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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畿內]5.광릉부(廣陵府)는 양주(楊州)이고

한부울 2011. 3. 15. 21:21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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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畿內) 

5.광릉부(廣陵府)는 양주(楊州)이고,

江南省(舊名南京)(分江蘇八府。三直隸州。三小州。六十二縣。分安徽八府五直隸州。四小州。五十縣)。

揚州府(名維楊)(名廣陵。領二州。六縣)江都(邦溝。附府)甘泉(與縣。附府)儀徵(真州)高郵州(臨澤)興化(白塗)寶應(安宜)泰州(蒲濤)東臺-地輿名目(一十九省)

 


東都為複都制體系下「位於東方的都城」的意思。複都制

 

中國

西周時,周成王在國都鎬京(今西安市)以東的雒邑(今洛陽市)興建東都,稱為成周,為西周兩都之一。犬戎入鎬後,周平王遷都至成周,雒邑成為周室唯一國都。在定都長安(又稱為「西都」)的朝代,洛陽則被雅稱為東都。東漢班固的《兩都賦》中,有《東都賦》描繪東都洛陽。其後,隋朝與唐朝置都長安,洛陽成為陪都,被稱為「東京」或東都。

五代十國時的南唐的都城為金陵(現在的南京市),廣陵(現在的江蘇省揚州市)為陪都,廣陵亦被稱為東都廣陵府。

 

日本

在日本,江戶時代的江戶城曾被雅稱為東都。

 

越南

在越南,1397年(胡朝時期)以後,昇龍城(今河內市)被改稱「東都」,「西都」則為「清化」。

首都

永曆十五年(1661年),鄭成功在台灣建立明鄭政權,改赤崁地方為東都明京(後改為東寧,即今台南市所在之地)。

關聯項目

1.複都制

2.北京 (消歧義) - 東京 (消歧義) - 南京 (消歧義) - 西京 - 中京 - 上京

3.北都 - 東都 - 南都 - 西都 - 中都 - 上都


揚州府,

明初改維揚府置,治江都縣(今江蘇揚州市),屬京師,永樂後屬南直隸。清轄境相當今江蘇省寶應縣以南、長江以北,東台市以西、儀征市以東地。當運河交通衝要,為明清兩淮鹽運中心。1912年廢。


在明代,揚州府是今江蘇長江以北僅有的2個府之一(另一個是淮安府),下轄高郵州、泰州、通州3州和江都縣、甘泉縣、儀真縣(今儀征市)、寶應縣、興化縣、泰興縣、如皋縣和海門縣8縣,轄區範圍基本上相當於今日揚州市、泰州市、南通市以及鹽城市南部。


清代,揚州府歸屬新成立的江蘇省,並且分出通州直隸州(及如皋縣、泰興縣)和海門直隸廳,範圍有所收縮,下轄高郵州、泰州2州和江都縣、甘泉縣、儀征縣(今儀征市)、寶應縣、興化縣、東台縣(分泰州東北部新設)6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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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양주 도호부(楊州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인데,【또는 북한산(北漢山)이라 한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취하여, 그 25년 신미에【곧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원년.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도읍을 옮기어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20년 을묘에【곧 송나라 폐제(廢帝) 원휘(元徽) 3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싸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되매, 이 해에 그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기었다. 그 뒤 79년, 신라 진흥왕(眞興王) 13년 계유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취하고, 15년 을해에 왕(王)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이르러 국경[封彊]을 정하였며, 17년 정축에【곧 진(陳)나라 고조(高祖) 영정(永貞) 원년.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14년 병신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고려가 양주(楊州)로 고치어,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는데, 양주 좌신책군(楊州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 우신책군 절도사(海州右神策軍節度使)와 더불어 이보(二輔)를 삼았다. 현종(顯宗) 3년 임자에 이보(二輔)와 십이절도사(十二節度使)를 폐하여 안무사(安撫使)로 고치고, 9년 무오에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숙종(肅宗) 9년 갑신에【곧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으며,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곧 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부치(府治)를 동촌(東村) 한골[大洞里]4928) 에 옮겨, 다시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4년 을해에 부(府)로 승격시켜 부사(府使)를 두었고, 정축에 또 부치(府治)를 견주(見州) 옛터로 옮겼으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속현(屬縣)이 3이다. 견주(見州)는 본래 고구려의 매초현(賣肖縣)인데, 신라가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견주(見州)로 고치어,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별호(別號)는 창화(昌化)이니,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사천현(沙川縣)은 본래 고구려의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견성군(堅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고려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농양현(農壤縣)은 본래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가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풍양현(豐壤縣)으로 고쳐,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포주(抱州)에 옮겨 붙였으며, 금상(今上) 원년(元年) 기해에 다시 본부(本府)에 붙였다.

삼각산(三角山)【부(府) 남쪽에 있다.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니, 3봉우리가 우뚝 빼어나서 높이 하늘에 들어가 있다. 】오봉산(五峯山)【부(府) 남쪽에 있다. 】천보산(天寶山)【부(府) 동쪽에 있다. 】소요산(逍遙山)【부(府) 북쪽에 있다. 】양진(楊津)【부(府) 남쪽에 있으니, 곧 한강[漢水]의 남쪽이다. 단(壇)을 쌓고 용왕(龍王)에게 제사지내는데, 봄·가을의 가운뎃달[仲月]에 〈나라에서〉 향(香)·축(祝)을 내리어 제사지낸다. 신라 때에는 북독 한산하(北瀆漢山河)라 칭하고 중사(中祀)에 올렸으나, 지금은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포천에 이르기 18리, 서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22리, 남쪽으로 광주에 이르기 47리, 북쪽으로 적성(積城)에 이르기 83리이다.

