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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畿內]7.영주부(永州府)는 강화(江華)

한부울 2011. 3. 15. 22:16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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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畿內)

7.영주부(永州府)는 강화(江華)이고,

(1).湖南省(領九府。七州。六十四縣)。

永州府(名眾陵。領一州。七縣)零陵(泉陵。附府)祁陽(永昌)東安(應陽)道州(昌浦)寧遠(冷道)永明(謝沐)江華(馬乘)新田(春陵)-地輿名目(一十九省)

 

 

永州府,明洪武元年(1368年)改永州路置,治零陵县(今湖南永州市)。属湖广承宣布政使司。辖境相当今湖南省祁东、新田两县以西湘江(包括潇水)流域。清属湖南省。1913年废。


地处湖南省南部.明洪武元年(1368),改永州路为永州府,属湖广布政司。清属湖南省。府治零陵(在今湖南省永州市零陵区)。下辖:零陵(县治在今湖南省永州市零陵区)、祁阳(今湖南省祁阳县)、东安(今湖南省东安县)、宁远(今湖南省宁远县)、永明(今湖南省江永县)、江华(今湖南省江华瑶族自治县)、新田(今湖南省新田县)共7县;道(州治在今湖南省道县)1散州。1913年废府。


江华瑶族自治县(江华县)

 

 

历史

江华自唐高祖武德四年(621年)分冯乘县置“江华县”,武则天当政时改“江华县”为“云溪县”,唐中宗神龙元年复名“江华”。1955年11月25日改名“江华瑶族自治县”,隶衡阳专署,1962年划归零陵专署(今永州)至今。


历史沿革

江华县因县治在阳华岩之江南,江华从此得名。

唐武德四年(621年)析冯乘县置江华县,以治所设“阳华岩之江南”而名。   

江华县域在秦以前属荆、楚之地,秦时属长沙郡。   

西汉元鼎六年(前111年),置冯乘县,隶苍梧郡,属交州。   

三国时,地入东吴,隶临贺郡,属广州。   

隋文帝开皇九年(590年),改隶永州总管府,属荆州。   

唐高祖武德四年(621年),分冯乘县置江华县,隶营州(道州),属江南西道。

武则天执政期间(684-704年),改江华为云溪县

中宗神龙元年复名江华。

唐昭宗乾宁三年,属楚国。   

宋隶道州,元隶道州路,属湖广行省。   

明隶永州府,属湖广巡抚。明英宗天顺六年(1462年)移县治于黄头岗(今沱江镇)。 

清顺治六年(1649年),隶永州府,属湖南巡抚。   

1914年,属衡阳道。   

1938年属零陵专署。   

1949年11月江华县和平解放,行政区划仍隶属零陵专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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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강화 도호부(江華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인데, 신라가 해구군(海口郡)으로 고쳤고, 고려가 강화현으로 고쳐, 현종(顯宗) 무오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종(高宗) 19년 임진에【송나라 이종(理宗) 소정(紹定) 5년. 】몽고병을 피하여 〈이 고을에〉 들어와서 도읍을 정하고, 강화군(江華郡)으로 승격시켜 강도(江都)라 하다가, 원종(元宗) 원년에【원(元)나라 세조(世祖) 중통(中統) 원년. 】다시 송도(松都)로 돌아왔다.【지금의 부(府) 동쪽 10리 되는 송악리(松岳里)에 옛날의 궁터가 있다. 】홍무(洪武) 정사5006) 에 부(府)로 승격시키고, 본조 태종(太宗)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속현(屬縣)이 2이니, 진강현(鎭江縣)은 본래 고구려의 수지현(首知縣)인데, 신라가 수진(守鎭)으로 고쳤으며, 하음현(河陰縣)은 본래 고구려의 동음내현(冬音柰縣)인데, 신라가 호음(冱陰)으로 고쳐서 모두 해구군(海口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이내 강화 임내(任內)에 붙였다.

진산(鎭山)은 고려 마리산(摩利山)이다.【부(府) 남쪽에 있다. 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四面)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石壇)이라.” 한다. 산기슭에 재궁(齋宮)이 있는데, 예로부터 매년 봄·가을에 대언(代言)을 보내어 초제(醮祭)를 지내었다. 금상(今上) 12년 경술에 비로소 2품 이상의 관원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재궁 벽 위에 ‘동(東)’자 운(韻)의 시(詩)가 있으니, 태종(太宗)이 잠룡(潛龍) 때에, 일찍이 대언(代言)이 되어서 이곳에서 재숙(齋宿)할 때 이 시를 지은 것인데, 지금 널에 새기고 금으로 메웠다. 】전등산(傳燈山)【일명(一名)은 삼랑성(三郞城)이니, 참성(塹城)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았다.”고 한다. 】〈강화〉부는 바다 가운데 있으니, 곧 통진현(通津縣)의 서쪽이요, 해풍군(海豐郡)의 남쪽이다. 동서가 32리, 남북이 64리이다.

호수가 2천 4백 45호, 인구가 3천 2백 83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명, 선군(船軍)이 1백 95명이며, 장번 수군(長番水軍)이 2백 79명이다.【전라도 나주(羅州)·목포(木浦) 사람이 배도 잘 타고, 수전(水戰)도 잘하므로, 홍무(洪武)때에 나라에서 그 지방 사람들을 뽑아서 교동과 강화에 나누어 있게 하고, 좌·우변 수군(左右邊水軍)이라 하였다. 】

