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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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
7.계림부(桂林府)는 전주(全州)이고,
廣西省(領十一府。二直穎州十六州。四十九縣)。
○桂林府(名建陵。領二州。七縣)臨桂縣(錫山)(附府)興定(臨源)靈川(上塘)陽朔(歸義)永寧州 永福(理定)義寧(寧州)全州(湘源)灌陽(灌水)-地輿名目(一十九省)
[湘江]
桂林府,中国古代行政区划名。明洪武元年(1368年)改静江路为府,五年改名桂林府,治临桂县(今广西桂林市)。属广西布政司。辖境相当今广西壮族自治区桂林、资源、龙胜、全州、兴安、灵川、灌阳、永福、阳朔等市县。1913年废。明、清为广西省会。
桂林历史
歷史沿革距今約一萬年前,根據市區寶積岩和甑皮岩洞穴發現的遺物考證,甑皮岩人已進入母系氏族社會階段。 夏商周時期 這裡是百越人的居住地。
秦(公元前214年)開鑿靈渠溝通湘灕水系,屬桂林郡。
漢元鼎六年(公元前111年)設始安縣,為縣治所在,隸屬荊州零陵郡。東漢(公元30年)時又設始安侯國,為始安侯國治所。
三國先屬蜀,後歸吳。甘露元年(公元265年)建始安郡,郡縣治所都在今之桂林,屬荊州始安郡。
南北朝(公元540年)置桂州於湘州始安郡,受湘州督。
隋朝(公元590年)置桂州總管府。
唐朝(公元634年)改名臨桂縣,屬桂州始安郡。(公元692年)築相思埭,即今桂柳運河。(公元757年)改始安郡為建陵郡。(公元868年)龐勛率桂州戍卒反唐。(公元879年)黃巢領導的農民起義軍陷桂州。(公元900年)屬靜江軍節度。
北宋(公元997年)置廣南西路,治所在今桂林,屬桂州。
南宋(公元1133年)升桂州為靜江府,治今桂林。靜江府本桂林,始安郡,靜江軍節度。
元朝(公元1277年)3月置廣南西路宣撫司於靜江(今桂林),5月改為廣南西路宣尉司。(公元1278年)7月增設嶺南廣西道,改靜江府為靜江路總管府。(公元1295年)並左右兩江宣尉司都元帥府為廣西兩江道宣尉司都元帥府,分司邕州。(公元1363年)3月立廣西等處行中書省,省治在今桂林。
明朝(公元1370年)朱元璋封侄孫朱守謙為靖江王,7月建靖江王府於獨秀峰前。明朝洪武年(1367年)將靜江路改桂林府因而沿用至今。(1372年)6月改為桂林市府,府治在今桂林。
清朝初建廣西省置巡撫,屬廣西省桂林府。
民國(1911年)為廣西省省會。(1940年)劃桂林縣縣城及附廓成立桂林市,餘地復稱臨桂縣。桂林是廣西省直轄市,省會駐地。1944年11月10日,桂林保衛戰敗,為日寇佔領。1945年7月28日,桂林光復。
1958年改稱廣西壯族自治區桂林市,轄桂林城區和郊區。
全州府
历史沿革
汉为零陵、洮阳县,隋并置湘源县,五代相继改为湘川县、清湘县,属全州,明废清湘县入全州。民国一板桥初改全州为全县。
1935年将西延分出建资源县。
1949年11月17日全县解放。
1952年资源县并入,1953年又分出资源县。1959年改称全州县。1971年起属桂林地区,1998年改隶属桂林市。
全州县位于中国广西东北部,是桂林市的一個縣,毗邻湖南省。南距桂林市125公里,北距湖南永州市79公里。湘江、湘桂铁路和322国道穿过,是中原进入广西的门户。面积4021平方千米,人口77万,是桂林面积最大和人口最多的一个县。邮政编码541500。县人民政府驻全州镇。
县内主要景点有:建于唐代的湘山寺、妙明塔、镇湘塔、清代著名画家石涛等的字画石刻等名胜古迹和高山明镜般的天湖水库、亚洲第一高水头(1074米)的天湖电站、龙岩、炎井温泉以及神奇的“风景鱼泉”等。
特色食品有:红油米粉、黑醋血鸭和清代宫廷贡品乌鲤禾花鱼等。
零陵-零洮-湘源-全州-全州路-全州府-全州-全县
1、春秋战国时期楚国青阳之零陵:二级行政区。楚国(都城初期在郢--荆州,后期楚考烈王二十二年(公元前241年)迁都寿春--安徽寿阳)地域管辖地域最南端,边界限于兴安县城之南的严关,往南为南越辖地。青阳(今长沙)为郡级单位,郡以下无行政单位名称,只直接叫地名;所以秦始皇统一后设立的零陵县址,即为战国时期楚国青阳的零陵旧址。
2、秦统一的长沙郡零陵县:二级行政区。公元前221年,秦始皇统一中国后,设立长沙郡及湘、罗、益阳、阴山、零陵、衡山、宋、桂阳等9县,依零山(古称阳海山、阳朔山、海阳山,今名海洋山)舜帝陵墓附近之地域,照原名零陵而县,驻地在全州县咸水,辖地为今全州、兴安北、灌阳、资源、永州、道县、双牌、宁远、江华、江永、东安、新宁、武岗、城步、祁阳等地域。曾有历史上著名的《零陵令信》一篇 , 责难秦相李斯:信失其姓,始皇时为零陵令。
