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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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畿內)
8.청성부(淸城府)는 광주(廣州)이고,
廣東省(領十府。三直隸州。七州。八十縣)。廣州府(名羊城。十四縣)南海(胥江附府)番禺(熙安。附府)順德(龍潭)東莞(南頭)從化(橫潭)龍門(東澗)新寧(上川)增城(綏寧)香山(陽江)新會(盈允)三水(高安)清遠(中宿)新安(寶安)花縣(花山)-地輿名目(一十九省)
清远市,别称凤城,位于广东省中部,北江中下游,北面和东北面与韶关市为邻,东南和南面接广州市,南与佛山市接壤,西与肇庆市相连,是珠江三角洲开放地区和粤北山区政治、经济、文化交流的主要汇集区之一,也是广东省面积最大的地級市。
历史
名称及其由来清远又称凤城,是由于清远的版图像一只凤凰。凤城之名还源自一传说:在清远市工人文化宫附近的一棵高大梧桐树上栖息了一窝凤凰,树下住一青年,名张易,靠泛舟为生。有一年,北江洪水泛滥,俗语云:“南雄落水洒湿石,去到韶关涨三尺,落到英德淹半壁,浸到清远佬无地走。”可见洪水之汹猛,一下子清城水淹,张易撑着小艇到处救人,救到梧桐树下,听到凤凰吱吱喳喳,才发现水位快漫到树顶,大凤凰都出去找吃的,小凤凰翅膀还没长齐,眼看水已淹没梧桐树,张易赶紧游去树中心抱起窝里的小凤凰,但张易的脚被树的寄生藤缠住,无法脱身,只好将小凤凰放置艇中,自己却不幸被水淹没,母凤凰飞回来,见此感人一幕,觉得人为救凤凰也肯舍命相救,自己也应当完成年青人救人心愿,就伏在水面,让落水的人踩着它的背逃生,最后因体力不支,也牺牲了,化成清远两条街,所以清远看上去像一只凤凰,而凤凰牺牲的地方,称为起凤里,清城因此得名叫凤城,而广东有两个凤凰,是因另一父凤凰飞回来发现爱妻已逝,伤心不已,带着爱子飞走了,飞了去顺德大良,故而顺德大良也叫凤城。
清城区是中国廣東省清远市的一個市辖区。清城区前身是清远县,建于秦朝,迄今已有2216年的历史。1988年初经国务院批准,清远撤县建市,清城区是清远市委、市政府的所在地,位于广东省中部,北江中下游,清城区总面积927平方公里,人口55万,下辖4个镇、4个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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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광주목(廣州牧)
목사(牧使)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백제 시조(百濟始祖) 온조왕(溫祚王)이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18) 계묘에 국도(國都)를 위례성(慰禮城)에 세웠다가, 13년 을묘에 이르러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내가 보매, 한수(漢水) 남쪽의 땅이 기름지고 걸으니, 마땅히 여기에 도읍을 세워서 장구한 계교를 도모하고자 하노라.”
