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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畿內]9.남웅부(南雄府)는 시흥(始興)

한부울 2011. 3. 15. 22:26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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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畿內) 

9.남웅부(南雄府)는 시흥(始興)이고,

廣東省(領十府。三直隸州。七州。八十縣)。

南雄府(名淩皆。領二縣)保昌(漬昌)始興(正階)-地輿名目(一十九省)

 

 


广东省韶关市辖县,重点林业县。位于省境北部,大庾岭南麓,浈水上游,邻接江西省。面积2285.8平方公里,人口43.6万。县府驻雄州镇


唐置浈昌县,北宋置南雄州,后为保昌县,1912年改称南雄县。县境西北高,东南低,高山环抱,中为红色岩系盆地。县西观音崠观(南雄、始兴交界)海拔1428米,为县最高点。县北大庾岭有大小梅关,隘口海拔低,为沟通赣南主要通道,历代商旅行军路线必经之地,有“南粤雄关”之称。


浈江古称昌水,是珠江水系北江上游的干流,发源于江西省信丰县大庾岭石溪,流经广东的南雄、始兴、仁化,在韶关市区与武江汇合成北江。全长211公里。主要的一级支流有墨江、锦江。


境内山地丘陵多。平原集中于盆地,为主要耕作区,人口密集。浈水流经县境,落差大,水力资源丰富。气候属亚热带季风气候,年均降水量1800毫米。全年无霜期296天,冬见霜雪,对越冬作物影响较大。农产有稻、甘薯、小麦、花生、豆类、黄烟等。其中黄烟以色黄味醇著称,远销国内外。多林产,主要有松、毛竹、松香、白果、土纸等。荒地多且集中,农林生产潜力很大。县境多花岗岩覆盖,节理纵横,多金属矿,主要有钨、铜、金、氟、萤石等。工业有化肥、造纸、电力等,竹木工艺品也有一定声誉。雄州镇临浈水,有凌江汇入,为航运起点,是大庾岭山区著名圩镇,名胜古迹有城北附廓珠玑巷和更北的大小梅关等。


位于中国广东省北部,邻江西省。面积2286平方千米。人口41.9万。唐置沾昌县。宋改保昌县。元、明、清为南雄路、府、州治。1912年改南雄县。属韶关市。多山地。交通以公路为主。农业生产水稻、黄烟。矿产有钨、铜。工业有化工、电力等。特产黄烟、腊鸡等。名胜古迹有梅关、珠玑巷。

  

广东省韶关市辖县,重点林业县。位于省境北部,大庾岭南麓,浈水上游,邻接江西省。面积2285.8平方公里,人口43.6万。县府驻雄州镇。唐置浈昌县,北宋置南雄州,后为保昌县,1912年改称南雄县。县境西北高,东南低,高山环抱,中为红色岩系盆地。县西观音?海拔1428米,为县最高点。县北大庾岭有大小梅关,隘口海拔低,为沟通赣南主要通道,历代商旅行军路线必经之地,有“南粤雄关”之称。境内山地丘陵多。平原集中于盆地,为主要耕作区,人口密集。浈水流经县境,落差大,水力资源丰富。气候属亚热带季风气候,年均降水量1800毫米。全年无霜期296天,冬见霜雪,对越冬作物影响较大。农产有稻、甘薯、小麦、花生、豆类、黄烟等。其中黄烟以色黄味醇著称,远销国内外。多林产,主要有松、毛竹、松香、白果、土纸等。荒地多且集中,农林生产潜力很大。县境多  南雄县


花岗岩覆盖,节理纵横,多金属矿,主有钨、铜、金、氟、萤石等。工业有化肥、造纸、电力等,竹木工艺品也有一定声誉。雄州镇临浈水,有凌江汇入,为航运起点,是大庾岭山区著名圩镇,名胜古迹有城北附廓珠玑巷和更北的大小梅关等。


始興縣

始興縣是中國廣東省韶關市下轄的一個縣,位於韶關市東北部,居湞江中游,東與江西省全南縣相連,南、西、北面分別與翁源縣、仁化縣、南雄市毗鄰。


歷史

三國吳永安(公元263年)始設始興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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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광주목 ◎ 금천현(衿川縣)