3、西汉零陵郡、县:一级行政区。西汉武帝元鼎六年(前111年)分桂阳郡新设零陵郡(改迁建安城,零陵县一并迁来);隶属于荆州刺史部(行部非行政单位),并增设洮阳县(今永岁改州)管辖全州北部地区、东安全境。零陵郡相当管辖今桂林(始安县)、全州、灌阳、阳朔、永福以东与阳朔以北,及永州市的九县两区全境、邵阳市以南资水上游三县地区和衡阳与道县之间的潇水、湘江流域(当时的县域有现在的2—6个县域宽),历来称之谓南楚。全州南部的零陵县管辖全州南部地区及资源、灌阳全境。早期的郡太守有:召信臣、周嘉、龙述(其任内北迁)。
4、东汉—两晋—南北朝—隋代的两县并立时期:二级行政区。光武帝建武年间(25-55)将零陵之郡治由零陵县迁至泉陵县(今湖南永州)。隶属于荆州刺史部零陵郡(迁永州)管辖。洮阳县依旧管辖全州北部地区、东安全境;全州南部的零陵县管辖全州南部地区及资源、灌阳全境,西晋后还含盖了今兴安严关以北,被称为“小零陵”。隋开皇十年(590年)废洮阳和零陵,合置湘源县,县衙驻地迁往柘桥。大业五年(607),改永州总管府为零陵郡。辖5县:零陵(永州、祁阳、祁东、东安、双牌部分)、湘源(全州、兴安北、资源、灌阳)、永阳(道县、江永)、营道(宁远、新田、祁阳部分)、冯乘(江华、富川)。
5、唐代为江南西道永州总管府湘源县:二级行政区。唐武德四年(621)废零陵郡,分置永州。道为监察区并非行政单位;湘源县(辖今全州、兴安北、资源、灌阳),驻地仍在柘桥。代宗大历二年(767)析湘源县置观阳(灌阳),县治在今全州镇柘桥村委罗家村。安史之乱后,道才成了高级行政单位,形成了道、州、县三级行政制。
6、后唐天成元年(926年),李嗣源称帝,因避其讳,改湘源县为湘川县。五代晋天福四年(939年)楚王马希范向后晋高祖(石敬瑭)奏准,将湘川县改为清湘县,并置全州,以全义岭(今越城岭)之全字命州名。二级行政区。
7、宋代荆湖南路(驻地武昌)节制下的全州军州:二级行政区。全州辖清湘县(辖今全州、兴安北、资源、灌阳)、灌阳县。清湘县辖建安、宜湘、西延三镇,北宋和南宋设置辖区未变。县衙驻地迁往清湘镇(今址)。第一任权知军州事:叶继能;第三任柳开。权知军州事指文官全权管理以军事州为单位的政事与军事(主持地方军队和民政事务)简称“知军”。
8、元代湖广行省(治鄂州)湖南道宣慰司(治潭州)节制下的全州路:三级行政区。元至元十四年(1277年)改称全州路。全州路辖清湘县(辖今全州、兴安北、资源、灌阳)、灌阳县。清湘县辖建安站、黄沙站、咸水站、山角站、柳浦站五站。全州路第一任为:达鲁花赤,正三品;第二任:翟松山。路的行政长官称为“达鲁花赤”。湖广行省元置湖广等处行中书省。忽必烈设立陕西、四川、甘肃、云南、江浙、江西、湖广、河南、辽阳、岭北十行省。1276年名为荆湖行省,治潭州(今长沙),后改名湖广行省。1281年移治鄂州(今武昌),治武昌路,领武昌路、岳州路、常德路、澧州路、辰州路、沅州路、兴国路、靖州路、天临路、衡州路、道州路、永州路、郴州路、全州路、宝庆路、武冈路、桂阳路、静江路、南宁路、梧州路、浔州路、柳州路、思明路、太平路、雷州路、化州路、高州路、钦州路、廉州路等路三十,归州等州十三,汉阳等府二,安抚司十五,南宁等军三,属州十七,自湖广至广西、贵州及四川南境皆属焉,即今湖南全境及广东电白县以西、广西河池县以东、恩阳县以南全境、又湖北汉川,武昌及兴山巴峡以南地。
9、明初湖南布政使司全州府:二级行政区。明洪武元年(1368年)改全州路为湖南布政使司全州府。全州府辖清湘县(辖今全州、兴安北、资源、灌阳)、灌阳县。第一任全州知府:章复。
三级行政区时期:1376年降为州,撤清湘县并入全州,1395年改隶广西桂林府。明初广西布政使司桂林府全州:全州直隶(今全州、兴安北、资源、灌阳)、灌阳县。州地辖建安巡检司、黄沙巡检司、山枣巡检司、山角巡检司、柳浦巡检司共五个巡检司。第一任知州:章复,第二任知州:李荣祖。
10、清代初期广西省桂林府全州:三级行政区。全州直隶(辖今全州、兴安北、资源、灌阳)、灌阳县。州直隶初设建安、宜湘、山枣、黄沙关、西延镇;清代中期后全州行政划分为六乡一分州:长乐、升平、万全、宜湘、建安、恩德等六乡及西延分州。第一任知州:李令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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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윤(尹) 1인, 판관(判官) 1인, 교수관(敎授官) 1인.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이었는데,【일명 비사벌(比斯伐)5101) 또는 비자화(比自火)5102) 라 한다. 】위덕왕(威德王) 원년 을해에【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승성(承聖) 4년.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가, 11년이 지나서 을유에【진(陳)나라 세조(世祖) 천가(天嘉) 6년. 