하고, 드디어 한산(漢山) 아래에 나아가 목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기며, 궁궐을 짓고, 14년 병진 정월에 도읍을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 하다가, 3백 76년을 지나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 신미에【곧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원년(元年). 】도읍을 남평양(南平壤)에 옮기고 북한성(北漢城)이라 하였다. 당(唐)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경신에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치는데, 신라 태종왕(太宗王)이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어 협공(夾攻)하여 〈백제를〉 멸하고, 당나라 군사가 다 돌아가매, 문무왕(文武王)이 차츰 그 땅을 거두어 차지하여, 3년 갑자에【인덕(麟德) 원년(元年). 】한산주(漢山州)로 고치고, 8년 경오에【함형(咸亨) 원년. 】남한산주(南漢山州)로 하였다가, 경덕왕(景德王) 15년 정유에【곧 당나라 숙종(肅宗) 지덕(至德) 2년. 】한주(漢州)로 고쳤고,【신라가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매, 신문왕(神文王)이 비로소 신라 경내(境內)의 사벌(沙伐)·삽량(歃良)·거열(居列)의 3주(州)와 백제의 옛땅 웅천(熊川) ·완산(完山)·무진(武珍)의 3주와 고구려의 옛땅 한산(漢山)·우수(牛首)·하서(河西)의 3주로써 구주(九州)의 수를 갖추었는데, 경덕왕 때에 이르러 구주(九州) 및 모든 군현(郡縣)의 이름을 모두 고치었으므로, 뒤에 대개 신라가 고쳐서 모모(某某)로 하였다고 한 것은 모두 이 해의 일이다. 】고려 태조(太祖) 23년 경자에【곧 진(晉)나라 고조(高祖) 천복(天福) 5년. 】광주(廣州)로 고치고, 성종(成宗) 2년 계미에【곧 송(宋)나라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 】처음으로 12주·목(州牧)을 두니, 〈광주가〉 곧 그의 하나이다. 〈성종〉 14년 을미에【곧 송나라 지도(至道) 원년. 】12절도사(節度使)를 두고 광주 봉국군 절도사(廣州奉國軍節度使)라 하였다가, 현종(顯宗) 3년 임자에 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按撫使)로 고치고, 9년 무오에【곧 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3년. 】8목(牧)을 정해 둠에 따라, 광주목(廣州牧)이 되었다.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別號)는 회안(淮安)이다.【성종(成宗) 10년 신묘에 주군(州郡)의 별호(別號)를 정하였는데, 광주를 회안(淮安)이라 하니, 곧 송나라 태종(太宗) 순화(淳化) 원년이다. 뒤에 순화(淳化)에 정한 바라 한 것은 모두 이를 말함이다. 】
검단산(黔丹山)【주(州) 동쪽에 있으니, 고을 사람들이 진산(鎭山)이라고 일컫는다. 】도미진(渡迷津)【주(州) 동북쪽에 있으며, 나룻배가 있다. 】그 서쪽을 진촌진(津村津)이라 하며,【주(州) 북쪽에 있으니, 나루머리[津頭]에 수참(水站)을 두었고, 참선(站船)이 15척이다. 】또 그 서쪽에 광진도(廣津渡)가 있다.【도승(渡丞)이 있어서 〈사람의〉 드나드는 것을 조사하는데, 좌도 수참 전운 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하여 조운(漕運)을 관장한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양근(楊根) 용진(龍津)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과천(果川)을 지나서 수원(水原) 경계의 성곶이[聲串]에 이르기 85리, 남쪽으로 이천(利川)의 양지(陽知)에 이르기 45리, 북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 11리요, 동서(東西)가 1백 15리, 남북(南北)이 56리이다.
헌릉(獻陵)은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과 원경 왕후(元敬王后)를 합장하였다.【주(州) 서쪽 대모산(大母山)4901) 의 양지쪽 건해산(乾亥山)에 있으니, 건좌 손향(乾坐巽向)이다. 능 앞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고, 능직(陵直)·권무(權務) 2인과 수호군(守護軍) 1백 호를 두고, 매호마다 밭 2결(結)을 주었다. 】문묘(文廟)【주(州) 북쪽에 있다. 나라에서 각도 주(州)·부(府)·군(郡)·현(縣)에 모두 문묘를 두고 향교(鄕校)라 한다. 그 생도(生徒)의 액수(額數)는, 유수관(留守官)에는 50명, 목(牧)과 도호부(都護府)에는 40명, 군(郡)에는 30명, 현(縣)에는 15명으로 하며, 제전(祭田)·학전(學田)과 노비(奴婢)를 주는데, 각기 차이를 둔다. 도호부(都護府) 이상은 모두 교수관(敎授官)을 두고, 군과 현에는 혹은 교수관, 혹은 교도(敎導)를 두며, 만일 민호(民戶)가 5백 호가 차지 못하면 학장(學長)을 두어 생도들을 가르치게 한다. 뒤에는 각 고을[邑]에 다시 문묘를 적지 아니한다. 】
