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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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
4.서안부(西安府)는 진안(鎭安)이고,
陝西省(領七府。五直隸州。五州。七十三縣)。
○[嫡-女]州(名上洛。領四縣)鎮安(安業)雒南(上雒)山陽(豐陽)商南。
廣西省(領十一府。二直穎州十六州。四十九縣)。
○鎮安府(名扶蘇。領五州。一縣)天保縣(附府)下雷州(州)奉議(州)歸順(州)向武(州)都康(州)-地輿名目(一十九省)
경기 서안부(西安府) 부평(富平)
전라 서안부(西安府) 진안(鎭安)
경상 서안부(西安府) 함양(咸陽)
함경 서안부(西安府) 삼수(三水)이고,
鎮安府地。乾隆三年置。北:天保山,東北:扶蘇山。西:鑒山。歸順江一曰浤渰江,自歸順入縣西,伏流,至鑒山前复出,東流經治南,右受馱命江,天保泉自北來注,又東,左受咘來河,右受歸順之武平河,東北入奉議。
天保县
乾隆四年(1739年),镇安府添设附廓县,叫天保县。民国元年,置府废县。次年废府复置天保县,属田南道。19年,广西省划为12个区, 天保县属第12区。21年6月,全省12个区并为6个区,天保县属第6区。1949年12月,属龙州专区。1951年7月,改属百色专区。同年8月,与敬德县合并为德保县。县政府设在今德保县城关镇。
德保县
秦属象郡。汉代属牂牁郡句町县地。晋属兴古郡。唐为废冻州(羁縻州)。宋建镇安峒。元至元十八年十月(1281年)建镇安州,二十九年六月改为镇安路。
明洪武元年(1368年),镇安路改为镇安土府。府治设于小镇安厅(今那坡县)的感驮岩。次年(1369年),府治移建于废冻州(今德保县治)。
清康熙二年(1663年)改土归流为镇安府。
乾隆四年(1739年),镇安府添设附廓县,叫天保县。
民国元年,置府废县。次年废府复置天保县,并恢复道制,天保县属田南道。
19年,广西省划为12个区, 天保县属第12区。
21年6月,全省12个区并为6个区,天保县属第6区,区治在百色。
22年7月增设天保民团区,区治在天保壮剧表演县,辖天保、恩隆、思林、奉议、向都、靖西、镇边、镇结8个县。23年3月民团区改为行政监督区,辖县不变。
23年,拨出恩阳县的东凌、仁和、塘日、扶平、赖德、保宁6个乡,靖西县的渠洋、太和、魁圩3个乡,天保县的多敬、 凌怀、多浪3个乡,一共12个乡,24年在靖西、天保、恩阳、百色接界处成立敬德县(县治在多敬圩),属天保行政监督区。
广西大新县下雷镇
大新县郡县建制以前,本县属骆越地,秦属象郡,汉属郁林郡临尘县地,东晋、宋、齐、梁、陈属晋兴郡,隋属郁林郡,唐属邕管,始建五个羁縻州(西原、波州、万承、养利、思城),宋以后增设太平、全茗、茗盈三州,全县定型为八个土州。清末改土归流结束后,于民国元年(1912年)改养利土州为养利县,改思城土州为崇善县思城分县,民国七年(1918年)思城分县并入养利县,民国十七年(1928年)下雷、安平、太平、合并置雷平县,民国十八年(1929年)置万承县,属龙州专区。1949年12月养利、万承、雷平3县陆续解放。1951年3月三县合并为大新县,属龙州专区,1952年属邕宁专区,1956年属桂西壮族自治州,1958年曾与天等县合并为新英县,次年恢复两县原制,属南宁专区,1970年改属南宁地区。2000年,大新县辖5个镇、11个乡:桃城镇、全茗镇、硕龙镇、下雷镇、雷平镇、龙门乡、五山乡、昌明乡、福隆乡、那岭乡、恩城乡、榄圩乡、振兴乡、宝圩乡、堪圩乡、土湖乡。
奉议州
宋皇祐五年(1053年),置奉议州,为羁縻州。奉议州治所在今广西田阳县田州镇兴城村那赖屯,因地形酷似桃果,故又名“桃城”。初属右江道镇安军民宣抚司,后改隶广南西路邕州管。元朝,升田州为田州路,奉议州为广西行中书省田州路所辖。
明洪武二年(1369年),奉议土州并入来安府。七年复置奉议土州,同时将治所从那赖屯迁至发祥屯(今兴城屯),直隶广西布政使司。嘉靖六年(1527年),改隶思恩府。清雍正七年(1729年),改隶镇安府(府治在今德保县)。 民国元年(1912年),废州改县,奉议州为奉议县。
歸順州(今廣西靖西縣)
靖西县历史悠久,据解放后在县城主山出土的旧石器时代的砍砸器,以及禄峒乡大金村等地出土的新石器时代的石锛、石斧、石铲等物推断,远在原始社会,靖西就有人类居住。
地处归属和政区设置,最早见于《唐书》,建制已有1200多年历史。
秦始皇三十三年(公元前214年)派尉屠睢率五十万大军平定岭南,在岭南置桂林、南海、象三郡,今县境属象郡,郡治临尘(在今崇左县境)。
秦末代理南海尉赵佗兼并三郡,建立南越国,县地属南越国。
汉武帝元鼎六年(公元前111年)平定南越,将岭南分为南海、苍梧、郁林、合浦、交趾、九真、日南、珠崖、儋耳九郡,今县境属益州刺史部南部牂柯郡句町县地,牂柯郡治故且兰,句町县治在今云南省广南县境,古为句町国,汉武帝时灭,置句町县。
