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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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
9.호주부(湖州府)는 장흥(長興)이다.
浙江省 (領十一府。一州七十六縣)。
○湖州府(名吳興。領七縣)烏程(菰城。附府)歸安(霅溪)長興(義鄉)德清(餘不)武康(餘英)安吉(故彰)孝豐(原鄉)-地輿名目(一十九省)
湖州府
歷史沿革
隋置州,因地濱太湖得名。
元成宗元貞6年(1295年),廢州置湖州路;元順帝至正26年(1366年),改湖州府。
明武宗正德2年(1507年),領安吉州、孝豐、烏程、歸安、長興、德清、武康,升安吉縣為安吉州,領孝豐一縣,仍隸湖州府。
清高宗乾隆39年(1774年),改安吉州為安吉縣,與孝豐縣並入湖州府。至此湖州府到清末管轄歸安(縣治在今浙江省湖州市北部)、烏程(縣治在今浙江省湖州市南部)、長興(今浙江省長興縣)、德清(縣治在今浙江省德清縣德清鎮)、武康(今浙江省德清縣)、安吉(縣治在今浙江省安吉縣安城鎮)、孝豐(縣治在今浙江省安吉縣孝豐鎮)共7縣。府治歸安、烏程。與本省杭州府、嘉興府,江蘇省蘇州府、常州府,安徽省廣德直隸州相鄰。
长兴
历史沿革长兴古称长城,春秋时吴国夫概在此筑城,城形狭长,故名“长城”。秦后地属乌程县,晋太康三年(282年)始置长城县,六朝以来均属吴兴郡(湖州)。梁开平四年(910年),吴越王钱镠为避梁太祖父朱诚讳,改长城为长兴。
历史沿革
春秋至南北朝
长兴古称长城。春秋吴越争霸时期(前514—前495年),吴王阖闾派弟夫概在今雉城东南两里处筑城,作为夫概王邑。因城狭长,故名长城,距今已有2500多年的历史。后属越,越为楚所灭,遂属楚。秦始皇二十六年(前221),分三十六郡,属会稽郡。汉朝时,长兴先后属扬州、会稽、吴兴等郡。三国时,东吴大将吕蒙曾屯兵吕山。公元282年(晋武帝太康三年),从乌程县中分出,建长城县。南北朝时,从长兴走出了一位开国之君——陈霸先,557年,在建康(今南京)建都,国号陈。当时,长兴属吴兴郡,为长城县。
隋至五代
隋开皇九年(589)灭陈,罢吴兴郡,长兴并入乌程县,属苏州。仁寿二年(602),复立长城县,属湖州。隋唐时期,长兴经济繁荣,文化发达。顾渚贡茶院规模宏大,盛极一时。茶圣陆羽将贡茶命名为紫笋茶并写入《茶经》,湖州刺使颜真卿、张文规、杜牧等亲临监茶,诗人皎然、白居易及宋代湖州知府苏轼、王十朋等都前来品茗赏景,赋诗题咏。五代后梁开平二年(908),吴越王钱缪改长城县为长兴县,自此县名一直沿袭至今。
宋至明
长兴的工商业、农业萌芽较早。早在东汉(25—220),长兴即有陶窑业;这一时期,县内的砖窑业、采石业也已出现;明代中后期已有挖煤、炼灰、制砖、印刷业的文字记载,皆属于手工操作;另据宋嘉泰《吴兴志》记载:长兴每年向朝廷贡赋黄糙米、粳稻、绢丝、绵外,还上贡紫笋茶、金沙泉。该县依山傍湖,地形复杂,交通方便,扼三省要冲,为历代兵家必争之地。南宋初,长兴曾是宋金交战的地方。著名抗金将领岳飞在缠岭(访贤东北6公里)大战金兀术。小浦镇西北5公里的岳飞场(山名)曾是岳飞的练兵场,访贤西5公里的将军山是岳飞安营扎寨处。元末朱元璋派大将耿炳文,在长兴守城10年,以寡敌众,击败了张士诚,奠定了明朝东南基业。明朝中叶,著名文人归有光、吴承恩分别担任长兴县令、县丞,留下了政坛、文坛一段佳话。
清
清咸丰末至同治初年(1860—1864),清军镇压太平军,在长兴交战多年,致使人口锐减,土地荒芜,造成田无主、屋无人的局面。光绪初,地方官以荒田荒地招垦,大量客籍人移居长兴,开荒种植,逐渐恢复生机;商贾随之振兴,市场日趋兴旺。
中华民国
民国元年(1912)1月17日,革命军光复长兴。随即,废府,长兴直属于省。市集以雉城、泗安、虹星桥、夹浦四地最盛。抗战爆发后,长兴成为抗日根据地,长兴人民为这场伟大的民族解放战争做出了巨大的贡献。整个战争期间,全县有1600多人参加新四军。长兴军民与日寇浴血奋战,取得了数十次战斗的重大胜利。解放战争于1949年4月26日解放了长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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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장흥 도호부(長興都護府)