토성(土姓)이 4이니, 최(崔)·위(韋)·황(黃)·고(高)요, 내성(來姓)이 3이니, 전(田)·노(魯)·한(韓)이며, 속성(續姓)이 2이니, 김(金)·이(李)이다. 진강(鎭江)의 성(姓)이 5이니, 노(魯)·소(蘇)·고(高)·정(井)·만(萬)이요, 하음(河陰)의 성(姓)이 5이니, 이(李)·전(田)·봉(奉)·길(吉)·만(萬)이며, 내성(來姓)이 1이니, 정(鄭)이요, 없어진 해령향(海寧鄕)의 성(姓)이 2이니, 고(高)·송(宋)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일찍 따뜻해지며, 민속(民俗)이 어염(魚鹽)으로써 업(業)을 삼는다. 간전(墾田)이 5천 6백 6결(結)이다.【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수수·팥·메밀·참깨·뽕나무·삼[麻]·감이요, 약재(藥材)는 조피나무열매[川椒]·사자발쑥·단너삼뿌리[黃耆]·검산풀뿌리[續斷]이며, 토산(土産)은 청란석(靑蘭石)과【마리산(摩利山) 서쪽 바닷가에서 나는데, 비문을 새기기에 좋다. 헌릉(獻陵)의 신도비(神道碑)도 이 돌을 썼다. 】또 암석(嵓石)이 있다.【쪼개어 석회(石灰)를 굽는다. 】어량(魚梁)이 2곳이요,【홍어·숭어·민어·쌀새우[白蝦]·대합조개[生蛉]·미네굴[土花]·굴[石花]이 난다. 】염소(鹽所)가 11곳이다. 목장(牧場)은 진강산(鎭江山)과 길상산(吉祥山)이 서로 연(連)한 데에 축장(築場)하였다.【둘레가 41리인데, 국마(國馬) 1천 5백 필을 놓아 먹인다. 】

정포(井浦)【부(府) 서쪽에 있는데,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수어(守禦)한다. 】갑곶진(甲串津)【부(府) 동쪽에 있다. 나룻배가 있고, 나루머리[渡頭]에 연미정(燕尾亭)이 있다. 】인화석진(寅火石津)5009) 【부(府) 북쪽에 있는데, 나룻배가 있다. 】봉화가 5곳이니, 할미성[大母城]은 부(府) 남쪽에 있고,【동쪽으로 통진(通津) 약산(藥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진강산(鎭江山)에 응한다. 】진강산(鎭江山)은 부(府) 남쪽에 있고,【서쪽으로 망산(網山)에 응한다. 】망산(網山)은 부(府) 서쪽에 있고,【북쪽으로 별립산(別立山)에 응한다. 】별립산(別立山)은 부(府) 북쪽에 있고,【동쪽으로 본부(本府)의 송악(松岳)에 응한다. 】송악(松岳)은 부(府)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통진현(通津縣) 주산(主山)에 응한다. 】가릉포 대제(嘉陵浦大堤)【부(府) 남쪽에 있는데, 길이 2천 척(尺)이다. 】부(府) 서쪽 수로(水路) 2리에 글음섬[煤島]이 있고,【옛날의 구음섬[仇音島]인데, 둘레가 60리이고, 나라의 말 3백 27필을 놓아 먹인다. 목자(牧子) 7호(戶)와 수군(水軍) 16호(戶)를 들여보내어 소금을 구워서 살게 한다. 섬에 광박석(廣博石)이 있는데, 캐서 국용(國用)에 쓰게 한다. 】또 서쪽 수로(水路) 7리에 주문도(注文島)가 있으면,【둘레가 30리이다. 】또 서쪽 수로(水路) 30여 리에 밤섬[巴音島]이 있고,【둘레가 40리이며, 밭 1백 6결(結)이 있는데, 우도 수군영(右道水軍營)의 밭이므로, 교동 수군(喬桐水軍) 8호(戶)가 들어가 산다. 옆에 작은 섬이 있는데, 길이 5리, 너비 2리이며, 밭 5결(結)이 있는데, 교동 수군(喬桐水軍) 4호가 들어가 산다. 】또 서쪽 수로(水路) 15리에 말섬[末島]이 있으며,【둘레가 10여 리인데, 밭 3결(結)이 있는데, 교동(喬桐)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농사를 짓는다. 】또 동쪽 수로(水路) 16리에 금북섬[今音北島]이 있고,【길이 10리, 너비 2리이며, 밭 20결이 있는데, 교동 사람 7호가 들어가 산다. 】또 동쪽 수로(水路) 2백 보(步)에 미법도(彌法島)가 있으며,【둘레가 15리이며, 옛날에는 매잉도(買仍島)라 하였다. 밭 7결이 있는데, 교동 수군 6호가 들어가 산다. 】또 남쪽 30리에 장봉도(長烽島)가 있고,【길이 40리, 너비가 5리이며, 소를 놓아 먹이는데, 통진현(通津縣)에서 관장한다. 】또 동쪽 60리에 신도(信島)가 있다.【둘레가 30리인데, 나라의 말 36필을 놓아 먹인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 

바다 섬 가운데 있는데, 동으로 갑곶나루[甲串津]까지 10리, 남으로 해안(海岸)까지 40리, 서쪽으로 인화석진(寅火石津)까지 26리, 북으로 승천부진(昇天府津)까지 15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35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 혈구군(穴口郡)인데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해구(海口)라 고치고, 원성왕(元聖王)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縣)으로 만들었다. 현종 9년(1018)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해 들어가 도읍하고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이름을 강도(江都)라 했다. 원종(元宗) 원년(1259)에 다시 송도(松都)로 돌아왔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인주(仁州)에 합병하였다가 곧 복구시켰다. 신우(辛禑) 3년(1377)에 부(府)로 승격시켰다가 본조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로 고쳤다.