蜀汉建兴三年(公元225年) 以建宁、牂柯郡为兴古郡,今县境属蜀汉益州南部兴古郡句町县地,郡治宛温(在今云南省砚山县)。
晋武帝太康元年(公元280年) 吴国末帝孙皓投降,统一南方,桂西部分属宁州,今县境西晋时属宁州兴古郡句町县地,郡治律高(在今云南省弥勒县)。
东晋时废句町县,郡治宛暖(在今云南省砚山县境)。
南朝(420年至589年)宋今县境属宁州兴古郡,郡治漏卧(在今云南省罗平县);南朝齐复置句町县,今县境属兴古郡句町县地,郡治西中(在今云南省文山州);南朝梁大宝后废句町县,今县境属兴古郡,郡治西中;南朝陈时今县地属北朝后周南宁州,州治味县 (在今云南省曲靖县)。
隋大定元年(581)今县境属南宁州总管府地(郡级政区),治所昧县(在今云南省曲靖县)。
唐开元二年(714年后)今县东境始置归淳州,隶邕州都督府,府治宣化(在今广西南宁市)。
贞元十二年(796) 西境始设安德州,隶安南都护府,府治宋平(在今越南河内)。元和初(806年后),归淳州更名归顺州。
五代十国(907年至960年)广西地区先是北部属楚国,南部属南汉。后来南汉并吞了北部,于是全属南汉,今县境属南汉兴王府,治所番禺(在今广州市),县东部置温州,西部置安德州,均隶邕州建武节度使。
宋太祖开宝四年(971) 进兵广州,消灭南汉,统一岭南,在羁縻地区实行土司制度。至道三年(997) 置广南东路和广南西路。
今县境属西路邕州,州治宣化(在今南宁市),县境东部置温弄州(一说温州、温闷峒、温润峒);中部置顺安州;西南部置归化州;西部置安德州均隶邕州。
景炎二年(1277)江西广信府广丰县人张天宗起兵抗元失败,率众南来顺安州贡峒,更名顺安峒。
元至元十三年(1276)进兵广西,十六年南宋灭亡。今县境属湖广行中书省,至正二十三年(1363年) 从湖广南部地区分置广西行中书省。今县中部置归顺州,东境置温州(一说河润州);隶镇安路,路治感驮岩(在今那坡县境);西境置安德州,隶来安路,路治奉议州(在今田阳县境)。
明洪武元年(1368)元朝灭亡,广西行中书省改为广西布政使司(洪武九年改承宣布政司),镇安路改为镇安府,府治从感驮岩移至冻州(在今德保县境)。
明初废归顺州、安德州入顺安峒。弘治九年(1496)10月,岑氏土官率兵有功,升顺安峒为归顺土州,仍隶镇安府。嘉靖四年(1525)直隶广西布政司属思恩府(府治在今武鸣县)。四十年(1561)温州降为寨,更名湖润,改属南宁府。
清顺治十八年(1661年、南明永历十五年)明朝灭亡,统一全国,今县境置归顺土州,初隶思恩府,雍正七年(1729)改土归流,因去思恩遥隔,复隶镇安府。
十年湖润寨又隶镇安府。乾隆十一年(1746)湖润寨土巡检故绝,改土归流属归顺州。光绪十二年(1886)归顺州升为归顺直隶州,属太平思顺道,道治今龙州县,小镇安厅改为镇边县,与下雷土州原属镇安府,均属归顺直隶州。
民国元年(1912) 6月废归顺州,置归顺府。
镇边县改隶省,湖润巡检裁销改为团,下雷土州改设弹压,均属归顺府。
2年6月废归顺府置靖西县,以旧城名靖城与位广西西部而名,初隶镇南道(道治今龙州县) ,15年6月废道为区。
16年下雷土州归并雷平县(今属大新县)。
19年冬广西划为十二个区民团指挥部, 靖西为第十区,区治靖西县。
21年6月又将十二个民团区并为民团六个区, 靖西隶龙州区。
22年7月增设天保民团区,靖西改隶天保区,区治天保县。
向武州,北宋皇祐中置,治今广西壮族自治区天等县西北向都东。属邕州羁縻。元初迁治今天等县向都西北,延祐间还治旧址。明洪武二十八年(1395年)改置为向武千户所,三十二年复置向武州。辖境相当今天等县部分地区。直隶广西承宣布政使司。万历四十五年(1617年)始迁治今天等县西北向都。清初属思恩府,雍正七年(1729年)改属镇安府。1917年和都康、上映二土州合置为向都县。
广西乡镇 天等县-都康乡
位于县城西北部。清属都康土州(少部分属向武士州) 民国属向都县
都康州,北宋置,治今广西壮族自治区天等县西北都康东。南宋末迁治今天等县西北都康。辖境即今天等县一带。元属田州路。明直隶广西布政司。清称都康土州,属思恩府、后改属镇安府,1917年并入向都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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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남원 도호부◎ 진안현(鎭安縣)
