽에 있다. 골 입구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 또 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는데, 뒤에는 중 대감(大鑑)의 영당으로 되었다. 또 신라 병부령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중 신행(神行)의 비명과, 고려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중 대감의 비명과, 한림학사 김은주(金殷舟)가 지은 진정대사(眞定大師)의 비문이 있다.

○ 강회백(姜淮伯)이 과거하기 전에 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손수 심었다. 그 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 하였다.

불일암(佛日庵) 서쪽으로 쌍계사(雙溪寺)와 10여 리 거리이다. 벼랑과 골짜기가 아주 가파라서 길을 낼 만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절벽 중간을 한 사람이 갈 수 있게 파서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가는 자로서 놀라 땀이 나며 머리 끝이 쭈뼛하지 않는 자가 없다. 암자는 벼랑에 달아 맨 듯한데, 밑이 수백 길이나 된다. 못이 두 곳인데 깊이를 알 수 없으며, 하나는 용추(龍湫), 하나는 학연(鶴淵)이라 한다.

천불암(千佛庵) 천왕봉 밑에 있다. 돌이 집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수십 명을 들일 만하다. 안양사(安養寺) 섬진에서 동쪽으로 고개 셋을 넘어 60리에 이 절이 있다. 오대사(五臺寺)와 함께 훌륭한 절이라 일컫는다. 묵계사(黙契寺) 안양사 앞 냇물을 따라서 북쪽으로 가면 계곡 사이가 매우 험하고 좁은데, 40여 리를 지나 물의 근원까지 이르면 지역이 조금 트이고 토지도 또한 비옥하며 평평하다. 절이 지리산에서 가장 훌륭한 곳에 있다.

영신사(靈神寺) 지리산에 있다. 절 뒤 봉우리에 깎은 듯한 돌이 섰고, 그 꼭대기에 작은 돌이 평상처럼 놓여 있는데 좌고대(坐高臺)라 부른다. 속담에, “능히 그 위에 올라가서 절을 네 번하는 자는 불성을 깨친다.” 한다.

응석사(凝石寺) 집현산(集賢寺)에 있다. 하연(河演)의 조부의 진영(眞影)이 있다. 청곡사(淸谷寺) 달엄산[月牙山] 서쪽에 있다. 법륜사(法輪寺) 달엄산 동쪽에 있다. 향적사(香積寺) 천왕봉 밑에 있는데, 성모묘(聖母廟)의 향화(香火)를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와룡사(臥龍寺) 와룡산에 있다. 고려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놀고 간 곳이다.

오대사(五臺寺) 살천현(薩川縣) 남쪽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벌여 서서 그 모양이 대 같은데, 절이 그 복판에 있으므로 절 이름으로 되었다. 또 수정사(水精寺)라 하기도 한다. 따오기알 만한 수정주(水精珠)가 있는데, 여의주(如意珠)라 부르며, 은으로 된 끈으로 얽어서 보배로 전해 온다. 절 중의 말에는, “구슬을 반 동이 물에다가 담그면 물이 곧 넘친다.” 한다.

○ 권적(權適)의 기문의 대략에, “절 주지 진억(津億)이 일찍이 동문승(同門僧) 혜약(慧約) 등과 더불어 탄식하기를, ‘출가한 자는 오직 한 가지 해탈만을 기약할 뿐인데, 진실로 이것을 빙자하여 높은 명예와 후한 이를 구한다면, 이것이 어찌 출가한 본심이리오.’ 하고, 이로부터 깊이 숨으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이름난 산에 정사(淨社)를 지어서 동림(東林) 서호(西湖)의 유풍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알맞은 곳이 없었는데, 지리산 오대라는 황폐한 절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지리산은 해동의 큰 진산(鎭山)으로서 높고 깊고 넓고 큰 것이 천하에 견줄 데가 없으며, 오대사는 또 그 산의 남쪽에 있다. 그 산이 일어났다 낮아졌다 한 것이 다섯 겹이어서, 은은하게 대를 쌓아 놓은 듯한 까닭에 그것을 절 이름으로 한 것이다. 천 봉우리가 고리처럼 호위했고, 백 골짜기가 모여들어 현성(賢聖)이 그 속에 숨어 살고 있는 듯하여, 보는 자는 눈이 부시고 마음이 취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일찍이 남쪽에 갔다가 이곳에 와서 배회하며 두루 돌아보고, ‘여기가 큰 법이 머물 곳이다.’ 하였다. 진억선사(津億禪師)는 이 얘기를 듣고 용기를 내어 가서는 그곳을 발견하였다. 인하여 머물 터를 닦아, 시주를 모집하고, 몸소 목공을 거느리고 도끼를 잡고 빨리 지었는데, 집이 86칸이다. 선사는 수정 하나를 얻어서 아미타불상에 걸어서, 신심을 표명하고, 인하여 수정사(水精社)라 이름하였다. 송 나라 선화(宣和) 5년 계묘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 기유(己酉) 10월에 마쳤다. 3일동안 낙성법회를 베풀고, 엄천사(嚴川寺)의 수좌 성선(性宣)을 청해서 경을 설하였다. 임금께서 동남해 안찰 부사 기거사인 지제고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향을 올리고, 이어 은 2백 냥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신심이 쏠리어 와서 속인이 폭주하였다.” 하였다.

