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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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
8.동평부(東平府)는 제주(濟州)이고,
山東省(領十府。二直隸州。九州。九十六縣)。
○泰安府(名汶陽。領一州六縣)泰安縣(名梁父附府)東平(須胸)東阿(設鎮)平陰(榆止)新泰(平陽)萊蕪(夾谷)肥城(蛇邱)-地輿名目(一十九省)
泰安府,中国古代行政区划名。清雍正十三年((1735年)升泰安州置,治泰安县(今山东泰安市)。辖境相当今山东省泰安、莱芜、新泰、肥城、平阴、东阿、东平等市县地。1913年废。
東平府 歷史
東平,古稱東原。西周至唐,境內先後置東平國、東平郡、宿城縣。公元788年(唐貞元四年),宿城縣改名東平縣,沿用至今。
西周,境內置須句、鄣、宿等諸侯國。春秋,須句屬魯;鄣屬齊;宿屬宋。戰國時,鄣、宿為齊無鹽邑。
秦代,始設須昌縣(治今埠子坡)、無鹽縣(治今無鹽村)、張縣(治今霍庄),屬薛郡。
西漢,增置富城、章縣,與無鹽縣先後屬梁國、濟東國、大河郡、東平國(國治無鹽縣宿城。)須昌、壽良二縣時屬東郡。
東漢,須昌、無鹽、壽張、富城、章縣同屬東平國。
三國魏,撤章縣,另四縣沿屬東平國(治遷壽張縣治霍庄)。
西晉,東平國治遷須昌城。東晉,改東平國為東平郡(郡治宿城)。晉代境內四縣沿襲。
南北朝,隸屬未變。南朝宋,撤富城,北魏又復置。至北齊,富城縣廢制,無鹽併入須昌縣(治遷宿城)。北周,境內須昌、壽張二縣屬魯州。 隋代,壽張縣治壽張集,屬濟北郡。596年(隋開皇十六年),須昌縣遷回原治;就原無鹽縣境置宿城縣(治宿城)。此須昌、宿城二縣屬鄆州(州治鄆城)。
唐代,須昌、宿城縣與壽張縣同屬鄆州(州治遷須昌)。鄆州先後為平盧、天平軍節度使治。627年(唐貞觀元年),宿城併入須昌縣。707年(景龍元年),復置宿城縣。788年(貞元四年),宿城縣改名東平縣,與須昌同附郡郭,此為東平縣名之始。830年(太和四年),改東平縣為天平縣。832年(太和六年),撤天平縣併入須昌縣。
五代,須昌、壽張縣沿屬鄆州。923年(後唐同光元年),改須昌為須城縣。
宋代,隸屬沿襲五代。997年(宋至道三年),置京東西路安撫使於鄆州(須城)。1000年(咸平三年),河決鄆州,州城浸沒,遂移州、縣城於五陵山前五里平原處(今州城)。1119年(宣和元年),改鄆州為東平府(治須城)。
金代,1128年(金天會六年,)立劉豫為「大齊」帝,先治大名,後遷須城偽稱東京。並以須城為山東西路首邑。境內須城、壽張縣仍屬東平府(治須城)。
元代,須城、壽張二縣屬東平路,須城為路城。
明代初年,須城為東平府治,壽張沿屬。1370年(明洪武三年),壽張縣分並須城、陽谷縣。1375年(洪武八年),東平府降為州,同年撤須城縣併入東平州,屬濟寧府。1380年(洪武十三年),復置壽張縣於王陵店(今台前縣),始離本境。1385年(洪武十八年),東平州改屬兗州府。明代東平州領轄汶上、東阿、平陰、陽谷、壽張5縣。
清代前期,東平州仍屬兗州府。1730年(清雍正八年),升東平州為直隸州,領轄東阿、平陰、陽谷、壽張4縣。1735年(雍正十三年),撤直隸州為散州,沿治東平州城。
1913年,改東平州為東平縣,治所沿襲,屬濟西道(駐聊城)。1928年,裁道制,直屬山東省政府。1935年,屬省第一實驗區行政長官公署(駐濟寧)。1938年,改屬省第二行政督察區。
須城縣,古縣名。五代唐避其先祖李國昌名諱,改須昌縣置。治今山東省東平縣西北,為鄆州治。北宋咸平三年(1000年)徙治今東平縣。為東平府治,元為東平路治,至正二十七年(1367年)降為東平州治。明洪武七年(1374年)省入東平州。
古济州,治于巨野。1150年巨野水灾,遂移济州于任城(今济宁)。元升济州为府治,由于地势较高不受泛滥之害居其中而获济水之宁,故名“济宁府”。济宁之名首见。1983年改为地级市。
济宁历史沿革
约于公元前2000年夏少康时,封此地为任国。秦称任城县。
后周广顺二年(952年)置济州,设治于巨野,任城县属济州。北宋仍之。
金朝天德二年(1150年)迁济州治所于任城。后或在任城或在巨野几经变迁,终因任城地势高亢可防水患,遂得安宁,而于元至正八年(1348年)定治于此,是为“济宁”得名之由来。
明洪武元年(1368年)改济宁路为府,仍治任城。后降济宁府为州,任城遂废名入济宁州。
清雍正二年(1724年)改为直隶州,领三县直属山东省。
1913年改直隶州为济宁县,先后属岱南道、济宁道等,至抗战胜利后,属第二督察专员公署。
1946年1月济宁第一次解放,以城区和郊区划为济宁市。同年9月被国民党军队占领,又复为县。
1948年7月重获解放,仍称济宁市。
1949年分属于鲁中南行署的尼山、台枣两个专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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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제주목(濟州牧)
도안무사(都安撫使)【3품(三品)이면 안무사(安撫使)라고 칭한다. 】·판관(判官)【겸감목관(兼監牧官). 】·교수 관(敎授官)·검률(檢律)·의학 교유(醫學敎諭).