사(使) 1인.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오아현(烏兒縣)으로 고쳐서 보성군(寶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서 정안현(定安縣)으로 고쳐서 영암(靈巖) 임내(任內)에 속(屬)하게 하였다가 인종(仁宗)이 공예 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시켰고, 원종(元宗) 6년 을축【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2년.】에 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3년.】에 다시 장흥부로 강등시켰다. 고려 말에 왜구(倭寇)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로 옮겼고, 본조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성(城)을 수령현(遂寧縣)의 중령산(中寧山)에 쌓아서 부(府)의 치소(治所)로 삼았고,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성이 좁다 하여 또 읍을 수령현의 옛터에 옮겨서 성을 쌓았다. 별호는 정주(定州)【성종(成宗) 때 정한 것이다. 】또는 관산(冠山)이라고 한다. 옛 속현(屬縣)이 5이니, 회령(會寧)은 본래 백제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대로현(代勞縣)으로 고쳐서 보성군(寶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회령현으로 고쳐서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내속(來屬)시켰다. 수령(遂寧)은 본래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마읍현(馬邑縣)으로 고쳐서 보성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수령현으로 고쳐서 영암(靈巖)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뒤에 내속(來屬)시켰다. 장택(長澤)은 본래 백제의 계천현(季川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계수현(季水縣)으로 고쳐서 보성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장택현으로 고쳤던 것을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내속시켰다. 두원(荳原)은 본래 백제의 두힐현(豆肸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강원현(薑原縣)으로 고쳐서 낙안군(樂安郡)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두원현으로 고쳤던 것을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내속시켰다. 도양(道陽)은 옛 도량도 부곡(道良道部曲)이다. 향(鄕)이 6이니, 도내산(徒內山)·아서(阿西)·어산(語山)·유치(有恥)·안양(安壤)·가을전(加乙田)5134) 이요, 다소(茶所)가 13이니 요량(饒良)·수태(守太)·칠백유(七百乳)·정산(井山)·가을평(加乙坪)·운고(雲高)·정화(丁火)·창거(昌居)·향여(香餘)·웅점(熊岾)·가좌(加佐)·거개(居開)·안칙곡(安則谷)이다.
진산(鎭山)은 수인(修因)이다.【부의 북쪽에 있다. 】천관산(天冠山)【부의 남쪽에 있는데, 옛 이름은 천풍(天風)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보성에 이르기 33리, 서쪽으로 강진(康津)에 이르기 6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34리, 북쪽으로 능성(綾城)에 이르기 40리이다.
