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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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
3.회안부(淮安府)는 안동(安東)이고,
江南省(舊名南京)(分江蘇八府。三直隸州。三小州。六十二縣。分安徽八府五直隸州。四小州。五十縣)。
○淮安府(名淮陰。領六縣)山陽(射陽附府)阜寧(黃浦)鹽城(鹽瀆)清河(角城)安東(連水)桃源(淮濱)-地輿名目(一十九省)
淮安府,中国古代行政区划名。1366年(韩宋龙凤十二年)朱元璋改淮安路置,治山阳县(今江苏淮安市楚州区)。1912年废。
在明代,淮安府属于南直隶,是今江苏长江以北仅有的2个府之一(另一个是扬州府),下辖海州、邳州2州和山阳县(今楚州区)、清河县(今淮阴区)、安东县(今涟水县)、桃源县(今泗阳县)、盐城县、沭阳县、赣榆县、宿迁县和睢宁县9县,辖区范围基本上相当于今日淮安、盐城、宿迁、连云港4市以及徐州市东部。
清代,淮安府归属新成立的江苏省,并且分出海州直隶州(及沭阳县、赣榆县),又划出邳州及宿迁县、睢宁县归属新设的徐州府,范围有所收缩,下辖6县:山阳县、清河县(乾隆年間清江浦由山阳县劃入清河县)、安东县、桃源县、盐城县、阜宁县(分山阳县东部新设),大致相当于今日淮安、盐城2市大部。
明清两代淮安府均是江苏辖地面积最大的府。
安东县
明置洪武二年(1369)正月,降安东州为安东县,属淮安府。清因明制,仍叫安东县,属淮安府。 民国初年撤府,安东县直属省辖。
民国3年(1914),因与奉天省(今辽宁)安东同名,改称涟水县。今属淮安市。
清置 光绪二年 (一八七六年)设安东县,驻地沙河子(今丹东市沙河镇),属风凰直隶厅管辖。
民国初年,属奉天省东边道。
一九二九年改隶辽宁省管辖。日本帝国主义侵占期间属安东省。一九四五年“九,三“胜利后,成立安东县人民政府,驻地大东沟,归安东省管辖。一九四九年划归辽东省管辖。一九五四年九月,辽东与辽西两省合并后属安东行政专署领导,隶属辽宁省。一九五八年为安东市领导。一九六五年经国务院批准,改安东县为东沟县,归丹东市管辖至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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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사(使) 1인, 판관(判官) 1인.
본래 고타야군(古陁耶郡)인데, 경덕왕이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 13년 경인에 〈태조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후백제(後百濟)의 임금 견훤(甄萱)과 더불어 고창(古昌)에서 싸워 패배시켰는데, 고을 사람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 등이 태조를 도와 공이 있으므로, 선평은 대광(大匡)을, 행과 길은 각각 대상(大相)을 삼고, 그 고을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뒤에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쳤다가, 성종 14년 을미에 길주 자사(吉州刺史)로 고치고, 현종 3년 임자에 안무사(按撫使)로, 9년 무오에 지길주사(知吉州事)로 고쳤다가, 21년 경오에【송나라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 】다시 지안동부사(知安東府使)로 삼았다. 명종 계축년에【송나라 광종(光宗) 소희(紹熙) 4년. 】남적(南賊) 김삼(金三)·효심(孝心) 등이 주군(州郡)을 약탈하니, 국가에서 해마다 연달아 군사를 보내어 비로소 이를 토평(討平)하였는데, 본부(本府)에서 보좌(輔佐)한 공이 있기 때문에, 정사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신종(神宗) 7년 갑자에【송나라 영종(寧宗) 가태(嘉泰) 4년. 】동경(東京)의 별초(別抄) 패좌(孛佐) 등이 무리를 모아 반란(叛亂)을 일으켰는데, 본부(本府)에서 이를 막아 깨뜨린 공이 있음으로써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가, 충렬왕 34년 무신에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고, 공민왕 10년 신축에【지정(至正) 21년.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순행하여 수레를 〈본부(本府)에〉 멈추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마음을 다해 공궤(供饋)하였으므로, 임인년에 다시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능라군(綾羅郡)이다.【창녕국(昌寧國)·지평군(地平郡)·고령군(古寧郡)·석릉군(石陵郡)·일계군(一界郡)·화산군(花山郡)·고장군(古藏郡) 등은 모두 신라 때의 칭호이다. 