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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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
4.서안부(西安府)는 함양(咸陽)이고,
陝西省(領七府。五直隸州。五州。七十三縣)。
○西安府(名關中。領一州。十五縣)長安(鎬京。附府)咸寧(霸陵。附府)咸陽(石安)興平(茂陵)臨潼(新豐)高陵(鹿苑)鄂縣(杜亭)藍田(玉山)涇陽(鼎州)三原(鹿原)盩屋(恒州)渭南(南鄭)富平(頻陽)醴泉(溫秀)同官(役祤)耀州(華原)-地輿名目(一十九省)
경기 서안부(西安府) 부평(富平)
전라 서안부(西安府) 진안(鎭安)
경상 서안부(西安府) 함양(咸陽)
함경 서안부(西安府) 삼수(三水)이고,
咸陽
历史沿革
周称程伯国,后改名毕郢,再改岐周。春秋时称渭阳。
秦为咸阳。汉高祖元年(公元前206年),更名新城。
汉武帝元鼎三年(公元前114年),改为渭城。晋时设置灵武县。后赵时更名石安县。
前秦时,将汉刘邦的陵邑-长陵邑改为咸阳郡,并辖灵武县。
唐武德元年(公元618年),武则天因其母杨氏陵墓-顺陵在此,改为赤县。唐神龙元年(公元705年),升为次畿。五代、两宋、金皆称咸阳。
元初,一度将咸阳并入兴平,不久又恢复咸阳县制。
明洪武四年(公元1371年)将咸阳迁到渭水驿,即现在秦都区所在地。
明、清均称咸阳,属西安府管辖。
夏代开始,咸阳属禹贡九州之雍州。
殷商时期,咸阳称做“程”。
西周王朝,称毕国。
武王都于镐京,其地在今长安县斗门镇附近。京者,大也。周制:”邦畿千里”,所以毕国当为畿内所属。
秦孝公初期,首都在栎阳。
孝公十二年(公元前350年),城咸阳,筑冀阙。
秦都九迁西犬丘、西垂、天水、雍、平阳、涀渭之会、泾阳、栎阳、咸阳),而咸阳为其最后定都之地。
秦王朝,首都咸阳。
汉高祖(刘邦)元年,被项羽毁了的咸阳得到恢复,取名新城。
七年又划归长安,所以司马迁说,长安是原来的咸阳。
武帝(刘彻)元鼎三年,始更名渭城(以其地临近渭水),属右扶风。
西汉早期、中期的七个汉陵,军没有陵邑。
除文帝霸陵、宣帝杜陵葬于长安南原外,其余高祖长陵、惠帝安陵、景帝阳陵、武帝茂陵、昭帝平陵五个陵邑都在咸阳原上,所以汉后把咸阳原也叫五陵原。
如刘邦的陵邑叫长陵县,曾显关东豪族万户以奉陵邑,至平帝元始二年(公元二年)已达五万户。
长陵邑遗址在今市区内韩家湾乡怡魏村。
安陵县迁来关东倡优乐人五千户以充陵邑,遗址在白庙村周围。
茂陵县奉陵邑者六万户。这些贵族公子不事生产、豪华奢侈、斗鸡走狗、生事滋扰。
当时咸阳五方之音充侈境内,所以古称难治。
“五陵公子”、“五陵少年”就是这个特殊阶层的代名词。五陵邑当时虽然称县,但并不属郡治理。而是在汉王朝中央部门设有“奉常”这样一个专门机构,管理陵邑一应事宜。武帝太初元年将长陵、阳陵及所属塞国更名为左冯翊,将渭城、安陵、茂陵、平陵及所属雍国更名为右扶风。
民国三年(公元1914年)废府设道,咸阳归关中道管辖,不久废道直属陕西省政府。公元一九三七年后,属咸阳第十行政督察专员公署。
1949年5月18日咸阳县解放,归咸阳行政专员公署。
1952年12月将咸阳县的城区建为咸阳市,郊区仍归咸阳县管辖,市、县并列。
1953年咸阳市、咸阳县直属陕西省政府领导。
1958年12月将咸阳县并入咸阳市。
1961年1月曾将兴平、周至、彬县划归咸阳市管辖。
1961年10月复置咸阳专署,四县划出,咸阳市仍归咸阳专署。
1966年7月改属西安市。1971年10月咸阳市复属咸阳地区。
1984年5月咸阳地区改为省辖市后,原咸阳市易名秦都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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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진주목◎ 함양군(咸陽郡)
본디 속함군(速含郡)인데, 경덕왕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치고, 고려 성종(成宗) 을미년에 허주 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올렸다가, 현종 임자년에 단련사(團練使)를 폐지하고 함양군(含陽郡)으로 낮추어서 합천(陜川) 임내(任內)에 붙였고,【뒤에 함(含)을 함(咸)으로 고쳤다. 】명종 2년에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4년 을해에 지군사(知郡事)로 올렸다. 부곡(部曲)이 1이니, 고안(高安)이요, 소(所)가 1이니, 마천(馬淺)이다.