】주(州)가 폐지되었고, 의자왕(義慈王) 22년 경신에【당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신라 사람들이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백제를 멸하자, 그 땅이 모두 신라에 들어갔으며, 신문왕(神文王) 4년 을유에【당나라 측천(則天) 수공(垂拱) 원년. 】다시 완산주를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15년 정유에【당나라 숙종(肅宗) 지덕(至德) 원년. 】전주로 고쳤다. 효공왕(孝恭王) 3년 경신에【당나라 소종(昭宗) 광화(光化) 3년. 】견훤(甄萱)이 완산에 도읍하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19년 병신에【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원년. 】친히 백제를 쳐서 이기고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23년 경자에【천복(天福) 5년. 】다시 전주로 하였다. 성종(成宗) 12년 계사에【송나라 태종(太宗) 순화(淳化) 4년. 】승화 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로 고쳤고, 15년 병신에【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2년. 】전주 순의 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 무오에【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 】안남 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고쳤고, 13년 임술에【송나라 진종(眞宗) 건흥(乾興) 원년.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 홍무(洪武) 25년. 】완산부(完山府)로 승격하니, 이씨(李氏)의 본관인 까닭이다. 태종(太宗) 3년 계사에【명나라 태종(太宗) 영락(永樂) 11년. 】전주부(全州府)로 고쳤다. 별호를 승화(承化)·완산(莞山)【고려 성종(成宗) 10년 신묘에 정한 것이다. 】혹은 견성(甄城)이라고 한다.【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고속현(古屬縣)이 4이니, 이성현(伊城縣)은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두성현(杜城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이성현으로 고쳤으며, 이성현(利城縣)은 본래 백제의 내리아현(乃利阿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이성(利城)으로 고쳐서 김제(金堤)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으며, 옥야현(沃野縣)은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옥야(沃野)로 고쳐서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6년 병신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전주에 내속(來屬)하였으며, 우주현(紆州縣)은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우주(紆州)로 고쳐서 금마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다. 향(鄕)이 2이니, 경명(景明)【일명 영명(榮明)이라 한다. 】·제견(堤見)이요, 소(所)가 2이니, 두모촌(豆毛村)·양량(陽良)이다.【태종(太宗) 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 윤향(尹向)이 아뢰어서 도(都) 안의 현(縣)·향(鄕)·소(所)·부곡(部曲)들을 모두 본고을에 합쳤다. 지금 고속현(古屬縣)을 적는 것은 뒷날에 참고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