호수는 1천 4백 36호, 인구는 3천 1백 단(單)10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22명이요, 선군(船軍)이 2백 63명이다.【잡색군(雜色軍)은 다 토정(土丁)을 뽑아 군사를 삼았으므로 같이 적지 아니한다. 나머지 고을도 〈모두〉 이와 같다. 】
토성(土姓)이 3이니, 이(李)·안(安)·김(金)이요, 가속성(加屬姓)이 3이니, 박(朴)·노(盧)·장(張)이요,【이 6성은 옛 문적과 지금의 본도(本道) 관록(關錄)에 의거한 것이며, 그 가속성(加屬姓)이란 것은 옛 문적에 기록되어 있는 바이니,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망성(亡姓)이 5이니, 윤(尹)·석(石)·한(韓)·지(池)·소(素)이다.【대개 망성(亡姓)이라 한 것은 옛 문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음을 이름이니,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 되며, 간전(墾田)이 1만 6천 2백 69결(結)이다.【논이 4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오곡(五穀)의 주석(註釋)을 살펴보면, 모든 책이 같지 아니하다. 오직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에 “예주(豫州) 땅에 곡식의 5종류가 알맞게 된다.” 함에, 안사고(顔師古)가 주를 내되, “기장[黍]·피[稷]·콩[菽]·보리[麥]·벼[稻]”라 하였고, 주자(朱子)가 《맹자(孟子)》의 오곡을 주내되, 안사고의 말을 좇았으므로, 이제 그를 따른다. 】·잡곡(雜穀)과 대추[棗]·칠(漆)·닥[楮]·왕골[莞]·뽕[桑]이요, 토공(土貢)은 느타리[眞茸]요, 약재(藥材)는 돌고드름[禹餘糧]·안식향(安息香)·사자발쑥[獅子足艾]·현호색(玄胡索)·진봉(蓁芃)이요, 토산(土産)은 은구어(銀口魚)이다.【주(州) 서쪽 어원(御院) 앞 내에서 난다. 】염소(鹽所)가 1이요,【분(盆) 1, 구(區) 2이다. 】자기소(磁器所)가 4이니, 하나는 주(州) 동쪽 벌내[伐乙川]에,【상품(上品). 】하나는 주(州) 동쪽 소산(所山)에, 하나는 주(州) 남쪽 석굴리(石掘里)에,【모두 하품(下品)이다. 】하나는 주(州) 동쪽 고현(羔峴)4902) 에 있다. 도기소(陶器所)가 3이니, 하나는 주(州) 남쪽 초현(草峴)4903) 에,【중품(中品). 】하나는 주(州) 동쪽 초벌리(草伐里)4904) 에, 하나는 주(州) 서쪽 배곶이[梨串]에 있다.【모두 하품(下品)이다. 】
일장 산성(日長山城)은 주치(州治)의 남쪽에 있다.【높고 험하며, 둘레가 3천 9백 93보(步)요, 안에 군자고(軍資庫)와 우물 7이 있는데, 가뭄을 만나도 물이 줄지 아니한다. 또 밭과 논이 있는데, 모두 1백 24결(結)이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비로소 한산(漢山)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
역(驛)이 4이니, 덕풍(德豐)·경안(慶安)·봉안(奉安)·낙생(樂生)【옛 안박(安菐). 】이요, 목장(牧場)이 2이니, 하나는 주(州) 서쪽 마전포(麻田浦)에,【둘레 20리. 】하나는 주(州) 서쪽 조포평(助布坪)에 있고,【둘레 18리. 】봉화(烽火)가 1곳이니, 천천산(穿川山)은 주(州) 서쪽에 있다.【남쪽으로 용인(龍仁)의 석성(石城)에 응하고, 북쪽으로 서울 목멱산(木覓山)에 응한다. 】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1이니, 여흥(驪興)4905) 이요, 군(郡)이 1이니, 양근(楊根)이요, 현(縣)이 6이니, 음죽(陰竹)·이천(利川)·과천(果川)·천녕(川寧)·지평(砥平)·금천(衿川)이다.
【영인본】 5책 615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경기 / 광주목 / 여흥 도호부
○ 지리지 / 경기 / 광주목 / 양근군
○ 지리지 / 경기 / 광주목 / 음죽현
○ 지리지 / 경기 / 광주목 / 이천현
○ 지리지 / 경기 / 광주목 / 과천현
○ 지리지 / 경기 / 광주목 / 천녕현
○ 지리지 / 경기 / 광주목 / 지평현
○ 지리지 / 경기 / 광주목 / 금천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광주목(廣州牧)
동은 양근군(楊根郡) 경계(境界)까지 25리, 여주 경계까지 75리, 남은 이천부(利川府) 경계까지 74리, 양지현 경계까지 85리, 용인현 경계까지 43리, 서는 과천현(果川縣) 경계 양재역(良才驛)까지 27리, 안산군 경계까지 76리, 북은 양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1리이다.
