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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6.염주부(廉州府)는 영산(靈山)

한부울 2011. 3. 16. 13:46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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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 

6.염주부(廉州府)는 영산(靈山)이고,

廣東省(領十府。三直隸州。七州。八十縣)

廉州府(名環珠。領一州。二縣)合浦(大廉。附府)欽州(安州)靈山(南賓)-地輿名目(一十九省)

 

 


廉州府,明洪武元年(1368年)改廉州路置,治合浦縣(今屬廣西)。轄境相當今廣西壯族自治區北海、欽州合浦、浦北、防城、靈山等市縣地。七年降為州,十四年復為府。屬廣東省。1912年廢。

广东十府中的下四府:高、雷、廉、琼,其中的廉州府(钦州北海东兴)划给广西,琼州长大成省(海南省)。

先来了解一下广东的儿子,广西的养子,钦〈钦州〉廉〈合浦/北海〉防〈防城〉的历史沿革:

百越之地“南珠故郡,海角名区”-合浦,历史悠久、山清水秀、资源丰富、物产众多,是著名的南珠之乡,是海上丝绸之路的发源地。

汉、三国至晋,钦州属交州合浦郡,南朝末元嘉设末寿郡,这是钦州的最早建制。梁代设安州

隋开皇十八年(公元598年)易名钦州,取“钦顺之义”,此为钦州的最早得名。唐武德五年(公元622年)改宁越郡为钦州总管府,元改为钦州路,明初改为钦州府,民国年间改为钦县,属广东省钦廉专署所辖。

北海市因市区北面濒临海而得名,始见于清康熙初年,清嘉庆年以来沿称为市。1876年中英《烟台条约-연대(烟台):산둥성(山东省) 동북부(东北部)에 있는 도시》辟为通商口岸。1949年12月4日解放,当时为镇,归合浦县管辖,1951年1月改为广东省辖市,

防城先秦时期,这一带属于百越之地,秦始皇统一岭南后,归秦置之象郡所辖;汉为合浦郡地,三国至晋仍属于合浦郡地(三国期间为吴国辖地);南朝宋、齐时为宋寿县地,属交州管辖,梁、陈时为这宋京郡安京县地,属安州管辖;隋、唐时为钦州辖地。宋时仍隶属钦州管辖,并开始有"防城"之称。元、明、清时隶属钦州廉州;至清朝光绪十四年(公元1888年)划出钦州西部设置防城县,隶属广东省。民国时期至解放初,仍属广东省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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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영산현(靈山縣)

본디 서화현(西火縣)인데, 경덕왕이 상약(尙藥)으로 이름을 고쳐서 밀성군(密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밀성군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충경왕(忠敬王) 15년 갑술에【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11년.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속현(屬縣)이 1이니, 계성(桂城)이다. 신라 시대의 이름은 미상(未詳)이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밀성(密城) 임내(任內)에 붙였으며, 공민왕 병오년에 영산(靈山)으로 이속(移屬)시켰다가, 공양왕 경오년에 도로 밀성으로 붙였는데, 본조 태조 갑술년에 다시 본현으로 붙였다.

진산(鎭山)은 영취산(靈鷲山)이다. 기음강(岐音江)【현 서쪽 28리 거리에 있다. 용당(龍堂)이 있는데, 춘추로 수령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되, 축문(祝文)에 “가야진 명소지신(伽倻津溟所之神)”이라고 칭한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밀양에 이르기 21리, 서쪽으로 창녕(昌寧)에 이르기 10리, 남쪽으로 칠원(漆原)에 이르기 16리, 북쪽으로 영취산(靈鷲山)을 등지고 있다.

본현(本縣)의 호수는 2백 57호, 인구가 1천 1백 34명이고, 계성(桂城)의 호수는 2백 14호, 인구가 9백 72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7명, 영진군(營鎭軍)이 50명, 선군(船軍)이 1백 92명이다.