진산(鎭山)은 백암(白嵓)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안음(安陰) 도현(桃峴)에 이르기 28리, 서쪽으로 전라도 운봉(雲峯)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진주(晉州) 화개곡(花開谷)에 이르기 90리, 북쪽으로 안음(安陰)에 이르기 27리이다.
호수는 4백 28호, 인구가 1천 9백 48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38명, 진군(鎭軍)이 28명, 선군(船軍)이 1백 88명이다.
본군(本郡)의 토성(土姓)이 5이니, 여(呂)·오(吳)·서(徐)·박(朴)·조(曺)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이(李)이며,【근본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향리가 되었다. 】마천(馬淺)의 성이 1이니, 조(曺)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추우며, 간전(墾田)이 2천 4백 73결이다.【논이 약간 적다. 】토의(土宜)는 벼·조·콩·감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석이(石茸)·칠·종이·녹포(鹿脯)·여우가죽·노루가죽이며, 약재(藥材)는 연꽃술[蓮花蘂]·모란껍질·모향(茅香)이요, 토산(土産)은 은어·작설다(雀舌茶)·죽순·감이다.
읍 토성(邑土城)【둘레가 4백 33보인데, 안에 작은 못 3, 우물 3이 있다. 】역(驛)이 2이니, 사근(沙近)·신역(新驛)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함양군(咸陽郡)
동쪽으로 안음현(安陰縣) 경계까지 37리이고, 남쪽으로 산음현(山陰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전라도 운봉현(雲峯縣) 경계까지 27리이고, 북쪽으로 안음현 경계까지 37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6백 59리이다.
[건치연혁]본래 신라 속함군(速含郡)인데 함성(含城)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이 승격시켜서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삼았으나, 현종은 함양군(含陽郡)으로 강등하여 합주(陜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함(含)을 함(咸)으로 고쳤다. 명종이 다시 강등시켜서 현으로 만들고 감무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4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풍속]풍속이 근신하고 정성스러움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기이한 봉우리와 깊은 구렁 신숙주가 지은 제운루(齊雲樓) 기문에 있다. 백암산(白巖山) 군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문필봉(文筆峯) 군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지리산(智異山)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산 북쪽은 온통 이 고을 지경이며, 천왕봉(天王峯)이 진주와 경계로 되었다.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 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일컫는다. 의탄소(義呑所)와 5ㆍ6리 거리인데 우마가 능히 가지 못하는 곳이나, 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 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천왕점(天王岾)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경계이다. 백운산(白雲山) 군 서쪽 40리 지점에 있는데 안음현 경계이다. 화장산(花長山)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산 속에 난초와 혜초(蕙草)가 많다. 취암산(鷲巖山) 군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상산(霜山) 군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여러 바위가 다투듯 빼어난데 형상이 칼날 같다. 산 밑에 골이 하나 있는데, 홍무(洪武) 경신년, 왜적을 정벌할 때에 병기를 저장했던 곳이다.
도현(桃峴) 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팔량현(八良峴) 군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전라도 운봉현 경계로서 요충 지대이다. 고개 위에 신라 때 옛 진터가 있다. 수지봉(愁智峯)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안점산(鞍岾山) 군 북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산 위에 옛날 석성이 있다. 사암산(蛇巖山) 군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오도봉(悟道峯)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대고대(大孤臺) 남계(灆溪) 복판에 있다. 소고대(小孤臺) 뇌계(㵢溪) 복판에 있다. 대관림(大館林) 뇌계 동쪽 언덕에 있다.
남계(灆溪)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안음현 동천(東川)의 하류이다. 산음현 경계에 와서 임천(瀶川)과 합류한다. 뇌계(㵢溪) 군 서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백운산에서 나오며 동쪽으로 흘러 사근역(沙斤驛) 가에 와서 남계에 들어간다. 임천(瀶川)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엄천(嚴川) 군 남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용유담 하류이다. 서계(西谿) 군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팔량현에서 나오는데, 제한역(蹄閑驛) 아래쪽 5리쯤에 이르러서는 두 산골 사이에 돌이 뻗쳐서 바닥이 되었으며, 갈아놓은 것처럼 미끄럽고, 물줄기가 나는 듯 흘러 물방울을 튕기며, 굽은 낭떠러지에 내리 쏟아서 댕글댕글하는 것이 패옥 소리 같다.
[토산]대[竹]ㆍ벌[蜂蜜]ㆍ석이버섯[石蕈]ㆍ감ㆍ은어[銀口魚]ㆍ석류ㆍ잣[海松子]. 『신증』 오미자.
[불우]견불사(見佛寺) 지리산에 있다. ○ 조승숙(趙承肅)의 시에, “절이 명산 속에 있으니, 창건된 때가 아주 옛날이네, 선상(禪床)엔 일월이 한가하고, 강석엔 인천(人天)을 설하는구나. 너에게 무생(無生)이라는 이치 들었고, 내 신선 못 배웠음이 한스러워라. 얘기 끝에 도리어 취미가 있으니, 눈앞에 풍경이 좋기도 하이.” 하였다.
