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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3.여남부(汝南府)는 광주(光州)

한부울 2011. 3. 16. 13:36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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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 

3.여남부(汝南府)는 광주(光州)이고,

河南省(領九府。四直隸州。六州。九十七縣)。

光州(名弋陽。領四縣)光山(西陽)固始(廖國)息縣(新息)[嫡-女]城(雩婁)-地輿名目(一十九省)

 

 

 


汝南,古属豫州,豫洲为九洲之中,汝南又居豫洲之中,故有“天中”之称。

自春秋战国时代有建制,距今已有2700多年的历史。

上自秦、汉,下至明、清,汝南一直是郡、州、军、府治所,为八方辐辏之地。

现辖7镇、13乡,281个村(居)委会,总人口78万,总面积1470平方公里。

汝南地处北亚热带暖温带的过渡地带,四季分明,气候温和,风景秀丽,资源丰富,区位优越。


汝南地处淮北平原,有近两千年的历史。她的称谓随着朝代的更迭屡有变化。

汉高祖置汝南郡,当时已是贯通中原地区南北的水陆码头。

公元817年,上蔡县治所迁于此,称“悬瓠城”。《水经注》有云:河自东西下,屈曲而流,抱城三面。形若垂瓠,故称悬瓠城

东晋义熙十四年(公元418年)汝南郡治迁至于此。

南北朝时,刘宋侨立司州,后周置总管府,隋仍为汝南郡治,另置汝阳县于郡城,改悬瓠城为溱州。

唐,“初置予州,宝应初以避讳改为蔡州”。

宋置“淮康军”,金设“镇南军”,曾建行宫。

元至元三十年(公元1293年)因断汝河上源之水经郾城入颍河,汝南水患大减,人民稍得安宁,改蔡州为汝宁府,是河南行省八府之一。

明成祖朱棣分封四子于汝宁府,称崇庄王,传十一世。

清沿明制,民国三年废府,改汝阳县为汝南县,是河南省第八行政区专员公署所在,解放初也曾设专署。


弋陽縣

歷史沿革東漢建安十五年(公元210年),三國·吳析余汗縣置葛陽縣。

隋開皇十二年(公元592年),縣治遷弋水之北(今弋江鎮),改名為弋陽縣。

唐證聖元年(公元695年)分置玉山縣;乾元元年(公元758年)分置上饒縣,改屬信州;永泰元年(公元765年)分置貴溪縣。

南唐保大十一年(公元953年)分置鉛山縣。

淳化五年(公元994年)分置寶豐縣,景裕元年(公元1034年)寶豐縣併入弋陽縣,康定元年(公元1040年)復寶豐縣,慶曆三年(公元1043年)寶豐縣又併入弋陽縣,屬江南東路信州。