건원릉(健元陵)은 우리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을 장사지냈다.【부(府) 남쪽 검암산(儉岩山)의 기슭에 있으니, 자룡[坎山]에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능 남쪽에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능지기[陵直]·권무(權務) 2인과 수호군(守護軍) 1백 호(戶)를 두고, 매호(每戶)마다 밭 2결(結)을 주었으며, 동리에 재궁(齋宮)을 짓고 개경사(開慶寺)라 하여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4백 결을 주었다. 】낙천정(樂天亭)【부(府) 남쪽 황대산(皇臺山) 언덕에 있으니,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다. 우리 태종(太宗)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풍양 이궁(豐壤離宮)【부(府) 동남쪽에 있으니, 곧 풍양현(豐壤縣)의 옛터이며, 또한 태종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

호수(戶數)가 1천 4백 81호, 인구가 2천 7백 26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33명, 선군(船軍)이 1백 32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4이니, 한(韓)·조(趙)·민(閔)·신(申)이요, 내성(來姓)이 5이니, 함(咸)【양근(楊根)에서 왔다. 】·박(朴)【춘천(春川)에서 왔다. 】·홍(洪)【남양(南陽)에서 왔다. 】·최(崔)【수원(水原)에서 왔다. 】·부(夫)【과천(果川)에서 왔다. 】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정(鄭)·예(艾)이다. 견주(見州)의 토성(土姓)이 7이니, 이(李)·김(金)·송(宋)·신(申)·백(白)·윤(尹)·피(皮)요, 사천현(沙川縣)의 토성(土姓)이 1이니, 경(耿)이며, 망성(亡姓)이 4이니, 이(李)·임(任)·송(宋)·허(許)이다. 풍양현(豐壤縣)의 토성(土姓)이 1이니, 조(趙)요, 망성(亡姓)이 4이니, 이(李)·강(姜)·윤(尹)·유(劉)이다. 인물(人物)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한산군(漢山君) 충정공(忠靖公) 조인옥(趙仁沃)이다.【본조(本朝)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 태조 묘정(太祖廟庭)에 배향되었다. 】

땅이 기름지고, 간전(墾田)이 1만 5천 1백 90결(結)이다.【논이 10분의 3이 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메밀·뽕나무요, 토공(土貢)은 느타리[眞茸]와 지초(芝草)이며,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와 잣[松子]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부 북쪽 사천현(沙川縣) 한탄리[大灘里]에 있으니, 하품(下品)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부(府) 북쪽 소요산(逍遙山) 아래에 있고,【중품이다. 】하나는 부(府) 동쪽 도혈리(陶穴里)에 있다.【하품이다. 】

역(驛)이 6이니, 청파(靑坡)·노원(蘆原)·영서(迎曙)·평구(平丘)·구곡(仇谷)·쌍수(雙樹)요, 목장(牧場)이 2이니, 하나는 살고지들[箭串坪]4933) 이요,【부(府) 남쪽에 있으니, 동서가 7리요, 남북이 15리이다. 나라의 말을 놓아 먹인다. 】둘째는 녹양벌[綠楊坪]4934) 이다.【부(府) 남쪽에 있으니, 동서가 5리요, 남북이 12리이다. 중군(中軍)과 좌군(左軍)의 말을 함께 놓아 먹인다. 】봉화(烽火)가 2곳이니, 대이산(大伊山)과【부(府) 동남쪽에 있으니, 북쪽으로 포천(抱川) 잉읍점(仍邑岾)에 응하고, 남쪽으로 가구산(加仇山)에 응한다. 】가구산(加仇山)이다.【부(府) 남쪽에 있으니, 북쪽으로 대이산(大伊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서울 목멱산에 응한다. 】회암사(檜巖寺)【천보산(天寶山) 아래에 있다. 불전(佛殿)과 승료(僧寮)가 수백 기둥이 되며, 승도(僧徒)들이 가리어 대가람(大迦藍)을 삼았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5백 결(結)을 주었다. 절에다 서번(西蕃)의 지공 화상(指空和尙)의 부도(浮屠)를 안치(安置)하였고, 비(碑)가 있다. 】소요사(逍遙寺)【소요산(逍遙山) 허리에 있다. 태종(太宗) 3년 임오에 태조(太祖)가 절 남쪽 행전(行殿)에 머물러, 여러 달을 두고 〈절의〉 온갖 그림을 새롭게 하였으며, 금상(今上) 6년 갑진에 태조(太祖)의 원당(願堂)으로 하여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 50결(結)을 주었다. 】진관사(眞觀寺)【삼각산(三角山) 서남쪽에 있다. 나라에서 수륙재(水陸祭)를 지내며,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승가사(僧伽寺)【삼각산(三角山) 남쪽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 45결(結)을 주었다. 】중흥사(重興寺)【삼각산(三角山) 아래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2백 결(結)을 주었다. 】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1이니, 원평(原平)이요, 현(縣)이 6이니, 고양(高陽)·교하(交河)·임진(臨津)·적성(積城)·포천(抱川)·가평(加平)이다.