[건치연혁]본래 백제의 남한산성이다.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또 도읍을 남평양성으로 옮겼다 지금의 경도(京都).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없애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신라가 그 땅을 점차 거두어 남한산성을 고쳐 한산주라 하고, 또 남한산주라고도 불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는 한주(漢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는데 광주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절도사를 두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고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가 되었다가 9년에 8목(牧)을 정할 때에 다시 목이 되었다. 본조에서는 이를 따랐다.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풍속]상기사 독서사(尙騎射讀書史) 《수서(隋書)》에, “백제 풍속이 말타고 활 쏘기를 숭상하며, 서사(書史)를 읽어 행정의 일에 능하고, 또 의약과 점치고 상보는 법을 안다.”하였다. 혼인의 예절은 대략 중화(中華)와 같다 위와 같다. 두 손을 땅에 디딤을 공경으로 삼는다 위와 같다. 의복은 깨끗하다 《남사(南史)》 삼년거복(三年居服) 《북사(北史)》에, “부모 및 남편 죽은 자는 3년 동안 복을 입고, 나머지 친척은 장사를 끝내면 복을 벗는다.”하였다.
[형승]한수(漢水)의 남쪽으로 토양이 기름지다. 백제 시조 온조의 말이다. 고적(古跡)편에 나타나 있다. 면이 모두 높은 산이다. 이곡(李穀)의 청풍정기(靑風亭記).
[산천]검단산(黔丹山) 주 동쪽 7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청계산(淸溪山) 주 서쪽 50리에 있는데 또 과천현 편에 보라. 대모산(大母山) 주 남쪽 30리에 있다. 일장산(日長山) 주 남쪽 5리에 있는데 일명 남한산이라고도 한다. 조곡산(早谷山) 주 동쪽 30리에 있는데 일명 초동산(草洞山)이라고도 한다. 문현산(門懸山) 주 남쪽 45리에 있다. 천천현(穿川峴) 주 서쪽 30리에 있다.
○ 중 선탄(禪坦)의 시에, “관산(關山)은 아득히 멀고, 길은 굽이굽이 돌았는데, 걸음이 양주에 가까우니 안계(眼界)가 점점 열리는구나. 삼산(三山)이 본래부터 친함이 있는 듯, 은근히 백리에 강을 건너옴을 깊이 사례하노라.”하였다. 영장산(靈長山) 주 남쪽 20리에 있다. 운길산(雲吉山) 주 동쪽 30리에 있다. 수리산(修理山) 주 서쪽 60리에 있다. 또 과천현 편에 보라. 대해산(大海山) 주 남쪽 50리에 있다. 군월라산(軍月羅山) 주 동쪽 15리에 있다. 원적산(元寂山) 일명 무적산(無寂山)으로, 주 동쪽 60리에 있다. 대쌍령(大雙嶺) 주 동쪽 40리에 있다. 소쌍령(小雙嶺) 주 동쪽 45리에 있다. 가마령(佳亇嶺) 주 동쪽 45리에 있는데 성종 어태(御胎)를 봉안했다. 이령(梨嶺) 주 남쪽 30리에 있는데 지금 임금의 어태를 봉안했다. 추령(楸嶺) 주 남쪽 47리에 있다. 망월봉(望月峯) 주 서쪽 10리 몽촌(夢村)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긴 바람에 배부른 돛으로 한수(漢水)에 급히 달려, 산중으로 돌아오니 술이 처음 익었네. 마른 창자에 술이 들어가니 또한 쉽게 취하는구나. 두 귀가 취중에 찡 울리며 흥이 스스로 족하니, 술 두루미를 옮겨 몽산 머리에 날아 올라가, 슬쩍 눈을 동쪽 봉우리로 돌려 새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본다. 새 달이 넘실넘실 구름 끝에 나오니, 빙륜(氷輪)이 둥그런데 금 물결 무늬 일렁거리네. 잠깐 사이에 하늘 중앙에 달려 있으니, 구주(九州)와 사해(四海)가 모두 맑은 빛이네. 잔을 들어 달에게 물어도 달은 응하지 아니하는데, 돌아보니 토끼가 나의 청광(淸狂) 많음을 웃누나. 옛 사람이 달을 사랑하는 이는 모두 유선(儒仙)이라,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지 천년이나 되었네. 적벽(赤壁) 어느 때에 검은 학이 춤 추었더냐. 백중(伯仲)되는 호걸 기운이 천하에 제일이었네. 한 두루미 술이 넘실넘실 강과 같이 다함이 없으니, 지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지 않을까. 오경 밤이 깊어도 달은 지지 아니하니, 사가(四佳 서거정의 호(號)) 취한 늙은이 머리가 반백일세.”하였다. 구질포(仇叱浦) 주 서쪽 90리에 있다. 이관포(梨串浦) 주 서쪽 88리에 있다. 조포평(助布坪) 주 서쪽 30리에 있는데 옛 목장이다. 탄천(炭川) 주 남쪽 30리에 있는데 삼전도(三田渡)로 들어간다. 소천(小川) 주 동쪽 30리에 있는데 도미진(渡迷津)으로 들어간다. 독포(禿浦) 주 북쪽 11리 도미진(渡米津) 하류에 있다. 또 양주 편에 보라.