호수가 2백 76호요, 인구가 1천 41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이 21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22명이요, 선군이 1백 87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조(曺)·오(吳)·혜(嵇)·임(任)·정(丁)이요, 내접성(來接姓)이 3이니, 이(李)【덕은(德恩). 】·송(宋)【염주(鹽州). 】·최(崔)【탐진(耽津). 】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최(崔)이다.【화순(和順)에서 왔다. 】회령(會寧)의 성이 5이니 마(馬)·형(邢)·이(李)·주(周)·성(成)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백(白)【직산(稷山). 】이다. 장택(長澤)의 성이 4이니, 임(林)·고(高)·윤(尹)·오(吳)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선(宣)【보성(寶城). 】이다. 수령(遂寧)의 성이 4이니, 위(魏)·박(朴)·조(曺)·함(咸)이요, 두원(荳原)의 성이 5이니, 오(吳)·허(許)·유(庾)·신(申)·종(鐘)이요, 내접성(來接姓)이 3이니, 노(盧)【서경(西京). 】·박(朴)【보성. 】·이(李)【남양(南陽). 】이다. 인물(人物)은 수 태사 중서령(守太師中書令) 문충공(文忠公) 임원후(任元厚)이다.
땅이 기름지며, 기후가 따뜻하다. 간전(墾田)이 6천 1백 24결이요,【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가 오곡·삼·닥나무·밤·석류·목화이다. 토공(土貢)은 족제비털[黃毛]·칠·꿀·말린 죽순·표고·배·유자(柚子)·전복·말린 홍합·붉은 큰새우·삵괭이가죽·여우가죽·잘[山獺皮]·자리·차·석이·비자·대방석·상곽(常藿)·분곽(粉藿)이요, 약재(藥材)는 호라비좆뿌리[天門冬]·녹용·흰매화[白梅]·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당귀(當歸)·검산풀뿌리[續斷]·암눈비앗씨[荒蔚子]·애기풀[遠志]·방풍(防風)·계소(鷄蘇)요, 토산(土産)은 은어·김·송이다. 자기소가 1이요,【부의 동쪽 20리 소아곡리(所兒谷里)에 있는데, 하품이다. 】도기소가 1이다.【부의 남쪽 10리 묵방리(墨方里)에 있는데, 중품이다. 】
읍석성(邑石城)【둘레가 3백 36보(步)이다. 】두원(荳原) 목책 도니성(木柵塗泥城)【둘레가 80보(步)이다. 】역(驛)이 1이니, 벽사(碧沙)요, 목장(牧場)이 2이니, 도양관(道陽串)【국마(國馬) 4백 21필(匹)을 방목(放牧)한다. 】우슬관(亐瑟串)이다.【말이 1백 34필이다. 】관방(關防)은 녹도(鹿島)·회령포(會寧浦) 등 두 포구다.【병선이 머무른다. 】봉화가 5곳이니, 부의 동쪽 팔전(八巓)【동쪽으로 순천(順天) 백야 봉화(白也烽火)에 응하고, 서쪽으로 보성(寶城) 천등(天登)에 응한다. 】또 부의 동쪽 장기(場機)【동쪽으로 보성 천등(天登)에 응하고, 서쪽으로 보성 정흥(正興)에 응한다. 】또 부의 동쪽 전내현(全乃峴)【동쪽으로 보성 정흥(正興)에 응하고, 서쪽으로 어불(於佛)에 응한다. 】·어불(於佛)【동쪽으로 천내현(天乃峴)에 응하고, 서쪽으로 강진(康津) 수인산(修因山)에 응한다. 】부의 남쪽 천관산(天冠山)이다.【북쪽으로 어화(於火)에 응하고, 서쪽으로 강진 원포(垣浦)에 응한다. 】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2이니, 담양(潭陽)·순천(順天)이요, 군(郡)이 3이니, 무진(茂珍)·보성·낙안(樂安)이요, 현이 7이니, 고흥(高興)·능성(綾城)·화순(和順)·동복(同福)·옥과(玉果)·진원(珍原)·창평(昌平)이다.【본래 광주목(光州牧)의 관할이었는데 선덕(宣德) 5년 4월 일에 광주(光州)를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하고, 본부(本府)로써 계수관(界首官)을 삼았다. 】해도(海島)가 3이니 초도(草島)·이매도(伊每島)·내덕도(內德島)이다.