본래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진안현으로 고쳐서 장계군(長溪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전주(全州)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본조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비로소 진안 감무(鎭安監務)를 두어 마령현(馬靈縣)을 겸하게 하였고, 태종(太宗) 12년 임진에 마령을 혁파하여 속현(屬縣)으로 하였다. 옛 속현(屬縣)이 1이니, 마령은 본래 백제의 마돌현(馬突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마령현으로 고쳐서 임실군(任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전주의 임내(任內)로 하였다. 소(所) 1이니, 산주(刪朱)이다.
명산(名山)은 마이(馬耳)이다.【현의 남쪽에 있는데, 신라 때에는 서다산(西多山)이라 하여 소사(小祀)에 실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장수(長水)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전주(全州)에 이르기 25리, 남쪽으로 임실(任實)에 이르기 36리, 북쪽으로 용담(龍潭)에 이르기 18리다.
호수가 1백 69호요, 인구가 7백 2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3명이요, 진군이 33명이요, 선군이 95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이(李)·전(全)·백(白)·한(韓)·유(庾)요, 마령(馬靈)의 성이 4이니, 한(韓)·송(宋)·장(張)·가(價)【어떤 본에는 가(賈)로 되었다. 】요, 망성(亡姓)이 1이니, 김(金)이요, 속성(續姓)이 2이니, 전(全)·이(李)【향리(鄕吏). 】이다.
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일찍 춥다. 간전(墾田)이 2천 7백 72결이요,【논이 4분의 1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麻]·닥나무·왕골이다. 토공(土貢)은 족제비털[黃毛]·칠(漆)·대추·석이·꿀·밀[黃蠟]·가뢰[斑猫]·여우가죽·삵괭이가죽·자리요, 약재(藥材)는 백복령(白茯苓)·녹각상(鹿角霜)·복신(茯神)·바디나물뿌리[前胡]·당귀·백작약(白芍藥)·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이다. 자기소가 1이요,【마령현 남쪽 두언리(豆彦里)에 있다. 】도기소가 1이다.【마령현 동쪽 동림리(東林里)에 있는데, 모두 하품이다. 】
역(驛)이 1이니, 단령(丹嶺)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진안현(鎭安縣)
동으로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28리, 남으로 임실현(任實縣) 경계까지 49리, 서쪽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까지 35리, 북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까지 23리, 서울로부터는 5백 82리다.
[건치연혁]본래는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縣) 일명 월량(月良)이었다. 신라 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장계군(長溪郡)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는 전주에 속하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공양왕(恭讓王) 3년에는 마령현(馬靈縣)을 겸임하게 하였고,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현감(縣監)으로 고쳤으며, 계속 장계군에 예속시켰다.
[풍속]기민질야(其民質野) 이규보(李奎報)의 기문에, “마령(馬靈)은 진안(鎭安) 산곡(山谷) 사이의 고읍이다. 백성은 소박하고 얼굴은 큰 원숭이 같고 음식은 날 것을 먹는 야만인의 풍이 있다. 꾸짖고 나무라면 놀란 사슴모양으로 달아나 버린다.” 하였다.
