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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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畿內)
6.서안부(西安府)는 부평(富平)이고,
陝西省(領七府。五直隸州。五州。七十三縣)。
○西安府(名關中。領一州。十五縣)長安(鎬京。附府)咸寧(霸陵。附府)咸陽(石安)興平(茂陵)臨潼(新豐)高陵(鹿苑)鄂縣(杜亭)藍田(玉山)涇陽(鼎州)三原(鹿原)盩屋(恒州)渭南(南鄭)富平(頻陽)醴泉(溫秀)同官(役祤)耀州(華原)-地輿名目(一十九省)
富平县是陕西省渭南市的一个县,位于陕西省中部,蒲城、渭南以西,耀县、三原以东,临潼、阎良以北,铜川以南。面积1233平方公里,人口75万。行政区划代码为610528,邮编711700。辖24个乡镇(杜村镇、庄里镇、老庙镇、美原镇、流曲镇、到贤镇、张桥镇、留古镇、淡村镇、刘集镇、薛镇、宫里镇、王寮镇、曹村镇、梅家坪、小惠乡、齐村乡、华朱乡、南社乡、白庙乡、底店乡、觅子乡、东上官、峪岭乡),337个行政村,县政府驻杜村镇人民路。
经济
富平境内有西包高速公路、西禹高速公路和咸铜铁路、西韩铁路通过。石灰石、大理石储量丰富。 富平是渭北高原上最大商品粮生产基地,盛产苹果。有唐定陵、献陵陪、章陵、元陵和法源寺塔等古迹。
富平县,建制始于秦代,迄今已有 2400余年。
公元前7世纪末,周室衰微,西戎南侵,平王东迁,移都洛邑,将迤山(今县境西南瓦窑头原畔一带)划辖秦国。
随着秦国势力的不断扩张,秦厉共公二十一年(前456)始在频山以南设置频阳县治(故址在今美原镇古城村一带)。
秦统一全国后,以频阳属内史。
西汉高帝时(前206—前195),以频阳县属河上郡。另于县境南部设置怀德县(故址在今华朱乡怀阳城附近),两县均属内史。
景帝时(前156—前141),两县同属左内史。
武帝时(前140—前87),又以两县归属左辅。
新莽时(9—23), 两县属列尉大夫。
东汉时(25—220),并怀德县入频阳县,属左冯翊。
三国时(220—265),归属曹魏,仍称频阳县,属左冯翊。
西晋时(265—316),自彭原界(今甘肃省庆阳地区西南)徙富平县治于怀德故城,与频阳县并存。
东晋时(317—420),富平一度为苻秦所统治,曾在频阳县境内设置土门护军(故址今薛镇土木坊)。
北魏太武帝太平真君八年(447),撤土门护军,将其辖地并入同官县(今铜川市),迁北地郡至泥阳县所属通川(今流曲镇);又并泥阳县于富平县。宣武帝景明元年(500),撤原频阳县建制,划同官县一部,另建土门县(今薛镇),隶北地郡。西魏文帝大统五年(539),富平县治由怀德故址迁至石川河北岸(今城关乡古城村一带)。
废帝三年(554),以富平县属宜州(今耀县)。
北周闵帝元年(557),于中华原置中华郡(故址今城关乡石佛原一带),富平县划归该郡管辖。
武帝建德四年(575),裁中华郡,富平县改属左冯翊。
隋文帝开皇三年(583),富平县改属京兆郡。
炀帝大业二年(606),将土门县并入华原县(今耀县),属京兆郡。
恭帝义宁二年(618),又从华原县划出原土门县辖域,恢复土门县建置,属宜君郡。
唐高祖武德元年(618)设置富平道,归骠骑车骑统辖;不久,改富平道为玄武军。太宗贞观十七年(643),废土门县。高宗咸亨二年(671),于富平、华原两县境域各划一部,在原土门县故址另建美原县。武则天天授元年(690),以美原县隶于宜州。大足元年(701),以美原县改属雍州。
玄宗开元年间(712—741),徙富平县治于义亭城(今华朱乡旧县村一带),属京兆府。德宗贞元四年(788),定富平县为赤县(按:赤县非县名,唐代分县为等,诸等中有赤县,由京城直接治理),旋升县为州。哀帝天佑二年(905),划出美原县,设置鼎州,隶属耀州(二州不同级)。
五代时,后梁恢复美原县,仍属耀州。
末帝贞明元年(915),改鼎州为裕州,隶属崇州。
后唐复以富平县改属耀州,美原县初属同州,继属耀州。
至后晋、后汉、后周诸朝,均未变动。
北宋哲宗元佑三年(1088),富平、美原二县同属永兴路京兆府耀州。