○ 이색(李穡)의 시에, “독포 모래 가에 어둠빛이 닥치니, 먼 산과 편평한 들의 형세가 굽이쳐 뻗었네. 뱃사람이 닻줄을 걷어 흐름을 따라 내려가면서, 달이 양주에 밝은데 마침 시를 지었네.”하였다. 세고탄(洗姑灘) 주 서쪽 15리 광진(廣津) 하류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강가에서 빨래하는 색시 얼굴이 꽃과 같은데, 어릴적부터 빨래하여 생활하였네. 아침엔 흰 발을 씻으니 눈빛 같고, 저녁에 흰 팔을 씻으니 서릿발 같네. 아침마다 저녁마다 씻고 도 씻으니, 한 물이 스스로 깨끗해져 마음에 스스로 만족하리. 흰 실[綿]을 내리니 빙사(氷絲) 더 희매, 밤마다 흰 달 아래 찬 북[梭]을 울리네. 가는 비단을 짜 재단하여 옷을 만드니, 교초(蛟綃)보다 가늘고 월사(越紗)보다 가볍네. 강물이 맑고 또 잔잔함이여, 날마다 눈을 내리어 쉴 때 없어라. 씻기 끝나매 소담[談]한 화장[粧]이 물 밑에 비치니, 소아(素娥 월궁의 선녀)도 깨끗함을 사양하겠고, 강비(江妃 강의 신녀)도 부끄러워하겠네. 문득 미친 바람이 있어 천지가 어두우니, 티끌이 아득하여 갈 곳을 잃었네. 허둥지둥 진흙물 가운데서 당황하니, 옥질(玉質)은 이미 잘못되어 옷도 검어졌네. 시누이 문에 나와 색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색시는 빨래하기 왜 더딘고. 색시가 돌아오매 시누이는 손뼉치며 웃되, 추악하여 우리 집 시(施 서시(西施)의 성)가 아니라 하네. 시누이 나이는 겨우 열 세 살, 이때에 철이 아직 안 들었네. 시누이야, 시누이야 색시를 웃지 말아라. 이 한(恨)을 뒷날 너도 혹 알게 되리라.”하였다. 도미진(渡迷津) 주 동쪽 10리, 양근군 대탄 용진(龍津) 하류에 있는데, 그 북쪽 언덕을 도미천(渡迷遷)이라 이름한다. 동쪽으로 봉안역을 향하여 돌 길이 7~8리나 빙빙 둘렀는데, 신라 방언(方言)에 흔히 물 언덕 돌 길을 천(遷 벼루)이라 불렀다. 뒤에 나오는 것도 이와 같다.
○ 고려 한수(韓脩)의 시에, “햇볕이 잠깐 움직이자 오는 바람이 부드럽고, 하늘 그림자는 멀리 비췄는데 돛은 한가히 가네. 머리를 돌려 은근히 삼각산을 이별하되, 달이 아직 반쯤 둥글기 전에 내 돌아오리라.”하였다.