본현(本縣)의 토성(土姓)이 5이니, 신(辛)·문(文)·전(全)·조(曺)·채(蔡)이며, 내성(來姓)이 1이니, 박(朴)이다.【흥주(興州)에서 왔는데, 지금은 성(姓)을 이은 사람이 없다. 】계성(桂城)의 성이 3이니, 서(徐)·석(石)·진(陳)이며, 망성(亡姓)이 2이니, 전(田)·신(申)이요, 망래성(亡來姓)이 1이니, 이(李)이다.【영천(永川)에서 왔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씩이며, 기후는 따뜻하고, 간전(墾田)이 3천 1결이다.【논이 10분의 3이 못된다. 】토의(土宜)는 벼·조·기장·피·보리·삼[麻]이며, 토공(土貢)은 꿀·밀[黃蠟]·호도·배·대추·석류·칠·종이·왕대·삵가죽·수달피(水獺皮)이요, 약재(藥材)는 오미자·안식향(安息香)이다. 토산(土産)은 동석(銅石)이 계성현 동쪽 신포리(新浦里) 아견사동(阿見寺洞)에서 난다.【제련하여 동철(銅鐵)을 만든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현 동쪽 신현리(新峴里)에 있다.【하품이다. 】역(驛)이 2이니, 온정(溫井)과【본현에 있다. 】일문(一門)【계성현에 있다. 】이요, 봉화가 2곳이니, 소산(所山)은 현 남쪽에 있고,【남쪽으로 칠원(漆原) 안곡(安谷)에 응하고, 북쪽으로 계성(桂城) 여통산(餘通山)에 응한다. 】여통산(餘通山)은 계성 남쪽에 있다.【북쪽으로 창녕(昌寧) 봉산(烽山)에 응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영산현(靈山縣) 

동쪽으로는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40리, 남쪽으로 칠원현(漆原縣) 경계까지 23리, 서쪽으로 창녕현(昌寧縣) 경계까지 15리, 북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11리, 서울과의 거리는 7백78리다.

[건치연혁]본래 신라(新羅) 서화현(西火縣)이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상약(尙藥)으로 고쳐서 밀양군(密陽郡)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전대로 소속시켰다. 원종(元宗)인 감무(監務)를 두고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풍속]백성들은 모두 주씨, 진씨다 고려 신예(辛裔)의 시(詩)에, “영취산(靈鷲山) 높아 조그만 티끌도 없는데, 안구역 백성들은 곧 모두 주씨(朱氏), 진씨(陳氏)로다.” 했다. 뽕나무를 심고 대나무를 가꾸었다 남재(南在)의 시(詩). 십실(十室)의 음악 소리와 글 외우는 소리 이지강(李之剛)의 시(詩)에, “생각 밖에 조그만 고을에서 음악 소리와 글 외우는 소리 들리니, 모름지기 조정에서 문화를 숭상함을 알겠도다.” 하였다.

[형승]취령진촌(鷲嶺鎭村) 이백첨(李伯瞻)의 시(詩)에, “취령(鷲嶺) 높고 높아 네 마을을 누르니, 영특한 재주와 무사(武士)의 지략(智略) 몇 가문(家門)이던가.” 하였다.

[산천]영취산(靈鷲山) 현의 동북쪽 7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서역(西域)의 중 지공(指空)이 여기에 와서, ‘이 산이 천축(天竺)의 영취산과 모양이 같아 이렇게 부른다.’고 했다. 태자산(太子山) 현의 북쪽 1리에 있다. ○ 신라(新羅) 태자(太子)의 묘가 있다 해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 도초산(道草山) 현의 서쪽 22리에 있다. 건현(件峴) 현의 동쪽 22리에 있다. 이물현(尼勿峴) 현의 동쪽 12리에 있다. 석천산(石泉山) 현이 남쪽 15리에 있다. 병풍암(屛風巖) 현의 남쪽 1리에 있다. 천연(穿淵)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방아굉이가 물에 잠겨 땅속을 뚫고 들어가다가 법사지(法師池)로 나왔다.” 한다. 지금은 변해서 내가 되었다. 기음강(岐音江) 현의 서쪽 28리에 있다. 창녕현(昌寧縣) 감물창진(甘勿倉津) 하류(下流)인데 의령현(宜寧縣) 정암진(鼎巖津)과 합쳤다. 옛날에는 가야진(伽倻津)이라고 불렀다. 매포진(買浦津) 현의 남쪽 23리에 있다. 또 멸포(蔑浦)라고도 하는데, 곧 칠원현(漆原縣) 우질포(亏叱浦) 하류다. 동보포(同步浦)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온천(溫泉) 현의 동남쪽 17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계성천(桂城川) 계성현(桂城縣)에 있다. 창녕현(昌寧縣) 화왕산(火王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매포(買浦)로 들어간다. 법사지(法師池) 현의 남쪽 18리에 있다. 가뭄이 들면 호랑이 머리를 못에 넣으면 곧 비가 왔다. 장자택(長者澤)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작택(鵲澤) 현의 서쪽 11리에 있다.