金太宗天会九年(1131),即宋金两军“富平之役”后,金人以富平、美原二县赐齐(金人立刘豫为齐帝,建都大名)。
熙宗天眷元年(1138),两县又同归宋。
天眷三年(1140),复由宋入金。
皇统二年(1142),撤富平县,以其地并入美原县,隶属耀州。
蒙古军 南下后,恢复富平县制,与美原同属耀州。世祖至元元年(1264),将美原县并入富平县。
至此,富平县境内再无两县并存的情况。
元末明初(1368—1370),富平县治由义亭城迁至窑桥寨(今老县城),属西安府。
明末,李自成建大顺国于西安,县治仍设窑桥寨。
清代,富平县属西安府。民国初,尽废府州厅制,富平属陕西省关中道。
民国23年(1934),属陕西省第十行政督察区(专署驻咸阳)。
民国37年(1948),改属第三行政督察区(专署驻耀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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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부평 도호부(富平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주부토군(主簿吐郡)인데, 신라가 장제군(長堤郡)으로 고쳤고, 고려가 수주(樹州)로 고쳐, 성종(成宗) 을미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을사에 파하고, 현종(顯宗) 무오에 지수주사(知樹州事)로 고쳤으며, 의종(毅宗) 4년 경오에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 고종(高宗) 2년 을해에 계양 도호부(桂陽都護府)로 고치고,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부평부(富平府)로 강등하였으며, 본조(本朝) 태종(太宗)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양천(陽川)에 이르기 12리, 서쪽으로 황해[大海]에 이르기 10리, 남쪽으로 인천(仁川)에 이르기 10리, 북쪽으로 김포(金浦)에 이르기 10리이다.
호수가 4백 29호, 인구가 9백 54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0명, 선군(船軍)이 1백 28명이다.
토성(土姓)이 7이니, 김(金)·이(李)·유(柳)·형(邢)·손(孫)·최(崔)·진(陳)이요, 내성(來姓)이 3이니, 조(趙)·유(柳)·윤(尹)이다. 없어진 황어향(黃魚鄕)의 망성(亡姓)이 1이니, 손(孫)이요, 망래성(亡來姓)이 1이니, 정(鄭)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지금 향리(鄕吏)가 되었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기후는 바다가 가까와서 일찍 더워진다. 간전(墾田)이 5천 2백 96결(結)이요,【논과 밭이 반반이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팥·녹두·뽕나무·삼[麻]이며, 약재(藥材)는 사자발쑥【썩 좋다. 】·삿갓나물[皂休]이다. 어량(魚梁)이 1소(所)이고,【참치·민어·조기·가물치[加火魚]·미네굴[土花]·청해(靑蟹)가 난다. 】염소(鹽所)가 7이다.
역(驛)이 1이니, 금수(金輸)요, 봉화가 1곳이니, 싸리곶이[杻串]로서, 부(府) 서쪽에 있다.【남쪽으로 인천(仁川)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김포(金浦) 백석산(白石山)에 응한다. 】
관할은 도호부(都護府)가 1이니, 강화(江華)요, 군(郡)이 2이니, 인천(仁川)·해풍(海豐)이며, 현(縣)이 4이니, 김포(金浦)·교동(喬桐)·양천(陽川)·통진(通津)이다.