본주(本州)는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주(州)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태초(太初)에는 사람과 물건이 없었는데, 신선[神人]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지금도 주산(主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맏을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세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다. 세 사람은 황량한 땅에서 사냥을 하여서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그 고기로 식량을 하였다. 하루는 자주 색깔로 칠하여 봉(封)한 목함(木函)이 두둥실 떠서 동쪽 바닷가에 이르는 것을 보고 가서 열어보니, 목함(木函) 속에 또 석함(石函)이 있었다. 붉은 띠[帶]에 자주색 옥을 입은 사자(使者) 한 사람이 있어서 석함을 열었는데, 푸른 옷을 입은 처녀[靑衣處女] 세 사람과 망아지·송아지와 오곡(五穀)의 종자가 나왔다. 이어 말하기를, ‘나는 바로 일본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기를,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 산[嶽]에 신선[神子] 세 사람이 내려와서 장차 나라를 세우려고 하나 배필이 없다.」 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고 오게 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마땅히 짝을 이루어서 대업(大業)을 이루도록 하십시요.’ 하고는, 사자(使者)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차례대로 나눠서 혼인하고, 샘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화살을 쏘아 살 땅을 선택하였는데, 양을나가 사는 데를 ‘제일도(第一都)’, 고을나가 사는 데를 ‘제이도(第二都)’, 부을나가 사는 데를 ‘제삼도(第三都)’라고 하였다. 비로소 오곡(五穀)을 심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창해갔다. 15대 손(孫)에 이르러, 고후(高厚)·고청(高淸)의 형제 세 사람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5146) 에 이르렀는데, 대개 신라가 번성할 때였다. 그때 객성(客星)이 남방(南方)에 나타나니,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이 내조(來朝)할 징조입니다.’ 하였다. 세 사람이 드디어 신라에 입조(入朝)하매, 왕이 가상히 여겨서, 맏[長子]을 ‘성주(星主)’라고 하니, 그 움직인 별을 상징한 것이요, 둘째[二子]를 ‘왕자(王子)’라고 하니, 왕이 고청(高淸)으로 하여금 바지가랑이 밑으로 빠져 나가게 하고서 자기 아들같이 사랑하였으므로,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요, 막내[季子]를 ‘도내(都內)’라고 하고, 읍(邑)의 이름을 ‘탐라(耽羅)’라고 하니, 대개 신라 때에 처음으로 탐진(耽津)에 이른 까닭이었다. 각기 보개(寶蓋)와 옷과 띠를 주어서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였고 본국[國家]을 정성껏 섬겼으며, 고(高)를 성주(星主)로, 양(良)을 왕자(王子)로, 부(夫)를 도상(都上)으로 고쳤고, 뒤에 또 양(良)을 양(梁)으로 고쳤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해동 안홍기(海東安弘記)에 구한(九韓)을 열거(列擧)하였는데 탁라(乇羅)가 네 번째에 있다. 백제 문주왕(文周王) 2년 병진【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원휘(元徽) 4년.】에 탐라국(耽羅國) 사자(使者)에게 은솔(恩率)이란 벼슬을 주었고, 동성왕(東城王) 20년 경신【남제(南齊) 태조(太祖) 건원(建元) 2년.】에 탐라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아니한다 하여 왕이 친정(親征)하여 무진주(武珍州)5147) 에까지 이르렀는데, 탐라에서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었으므로 이에 중지하였다.”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라.”하였다. 백제가 망하니,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 임술【당나라 고종(高宗) 용삭(龍朔) 2년.】에 탐라 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좌평은 백제의 벼슬 이름이다. 】고려 숙종(肅宗) 10년 을유【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4년.】에 탁라(乇羅)를 고쳐서 탐라군(耽羅郡)으로 하였고, 의종(毅宗) 때 현령관(縣令官)으로 하였다. 충경왕(忠敬王) 11년 경오【송나라 도종(度宗) 함순(咸淳) 6년. 】역적 김동정(金同正)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탐라에 들어가서 난(亂)을 일으켰는데, 4년이 지나 14년 계유【몽고 세조(世祖) 지원(至元) 10년.】에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에게 명하여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년 정축【지원(至元) 14년.】에 원나라 조정(朝廷)에서 목마장(牧馬場)으로 삼았는데, 21년 갑오에 왕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나라 승상(丞相) 완택(完澤) 등이 상주(上奏)하여, “그 탐라를 고려에 돌려주는 것이 옳겠다.”하는 성지(聖旨)를 받았고, 익년(翌年) 을미【원정(元貞) 원년.】에 탐라를 고쳐 제주로 하였고, 비로소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으며, 26년 경자【대덕(大德) 4년.】에 원나라 황태후(皇太后)가 또한 내구마(內廐馬)를 방목(放牧)하였는데, 31년 을사【대덕 9년.】에 도로 본국(本國)에 환속하였다. 충숙왕(忠肅王) 5년 무오【원나라 인종(仁宗) 연우(延祐) 5년.】에 초적(草賊) 사용(士用)·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난(亂)을 꾸미니, 본토 사람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모두 잡아 죽이고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8년 기유【명(明)나라 홍무(洪武) 2년.】에 원나라의 목자(牧子) 합치(哈赤)가 발호(跋扈)하여 관리를 살해하였는데, 6년이 지나 23년 갑인 8월에 나라에서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을 보내어 합치(哈赤)를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다시 관리를 두었다. 본조 태종(太宗) 2년 임오에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 등이 성주와 왕자의 호가 너무 참람한 것 같다고 하여, 고치기를 청(請)하였으므로,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왕자를 우도 지관(右都知管)으로 하였다.
진산(鎭山)은 한라(漢拏)이었다. 주의 남쪽에 있는데, 일명 두무악(頭無岳) 또는 원산(圓山)이라 한다. 그 고을 관원이 제사를 지내는데, 둥그스름하고 높고 크며, 그 꼭대기에는 큰 못이 있다.
호수가 5천 2백 7호요, 인구가 8천 3백 24명이요, 군정은 2천 66명이다.【마군(馬軍)이 8백 43명이요, 보군(步軍)이 1천 2백 23명이다. 】
토성(土姓)이 고(高)·양(梁)·부(夫)요, 인물은 문하 시랑(門下侍郞) 고조기(高兆基)이니, 의종(毅宗) 때 사람이다.
그 땅의 기후가 따뜻하며, 풍속이 미욱하고 검소하다. 간전(墾田)이 3천 9백 77결이요,【논이 31결이다. 】토의(土宜)가 밭벼[山稻]·기장·피·콩·메밀·밀보리이다. 토공(土貢)이 대모(玳瑁)·표고·우무[牛毛]·비자·감귤·유자·유감(乳柑)·동정귤(洞庭橘)·금귤(金橘)·청귤(靑橘)·돌귤[山橘]·전복·인포(引鮑)·퇴포(槌鮑)·조포(條鮑)·오징어·옥두어(玉頭魚)·곤포(昆布)·돌유자나무[山柚子木]·이년목(二年木)·비자나무[榧子木]·좋은 말[良馬]이요, 약재는 진피(陳皮)·마뿌리[山藥]·석골풀[石]·초골풀[草]·소태나무열매[川練子]·구리대뿌리[白芷]·팔각(八角)·영릉향(零陵香)·오배자(五倍子)·치자·향부자(香附子)·모과·묏미나리[柴胡]·푸른귤껍질[淸皮]·백변두(白扁頭)·바곳[草烏頭]·엄나무껍질[海東皮]·후박(厚朴)·오징어뼈·두충(杜沖)·순비기나무열매[蔓荊子]·석결명(石決明)·끼무릇뿌리[半夏]·누른국화[黃菊]·녹용·박상(舶上)·회향(茴香)·탱자껍데기[枳殼]다.