[형승]안으로 마리(摩利)ㆍ혈구(穴口)를 점거하고, 밖으로 동진(童津)ㆍ백마(白馬)를 경계로 했다 고려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서도(西都)의 변생(辯生 말 잘하는 사람)이 북경(北京)의 담수(談叟 이야기 잘 하는 노인)와 함께 강도(江都)에 놀러 와서 한 정의대부(正議大夫 바르게 말하는 대부)를 만났다. 대부가 말하기를, ‘내가 두 나라의 이름은 들었으되 그 제도를 못 봤는데, 다행히 이제 두 분을 만났으니, 옛것을 그리워하는 정이 트이도록 나에게 두 서울 이야기를 들려 주오.’ 하니 변생이 말하기를, ‘그리하리다. 서도(西都)가 처음 이룩될 제 동명(東明)이란 임금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이 땅을 돌보아 거주를 정하시니, 터를 닦지 않고 돌을 쌓지 않았는데도 화성(化城)이 치솟았네.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하늘을 오르락내리락하니 온갖 신(神)이 인도하시고 뭇 신선이 뒤쫓고, 웅연(熊淵 금소)에서 여인 만나 펄펄 날며 오락가락 하였네. 강 가운데 돌이 있으니 그 이름이 조천대(朝天臺)라 얼핏 보면 너럭바위, 문득 솟아 절벽인데 황제께서 때로 올라 신(神)의 행차 배회하네. 신령(神靈)이 계신 곳 평양 신사(神祠 동명왕사(東明王祠))가 아닌가. 풍백(風伯)을 부르시고 우사(雨師)를 지휘하시니, 노하시면 대낮에도 번개와 우박, 나무ㆍ돌이 섞여 날리네. 또 목멱신사(木覓神社 평양 목멱산에 있다)는 농사를 관장하니, 애써 갈지 않아도 풍년 들어 노적가리가 산더미 같으며, 공사(公私)로 두호하여 큰 이불로 덮어 주네. 대개 이 같으니 어떠한가?’ 하자, 대부가 말하기를, ‘신비하고 괴이하며 어리둥절하고 거짓된 말을 어째서 과장되게 하는가?’ 하니, 변생이 말하기를, ‘장려(壯麗)한 구경거리는 용언궐(龍堰闕)과 구제궁(九梯宮)이니, 넓고 트이고 드높아서 우주를 여닫는 듯, 동서를 못 가릴지니, 하늘도 그 나는 듯한 자세를 빼앗지 못하며 귀신도 그 공력을 다투지 못하리라. 유람할 장소로는 다경루(多景樓)는 푸른 바다에 걸쳐 있고 청원루(淸遠樓)는 허공에 반 공중에 버티고 있으며, 부벽루(浮碧樓)는 장강(長江)에 임하였고, 영명사(永明寺)는 드높이 걸쳐 있네. 뭇 물줄기 모였으니 강 이름이 대동(大同)이라, 해맑고 넘실넘실, 번쩍여 출렁출렁, 호경(鎬京 중국의 지명)을 안고 풍수(灃水 중국의 강 이름)를 모아온 듯, 깨끗하기는 흰 비단을 깐 듯, 해맑기는 청동(靑銅 거울) 같은데 양편 언덕 수양버들은 온 종일 바람 쐬며 춤을 추며, 질펀한 모래 넓은 들에 기러기들이 날아 우네. 푸른 산이 성(城)을 둘러 사면이 드높은데, 굽어보면 가랑비에 도롱이를 쓴 어옹(漁翁)들, 멀리 들으면 석양녘에 피리를 부는 목동(牧童)들,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고 노래로도 다할 수 없네. 어사와 닻줄을 풀고 화선(畫船)을 띄워 중류(中流)에서 머리를 돌려 볼 양이면, 황홀하기가 비단, 병풍 속에 놓여 있는 듯하니, 우리 도성의 경치가 진실로 천하 제일 아닌가?’ 하자, 대부가 말하기를, ‘기이한 구경거리와 뛰어난 경치는 사람의 맘과 눈을 흐리는 것일세.’ 하니, 변생이 말하기를, ‘물에 가 고기를 잡으면 긴 그물을 한 번 들자 별별 고기 다 많다. 미꾸라지ㆍ암치ㆍ방어ㆍ가물치ㆍ날치ㆍ모래무치ㆍ메기ㆍ잉어ㆍ오징어ㆍ장어ㆍ전어ㆍ상어 따위는 워낙 흔한 산물일세. 한창 추운 겨울날에 온 강이 얼었는데, 금린옥척(金鱗玉尺)이 그 아래 퍼덕퍼덕. 쇠 작살로 찔러 대니 백발백중 찍히는데, 소반에 하룻밤 담아두니 깨끗이 얼었거늘 요리꾼이 칼을 울리며 저며내니, 가는 살결 썩썩 싹싹, 빛도 절색(絶色), 맛도 절미(絶味), 대번에 이가 시리고 목이 써늘하네.” - 원문 빠짐 - 담수가 말하기를 ‘천년 뒤에 나왔어도 부절을 합쳐 놓은 듯하네. 앞서 최고운(崔孤雲)이란 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기운이 산 남쪽에 서려 있으니, 곡령(鵠嶺)엔 솔이 푸르고, 계림(鷄林)엔 잎이 누르다.」하여 자줏빛 구름이 일기 전에 흥망을 미리 예언했네. 철원(鐵原)의 보배거울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닭이 먼저고, 오리가 뒤」라는 말이 분명하더니, 삼한(三韓)을 통합하자 명당 터를 선택함에, 북악(北岳)은 소 누운 듯하고 남산은 용이 나는 듯, 우로 품고 좌로 안아 안산(案山)ㆍ화형(花形)이 꼭 맞았다. 여덟 머리와 세 꼬리, 동녘 고개와 서편 언덕이 민 듯이 구불구불, 각(角 별 이름)은 팔로 들고, 상(商 별 이름)은 주먹으로 쥐어 정기(精氣)가 모여서 기운을 토하며 상서(祥瑞)를 낳았네. 다섯 내[川]의 신령스러운 줄기는 그 근원이 깊고 멀어 수많은 골[洞] 물이 모여 흐르고 넘쳐 쏜살같이 내닫고 바퀴처럼 달려 중앙에 모여드니, 영(靈)이 적시고 덕(德)이 주입되어 온갖 것이 기름져서 창성하네. 푸른 솔[松都]이 무성하기가 삼백여 년의 해이니, 중간에 쇠했다가 다시 성하여, ‘뽕나무 줄기에 맨 양 견고해졌네. 예로부터 우리나라같이 도참(圖讖)에 응하여 나라를 세운 이가 몇몇 제왕이 있던가’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성조(聖祖)가 임금이 됨은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人心)에 순함이지, 풍수(風水)나 도참의 황당한 것 때문이 아니다.’ 하자 담수가 말하기를, ‘중원(中原 충주(忠州))ㆍ대령(大寧)은 철의 산지(産地)로, 강철ㆍ납ㆍ부드럽고 강한 철, 부드러운 철이 돌을 뚫지 않아도 산의 골수(骨髓)로 흘러나오니, 뿌리를 찍고 파서 무진장 끝이 없네. 홍로(洪爐)에 녹여 부으니 쇠가 녹아 화염에 달군 양문(陽紋)과 물에 담근 음문(陰紋)을 늙은 대장장이 망치 잡아 백번 천번 단련하니, 큰 살촉이 되고 작은 살촉이 되며, 창도 되고 갑옷도 되며 칼도 되고 긴 창도 되며 화로도 되고 작은 창도 되며 호미가 되고 괭이도 되며 솥도 되고 물통도 되니, 그릇으론 집안에서 쓰고 병기론 전쟁에서 쓰네. 계림(鷄林 경주(慶州))ㆍ영가(永嘉 안동(安東))엔 뽕나무가 우거졌으니, 봄날 누에 칠 때 한 집에 만반[萬箔]이요, 여름이라 실 뽑으면 한 손에 백 타래씩 뽑을 제 엉킨 실을 다듬어 짜내니, 철꺽철꺽 저 북[梭] 소리 우레인가 벼락인가. 