본래 고구려의 잉벌노현(仍伐奴縣)인데, 신라가 곡양(穀壤)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금천(衿川)으로【금천(黔川)이라고도 한다. 】고치어, 성종(成宗) 14년 을미에【곧 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元年)이다.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 을사에【곧 송나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2년이다. 】혁파하고, 현종(顯宗) 9년 무오에【곧 송나라 진종 천희(天禧) 2년이다. 】수주(樹州) 임내(任內)에 붙였으며, 명종(明宗) 2년 임진에【곧 송나라 효종(孝宗) 건도(乾道) 8년이다.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 14년 갑오에 과천(果川)을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이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파하였고, 또 양천현(陽川縣)을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이라 하였다가 1년 만에 파하였으며, 〈태종〉 병신에 다시 금천 현감(衿川縣監)이라 하였다. 별호(別號)는 시흥(始興)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과천(果川)에 이르기 14리, 서쪽으로 부평(富平)에 이르기 11리, 남쪽으로 안산(安山)에 이르기 15리, 북쪽으로 노도(露渡)에 이르기 18리이다.

호수가 3백 27호, 인구가 9백 37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명, 선군(船軍)이 73명이다.

토성(土姓)이 6이니, 이(李)·조(趙)·강(姜)·장(莊)·피(皮)계(桂)이고, 망성(亡姓)이 2이니, 윤(尹)·추(秋)이다. 인물은 문하 시중(門下侍中)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이다.【고려 현종(顯宗) 때 사람이다.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에 이르기를, “한 사신(使臣)을 밤에 시흥군(始興郡)에 들어갔다가, 큰 별이 사람의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전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니, 마침, 그 집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사신이 기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서 기르니, 이가 강감찬이다. 뒤에 송나라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저도 모르게 절하며 이르기를, ‘문곡성(文曲星)이 보이지 아니한 지 오래 되더니, 이제 여기에 계십니다.’ 하였다. 이 말이 황당한 것 같으나, 그러나, 부열(傅說)이 기미성(箕尾星)의 정기가 되고, 신백(申伯)·보후(甫侯)가 숭악(崧岳)에 강림하였다 하니, 강감찬(姜邯贊)에게만 어찌 의심하리오.” 하였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백성의 풍속이 대개 어리석다. 간전(墾田)이 2천 7백 62결(結)이다.【논이 5분의 2가 된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팥·녹두·메밀·수수[唐黍]·참깨·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지초(芝草)요, 약재(藥材)는 백변두(白扁豆)이다.

역(驛)이 1이니, 반유(盤乳)이고, 목장(牧場)이 2이니, 하나는 달촌(達村)이요,【현(縣) 북쪽에 있으니, 둘레가 12리이며, 국마(國馬)를 놓아 기른다. 】둘째는 사외포(沙外浦)이다.【현(縣) 서북쪽에 있다. 양천(陽川) 절고지포[寺串浦]와 서로 연해서 둘레가 15리이니, 우군(右軍)의 목장(牧場)이다. 】양화도(楊花渡)【현(縣) 북쪽에 있고, 도승(渡丞)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금천현(衿川縣) 

동쪽으로 과천현 경계까지 11리이고, 남쪽으로 안산군 경계까지 16리이며, 서쪽으로 부평부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 양천현 경계까지는 27리이며, 노량까지는 23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31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 잉벌노현(仍伐奴縣)인데, 경덕왕이 곡양(穀壤)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금주(衿州) -금(衿)을 금(黔)이라 한 곳도 있다.- 라고 고쳤고, 성종(成宗)이 단련사(團練使)를 설치하였는데, 목종(穆宗)이 혁파하였다. 현종 9년에 수주(樹州)에 예속시켰고, 명종이 비로소 감무를 설치하였다. 본조 태종 14년에 과천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을 만들었다가 두어 달만에 혁파하고, 또 양천과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으로 만들었는데, 한 해만에 혁파하였다. 16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현감으로 만들었고, 세조조에 과천과 병합했다가, 얼마 못 가서 복구하였다.

[풍속]속동제완(俗同齊緩)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습속이 비록 제(齊) 나라 땅같이 느리다.” 하였다. 제영(題詠) 편에 보인다.

