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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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畿內)
4.용릉부(舂陵府)는 남양(南陽)이고,
河南省(領九府。四直隸州。六州。九十七縣)
○南陽府(名宛山。領二州。十一縣)南陽縣(村衍附府)南召(云陽附府)鎮平(課陽)唐縣(西淮)泌陽(慈邱)桐柏(俊陽)鄧州(臨湍)內鄉(菊潭)新野(漢廣)浙川(丹水)裕州(方城)舞陽(定陵)葉縣(汝墳)-地輿名目(一十九省)
零陵郡,中國古郡名。西漢元鼎六年(前111年)分桂陽郡而置。其地大致相當於今湖南省永州市及邵陽市、衡陽市的一部分,廣西桂林市一帶。治所在零陵縣(今廣西興安縣北)。東漢移治泉陵縣。唐废。
漢武帝元鼎六年(前111年),發兵滅南越國,桂陽郡地界向南擴展,並增置數縣。於是分泠道以西諸縣置零陵郡。宣帝元康元年(前65年),長沙王子侯國鍾武別屬零陵郡。其後鍾武侯國遷往江夏郡,但零陵郡仍保留鍾武縣,故漢書地理志有兩鍾武。成帝綏和元年(前8年),零陵郡領七縣、三侯國:零陵縣、泉陵侯國、泠道縣、營道縣、營浦縣、鍾武縣、夫夷侯國、都梁侯國、洮陽縣、始安縣。郡治在零陵縣。有21092戶,139378人。元帝元始五年(5年),長沙王子侯國湘鄉、昭陽、承陽別屬零陵郡。東漢時零陵郡移治泉陵。王莽改零陵為九疑。順帝永建三年,改鍾武為重安侯國。獻帝時,荊州刺史劉表增置觀陽縣(一作灌陽縣)。
西晉太康三年(282年),零陵郡領泉陵、祁陽、零陵、營浦、洮陽、永昌、觀陽、營道、舂陵、泠道、應陽十一縣。隋初廢,置永州總管府,改泉陵縣為零陵縣。大業三年(607年)復置零陵郡,領零陵、湘源、永陽、營道、馮乘五縣。唐武德四年(621年)平蕭銑,復置永州。天寶元年(742年),改永州為零陵郡,領零陵、湘源、祁陽、灌陽四縣。乾元元年(758年)復為永州。
남양(南陽)得名關於南陽的得名,有這樣的文獻記載:
《資治通鑒·周紀五·赧王四十三年》載:「秦置南陽郡,以在南山之南,漢水之北也」;
《元和郡縣圖志·山南道二》載:「秦昭襄王取朝地,置南陽郡,以在中國之南而有陽地,故曰南陽」;
《釋名·釋州國》載:「南陽在中國之南,而居陽地,故以為名也」;
以上記載表明秦置南陽郡時,因具備中國古代方位陽性的雙重特徵,即位於南山(如今的伏牛山)之南,居漢水之北而得名,這一名字一直沿用至今。
「宛」(古代讀音:yuān,現代讀音:wǎn)是南陽最早的地名,宛,即反映了「盆地」的地貌特徵,又反映了它的生態環境。《說文解字》:宛,屈草自履也,從宀、夗聲。其義:①「四方高中央下」,符合南陽西、北、東三面環山,當中低平的盆地地貌特徵;②「屈草自覆」為芳草蓋地,植被蔥綠貌。春秋初期,楚國滅了呂、申兩國。並在這裡建置宛邑,宛之名,即自此而始。其後,朝代更替,這裡曾設置過「宛城」、「宛縣」、「宛州」、「上宛縣」等,所以,「宛」便成為「南陽市」約定俗成的簡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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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수원 도호부
◎ 남양 도호부(南陽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당성현(唐城縣)인데, 신라가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쳤고, 고려가 옛이름[唐城]으로 복구하여, 현종(顯宗) 무오에 수주(水州) 임내(任內)에 붙이었다가, 뒤에 인주(仁州)에 옮겨 붙였으며, 명종(明宗) 2년 임진에【곧 송나라 효종(孝宗) 건도(乾道) 8년.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16년 경인에 고을 사람 홍다구(洪茶丘)가 원나라에 벼슬하여 정동행성 우승(征東行省右丞)이 되었으므로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되고, 뒤에 또 강녕 도호부(江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34년 무신에 또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 2년 경술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남양부(南陽府)로 강등되어,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속현(屬縣)이 1이니, 재양(載陽)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수원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화지량(花之梁)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수원(水原) 임내(任內) 쌍부(雙阜)에 이르기 20리, 북쪽으로 안산(安山)에 이르기 10리이다.