】속현(屬縣)이 8이니, 임하현(臨河縣)은 본디 고구려의 굴화군(屈火郡)인데, 신라에서 곡성군(曲城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풍산현(豐山縣)은 본디 하지현(下枝縣)인데, 경덕왕이 영안현(永安縣)으로 이름을 고쳐서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일직현(一直縣)은 경덕왕이 직녕현(直寧縣)으로 고쳐서 고창군(古昌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는데, 고려에서 다시 예전 이름으로 바꾸었다. 감천현(甘泉縣)은 신라 때의 칭호는 미상(未詳)이다. 위의 4현(縣)은 〈고려〉 현종 무오년에 모두 길주(吉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길안현(吉安縣)은 본디 길안 부곡(吉安部曲)인데, 뒤에 현(縣)으로 올렸다. 내성현(柰城縣)은 본디 퇴관 부곡(退串部曲)인데, 고려 충혜왕(忠惠王)이 고을 사람인 환자(宦者) 강금강(姜金剛)이 원(元)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시위(侍衛)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내성현(柰城縣)으로 승격시켰다. 춘양현(春陽縣)은 본디 가야향(加也鄕)인데, 고려 충렬왕 10년 갑신에【원나라 지원(至元) 21년. 】토인(土人)인 호군(護軍) 김인월(金仁䡄)의 공(功)으로써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시켰다. 재산현(才山縣)은 본디 덕산 부곡(德山部曲)인데, 고려 충선왕이 경화 옹주(敬和翁主)의 고향인 까닭으로 올려서 재산현으로 만들었다. 부곡(部曲)이 3이니, 개단(皆丹)·소라(召羅)·소천(小川)이다.
청량산(淸涼山)【재산현(才山縣) 서쪽에 있다. 】하지산(下枝山)【부(府) 서쪽에 있다. 시속에서 잘못 가(枷)로 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보(眞寶)에 이르기 47리, 서쪽으로 기천(基川)에 이르기 62리, 남쪽으로 의성(義城)에 이르기 34리, 북쪽으로 춘양(春陽)을 넘어 순흥(順興) 경계에 이르기 94리이다.
본부(本府)의 호수는 8백 47호, 인구가 3천 3백 20명이며, 임하(臨河)의 호수는 3백 23호, 인구가 1천 9백 단(單) 5명이요, 풍산(豐山)의 호수는 2백 82호, 인구가 1천 39명이며, 일직(一直)의 호수는 72호, 인구가 83명이요, 길안(吉安)의 호수는 44호, 인구가 1백 63명이며, 감천(甘泉)의 호수는 1백 62호, 인구가 5백 24명이요, 내성(柰城)의 호수는 83호, 인구가 3백 71명이며, 춘양(春陽)의 호수는 42호, 인구가 1백 단(單) 5명이요, 재산(才山)의 호수는 32호, 인구가 1백 57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13명, 진군(鎭軍)이 2백 41명, 선군(船軍)이 5백 6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7이니, 권(權)·김(金)·강(姜)·조(曺)·장(張)·고(高)·이(李)이요, 내성(來姓)이 2이니, 우(禹)·곽(郭)이며, 촌성(村姓)이 1이니, 조(趙)이다. 임하(臨河)의 성이 4이니, 윤(尹)·이(李)·전(全)·신(申)이요, 내성(來姓)이 1이니, 화(華)이다. 풍산(豐山)의 성이 5이니, 김(金)·임(林)·유(柳)·홍(洪)·강(康)이요, 내성이 2이니, 권(權)【본부에서 왔다. 】·민(閔)【강주(剛州)에서 왔다. 】이다. 일직(一直)의 성이 6이니, 임(任)·손(孫)·김(金)·노(盧)·전(田)·한(韓)이요, 감천(甘泉)의 성이 5이니, 이(李)·김(金)·전(全)·문(文)·조(趙)이며, 속성(續姓)이 2이니, 장(張)·최(崔)이다.【모두 근본을 알지 못한다. 지금 향리가 되었다. 】춘양(春陽)의 성이 2이니, 정(鄭)·윤(尹)이요, 길안(吉安)의 속성(續姓)이 3이니, 김(金)·임(林)·박(朴)이다. 내성(柰城)·재산(才山)·소천(小川)·개단(皆丹)의 속성(續姓)이 각각 1이니, 모두 윤(尹)이며, 소라(召羅)의 속성(續姓)이 1이니, 엄(嚴)이다. 인물(人物)은 문하 시중(門下侍中) 상락공(上洛公)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충렬왕 때 사람.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 문탄공(文坦公) 권한공(權漢公)【충숙왕 때 사람. 】·첨의정승(僉議政丞) 계림군공(鷄林郡公)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충선왕 때 사람.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본조 태조 때 사람.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 길창군(吉昌君)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본조 태종 때 사람. 】이다.