읍석성(邑石城)【둘레가 9백 10보이다. 】봉화가 9곳이니, 주의 동문(東門)【동쪽으로 별도(別刀)에 응한다. 】별도(別刀)【동쪽으로 원당(元堂)에 응한다. 】·원당(元堂)【동쪽으로 서산(西山)에 응한다. 】·서산(西山)【동쪽으로 입산(笠山)에 응하고, 또 동쪽으로 정의현(旌義縣) 지말산(只末山)에 응한다. 】·남문(南門)【서쪽으로 도도리산(道道里山)에 응한다. 】·도도리산(道道里山)【서쪽으로 수산(水山)에 응한다. 】·수산(水山)【서쪽으로 고내(高內)에 응한다. 】·고내(高內)【서쪽으로 곽산(郭山)에 응한다. 】·곽산(郭山)【서쪽으로 판포산(板浦山)에 응하고, 또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 차귀산(遮歸山)에 응한다. 】이다. 목장【말이 3천 3백 52필이다. 】
이상한 일[靈異]은 고려 목종(穆宗) 5년 임오 6월에 탐라산(耽羅山)에 구멍 네 개가 뚫려서 시뻘건 물이 치솟아 올랐고, 10년 정미에는 바다 가운데 산 하나가 솟아나왔다. 탐라에서 보고하니, 왕이 태학 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가서 조사하게 하였다. 탐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솟아나오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고, 벼락치는 것같이 땅이 움직였습니다. 무릇 7주야(晝夜)가 지나서야 비로소 개었는데, 산에는 풀과 나무가 없고, 연기만이 그 위를 덮고 있습니다. 바라다 보니, 석류황(石流黃) 같기도 하여 사람이 갈 수가 없습니다.”하였으나, 전공지가 몸소 산 아래에까지 나아가 그 모양을 그려서 나라에 바쳤다.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한라산 주신(主神)의 아들 계제(季弟)가 살아서 거룩한 덕(德)이 있었으므로 죽어서 명신(明神)이 되었는데, 마침 호종단(胡宗旦)5148) 이 이 땅을 진무(鎭撫)하는 제사를 지내고 배를 타고 강남(江南)으로 떠나려 할 때, 신(神)이 매[鷹]로 화(化)하여 날아서 돛대 꼭대기에 올라 앉았는데, 조금 있다가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단의 배가 난파[擊碎]되어 서쪽 지경인 비양도(飛揚島)의 암석(巖石) 사이에 침몰하였다. 나라에서 그 신령함[靈異]을 포장(褒奬)하여 식읍(食邑)을 하사하고, 광양왕(廣壤王)으로 봉하였는데, 해마다 나라에서 향(香)과 폐백(幣帛)을 내려서 제사를 지낸다.
【영인본】 5책 667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전라도 / 제주목 / 정의현
○ 지리지 / 전라도 / 제주목 / 대정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제주목(濟州牧)
동쪽은 정의현(旌義縣) 경계까지 80리이고, 서쪽은 대정현(大靜縣) 경계까지 81리이며, 남쪽으로는 바다까지 1백 20리이고, 북쪽으로 바다까지 1리이다.
[건치연혁]본래 탐라국(耽羅國)인데 혹은 탁라(乇羅)라고도 한다. 전라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넓이가 4백여 리이다. 처음에 양을나(良乙那)ㆍ고을나(高乙那)ㆍ부을나(夫乙那)라는 세 사람이 있어 그 땅에 나누어 살고, 그 사는 곳을 도(都)라고 이름하였다. 신라 때에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가 그 아우 두 사람과 함께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에 조회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후에게 성주(星主)라 칭호하고, 그 둘째 아우는 왕자(王子)라 하고, 끝 아우는 도내(都內)라 하여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내려주었다. 《고려사(高麗史)》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처음에는 인물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다. 지금 진산(鎭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는 구멍이 있으니, 이곳이 세 신인이 나온 땅이다. 맏이는 양을나이고 다음은 고을나이고 세 번째는 부을나인데, 세 사람이 궁벽한 황무지에 돌아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으로 옷을 해입고 고기를 먹고 살았다. 하루는 보니, 붉은 진흙으로 봉한 목함(木函)이 동해 가에 떠 이르렀다. 가까이 가서 열어보니, 안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주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따라왔다. 석함을 여니 푸른옷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ㆍ송아지와 오곡의 종자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日本國) 사신인데, 우리 왕이 이 세 딸을 낳고 이르기를, 「서해 가운데 있는 산에, 신의 아들 세 사람이 내려와서 나라를 열려고 하는데 배필이 없다.」 하고, 이에 신에게 명하여, 세 딸을 모시고 왔으니, 배필을 삼아 큰 업을 이루소서.’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대로 나누어 장가들었다. 샘물 맛이 좋고 땅이 비옥한 곳에 나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정하여,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고,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여,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마다 부유하고 번성해졌다. 15대 손 고후(高厚)ㆍ고청(高淸) 형제 세 사람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닿았으니, 이때는 신라의 융성한 시대였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방에 보였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조회할 징조이다.’ 하였다. 고후의 무리가 이르자 왕이 가상히 여기어 고후에게 성주(星主)란 칭호를 주었으니 객성이 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왕은 고청을 자기의 가랑이 아래로 나가게 하고 사랑하기를 자기 자식같이 하여 왕자(王子)라고 일컫고 그 막내를 도내(都內)라고 일컬었다. 고을 이름은 탐라(耽羅)라 하였으니, 처음 올 적에 탐진에 닿아서 신라에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각각 보개(寶蓋)와 옷을 주어 보냈다. 이때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신라를 공경히 섬기니, 드디어 고(高)를 성주로 삼고 양(良)을 왕자로 삼고 부(夫)를 도상(都上)으로 삼았다. 뒤에 양(良)을 고쳐 양(梁)으로 하였다.” 하였다. 그 뒤에 백제에 복종하여 섬겼는데, 동성왕(東城王) 21년에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친히 정벌하려고 무진주(武珍州)에 이르자 그 성주가 듣고 사자를 보내어 죄를 용서하기를 비니, 이에 그만두었다. 백제가 멸망함에 미쳐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탐라국주(耽羅國主)의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20년에 태자 말로(末老)를 보내어 조회하니, 성주 왕자의 작위를 주었다. 숙종(肅宗) 10년에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耽羅郡)으로 만들었고, 의종(毅宗) 때에 강등하여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11년에 반적(叛賊)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그 땅에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4년이 지나 왕이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쳐서 평정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년에 원(元) 나라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만들었는데, 20년에 왕이 원 나라에 조회하고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 나라 승상 완택(完澤) 등이 아뢰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다시 우리에게 예속시켰다. 이듬해에 제주(濟州)로 고치고 비로소 판비서성사(判祕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다. 26년에 원 나라 황태후(皇太后)가 또 그 땅에 말을 방목하다가 31년에 다시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충숙왕(忠肅王) 5년에 좀도둑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난을 꾸미니, 그 지방 사람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일으켜 모두 베고 원 나라에 보고하여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1년에 원 나라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니, 원 나라에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를 탐라만호(耽羅萬戶)로 삼았다. 아단불화가 본국의 천한 노예 김장로(金長老)와 함께 주(州)에 이르러 만호 박도손(朴都孫)을 매질하고 바다에 던져 죽였다. 16년에 원 나라가 이 주(州)를 다시 우리나라에 예속시켰다. 이때에 원 나라 목자(牧子)들이 사나워서 여러 번 국가에서 보낸 목사와 만호를 죽이고 배반하였다. 김유(金庾)가 토벌하게 되니 목자들이 원 나라에 호소하여 만호부(萬戶府)를 두기를 청하였다. 왕이 아뢰어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관리를 임명하고 목자들이 기른 말을 가려 바치기를 전례와 같이 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그대로 좇았다. 18년에 원 나라 목자 하치[哈赤]가 제 마음대로 날뛰어 관리를 살해하니, 6년 뒤에 왕이 도통사 최영(崔瑩)을 보내어 하치를 쳐서 멸하고 다시 관리를 두었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하였다. 태종(太宗) 2년에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의 무리가 성주 왕자의 호가 참람하다 하여 고치기를 청하니,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삼고 왕자를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삼았다. 세조(世祖) 12년에 안무사를 고쳐 병마수군절제사를 삼았다가, 뒤에 목사로 고치고 진(鎭)을 두었다.