【영인본】 5책 622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경기 / 부평 도호부 / 강화 도호부
○ 지리지 / 경기 / 부평 도호부 / 인천군
○ 지리지 / 경기 / 부평 도호부 / 해풍군
○ 지리지 / 경기 / 부평 도호부 / 김포현
○ 지리지 / 경기 / 부평 도호부 / 양천현
○ 지리지 / 경기 / 부평 도호부 / 교동현
○ 지리지 / 경기 / 부평 도호부 / 통진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
동쪽으로 금천현(衿川縣) 경계까지 34리, 양천현(陽川縣) 경계까지 15리, 남쪽으로 안산군(安山郡) 경계까지 48리, 인천부(仁川府) 경계까지 15리, 서쪽으로 큰 바다까지 14리, 북쪽으로 김포현(金浦縣) 경계까지 17리, 통진현(通津縣) 경계까지 36리, 서울까지 55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의 주부토군(主夫吐君)인데, 신라에서 장제(長堤)라 고치었고, 고려 초년에 수주(樹州)라 고치었다. 성종(成宗)이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이 혁파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지주사(知州事)라 고치고, 의종(毅宗)이 고치어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만들고, 고종(高宗)이 계양(桂陽)이라 개칭(改稱)하고, 충렬왕(忠烈王)이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 여러 목(牧)을 없앨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강등시켜 부(府)로 만들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고쳐 도호부로 만들고, 세종 20년에 강등시켜 현령(縣令)을 만들고, 28년에 복구하였다.
[풍속]인순사간(人淳事簡) 이규보의 시에, “사람이 순박하고 일이 간단한 것은 비록 가상하나,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쇠잔하여 차마 볼 수 없구나.” 하였다.
[형승]삼면(三面)이 모두 물이다 이규보의 망해지(望海誌)에 있다. 궁벽하고 황폐하며 낮고 삽(澁)한 땅이다. 전 사람의 〈자오당기(自娛堂記)〉에 있다.
[산천]계양산(桂陽山) 부 북쪽 2리 되는 곳에 있는 진산(鎭山)인데, 일명 안남산(安南山)이라고도 한다.
○ 이규보의 〈망해지(望海誌)〉에, “길이 사면으로 계양 지경에 났는데, 오직 한 면만이 육지로 통하고 삼면은 모두 물이다. 처음에 내가 조정에서 쫓겨나서 이 고을에 원이 되었을 때에, 물의 푸르고 넓은 것을 사방으로 돌아보고는 섬 가운데에 들어왔는가 의심하여, 근심스러워 즐기지 않아서 문득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보려고 하지 않았다. 2년 여름 6월에 미쳐서 성랑(省郞)으로 제수되어, 장차 날을 정하여 서울에 돌아가게 되고 보니, 지난번의 푸르고 넓던 물이 모두 즐겁게 생각되었다. 이에 무릇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는 놀러 돌아다니지 않은 데가 없었다. 비로소 만일사(萬日寺) 누대 위에서 바라보니, 큰 배가 물결 가운데 있는 것은 마치 오리가 헤엄치는 것 같고, 작은 배는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서 머리만 조금 내놓은 것 같고, 돛단배가 가는 것은 사람이 높은 사모를 쓰고 가는 것 같았다. 여러 산과 여러 섬이 아득하게 서로 바라보고 있어서, 우뚝 내민 것도 있고 민둥한 것도 있으며, 발을 제껴 디딘 것 같은 것도 있고, 납작 엎드린 것 같은 것도 있으며 등마루만 나온 것도 있고, 상투같이 솟은 것도 있으며 가운데가 뚫려서 구멍 같은 것도 있고, 머리가 둥그스름하여 일산 머리 같은 것도 있었다. 절 중이 와서 조망(眺望)을 돕는데, 문득 손가락으로 가리켜, ‘섬은 저것은 자연도(紫燕島), 저것은 고란도(高鸞島)ㆍ기린도(麒麟島)이며, 산은 저것은 서울의 곡령(鵠嶺), 저것은 승천부(昇天府)의 진산(鎭山)이며 용산(龍山)이다.’ 하였다. 인주(仁州)의 바라뵈는 것이나 통진(通津)의 바라뵈는 것을 역력히 세어서 마치 손바닥을 지적하는 것과 같았다. 이날에 내가 대단히 즐거워서 노는 자와 더불어 술을 잔질하여 취하여 돌아왔다. 며칠 뒤에 명월사(明月寺)에서 노는데, 산의 가린 것이 더러 있어서, 만일사같이 툭 트이지는 못하였다. 두어 날 뒤에 다시 산을 따라 북쪽으로 가고, 바다와 나란히 동쪽으로 가서 조수의 격동하고 부딪치는 것과, 해시(海市 신기루)의 변화하고 괴이한 것을 구경하노라고 혹 말도 타고, 혹 걷기도 하여 조금 피곤한 뒤에 돌아왔다. 함께 논 사람은 아무 아무인데 모두 술병을 가지고 따랐다. 아, 물도 지난번의 물이요 마음도 지난번의 마음인데, 지난번에 보기 싫어하던 물을 지금은 도리어 즐겨 구경하니, 혹시 구구한 한 벼슬을 얻었기 때문인가. 