【영인본】 5책 663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담양 도호부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순천 도호부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무진군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보성군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낙안군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고흥현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능성현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창평현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화순현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동복현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옥과현
○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진원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동쪽은 보성군(寶城郡) 경계까지 48리, 서쪽은 강진현(康津縣) 경계까지 12리, 북쪽은 나주(羅州) 경계까지 50리, 능성현(綾城縣) 경계까지 40리, 남쪽은 바다까지 1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6리다.
[건치연혁]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오아(烏兒)로 고쳐 보성군(寶城郡)에 딸린 현이 되었다. 고려 때에 정안(定安)으로 고쳐 영암군(靈巖郡)에 예속시켰고, 인종(仁宗) 때에 공예태후(恭睿太后 인종 왕비)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부(府)로 승격시켰다. 원종(元宗) 6년에 회주(懷州)로 고쳐 목(牧)으로 올렸으며, 충선왕(忠宣王) 2년에 다시 장흥부(長興府)로 하였다. 후에 왜구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에 옮겼다가 본조 태조 원년에 수령현(遂寧縣)의 중령산(中寧山)에 성을 쌓아 다스리는 곳으로 하였다. 태종 13년에 규례에 따라 도호부로 하였고, 이듬해 성이 좁다하여 도로 수령현의 옛터로 다스리는 곳을 옮겼으며, 세조 때에 비로소 진(鎭)을 설치하였다.
[풍속]옛날에 낙토(樂土)라 일컬었다. 백성은 순박하고 일은 간략하다. 모두 이색(李穡)의 기문.
[형승]땅이 큰 바다에 임하였다. 임종선(任從善)의 기문. 삼면이 넓고 아득한 바다이다. 최경지(崔敬止)의 시에, “아득히 넓은 바다로 삼면이 물인데, 푸르고 두터운 땅에는 얼마나 산이 많은고.” 하였다.
[산천]수인산(修因山) 부의 북쪽 10리에 있는 진산이다. 위에 돌성이 있다. 자세한 것은 강진(康津)의 고적 아래에 보인다. 중령산(中寧山)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장원봉(狀元峯) 읍성(邑城)의 서쪽에 있다. 억불산(億佛山) 부의 동쪽 7리에 있다. 천관산(天冠山) 부의 남쪽 52리에 있다. 예전에는 천풍(天風)이라 불렀고, 혹은 지제(支提)라고도 하였는데, 몹시 높고 험하여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 사자산(獅子山) 부의 동쪽 9리에 있다. 부암(婦巖) 혹은 망부석이라도 일컫는데, 억불산 산허리에 있다. 가지산(迦智山)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용두산(龍頭山)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착두산(錯頭山)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웅점(熊岾) 착두산 동쪽 5리에 있다.
작천(鵲川) 영암군(靈巖郡) 월출산(月出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강진현의 북내상(北內廂) 서남쪽을 지나 부의 남쪽 6리에 이르러 수령천과 합쳐 강진의 구십포(九十浦)로 들어간다. 예양강(汭陽江) 부의 동쪽 성문 밖에 있다. 바다 부의 동남쪽 16리에 있다. 수령천(遂寧川) 예양강(汭陽江)이라고도 하는데, 가지산(迦智山)에서 나와 부의 북쪽 2리를 지나 돌아 동쪽으로 흐르고, 또한 서남쪽으로 흘러 성암(省巖)에 이르러 강진현의 구십포와 합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죽포(竹浦)ㆍ관음방포(觀音方浦)ㆍ돈도두포(豚道頭浦) 모두 옛 장흥에 있다. 천포(泉浦) 부의 동쪽 40리에 있는데, 어량이 있다. 금당도(金堂島) 둘레가 24리이다. 동도(童島) 둘레가 2리이다. 득량도(得良島) 둘레가 10리이다. 이상은 모두 부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횡간도(橫看島)ㆍ벌라도(伐羅島) 둘레가 60리. 산이도(山伊島) 둘레가 90리이다. 소랑도(小狼島) 둘레가 1리이다. 대랑도(大狼島) 둘레가 6리이다. 대화도(大花島) 둘레가 42보이다. 대저도(大猪島) 둘레가 3리이다. 우도(牛島) 둘레가 4리이다. 화도(花島) 둘레가 12리이다. 내덕도(來德島) 둘레가 30리이고, 목장이 있다. 이상은 모두 부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토산]생강ㆍ옻ㆍ유자ㆍ비자ㆍ치자ㆍ석류ㆍ꿀ㆍ낙지ㆍ농어ㆍ물개ㆍ숭어ㆍ전복ㆍ굴ㆍ오징어ㆍ표고ㆍ송이ㆍ맛[甘蛤]ㆍ소금ㆍ우뭇가사리ㆍ참가사리[細毛]ㆍ은어[銀口魚]ㆍ홍합ㆍ미역ㆍ김ㆍ감태ㆍ매산ㆍ황각(黃角)ㆍ오매(烏梅)ㆍ죽전(竹箭) 부의 동쪽 정화리(丁火里) 및 부 안의 남산(南山)에서 나온다.