비단ㆍ깁[綃]ㆍ능라(綾羅)ㆍ삼베ㆍ겹올ㆍ이올ㆍ가는 비단이 불면 날 듯 연기인가 안개인가, 희고 흰 빛 눈인가 서리인가. 파랑ㆍ노랑ㆍ주홍ㆍ녹색으로 물들여 무늬 있는 금수(錦繡)로 만들어서 귀인(貴人)들이 입고 사녀(士女)들이 입고 끌 제 바스락 바스락 떨치면 번쩍하네. 이는 진실로 하늘이 주신 고장, 나라의 보물이 가득 찼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한 자 구슬도 보배가 아니라고 했거늘 하물며 쇠와 비단이랴.’ 하자, 담수가 말하기를, ‘시인(詩人)ㆍ묵객(墨客)들 어깨를 나란히하여 많고 많다. 붉은 정(情)에 푸른 뜻[意], 수놓은 입에 비단 마음, 얼음과 눈[雪]을 짓씹는 듯, 금과 옥을 새긴 듯, 붓 한 번 달릴 양이면 우레와 번개가 더 날랠 수 없고, 시(詩)가 워낙 뜻[態]이 많으매 맑은 강과 절벽도 그 높고 깊음을 비유하지 못하네. 케케묵은 말을 옛 것이라 그대로 쓰지 않고 생신(生新)한 말을 이제 따로 창조하네. 무사와 맹사(猛士)들은 뒷자락 짧은 옷에 만호(縵胡) 갓끈 잡아매고 사검(蛇劍) 차고 용도(龍刀) 쥐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눈 부릅뜨고 포효하다가 곰처럼 잡고 범처럼 할퀴며, 매처럼 나꿔채고 원숭이처럼 뛰며 눈 부릅뜨고 힐난하고 팔을 뽑으며 내닫는다. 말 타고 활 쏘매 연달아 맞추고, 지팡이 한 번 손에 놀리면 나는 공이 백 번 도네. 이것이 이른바 나라의 보배가 아닌가.’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아니로다. 조충(調蟲)의 작은 재주와 폭력을 함부로 쓰는 것을 군자(君子)가 취하지 않나니, 하물며 공을 희롱하는 재주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자, 담수가 말하기를, ‘관직(官職)을 설치해 나누니 내관(內官)이 천이요 외직(外職)이 만이라. 나쁜 사람을 떼버리고 좋은 사람을 등용하여 천거에는 공평무사하며 해마다 춘관(春官)에 명하여 어진이를 뽑아 등용하니 청의(靑衣)ㆍ자의(紫衣)가 조정에 가득하여 띠를 드리우고 홀(笏)을 꽂았다. 나가서는 염찰사(廉察使) 되고 혹은 고을의 수령이 되되 모두 청백(淸白)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샘물과 등불 같은 이(利)를 보지 않거든 하물며 뇌물 꾸러미를 받겠는가. 띠 풀어 등의 심지 삼고 돈 주고 샘물 마시니 문에는 참새 그물이 고요하고 밥상에는 생선 없이 냉담하니, 사람들이 그 이름에 탄복하고 스스로 티끌 없다고 한다. 백성에게 위엄을 부리려면 반드시 가혹해야 한다고 하여 털끝만한 일도 사찰(査察)하고 어두운 구석까지 빠짐없이 비추며 불고 닦아 흠집을 찾으니 허물을 가릴 수 없네. 이에 포승으로 묶고 오라를 지워 때릴 때에는 곤장을 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고, 목을 맬 때에는 밧줄을 겹으로 쓰고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네. 아전은 온 몸이 성한 데 없고 백성은 간담이 서늘하여, 쉬쉬 찌르렁 와들와들 부들부들. 별안간에 시비가 가려지고 한 번 꾸짖으면 교활한 자들도 떠네. 해마다 세(稅)를 늘려도 중세(重稅)가 아니고, 달마다 선물을 바쳐도 아첨이 아니며, 급하게 독촉하여 집집이 거둬다가 수로(水路)ㆍ육로(陸路)로 성화같이 운송해 와서 국고(國庫)를 채우니 공사(公事)에 부지런하고 나라를 이롭게 한 공을 말로 다 못한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거짓 청렴으로 가혹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좀먹는 일이니, 그 해독이 심하다.’ 하자, 담수가 말하기를, ‘공경(公卿)들의 저택이 10리에 뻗쳐 있는데, 엄청난 큰 누각(樓閣)은 봉황이 춤추는 듯하고, 서늘한 마루 따스한 방이 즐비하게 갖춰 있어 금벽(金碧)이 휘황하고 단청(丹靑)이 늘어섰네. 비단으로 기둥 싸고 채전(彩氈)으로 땅을 깔며 온갖 진기한 나무와 기이한 화초들, 봄의 꽃과 여름 열매, 푸른 숲에 붉은 송이 그윽한 향내, 서늘한 그늘이 한껏 곱고 아양을 떠네. 뒷방의 미인들은 구름 옷에 안개 치마, 갖은 자태와 더할 수 없는 요염함으로 열지어 둘러 있구나. 화문석 비단 요에 생가(笙歌)가 요란한데, 천 잔에 담긴 술은 구하주(九霞酒 신선이 마시는 술)가 아니던가. 《주역(周易)》의 수괘(需卦) 같고, 《시경(詩經)》의 기취(旣醉) 같도다. 낙타의 등허리와 곰의 발에 용의 간(肝)과 봉의 골수가 무더기로 쌓여도 입에 물려 내뱉네. 사대부와 평민, 절의 중도 화려한 집과 수육(水陸)의 진미(珍味)를 죄다 먹고, 귀와 눈의 온갖 오락과 사치한 옷을 자랑하며, 종과 천예(賤隸)조차 다투어 참람하여 높은 갓에 복두(幞頭) 쓰고 각대(角帶)와 아로새긴 신, 가벼운 옷 촘촘한 감을 다투어 서로 빛내고 자랑하니, 비록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성대한 화려함으로도 우리와 감히 풍속을 나란히 서지 못하리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아, 우리 옛 서울[松都]의 유리(流離)된 것이 대개 그것 때문이 아닌가.’ 하였다. 이에 서도와 북경의 두 손님이 수염을 흩날리며 불쾌해하면서 한편으로는 노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워하면서 말하기를, ‘저희들이 종일 말하되 대부께서 모두 꺾으니, 그러면 강도(江都)에 대한 말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두 분이 어찌 또한 일찍이 강도의 일을 들었겠는가. 한 끝을 대강 들어 토론하여 보리다. 동해 바다의 크기는 아홉 강과 여덟 하수(河水)를 겨자씨처럼 삼켜 구름과 해를 불락 삼키락 출렁 왈랑거리는데, 그 가운데 화산(花山 강화(江華)의 산 이름)이 있어 금오(金鼇)가 우뚝 치받쳤다. 물가와 언덕이 잎처럼 가지처럼 붙었는데, 그 가지와 잎에 붙어 올망졸망한 것들은 강상(江商) 해고(海賈)ㆍ어옹(漁翁)ㆍ소금구이의 집들이요, 꽃송이 같은 신악(神岳)과 꽃받침 같은 영악(靈岳) 그 꽃송이와 꽃받침을 걸쳐 날아가는 듯 솟아 있는 것은 황실ㆍ궁궐과 공경(公卿)ㆍ사서(士庶)들의 저택일세. 