【영인본】 5책 617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원평 도호부

○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고양현

○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교하현

○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임진현

○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적성현

○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포천현

○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가평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양주목(楊州牧)

동쪽으로 포천현(抱川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또 같은 현 경계까지 22리가 되기도 하며, 가평현(加平縣) 경계까지는 29리이고, 광주부(廣州府) 경계까지 75리이다. 남쪽으로는 광주 경계까지 67리이고, 또는 82리가 되기도 한다. 서쪽으로는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40리이고, 파주(坡州) 경계까지는 33리이다. 북으로는 적성현(積城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마전군(麻田郡) 경계까지 58리이며,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7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56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 매성군(買省郡)인데, 창화군(昌化郡)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내소(來蘇)라 고쳤다. 고려 초에는 승격하여서 견주(見州)라 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는 양주에 예속하였다. 본조 태조 3년에 도읍을 한양부(漢陽府)- 곧 옛 양주 -에 정한 다음, 부의 관아를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에 옮기고, 강등하여 양주 지사(楊州知事)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승격하여 부(府)로 만들었다. 6년에 또 부치(府治)를 견주 옛터에 옮기고, 그대로 양주라 불렀다.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조 12년에 승격하여서, 목으로 만들고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풍양현(豐壤縣) 주(州) 동쪽 5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골의노현(骨衣奴縣)이다. 신라에서 황양(荒壤)이라 고쳐서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풍덕(豐德)이라 고쳤다. 현종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포천에 예속시켰는데, 본조 세종 원년에 다시 본현에 내속하였다.

[형승]세 영(嶺)이 하늘에 꽂힌 듯하다[三嶺揷天] 이색의 시에, “깍아지른 듯한 세 영이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한데, 가파른 길이 얼어붙어 말이 못 가네.” 하였다.

[산천]불곡산(佛谷山) 주 북쪽 3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삼각산 주 남쪽 39리 지점에 있다. 한성부 조에 자세히 적었다. 도봉산(道峯山)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불암산(佛巖山)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아차산(?嵯山)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수락산(水落山) 불암산 서북쪽에 있다. 주엽산(注葉山) 주 동쪽 35리 지점에 있다. 또 포천현 조에도 적었다. 천마산(天馬山) 주 동쪽 60리 지점에 있다. 천보산(天寶山) 주 동쪽 25리 지점에 있다. 포천현 조에도 적었다. 소요산(逍遙山) 주 북쪽 45리 지점에 있다. 묘적산(妙寂山)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왕방산(王方山) 북쪽 60리 지점에 있다. 또 포천현 조에 적었다. 고령산(高嶺山) 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갈립산(葛立山) 주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금대산(金臺山) 주 남쪽 75리지점에 있다. 검암산(儉巖山) 주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홍복산(弘福山) 주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소라산(所羅山)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차유령(車踰嶺) 주

동쪽 65리 지점에 있다. 벽석령(碧石嶺) 주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석문령(石門嶺) 주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효성현(曉星縣) 주 동쪽 30리 지점에 있는데, 고려 고종 때에 김산(金山) 군사가 풍양 효성현을 침범하자, 관군(官軍)이 산 바깥쪽에서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노원역(盧原驛)까지 추격하였는데, 참수(斬首)한 것이 매우많으니, 우마(牛馬)와 의량(衣糧)을 다 버리고 가버렸다. 전두령(田頭嶺) 주 동쪽 40리 지점에 있다. 추현(槌峴)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 주을동(住乙洞) 주 남쪽 40리 지점에 있다. 녹양평(綠楊坪) 주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양진(楊津)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 광진도(廣津渡)라 하기도 하는데 미진(迷津) 하류이다. 강원도 춘천부 소양강(昭陽江)과 충청도 충주 금탄(金灘)이 합쳐져서 이 나루로 되었다.

대탄(大灘) 주 북쪽 74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영평현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강원도 철원부(鐵原府) 체천(?川)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연천ㆍ영평을 지나 서남쪽 임진으로 들어간다. 풍양천(?壤川) 풍양현 남쪽에 있다. 물 근원이 천마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광진에 흘러든다. 백달천(白達川) 주 동쪽 85리 지점에 있다. 일곡천(一谷川) 주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홍복산에서 나오는데, 남으로 흘러 삼기강(三岐江)에 들어간다. 독포(禿浦) 주 동쪽 67리 지점에 있다. 노지(蘆池) 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사(絲)ㆍ삼ㆍ옥돌 옥돌은 갈립산에서 산출한다. 잣ㆍ송이ㆍ은어.『신증』 녹반(綠礬) 주 서쪽 청송리(靑松里)에서 난다.

[불우]회암사(檜巖寺)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西域) 중 지공(指空)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天竺國) 아란타(阿蘭陀) 절과 같다.” 하였다. 그 뒤에 중 나옹(懶翁)이 절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제자 각전(覺田) 등이 공역을 마쳤다. 집이 무릇 2백 62칸인데, 집과 상설(象設)이 굉장ㆍ미려하여 동방(東方)에서 첫째였고, 비록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목은(牧隱)이 기문을 지었다.