○ 권우(權遇)의 시에, “산 허리 구불구불 사닥다리 길 비꼈는데, 가다가 길 다한 곳에 사람 집이 있구나. 하늘은 차고 날은 저물고 바람은 급하게 부는데, 머리 돌려 긴 강을 바라보니 물결이 꽃을 피우네.”하였다. 광진(廣津) 주 서쪽 18리 독포 하류에 있다. 또 양주 편에 보라. 삼전도(三田渡) 주 서쪽 18리에 있는데, 한성부(漢城府) 편에 자세히 있다.
[토산]실[絲]ㆍ삼[麻]ㆍ자기(磁器) 해마다 사옹원(司饔院) 관리가 그림 그리는 사람을 인솔하고 가서, 궁중에서 쓸 그릇을 감독하여 만든다. 도기(陶器)ㆍ은어[銀口魚]ㆍ눌어(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게[蟹].
[불우]신복선사(神福禪寺) 이곡(李穀)이 지은 중영기(重營記)가 있다. 봉수사(奉水寺) 모두 한산에 있다. 수리사(修理寺) 수리산에 있다. 약정사(藥井寺) 한산에 있다. 백종사(百種寺) 주 북쪽 20리에 있다.
수종사(水鍾寺) 조곡산(早谷山)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가을이 오매 경치가 구슬퍼지기 쉬운데, 묵은 밤비가 아침까지 계속하니 물이 언덕을 치네. 하계(下界)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절의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흰 구름은 자욱한데 뉘게 줄거나. 누런 잎이 휘날리니 길이 아득하네. 내 동원(東院)에 가서 참선(參禪) 이야기하려 하니, 밝은 달밤에 괴이한 새 울게 하지 말라.”하였다. ○ “용진강(龍津江) 위 옛 절을 찾으니, 구불구불 돌길이 푸른 삼(杉)나무 숲으로 들어갔네. 옛날 자주 사영운(謝靈運)의 지난 일이 생각되고 지금 원공(遠公 혜원(惠遠)) 말을 못 들은 지 오래로세. 시냇가에서 바릿대[鉢]에 주문(呪文) 외우니 용이 응당 엎드릴 것이요, 돌 위에서 불경을 설(說)하니 호랑이 또한 참여하여 듣네. 흰 버선과 푸른 짚신 신고 내 또한 있으니 서로 만나 한 번 호계(虎溪) 남쪽에서 웃어보세.”하였다. 백중사(伯仲寺) 일명 암사(巖寺)이며, 하진참(下津站) 동쪽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절간이 푸른 벼랑에 걸쳐 있으니, 어느 날 금을 펴고 지었는고. 낙엽은 쓰는 사람이 없는데, 빈 집에 오는 손이 있네. 산 형세는 물에 다달아 끊겼는데, 물 구비는 산에 부딪쳐 돌아 흐르네. 앉아서 고승(高僧)과 같이 말을 주고 받으니, 마음이 스스로 티끌이 없어지네.”하였다. 봉은사(奉恩寺) 저도(楮島) 남쪽에 있다.
[고적]온조왕고성(溫祚王古城) 온조왕 13년에 왕도(王都)에 늙은 할미가 변화하여 남자가 되고, 다섯 호랑이가 성안에 들어왔으며, 왕의 어머니가 돌아갔다. 왕이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적은 데다가, 더욱 지금 요사스러운 조짐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께서 세상을 버리시니 사세가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 없어 반드시 장차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 어제 나가서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여 보니, 토지가 비옥하다. 마땅히 그곳에 도읍하여 오래 편안하기를 도모하리라.”하고, 7월에 한산에 나아가 목책(木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기고, 9월에 성과 궁궐을 세웠다. 일장산성(日長山城) 바로 신라 때 주장성(晝長城)이다. 문무왕(文武王)이 쌓은 것인데, 안에 여섯 우물과 시내가 있다. 주위가 8만 6천 8백 척, 높이는 24척인데 석축이다. 요탄역(饒呑驛) 고려 현종 9년에 거란이 와서 침범하므로 왕이 광주로 행차하였다가 두 왕후의 간 곳을 잃어 지채문(智蔡文)으로 하여금 가서 찾게 하였더니, 이 역에 이르러 바로 만나 모시고 돌아왔다. 왕이 기뻐하여 사흘 동안을 여기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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