땅이 메마르고, 풍속은 근검(勤儉)하여 농상(農桑)에 힘쓴다. 간전(墾田)이 1만 1천 2백 83결이다.【논이 7분의 2이다. 】토의(土宜)는 벼·기장·조·메밀·콩·뽕나무·삼[麻]·왕골[莞]이며,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칠·설면자(雪緜子)·송이버섯·잣·지초·은구어(銀口魚)·종이·자리·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이요, 약재(藥材)는 황금(黃芩)·오미자·백복령(白茯苓)·원지(遠志)·인삼(人蔘)이다. 토산(土産)은 사철(沙鐵)이 임하현 북쪽 사등라리(沙等羅里)·목곡리(本谷里) 등지에서 난다.【철장(鐵場)이 있다. 세공(歲貢)은 정철(正鐵) 9천 9백 50근이다. 】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5백 28보이며, 안에 우물과 샘 18이 있다. 】청량산 석성(淸涼山石城)【재산현 서쪽 21리에 있으니, 본부(本府)와의 거리가 71리이다. 둘레가 2천 2백 79보인데, 높고 험하다. 안에 우물과 샘 7, 작은 시내 2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영호루(映湖樓)【부치(府治) 남쪽에 있는데, 큰 내를 굽어보고 있다. 고려 공민왕이 올라가 보고 ‘영호루’ 석 자를 써서 편액(扁額)을 만들었는데, 필력(筆力)이 힘차서, 보는 사람이 경앙(敬仰)한다. 】역(驛)이 7이니, 안기(安奇)·옹천(甕泉)【본부 지경에 있다. 】·금소(琴召)·송제(松蹄)【임하에 있다. 】·안교(安郊)【풍산에 있다. 】·신역(新驛)【일직에 있다. 】·유동(幽洞)【감천에 있다. 】이다. 봉화가 7곳이니, 남산(南山)은 부(府) 남쪽에 있다.【동쪽으로 신석산(申石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일직현의 감곡(甘谷)에 응하며, 서쪽으로 풍산현 남산(南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개목(開目)에 응한다. 】신석산(申石山)【임하현의 약산(若山)에 응한다. 】약산(若山)【동쪽으로 진보현(眞寶縣) 남각산(南角山)에 응한다. 】감곡(甘谷)【남쪽으로 의성현 마산(馬山)에 응한다. 】남산(南山)은 풍산현 남쪽에 있다.【서쪽으로 예천(醴泉) 서암산(西庵山)에 응한다. 】개목(開目)【북쪽으로 영천(榮川) 소이산(所伊山)에 응한다. 】봉화점(烽火岾)은 내성현 남쪽에 있다.【동쪽으로 봉화현(奉化縣) 서산(西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영천(榮川)의 소이산(所伊山)에 응한다. 】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2이니, 영해(寧海)·순흥(順興)이요, 군(郡)이 4이니, 예천(醴泉)·영천(榮川)·영천(永川)·청송(靑松)이며, 현(縣)이 11이니, 의성(義城)·영덕(盈德)·예안(禮安)·하양(河陽)·기천(基川)·인동(仁同)·봉화(奉化)·의흥(義興)·신녕(新寧)·진보(眞寶)·비안(比安)이다.