대천(大川)은 신창진(新倉津)이다.【주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고산(高山)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금구(金溝)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임실(任實)에 이르기 31리, 북쪽으로 여산(礪山)에 이르기 46리이다. 태조 강헌 대왕 진전(太宗康憲大王眞殿)【성 안 동남쪽 모퉁이에 있다. 】
호수는 1천 5백 65호요, 인구는 5천 8백 29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77명이요, 진군(鎭軍)이 1백 48명이요, 선군(船軍)이 8백 26명이요, 수성군(守城軍)이 30명이다.
토성(土姓)이 9이니,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백(白)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방(房)이요, 속성(續姓)이 4이니, 양(梁)【주계(朱溪)에서 왔다. 】·장(張)【결성(結城)에서 왔다. 】·김(金) 2【하나는 모평(牟平)에서 왔고 하나는 온 곳을 모르는데, 모두 향리(鄕吏)가 되었다. 】이다. 이성(伊城)의 성은 5이니, 조(趙)·배(裴)·장(張)·구(仇)·염(廉)이요, 이성(利城)의 성은 5이니, 이(李)·백(白)·정(鄭)·손(孫)·진(陳)이요, 옥야의 성은 4이니, 장(張)·염(廉)·양(梁)·구(仇)요, 망성(亡姓)이 1이니, 임(林)이다. 우주(紆州)의 성은 5이니, 박(朴)·이(李)·정(鄭)·황(黃)·최(崔)요, 경명(景明)의 성은 4이니, 김(金)·임(林)·배(裵)·인(印)이요, 두모촌(豆毛村)의 성은 3이니, 책(冊)·최(崔)·이(李)요, 양량(陽良)의 성은 4이니, 백(白)·나(羅)·강(康)·유(劉)이다. 인물(人物)은 예부 낭중(禮部郞中) 최균(崔均)이니, 고려 명종(明宗) 때 사람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되며, 민간 풍속이 장사[儇利]를 좋아한다. 간전(墾田)이 1만 8천 6백 64결이요,【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오곡·뽕나무·삼[麻]·목화·감·배[梨]·왕대[簜]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여우가죽·이리가죽·잘[山水獺皮]·종이【표전(表箋)·주본(奏本)·부본(副本)·자문(咨文)·서계(書契) 등의 종이 및 표지(表紙)·도련지(擣鍊紙)·백주지(白奏紙)·유둔(油芚)·세화(歲畫)·안지(眼紙)인데, 도(道) 안에 오직 이 고을과 남원(南原)의 것의 품질이 좋다. 】·모시·무늬있는 자리[有文席]·족제비털[黃毛]·칠(漆)·꿀·대추·석류·새앙[薑]【읍(邑)의 사람들이 업(業)으로 삼는다. 】이요, 약재(藥材)는 인삼·말오줌나무[蒴藋]·궁궁이[芎藭]·호라비좆뿌리[天門冬]·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패랭이꽃이삭[瞿麥穗]·흰매화열매[鹽梅實]·복령(茯苓)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부의 남쪽 장파곤동(長波昆洞)에 있는데, 중품(中品)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다.【부의 서쪽 우림곡(雨林谷)에 있는데 중품(中品)이다. 】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1천 2백 88보(步)이다. 】고덕산 석성(高德山石成)【둘레가 1천 4백 13보이며, 성안에 샘이 7이 있고, 또 시내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역(驛)이 3이니, 반석(半石)·삼례(蔘禮)·앵곡(鷪谷)이요, 요해(要害)가 1이니, 상관동(上館洞) 여현(礪峴)이다.【주(州) 남쪽에서 임실(任實)로 가는 지로(指路)이다. 】큰 방죽[大堤]이 3이니, 상시제(上屎堤)·하시제(下屎堤)·공덕제(孔德堤)이다.