맘은 내 맘이로되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여, 때에 따라 바뀌기를 이와 같이 하게 되니 죽고 사는 것을 한결같이 하고 얻고 잃는 것을 같이 보는 것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뒷날을 오히려 경계할 수 있으므로 기록하여 둔다.” 하였다. 원적산(元積山) 부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축곶산(杻串山) 부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직포(直浦) 부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이 적유산(狄踰山)에서 나와서 또 동으로 흘러, 양천현(陽川縣) 북포(北浦)로 들어간다. 대교천(大橋川) 부 동쪽 7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이 원적산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직포가 되고, 김포현(金浦縣)을 지나 굴포(堀浦)가 되어 제법진(濟法津)으로 들어간다. 바다 부 서쪽 14리 되는 곳에 있다. 물차도(勿次島) 부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3백 보이다. 호도(虎島) 부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2백 보이다. 응도(鷹島) 부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3백 보이다. 정자도(亭子島) 부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1백 보이다. 문지도(文知島) 부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1백 보이다. 청라도(靑羅島) 부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8백 보이다. 일도(一島) 부 서쪽 8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3백 보이다. 장도(獐島) 부 서쪽 6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5백 보이다. 율도(栗島) 부 서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8백 보이다. 서천도(西遷島) 부 서쪽 25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8백 보이다. 기도(箕島) 부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둘레가 50보이다. 전지지(全之池) 부 남쪽 3리 되는 곳에 있다.
[토산]소금[鹽]ㆍ조기[石首魚]ㆍ토화(土花)ㆍ굴[石花]ㆍ부레[魚鰾]ㆍ낙지[絡締]ㆍ맛조개[竹蛤]ㆍ소라(小螺)ㆍ청해[靑蟹]ㆍ게[蟹]ㆍ곤쟁이[紫蝦]ㆍ중하(中蝦)
[불우]만일사(萬日寺) 계양산(桂陽山)에 있다.
○ 이규보의 시에, “지는 해는 침침한데 물은 홀로 밝고, 어지러운 산이 구불구불 서렸으니 길이 평탄하기 어렵네. 구름에 희미한 극한 포구의 수 없는 돛의 빛이며, 바람이 떨어지는 긴 강의 한 줄기 피리 소리네. 몇 사람이나 건넜는고 배는 스스로 떠있고, 외로운 호랑이를 지저귀어 쪼고도 새는 오히려 운다. 가고 오면서 깊이 강호(江湖)의 흥취를 얻었으니, 홀연히 순채(蓴菜)와 농어(鱸魚)가 만리의 정취(情趣)를 일으킨다.” 하였다. 명월사(明月寺) 계양산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황무한 가시숲 헤쳐도 열리지 않으니, 돌길이 평탄한 데가 적구나. 말에서 내려 걷다가 자빠져서, 내 석 자 되는 지팡이를 부러뜨렸네. 깊숙한 곳의 박쥐는 사람에 익지 못하여, 앞발 모으고 서서 멍한 모양을 한다. 주린 호랑이야 너는 으르렁대지 말라. 충신(忠信)은 내가 믿는 바이다. 나무 끝에 암자를 찾아내니,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얹었네. 어떤 사람이 이름지어, 명월(明月)이라 표방(標榜)하였나. 달을 가져 마음을 깨끗이 하려 함이런가. 혹시 달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런가. 한 길되는 집이 이 다락보다 높으니, 창해(滄海) 넓은 것이 다가보인다. 전일에 하늘에 오르기 어렵다 들었더니, 홀연히 이미 하늘 위에 있도다. 물빛이 멀수록 더욱 희어, 서리 같은 흰 비단을 펼친 것과 한 모양이네. 침침한 구름과 갠 놀이 경각 사이에 천만 가지 형상이로다. 큰 배가 물결 가운데 있는 것이, 가벼운 갈매기 헤엄치는 것 같다. 어주자(漁舟子)에게 말을 부탁하노니, 정신을 들여서 노를 잘 저어라. 너의 한가히 노는 모양을 내 시속에서 넣으련다. 아, 나는 장부책에 취하여, 맑은 흥취 저버린 지 오래려니, 이 고을에 이른 지 2년 동안, 오래 묵은 심상(心想)과 크게 들어맞네. 청하건대 그대는 다시 머물라. 이것이 하늘이 주는 바이다.” 하였다. 봉일사(奉日寺) 계양산에 있다.