【영인본】 5책 641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영해 도호부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순흥 도호부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예천군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영천군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영천군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청송군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의성현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영덕현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예안현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하양현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기천현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인동현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봉화현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의흥현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신녕현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진보현
○ 지리지 / 경상도 / 안동 대도호부 / 비안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동쪽으로 진보현(眞寶縣)의 경계까지 65리, 청송부(靑松府)의 경계까지 66리, 남쪽으로 의성현(義城縣)의 경계까지 44리, 서쪽으로 예천군(醴泉郡)의 경계까지 54리, 북쪽으로 영천군(榮川郡)의 경계까지 42리, 예안현(禮安縣)의 경계까지 32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4리이다.
[건치연혁]안동(安東)은 본래 신라의 고타야군(古陁耶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임금 견훤(甄萱)과 이 고을의 땅에서 싸워서 견훤을 패배시켰다. 그때 이 고을 사람 김선평(金宣平)ㆍ김행(金幸)ㆍ장길(張吉)이 태조를 도와서 전공(戰功)이 있었으므로, 김선평은 대광(大匡)으로 임명하고, 김행과 장길은 각각 대상(大相)을 삼고 이 까닭으로 인하여, 군(郡)을 승격시켜 부(府)로 삼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가, 뒤에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쳤다. 성종(成宗)은 길주 자사(吉州刺史)로 일컬었고, 현종(顯宗)은 안무사(安撫使)로 고쳤으며 또 지길주사(知吉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안동부(安東府)로 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남적(南賊) 김삼(金三)ㆍ효심(孝心) 등이 주(州)ㆍ군(郡)을 위협하고 약탈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쳐서 평정하였는데, 그때 안동부가 공이 있었다고 하여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신종(神宗) 때에 동경(東京 경주)의 야별초(夜別抄) 패좌(孛佐) 등이 무리를 모아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안동도호부가 적(賊)을 항거하여 막은 공로가 있으므로 승격시켜 대도호부(大都護府)로 하였다. 충렬왕(忠烈王)이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을 피해 남쪽으로 순행(巡幸)하여 고을에 머무를 때에, 고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공하였으므로 다시 승격시켜 안동대도호부로 하였다. 본조에 들어 와서도 그대로 하였다.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부사(府使)에게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얼마 안 가서 부사(副使)는 폐지하였다.
[속현]임하현(臨河縣) 부(府)의 동쪽 33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의 굴화군(屈火郡)이었는데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곡성군(曲城郡)으로 고쳤다가,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때에 본부(本府)에 예속되었다. 풍산현(豐山縣) 부의 서쪽 35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하지현(下枝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영안(永安)으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때에 이 고을 사람 원봉(元逢)이 귀순(歸順)한 공로가 있었으므로 승격시켜 순주(順州)로 하였으나, 뒤에 견훤에게 함락되었으므로, 다시 낮추어 하지현으로 하였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때에 본부에 예속되었다.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뒤에 다시 본부에 예속되었다. 일직현(一直縣) 부의 남쪽 3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일직현(一直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일녕(一寧)으로 고쳐서 고창군(古昌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초기에 옛 이름을 회복하였으며, 현종 때에 본부에 예속되었다. 감천현(甘泉縣) 부의 서쪽 1백 리에 있다. 고려 현종 때에 본부에 예속되었다. 길안현(吉安縣) 부의 동쪽 50리에 있다. 본래 길안부곡(吉安部曲)인데,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에 승격시켜 현(縣)으로 하였다. 내성현(奈城縣) 부의 북쪽 90리에 있다. 본래 퇴곶부곡(退串部曲)인데, 고려 충혜왕이, 이 고을 사람인 내시 강금강(姜金剛)이 원 나라에 있을 때 시위(侍衛)한 공로가 있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으로 하였다. 춘양현(春陽縣) 부의 북쪽 1백 12리에 있다. 본래 가야향(加也鄕)인데 고려 충렬왕(忠烈王) 10년에 이 고장 사람인 호군(護軍) 김인궤(金仁軌)가 공이 있었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으로 하였다. 재산현(才山縣) 부의 동쪽 75리에 있다. 본래 덕산부곡(德山部曲)인데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이라고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으로 하였다. 개단부곡(皆丹部曲) 내성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소천부곡(小川部曲) 재산현의 북쪽 25리에 있다.