호수(戶數)가 4백 87호, 인구가 7백 78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명, 선군(船軍)이 1백 45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6이니, 홍(洪)·송(宋)·방(房)·박(朴)·최(崔)·서(徐)요, 망성(亡姓)이 1이니, 오(吳)이다. 재양(載陽)의 토성이 4이니, 손(孫)·윤(尹)·신(辛)·우(祐)요, 내성(來姓)이 1이니, 서(徐)이며,【안산(安山)에서 왔다. 】속성(續姓)이 1이니, 전(田)이다. 인물(人物)은 첨의중찬(僉議中贊) 경흥군(慶興君) 충정공(忠正公) 홍자번(洪子蕃)·첨의중찬 광정공(匡定公) 홍문계(洪文系)【모두 충렬왕(忠烈王) 때 사람이다. 】·첨의정승(僉議政丞) 남양후(南陽侯) 문정공(文正公) 홍언박(洪彦博)이다.【공민왕(恭愍王) 때 사람이다. 당(唐)에서 재주 있는 젊은이 8인을 보내어 고려에 가서 가르치게 하였는데, 홍(洪)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자손이 대대로 삼한(三韓)4954) 에서 귀하게 되었으므로, 그가 사는 곳을 당성(唐城)이라 하였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바다가 가까와서 기후[風氣]가 일찍 더워지고, 간전(墾田)이 4천 3백 48결(結)이다.【논이 8분의 3이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수수·팥·참깨·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지초이며, 약재(藥材)는 사자발쑥【가장 좋은 것이다. 】·백부자(白附子)·연밥이요, 염소(鹽所)가 44이다. 경석(磬石)이 부(府) 동쪽 사나사(舍郡寺[舍那寺])의 서쪽 산에서 난다.【빛이 푸르고 흰 것이 섞이고 문채가 있다. 금상(今上) 9년 정미에 캐서 경쇠를 만들었는데, 소리가 음률에 맞았다. 】어량(魚梁)이 2이다.【주로 민어·송어가 나고, 또 숭어·상어·참치·가물치[加大魚]·조기[石首魚]·큰새우·중새우·곤쟁이[紫蝦]·모시조개[黃蛤]·대합조개[生蛤]·미네굴[土花]·굴[石花]·낙지(落地)가 난다. 】
역(驛)이 1이니, 해문(海門)이요, 관방(關防)이 2이니, 영종포(永宗浦)와【부 남쪽에 있으니,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수어(守禦)한다. 】화지량(花之梁)이며,【부 서쪽에 있으니, 우도 수군 첨절제사(右道水軍僉節制使)가 수어한다. 】봉화(烽火)가 2곳이니, 염불산(念佛山)과【부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 수원(水原) 흥천산(興天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부(本府) 해운산(海雲山)에 응한다. 】해운산(海雲山)이다.【부 북쪽에 있다. 안산(安山) 무고리(無古里)에 응한다. 】선감미도(仙甘彌島)【화지량(花之梁) 서쪽 수로(水路) 2리에 있으니, 둘레가 5리이며, 소를 놓아 먹인다. 】대부도(大部島)【화지량 서쪽 2리에 있다. 길이 30리요, 너비가 15리이니, 좌도 선군영(左道船軍營) 밭이 1백여 결(結)이 있으며, 나라의 말 4백 18필을 놓아 먹이는데, 염부(鹽夫) 4호가 살면서 돌보게 한다. 】소우도(小牛島)【대부도 서쪽 5리에 있으니, 둘레 15리이며, 염부(鹽夫) 2호가 있다. 】영흥도(靈興島)【소우도 서쪽 7리에 있다. 길이 25리, 너비 15리이며, 염부(鹽夫) 5호가 있다. 】소홀도(召忽島)【영흥도 서쪽 30리에 있다. 예전에는 소물도(召物島)라 하였으며, 둘레가 20리이나, 밭이나 사는 사람이 없다. 】덕적도(德積島)【소홀도 남쪽 60리에 있다. 예전에는 인물도(仁物島)라 하였으며, 둘레가 15리인데, 나라의 말 2백 57필을 놓아 먹인다. 】우음도(亐音島)【부 북쪽 수로(水路) 2리에 있다. 둘레 13리이며, 밭 5결이 있는데, 부의 사람들이 드나들며 농사를 짓는다. 】새곶이[士也串]【나라의 말을 놓아 먹인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
동쪽으로 수원부(水原府) 경계까지 24리요, 남쪽으로 같은 부 쌍부현(雙阜縣) 경계까지 20리요, 서쪽으로 화량(花梁)까지 41리요, 북쪽으로 안산군(安山郡) 경계까지 43리며, 서울까지 1백 5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 당성군(唐城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당은(唐恩)으로 고치었다가, 고려 초년에 예전 이름을 회복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수주(水州)에 속했다가 뒤에 옮겨 인주(仁州)에 붙이었고, 명종(明宗)이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16년에 고을 사람 홍다구(洪茶丘)가 원(元) 나라에 벼슬하여 정동행성 우승(右丞)이 되었으므로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하고, 뒤에 승격하여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로 만들고, 또 승격하여 익주목(益州牧)으로 만들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을 없앨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강등하여 부를 만들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치었다.