○ 고려 왕자 중 원경(圓鏡)의 글씨가 남루(南樓) 동서 벽과 객실(客室) 서편 다락에 남아 있다. 필중이 이르기를, “대정(大定 금국(金國) 세종의 연호) 갑오년에 서도(西都)가 반역하여 서북 방면 길이 막혔다. 그때 금국 사신이 오니, 춘천(春川)길을 따라서 인도하여 맞아 들였다. 금국 사신이 절에 들자 상설에 예배하고, 모여서 글씨를 보았다. 한 사람은, ‘귀한 분의 글씨이다.’ 하고, 한 사람은, ‘이것은 산인(山人)의 글씨이니, 나물과 죽순을 먹은 기운이 자못 남아 있다.’ 하였다. 중이 옆에 있다가 사실을 알리니, 두 사람이 모두 제 말이 맞았음을 기뻐하고 이에 시를 썼다. ‘왕자는 고량(膏粱) 기운이 반쯤 남았고, 중은 소윤의 흔적이 오히려 남았네. 미친 장지(張芝)와 취한 회소(懷素)는 온전한 골기가 없었다. 이 글씨는 당년에 중된 것이 문득 한이로구나.’ 하였다.” 한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중창기(重創記)에, “우리나라 산수 경치가 천하에 이름이 났으며, 불사로서 그 사이에 있는 것이 또 몇 십 개인지 모르지만, 인사(仁祠) 제도의 극진한 것과 법왕(法王)ㆍ행화(行化)의 체제를 갖춘 것은 회암(檜巖)같은 것이 없다. 옛적 천력(天曆 원 나라 문종의 연호) 연간에 서천박가납제존자(西天博伽納提尊者)가 이 절터를 보고, ‘서천 아란타사 터와 꼭 같다.’ 하고, 또 ‘가섭불(迦葉佛) 때에 벌써 큰 도량이 되었다.’ 하였다. 이에 먹줄을 잡아 측량하여 그 자리를 정할 때에 오래 된 주추와 섬돌을 발견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임시로 집을 덮어서 그 대개를 표시했을 뿐이었다. 얼마 뒤에 현릉왕사보제존자(玄陵王師普濟尊者)가 지공에게 삼산(三山)과 양수(兩水)에 대한 기(記)를 받고, 드디어 여기에 와서 살았다. 이에 크게 창건하고자 하여, 책임을 나누어 맡기고 바쁘게 불연(佛緣)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공역이 반도 못되어서 왕사도 또한 서거(逝去)하였다. 그의 제자 윤절간(倫絶澗) 등이 왕사의 이루지 못한 뜻을 생각하여, 그가 남긴 규모를 계승하여 공역을 마쳤다.” 하였다.

○ 목은 문정공이 기를 쓰기를, “보광전(普光殿) 5칸이 남으로 향했고, 전 뒤에는 설법전(說法殿)이 5칸이다. 또 그 뒤에는 사리전(舍利殿)이 1칸이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이 3칸이다. 정청 동쪽과 서쪽에 방장(方丈)이 두 곳인데 각 3칸이다. 동쪽 방장 동편쪽에는 나한전(羅漢殿)이 3칸이고, 서쪽 방장 서편에는 대장정(大藏殿)이 3칸이다. 보광전 동쪽과 서쪽에서 좌우로 나뉘어, 여러 전이 우뚝하게 섰고, 여러 요사들이 높고 낮게 되었으며, 종루(鐘樓)ㆍ사문(沙門)과 부엌의 장소와 빈객(賓客)의 자리가 질서정연하다. 지붕이 연달아 뻗쳤고, 골마루가 덩굴처럼 돌아서 높고 낮고 아득한 것이 동서를 모르겠다. 무릇 집 지은 것이 2백 62칸이었다.” 하였다.

○ 이로부터 재간(才幹) 좋은 사람이 대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혹 불전을 시작했으나 승료(僧寮)까지는 미처 못했고, 혹 종루는 보수했으나 객실에는 미치지 못하여, 동쪽을 수리하자 서쪽이 벌써 기울고, 남쪽을 고치면 북쪽이 또 상했다. 이는 절이 큰 까닭에 일이 거창했고, 일이 거창한 까닭에 사람이 능히 두루 짓고 다 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나라의 큰 총림이 거의 빈 집이 되었다.