元至元十四年(公元1277年)弋陽屬江浙行省信州路,至正二十年(公元1360年)屬江浙行省廣信府。

明洪武四年(公元1371年)屬江西省廣信府。嘉靖三十九年(公元1560年)分弋陽地建興安縣(今橫峰縣)。清沿明制。

民國元年(公元1912年)屬江西豫章道。民國十五年(公元1926年)復直屬江西省。民國21年(公元1932年)屬江西省第六行政區。


光州即今信阳市潢川县

春秋时期为黄国,鲁僖公十二年(公元前648年),楚灭黄,黄地入楚。

秦潢川属九江郡。西汉初(公元前206年)置弋阳县,隶汝南郡;东汉初(公元前26年)改弋阳为弋阳侯国,仍隶汝南郡。

三国魏文帝黄初元年(220年)分汝南、江夏郡置弋阳郡,郡治弋阳县,辖弋阳、期思、轪(念dài)和西阳4县,隶豫州。

晋武帝泰始元年(265年)分汝南、弋阳郡地置汝阴郡,惠帝元康元年(291年)分弋阳郡置西阳郡。   

南北朝时期:宋武帝永初三年(422年)弋阳郡辖弋阳、期思、安丰3县,隶南豫州;文帝元嘉二十五年(448年)以豫部蛮民居地立茹由、乐安、光城、雩娄(雩念yú)、边城、史水、开化7县,均隶弋阳郡;孝武帝大明元年(457年)分弋阳郡立光城郡,八年(464年)省光城郡为县,仍隶弋阳郡;齐高帝建元元年(479年)弋阳郡领弋阳、期思、南新息、上蔡、平舆5县;武帝永明十三年(495年)弋阳郡属北魏,只领弋阳1县;梁武帝太清元年(547年)在南光城郡置光州,治光城县(今河南省光山县);简文帝大宝元年(550年)弋阳县归属北齐;北齐武平元年(570年)省北弋阳入南弋阳,更名定城县(治今潢川南城);陈宣帝十一年(579年)北周攻占定城,改弋阳郡为淮南郡,省定城为郡治。   

隋文帝开皇元年(581年)废淮南郡,复置定城县,仍隶弋阳郡。   

唐高祖武德三年(620年)改弋阳郡为光州(治光山),以定城为弦州,领定城县;太宗贞观元年(627年)废弦州,光州属淮南道,领定城、殷城、光山、乐安、固始5县;睿宗太极元年(712年)光州州治由光山迁至定城,州辖定城、光山、固始、仙居、殷城5县,隶淮南道;玄  潢川

宗天宝元年(742年)改光州为弋阳郡;肃宗乾元元年(758年)复为光州,隶淮南西道。   

五代十国期间:梁太祖开平元年(907年)光州归后梁,乾化二年(912年)属吴国;后晋高祖天福二年(937年)隶南唐;后周世宗显德五年(958年)归后周。   

宋太宗至道二年(997年)光州领定城、光山、仙居、固始4县;仁宗皇祐三年(1051年)光州隶淮南西路;徽宗宣和元年(1119年)光州升为光山军,领属如故;高宗绍兴二十八年(1158年)为避金太子光瑛讳,改光州为蒋州,未几即复;宁宗时建州为两城,南城为县治、北城为州治;理宗嘉熙元年(1237年)兵乱,光州徙治金刚台,寻复故。   

元世祖至元十年(1273年)置光州招讨司,十二年光州属蕲黄宣慰司,二十三年划归淮西宣慰司,三十年光州改为汝宁府,领定城、光山、固始3县。   

明太祖洪武元年(1368年)省定城为光州治,四年光州改属中都临濠府(治今安徽声凤阳县),十三年仍属汝宁府,州领县3:固始、光山、息县(七年来属);宪宗成化十一年(1475年)析固始置商城,隶光州。   

清初光州领属沿袭明制,雍正二年(1724年)升光州为直隶州,直隶河南布政使司,仍领光山、固始、息县、商城4县。   

民国初废府州设道。2年(1913年)光州改为潢川县,属豫南道(1914年改豫南道为汝阳道);1928年5月分河南省境划为14个行政区,潢川为第十三行政区治所,辖潢川、息县、光山、固始、商城、罗山、新蔡、正阳8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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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장흥 도호부◎ 무진군(茂珍郡)