[풍속]부지런한 것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농사 짓고 누에치는 일을 힘쓴다. 지리지(地理志). 무본절용(務本節用) 권시(權偲)의 향사당기(鄕射堂記)에, “풍속은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며, 농사를 힘쓰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당(唐)ㆍ위(魏)의 유풍(遺風)이 있다.” 하였다. 근검충의(勤儉忠義) 권제(權踶)의 덕민루기(德民樓記)에, “근검(勤儉)한 풍속과 충의(忠義)의 열렬함은 남쪽 지방의 으뜸이 된다.” 하였다.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누에를 치며, 굽은 수레[曲車]를 사용하고, 광주리를 짊어지고 다닌다 옛 사람의 기록이다.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 풍기(風氣)가 혼륜(渾淪)하다 권반(權攀)의 모은루기(慕恩樓記). 『신증』 석전(石戰) 매년 정월 16일에 부내에 사는 사람들이 부(府)의 중앙에 있는 내를 경계선으로 하여, 좌우편으로 패를 나누어 돌을 던지며 서로 싸워 승부를 결정한다. 경오년 왜적(倭賊)을 토벌할 때에 석전(石戰) 잘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았더니, 적이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형승]안동은 도(道)의 웅번(雄藩)이다 이석형(李石亨)의 사청기(射廳記). 큰 강이 띠처럼 둘러 있다. 백문보(白文寶)의 금방기(金榜記)에, “무협(巫峽)이 왼쪽에 펼쳐져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으며, 큰 강은 띠처럼 둘러 있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고 있다.” 하였다. 물은 황지(黃池)로 흐르고, 산은 태백이 뛰어나다 무명씨(無名氏)의 백련사(白蓮寺) 침벽루기(枕碧樓記)에, “물은 황지로 빠져서 일만 구렁을 흡수하고, 산은 태백산(太白山)이 가장 뛰어나 뭇 봉우리를 통솔한다.” 하였다.
[산천]청량산(淸涼山) 재산현(才山縣)의 서쪽에 있다. 하지산(下枝山) 다른 이름은 풍악(豐岳)인데, 풍산현(豐山縣)에 있다. 병산(甁山) 본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 고려 태조가 견훤과 더불어 여기에서 싸워 훤이 패주(敗走)할 때에 시랑(侍郞) 김악(金渥)을 포로로 잡았으며, 죽은 자가 8천 명을 넘었다. 문필산(文筆山) 다른 이름은 갈나산(葛那山)인데, 본부의 남쪽 23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김생(金生)이 여기에서 글씨를 배웠으므로 산 이름을 문필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 안축(安軸)의 시(詩)에, “신라 때의 김생은 글씨 쓰는 법이 신기하였는데, 산 집[山室]에서 글씨를 배우던 일이 이미 천년을 지났네.” 하였다. 태백산(太白山) 소천부곡(小川部曲)에 있다. 자세한 것은 강원도의 삼척부(三陟府)에 있다. 이이현(耳而峴) 임하현(臨河縣)에 있다. 두모현(豆毛峴)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모현(茅峴) 길안현(吉安縣)에 있다. 노산(盧山) 본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학가산(鶴駕山) 하가산(下柯山)이라고도 한다. 본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또 영천군(榮川郡) 편에 나온다. 천등산(天燈山) 부의 북쪽 28리에 있다. 치원봉(致遠峯) 청량산(淸涼山)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으므로 이름 지은 것이다. 와부탄(瓦釜灘)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진보현(眞寶縣)의 신한천(神漢川), 청송부(淸松府)의 남천(南川), 임하현의 금소천(琴召川)의 하류이며 견항진의 남쪽에서 합류한다. 