○ 성화(成化 명(明)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임진년 봄에 대왕대비 전하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에게 의지(懿旨)를 전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한 부인으로서 조부의 여음(餘蔭)을 받들어 우리 세조대왕을 돕고, 성자 신손(聖子神孫)을 낳아 길렀다. 이것은 비록 황천(皇天)이 동방(東方)을 돌보신 것이나, 또한 오랜 세대로 덕을 닦은 것이 불법에 근본하였던 것이다. 예부터 자애로운 어미가 그 자손을 보호하고자 하고, 충신이 그 임금의 장수를 빌고자 하면, 오직 삼보(三寶 부처)에 귀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회암은 동국에서 큰 가람(伽藍 절)이다. 세 화상(和尙)이 서로 이어서 개산(開山)하였는데, 세 개의 산과 두 가닥 물 사이라는 이 지공(指空)에서 비롯하였으니, 실상 임금의 장수를 빌고 나라를 복되게 하는 곳이다. 내 들으니, 터 쌓은 것이 견고하지 못하고, 전사(殿舍)의 섬돌을 잡석(雜石)으로 쌓았기 때문에, 창건한 지 오래 되지 않아서 집이 벌써 퇴락하였다 한다. 지금 간각(間閣)의 제도는 옛날대로 하여 고치지 않고, 뜰에 박힌 것은 모두 다듬은 돌로써 바꾸고자 하는데, 공역(工役)을 계산하니 초창하는 것보다 두 배나 된다. 경(卿)도 또한 덕을 심은 인과(因果)가 있었으므로, 공주(公主)와 짝할 수 있었으니, 경은 힘을 다해서 나의 넓은 원심(願心)을 이루게 하라.” 하였다. 현조(顯祖)가 대답하기를, “세상에서 모두 중수(重修)하는 일이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합니다. 재물과 곡식 저축이 많다 하더라도, 진실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금 정양사(正陽寺) 주지(住持) 처안(處安)은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일을 감당할 만한 재질로서, 그를 따를 자가 적습니다.” 하니, 의지(懿旨)로써 허락하였다. 드디어 처안(處安)을 회암사에로 이주(移住)시키고, 재물과 곡식 따위 비용은 내수사(內需司)에서 전적으로 맡아서 모자라는 대로 보급하여 쓰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부원군도 또한 개인의 재산을 내어서 모자라는 것을 제공하였다. 처안이 승도(僧徒)와 속인(俗人)으로서 자원(自願)하는 자를 모집하고, 일한 것을 계산하여 품값을 주도록 아뢰었다. 날마다 만 여명을 사역 시켰으나 감독하지 않아도 저절로 힘껏 하였다. 그 해 월 일에 시작해서 거의 열 석 달을 지나 마쳤다. 전사(殿舍) 칸살은 다시 고친 것이 없고, 난간과 담의 넓고 좁음도 보태거나 줄인 것이 없어도 방문과 문 차면이 더욱 넓어졌고, 단청을 칠하여 더욱 현란하였다. 백여 년 퇴락한 옛절이 일조에 새로운 보찰(寶刹)로 변하게 되었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노송나무 푸르고 돌 기세 완악 한데, 잎 사이 풍우로 공중 기후가 차다. 늙은 중 출정(出定)하여 성색(聲色)을 잊으니, 머리 위에 구슬 같이 세월이 달리는 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손에 익은 여장(藜杖) 짚고 절 찾아가니, 장송(長松)이 바위에 기대어 나지막하네. 산 이름을 중에게 묻지 않고, 문에 걸린 현판에서 큰 글자 본다. 만학(萬壑)에 구름 피니 숲이 더 깊고, 천년 일 아득한데 새 자주 운다. 삼사탑(三師塔)이 칡덩굴 넘어 있어 꼭대기에 오르려니, 마음 더욱 아득하다.” 하였다. 봉선사(奉先寺) 주엽산(注葉山) 광릉(光陵) 남쪽 둔덕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기문에, “봉선사(奉先寺)란 것은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세조 대왕을 위해서 창건한 것이다. 성화(成化) 기원(紀元) 4년에 우리 세조 대왕께서 승하하시니, 여러 신하가 양주(楊州) 땅에서 동쪽으로 30리 지점에 터를 가렸는데, 산은 주엽(注葉)이고 둔덕은 운악(雲岳)이다. 그해 12월에 세조 대왕의 현궁(玄宮)을 받들어 장사하니, 예(禮)대로 한 것이다.” 하였다. 대왕대비께서 의지(懿旨)를 내리기를, “우리 대행대왕께서 몸소 큰 변란을 만나, 백성이 크게 원망하는 것을 바로잡았으니, 성스러운 덕과 높은 공은 동방이 생긴 이래로 비교할 데가 없다. 국가가 불행하여 갑자기 뭇 신민을 버리시니, 아, 애통하다. 옛 제도를 상고하니, 선왕의 능침(陵寢)에는 반드시 정사(精舍)를 설치하였다. 지금 큰일을 마쳤으니, 경들은 절 지을 터를 살펴서 아뢰어라.”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신 정현조(鄭顯祖),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신 한명회(韓明澮), 능성부원군(陵城府院君) 신 구치관(具致寬) 등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능실(陵室) 남쪽에 깊숙한 구역 하나가 있는데, 산이 감돌았고 물이 차서 절 터로서 알맞으므로, 신 현조 등이 아뢰어서 허락을 받았다.