[산천]삼성산(三聖山)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호암산(虎巖山)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범 모양과 같은 바위가 있으므로, 이름이 되었다. ○ 윤자(尹慈)의 설(說)에,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가는 것 같다. 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호암(虎巖)이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보고 바위 북쪽 모퉁이에 절을 세워서 호갑(虎岬)이라 하였다. 거기에서 북쪽으로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 하고, 또 북쪽 10리 지점에 사자암(獅子菴)이 있다. 모두 범이 가는 듯한 산세를 누르려는 것이었다. 내가 경오년 봄에 어사(御史)를 그만두고 이 고을의 원이 되었는데, 고을 민속이 본래 어리석었으며, 나도 또한 어리석었다. 사람들은 모두 바위 때문에 그러하며, 전부터 이를 진압하려 한것도 어리석게 되지 않으려는 바람이라 한다. 나는 말하기를, ‘옛적에 광천(狂泉)ㆍ음천(淫泉)ㆍ탐천(貪泉)이 있었는데,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미치거나 음탕하거나 탐하거나 하지 않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이름되었다.’ 한다. 그렇다면, 이 바위 밑에 살면서 여기에서 먹고 여기에서 놀고 여기에서 자고 일어나고 하는 자가 어리석게 되지 않는 줄을 어찌 알겠나. 이치가 혹 그럴 듯하나, 또한 알 수 없다. 옛적에 오은지(吳隱之)가 원이 되어서 탐천 물을 마셨으나, 마침내 탐하지 않고 청백한 지조를 더욱 힘썼다. 그리하여, 시험삼아 이제(夷齊 백이ㆍ숙제)에게 마시게 하여도 마침내 본심을 바꾸지는 않으리라는 시를 지었다. 하물며, 사람의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은 당초 태어날 때에 품수한 것이니, 산천이 어찌 바꾸어지게 하리요. 가령 이 고을에 사는 자로서 혹 안자(顔子)의 어짊과 같이 어리석은 듯하면서 어리석지 않는 자가 있는지도 마침내 알 수 없다. 이것으로써 미루어 보면, 민속과 나의 어리석음은 바위 때문이 아닌 것이고, 바위 때문이라 말하는 자가 진실로 어리석은 자이다. 아, 당 나라 유자후(柳子厚)가 염계(冉溪) 풍경을 사랑하여, 거기에다 집을 짓고 우계(愚溪)라고 고쳤다. 이것은 자기의 어리석음으로 이름 붙인 것인데, 대개 예전 우공곡(愚公谷)의 남긴 뜻이며, 어리석지 않음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어리석은 나의 어리석음은 한 마디 말과 한 번의 움직임과 공사(公私) 간에 어디에 가나 어리석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도 유주(柳州 유자후)의 우계라는 우의 뜻을 가만히 본따서 호암을 고쳐, 우암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참으로 어리석은 데에야 어찌하랴. 감히 설을 지어서 어리석지 않은 군자를 기다린다.” 하였다. 독산(禿山)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 강희(姜曦)가 지은 설에, “어떤 사람이 와서 나에게 묻기를, ‘자네가 독산이라 호한 것은, 살고 있는 곳에 따라서 호한 것인가, 또는 딴 뜻이 있는 것인가. 어찌 설명이 없는가.’ 하였다. 내가 응답하기를, ‘내 집 지은 곳에 산 하나가 있는데, 활딱 벗어져서 나무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산이라 한다. 아, 이 산의 토성(土性)이 본래부터 어찌 나무가 없어 그러하리요. 한성(漢城) 교외에 위치한 까닭으로 도끼로 찍히고, 소ㆍ염소 따위에 먹이는 것이 나날이 심하였던 때문이다. 내가 이 산 밑에서 생장하여, 이런 일들을 목격하면서 개연히 탄식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사람의 본성도 또한 이 산에 나무 있는 것과 같다. 진실로 그 심성을 존양하지 못하면, 뭇 사욕이 공격해 오는 것이 바로 이 산 나무를 도끼와 소ㆍ염소 따위가 해치는 것과 같다. 물(物)과 나라는 것이 이미 대립되고 사심이 한계를 만들면, 나의 본성이 어두워지는 것도 또한 이 산이 활딱 벗겨진 것과 같다. 사람으로서 이런 극도에 이르면, 금수와 무엇이 다르랴. 아, 산에 본래 나무가 있었는데, 활딱 벗겨졌고 사람도 본성이 있었는데, 어리석게 된 것이 어찌 본성 때문이리요. 진실로 능히 존양하기만 한다면, 비와 이슬에 젖어서 싹과 움이 다시 날 것이며, 밤 기운이 있어서 천성이 드러날 것이다. 사람이 되어서 이 천성이 있는 자는 공경으로써 마음을 두어서 사물에 흔들리고 빼앗기게 되지 않게 하지 않으리요. 감히 이것으로써 표준하여 스스로 나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하니, 손이, ‘자네 말이 옳다. 삼가 가르침을 받았다.’ 하였다.” 했다.