관할[所領]은 군(郡)이 5이니, 진산(珍山)·금산(錦山)·익산(益山)·고부(古阜)·김제(金堤)요, 현(縣)이 11이니, 금구(金溝)·만경(萬頃)·임피(臨陂)·옥구(沃溝)·함열(咸悅)·용안(龍安)·부안(扶安)·정읍(井邑)·태인(泰仁)·고산(高山)·여산(礪山)이다.
【영인본】 5책 655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진산군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금산군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익산군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고부군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김제군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금구현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만경현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임피현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옥구현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함열현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용안현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부안현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정읍현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태인현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고산현
○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여산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전주부(全州府)
동으로 진안현(鎭安縣)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임피현(臨陂縣) 경계까지 74리,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38리, 임실현(任實縣) 경계까지 42리, 북으로 익산군(益山郡) 경계까지 37리,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61리, 고산현(高山縣) 경계까지 40리, 서울로부터는 5백 16리가 된다.
[건치연혁]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이며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가 동왕 26년에 주를 폐지하고, 신문왕(神文王) 때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9주를 완비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에 신검(神劍)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다가 23년에 다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하였고, 14년에 12주에 절도사를 두고 순의군(順義軍)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4년에 원(元) 나라 사신 야사불화(埜思不花)를 가둔 일 때문에 부곡(部曲)으로 강등하였다가 5년에 다시 완산부(完山府)라 하였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에 임금의 고향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켰고, 태종(太宗) 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형승]국가의 풍패(豐沛)로 산천이 영수(靈秀)하다 윤곤(尹坤)의 기(記)에 있다. 주 나라의 조상이 일어난 곳이요, 일도의 으뜸이다. 모두 서거정의 기에 있다. 안팎으로 산과 개천이 있다. 성임(成任)의 시(詩)에, “안팎의 산과 강이 판적에 들어 있다.” 하였다.
[산천]건지산(乾止山) 전주부의 북쪽 6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이규보(李圭報)의 기(記)에, “전주에 건지산이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주(州)의 웅진(雄鎭)이다.” 하였다. 완산(完山) 작은 산이다.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부의 이름은 이 산 이름에서 딴 것으로 일명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는데, 읍을 설치한 후로부터 나무하는 것을 금지했다. 고덕산(高德山) 부의 동남쪽 10리에 있다. 고달산(高達山)이라고도 한다. 