안으로는 마니(摩尼)ㆍ혈구(穴口 지금의 혈굴산(穴窟山))의 첩첩한 산이 웅거하고, 밖으로는 동진(童津 지금의 통진산(通津山))ㆍ백마(白馬 산이름)의 사면 요새(要塞)에 출입을 단속함에는 동편의 갑화관(岬華關 갑곶나루 甲串津), 외빈(外賓)을 맞고 보냄엔 북쪽의 풍포관(楓浦館)이니, 두 화(華 화산(花山)의 봉우리)가 문턱이 되고 두 효(崤)가 지도리[樞]가 되니, 참으로 천하에 중심이네. 이에 안으로 자줏빛 성을 둘러쌓고 밖에는 분첩(粉堞)으로 싸니, 물은 도와 둘렀고 산은 다투어 드높아서 굽어보면 오싹하게 연못이 깊고 우러르면 아찔한 절벽이라. 오리나 기러기도 다 날아들지 못하고 늑대와 범이 엿보지 못하는지라, 한 사람이 금지시키니 만 집이 편안히 잠을 자네. 이는 금성탕지(金城湯池)로 만세토록 제왕의 도읍이로다.’ 하자 두 손이 말하기를,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것은 산하(山河)로써가 아니니, 덕(德)에 있고 험난함에 있지 않도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성시(城市)가 포구이니 문 밖이 바로 배라, 꼴 베러 가거나 나무해 돌아가도 조그만 배에 둥실 실어 육지보다 빠르니, 땔감 부족 없고 마소 먹이 넉넉하여 사람은 한가하고 씀씀이 넉넉하며 힘은 적게 들고 공은 뛰어나네. 장삿배와 조공(朝貢) 배가 만 리에 돛을 이어 묵직한 배 북쪽으로 가벼운 돛대 남쪽으로 돛대머리 서로 잇고 고물[船尾]이 맞물어서 한 바람 따라 순식간에 팔방 사람 모여드니, 산해(山海)의 진미를 실어오지 않는 물건 없네. 옥(玉) 같은 쌀을 찧어 만 섬을 쌓아 우뚝하고 주옥(珠玉)이며 모피(毛皮)를 싸고 꾸린 것을 사방에서 모아 가득하다. 뭇 배 와서 닻을 내리자 거리 가득 골목 붐벼 매매가 자못 손쉬우니 말짐 소짐 무엇하리. 손에 들고 어깨에 매고 몇 걸음 안 가서 관가(官家)에 쌓여지고 민가에 흘러 넘쳐서, 산보다 높직하고 샘물처럼 콸콸하니, 온갖 곡식이 묵어서 썩을 지경이네. 한대(漢代)의 풍족함과 어떠한가?’ 하자, 두 손이 말하기를, ‘지극한 부는 축적하는 것이 아니니 거교(鉅橋)를 거울 삼으라.’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불법(佛法)이 해동(海東)에 온 지 오래되었으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신앙이 두터워져 상(像)을 만들어 귀의함엔 쇠를 녹이고 흙을 빚고 돌을 쪼고 나무를 새기며, 혹은 실로써 수불(繡佛)을 만들어 그림으로 얼굴을 그려 단정하고 장엄하여 표정이 엄연하네. 법보(法寶)를 드날림에는 경(經)ㆍ율(律)ㆍ논(論)의 장(章)들과 선가서(禪家書)ㆍ조사결(祖師訣)의 판(板)에 찍고 필사(筆寫)함에는 이금(泥金)이나 피로 써서 누런 권(卷)과 붉은 축(軸)에 주옥 함(函)과 비단 싸개 천 권인가 만 권인가 더미더미 쌓여 있네. 선방(禪房)과 교찰(敎刹)이며 공사(公寺)와 사당(私堂)이 있어, 사(社)니 암(庵)이니 재(齋)니 방(房)이니 우뚝 솟아 몇 천만 방(坊)인지 알지 못하니, 향내가 만 리에 이어져 나고 종소리가 사방에서 서로 들리네. 이에 긴 눈썹 오디빛 가사(袈裟), 푸른 눈동자 국화빛 장삼들이 남북 총림(叢林)에 대나무와 갈대처럼 줄을 지어 용과 코끼리가 맞서서 발로 차고 금털 사자가 다투어 으르렁거리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천 개 등불이 이어지고 입마다 뭇 바다의 물결이 용솟음치되, 아침에는 성수(聖壽)를 비는 향화(香火)를 태우고, 저녁에는 재앙을 소멸시키는 심지에 불을 붙이네. 그것도 오히려 부족해서 특별히 도성 안에 정사(精舍)를 짓고 세상 밖에서 도승(道僧)을 맞아 들이니, 푸른 산 흰 구름에서 몸을 떨치고 나와 도성의 시끄럽고 번화한 속에서 법을 설하네. 주장자를 치자 바람과 우레가 일고 몽둥이로 치며 큰 소리로 꾸짖자 우박이 흩어져서 죽고 살리기를 자유롭게 하며 머리와 머리 끊어지네. 몇 해 전 국난(國難) 때문에 군신이 지원(至願)을 말하여 여러 종(宗)을 모아다가 하루 건너서 불사(佛事)를 하니 염불하고 창신(唱神)하는 소리가 간절하여 산악이다 진동하고, 머리와 손가락 태우는 연기가 흩어져 해와 달이 빛을 잃네. 정성스럽고 부지런한 고행이 이다지도 지극하니 그 보응(報應)과 섭호(攝護)가 끝없을 것이다.’ 하자, 두 손이 말하기를 ‘고금에 부처를 신봉함이 양(梁) 나라가 으뜸이었는데 어찌 속히 망했는가?’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지금 주상께서 몸소 검박하시고 아랫사람에게 후하시다.’ 하자 두 손이 바로 깜짝 놀라 얼굴빛을 고치고 자리를 피해 꿇어앉아 말하기를, ‘대부는 더 말씀 마오. 이 한 마디 말로 족히 태평성대의 지극한 정치를 아름다움을 알겠소. 무릇 정사의 밝고 공평함은 모두 검박한 데서 비롯하니, 검박하면 풍속이 후해지므로 어찌 하늘이 돕지 않으며, 어찌 국운(國運)이 길지 않으리오. 아까 저희들이 횡설수설 지껄여 스스로 나라의 누(累)만 드러냈을 뿐이오.’ 하니, 대부가 말하기를, ‘두 분은 들으시오. 나는 옛일을 표준으로 삼네. 옛날에 주실(周室)은 충후(忠厚)하여 8백 년을 누렸고, 한 무제(漢武帝)는 무명옷에 가죽신을 신었으며, 그 신하들은 돈후(敦厚)한 장자(長者)들이 많아서 국조(國祚)가 끝이 없었고, 당 문황(唐文皇 태종)은 검박을 숭상하여 대궐 하나 지으려다가 진(秦) 나라를 거울 삼아 중지했고, 그때 방현령(房玄令)이 정치가 편안하다고 방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통(國統)을 3백여 년 동안 드리웠네. 거룩한 본조(本朝)는 옛날에 없던 풍화(風化)로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하늘의 도(道)를 즐겨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겨 이에 보전되니, 만물이 탈나지 않고 백성이 태평하네. 감탄해도 부족하여 그 뜻을 거듭하여 노래를 지으리. 「멀리 요순(堯舜) 때부터 아래로 당송(唐宋)에 이르기까지, 문(文)과 질(質)의 연혁(沿革)은 달랐으나, 모두 사치로 망하고 검박으로 흥했네. 서쪽 유경(柳京)은 음란함으로 뒤엎어지고, 북녘 송도(松都)는 사치해서 유이(流移)했네. 서도를 유경(柳京)이라 부른다. 빛나는 강도는 덕의 터전, 천명(天命)을 따라 큰 나라를 섬겨 풍속이 순후하네, 아아, 만 년에 태평한 가운데 위태로움을 잊지 않으리.」’ 하였다.” 하였다. 사면이 바다로 둘려 있고, 토지가 기름지다 정이오(鄭以吾)의 아기(衙記).