[산천]비봉산(飛鳳山) 부 동쪽 7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염불산(念佛山) 부 서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청명산(晴明山) 부 서쪽 22리 되는 곳에 있다. 절명산(絶命山) 부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해운산(海雲山) 부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사나산(舍那山) 부 동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바다 부 서쪽 54리 되는 곳에 있다. 수홀도(愁訖島) 부 서쪽 41리 되는 곳에 있다. 우음도(亏音島) 부 서쪽 45리 되는 곳에 있다. 선감미도(仙甘彌島) 부 서쪽 5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대부도(大部島) 부 서쪽 53리 되는 곳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영흥도(靈興島) 대부도 서쪽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소홀도(召忽島) 성종(成宗) 17년에 안산군(安山郡)에 옮겨 붙였다. 『신증』지금 임금 14년에 안산(安山)으로부터 도로 남양부에 붙였다. 덕적도(德積島) 성종(成宗) 17년에 인천부(仁川府)에 옮겨 붙였다. 독갑도(禿甲島) 덕적도 남쪽에 있으며 주위가 25리이고 목장이 있다. 승황도(昇黃島) 독갑도 서남쪽에 있으며 주위가 45리이고 목장이 있다. 풍도(楓島) 성종(成宗) 17년에 수원부에 옮겨 붙였다. 신야곶도(新也串島) 성종(成宗) 17년에 인천부에 옮겨 붙였다. 이측도(伊則島) 독갑도 동쪽에 있으며 주위가 35리이고 목장이 있다. 제부도(濟扶島) 선감미도(仙甘彌島) 남쪽에 있다. 탄모로도(炭毛老島) 소우도(小牛島) 남쪽에 있다. 오질도(於叱島) 부 서쪽에 있고 목장이 있다. 소우도(小牛島) 대부도 서쪽에 있다. 선협도(仙俠島) 독갑도 서쪽에 있다. 입파도(立波島) 풍도 동쪽에 있다. 구을압도(仇乙鴨島) 신야곶도(新也串島) 서쪽에 있다. 결오리도(結吾里島) 오질도(於叱島) 북쪽에 있다. 사나천(舍那川) 부 동쪽15리 되는 곳에 있다.
[토산]경석(磬石) 부 동쪽 사나사(舍那寺) 서쪽에서 나는데 돌빛이 푸르고 흰 것이 서로 섞이어 무늬가 있다. 본조 세종(世宗) 9년에 캐어서 경쇠를 만들었더니 소리가 음률에 맞았다. 정옥사(碇玉沙)ㆍ소금[鹽]ㆍ감[?] 국원(國苑)에서 난다. 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전어(錢魚)ㆍ준치[眞魚]ㆍ조기[石首魚]ㆍ참조기[黃石首魚]ㆍ호독어(好獨魚)ㆍ민어(民魚)ㆍ농어[?魚]ㆍ홍어(洪魚)ㆍ뱅어[白魚]ㆍ은어[銀口魚]ㆍ오징어[烏賊魚]ㆍ낙지[絡締]ㆍ조개[蛤]ㆍ가무락조개[黃蛤]ㆍ토화(土花)ㆍ굴[石花]ㆍ소라(小螺)ㆍ해파리[海?]ㆍ대하(大蝦)ㆍ중하(中蝦)ㆍ쌀새우[白鰕]ㆍ곤쟁이[紫蝦]ㆍ게[蟹]ㆍ청해(靑蟹)ㆍ부레[魚膠]ㆍ맛조개[竹蛤].
[불우]사나사(舍那寺) 사나산(舍那山)에 있다. 봉림사(鳳林寺)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홍법사(弘法寺) 청명산(晴明山)에 있다. 장생사(長生寺) 절명산(絶命山)에 있다.