본래 백제의 무진주 도독(武珍州都督)이었는데,【일명 노지(奴只)라고 한다. 】신라에서 백제를 차지하여 그대로 도독(都督)으로 하였고, 경덕왕(景德王) 16년 정유【당나라 숙종(肅宗) 지덕(至德) 2년.】에 무주 도독(武州都督)으로 고쳤다. 진성왕(眞聖王) 6년 임자【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에 견훤(甄萱)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빼앗아 웅거하고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일컫다가 드디어 전주(全州)로 옮겼다. 견훤 20년 신미【양(梁)나라 태조(太祖) 건화(乾化) 원년.】에 후고려(後高麗) 왕 궁예(弓裔)가 고려 태조(太祖)를 정기 태감(精騎太監)으로 삼아서 뱃군사[舟師]를 거느리고 무진 지경을 공략하여 차지하게 하였는데, 성주(城主) 지훤(池萱)은 바로 견훤의 사위였으므로 견훤과 서로 응(應)하여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고려 태조 23년 경자【진(晉)나라 고조(高祖) 천복(天福) 5년.】에 이르러 광주(光州)로 고쳤고, 성종(成宗) 15년 병신【송나라 태조(太祖) 지도(至道) 2년.】에 광주 자사(光州刺史)로 강등하였고, 그 뒤에 또 해양 현령(海陽縣令)으로 강등하였다가 고종(高宗) 45년 무오【송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6년.】에 공신(功臣) 김인준(金仁俊)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지익주사(知翼州事)로 고쳤고, 뒤에 광주목(光州牧)으로 승격하였고, 충선왕(忠宣王) 원년 경술【원나라 세조(世祖) 지대(至大) 3년.】에 화평부(化平府)로 고쳤고, 공민왕(恭愍王) 11년 임인【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22년.】에 무진부(茂珍府)로 고쳤고,【혜묘(惠廟)의 휘자(諱字)를 피하여 ‘무(武)’를 ‘무(茂)’자로 고쳤다. 】23년 갑인【명나라 홍무(洪武) 7년.】에 광주목으로 승격하였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금상(今上) 12년 경술에 읍(邑)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본주(本州) 목사(牧使)를 구타하였으므로 노흥준을 곤장을 때려 변방(邊方) 지방으로 유형시키고 그 가족도 이주시키고서, 군(郡)으로 강등하였다. 별호를 광산(光山), 또는 익양(翼陽)이라고 한다. 예전에 딸린 부곡(部曲)이 2이니, 양과(良瓜)·경지(慶指)다.

진산(鎭山)은 무등(無等)이다.【군의 동쪽에 있다. 】병로지 용당(幷老只龍堂)【사전(祀典)에는 용진 연소(龍津衍所)라 하였는데, 봄·가을에 이 고을 관원이 제사를 지낸다. 】벽진도(碧津渡)【군의 서쪽에 있다. 】거진도(巨津渡)【군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창평(昌平)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나주(羅州)에 이르기 28리, 남쪽으로 화순(和順)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진원(珍原)에 이르기 24리이다.

호수가 8백 60호요, 인구가 4천 1백 8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75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2백 69명이요, 선군이 5백 71명이요, 수성군(守城軍)이 8명이다.

토성(土姓)이 13이니, 탁(卓)·이(李)·김(金)·채(蔡)·노(盧)·장(張)·정(鄭)·박(朴)·진(陳)·허(許)·반(潘)·성(成)·승(承)이요, 촌성(村姓)이 1이니, 유(庾)요, 속성(續姓)이 4이니, 김(金)【개성(開城). 】·정(程)【금산(錦山). 】·신(申)【고흥(高興). 】·최(崔)【당진(唐津). 】이요,【모두 향리(鄕吏)이다. 】양과(良瓜)·경지(慶旨)의 성은 모두 김(金)이요, 벽진도(碧津渡)의 망성(亡姓)이 1이니, 김(金)이다. 인물은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시호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이니,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사람이요,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치사한 시호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이니, 충선왕(忠宣王) 때 사람이다.

땅이 메마르며,【10분의 2이다. 】간전(墾田)이 1만 8백 80결이요,【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가 오곡·뽕나무·삼[麻]·목화·닥나무·왕골이다. 토공(土貢)이 표범가죽·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족제비털[黃毛]·칠(漆)·등나무상자·대추·감·배[梨]·석류·모과·차(茶)·표고·꿀·밀[黃蠟]·자리·왕대요, 약재가 호라비좆뿌리[天門冬]·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연꽃술[蓮花蘂]·말린 새앙[乾薑]·패랭이꽃이삭[瞿麥穗]·흰매화열매[鹽梅實]·복령(茯苓)·모란뿌리껍질[牧丹皮]이다. 자기소가 1이요,【군의 동쪽 이점(利岾)에 있다. 】도기소가 1이다.【군의 북쪽에 있다. 】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9백 72보(步)이다. 】옛 내상 석성(內廂石城)【군의 서쪽에 있는데, 둘레가 6백 25보이다. 】무진 도독(武珍都督) 때의 옛 토성(土城)【둘레가 2천 5백 60보(步)이다. 】역(驛)이 2이니, 경양(景陽)·선암(仙巖)이다. 예전에 진원역(鎭原驛)이 있었는데, 본조 태종(太宗) 17년 정유에 내상(內廂)을 강진(康津)에 옮길 때 아울러 옮겼다.