[산천]고려산(高麗山) 부의 서쪽 15리에 있으니, 진산(鎭山)이다. 마니산(摩尼山)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 고려 고종 46년(1259)에 교서랑(校書郞) 경유(景瑜)의 말을 좇아서 이 산 남쪽에 이궁(離宮)을 지었다. 전등산(傳燈山) 부의 남쪽 32리에 있다. 혈굴산(穴窟山) 부의 서쪽 10리에 있다. 진강산(鎭江山) 진강현(鎭江縣)에 있다. 길상산(吉祥山) 부의 남쪽 30리에 있으니, 주위가 13리요, 목장(牧場)이 있다. 망산(網山)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송악산(松岳山) 부의 북쪽 1리에 있다. 화산(花山)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봉두산(鳳頭山) 바로 하음성산(河陰城山)인데, 부의 북쪽 16리에 있다. 별립산(別立山)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대모성산(大母城山)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바다 부의 남쪽에 있다. 갑곶나루[甲串津]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인화석진(寅火石津) 부의 서쪽 32리에 있으니, 교동(喬桐)으로 다니는 길목이다. 예전에 정자가 있었다. ○ 남익문(南益文)의 시에, “예전에 경치 좋기로는 악양루(岳陽樓)를 들었더니, 지금 이 정자에 이르니, 팔경(八景)이 더욱 좋구나. 인석나루에 조수는 옥으로 만든 구기[玉斗]를 깨뜨린 듯, 각산(角山)에 석수(汐水)를 당해 오두(鰲頭)에서 춤추네. 은관(銀關)에 험한 것을 설치하니, 천연적인 참호(塹壕)가 되었고, 정포(井浦)로 못을 삼으니 땅 귀퉁이를 막았네. 더위에 시달려 발걸음 멈추니, 구경거리 많구나. 어느 날 다시 와서 맑은 놀이 해 볼거나.” 하였다. 가릉포(嘉陵浦) 부의 서쪽 32리에 있는데, 근원이 마니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큰 제방이 있는데, 길이가 20척이다. 하포(蝦浦) 부의 북쪽 12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청포(大靑浦) 부의 남쪽 13리에 있는데, 근원이 혈굴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염점포(鹽岾浦) 부의 서쪽 22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조산포(造山浦) 부의 남쪽 5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말오을포(末吾乙浦) 부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그 근원이 둘이 있어 하나는 고려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혈굴산에서 나와 합쳐져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승천포(昇天浦) 부의 북쪽 19리에 있다. 매도(煤島) 부의 서쪽에 있는데, 예전 구음도(仇音島)로 주위가 60리요, 섬에 광박석(廣博石)이 있어 국용(國用)으로 삼는다. 목장이 있다. 저천(猪川) 부의 남쪽 5리에 있는데, 근원이 혈굴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조산포로 들어간다. 두모천(豆毛川) 부의 서쪽 20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말을포로 들어간다. 동락천(東洛川) 부의 남쪽 1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조산포로 들어간다. 고려천(高麗川) 부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염점포로 들어간다. 마장천(馬場川) 부의 남쪽 13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둘이 있어 하나는 혈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진강산에서 나와 합류하여 대춘포(大春浦)로 들어간다. 오리천(吾里川) 부의 서쪽 10리에 있는데, 근원이 고려산에서 나와 북으로 흘러 하포로 들어간다. 주문도(注文島) 매도 서쪽 7리에 있는데, 정포영전(井浦營田)이 있고 또 목장이 있다. 보음도(甫音島) 주문도 서쪽에 있는데 주위가 17리다. 좌도수군 영전(左道水軍營田)이 있고 또 목장이 있다. 말도(末島) 부의 서쪽 5리에 있는데, 주위가 43리다. 금음북도(今音北島) 부의 동쪽 16리에 있는데, 염분(鹽盆)이 있다. 미법도(彌法島) 금음북도 북쪽 2리에 있는데, 목장이 있다. 장봉도(長烽島) 진강현(鎭江縣)에 있는데, 주위가 25리요, 목장이 있다. 신도(信島) 부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목장이 있다. 거도(居島) 신도 서쪽에 있다. 소도(少島) 보음도 동쪽 3리에 있다. 오두두지(吾豆頭池) 부의 남쪽 15리에 있으니, 깊이가 10척이다. 와초지(瓦草池) 대모성(大母城) 아래에 있다.