무악산(毋岳山) 부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금구현(金溝縣) 조에도 있다. 기린봉(麒麟峯) 부의 동쪽 6리에 있다. 봉우리 위에는 작은 못이 있다. 청량산(淸涼山) 부의 동북쪽 40리에 있다. 서방산(西方山) 부의 동북쪽 25리에 있다. 가련산(可連山) 부의 서쪽 10리에 있으며, 건지산(乾止山)의 산세가 여기에 와서 끊어졌는데, 사람들의 말이 이어져야 할 곳에서 끊어졌다고 하여 가련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 여현(礪峴) 부의 남쪽 42리에 위치한다. 웅현(熊峴) 부의 동쪽 47리, 진안현(鎭安縣) 경계에 있다. 서고산(西高山)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태실산(胎室山)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여기에 예종(睿宗)의 어태(御胎)를 안치하였다. 황화대(黃華臺) 부의 서쪽 4리에 있다. 읍인(邑人)들이 봄ㆍ가을로 올라가 제사술을 마셨다. 만경대(萬景臺) 고덕산(高德山) 북쪽 기슭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石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천인(千仞)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올라오니 품은 감회 이길 길이 없구나. 청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이니 부여국(扶餘國)이요, 황엽이 휘날리니 백제성(百濟城)이라. 9월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슬프게 하고, 백년 호기는 서생(書生)을 그르치게 하는구나. 하늘가로 해가 져서 푸른 구름이 모이니, 고개 들어 하염없이 옥경(玉京)을 바라보네.” 하였다. 안천(雁川) 주의 북쪽 25리에 있으니 즉 고산현(高山縣) 남천(南川)의 하류가 주계(州界)에 이르러 직연(直淵)이 되고 안천이 되며,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와서 추천(楸川)과 합류한다. 남천(南川)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금상 4년에 시내를 막고 돌을 쌓으니 길이가 6천 자나 되었다. 남천(南川)의 근원은 여현(礪峴)에서 나오는데 부의 동남에 이르러 성을 둘러 북으로 가련산(可連山)을 지나 추천이 되고, 무악산(毋岳山)에서 나온 물과 합해서 삼례역(參禮驛) 남쪽에 이르러 다시금 고산(高山) 웅현(熊峴)의 물과 합쳐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洄浦)가 되며, 조수(潮水)가 여기까지 들어온다. 옥야(沃野) 이성(利城)을 지나서 신창진(新倉津)이 되었다. 신창진(新倉津) 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김제군(金堤郡)과 만경현(萬頃縣) 조에도 있다. 덕진지(德眞池)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부의 지세는 서북방(西北方)이 비어 있어 전주의 기맥(氣脈)이 이쪽으로 새어버린다. 그러므로 서쪽으로는 가련산으로부터 동으로 건지산(乾止山)까지 큰 둑을 쌓아 기운을 멈추게 하고 이름을 덕진(德眞)이라 하였으니, 둘레가 9천 73자이다. 풍월정(風月亭)의 시에, “깊은 못을 한번 바라보니 푸른 하늘이 비쳐 있네. 옛부터 이 못을 파기에 몇 사람의 공이 들었을까. 마을 연기 멀리 끼어 가을 달이 몽롱하고, 어부의 피리 소리는 저녁 바람에 비꼈도다.” 하였다. 『신증』 유순(柳洵)의 시에, “깊고 맑은 물에 허공이 비쳐 있고, 덕을 쌓았으니 제물(濟物 사물을 구제하는 것)하는 공(功)을 갖추었네. 이곳에 참 용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세상 어느 곳에서 뇌풍(雷風)을 찾았으리오.” 하였다. 공덕지(孔德池)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판토포지(板吐浦池)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굴연(堀淵)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돌기둥 여섯 개가 있는데 녹담정(綠潭亭)의 기둥이라고 전해온다.
『신증』 발산(鉢山)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우락암(于樂巖) 옥야창(沃野倉) 북쪽 2리에 있다. 그 위에 50여 명이 앉을 수가 있다. 봉황암(鳳凰巖)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그 아래에 못이 있다. 황학대(黃鶴臺)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석봉(石峯)이 솟아 있고, 큰 시내가 끼고 돌아간다. 전하는 말에 황학(黃鶴)이 놀던 곳이라 한다.
[토산]석류(石榴), 종이 상품(上品)이다. 생강[薑]ㆍ울금초(鬱金草)ㆍ벌꿀[蜂密]ㆍ웅어[葦魚]ㆍ옻[漆]ㆍ사기그릇[磁器].