이상한 일[靈異]. 지정(至正) 원년 신사【충혜왕(忠惠王) 복위 2년.】에 동정 원수(東征元帥) 김주정(金周鼎)이 각 고을의 성황신(城隍神)에 제사지냈는데, 다니며 이름을 부르면 신령한 일이 나타났으니, 군(郡)의 성황(城隍) 가운데 둑(纛)의 방울[鈴]을 흔든 것이 셋이었으므로, 주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작(爵)을 봉(封)하였다. 무등산(無等山) 꼭대기에 줄바위가 수십 개 있는데, 삐죽하게 선 것이 높이가 백여 자나 된다. 그 산이 오래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차 개려고 할 때에는 우레 소리 같이 우는 소리가 자주 나는데, 수십리에까지 들린다. 또 읍의 남쪽에 큰 나무가 있어서 이름을, ‘활나무[弓樹]’라고 하는데, 가지와 줄기가 오래되고 울창하여, 둘레가 19자쯤 되고, 높이가 70자쯤 된다. 해마다 봄철이 되어 여러 나무가 잎이 나기 전에 먼저 잎이 나면 그 해에 흉년이 들 징조이며, 여러 나무가 이미 활짝 피었는데도 이 나무가 잎이 나지 않거나 혹 느즈막하게 가지런히 나면 그 해에 풍년이 들 징조이며, 혹은 나무의 네면과·위·아래가 가지런하지 않게 잎이 나도 또한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성중(城中) 사람들이 대개 이것으로써 한 해의 풍년·흉년을 점치는데, 그 일이 여러번 들어 맞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광산현(光山縣) 

동쪽으로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18리, 남쪽으로 화순현(和順縣) 경계까지 21리,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28리, 서쪽으로 나주(羅州) 경계까지 47리, 북쪽으로 진원현(珍原縣) 경계까지 21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7백 25리이다.

[건치연혁]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일명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가 백제를 빼앗은 뒤 그대로 도독(都督)을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무주(武州)로 고치고, 진성왕(眞聖王) 6년에 견훤(甄萱)이 습격하여 의거하고 후백제(後百濟)라 칭하다가, 이윽고 전주(全州)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弓裔)가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으니, 태조는 해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주의 경계를 대략 평정했는데 성주(城主) 지훤(池萱)이 견훤의 사위로서 굳게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 19년에 이르러 신검(神劍)을 쳐서 멸망시키고 23년에 광주(光州)라 고쳤다. 지금 《고려사》를 상고하건대, 천복(天復) 3년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 경계까지 가서 금성(錦城)을 쳐서 빼앗게 했다. 개평(開平) 3년에 또 태조를 시켜서 전함을 수리하고 가서 광주와 진도군(珍島郡)을 쳐서 빼앗게 했다. 뒤에 또 광주 서남쪽 반남현(潘南縣) 포구(浦口)에 이르러, 압해현(壓海縣) 수적(水賊) 능창(能昌)을 잡아 궁예에게 보냈다. 태조 즉위 19년 친히 신검(神劍)을 칠 적에 영마성(營馬城)에 주둔하니, 신검은 그의 아우 정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劍)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劍)과 함께 와서 투항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주(武州)를 광주(光州)라고 부른 것은 견훤 때부터였으니 태조 23년에 비로소 광주라 칭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고려의 사신(史臣)이 추후에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주현(州縣)은 모두 당시의 이름으로 기록했는데 광주만 그렇게 기록했을 것인가. 생각하건대, 견훤이 후에 광주라 하고 무주라 하여 다 함께 불렀다가 이해(태조 23년)에 이르러 광주로 정한 것인가 한다. 정확히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성종 15년에 강등하여 자사(刺史)가 되고 후에 또 강등하여 해양 현령(海陽縣令)이 되었다. 고종 46년 공신 김인준(金仁俊)의 외가의 고향이므로 승격하여 익주 지사(翼州知事)가 되고, 후에 또 승격하여 무진주(武珍州)가 되었다. 충선왕 2년에 강등하여 화평부(化平府)가 되고, 공민왕 11년에 무진부(茂珍府)라 개칭했다. 혜종(惠宗)의 휘(諱)를 피해서 무(武) 자를 무(茂) 자로 고쳤다. 22년 다시 광주라 칭하고 목(牧)을 삼았으며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따랐다. 세종 12년에 그 고을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목사(牧使) 신보안(辛保安)을 때렸으므로, 노흥준을 장형(杖刑)에 처하여 변방으로 쫓아 보내고 강등하여 무진군(茂珍郡)으로 만들었다가 문종 원년에 옛날대로 복구하고, 성종 20년에 판관(判官) 우윤공(禹允功)이 날아온 화살에 맞았는데 조정에서는 그 고을 사람의 행위인가 의심해서 강등하여 현을 만들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군명]무진(武珍)ㆍ무주(武州)ㆍ광주(光州)ㆍ해양(海陽)ㆍ익주(翼州)ㆍ화평(化平)ㆍ무진(茂珍)ㆍ익양(翼陽)ㆍ서석(瑞石).