양화도(楊花渡) 현 북쪽 33리 지점에 있고, 도승(渡丞)이 있다. 한성부 조에도 적었다. 바위곶[巖串]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 이색의 시에, “금주(黔州) 북쪽 양천 동쪽인데, 한수가 북으로 꺾이면서 한없이 흘러간다. 바다에 조종(祖宗)하는 것은 〈우공편(禹貢篇 서경의 편명)〉에 나타났고, 서울을 감싼 것은 어룡(魚龍)이 달리는 듯하다. 남방(南方)에서 조운(漕運)하는 것이 모두 모이는 곳이어서 천 척 배의 노(櫓) 소리가 공중을 흔든다. 내가 처음 한산촌(韓山村)에 왕래할 때, 뱃 다락[拖樓 배의 고물]에 높이 누워서 바람에 돛 올렸다. 순식간에 훌쩍 백여 리를 달리니, 등불이 여기저기 흩어졌는데, 술잔 거듭 들었었다.” 하였다. 대택(大澤)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날씨가 가물면 기우(祈雨)한다. 하택(下澤) 현 북쪽 7리 지점에 있다. 대천(大川) 현 서쪽 4리 지점에 있다. 물의 근원이 과천현 관악(冠岳)ㆍ청계(淸溪) 등 여러 산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양천현 철곶포(鐵串浦)에 흘러 든다.

[토산]붕어ㆍ게.