진관(鎭管) 현(縣)이 2 정의(旌義)ㆍ대정(大靜).
[풍속]백성의 풍속이 어리석고 검소하며 예절이 있다. 백성의 풍속이 어리석고 검소하며, 또 초가가 많고 빈천한 백성들은 부엌과 온돌이 없고 땅바닥에서 자고 거처한다. 남녀가 짚신 신기를 좋아하고 방아가 없으며, 오직 여자가 손으로 나무 절구에 찧는다. 등에 나무통을 짊어지고 다니고 머리에 이는 자가 없다. 잘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남자나 여자나 관원을 길에서 만나면 달아나 숨고 남자는 길 옆에 엎드린다.
사투리가 난삽하다. 촌 백성의 말이 난삽하여 먼저는 높고 뒤는 낮다.
밭머리에 무덤을 만든다. 상사를 마친 지 백일이면 복을 벗고 밭머리를 조금 파고 무덤을 만든다. 간혹 삼년상을 행하는 자도 있다. 풍속이 풍수지리와 점을 사용하지 않고 또 부처의 법도 쓰지 않는다.
음사(淫祀)를 숭상한다. 풍속이 음사(淫祀)를 숭상하여 산과 숲, 내와 못, 높고 낮은 언덕, 나무와 돌에 모두 신의 제사를 베푼다. 매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날까지 남녀 무당이 신의 기(旗)를 함께 받들고 경을 읽고 귀신 쫓는 놀이를 하는데 징과 북이 앞에서 인도하며 동네를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다투어 재물과 곡식을 내어 제사한다. 또 2월 초하룻날 귀덕(歸德) 금녕(金寧) 등지에서는 나무 장대 열둘을 세워 신을 맞아 제사한다. 애월포(涯月浦)에 사는 자는 나무 등걸 형상이 말머리 같은 것을 구해서 채색 비단으로 꾸며 말이 뛰는 놀이를 하여 신을 즐겁게 하다가 보름날이 되면 그만두는데, 그것을 연등(燃燈)이라고 한다. 이달에는 배타는 것을 금한다. 또 봄가을로 남녀가 광양당(廣壤堂)과 차귀당(遮歸堂)에 무리로 모여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에게 제사한다. 또 그 땅에 뱀ㆍ독사ㆍ지네가 많은데 만일 회색뱀을 보면 차귀(遮歸)의 신이라 하여 죽이지 말라고 금한다.
오래 사는 사람이 많다. 지방 사람이 질병이 적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없고 나이 팔구십 세에 이르는 자가 많다.
일기가 항상 따뜻하다. 봄 여름에는 운무가 자욱하게 끼고 가을과 겨울이 되면 갠다. 초목과 곤충이 겨울을 지나도 죽지 않으며 폭풍이 자주 인다.
산에는 사나운 짐승이 없다. 호랑이ㆍ표범ㆍ곰ㆍ승량이ㆍ이리 등 사람을 해하는 짐승이 없고 또 여우ㆍ토끼ㆍ부엉이ㆍ까치 등속이 없다.
그물을 쓰지 않는다. 산과 바다가 험악하여 그물을 쓰지 못한다. 고기는 낚고 짐승은 쏜다. 조리희(照里戲) 매년 8월 15일이면 남녀가 함께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왼편 오른편으로 나누어 큰 동아줄의 두 끝을 잡아당겨 승부를 결단하는데 동아줄이 만일 중간에 끊어져서 두 편이 땅에 자빠지면 구경하는 사람들이 크게 웃는다. 이것을 조리(照里)의 놀이라고 한다. 이날에 또 그네 뛰는 것과 닭 잡는 놀이를 한다.
풍속이 별나고 군사는 사납고 백성은 어리석다. 권근(權近)이 목사 이원항(李元恒)을 보내는 서(序)에, “탐라가 바다 가운데 있어 처음에 신라 때로부터 해마다 직공(職貢)을 닦아 우리의 부속국이 되었는데, 고려 때에 제주목을 두었고, 국가에서 그대로 하여 반드시 조정 신하 중에서 문무의 재주와 지략이 있고 위엄과 은혜가 평소에 드러난 자를 뽑아서 목사를 시킨다. 그러나 바람에 돛을 달고 바다에 떠서 아득하고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에 수백 리 무서운 파도와 한없이 험한 것을 건너서 도착하고 보면, 풍속은 별나고 군졸은 사납고 백성은 어리석어서 기쁠 때는 사람이지만 성내면 짐승 같아서 제어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땅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다. 고려 문종(文宗) 12년에 문하성이 아뢰기를, “탐라는 땅이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하여 오직 목도(木道)질로 생활을 영위한다.” 하였다.
풍속이 야만스럽고 거리가 멀다. 정이오(鄭以吾)가 박덕공(朴德恭)을 임지로 보내는 서(序)에, “그 풍속이 야만스럽고 거리도 먼 데다가 성주(星主)ㆍ왕자(王子)ㆍ토호(土豪)의 강한 자가 다투어 평민을 차지하고 사역(使役)을 시켜, 그것을 인록(人祿)이라 하여 백성을 학대하여 욕심을 채우니, 다스리기 어렵기로 소문이 났다.” 하였다.