우방사(牛房寺) 우산에 있다.

지거사(智居寺) 지리산에 있다.

○ 정몽주(鄭夢周)가 주지 각경(覺冏)에게 부친 시에, “남으로 놀아 어느 곳에 시냇소리 듣는고. 지리산이 높고 높아 만 길이나 푸르네. 봄 원(院)에 해 길고 일 없으니, 사미가 와서 묘법연화경 배우리.” 하였다.

화엄사(華嚴寺)ㆍ신흥사(神興寺) 모두 지리산에 있다.

쌍계사(雙溪寺) 지리산에 있다. ○ 세상에 전하기로는, 최치원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뜰에 늙은 괴목(槐木)이 있는데, 거의 백 아름이나 된다.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냇물을 가로질러 서리서리 얽히어 다리 같으므로 절 중이 인해서 다리로 만들었다. 치원이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고을 입구에 돌 두 개가 마주 있어 문 같은데, 동쪽 돌에는 쌍계, 서쪽 돌에는 석문(石門)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또 옛 비가 있는데 비문은 치원이 지은 것이다. ○ 최치원이 이 절에 있으면서 호원상인(顥源上人)에게 부친 시에, “종일토록 머리 숙이고 붓끝을 희롱하니, 사람마다 입 다물어 맘속 말하기 어려워라. 진세를 멀리 떠난 건 비록 즐거우나, 풍정(風情)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할꼬. 개인 놀 단풍 길에 그림자를 다투고, 비 오는 밤 흰 구름 여울에 소리 연했다. 읊조리는 마음 경치를 대해 얽매임 없으니, 사해의 깊은 기틀 도안(道安)을 생각노라.” 하였다.

영대사(靈臺寺) 지리산에 있다. ○ 정추(鄭樞)의 시에, “이끼 낀 길 지팡이 짚고 굽이굽이 내를 따라 가니, 대숲이 잠겼는데 시냇물 시끄러워 길이 더욱 아득하다. 지는 해 창자 끊어지는 곳, 구름에 연한 높은 나무에 소쩍새 운다.” 하였다.

용암사(龍巖寺) 반성현(班城縣) 영봉산(靈鳳山) 속에 있다. 고려 중 무외(無畏)가 거처하던 곳이다.

○ 고려 박전지(朴全之)의 기문에, “옛날에 도선(道詵)이 말하기를, ‘만약 세 암사(巖寺)를 창립하면 삼한이 통일되어 전쟁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선암(仙巖)ㆍ운암(雲巖)과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하였다.

『신증』 【총묘】 하륜(河崙)묘 주 북쪽 오이방(梧耳方)에 있다.

[고적]흥선폐현(興善廢縣) 곧 흥선도이다. 본래 고려 유질부곡(有疾部曲)인데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본 주에 와서 속하였고, 충선왕(忠宣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왜구 때문에 인물이 모두 없어졌다. 지금은 직촌(直村)이다.

○ 원종 10년에 일본이 우리 변경을 침략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여기에 간직하였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에 옮겼다.

