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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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畿內)
11.운양부(鄖陽府)는 죽산(竹山)이다.
湖北省(領十府。一直隸州。七知州。六十縣)。
○鄖陽府(名魏興。領六縣)鄖縣(鄖鄉附府)房縣(房陵)竹山(上庸)竹谿(安城)保康(光遙)鄖西(上津)-地輿名目(一十九省)
鄖陽地名。湖北省舊府名,今鄖縣為其舊治
[建制沿革]湖北位於長江中游,洞庭湖以北,故名湖北,簡稱鄂。湖北歷史悠久。夏王朝時期,夏文化的影響已經到達江漢地區。商朝建立後,湖北即納入商的版圖。西周時期,湖北境內已出現諸多小國,春秋戰國時期,南方諸國逐漸統一于楚。
明代(1368-1644年)初,湖北屬湖廣行省。後分全國為十三個布政使司。今湖北全境基本屬於湖廣布政使司(治江夏,今武漢市武昌),有武昌府、漢陽府、黃州府、承天府、德安府、荊州府、襄陽府、鄖陽府。
历史沿革
竹山为古庸国故址。
春秋楚灭庸置县,秦、西汉为上庸县,属汉中郡。
东汉至南齐为上庸郡。
西魏因黄竹岭之竹色黄,改名竹山。
商代前为汉水流域重要部落方国,称庸国。
公元前221年(秦始皇二十六年),秦始皇统一中国,分天下为36郡,庸地复置上庸县,改隶汉中郡,属梁州。
552年(西魏废帝元年),改安城为竹山。北周时,改上庸县为孔阳县。
598年(文帝开皇十八年),改孔阳县为上庸县,改罗州为房州,领上庸、竹山、光迁、永清4县,605年(隋炀帝大业元年),改房州为房陵郡,治竹山。唐初沿隋制。
636年(唐太宗贞观十年),废迁州,置房州,治竹山,领房陵、竹山、永清、上庸4县,属山南东道。
742年(玄宗天宝元年),改房州为房陵郡。
758年(肃宗乾元元年),复房州,竹山属之。五代时,上庸、竹山仍属房州。
宋初沿旧制。
986年(北宋太宗雍熙三年),省上庸入竹山,仍隶房州。
1130年(南宋高宗建炎四年),置金、均、房州镇抚使,属利州路。
1135年(高宗绍兴五年),隶襄阳路。
1137年(绍兴七年),改隶京西南路。
1141年(绍兴十年),置金、房、达、开安抚使,改属利州路,房州领房县、竹山2县。元沿宋制。
1342年(顺帝至正二年),省房陵入房州,竹山仍隶房州,属襄阳路。
1368年(明太祖洪武元年),改襄阳为府,领竹山、房县、上津、郧县等县。
1374年(洪武七年),省竹山入房县,属湖广布政使司襄阳府。
1380年(洪武十三年),复置竹山县,仍属襄阳府。
1476年(宪宗成化十二年),设郧阳府,竹山属之,同时割竹山县西尹店社置竹溪县。清沿明制。
1664年(圣祖康熙三年),郧阳府属湖北布政使司,领郧县、郧西、竹山、竹溪、房县、保康6县。
1821年(宣宗道光元年),割竹山、竹溪、房县之南乡置白河厅(柳林白河口)。
1864年(穆宗同治三年)裁白河厅,复原制。
民国初,全国实行省、道、县制,竹山属湖北省襄阳道。
1932年(民国二十一年),改属湖北省第十一行政督察区。
十堰市
2市辖区:张湾区和茅箭区
代管县级市:丹江口市
5县:郧县、竹山县、房县、郧西县和竹溪县
历史
十堰作为地理名称来由,其来历有两种说法:
1. 一说来源于十堰镇。相传古时此地原名张家庄,后改名陈家街,清代中叶,人们在陈家街东侧的百二河拦河筑坝,沿河先后筑起头堰、二堰、三堰、四堰、五堰、六堰,在花果园犟河上拦河修起了头堰、二堰、三堰、四堰,两处共有十个堰;自此筑起十个堰以后,十堰便成为行政区划的一个专名;
2. 第二个说法源自明代志书记载堰有10处。即十堰、九倾坪堰、虎尾堰、白龙堰、尖山堰、黄龙堰、双龙堰、佃户堰(白浪上堰)、么堰(白浪中堰)、谭家堰(白浪下堰),十堰作为地名,便由此而来。此说法不可信,明代至中华人民共和国前,白浪属于襄阳府均州,十堰作为区划属于郧阳府郧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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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죽산현(竹山縣)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에서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죽주(竹州)로 고치었다. 성종(成宗)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 을사에 단련사를 폐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 임내에 붙이었다.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에 의하여 죽산 현감(竹山縣監)으로 고쳤다. 별호는 음평(陰平)【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또는 연창(延昌)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경기(京畿) 양지(陽智)에 이르기 16리, 서쪽으로 안성(安城)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진천(鎭川)에 이르기 21리, 북쪽으로 양지(陽智)에 이르기 36리이다.