[고적]자오당(自娛堂) 이규보(李奎報)의 기(記)에, “정우(貞祐) 7년 초여름에, 내가 좌사간 지제고(左司諫知制誥)로부터 계양부사(桂陽副使)로 귀양왔다. 고을 사람들이 깊은 산 옆 나무 덤불 속에 쓰러질 듯한 깨어진 달팽이 집같은 것을 태수(太守)의 처소로 삼았다. 그 제도를 보니 들보와 기둥을 아무렇게나 얽어매어, 억지로 집이라고 이름한 것이어서 쳐다보면 머리도 들 수 없고 구부리면 무릎도 뻗칠 수 없다. 더위를 만나 그 속에 있으려면, 깊은 시루 속에 들어가서 찜질을 당하는 것 같다. 처자와 노비들이 머리를 내두르며 모두 거기에 거처하려 하지 않으나, 나는 홀로 기뻐하여 깨끗이 쓸고 거처하며, 인하여 그 집에 써 붙이기를 ‘자오(自娛)’라 하였다. 그 이유를 힐난하는 손님이 있어 말하기를, ‘지금의 태수는 옛날의 방백(邦伯)이다. 뵙기를 청하는 손님들이 날마다 서로 잇달으니, 이 당(堂)에 오려는 이는 모두 준수(俊秀)한 관리들이며, 선비와 중의 괴걸(魁傑)ㆍ기특(奇特)한 사람이라서, 태수와 더불어 그 즐거움을 누리는 자가 아님이 없다. 그런데 태수가 문득 자오(自娛)라 일컬었으니, 아까 말한 손님들은 인품 가운데에 두지 않는 것이 아닌가. 어찌 사람에게 도량의 넓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가.’ 하였다. 나는 웃으며 답하기를, ‘손님은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바야흐로 내가 성랑(省郞)이 되었을 때에는, 나가면 누른 옷 입은 앞잡이가 길에서 외치고, 집에 들면 맛있는 음식이 큰 상에 가득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고량자제(膏粱子弟 부잣집 자제)에 있어서는 비록 부족할 것 같지마는, 나에게는 크게 과(過)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詩人)이 운명이 박명(薄命)한 것은 옛날부터 그러한 것이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유사(有司)의 무함을 입어, 이 궁벽하고 황폐하며 비습한 땅에 떨어졌으니 아마도 하늘이 시킨 것이요, 사람의 힘은 아니다. 만일 집이 굉걸(宏傑)하고 거처가 화려하여, 나의 생활을 몹시 낮추고 덜어내지 않게 된다면, 하늘이 나를 조처한 뜻이 아니어서 다만 더욱 화(禍)를 부를 뿐이다. 그러니 이 누추한 것은 나만이 홀로 좋아하는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어떻게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남도 나와 같아지라고 강제할 수가 있는가. 만일 혹시라도 변두(籩豆)를 베풀어 놓았거나, 성색(聲色)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도 또한 무슨 마음으로 혼자서 자기 즐거움만 누리고, 차마 빈객(賓客)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고을에 있고 이 집에 사는 동안에는 이런 즐거움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또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하였더니, 손이 무안하여 물러갔다. 그리하여 기문(記文)으로 한다.” 하였다. 초정(草亭) 이규보(李奎報)의 기(記)에, “계양이 궁벽하게 쑥대 우거진 사이에 있어서, 하나도 임천(林泉)의 좋은 지경만큼 놀 만한 데가 없고, 오직 남산 옆에 한 정자가 있는데 늙은이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전날 상국(相國) 허홍재(許洪材)가 일찍이 이 고을에 태수로 있을 때에, 처음으로 이 터를 잡아서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고, 전날 태수였던 이실충(李實忠)이 물을 터서 못을 만들고 정자를 그 위에 지었다.’ 