굴촌폐현(屈村廢縣) 주 서쪽 50리에 있다. 신라 때에 본주에 예속되었다. 가차례부곡(加次禮部曲)ㆍ어아부곡(於牙部曲) 모두 주 남쪽 10리에 있다. 침곡부곡(針谷部曲) 주 서쪽 15리에 있다. 율곡부곡(栗谷部曲) 주 서쪽 30리에 있다. 부곡부곡(釜谷部曲) 주 북쪽 5리에 있다. 인담부곡(鱗潭部曲) 영선현에 있으며 주와 30리 거리이다. 송자부곡(松慈部曲) 영선현에 있다. 월아부곡(月牙部曲) 주 동쪽 15리에 있다.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선천(鐥川)이라는 명칭도 있으며, 주 서쪽 40리에 있다. 송곡향(松谷鄕) 주 남쪽 30리에 있다. 복산향(福山鄕) 영선현에 있다. 벌대소(伐大所) 주 서쪽 40리에 있다. 수곡소(水曲所) 주 서쪽 30리에 있다. 화곡소(火谷所)ㆍ대곡소(大谷所) 모두 주 동쪽 30리에 있다. 수대곡소(水大谷所) 주 남쪽 40리에 있다. 갈곡소(葛谷所) 주 동쪽 20리에 있다.

시중백(侍中柏) 정이오의 시중백 시의 서문에, “시중백이란 것은 개국공신 좌시중(開國功臣左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심은 것이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공이 진주에 목사로 와서 일으키고 세운 것이 많았다. 고을에 온 다음 해에 산중에서 어린 잣나무를 옮겨다가 관아 북헌(北軒)에다가 심었다. 그가 임기가 차서 갈려 간 뒤에 진주 백성은 공의 덕을 사모하여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이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았다. 대개 잣나무는 절개가 있어 사시를 통하고 천년을 지나도록 지엽이 변하지 않으니, 보통 초목과는 아주 다르다. 누구가 사랑하지 않으랴.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하셨는데, 이는 그 절개를 사랑한 것이다. 공의 사랑하는 바가 성인의 뜻과 같으니, 그의 공이 개국의 으뜸으로 벼슬이 총재(冢宰)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음이 마땅하다. 지금 공이 간 지 48년이다. 조그마하던 잣나무가 푸르름이 하늘을 떨치고 뇌우(雷雨)를 밀칠 만큼 되었으니, 그 천연 그대로의 본성을 온전히 한 것이요, 공의 당시 정사 또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절공 이후로 이 고을을 다스린 자가 또 몇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영목사 최공이(崔公迤)가 처음으로 이것을 읊조렸으니, 정절공에게 가만히 합함이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덥고 싸늘함을 반백 년 겪었으니, 세한(歲寒)의 재목이 제세(濟世)의 현인과 합치되네. 손수 영재(鈴齋) 가에 심은 뜻 알고자 할진대, 맑은 바람을 남겨 후세에 전하세.’ 하였다.” 한다.

암석이서(巖石異書) 우리 태조(太祖)가 잠저에 있을 때에, 중이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지리산 바윗돌 사이에서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 글에는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삼한(三韓)을 바로잡는다.’는 글귀가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아 들이려 한즉, 벌써 가버려서 찾지 못하였다.

남지이조(南池異鳥) 신라 헌덕왕(憲德王) 13년에 헌창(憲昌)이 정주 도독(菁州都督)으로서 웅천(熊川)의 진장(鎭將)으로 옮겨 가서 배반하였다. 이보다 먼저 정주 태수의 청사(廳事) 남쪽 못 가운데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몸 길이는 5척이나 되며 빛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쯤 되는 아이 같았다. 주둥이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이고, 눈은 사람 같으며, 목구멍은 다섯 되들이 그릇만 하였는데 3일 만에 죽었다. 당시 사람이, “헌창이 패망할 조짐이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구라량폐영(仇羅梁廢營) 각산(角山)에 있다. 예전에는 수군만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고성현(固城縣) 사량(蛇梁)으로 옮겼다. 송대산성(松臺山城) 토축(土築)으로 둘레가 4천 73척이었는데 지금은 무너졌다. 성산성(城山城) 하나는 주 동쪽 44리에 있는데 토축이며, 둘레는 2천 8백 14척이고, 하나는 주 서쪽 48리에 있는데 석축이며, 둘레는 9백 77척인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신증』 명진부곡(溟珍部曲) 영선(永善) 동쪽 15리에 있다. 고려 말기에 거제현(巨濟縣) 명진포(溟珍浦) 사람들이 여기에 우거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그들이 본토에 돌아갔으나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진성부곡(晉城部曲) 주 동서쪽 15리에 있으며 산 꼭대기에 성터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