[불우]귀신사(歸信寺)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신우(辛禑) 때에 왜병(倭兵) 3백여 기(騎)가 주성(州城)을 함락하고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 ○ 윤진(尹珍)의 시에, “북쪽 뜰에는 산들바람 대밭에 불고, 남향 창문을 열면 넓고 아득한 만겹 산이로구나. 소나무 관문과 돌길 시내 건너 들어와서, 고승(高僧)을 대하고 앉아 잠시 한가함을 얻었도다.” 하였다. 보광사(普光寺)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記)에, “전주의 남쪽 고덕산에 절이 있으니, 이를 보광사(普光寺)라 한다. 실로 백제(百濟)로부터 내려오는 큰 절이다. 비구(比丘) 중향(中向)이 어려서 이 절에서 자랐는데, 그 절이 황폐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개연히 중흥시킬 뜻을 품었는데, 주(州)의 사람 중에 지금의 자정사(資政使) 고룡봉(高龍鳳) 공이 황제의 우대를 받고 성품이 또한 착한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원통(元統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 갑술년에 바다를 건너 서유(西遊)하여 경사(京師)에 가서 만나보고 말하기를, ‘고공(高公 즉 고룡봉(高龍鳳))은 변지(邊地)에서 태어난 몸으로 상국(上國)에 와서 이토록 뜻을 얻으니 어찌 인과(因果)가 아니겠습니까. 공은 군상의 측근에서 주야로 반걸음도 좌우에서 떠나지를 아니하니 군상(君上)의 은택에 빛남과 여복(輿服 타는 수레와 입는 옷)의 아름다움을 고향에 있는 친척과 붕우들이 알 수가 없으니, 소위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약 고향에 절을 지어서 위로 임금을 위해 축수(祝壽)하고, 아래로 대중들과 복을 같이하여 우뚝하게 한 자리 귀앙(歸仰)할 장소를 마련한다면, 낮에 비단옷을 입는 격[晝錦]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이 흔연히 승낙하고 천민(千緡)에 상당한 지폐를 출자하여 절을 새로 단장하고 삼장(三藏 불교의 경(經)ㆍ율(律)ㆍ논(論))을 두게 했다. 그 뒤 공은 재신(宰臣)의 이간질을 당하여 남방에 출거(出居)하게 되고 중향(中向)도 또한 산으로 돌아와서 건물을 수리하고 공이 하루속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지정(至正 원(元) 순제(順帝)의 연호)으로 개원(改元)하기 2개월 전에 간신들을 출척하고, 정화(政化)를 다시 베풀어 바람과 우레처럼 호령을 발하고 뇌성과 비처럼 시행하자, 공은 다시 사환(賜環)되어 임금의 사랑이 더욱 새로웠다. 중향은 다시 경사에 들어갔는데 공은 전에 뜻을 다 마치지 못한 것을 서운하게 여겨 그 비용을 더해서 공사를 독려하여 완성하도록 하였다. 세시(歲時)에 전장(轉藏)하고 전후로 보시(布施)한 것을 합하니, 천에 달하는 사람이 2만 50명이요, 황금물로 칠을 해서 불상을 새롭게 한 사람이 15명이며, 백금으로 새겨서 기명(器皿)을 장식한 사람이 30명이었다. 무릇 건물의 기둥은 1백여 개나 되는데, 정축년 봄에 시작해서 계미년 겨울에 완성을 보았다. 일이 끝나는 달에는 산인(山人) 담숙(旵淑) 등이 시주를 널리 모아서 크게 화엄회(華嚴會)를 개최하여 낙성식을 하니, 그동안에 쓴 일꾼이 3천명이요, 시일은 50일이 걸렸다. 선비와 부녀자들이 부지런히 다니며 공양(供養)하고 찬탄(讚嘆)하니, 골짜기를 메우고 산등에 넘쳐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중향(中向)이 마땅히 본말(本末)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옳다 하여 고공(高公)의 명으로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견훤씨(甄萱氏)가 본국에 들어온 지 4백 년이 넘는다. 절은 비록 백제 때에 창건되었으나 여러 차례 병화를 입고 비(碑)나 기문도 없어 그 세월을 상고할 길이 없으나, 혹은 일으키고 혹은 폐하더니, 오늘에 이르러 반드시 고공(高公)을 기다려서 비로소 옛날의 모습을 복구하게 되었다. 공은 삼한(三韓) 땅에 태어났으니 경사(京師)로부터 5천 리인데, 인연이 닿아서 일월(日月) 같은 천제(天帝)의 빛에 의지하고 비와 이슬 같은 큰 은혜를 입었으니, 향국(鄕國)에 그 여택이 많이 미쳤다. 또한 불사(佛事)를 크게 베풀어서 복을 빌고[祝釐] 근본을 갚아서[報本] 끝없이 드리우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하였다.