돌을 모아서 담을 쌓았다. 《동문감(東文鑑)》에, “그 땅에 돌이 많고 건조하여 본래 논은 없고 오직 보리ㆍ콩ㆍ조만이 생산된다. 그 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서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김구(金坵)가 판관이 되었을 때에 백성의 고충을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하였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혼인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춘다. 납채(納采)를 하는 자도 그렇다. 혼인날 저녁에 사위가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부의 부모에게 뵙고 취한 뒤에야 방에 들어간다. 풍속이 소주를 많이 쓴다.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은데, 중이 모두 절 옆에 집을 짓고 처자를 기른다.
[형승]북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베고 남쪽으로 높은 산을 대하였다.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기(弘化閣記)〉. 집집마다 귤과 유자요 곳곳마다 준마(駿馬)로다 위와 같다. 바다가 아득하고 멀다. 정이오(鄭以吾)의 서(序)에, “본토에서 탐라를 바라보면 큰 바다 아득하고 먼 가운데에 따로 한 구역이 되어 부속국과 같다.” 하였다. 치고 싸우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의종(毅宗) 13년에 안무사 조동희(趙冬曦)가 들어와 뵙고 말하기를, “탐라는 험하고 멀어서 치고 싸우는 것이 미치지 못하는 곳입니다.” 하였다. 가운데는 대단히 넓다. 《동문감》에, “남해 가운데에 있어 수로로 무려 백 리나 되고 그 가운데가 대단히 넓다.” 하였다.
[산천]한라산(漢拏山) 주 남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한라(漢拏)라고 말하는 것은 운한(雲漢 은하(銀河))을 나인(拏引 끌어당김)할 만하기 때문이다. 혹은 두무악(頭無岳)이라 하니 봉우리마다 평평하기 때문이요, 혹은 원산(圓山)이라고 하니 높고 둥글기 때문이다. 그 산꼭대기에 큰 못이 있는데 사람이 떠들면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별할 수가 없다. 5월에도 눈이 있고 털옷을 입어야 한다. ○ 권근(權近)의 응제시(應制詩)에, “푸르고 푸른 한 점 한라산 멀리 넓은 물결 아득한 사이에 있다. 사람은 별을 움직이게 하면서 바다 나라에서 왔고, 말은 용종(龍種)을 낳아서 임금의 마구에 들어온다. 땅이 편벽되나 백성의 생업은 이루어지고, 바람편에 장삿배가 임의로 왕래한다. 융성한 시대에 직방씨(職方氏)가 판도(版圖)를 닦을 때에, 이 나라가 비록 누추하기는 하나 깎을 것은 아니다.” 하였다.
장올악(長兀岳) 한라산 중턱에 있는데 주에서 36리이다. 산 위에 못이 있다. 갈악(葛岳) 주 남쪽 17리에 있다. 다랑시악(多郞時岳) 주 동쪽 65리에 있는데 둘레가 34리이다. 금물악(今勿岳) 주 남쪽 17리에 있다. 저악(猪岳) 주 동쪽 61리에 있는데 둘레가 85리이다. 장악(獐岳) 주 동남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43리이다. 사라악(沙羅岳) 주 동쪽 7리에 있다. 별도악(別刀岳) 주 동쪽 17리에 있다. 원당악(元堂岳) 주 동쪽 17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 못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못에는 마름과 거북ㆍ자라가 있다. 서산악(西山岳) 주 동쪽 34리에 있다. 입산악(笠山岳) 주 동쪽 50리에 있다. 산 위에 못이 있는데 연꽃과 순채(蓴菜)가 난다. 도도리악(道道里岳) 주 서쪽 13리에 있다. 수산악(水山岳) 주 서쪽 32리에 있다. 고내악(高內岳) 주 서쪽 57리에 있다. 곽지악(郭支岳) 주 서쪽 45리에 있다. 피문악(皮文岳) 주 서쪽 30리에 있다. 판을포악(板乙浦岳) 주 서쪽 80리에 있다. 파마지악(破磨只岳) 주 동남쪽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18리이다. 문사내악(文士乃岳) 주 동남쪽 30리에 있는데 둘레가 42리이다. 금물덕악(今勿德岳) 주 서남쪽 39리에 있다. 효별악(曉別岳) 주 서남쪽 59리에 있으며 둘레가 18리이다. 상시사리(常時舍里) 주 서쪽 65리에 있는데 둘레가 70리이다. 흘전리(訖田里) 주 서쪽 82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금녕수(金寧藪) 주 동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50여 리이다. ○ 수(藪)는 지방 말로 화(花)라 한다. 이마수(尒亇藪) 주 동쪽 79리에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말응내수(末應乃藪) 주 서남쪽 62리에 있다. 개리사수(介里沙藪) 주 서쪽 75리에 있는데 둘레가 50리이다. 사야수(斜野藪)ㆍ궁괘로개수(弓掛老介藪)ㆍ복현수(卜懸藪) 모두 한라산 가운데 있다. 괴질평수(怪叱坪藪) 주 동남쪽 23리에 있다. 말질가리수(末叱加里藪) 주 동쪽 31리에 있다. 등어리지(等於里池) 주 서쪽 50리에 있는데 둘레가 25리이다. 추수(楸水) 주 서남쪽 60리에 있는데 둘레가 29리이다. 천미수(泉未水) 둘레가 25리이다. 감물덕천(甘勿德川) 주 서쪽 90리에 있다. ○ 이상 장올악 이하에는 모두 목장이 있다.
산저천(山底川) 주 성 동쪽에 있다. 병문천(屛門川) 주 성 서쪽에 있다. 별도천(別刀川) 주 동쪽 8리에 있다. ○ 이상 세 내는 모두 가물면 마르고 비가 오면 불어난다.
대천(大川) 주 서쪽 3리에 있다. 가물면 마르고 비가 오면 불어나는데, 물이 우묵한 곳에 이르러 저수지가 되어 그 깊이가 밑바닥이 없는데 이름을 용추(龍湫)라 한다. 비가 오지 않는 해에는 나가서 기도한다. 도근천(都近川) 주 서쪽 18리에 있다. 일명 수정천(水精川) 또는 조공천(朝貢川)이라고도 하는데 지방 사람들의 말이 난삽하여 도근(都近)은 곧 조공(朝貢)이란 말의 그릇된 것이다. 언덕은 높고 험하여 폭포가 수십 척을 날아 흘러 그 밑에서 땅속으로 스며들어 7, 8리에 이르러 돌 사이로 솟아 나와 드디어 대천의 하류를 이루었는데 도근포(都近浦)라 일컫는다. 이 아래에 깊은 못이 있는데 모양이 수달 같은 동물이 잠복하고 있어 변화를 일으켜 사람의 보물을 보면 끌어당기어 못 속으로 들어간다. ○ 이상의 병문천(屛門川) 이하는 근원이 모두 한라산 북쪽에서 흘러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양쪽 언덕에 석벽이 깎은 듯 서 있고 가운데는 암석이 깔렸다. 그 근원이 혹은 잠복하고 혹은 흐르는데 도근천이 그 내 중의 큰 것이다.