[토산]석회ㆍ청란석(靑斕石) 모두 마니산에서 난다. 홍어ㆍ쌀새우[白蝦]ㆍ조개ㆍ토화(土花)ㆍ굴[石花]ㆍ낙지[絡締]ㆍ소라ㆍ부레[魚鰾]ㆍ숭어ㆍ중하(中蝦)ㆍ맛소개[竹蛤]ㆍ파리[海䑋]ㆍ참조기[黃石首魚]ㆍ게ㆍ청게ㆍ천초(川椒)ㆍ감[柹]ㆍ사자족애(獅子足艾)ㆍ소금

[불우]전등사(傳燈寺) 길상산(吉祥山)에 있는데, 원 나라 지원(至元) 19년(1282)에 충렬왕의 원비(元妃) 정화궁주(貞和宮主) 왕씨(王氏)가 중 인기(印奇)에게 부탁하여 바다를 건너 송(宋) 나라에 들어가 대장경(大藏經)을 인쇄해와 이 절에 보관했다. ○ 이색의 시에, 납극(蠟屐) 신고 산에 오르니 흥이 절로 맑은데, 전등사 늙은 중이 나의 행차를 인도하네. 창 밖에 먼 산은 하늘 끝에 벌려 있고, 누(樓) 밑에 부는 바람 물결 쳐 일어나네. 성력(星歷)은 오태사(伍太史)가 까마득한데,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三浪城)에 참담하여라. 정화궁주 원당(願幢)을 뉘라서 다시 세울 건가. 벽기(壁記)에 쌓인 먼지 객의 마음 상하네.” 하였다. 선수암(善首菴)ㆍ정수암(淨水菴) 모두 마니산에 있다. 국정사(國淨寺)ㆍ적석사(積石寺)ㆍ월명사(月明寺) 모두 고려산에 있다. 수월사(水月寺)ㆍ미륵사(彌勒寺) 모두 하음성산에 있다. 사왕사(四王寺) 송악산에 있다. 덕장사(德藏寺) 진강산에 있다. 홍릉사(弘凌寺)ㆍ백련사(白蓮社) 모두 고려산에 있다.