○ 기축년 6월에 짓기 시작하여, 가을 9월에 마쳤다. 칸살을 계산하면 총 89칸이고, 검고 붉은 것을 발라서, 극히 선명하였다. 불전과 승료(僧寮)가 빛나고 넓으며, 방울과 목탁이 바람만 불면 절로 울렸다. 천석(薦席)과 상탑(床榻)이 곱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며, 빗장과 방망이 따위 도구와, 집기 따위도 넉넉하게 구비하여, 여러 사찰 중에 비교될 곳이 없었다. 전지(田地)와 노비ㆍ전곡(錢穀) 등 상주하기 위해 밑천으로 하는 숫자는, 영구히 부처와 중의 공양을 위한 것으로서 별도로 문부(文簿)가 있으므로, 여기에 언급(言及)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해 9월 7일에 세조를 위한 천도(薦度)를 크게 베풀어서 낙성(落成)하였다. 또 의지(懿旨)에 이르기를, “절을 지었으나 능침과는 둔덕이 서로 격했으니, 절 곁에다가 진전(眞殿)을 지어서 하늘에 계신 대행대왕의 혼령도 불법(佛法)에 귀의하게 하여, 저승에서 노니는 데에 이롭게 하라.” 하였다. 이에 절 동쪽에다가 영전(影殿)을 건립하고 숭은전(崇恩殿)이라 이름하였다. 참봉(參奉) 두 사람을 두어서 새벽과 저녁에 배알하게 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헌관을 보내서 능실(陵室)과 같이 예배하였다. 이에 제조 신 정현조 등이 돌아와서 일이 완성됨을 아뢰니, 예종 대왕(睿宗大王)께서 ‘봉선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 들으니, 예부터 왕자(王者)의 일어남이 후(后)의 덕에서 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하(夏) 나라의 도산(塗山)과 주(周) 나라의 태사(太?)의 사적은 경전에 나타났고, 그 일도 빛남이 있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는 우리 세조를 보좌하였다. 잠저에서부터 보위에 오르기까지, 영특한 지략과 과단함으로써 성덕(聖德)에 이바지하였다. 집을 변화시키고, 국가로 만들어서, 큰 명(命)이 붙는 데가 있게 하였다. 사적(史籍)을 살펴도 성덕의 높음과 내조(內助)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우뚝하였다. 비록 도산이 하(夏) 나라를, 태사가 주(周) 나라를 도왔다 하더라도, 우리 대비 전하보다 낫지는 못하리라.

○ 들으니, 산 사람을 섬기는 데에 공경을 다한 자는 반드시 죽은 이를 섬기는 예를 다하고, 처세(處世)하는 가르침을 높이는 자는 반드시 출세(出世)하는 법을 온전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신과 효자가 임금과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능히 그 덕을 온전히 하는 도이다. 우리 대왕대비 전하께서 선왕(先王)을 위해 애통해하는 정성과, 추모하고 기도하는 뜻에 이미 정성과 공경을 다했다. 큰 가람을 묘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창건했고, 삼보(三寶)의 가르침을 펼쳐서, 초승(超昇)하는 편제(便梯)를 일으켰다. 이것은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그 덕을 더욱 온전히 한 것이며, 여러 어진 덕을 겸비한 후비들과 나란히 할 수 있다. 또한 전대 제왕에도 드물게 있는 훌륭한 일이다.