군자사(君子寺) 지리산에 있다. 전설에,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왕위를 피해서 여기에 살다가, 태자를 낳아서 나라에 돌아가고, 집은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한다. 『신증』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10년 동안 떠들 적에 내 어이 견디었던가. 구름 산에 자취 감추고 한바탕 꿈 달게 여기자. 지는 해에 번쩍이는 놀 취점(鷲岾)에 비꼈고, 긴 바람은 비를 몰아 용담(龍潭)에 지난다. 흰 구름과 푸른 학은 속절 없이 아득한데, 아간(牙簡)과 경고(瓊膏)를 어찌 싫도록 참례하였나. 오늘 밤에 솔바람 창을 스치니, 가벼운 노을에 뚜렷한 달을 누워서 보리라.” 하였다.
승안사(昇安寺) 사암산(蛇巖山)에 있다. 선열암(先涅菴)ㆍ고열암(古涅菴)ㆍ신열암(新涅菴)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화장사(花長寺) 화장산에 있다. 엄천사(嚴川寺) 엄천 북쪽 언덕에 있다. 마적사(馬迹寺)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馬迹)이 살았다는 것으로 명칭을 하였다. 앞에는 유가대(瑜珈臺)가 있고, 밑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으며 탄 위는 곧 용유담(龍遊潭)이다. 금대암(金臺菴)ㆍ보월암(寶月菴)ㆍ안국사(安國寺) 아울러 지리산에 있다. 본조 중 행호(行乎)가 창건한 것이다.
무주암(無住菴) 지리산에 있다. ○《보한집(補閑集)》에, “중 무기(無己)가 스스로 대혼자(大昏子)라 호하고 이 산에 숨었다. 장삼 하나로 30년 동안을 지냈고, 매년 겨울과 여름이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새끼 띠로 감아 묶고서, 봄 가을이면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는데, 하루에 3ㆍ4말 밥을 먹었다. 한 곳에 앉으면 반드시 열흘이 넘었고, 일어나 걸으면서 게(偈)를 지어 크게 읊었다. 산중에 70여 개 암자가 있는데, 한 암자에서 한 끼씩 먹으면서 게 한 수씩 남겼다. 무주암 게에, ‘이 지경에 본래 주거하는 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집을 지었는가. 오직 무기(無己)란 자만이 남아서 가거나 머물거나 처음부터 거리낌 없다.’ 하였으니, 말이 엉성하고 쉬운 듯하나 숨긴 뜻이 깊다. 혹시 한습(寒拾)의 무리인가.” 하였다.
덕봉사(德峯寺) 천왕점 밑에 있다. 등귀사(登龜寺) 오도봉(悟道峯)에 있다.
『신증』 유호인의 시에, “두류 만첩 산아 잘있었는가. 잠깐 여가 타서 여기 올랐노라. 금당(金堂)과 옥실(玉室)의 옛 언약을 찾으니, 푸른 고개 붉은 벼랑이 모두 옛 안면일세. 해 저물어가니 기러기 북쪽으로 가고, 누런 국화 떨어질 제 객이 남쪽으로 돌아온다. 난파(鑾坡)가 멀리 운림(雲林)과 격했구나. 양(兩) 지역에서 돌아오니 귀밑머리 반백일세.” 하였다.
미타사(彌陀寺) 사근성산(沙斤城山)에 있다.
[고적]옛 읍성 관변리(官邊里)에 있는데, 지금 고을 관아와 4리 거리이다. 공안부곡(功安部曲) 군 동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마천소(馬川所) 천(川)은 옛날에는 천(淺)으로 썼다. 군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말 방울 울리며 마천에 들어오는데, 빈종(賓從)도 또한 점잖구나. 그늘진 구렁엔 얼음이 얼려하고, 양지쪽 벼랑엔 단풍이 아직도 곱다. 눈이 신모묘(神母廟)를 덮었고, 우레가 칩룡연(蟄龍淵)에서 울려온다. 굽은 언덕엔 시참(柴慘 형벌의 일종)을 남기고, 수목 우거진 사당엔 지전(紙錢)이 걸려 있네. 나무를 깎아서 시냇가엔 자귀밥 있고, 숯을 굽느라 골짜기엔 연기가 난다. 일하는 사람은 메밀을 베고, 작은 색시는 목화를 거둔다. 그럭저럭 임기가 가까워졌으니, 이 놀이를 응당 그리워하리.” 하였다. 의탄소(義呑所)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소의 아전들이 지금은 군 서쪽 웅곡리(熊谷里)에 옮겨가 산다.
월명총(月明冢) 수지봉 위에 있다. 전설에는, “옛날에 동경의 장사꾼이 사근역 계집 월명을 사랑하여 며칠 동안을 머물다가 갔다. 월명이 사모하다가 병이 되어 죽었으므로 여기에다 묻었다. 그 뒤에 장사꾼이 그 무덤에 가서 곡하다가 또한 죽어서 마침내 같은 무덤에 묻혔다.” 한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무덤 위에는 연리지(連理枝) 푸르구나. 길손이 그를 위해 화산기(華山畿)를 부른다. 지금도 달 없으면 여우가 우는데, 꽃다운 넋은 나비되어 날고 있겠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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