[불우]보림사(寶林寺) 가지산(迦智山)에 있다. 신라의 사마금영(司馬金穎)이 지은 보조선사(普照禪師)의 탑비명(塔碑銘)이 있다.
천관사(天冠寺) 천관산에 있다.
○ 중 정명(靜明)의 기문에, “천하를 통한 일기(一氣)가 쏟아져 내와 개천이 되고, 쌓여서는 산을 이루었다. 영(嶺)의 남쪽 바닷가에 임한 땅, 옛 오아현(烏兒縣)의 경계에 천관산이 있으니, 꼬리는 궁벽한 구석에 도사리고, 머리는 큰 바다에 잠겨 일어섰다 엎드렸다 하면서 구불구불 몇 주(州)의 땅에 걸쳐 있으니 그 기운의 쌓임이 크기도 하다. 영통화상(靈通和尙)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북갑(北岬)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랐다. 가지고 있던 석장(錫杖)이 날아 산꼭대기를 지나 북갑에 이르러 꽂혔다. 꿈에 석장을 세웠던 그곳에 숲을 베고 절을 지었으니 지금의 천관사가 바로 이것이다. 절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바위들이 더욱 기이한데 높이 우뚝 서있는 것이 당암(幢巖)이요, 튀어나와 외로이 걸려 있는 것이 고암(鼓巖)이다. 구부리고 공손히 절하며 명령을 듣고 있는 것같은 것이 측립암(側立巖)이요,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울부짖는 것같은 것이 사자암이다. 층층이 쌓아 놓은 것이 마치 잔치 그릇에 음식을 쌓아 놓은 것같은 것이 상적암(上積巖)과 하적암이요, 하늘을 찌를 듯이 공중에 홀로 솟아 있는 것이 사나암(舍那巖)이며, 우뚝하고 험한 것이 서로 끌어 안아 이즈러진 데를 보충하고 있는 것이 문수 보현암(文殊普賢巖)이다. 천관사에서 남쪽으로 5백 보를 가면 작은 암자가 낭떠러지 아래 외진 곳에 있는데, 그것을 구정암(九精庵)이라 부른다. 그 암자에서 낭떠러지를 따라 백여 보를 올라가면 돌 대(臺)가 펀펀한 것이 있으니 환희대(歡喜臺)라 한다. 그것은 올라가는 사람이 험한 길에 지친 몸을 여기에서 쉬게 되므로 즐겁고 기쁘기 때문이라 한다. 대 앞 초목이 우거진 사이에 희미한 길이 있고, 길을 따라 올라가 산마루에 이르면 사방이 틔어 바라보인다. 구름과 놀이 곱고 초목들이 빛나며, 온 산봉우리는 푸른 소라를 벌려놓은 듯, 시냇물은 흰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것이 손바닥 위를 가리키듯 역력히 보인다. 산꼭대기에서 남쪽으로 30리쯤 되는 곳에 선암사(仙嵒寺)가 있는데, 절 북쪽에 바위들이 총총 섰으니, 이곳은 지선(地仙 지상의 신선)이 거처하던 곳으로서, 단애옹(丹崖翁)ㆍ황석공(黃石公)과 같은 분들이다. 절의 남쪽 별봉(別峯) 꼭대기 미타암(彌陁庵) 북쪽에 신령스러운 돌이 하나 있어, 높고 크기가 거의 10척이나 되는데도 손으로 밀면 움직이니, 아아 놀랍도다. 또 포암(蒲嵒)이 그 서쪽에 있는데, 그 위에 모난 우물이 있어 깊이가 한 자쯤 되며, 신령스러운 맑은 샘이 솟아 사시에 마르지 않고, 청포(靑蒲)가 두어 떨기 돌틈에 나있어 마치 무엇이 그것을 보호하고 있는 것같다. 