[산천]부귀산(富貴山) 현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고달산(高達山) 현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마이산(馬耳山) 현의 남쪽 7리에 돌산이 하나 있는데 봉우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용출봉(湧出峯)이라 이름하였다. 높이 솟은 봉우리 중에서 동쪽을 아버지, 서쪽을 어머니라 하는데,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이 마치 깎아서 만든 것 같다. 그 높이는 천 길쯤 되고 꼭대기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사면이 준절(峻絶)하여 사람들이 오를 수 없고 오직 모봉(母峯)의 북쪽 언덕으로만 오를 수가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동봉(東峯) 위에는 작은 못이 있고, 서봉(西峯)의 정상은 평평하고, 샘이 있어서 적병을 피할 수 있고, 날이 가물어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고 한다. 신라 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이라고 불렀는데 소사(小祀)에 올렸다. 본조 태종(太宗)이 남행(南幸)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서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고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기이한 봉우리가 하늘 밖에서 떨어지니, 쌍으로 쭈삣한 것이 말의 귀와 같고나. 높이는 몇 천 길인지 연기와 안개 속에 우뚝하도다. 우연히 임금의 행차하심을 입어 아름다운 이름이 만년에 전하네. 중원(中原)에도 또한 이런 이름이 있으니 이름과 실제 모습이 서로 비슷하도다. 천지 조화의 공교함은 끝이 없으니, 길이 천지가 혼돈했던 처음 일을 생각하도다. 내 이곳에 가을비 내린 뒤에 오니, 푸른 빛과 붉은 빛이 비단처럼 뒤섞였네. 멀리 바라보노라고 고개를 돌리지 아니하니 문은 밤새도록 열어 둔대로다. 어떻게 해서 신선의 녹옥장(綠玉杖)을 얻어 높은 데에 올라가 다니면서 진흙먼지같은 이 세상을 벗어나 쇄석암(碎石庵)에서 묵고 봉우리 꼭대기에 올라 샘물을 손으로 마시며 선동(仙童)과 서로 상의하여 방촌(方寸) 숟갈의 약을 먹을꼬.” 하였다. 조위(曹偉)의 시에, “우뚝 솟은 두 귀가 마이봉(馬耳峯)인데, 구름 끝에 벽부용(碧芙蓉)을 받쳐 내었네. 어떻게 하여 하늘 뚫는 날개를 얻어 봉우리 끝까지 날아 올라 가슴을 한번 씻어낼꼬. 말 위에는 시를 지으며 술 기운을 약간 띠고나서, 하늘 끝 멀리 벽옥잠(碧玉簪)을 바라보겠네. 객로(客路)에 오른 사람 중에 몇 사람이나 그 절정에 올랐을꼬. 하늘에 기댄 검극(劍戟)이 뾰족하게 연람(煙嵐) 가운데서 솟아나왔도다. 산색이 가을 하늘에 비치니 비에 씻기고 서리에 갈려도 만고에 새롭도다. 평생에 보지 못했던 것 처음 보았으니 그림으로 그려 북쪽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자랑하리라.” 하였다. 김수동(金壽童)의 시에, “마이 쌍봉(雙峯)이 공중에 꽂혔는데 구름 열리니 우뚝하게 가을 얼굴 드러냈네. 듣기에 절정에 신령스러운 연못이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고각(鼓角) 소리로 늙은 용을 시험할꼬.” 하였다.
성수산(聖壽山) 현의 남쪽 50리에 있다. 중대산(中臺山) 마령현(馬靈縣)에 있다. 웅령(熊嶺) 현의 서쪽 37리, 전주(全州)의 경계에 있다. 동천(東川) 현의 동쪽 1리에 있다. 물의 발원지는 마이산 동봉(東峯)에서 나와 용담현(龍潭縣)의 마산담(馬山潭)으로 들어간다. 서천(西川) 현의 서쪽 13리에 있는데, 물의 발원지는 마이산 서봉(西峯)에서 나와 임실현(任實縣)의 오원천(烏原川)으로 들어간다. 『신증』 증연(甑淵) 마령(馬靈)의 동쪽에 있는데, 큰 구멍이 뚫려 산정(山頂)과 서로 통한다. 사람이 돌을 굴리면 곧바로 못 속으로 떨어진다. 수증기가 늘 서려서 마치 물을 끓이면 증기가 올라가는 것 같아서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토산]꿀ㆍ석이버섯ㆍ송이ㆍ지치[紫草]ㆍ옻ㆍ닥종이.
[불우]상원사(上院寺)ㆍ혈암사(穴巖寺)ㆍ쇄암사(碎巖寺) 모두 마이산(馬耳山)에 있다. 중대사(中臺寺) 성수산(聖壽山)에 있다.
[고적]마령폐현(馬靈廢縣) 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마돌현(馬突縣)인데, 일명 마진(馬珍), 일명 마등량(馬等良)이라고도 한다. 신라 시대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임실군(任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는데, 고려 초기에는 전주(全州)에 속하였고, 뒤에는 진안(鎭安) 감무가 겸임하게 하였으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그대로 그곳에 속하게 하였는데 별호는 영천군(穎川郡)이라 한다. 강주소(剛珠所) 마령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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