[풍속]백성 중에 어진 사람이 많다. 성임(成任)의 시에 있다.

[형승]전라도의 거읍(巨邑)이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있다. 모든 봉우리는 중첩하고 온 골짜기는 구불구불 하도다.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있다. 남국의 웅장한 번진(藩鎭)이다. 이집(李集)의 시에, 광주는 남쪽 지방의 가장 큰 번진이라 하였다. 한 도의 요충지이다. 신숙주(申叔舟)의 기(記)에 있다.

[산천]무등산(無等山)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며, 일명 무진악(武珍岳)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한다. 하늘같이 높고 큰 것이 웅장하게 50여 리에 걸쳐 있다. 제주도의 한라산, 경상도의 남해(南海)ㆍ거제도(巨濟島) 등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 서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백 척이나 된다. 산 이름 서석(瑞石)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할 때나 오랫 동안 비가 오다가 개려고 할 때에는 산이 우는데 수십 리까지 들린다. ○ 세속에 〈무등산곡(無等山曲)〉이 있는데, 백제 때 이 산에 성을 쌓자 백성들이 이에 편안히 살면서 즐거워 부른 것이라 한다. 양림산(陽林山) 현의 서쪽 2리에 있다. 삼각산(三角山)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건지산(巾之山)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하늘이 비를 내리려면 이 산이 울어 그 소리가 수 리까지 들린다. 어등산(魚登山)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벽진(碧津)ㆍ생압도(生鴨渡) 둘 다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선암도(仙巖渡)ㆍ병화로진(幷火老津) 둘 다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건천(巾川)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무등산 서쪽 산록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칠천(漆川)으로 들어간다. 칠천(漆川)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담양(潭陽)과 창평(平昌)의 물이 합쳐 서쪽으로 흘러 칠천이 되고, 벽진ㆍ생압도ㆍ선암도ㆍ병화로진을 거쳐 나주(羅州)의 경계로 들어간다. 혈포(穴浦) 칠천에서 동쪽으로 갈라진 곳이다. 풍혈(風穴) 규봉사(圭峯寺) 곁 석벽 아래에 있다. 길이가 한 자이고 너비가 다섯 치이며, 바람이 불다 그쳤다 한다. 속칭 그 석벽을 풍혈대(風穴臺)라 한다. 보지지(普智池)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금물제지(今勿梯池)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신증』 장원봉(壯元峯) 곧 무등산의 지봉(支峯)이다. 속설에 향교가 옛날에는 이 봉우리 아래에 있었는데, 이 고을 사람 중에 장원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 한다. 용연(龍淵) 주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날이 가물어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 한다.

[토산]감ㆍ차ㆍ석류ㆍ꿀ㆍ철(鐵) 무등산 장불동(長佛洞)에서 생산된다. 사기그릇[磁器] 현의 동쪽 석보리(石保里)에서 생산된다. 지황(地黃)ㆍ죽전(竹箭) 현의 남쪽 양림산(陽林山)에서 생산된다. 『신증』 대추ㆍ호두[胡桃]ㆍ매실ㆍ밤ㆍ붕어[鯽魚].