그 외에 이상하고 기괴한 것들이 많은데, 오뚝한 것, 숙인 것, 우묵한 것, 입을 벌린 것, 우뚝 일어선 것, 숨어 엎드린 것, 울툭불툭한 것 등이 천태만상 기괴하고 이상하여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어찌 조물주가 여기에 정수를 모아 놓고 바다를 한계로 하고 넘어서 달아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옛사람이 몹시 산수를 사랑하여 나막신으로 올라간 이도 있고, 나귀를 거꾸로 타고 돌아온 사람도 있으며, 혹은 수일 묵으며 돌아가기를 잊어버린 이도 있고, 아주 가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눈으로는 산의 울툭불툭한 것을 보고 귀로는 잔잔한 물소리를 들어 그 정서를 유쾌하게 하기에 힘쓸 뿐만이 아니라, 이 사이에 뜻을 붙여 인지(仁智)의 즐거움을 따라서 장차 그 본성을 회복하고 그 도(道)에 알맞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가지사(迦智寺) 가지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구불구불 골짜기를 건너고 숲을 뚫고, 나는 새보다 높은 만첩 봉우리에 올라간다. 범 다니는 길에는 푸른 이끼가 어울렸고, 용당(龍堂)에는 흰 구름이 깊었네, 해가 더디니 섬돌에는 온갖 꽃이 웃고, 바람이 빠르니 동산에는 많은 나무들이 읊는다. 밑바닥까지 본래 한 줌 티끌도 없으니, 산 빛은 눈을 씻고 물은 마음을 깨끗이 한다.” 하였다.
수정암(修精庵) 천관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여윈 몸 절에 앉아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몸은 한가하고 경치는 좋기가 그대 같은 이 드물어라. 종소리 골짜기에 은은하니 미친 고래의 울음이요, 탑 그림자 하늘에 흔들리니 상서로운 기러기 날아 가네. 바람이 옥로(玉爐)를 지나니 작전(鵲篆)이 흔들리고, 비가 금소(金沼)에 뿌리니 물풀이 자라네. 도정(道情)은 오히려 도연명(陶淵明)을 사랑하여, 손을 이끌고 일을 잊은 채 도리어 전송하네.” 하였다.
옥룡사(玉龍寺) 천관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구름 속에 솟은 누각 우뚝하니, 한 떼가 높은 공중에 단청이 빛난다. 해와 달은 험한 산에서 낮게 보이고, 산과 시내는 지령(地靈)을 웅장하게 하네. 비가 오니 용이 바릿대에 내리고, 바람이 이니 범이 경을 듣네. 온갖 생각이 홀연히 사라져 버리니, 덩그러니 마른 나무의 형상이로구나.” 하였다.
금장사(金藏寺) 용두산에 있다.
[고적]옛 장흥[古長興] 천관산 남쪽에 있다. 회령폐현(會寧廢縣) 본디 백제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대로(代勞)로 고치고 보성군(寶城郡)에 딸린 현이 되었고,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본부에 소속시키었다. 부의 동쪽 32리에 있다. 수령폐현(遂寧廢縣) 본래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마읍(馬邑)으로 고치고 보성군에 딸린 현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영암군(靈巖郡)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와서 본부에 소속되었으며, 지금은 부의 치소가 되었다. 장택폐현(長澤廢縣) 본디 백제의 계천현(季川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계수(季水)로 고치어 보성군에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와서 소속되었다. 부의 동북쪽 41리에 있다.