두천(斗泉) 병문천(屛門川) 서쪽 50보에 있는데 그 모양이 말[斗] 같으므로 이름지은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 샘물을 마시면 능히 백 보를 날 수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그 기운을 눌렀기 때문에 마침내 없어졌다.” 한다. 가물면 맑아지고 비가 오려면 금(金)기운이 물 위에 뜬다. 추자도(楸子島) 주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둘레가 30리이고 수참(水站)의 옛터가 있다. 모든 제주에 가는 자가 나주(羅州)에서 떠나면 무안(務安)ㆍ대굴포(大崛浦)ㆍ영암(靈巖)ㆍ화무지와도(火無只瓦島)ㆍ해남(海南)ㆍ오란량(於蘭梁)을 거쳐 이 섬에 이르고, 해남(海南)에서 떠나면 삼촌포(三寸浦)로 좇아 거요량(巨要梁)ㆍ삼내도(三內島)를 거치고, 강진(康津)에서 떠나면 군영포(軍營浦)로 좇아 고자황이노슬도(高子黃伊露瑟島)ㆍ삼내도를 거치는데, 모두 삼 주야라야 이 섬에 이른다. 여기를 경유하여 사서도(斜鼠島)와 대화탈도(大火脫島)ㆍ소화탈도(小火脫島)를 지나 애월포(涯月浦)와 조천관(朝天館)에 이른다. ○ 고려 원종(元宗) 11년에 삼별초가 진도로부터 탐라에 들어와서 내외성을 쌓고 험함을 믿고 더욱 창궐하였다. 김방경(金方慶)이 몽고 흔도(忻都)와 더불어 추자도에 머물러 바람을 기다리는데, 밤중에 바람이 급하여 지향할 곳을 알지 못하였더니, 새벽에 보니 이미 탐라에 가까워졌는데 바람과 큰 파도가 세차서 오도가도 못하였다. 방경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국가가 편안하고 위태함이 이 한 번 싸움에 달렸는데, 오늘의 일은 나에게 있지 않은가.” 하니, 조금 뒤에 풍랑이 그쳐 마침내 진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탐라 사람들이 그 공을 생각하여 후풍도(候風島)라고 이름하였다.
신도(身島) 곧 추자도의 주봉(主峯)이다. 청로도(淸路島)ㆍ지도도(知道島)ㆍ초란도(草蘭島)ㆍ수덕도(愁德島) 모두 추자도 남쪽에 있다. 사여서도(斜餘鼠島)ㆍ사서도(斜鼠島) 모두 추자도 동쪽에 있는데 두 섬에 모두 샘이 있고, 그 남쪽에는 어선이 모여든다. 대화탈도(大火脫島) 추자도 남쪽에 있는데 돌봉우리가 삐쭉삐쭉하고 그 꼭대기에 샘이 있다. 수목은 없고 풀이 있는데 부드럽고 질겨 기구를 만들 만하다. 소화탈도(小火脫島) 추자도 서남쪽에 있는데 석벽이 깎은 듯이 서 있고, 양 섬 사이로 두 물이 합쳐서 흘러 파도가 높고 급하므로 배가 많이 표류하고 침몰되니, 왕래하는 사람들이 매우 괴롭게 여긴다.
우도(牛島) 둘레가 백 리인데 주 동쪽 정의(旌義) 경계에 있다. 사람과 말[馬]이 떠들면 풍우가 일어난다. 섬의 서남쪽에 구멍이 있는데 작은 배 한 척을 용납할 만하고, 조금 나아가면 배 오륙 척을 감출 만하다. 그 위에는 큰 돌이 집 같은데, 마치 햇빛이 떠서 비치고 별들이 찬연하게 벌여 있는 것 같고 기운이 심히 차고 냉하여 머리털이 쭈뼛한다. 세속에서는 부르기를 신룡(神龍)이 있는 곳이라 부르는데, 7, 8월 사이에는 고기잡이 배가 가지 못한다. 가면 크게 바람이 일어나고 우레가 치고 비가 쏟아져서 나무를 쓰러뜨리고 곡식을 손상시킨다. 그 위에는 닥나무가 많다.
비양도(飛揚島) 주 서쪽 80리에 있는데 수로가 5리이다. 둘레가 10리이고 양을 기르는 목장이 있다. 재암(財巖) 명월포(明月浦) 서쪽 5리에 있는데, 집과 같이 둥글넓적하고 그 위에는 흰모래로 깔렸고 그 밑에는 큰 구멍이 있다. 사람이 횃불을 가지고 들어가면 그 가운데가 넓어서 80보는 될 만하다. 석종유(石鐘乳)가 산출된다. 그 서북쪽에 바위 두 개가 있는데 소협재(小夾財)라 한다. 모두 석종유가 산출되고 그 가운데가 넓어서 50보쯤 된다. 명월포(明月浦) 주 서쪽 60리에 있는데 바다 어귀에 선박을 댈 만하다. 최영(崔瑩)이 하치[哈赤]를 토벌할 때 목자(牧子) 질리필사(迭里必思)의 무리가 30여 기(騎)로 이 포구에서 막으니, 큰 군사가 일제히 나가 힘껏 쳐서 크게 물리쳤다. 판포(板浦) 주 서쪽 95리에 있다. 북포(北浦) 주 동쪽 45리에 있는데 염분(鹽盆)이 있다. 이포(泥浦) 주 서쪽 9리에 있다. 도도리포(道道里浦) 주 서쪽 10리에 있다. 귀일포(貴日浦) 주 서쪽 27리에 있다. 고내포(高內浦) 주 서쪽 40리에 있다. 귀덕포(歸德浦) 주 서쪽 47리에 있다. 독포(獨浦) 주 서쪽 61리에 있다. 배령포(杯令浦) 주 서쪽 63리에 있다. 함덕포(咸德浦) 주 동쪽 31리에 있다. 어등포(於等浦) 주 동쪽 64리에 있다. 도의탄포(道衣灘浦) 주 동쪽 72리에 있다.