[불우]무량사(無量寺)ㆍ천복사(薦福寺)ㆍ개룡사(開龍寺)ㆍ원효사(元曉寺) 모두 무등산(無等山)에 있다. 성거사(聖居寺)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십신사(十信寺) 현의 북쪽 5리 평지에 있는데 범어(梵語)로 쓴 비가 있다. 선원사(禪院寺) 현의 동쪽 2리 평지에 있다. 증심사(證心寺) 무등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잣나무는 뜰 앞에서 푸르고, 복사꽃은 언덕 위에서 붉구나. 어찌 반드시 지경 밖에서 찾으랴, 다만 둘려 있는 속에서 찾을 것이로다. 막힌 경내에서는 마음도 끝까지 막히나니, 말[言]을 잊어야 도가 비로소 통하는 것이다. 누가 이 절 이름을 지었는가. 묘한 이치를 홀로 깊이 궁리하였도다.” 하였다. 『신증』 규봉사(圭峯寺) 무등산에 있다. 절 옆에 세 개의 돌이 있는데, 높이가 수백 척이 되어 삼존석(三尊石)이라고 한다. 또 열 개의 대(臺)가 있는데, 송하(送下)ㆍ광석(廣石)ㆍ풍혈(風穴)ㆍ장추(藏秋)ㆍ청학(靑鶴)ㆍ송광(松廣)ㆍ능엄(楞嚴)ㆍ법화(法華)ㆍ설법(說法)ㆍ은신(隱身)이라고 이름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도선(道詵)이 이 대 위에 두루 앉아서 송광(松廣)의 산세를 본 다음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이상한 모양이라 이름을 붙이기 어렵더니, 올라와 보니 만상(萬像)이 공평하구나. 돌 모양은 비단으로 말라낸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 명승을 밝으니 속세의 자취가 막히고, 그윽한 곳에 사니 진리에 대한 정서가 더해지누나. 어떻게 속세의 인연을 끊을까, 가부(跏趺)하고 앉아 무생(無生)을 배우노라.” 하였다. 금석암(錦石庵) 무등산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지격이 궁벽하니 인적이 끊어졌는데, 봉우리와 숲이 천만겹이로다. 길은 시내 비[溪雨]에 깨끗하고, 문은 고개의 구름으로 봉하였다. 상쾌한 퉁소 소리는 바람 대[風竹]에서 나고, 맑은 그늘은 달 아래 소나무 따라 돌아간다. 도인(道人)은 원래 관장하지 않고서 길이 자금용(紫金容 불상)에 예를 올린다.” 하였다.

[고적]석서정(石犀亭) 현의 남쪽 2리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광주(光州)의 지리는 삼면이 모두 큰 산이고 북쪽만이 평탄하게 멀리 틔어 있다. 남산 계곡에서 흘러 나오는 물은 둘이 있는데 물의 근원이 또한 멀기 때문에 합류하면 그 형세가 더 크게 될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매년 한 여름에 장마가 들면 세차게 흐르는 급류가 사납게 쏠려, 가옥을 파괴하고 전답을 깎아가서 백성의 피해가 적지 않으니, 수령 된 자가 어찌 크게 우려하지 않겠는가. 남산 아래에 분수원(分水院)을 둔 것은 옛 사람이 그 물의 형세를 감쇄(減殺)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끝내 그 물을 나누지 못했다. 그리하여 두 물이 교충(交衝)하는 곳에 돌을 쌓아 성을 만들고 물결을 조금 서쪽으로 돌렸다가 북쪽으로 흐르게 하니, 지세가 북쪽으로 조금 내려간지라, 그 지세를 따라 물이 천천히 흘러서 백성의 피해가 그제야 겨우 없어졌다. 이에 물의 옛 길에 정자를 짓고 그 한 중간을 거점(據點)으로 해서 보(洑) 물을 양쪽으로 흐르게 하니, 사면으로 정자를 두른 것이 마치 벽수(壁水)의 모양처럼 되었다. 정자의 전후에 흙을 모아 작은 섬을 만들어 두 곳에 모두 꽃나무를 심고 부교(浮橋)를 놓아 출입하게 하니, 그 가운데에 앉아 휘파람을 불면, 마치 바다에서 뗏목을 타고 앉아 섬들이 안개와 파도 사이로 출몰하는 것을 보는 것 같아 참으로 즐겁다. 위구르[回鶻]의 설천용(偰天用)이 남방을 유람할 적에 그 정자에 갔다가 이미 서울로 돌아왔는데, 목사(牧使) 김후(金侯 후는 지방 장관에 대한 존칭)가 서신을 보내어 정자의 이름과 기(記)를 요구하였다. 이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