황보성(皇甫城) 중녕산(中寧山) 동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터가 남아 있다. ○ 이색의 기문에, “중녕에 성을 쌓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함이다. 장흥부는 큰 바닷가에 임해 있어 초목에는 상록수가 많으며, 예전에 낙토(樂土)라 일컬었다. 인종 왕비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가 의종(毅宗)ㆍ명종(明宗)ㆍ신종(神宗) 세 왕을 낳았는데, 서로 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장흥은 옛적부터 유신(有莘)에 비하여 군에서 목으로 승격하였으니, 특별하게 표창한 것이 지극하였다. 백성은 순박하고 일은 간략하므로 명현(名賢)과 재주 있는 사대부가 공명에 별 뜻이 없고 고요히 수양하고 다스리기를 좋아하는 이가 많이 이 부를 맡게 된다. 지정(至正) 경인년 이후로 왜적들이 침입하여 밤에는 작란하다가 날이 밝으면 몰래 곧 달아나므로 나라에서 가볍게 여기고 걱정거리로 삼지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대낮에도 깊숙히 들어와 열흘 혹은 한 달 동안이나 멋대로 횡행하여 바다 근처의 민가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조정에서 그때마다 대장을 보내어 쫓아 버렸으므로 조금 평정되기는 했으나, 형세가 궁박해져서 백성을 딴 곳으로 옮기라는 영을 내렸으므로 장흥 백성은 철야현(鐵冶縣)으로 옮겨가서 살게 된 것이 기미년이요, 보성군에 합친 것이 기사년이었다. 옛날에 제후가 나라를 잃으면 다른 제후에게 우거(寓居)함은 비록 예가 그러하다 하였으나, 그 사대부로서 늙어 고향에 은퇴한 사람, 관리로서 뜻이 있는 사람, 백성으로서 뜻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분개하여 말하기를, ‘우리 부는 은대(銀帶 정3품~종6품 벼슬) 이상의 관원이 다스렸는데, 이제 지현(支縣)의 관리에게 기탁하게 되었으니 마치 머리가 아래에 있는 것 같고, 혹이나 군더더기같이 되었으니, 어찌 심한 수치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금년 봄 2월에 부사 황보공이 부임하자 부로들이 그 사연을 진정하였더니, 황보공도 옳게 여겨 안렴사 이원(李原)에게 보고하였다. 이공도 옳다고 하여, 이웃 고을에 통첩을 내리어 장정 3백 50명을 모아서 8월 17일에 공사를 일으켜 9월 27일에 끝마쳤는데, 성의 높이가 15자, 두께가 6자, 둘레가 1천 5백 자이다. 동ㆍ서 두 문이 자물쇠가 이미 굳고, 경비하는 자의 바라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낮에는 동ㆍ서문을 활짝 열어 놓아 나무꾼이나 목동들도 편리하게, 나가서 밭갈이 하고 들어와서 쉬며, 백성들이 두려움 없이 즐겁게 처자를 기르는 기쁨을 누리고, 도망쳐 달아나는 괴로움도 없어졌으니, 사대부 및 아전과 백성들의 소망이 이제 이루어졌다. 봉역을 굳게 지키고 부역을 바치고 여유가 있게 되었으니,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하였다고 쓰는 것이 어찌 옳지 않으리오.” 하였다.
유치향(有恥鄕) 부의 북쪽 15리에 있다. 안양향(安壤鄕) 안회(安懷)라고도 썼는데,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어산향(語山鄕)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도내산향(徒內山鄕)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아서향(阿西鄕) 부의 서쪽 41리에 있다. 요랑소(䭜狼所)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수태소(守太所)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칠백유소(七百乳所) 부의 동쪽 20리에 있다. 정산소(井山所)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운고소(雲膏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정화소(丁火所)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창거소(昌居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웅점소(熊岾所)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가좌소(加佐所)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거개소(居開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가을평소(加乙坪所) 부의 동쪽 31리에 있다. 향여소(香餘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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