하였다. 한 칸 열 서까래에 띠로 덮은 것은 검소한 것을 보인 것이요, 길이와 넓이가 8척에 지나지 못하고, 앉는 것도 8명에 지나지 못하는 것은 그 제도를 줄인 것이다. 물이 바위 틈에서 나와 얼음같이 극히 차서 비록 한여름이라도 들어가 목욕하면, 추워서 머리털이 서서 오래 견딜 수 없다. 게다가 둥그런 솔과 무성한 나무가 그늘을 펼치어 서늘한 기운이 생기어 맑은 바람이 저절고 오고, 뜨거운 볕이 다가오지 못하니 피서하기에 가장 적당하다. 그러므로 현판(縣板)을 척서(滌暑)라 하였다. 그러나 고을 사람들이 오히려 초정(草亭)으로 부른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땅이 풍수설(風水說)에 의한 한 형상과, 좋은 국면(局面)이 있어서 더욱 태수가 되어 온 사람에게 이롭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당과 판수의 이치에 맞지 않는 말 같아서, 선비된 자가 마땅히 말하지 않는 것이지만, 촌사람의 비루한 말도 때로는 맞는 것이 있으니 또한 믿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내가 오기 전에 홀연히 거문고를 태워, 학(鶴)을 삶는 자가 헐어버렸기 때문에 황량한 묵은 터만 남았다. 내가 보고 딱하게 여기어, 고을 아전을 불러 말하기를, ‘정자는 이 태수(李太守)가 창건한 것인데, 너의 고을에 무슨 해가 되기에 감히 헐었는가. 옛날 사람은 그 사람을 생각하여 감당(甘棠)을 베지 않은 일이 있거늘 감히 정자를 허는가.’ 하였다. 아전이 아무 말 없이 물러가서 묵은 재목을 찾아 수습하여 잠깐 동안에 다시 짓고, 다 지은 이튿날에 와서 일을 마쳤음을 고하였다. 내가 동료 친구와 더불어 술을 베풀어 낙성(落成)하였다. 내가 지난해 첫여름에 보궐(補闕)로부터 나와서 이 고을의 태수가 되었는데, 금년 6월에 이르러 예부 낭중 기거주 지제고(禮部郞中起居注知制誥)로 제수되어, 장차 대궐에 나아가게 되었다. 여러 동료들이 말하기를, ‘이 정자는 태수가 거듭 세운 것이니,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후인들이 알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내가 그렇게 여기어 대략를 써서 뒤에 오는 사람이 경솔히 헐지 않도록 부탁하고, 또 이 태수를 위하여 영원히 썩지 않을 자취를 남긴다.” 하였다.
○ 이규보의 시에, “바위를 파서 솟는 물을 통하여 못에 저수하여 나는 듯한 집을 그 위에 걸치었다. 바라보면 고기잡이 배인가 생각되고, 와서는 그림 병풍에 들어왔는가 의심한다. 물의 신선이 응당 기이한 것을 저장하였던 것이며, 땅 신령이 바로 영기(靈氣)를 쌓았도다. 들빛은 처마 앞에 껴안았고, 샘 소리는 자리 밑에 들린다. 맑은 바람은 여름을 당하여 족하고, 흰 이슬은 가을도 안 되어 떨어진다. 비단 이끼는 섬돌에 얽히고 빙수(氷水)는 옥 병에서 언다. 산이 뚫어졌으니 먼 조망(眺望)을 더하고, 골이 넓으니 멀리 듣는 것을 돕는다. 나무가 우뚝하니 높은 깃발이 푸르고, 솔이 벌어졌으니 비스듬한 일산이 푸르다. 허공(許公)이 일찍이 터를 보고 이수(李守)가 비로소 정자를 지었다. 감당(甘棠)의 읊음에 짝하려 하여, 거듭 경영하고 이 글을 새긴다.” 하였다.
황어향(黃魚鄕) 부 북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계양산고성(桂陽山古城) 돌로 쌓았고 둘레가 1천 9백 37척이다.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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