대우(大禹)가 치수(治水)를 한 것이 우공(禹貢 서전(書傳)에 있는 편명) 한 편에 나타나 있는데 대개 물의 형세를 따라 인도했을 뿐이다. 진(秦) 나라 효문왕(孝文王)이 이빙(李氷)을 임용하여 촉(蜀) 땅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빙이 돌로 물소를 만들어 수재를 진압한 바가 있다. 역도원(酈道元)이 《수경(水經)》을 편찬함에 있어서는 그 돌물소가 이미 영구한 것이 아니었으나, 후에 물의 이해를 말하는 자가 반드시 이빙을 칭송한다 하였으니, 이는 이것을 통해 이빙의 마음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보(杜甫)가 노래를 지었으니, ‘다만 원기만 항상 조화롭게 된다면 홍수로 인한 민폐를 스스로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장사를 얻어 하늘 그물[天綱]을 들어다가 또다시 돌물소를 바쁘게 부려서 수토(水土)를 잘 다스리게 할까.’ 하였다. 대개 원기를 조화시켜서 수토를 잘 다스리는 것은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일이었는데 이제와 삼왕의 마음은 바로 후세에 진실로 있는 바로서 일찍이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괴상하고 정도를 벗어난 말을 찾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영원한 정책으로 삼았으니, 여기에서 두보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공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비록 조그마한 도로라도 반드시 볼 만한 것이있다.’ 하였거니와, 돌이 물을 진압한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남자 어리석은 여자라도 다 아는 바이니 물소의 형상으로 만든 것도 반드시 그 이치가 있을 것이다. 포박자(抱朴子)가 말하기를, ‘물소를 조각하여 어함(魚銜)을 만들어 물에 넣으니 물이 석 자나 갈라졌다.’ 하였으니, 물소란 물건이 수재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더구나 돌은 산의 뼈가 되고 물소는 또 물을 물리치는 것이니, 물이 이것을 피할 것은 틀림없다. 물도 이미 피할 줄 알고 또 아래로 인도하니, 지체없이 흘러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서 날로 비고 넓은 땅으로 향하여 도도히 흘러 바다에 이르고야 말리니, 물의 환란이 어디로부터 다시 일어나며, 읍의 주민들이 무엇 때문에 불안을 느낄 것인가. 이 정자를 지은 내력을 쓰면 마땅히 폄(貶)하는 예(例)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돌물소[石犀]로 이 정자의 이름을 삼고, 두보의 〈석서행(石犀行)〉이란 노래를 취하여 근본을 삼으며, 또 《포박자》를 증거로 삼아, 《춘추(春秋)》의 법으로 단정하여 후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정자를 지음이 수재를 막기 위함이며, 백성의 삶을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요, 한갓 놀고 관람하기 위하여 지음이 아님을 알게 하고자 한다. 이 정자에 오르는 자가 그 이름을 생각하고 뜻을 생각하면 반드시 김후(金侯)에 대한 경의가 우러나게 될 것이다. 김후의 이름은 상(賞)이며 재부(宰府)의 지인(知印)과 헌사(憲司)의 장령(掌令)을 역임한 바 있어서, 행정에 있어 청렴하고 능력있는 행정가로 이름이 높다.” 하였다. 고내상성(古內廂城)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6백 81척이다. 무진도독고성(武珍都督古城)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4백 48척이다. 궁수(弓樹) 현의 성 남문 밖에 있다. 가지와 줄기가 둥근데 크기가 수십 아름이나 되고, 높이가 70여 척이나 된다. 고을 사람들이 잎이 일찍 피고 늦게 피는 것으로써 그해의 풍흉을 점쳤다. 지금은 말라죽었다. 양고부곡(良苽部曲)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경지부곡(慶旨部曲)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벽진부곡(碧津部曲)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