호수는 4백 70호, 인구가 2천 1백 1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8명이요, 선군이 1백 35명이다.
토성(土姓)이 9이니, 박(朴)·최(崔)·안(安)·양(梁)·이(李)·유(庾)·민(閔)·김(金)·음(陰)이다.
땅이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으며, 기후는 차다. 간전(墾田)이 5천 7백 89결이요,【논이 9분의 4가 된다. 】토의(土宜)는 기장·벼·콩·조·팥·메밀·참깨·밀이다. 토공(土貢)은 대추·칠(漆)·족제비털·잡깃[雜羽]·종이·삵괭이가죽[狸皮]이요, 약재(藥材)는 인삼이다.
역(驛)이 2이니, 분행(分行)·좌찬(佐贊)이요, 봉화가 1곳이니, 현의 북쪽 건지산(巾之山)이다. 일명(一名) 검단산(劎斷山)이라 한다.【동쪽으로 충주(忠州) 망이성(望伊城)에, 서쪽으로 용인(龍仁) 석성(石城)에 응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죽산현(竹山縣)
동쪽으로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충청도(忠淸道)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26리이며, 서쪽으로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3리이고, 북쪽으로 양지현(陽智縣) 경계까지 49리이며, 서울까지 1백 70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인데, 신라에서 고쳐 개산(介山)으로 일컬었다. 고려 초년에 죽주(竹州)로 고치었고, 성종(成宗)이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이 폐하였다.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에 붙였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현감으로 만들었다. 무릇 군(郡)과 현(縣)의 이름이 주(州) 자(字)를 가진 것은, 도호부 이하는 모두 산(山)과 천(川)의 글자로 대신하여 부(府)ㆍ목(牧)과 구별하였다. 뒤의 것은 이것과 같다. 세종 16년에 충청도로부터 옮겨 경기(京畿)에 예속시켰다.
[산천]건지산(巾之山)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정배산(鼎陪山)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돌을 이고 있는데, 그 돌 구멍에 흰 뱀이 있어 매년 큰 물이 질 때를 타서, 천민천(天民川)에 내려와 사람과 가축의 우환이 되었다. 칠현산(七賢山)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구봉산(九峯山) 현 서쪽 22리 지점에 있다. 비봉산(飛鳳山) 현 북쪽 4리 되는 곳에 있다. 생현(栍峴) 현 동쪽 15리 지점이며, 이천부(利川府) 경계에 있다. 천민천(天民川)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근원이 건지(巾之)ㆍ정배(鼎培) 두 산에서 나와, 여주(驪州) 여강(驪江)으로 들어간다. 대사천(大寺川) 현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이 칠현(七賢)ㆍ구봉(九峯) 두 산에서 나와 천민천(天民川)과 합한다. 월라정지(月羅井池)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토산]자기(磁器)ㆍ도기(陶器).
[불우]칠장사(七長寺) 칠현산(七賢山)에 있다.
○ 신우(辛禑) 9년에 왜적이 함부로 내지(內地)로 들어오므로, 충주 개천사(開天寺)에 감추어 둔 사적(史籍)을 여기에다 옮기었다.