[토산]대[竹]ㆍ죽전(竹箭) 병풍암(屛風巖)에서 난다. 붕어[鯽魚]ㆍ잉어[鯉魚]ㆍ복령(茯苓)ㆍ매실(梅實)ㆍ꿀[蜂蜜]ㆍ감[柹]ㆍ석류(石榴)

[불우]보림사(寶林寺)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이 절에 반야루(般若樓)가 있다. 고려 김륜(金倫)이 합포 만호(合浦萬戶)가 되었을 제, 서역(西域) 중[僧] 지공(指空)을 위해서 이 누(樓)를 3일만에 지었다. 지공(指空)이 여기 올라가서 반야경(般若經)을 강론하였다 하여 이렇게 이름지었다. 죽림사(竹林寺)ㆍ고봉사(高峯寺)ㆍ서림사(西林寺)ㆍ적조사(寂照寺)ㆍ법화사(法華寺) 모두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절벽(絶壁) 위에 겨우 뚫린 돌길이 있어 사람들이 붙들고 오르내린다. 일미사(一味寺) 화왕산(火王山)에 있다. 석천사(石泉寺) 석천산(石泉山)에 있다.

[고적]계성폐현(桂城廢縣)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밀성군(密城郡)에 붙였다가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곳에 소속되었다. 뒤에 공양왕(恭讓王)이 다시 밀성(密城)에 붙였고,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에 다시 여기로 소속되었다. 마천부곡(馬川部曲) 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왕기음부곡(王岐音部曲) 계성현(溪城縣) 서쪽 10리에 있다. 길곡부곡(吉谷部曲) 지금은 기곡(箕谷)이라고 부르는데 현의 동남쪽 20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기곡계당기(箕谷谿堂記)에 쓰기를, “취성(鷲城) 동쪽에 골짜기가 있으니 깎은 듯이 삼면이 높다랗고, 그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마치 키[箕]와 같이 생겼기 때문에 기곡(箕谷)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 동방(東方)은 본래 기자(箕子)가 봉한 나라요, 또 기성(箕星)의 분야(分野)이므로 이 골짜기를 기곡이라고 한 것은 처음에는 비록 그 모양이 키와 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겠지만 그 이름의 뜻을 상고해 본다면 아주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대체 키라는 것은 곡식을 까부르는 도구인 까닭에 군자를 안으로 하고 소인을 밖으로 하는 뜻이 있다 한 것은 태괘(泰卦)의 형상[象]이다. 그래서 어진 사람이라야 이 골짜기에 살 수 있고 못난 자는 제 몸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군자(君子)다운 이 부감(李府監)이 여기에서 늙은 것이다. 무술(戊戌)년에 집 동쪽에 당(堂)을 짓고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고 시냇물을 끌어 오리를 기르며, 대나무 천 주를 심어 음악 소리를 대신하고 소나무 백 그루를 심어 절조를 가다듬는다. 이는 모두 계당(谿堂)의 구경거리로 군자(君子)가 즐겨하는 바이다. 마침내 언덕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면 취봉(鷲峯)이 우뚝 서 있는 것은 키[箕]의 발뒤꿈치가 아닌가! 낙수 물이 가로놓인 것은 키의 혓바닥이 아닌가! 그 밖에 쇠잔한 산과 끊어진 항구, 별 같은 것이 또한 많다. 하늘에는 기성(箕星)이 있고 땅에는 기곡(箕谷)이 있어 빛나는 멧부리의 기상이 서로 사랑하는 덕에 감응하여 덕을 나게 하여 계당(谿堂)의 주인에게 주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 부감(李府監)이 그렇게 수(壽)하고 또 강녕하며 그 자손이 잘 되고 또 많단 말인가. 내가 가서 그를 찾으니 공(公)은 나를 계당 위에서 대접하여 술을 마시고 나서 그 당(堂)의 기(記)를 청하기를, “내 당(堂)이 이루어진 지 이제 15년이나 되었건만 글하는 선비라고는 그대가 처음 왔으니, 나를 위해서 기(記)를 지어달라.” 했다. 나는 강경하게 사양했으나 그 뒤 며칠만에 또 편지를 보내어 권하는 뜻이 더욱 두터웠으므로 끝내 사양치 못했다.” 하였다. 오가이향(烏加伊鄕) 매포(買浦) 동쪽에 있으니 현에서 거리가 20리다. 퇴곡소(退谷所)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수다이소(水多伊所)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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