사단 참성단(塹城壇) 마니산 꼭대기에 있다. 돌을 모아 쌓았는데, 단의 높이는 10척이며, 위는 모가 나고 아래는 둥근데, 위는 사면이 각각 6척 6촌이요, 아래 둥근 것은 각각 15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다.” 하였다. 본조에서 전조(前朝)의 예전 방식대로 이 사단에서 별에 제사지냈는데, 아래에 재궁(齋宮)이 있다. 우리 태종(太宗)이 잠저 때 대언(代言)이 되어 여기서 재숙(齋宿)했다.

○ 이색의 시에, “향 피우고 맑게 앉아 시 읊으며 머리를 갸우뚱하니, 한 방이 비고 밝은데, 작기가 배[舟] 같네. 가을빛을 가장 사랑하여 지게문 열어 들이고, 다시 산 그림자 맞아들여 온 뜰에 머물게 하네. 몸은 가뿐하여 때[垢]가 없으니 봉황을 탈 생각하고 마음은 고요하여 기심(機心)을 잊었으니, 갈매기를 가까이 하려 하네. 단(丹)을 만들어 신선되기 구할 필요 없다. 육착(六鑿)만 제거하면 바로 14천유(天遊)일세.”

○ “무릉(茂陵)은 무슨 일로 신선 찾기에 그다지 애썼는가. 다만 봉래(蓬萊)만은 또한 혹 그럴 듯도 하나, 산은 구름과 같이 떴으니 자연 끝이 없고, 바람은 배를 불어 가니 앞설 이 없네. 금인(金人)의 한 방울 이슬은 소반 가운데에 떨어지고, 청조(靑鳥)는 바다 위 하늘로 외로이 날아가네. 참호[塹城]에서 제사하여, 그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태평스러운 해를 누리게 하면 어떠하랴.”

○ “산하는 험하기 이와 같으니, 장한 우리나라일세. 절정에 구름 기운 흐르고, 높은 벼랑에 고목나무를 굽어보네. 바람을 향해 휘파람 길게 부니, 울리는 소리 암곡(巖谷)에 진동하네. 소문(蘇門) 놀이 계속하려 하니, 석수(石髓)는 지금 한창 푸르렀으리. 해와 달은 쌍 수레바퀴가 되고, 우주는 한 칸 집이 되었네. 이 단이 천연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 모르겠네, 정녕 누가 쌓은 것이냐. 향 냄새 올라가니 별은 낮아지고 축문[綠文]이 들어가니, 기운이 비로소 엄숙해지네. 다만 신(神)이 내린 은혜에 보답할 뿐이지. 무엇 때문에 스스로 복을 구하겠는가.”

○ “긴 바람 나에게 불어 요대(瑤臺신선이 사는 곳)에 오르니, 넓은 바다 먼 하늘이 만 리나 터졌네. 옷을 털고 이어 발 씻을 것없다. 신선의 피리와 학이 공중에서 내려오는 듯하네.”

○ “만 장(丈)이나 되는 현단(玄壇 도관(道觀))에 밤 기운이 맑은데, 녹장(綠章)을 아뢰자마자 담담히 티끌 생각 잊었네. 돌아가는 말 안장에 장생(長生)할 복을 가득 실어다, 우리 님께 바쳐 태평 성대 이룩하려네.”

○ 고려 이강(李岡)의 시에, “마음은 고요하고 몸은 한가하여 뼈가 신선이 되려 하니, 멀리 인간 일 생각하며 정히 망연하구나. 제사 지내는 신비한 자리는 중흥(中興)한 뒤이요, 돌로 쌓은 영단(靈壇)은 태고(太古) 전의 일일세. 이미 눈은 천리 밖 땅을 보게 되었고, 황홀히 몸은 구중(九重) 하늘에 있는 듯해라. 이번 걸음엔 짝도 없이 서로 속이는 것 같으나, 환도(還都)한 첫 해를 누가 만났는가.” 하였다. 산천제단(山川祭壇) 마니산 초성단(醮星壇) 아래에 있다. 사직단(社稷壇)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갑곶나루에 있다. 여단(厲壇) 부의 북쪽에 있다. 진강신사(鎭江神祠) 진강산에 있다. 하음신사(河陰神祠) 성산(城山)에 있다.

[능묘]고려 고종릉(高宗陵) 부의 서쪽 6리에 있는데, 이름은 홍릉(弘陵)이다. 원덕태후릉(元德太后陵) 부의 남쪽 23리에 있는데, 고려 고종의 비로 이름은 곤릉(坤陵)이다. 고려 희종릉(熙宗陵) 부의 남쪽 21리에 있는데, 이름은 석릉(碩陵)이다. 순경태후릉(順敬太后陵) 부의 남쪽 24리에 있는데, 고려 원종비(元宗妃)로 이름은 가릉(嘉陵)이다. 이규보(李奎報) 묘 진강산 동쪽 기슭에 있다.

[고적]진강 폐현(鎭江廢縣) 본섬 안에 부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에 있다. 본래 고구려 수지현(首智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수진(守鎭)으로 고쳐서 해구군(海口郡)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그대로 예속시켰다. 하음 폐현(河陰廢縣) 본섬 안에 부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다. 본래 고구려 동음내현(冬音奈縣)이었는데, 아음(芽音)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호음(沍陰)이라고 고치고 해구군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그대로 예속시켰다가 뒤에 개성현(開城縣)에 예속시켰고, 뒤에 다시 도로 강화에 예속시켰다. 해령향(海寧鄕) 진강현 서쪽 5리에 있다. 삼랑성(三郞城) 전등산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 한다. 고궁성(古宮城) 송악리(松岳里)에 있는데, 부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고려 고종 때 쌓은 것으로 내외의 성을 모두 흙으로 쌓았는데, 외성 주위는 3만 7천 76척이요, 내성 주위는 3천 8백 74척이다. 고려 산성(高麗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주위가 1만 9천 3백 72척이다. 개골동(蓋骨洞) 부의 남쪽 10리에 있으니, 고려 고종 13년(1226)에 골 안에 세조(世祖)와 태조(太祖)를 이장했다. 용장사(龍藏寺) 옛터는 부의 서쪽 4리에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선위(禪位) 받을 때에, 충정왕(忠定王)이 이 절에서 손위(遜位)했다. 선원사(禪源寺) 옛터는 부의 남쪽 8리에 있는데, 지금은 장원서(掌苑署) 과원(果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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