○ 권근(權近)이 수찬(修撰) 배중원(裵仲員)을 보내어 사적을 포쇄(曝晒)하는 서(序)에, “본조가 바다 동쪽을 차지한 지 수백 년에, 처음에는 국사(國史)를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감추었는데, 대개 후세에 난리를 만나서 잃어버릴까 염려함이다. 가야산이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가장 멀고 험하며, 해인사가 가야산에 있어서는 가장 궁벽하고 깊이 막혔기 때문에, 국가에 비록 변이 있어도 난이 일찍이 미치지 않았으니, 조종(祖宗)의 염려가 심원(深遠)하였다. 근래에는 왜적을 제어함에 기율(紀律)을 잃어서, 깊이 들어와 주와 현을 도둑질하므로 가야가 거의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홍무(洪武) 기미년 가을에 그 사적을 선산(善山)의 득익사(得益寺)로 옮겼고, 신유년 가을에 조령(鳥嶺)을 넘어 북쪽으로 와서, 충주(忠州)의 개천사(開天寺)에 수운하였으며, 이번 계해년 여름에 왜적이 또 충주의 옆 고을에 침입하자, 7월에 또 개천사로부터 죽주(竹州)의 칠장사(七長寺)로 옮기었으니, 땅의 험하고 먼 것도 믿을 수 없다. 적이 감히 깊이 들어오는 것이 이와 같으니, 아, 이것으로 세상이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였다. 비족사(飛足寺) 구봉산(九峯山)에 있다. 장광사(長光寺)ㆍ지통사(智通寺) 모두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응석사(凝石寺) 생현(栍峴) 서쪽에 있다. 고려 명종(明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소향사(燒香使)로 이 절에 이르렀다. 절 중의 꿈에 태조(太祖)가 명종(明宗)에게 아홀(芽笏) 하나를 주고, 아울러 시를 주기를, “네게 한 아흘을 주노니, 법사(法師)가 모시어 떠나지 않으리라. 거년(居年)은 구구구(九九九)요, 향위(享位)는 칠칠이(七七二)이다.” 하였는데, 명종은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뒤에 왕위에 올라 재위(在位)한 지 28년에 최충헌(崔忠獻)이 폐하게 되었으니, 그 응험(應驗)이 틀리지 않았다.
[고적]죽주고성(竹州古城) 현 동쪽 5리 되는 태평원(太平院) 북쪽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3천 8백 74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 고종(高宗) 13년에 송문주(宋文冑)가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고가 죽주성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나가 쳐서 쫓았다. 몽고가 다시 포(砲)로 성의 사변을 공격하자 성문이 곧 무너졌다. 성중에서도 또한 포를 가지고 마주 공격하자, 몽고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몽고는 또 사람의 기름을 준비하여 짚에 부어 불을 놓아 공격하므로, 성중의 사졸이 일시에 문을 열고 돌격하니, 죽은 몽고군이 이루 셀 수가 없었다. 몽고는 여러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문주(文冑)가 구주(龜州)에 있을 때에는, 몽고의 성에 공격하는 술책을 익히 알았기 때문에, 그 계획을 먼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문득 군사들에게 고하기를, “오늘은 적이 반드시 아무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기계를 준비하여 응해야 한다.” 하였다. 적이 이르러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성중에서 모두 귀신이라고 일렀다. 만선사(萬善寺)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절은 푸른 풀에 싸이어 침침하고, 길은 푸른 덩굴 속에 들어가 깊숙하다. 골이 좁으니 한가한 구름이 모이고, 정원이 거칠으니 모진 불길이 침노한다. 새벽 바람에 목탁 소리 잦고, 저녁 달은 못 가운데 잠겼도다. 푸른 산아 잘 있거라, 벼슬을 그만두면 다시 찾아오련다.” 하였다. 연창관(延昌館)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내가 편평하니 들이 넓은 것을 알겠고, 꽃이 떨어지니 봄이 깊은 것을 깨닫도다. 손의 길 연창관 소나무 바람이 내 꿈을 맑혀 준다.” 하였다. 봉업사(奉業寺) 비봉산(飛鳳山) 아래에 있다. 고려 때에 태조(太祖)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 12년 2월에 거가(車駕)가 청주(淸州)를 떠나서, 이 절에 들러 진전(眞殿)에 참알(參謁)하였다.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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