○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종명(鐘銘)〉에, “삼가 생각건대, 세조 승천 체도 열문 영무 대왕 전하(世祖承天體道烈文英武大王殿下)께서는 구오(九五)에 오르시고 금륜(金輪)에 임어(臨御)하시니, 신화(神化)가 미치는 곳에 가까운 데는 편히 여기고 먼 데서는 두려워하였으며, 백성과 만물이 모두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14년이 되어 불행히도 숙연(宿緣)은 다하였고 명수(命數)는 피하기 어려우며, 뭇 신하들은 복이 없어 문득 승하하심을 당하였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효성이 신명(神命)과 통하여, 우러러 호곡하심이 다함없었다. 깊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세상이 끝나도록 영원히 사모하였다. 이에 광릉(光陵) 곁에다가 큰 절을 영건(營建)하여 ‘봉선사’라 이름하고, 유사에게 큰 종을 주조(鑄造)하도록 명하였다. 해당 관원이 왕의 뜻을 받들고 이에 부씨(鳧氏)를 상고하고, 금과 주석을 헤아려, 여섯 가지 재료를 형성하였다. 본[模範]이 이루어질 무렵에 신에게 명(銘)을 짓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니, 종이라는 기물이 쇠로 된 것 중에서는 가장 크다. 그 소리가 용용(舂容)하여 먼 데는 놀라게 하고 가까운 데는 두렵게 하며, 그 묘함이 위로는 삼천(三天)까지 통하고 아래로는 육도(六塗)를 겸한다. 타왕(?王)이 윤회(輪回)를 받고 꿈에도 종치기를 원했고, 제파(提婆)가 두번 울려서 크게 진교(眞敎)를 일으켰다. 인연 공덕(因緣功德)을 어찌 모두 말하랴. 지금 이 종으로써 육부(六府)를 깨우치니, 어찌 특히 도려(道侶)가 깊은 각성(覺醒)을 말하며, 아득한 무리가 고뇌(苦惱)를 그칠 뿐이리요. 반드시 아득한 현궁(玄宮)에도 통하여, 좌우에 들리면, 돈연(頓然)히 불지(佛智)를 더하여, 피안(彼岸)에 속히 오를 것이다. 하물며, 우리 세조대왕은 성한 덕과 높은 공이 만고에 빛나고,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의 근본에 보답하고 영원히 추모하는 정성이 천지와 함께 다함이 없음에랴. 이러한 바를 종정(鐘鼎)에 붙여서 영원히 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삼가 절하며 머리 조아리고 명(銘)하기를, “능침 곁에다 보찰(寶刹) 지으니, 금벽(金碧)이 우뚝하게 솟아났구나. 법악(法樂)이 인간의 세계와 하늘에 울리니, 묘한 소리 유명(幽明)을 화하게 한다. 그 중에 커다란 방망이 있어, 고래가 투그리듯 소리가 높다. 연모로써 두드려서 울리기만 하면, 귀 있는 자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법은 제진(諸塵)을 떠나지 않고, 삼기(三紀)가 합친 다음 이루어진다. 듣는 것이 있어도 들림이 없고, 마땅히 실(實)을 듣는 본성이 있다. 능히 듣는 자, 어찌 옳으랴. 본래는 실상, 청정(淸淨)뿐이다. 청정하면 때와 더러움 없이 이것을 이름하여 대원경(大圓經)이라 한다. 사람마다 이 이치 갖추어져서, 한 번만 들어도 깨치게 된다. 위로 통함은 아가니(阿伽尼)에게, 옆으로 둘리는 건 항하사(恒河沙)까지 법이 다하면 끝없는 삶의 복리가 이루어진다. 열성(列聖)이 올라서 바로 보니, 모든 형체 있는 것이 삼매에 든다. 삼광(三光)의 돗수가 순리로 되고, 만 백성이 요사(夭死)와 역질이 없다. 진묵검(塵墨劍)이 지나도록 요도(瑤圖)와 함께 나라는 반석 같아 견고하리라. 산이 평지 되고 바다는 말라도, 공덕은 마침내 닳지 않으리라.” 하였다. 개경사(開慶寺) 옛날에는 현릉(顯陵) 동쪽에 있었는데, 능침과 가깝다하여 지금은 남곡(南谷)에 옮겼다. 중대암(中臺菴)ㆍ백운암(白雲庵)ㆍ소요사(逍遙寺), 소운암(小雲菴) 아울러 소요산에 있다. 고령사(高嶺寺) 고령산에 있다. 청룡사(靑龍寺)ㆍ망월사(望月寺)ㆍ회룡사(回龍寺)ㆍ원통사(圓通寺)ㆍ영국사(寧國寺) 아울러 도봉산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어느 해에 산 밑 절을 지었나. 객이 와서 종일토록 맴돌고 있다. 창문 여니 구름이 처마를 헤쳐 들고, 베개 비기니 시냇소리 땅을 울려 들린다. 옛 탑은 층이 있어 공중에 부옇게 섰고, 동강난 비는 글자 없이 반쯤 퍼렇게 묻혔다. 늙어서 인간 일, 죄다 버리고 돌아가지 않기로 중과 의논한다.” 하였다. 은석사(恩石寺)ㆍ범굴사(梵窟寺) 아울러 기슭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한 줄기 긴 강이 맑디맑구나. 강 위에 푸른 산은 백층이로세. 절은 허공에 있어 놀과 연했고, 깊은 바위틈을 가느라 덩굴 잡는다. 불전에 향 사르며 예배 드리고, 밝은 창 햇살 쬐는데 중과 말한다. 화겁(火劫)이 망망하매 진계(塵界)는 작다. 한낮에 승화(昇化)할 인연이 없구나.” 하였다. 묘적사(妙寂寺) 묘적산에 있다. 김수온(金守溫)의 기문이 있다.

○ 신종호(申從護)의 시에, “한가히 생대(生臺) 밑에 앉아 있으니, 임궁(琳宮)에 밤들어 적적하구나. 매화(梅花) 보고 시 지으니 격(格)이 여위고, 차 달이며 술 마시니 취기 가신다. 깊은 원(院)에 바둑 소리 급하고, 주렴(珠簾)에 촛불이 일렁거린다. 밤이 새면 서울로 떠나야 할 터, 돌아가야 할 길이 아득도하다.” 하였다. 불곡사(佛谷寺) 불곡산에 있다. 수락사(水落寺) 수락산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수락산 속 수락사에 물 마르고, 돌 나와 이해 저문다. 황학(黃鶴)이 나는 옆에 하늘이 낮고, 검은 구름 끄는 데 빗발이 난다. 거년에 중 찾아 여기 왔더니, 구렁에 눈 쌓였고 달이 밝았다. 금년에도 중 찾아 여기에 오니, 바윗가에 봄 꽃이 피었다 진다. 거년에도 금년에도 내왕하던 길, 산천은 역역하게 예와 같아라. 이끼 낀 길 미끄러워 청려장 짚고, 샘물이 흐르는데 바람이 분다. 식후(食後)에 들리는 종소리 예전대로다. 벽 위에 시기(詩記) 있는데 먼지 덮였다. 홍수(紅袖) 고금(古今)이란 것, 어찌 구래공(寇萊公)뿐일까. 왕공(王公)의 호기(豪氣) 적음을 내 한번 웃노라. 스무 해 만에 처음으로 얻은 벽사롱(碧沙籠).” 하였다.