[토산]산도(山稻)ㆍ기장ㆍ피ㆍ조ㆍ콩ㆍ팥ㆍ메밀ㆍ보리ㆍ밀, 말 원 나라 지원(至元) 시대에 탐라를 방성(房星) 분야(分野)라 하여 목장을 두고 단사관(斷事官)이나 만호(萬戶)를 두어 목축을 주관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기(記)에, “말이 생육되는 것이 진(晉) 나라의 굴산(屈産)과 같아서 여러 고을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목장이 4군데인데, 정의(旌義)와 대정(大靜)도 같다. 소 검정소ㆍ누런소ㆍ얼룩소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뿔이 매우 아름다워 술잔을 만들 만하다. ○ 집집마다 목축하여 수백 마리로 떼를 이룬다.
궤자(麂子)ㆍ미록(麋鹿) 이 고을에서만 생산된다. 가죽이 세밀하고 질겨 가죽신을 만들 만하다. 해달(海獺)ㆍ지달(地獺)ㆍ환(獾)ㆍ진주[蠙珠] 고려 충렬왕(忠烈王) 2년에 원 나라에서 임유간(林惟幹)을 보내어 탐라에서 구슬을 채취하다가 얻지 못하고, 민간이 간직하여 둔 것을 백여 개 가지고 돌아갔다. 대모(玳瑁)ㆍ자개[貝]ㆍ앵무라(鸚鵡螺) 이상 세 물건은 모두 우도(牛島)ㆍ대정(大靜)ㆍ가파도(加波島)에서 난다.
감(柑) 황감(黃柑)ㆍ유감(乳柑) 등 몇몇 종류가 있다. 귤(橘) 금귤(金橘)ㆍ산귤(山橘)ㆍ동정귤(洞庭橘)ㆍ왜귤(倭橘)ㆍ청귤(靑橘)의 다섯 종류가 있는데 청귤은 열매를 맺어 봄이 되어서야 익고 때가 지나면 다시 말랐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익는다. 유자[柚]ㆍ비자(榧子)ㆍ치자(梔子)ㆍ밤 적률(赤栗)ㆍ가시율(加時栗) 두어 종류가 있다. 과실이 과원(果園)에서 나오는데 과원은 모두 담을 쌓았다. 모두 열아홉 곳인데, 대정이 여섯 곳이고 정의가 다섯 곳이다. 무환자(無患子) 잎사귀가 창백하다. 무회목(無灰木) 우도(牛島)에서 난다. 바다 가운데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여 물결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가 물 밖에 나오면 굳고 단단하여진다.
산유자ㆍ이년목(二年木)ㆍ노목(櫨木)ㆍ두충(杜冲)ㆍ지각(枳殼)ㆍ후박(厚朴)ㆍ동실(棟實)ㆍ동근(棟根)ㆍ영릉향(零陵香)ㆍ안식향ㆍ향부자(香附子)ㆍ청피(靑皮)ㆍ해동피(海東皮)ㆍ촉초(蜀椒)ㆍ진피(陳皮)ㆍ필징가(蓽澄茄)ㆍ팔각(八角)ㆍ표고버섯ㆍ목의(木衣)ㆍ석곡(石斛)ㆍ석종유(石鐘乳)ㆍ백납(白蠟)ㆍ소금ㆍ미역ㆍ우뭇가사리ㆍ게ㆍ소라ㆍ전복ㆍ석결명(石決明)ㆍ황합(黃蛤)ㆍ해의(海衣)ㆍ오징어ㆍ은어[銀口魚]ㆍ옥두어(玉頭魚)ㆍ상어ㆍ갈치ㆍ고등어ㆍ행어(行魚)ㆍ문어.
[불우]존자암(尊者庵) 한라산 서쪽 고개에 있다. 그 골짜기에 돌이 있는데 마치 중이 도를 닦는 모양 같다. 속설에 전하기를 수행동(修行洞)이라고 한다. 월계사(月溪寺) 독포(獨浦) 동남쪽에 있다.
수정사(水精寺) 도근천(都近川) 서쪽 언덕에 있다.
○ 이제현(李齊賢)의 해가시(解歌詩)에, “도근천에 물 막는 둑이 무너지면, 수정사 안이 또한 바다가 되리.” 하였는데, 곧 이 절의 고사이다.
묘련사(妙蓮寺) 주 서쪽 25리에 있다. 중 혜일(慧日)의 시에, “남해의 천기가 자주 흐리기를 좋아하는데, 오늘 저녁은 새로 개여 손의 마음을 씻는구나, 한 꿈 같은 인생은 영화와 쇠하는 것이 있으나, 중추에 달빛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멀리 아득한 데 다다르니 포구(浦口)가 넓고, 비낀 그림자가 침침하니 연기 낀 대숲의 집이 깊도다. 밤늦도록 구경하니 맑은 것이 생각에 들어와, 머리 기울이며 가느다랗게 읊조림이 나옴을 금하지 못하네.” 하였다.
문수암(文殊庵) 주 서남쪽 27리에 있다. 해륜사(海輪寺) 일명 서자복(西資福)이다. 주 서쪽 독포(獨浦) 어귀에 있다. 만수사(萬壽寺) 일명 동자복(東資福)이다. 건입포(巾入浦) 동쪽 언덕에 있다. 강림사(江臨寺) 주 동쪽 함덕포(咸德浦) 어귀에 있다.
보문사(普門寺) 거구리악(巨口里岳) 북쪽에 있다. ○ 중 혜일(慧日)의 시에, “절이 궁벽하여 거친 지경에 의지하였는데, 샘물이 단 것은 꿈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연장(蓮場)에 좋은 일을 만났고, 불법의 유풍을 잇는다. 풀은 서리를 맞고도 그대로 푸르고, 담쟁이는 장기(瘴氣)로 인하여 붉지 못하네. 원통문(圓通門)은 스스로 열렸는데, 먼 기러기가 긴 하늘에서 부르짖는다.” 하였다.
서천암(逝川庵) 조공천(朝貢川) 위에 있다. ○ 중 혜일의 시에, “한라산이 높기가 몇 길인가, 절정 위에는 신비한 못물이 고였다. 나누어 나와 북으로 흘러가서, 아래에 조공천이 되었네. 폭포가 어지러이 물방울을 뿜어, 둥근 구슬들같이 달아나네. 놀란 여울이 여러 돌에 부딪치다가, 간혹 항아리와 동이같이 파여지기도 한다. 편안히 흐르는 것이 몇 리가 되는데, 맑고 깨끗하여 푸른 하늘을 비치네. 도 닦는 사람 종해(宗海)란 이가 있어, 냇가에 암자를 세웠네. 이미 산수의 낙을 따르고, 또 향화(香火)의 인연을 부쳤네. 서늘한 가을 아름다운 달밤에, 바위를 쓸고 차 마시는 자리를 열었다. 새것을 맛보려고 대추ㆍ밤을 따고, 옛것을 얘기하여 깊고 미묘한 것을 다한다. 인하여 중니(仲尼)의 말을 생각하고, 자못 소성(小聖)의 선(禪)도 생각한다. 무생(無生)의 이치로 서천(逝川)이라 이름지어, 오래 전하기를 기약한다. 만일 드높이 깨달아 잡는다면, 물결이 모두 옮기지 않으리라.” 하였다.