서고사(西高寺) 서고산(西高山)에 있다. 남고사(南高寺) 만경대(萬景臺)의 뒤에 있다. 천룡사(天龍寺) 부의 동쪽 성 밑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온 집이 푸른 산 옆에 와서 산다네. 얕은 모자 가벼운 옷으로 침상에 누웠네. 폐부가 마르니 촌 술맛이 더욱 좋고, 정신이 혼미하니 들차[野茶] 향기가 또한 좋구나. 대나무 뿌리는 지상에 흩어져 뻗으니 용이 허리를 움직이는 것 같고, 파초 잎이 창 앞에 닿으니 봉의 꼬리처럼 길구나. 삼복(三伏)이 일찍 그치고 백성의 송사가 적으니, 이때 다시 부처님을 섬김도 무방하리라.” 하였다. 경복사(景福寺) 고달산에 있다. 이절의 비래당(飛來堂)에는 보덕대사(普德大士)의 화상이 있다. ○ 이규보의 기(記)에, “보덕(普德)의 자는 지법(智法)인데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연복사(延福寺)에 거주하였다. 어느날 홀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는 도교(道敎)만을 숭상하고 불법을 존숭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하리라. 몸을 편히 피란할 곳이 어디 있겠느냐.’ 하니,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全州)의 고달산(高達山)이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할 곳입니다.’ 하였다. 보장왕(寶藏王) 26년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은 이미 고달산에 옮겨져 있었으니, 반룡산으로부터 1천여 리나 떨어진 곳이다. 명덕(明德)의 말이, ‘이 산이 비록 뛰어나긴 했으나 샘물이 말라 있다. 내 만약 스승께서 옮겨 오실 것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반룡산의 샘도 옮겨왔을 텐데.’ 하였다.” 한다.
임천사(臨川寺) 서산(西山)에 있다. 사대사(四大寺)ㆍ흑석사(黑石寺) 두 절 모두 고덕산(高德山)에 있다. 원암사(圓巖寺) 청량산에 있다. 봉서사(鳳棲寺) 서방산에 있다. 대원사(大圓寺) 무악산(毋岳山)에 있다. ○ 고려 박춘령(朴椿齡)의 시에, “문서 다루는 3년 생활에 몸에는 백 가지 병이라, 공사에서 물러나 때때로 옛 정이 든 벗을 찾아가네. 높고 낮은 데 수목은 빽빽하여 길이 없나 의심하고, 철 따라 꽃이 피니 달리 봄이 있도다. 골짜기는 음청(陰晴)하여 부앙(俯仰)간에 다르고, 연기와 노을은 자색과 푸른색으로 아침저녁 다르네. 원공(遠公)은 시냇물을 건너지 마소. 산인(山人)들이 스스로 보내고 맞이하네.” 하였다.
[고적]고토성(古土城)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터가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은 것이다. 고덕산성(高德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8천 9백 20척(尺),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우물이 7개, 시내 하나가 있다. 우주 폐현(紆州廢縣) 우(紆)는 오(汚)로 쓰기도 한다. 주의 북쪽 5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인데, 신라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이성 폐현(伊城廢縣) 주의 서쪽 25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인데, 왕무(往武)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두성(杜城)으로 고치어 예속시키고 고려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성 폐현(利城廢縣) 주의 서쪽 7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내리아현(乃利阿縣)이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김제군(金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예속시켰다. 경명향(景明鄕) 영명(榮明)이라고도 한다. 부의 북쪽 1백 20리에 있다. 양량소(陽良所) 우주(紆州)의 동북쪽, 즉 우양촌(右楊村) 철소(鐵所)에 있다. 두모촌소(豆毛村所) 이성현(利城縣)에 있다. 녹균정(綠筠亭) 청사(廳事)의 북쪽에 있다. 지정(至正) 정미년에 목사 한계상(韓系祥)이 정(亭)을 바꾸어 누(樓)로 만들었다. 이달충(李達衷)이 편액을 관풍루(觀風樓)로 고치고 기문을 적었는데 지금에 와서 폐지하였다. 효자리(孝子里)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돌을 세워 효자를 표창하였는데, 성씨를 아니 새겼네. 어느 때 사람이며, 효행은 어떠하였는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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