○ 앞사람의 서문에, “젊었을 때 여러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었다. 수락산에 왕래한 것도 또한 두 번이며, 이 시를 우연히 벽 위에다가 적은 지도 지금 30여 년 전이다. 그저께 일암 전상인(一菴專上人)이 이 시를 베껴 와서 나에게 보이며, ‘장단 백태수(長湍白太守)가 외우는 것을 적었다.’ 하면서, 나에게 그릇된 글자를 바로잡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시를 지어도 갑자기 짓고 문득 버려서 한두 마디의 말로 상자에 남겨 둔 것이 없다. 하물며 광망한 소년 적에 지은 것으로 유전(流傳)시킬 뜻이 없었으니 어찌 기록하였겠으며, 32년 전 일이 아득하게 꿈속 같아서 그때 지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또 어찌 그릇된 글자를 알 수 있으랴. 그러나 한번 읽어보니, 운자(韻字) 단 것과 글자 놓은 것에 불만스러운 곳이 있다. 반드시 나의 유치한 시절의 잘못이거나, 혹 외우는 자의 잘못이 아닐까. 우선 그냥 두었으나, 옛일을 생각하니 능히 느낌이 없을 수 없다. 드디어 근체시(近體詩) 여섯 수를 지어, 일암 법좌하(法座下)에 드렸다. 일암은 그때 불암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수락사와는 겨우 10여 리이다. 후일 일암과 함께 한번 놀게 된다면 나의 말을 마치겠다.” 하였다. 그 시(詩)에, “산중(山中) 옛절에 유람하던 일, 손꼽으니 지금 벌써 30년이다. 객과 함께 거닐면서 많은 시간을 중을 위해 머물렀다. 한가한 긴 날, 꽃이 짙고 대나무 빽빽하여 지역이 깊고, 나무 늙고 바위 돌아 작은 누(樓)를 안았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소년 적 지난 일이 유유하여라.” 하였다.

○ “유유한 지난 일은 소년 적일세. 취한 중에 필세(筆勢)가 용솟음쳤다. 판벽(板壁)에 내 쓴 것은 무심하였고, 화등(花藤)에 중 베낌은 다사(多事)도 하다. 붉은 소매 푸른 비단은 본분 아닌 것이 부끄럽고, 흰머리 누른 티끌 속에 늙음이 밉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높은 봉에 또 오르면 쾌함 있으리.” 하였다.

○ “다시 최고봉(最高峯)에 오르고 싶다. 정(井 별 이름)을 지나 참(參 별 이름) 만지면 가슴 시원하리. 한낮에 새 한 마리 머리로 날아 지나고, 푸른 산은 여러 용이 눈아래 노는 듯, 금은(金銀) 불찰(佛刹)은 3천 계(界)이고, 금수(錦繡) 강산은 백 두 겹이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해질 무렵 앉아서 차를 끓이며.” 하였다.

○ “저녁 해 떨어지고 차 끓는 소리, 청산은 거만한 듯 아랑곳없다. 굽어보니 구름은 평지에 일고, 쳐다보니 폭포는 반공(半空)에 난다. 꽃비는 누(樓)에 가득 옷이 다 젖고, 베갯머리 송도(松濤)는 뼈에 사무친다.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청련(靑蓮)과 결연(結緣)하여 여생 보내리.” 하였다.

○ “여생에 결연하기 첨 마음일세. 서글퍼라 연래에 눈 같은 머리. 원(願) 맺기가 옅지 않음 누가 알리. 산에 들면 안 깊을까 항상 염려라. 스님과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총림(叢林)과 가깝구나 불암 촌서(村墅)가.” 하였다.

○ “총림이 불암산 가까이 있고, 산 밑에는 내 집이 두어 칸 있다. 도잠(陶潛)의 세 가닥 길, 적막하여도 양로(楊老)의 한 구역 집 반환(盤桓)하노라. 나물 캐고 죽순 구워, 예삿일이고 국화 보내고 매화 맞았다 하여라. 다시 한 번 스님과 가보고 싶다. 저문 나이 내 신세가 함께 따르리.” 하였다. 불암사(佛巖寺) 불암산에 있다.

○ 앞사람의 시에, “우리 집 서쪽 영(嶺)에 절이 있는데, 여러 벗들과 손잡고 함께 놀았다. 달 숲에 송뢰(松瀨) 소리, 두릉(杜陵)이 묵었고[宿], 늙은 나무 굽은 바위 이백(李白)이 썼다. 객자(客子)가 안 오니 원숭이 서럽고, 노승(老僧)이 잠들려니 산새가 운다. 아득한 띠끌 세상 어느 곳인가. 흰 구름 땅에 가득, 길을 몰라라.” 하였다. 석천사(石泉寺) 수락산에 있다.

○ 앞 사람의 시에, “천불산(千佛山) 높푸르러 겹쳐졌는데, 발자국 미끄러워 칡을 잡는다. 구름이 노목을 덮어 매 집이 높고, 물이 샘에 흘러와 용이 숨었다. 손님은 시를 쓰려 석탑(石塔)을 쓸고, 스님은 예불(禮佛)하며 종을 울린다. 올라가 임해 보니 동남쪽이 죄다 보인다. 건곤(乾坤)을 굽어보니 가슴 시원해.” 하였다. 홍복사(弘福寺) 홍복산에 있다. 정토사(淨土寺) 주 서쪽 59리 지점 백련산(白蓮山)에 있으며,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묘가 있다.

[고적]사천폐현(沙川廢縣) 주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본래 고구려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내이미(內?米)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사천(沙川)이라 고쳐서 견성군(堅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양주에 예속시켰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대모산성(大母山城) 주 서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둘레는 9백 6척이고, 높이는 5척이다. 수철성(水鐵城) 주 북쪽 51리 지점에 있다. 둘레는 3백 57척이고, 높이는 14척이며 적성(積城)과 서로 마주 있다. 해촌처(海村處) 주 서쪽 35리 지점에 있다. 송산처(松山處) 주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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