[고적]고당성(古唐城) 부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고성(古城)이 있는데 둘레가 2천 4백 15척이고 높이가 10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당 나라에서 재사(才士) 여덟 사람을 보내어 와서 고려 사람을 가르쳤는데 홍(洪)이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자손이 대대로 귀히 되어 사는 곳을 당성(唐城)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지금은 과원(菓園)이 되었는데 장원서(掌苑署)에 속하였다. 석산성(石山城) 부 서쪽 33리 되는 곳에 있으며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5척이다 재양폐현(載陽廢縣) 부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예전 안양현(安陽縣)이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주(水州)에 붙이고 또 인주(仁州)에 붙였다가 뒤에 내속되었다. 분황부곡(奔黃部曲) 부 동남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양등간처(陽等干處) 부 북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망해루(望海樓) 고당성(古唐城)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남양부(南陽府)를 삼국 시대에는 당성(唐城)이라 이름하였는데 본조에 들어와서 중세(中世) 이래로는 익주(益州)가 되었다. 익주의 홍씨(洪氏)가 태조(太祖)가 처음 일어날 때에 보익한 공이 있는데 은열(殷悅)이라는 이가 그 사람이다. 대대로 대족(大族)이 되었고 강도(江都) 말년에 이르러 남양군(南陽君)이 권신(權臣)을 죽이고 정치를 왕실로 돌려보냈으며 문예부주(文睿府主)를 낳아서 두 조정의 태모(太母)가 되었으므로 승격하여 부를 만들었다. 대개 산천이 신령하고 이상한 기운이 뭉치어 아름다운 상서가 되어서 억만년 한없는 왕업의 기초가 되었으니 참으로 다른 고을들과 평등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을을 지키는 신하를 중하게 여기고 또한 반드시 삼가 선택하였다. 해정어수(海亭漁叟) 정후(鄭侯)가 와서 생각하기를, ‘날[日]은 나오고 들어가는 것이 있고 물은 근원과 끝이 있는 것이어서, 비록 멀고 큰 것이라도 그것을 잘 볼 줄 아는 자는 모두 그 난 곳과 근원을 알거든, 하물며 군상(君上)이 나온 곳(어머니의 집)이겠는가. 신하된 자가 진실로 마땅히 공경하여 감히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내가 영광스럽게 명령을 받아서 임금이 출생한 땅을 지키는 신하가 된 것이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서 오직 공경하여 덕으로써 솔선하기를 힘썼으니, 그 아전을 감화시키고 감히 형벌을 가하지 않으며, 그 백성에게 은혜롭게 하고 감히 위엄을 베풀지 않았다. 일 년 만에 크게 화평해져서 이익이 되지 않음이 없고, 모든 해가 제거되었다. 이에 고을 읍내에 누각을 지어 백성들의 우러러보는 것을 장려하게 하며, 찾아오는 빈객과 사신을 즐겁게 하였다. 누의 이름을 써 붙이기를 ‘망해(望海)’라 하고 그 아들 국자생(國子生) 이(?)를 시켜 내 글을 받아서 기(記)를 삼게 하면서 말하기를, ‘고을에 예전에는 못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버려두고 수축하지 않아서 위에는 풀이 우거지고 아래는 지적지적하여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그 가운데에 섞이어 경작하고 있다. 고을 사람들이 서로 못의 용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매 그 뒤에 못이 말랐다고 전하나 참으로 그러한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정후가 이른 뒤에 명하여 못을 파서 수축하였더니 이날에 검은 구름이 갑자기 동남쪽에서 일고 바람과 우레가 따라 이르렀다.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용의 꼬리가 꿈틀꿈틀하며 못에 닿아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못 물이 사흘 동안을 끓어 흰 기운이 무럭무럭 올라서 그치지 않으니 늙은이와 어린이가 탄식하고 이상하게 여기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마음의 작용이란 큰 것이다. 한 번 그 마음을 정하면 천하도 하잘 것이 없는 것이다. 정후(鄭侯)의 공경하는 마음이 멀리 통달하여 간격이 없으므로, 밝은 곳에서는 사람이 화합하고 어두운 곳에서는 용같은 물(物)이 감동되었으니, 이 누각이 작은 것쯤이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는가. 그러므로 먼저 고을의 고사(故事)를 말하고 다음에 용이 돌아온 사유를 기록하여 뒷사람에게 고하노라. 정후의 이름은 을경(乙卿)이요 자(字)는 선보(善輔)이며, 재간과 능력으로 세상에 쓰여졌다.’ 하였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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