[불우]안양사(安養寺) 삼성산(三聖山)에 있다. 절 남쪽에 고려 태조가 세운 7층 벽돌 탑이 있고,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비명은 글자가 결락되었다. ○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중신기(重新記)〉에,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한(漢) 나라 축법란(竺法蘭)부터였다. 드디어 천하에 만연하여졌고, 우리 동방에는 아도(阿道)가 시작하였는데, 실상 신라 때였다. 그 설법이 굉대하고, 또 화복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므로, 천하가 다 붙좇는다. 비록 영명(英明)한 임금과 충의한 신하라도 가끔 절 집을 건립하여, 불교를 드날렸다. 대개 국가를 위해서 복과 이익을 구하고자 한 것이니, 또한 군자의 마음 씀이 후한 것이다. 우리 태조가 개국한 초기에 불법 있는 자가, 큰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어서, 그들의 말을 꽤 채용하여, 탑묘(塔廟)를 많이 설치하였다. 지금 금주(衿州) 안양사(安養寺) 탑같은 것도 그중에 하나이다. 자은종사 양가 도승통 임공(慈恩宗師兩街都僧統林公)이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안양사 탑은 성조(聖祖)께서 옛적에 세운 것이다. 벌써 무너졌으므로, 문하 시중 철원 부원군 최공(門下侍中鐵原府院君崔公)과 지금 주지 대사 혜겸(住持大師惠謙)이 중수하여 새롭게 하였다. 겸은 나의 문도(門徒 제자)이다. 나를 소개로 하여 선생에게 기문을 구하는 바, 자세한 것은 반드시 겸이 말할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겸이 왔는데, 그는 말하기를 ‘겸이 이 절에 머문 지가 몇 해째입니다. 절 역사를 상고하니, 옛적에 태조께서 조공(朝貢)하지 않는 자를 정벌할 참인데, 여기를 지나다가 산 꼭대기에 구름이 오체(五彩)를 이룬 것을 바라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겨서 사람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습니다. 과연 늙은 중을 구름 밑에서 만났는데, 이름은 능정(能正)이었습니다. 더불어 말해 보니, 뜻에 맞았습니다. 이것이 이 절이 건립하게 된 연유입니다. 절 남쪽에 있는 탑은 벽돌로 7층을 쌓았고 기와로 덮었습니다. 제 1밑층은 행각이 빙 둘렸는데, 12칸입니다. 벽마다 부처와 보살과 사람과 하느님의 화상을 그렸습니다. 밖에는 난간을 세워서 드나드는 것을 막았는데, 그 거창하고 장려한 모습은 딴 절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과 풍우에 거의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겸은 아침저녁으로 보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진실로 다시 새롭게 하고자 한 것이 오래였으나, 힘이 모자랐습니다. 신유년 가을 7월에 시중 최공을 뵙고 이 일을 고했더니, 공이 내 젊었을 때 한 번 탑 밑에서 유숙하면서 성조께서 처음으로 경영하심을 우러러 생각하고 사사로 맹세하기를 신이 타일에 진실로 출세한다면, 이 탑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하늘에 성조의 영에 죄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벼슬이 뭇 관료(官僚)의 위에 있으니, 출세하였다 할 것이다. 내 마땅히 나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고는 곧 양주, 광주 안찰사(按察使)에게 통첩을 보내어 군조(軍租)를 털어서 그 비용에 충당하고 장정(壯丁)을 불러서 그 역사를 맡겼습니다. 겸도 자신의 재산을 다 내고 단월(檀越 단골 시주)의 희사(喜捨)를 받아서, 쌀ㆍ콩ㆍ돈ㆍ베 약간을 얻었습니다. 또 놀고 있는 겸 같은 자 약간을 청하였습니다. 공사를 시작하기는 이해 8월 모일이었고 일손을 끊기는 9월 모일이며, 낙성(落成)은 10월 모일이었습니다. 이날 전하께서 내시(內侍) 박원계(朴元桂)를 보내어 향을 내렸습니다. 승려 천 명을 모아 크게 불사(佛事)를 올리고, 사리(舍利) 열둘과 불아(佛牙) 하나를 탑 속에 봉안하였는데, 사부(四部) 대중에게 널리 시주한 것이 무려 3천 명이었습니다. 그 단확(丹雘)은 임술년 봄 3월에 하였고, 그 화상(畫像)은 계해년 가을 8월에 하였습니다. 탑안 네 벽 중 동쪽은 약사회(藥師會), 남쪽은 석가 열반회(釋迦涅槃會), 서쪽은 미타 극락회(彌陀極樂會), 북쪽은 금경신중회(金經神衆會) 상을 그렸습니다. 행각이 12칸인데, 벽마다 한 칸씩 그린 것은 소위 12행년불(十二行年佛)입니다. 무릇 역꾼이 4백 명이 넘었으며, 쌀이 5백 95섬, 콩이 2백 섬, 베가 1천 1백 55필이 소용되었습니다. 아, 이것은 큰 비용이며 큰 공역인데, 마침내 능히 완성한 것은 모두 우리 시중께서 발원(發願)하기를 맹세한 소치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공은 오직 국가 복리만을 구한 것이고, 어찌 자기 일신만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만약 영구하기를 도모하려면, 문사(文辭)에 의탁하지 않으면 인연할 길이 없으니, 선생이 짓기를 원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내 불씨(佛氏)에 미쳐 입문(入門)하지 못한 자이다. 감히 무엇을 말할 수 있으리요. 비록 그러나, 내가 태사씨(太史氏 역사 기록관)로 되어, 무릇 흥작(興作)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적는 것이 직분이다. 하물며 이 탑에서 성조와 현상(賢相)의 두터운 마음 씀을 볼 수 있음에랴. 이것을 적을 뿐이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붉은 다리를 지나 감색(泔色) 불궁(佛宮)에 이르니, 조촐한 놀이가 다행히 부처 있는 곳과 함께 했다. 푸른 못에는 교교하게 가을 달이 잠겼고, 붉은 잎사귀에는 쓸쓸하게 밤바람이 운다. 불사(佛社) 안에는 일찍이 사객(謝客)을 용납하지 않았고, 시냇가에서 다행히 도옹(陶翁 도연명)을 맞이한다. 서로 이끌어 웃음 띄며 돌아가기를 늦추는데, 지는 해가 서쪽에 넘어가니 재가 반쯤 붉다.”