귀령(龜嶺) 일직현(一直縣)에 있다. 견항진(犬項津) 부의 동쪽 3리에 있다. 물야탄의 하류이다. 물야탄(勿也灘) 부의 동쪽 11리에 있다. 요촌탄의 하류이다. 요촌탄(蓼村灘) 부의 동쪽 40리에 있다. 예안현(禮安縣)의 부진(浮津)의 하류이다. 독천(禿川)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근원이 의성현(義城縣)의 황산(黃山)에서 나와서 견항진의 하류에 들어간다. 금소천(琴召川) 임하현의 서쪽 5리에 있으며, 부(府)와의 거리는 동쪽으로 27리이다. 즉 청송부 관내 안덕현(安德縣) 서천(西川)의 하류로 와부탄의 상류에 들어간다. 여자지(女子池) 풍산현에 있다. 『신증』 화산(花山) 하나는 부의 동쪽 14리에 있고, 하나는 풍산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송관산(松官山) 내성현(奈城縣)의 남쪽 5리에 있다. 문수산(文殊山) 내성현의 북쪽에 있다. 송대풍혈(松臺風穴) 청량산에 있다. 석현(石峴) 일직현의 남쪽 1리에 있다. 고암현(古巖峴)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광탄(廣灘) 부의 동쪽 13리에 있다. 화천(花川) 풍산현의 화산(花山) 아래에 있다. 사천(斜川) 일직현의 앞에 있다. 망라담(網羅潭)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토산]철(鐵)ㆍ인삼(人蔘)ㆍ은어[銀口魚]ㆍ잣[海松子]ㆍ설면(雪綿)ㆍ꿀(蜂蜜)ㆍ왕골[莞草]ㆍ적복령(赤茯苓)ㆍ신무애뱀[白花蛇], 자석(紫石) 독천(禿川)에서 나오는데, 벼루를 만들 수 있다. 송이[松蕈]ㆍ석이버섯[石蕈]ㆍ오미자(五味子)ㆍ지황(地黃).
[불우]백련사(白蓮寺) 노산(盧山)에 있으며, 침벽루(枕碧樓)가 있다. ○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10년 동안 글 읽던 곳을, 포의(布衣)로 이제 다시 놀러 왔네. 긴 소나무는 옛 길에 그늘을 지우고, 어지러운 돌들은 차가운 냇물에 씻기우며 있다. 산촌에 하루가 저무니, 동부(洞府)엔 봄빛이 그윽하기만. 어느 때나 천병만마(千兵萬馬)를 거느리고, 한 번 웃으며 강가의 누(樓)에 오를 것인가.” 하였다. 임하사(臨河寺) 부의 서쪽에 있다. 법림사(法林寺) 성 남쪽에 있다. 법룡사(法龍寺) 성 서쪽에 있다. 청량사(淸涼寺) 청량산에 있다. 개목사(開目寺) 개목산(開目山)에 있다. 법흥사(法興寺) 부의 동쪽에 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이 절에 오르면 황홀하여 공중에 있는 것 같으니, 열두 봉우리들이 서로 등지기도 하고 마주 보기도 하네. 들 비[野雨]는 빛이 먹처럼 짙어서 모든 자취를 검게 덮어 버리고, 호수에 날이 개니 가늘게 밝은 자태를 희롱한다. 먼 마을의 단풍 든 나무에는 저녁볕이 머무르고, 높은 산 차운 소나무에는 가을 안개 물러간다. 다른 날 임충의 수레 아래에서 이 누(樓)를 생각하게 된다면, 하루 밤에 남쪽 꿈을 두 번 꾼들 무엇이 싫으랴.” 하였다.
[고적]일계현(日谿縣)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본래는 열혜현(熱兮縣)이니 혹은 이혜(泥兮)라고 한다. 신라의 경덕왕(景德王)이 일계(日谿)라고 고치고 고창(古昌)에 예속시켰다. 지금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요촌부곡(蓼村部曲) 부의 동쪽 35리에 있다. 하양부곡(河壤部曲)ㆍ신양부곡(新陽部曲) 풍산현에 있다. 소라부곡(召羅部曲) 춘양현(春陽縣)에 있다. 봉화현(奉化縣)의 동촌(東村)에 넘어 들어가 있다. 토곡부곡(吐谷部曲) 내성현(奈城縣)의 북쪽에 있다. 청량산고성(淸涼山古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3백 50척이다. 안에 우물 7개소, 시내[溪] 2개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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