소림사(小林寺) 주 동남쪽 10리에 있다. 관음사(觀音寺) 조천관포(朝天館浦)에 있다.
[고적]모흥혈(毛興穴) 주 남쪽 2리에 있다. 건치연혁의 주에 자세하다. 서산(瑞山) 고려 목종(穆宗) 5년 6월에 산이 바다 가운데에 솟아나왔는데 산에 네 구멍이 뚫리고 용암이 솟아나와 닷새 만에 그쳤는데, 그 물이 모두 엉기어 기왓돌[瓦石]이 되었다. 10년에 상서스러운 산[瑞山]이 바다 가운데에 솟아나왔다. 태학박사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가서 보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우레 소리를 내며 땅이 움직였는데, 일곱 주야 만에 비로소 개였다. 산의 높이가 백여 길이나 되고 주위가 40여 리나 되는데, 초목이 없고 연기가 그 위에 덮이고 바라보기에 석류황(石硫黃) 연기 같아서 사람들이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공지(拱之)가 친히 산밑에 이르러 그 모양을 그려 바쳤다.” 하니, 지금 대정현(大靜縣)에 속한다.
칠성도(七星圖) 주 성 안에 있다. 돌로 쌓았던 옛터가 있다. 삼성(三姓)이 처음에 나와서 삼도(三徒)를 나누어 차지하고 북두성 모양으로 대를 쌓아 나누어 웅거하고 인하여 칠성도(七星圖)라고 이름하였다. 대촌(大村) 삼도(三徒)를 합하여 살아서 큰 마을이 되었는데, 곧 지금의 주성(州城)이다. 고을 사람들이 성 안을 대촌(大村)이라고 한다. 고령전(高齡田) 주 동쪽 1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당(唐) 나라 배가 와서 파선한 곳이다.” 한다. 지금도 밭을 가는 사람들이 혹 마노(碼碯) 등 보물을 파서 얻는데 당 나라 사람들이 유실한 것이라 한다. 지금 한라산 밑 바닷가에 있는 바윗돌을 보면 모두 바닷물에 깎인 곳이 있으니, 의심컨대 상고(上古)에는 모두 바다였던 것이 지금은 변하여 밭이 되었나보다.
동무소협(東巫小峽)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한라산의 일명은 원산(圓山)이니, 곧 바다 가운데 있다는 원교산(圓嶠山)이고 그 동쪽은 동무소협인데 신선이 사는 곳이다. 또 그 동북쪽에 영주산(瀛洲山)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탐라를 일컬어 동영주(東瀛洲)라 한다.” 하였다. 고토성(古土城) 주 서남쪽 36리에 있는데, 둘레가 15리이다. 삼별초가 쌓은 것인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 고성(古城) 주 성 서북쪽에 고성의 남은 터가 있다. 고장성(古長城) 바닷가에 따라 둘러 쌓았는데 둘레가 3백여 리이다. 고려 원종(元宗) 때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니, 왕이 시랑 고여림(高汝林)의 무리를 탐라에 보내어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방비하고, 인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다.
항파두고성(缸波頭古城) 주 서쪽 10리에 있다. 성 안에 샘이 있어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고려 원종 12년에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삼별초를 진도에서 토벌하여 물리칠 때,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와서 귀일촌(貴日村) 항파두리에 웅거하고 이 성을 쌓아서 막았다. 방경의 무리가 나아가 쳐서 함락시키고, 천호 윤방보(尹邦寶)를 시켜 원 나라 군사 4백 명과 관군 1천 명을 거느리고 머물러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애월목성(涯月木城) 주 서쪽 42리에 있는데 곧 삼별초가 쌓은 것으로서 관군을 막던 곳이다. 지금은 반은 퇴락하였다. 동제원(東濟院) 주 동쪽 9리에 있다. 남은 터가 있는데 곧 이문경(李文京)이 군사를 진쳤던 곳이다. 장평(長坪) 주 서쪽 6리에 있다. 고려 원종 때에 문행노(文幸奴)가 난을 일으켜 군사를 장평(長坪)에 주둔시켰는데, 부사 최탁(崔托)과 성주(星主) 양호(梁浩)의 무리가 쳐서 평정하였다.
다루가치부[達魯花赤府]ㆍ군민안무사부(軍民安撫使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 나라 탑라치[塔羅赤]가 소ㆍ말ㆍ낙타ㆍ나귀ㆍ양을 싣고 와서 수산평(水山坪)에 방목하였는데 말이 번식하였다. 이 뒤에 원 나라에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총관부(摠官府)를 설치하고 고인단(高仁旦)을 총관으로 삼아 부의 행정을 처리하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그 뒤에 또 군민안무사부(軍民安撫使府)를 설치하고 탑치(塔赤)로 다루가치를 삼아 부의 일을 처리하다가 조금 뒤에 또 파하고, 도로 고려에 예속시켰다. 지금 주 성 북쪽 해안에 옛 관부의 남은 터가 있는데, 의심컨대 곧 그 땅인 듯하나, 상고할 수 없다. 송담천(松淡川) 주 동쪽 13리에 있다. 이문경(李文京)이 군사를 놓아 불사르고 약탈하니, 고여림(高汝林)의 무리가 이곳에서 맞아 싸워 이기지 못하였다. 문경이 관군을 모두 죽이고 조천포(朝天浦)에 웅거하였다. 귀일촌(貴日村) 주 서쪽 20리에 있다. 고내현(高內縣) 주 서쪽 45리에 있다. 애월현(涯月縣) 주 서쪽 42리에 있다. 곽지현(郭支縣) 주 서쪽 50리에 있다. 귀덕현(歸德縣) 주 서쪽 60리에 있다. 고려 희종(熙宗) 7년에 주의 석천촌(石淺村)을 승격하여 귀덕현을 만들었다. 명월현(明月縣) 주 서쪽 60리에 있다. 신촌현(新村縣) 주 동쪽 25리에 있다. 함덕현(咸德縣) 주 동쪽 30리에 있다. 금녕현(金寧縣) 주 동쪽 50리에 있다. ○ 이상 각 현이 모두 직촌(直村)이 된다.
『신증』 시사석(矢射石) 주 동쪽 12리에 있다. 고로들이 전하는 말에, “삼성(三姓)이 터를 정할 때에 활을 쏜 것인데, 지금도 쏜 자국이 아직 남아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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