○ 또, “파리한 말 몰아 서울을 지향하다가, 우연히 안양사에 들어 유숙한다. 새벽닭이 처음으로 소리 치는데, 데운 밥 먹고 그윽한 골에서 나온다. 조각달은 옥 고리처럼 나지막하고, 성긴 별은 금 좁쌀을 흩은 듯하다. 깊은 골짝 길은 성난 뱀이 오듯 꾸불꾸불 3백 굽이여라. 시냇물 얼음 되니 새로 흰 것이 보태었고, 잿마루에 구름 끼니 본래 푸름이 없어졌다. 여윈 말은 고슴도치 털처럼 까칠하고, 파리한 아이는 거북이 등처럼 움츠린다. 내 본래 풍진 바깥 사람으로서, 평생에 얽매임이 적었다. 10년 동안 산림에 놀 제, 건구(巾屨)로서 사슴을 좇았었네. 문득 조물(造物)의 속임을 만나 내 한가함을 오로지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명리(名利) 속에서 천리 길 행역(行役)이 괴롭구나. 어느 때나 인패(印佩)를 던지고 완적(阮院籍)이 궁도(窮途)에서 울던 꼴 면하리.” 하였다. 도안사(道安寺) 삼성산에 있다.

○ 권제(權踶)가 젊었을 때에 네 벗과 함께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 그 뒤에 이들은 모두 과거에 올랐다. 벗에게 부친시에, “고인(故人)은 아직도 예전대로 삼옷 입고서 용문(龍門) 약속 어김을 일찍 웃었다. 삼성산 신령이 응당 경사로 여기리. 네 가지 단계(丹桂)가 아침 볕에 빛난다.” 하였다. 안흥사(安興寺)ㆍ삼막사(三藐寺)ㆍ망일사(望日寺)ㆍ성주사(聖住寺) 아울러 삼성산에 있다. 사자암(獅子菴) 궁교산(弓橋山)에 있다.

[고적]영랑성(永郞城) 석축이며 삼성산에 있다. 둘레가 3천 7백 50척이고, 성안에 못 하나가 있는데, 대정(大井)이라 부른다. 호암산성(虎巖山城) 석축이며 둘레는 1천 6백 81척이다. 성안에 큰 못이 있는데, 날씨가 가물면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인물]고려 강감찬(姜邯贊) 현종 때 거란 군사를 물리쳤다.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한 사신이 있어서 밤에 시흥군에 들어오다가 큰 별이 인가(人家)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전을 보내서 보도록 하였다. 마침 그 집 며느리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신이 이상히 여기고 아이를 데려다가 길렀는데, 이 사람이 강감찬이다. 뒤에 송(宋) 나라 사신이 보고, 자신도 모르게 두 번 절하면서, ‘문곡성(文曲星)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지금 여기에 있다.’ 하였다.” 한다.


한강(漢江) 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목멱산 남쪽으로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고 하였다. 신라 때에 북독(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祀)로 적혀 있으며,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고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의 오대산 우통(五臺山于筒)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倉水)와 합하고, 양근군(楊根郡)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하며, 광주(廣州) 지경에 이르러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광진(廣津 광나루)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되고, 두모포(豆毛浦 두뭇개)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露梁)이 되고, 용산강(龍山江)이 되며, 또 서쪽으로 가서 서강(西江)이 되며, 시흥현(始興縣)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현(陽川縣)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며, 교하군(交河郡)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부(通津府)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용산강(龍山江) 도성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고양군(高陽郡) 부원현(富原縣) 땅이다. 경상ㆍ강원ㆍ충청ㆍ경기도 상류의 조운(漕運)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서강(西江)의 한 갈래가 바로 시흥현(始興縣)에서부터 방학동(放鶴洞)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서 양화도에 이르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니, 이것이 용산포(龍山浦)이다.


양화도(楊花渡) 곧 서강의 하류이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는 토정리(土亭里)ㆍ옹리 상하계(甕里上下契)ㆍ현석리(玄石里)ㆍ율도(栗島)ㆍ다인리(多人里)ㆍ하중리(下中里)ㆍ합정리(合井里)ㆍ수파리(水波里)ㆍ망원정 일이계(望遠亭一二契)ㆍ시흥 신정리(始興新井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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