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삼차수(三叉水)-吴川市-김해

한부울 2010. 6. 10. 23:14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누정편에

칠점산(七點山) 앞에 저녁노을이 비끼고, 삼차수(三叉水) 나루터엔 푸른 물결 일어나네. 봄바람 부는 2월에 금주(金州)의 길손은 꼭 강남(江南) 길을 가는 듯하네....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의 풍속으로『신증』에 석전(石戰)을 좋아한다 하였고 매년 4월 초파일부터 아이들이 무리로 모여서 성 남쪽에서 석전을 연습하고 단옷날이 되면 장정(壯丁)이 다 모여 좌우 패로 갈려져서 기를 세우고 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놀고 돌을 비 쏟아지듯 던져서 승부가 결판난 다음이라야 그만둔다. 비록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서 수령도 금하지 못한다. 경오년에 왜(倭)를 정벌할 때에 돌을 잘 던지는 자를 선봉으로 삼았더니, 적군이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였다 한다.

 

사실 단오는 촉나라에서 굴원이란 전설과 함께 대륙 사천지방과 양자강 이남지방에서 옛부터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풍속이다. 그 중에서도 용배놀이와 함께 석전(石戰)놀이는 유명한데 강을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갈라져 상대방에세 투석전을 벌리는 것인데 한쪽이 도망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 치열한 공방전의 위험한 놀이였다.

대륙 장강이남지역에서 벌어지던 놀이가 전통적으로 김해 도호부에서도 벌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차수(三叉水)는 세 갈래 물길이 모이는 곳이라고 풀이 된다.

그러나 삼차수와 비슷한 삼차하(三叉河)보다는 삼차강(三叉江)으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으며 여기 저기 똑같은 지명을 사용하고 혼란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양자강 하류쪽에서도 삼차강이란 이름으로 지명을 말 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때문에 대륙에서 지명 찾기란 쉽지 않다.

문제는 삼분수(三分水) 즉 삼차수(三叉水)가 있었다고 하는 김해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분명 김해는 한반도에 있었서야 함인데 그렇지가 못하다.

왜냐하면 아래 삼차수가 그려진 옛 지도의 김해위치와 지형이 지금 현재 구글 위성으로 보는 김해 지형과 위치가 전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도대체가 딴판처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럼 김해는 어딜 말한 것일까?

바다 남해로 흘러드는 곳, 남해와 가까운 곳에 진짜 삼차수 삼차강이 있어야 한다.

그곳을 찾아보니 광동성 오천시(吴川市) 경내에 삼차강이 있다.(广东省吴川市境内的三叉江)


삼차하(三叉河)라 한 것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선조(宣祖)에게 유성룡이 김해(金海)와 양산(梁山) 두 읍의 사이에 삼차하(三叉河)와 칠점산(七點山)이 있다고 했던 기록이 있고

해동역사(海東繹史) 지리고(地理考) 산수(山水) 편에 낙동강(洛東江) 설명에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김해부(金海府)의 동쪽에 이르러서 흩어져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김해(金海)와 양산(梁山) 사이에 있었던 삼차강(三叉江)

대륙오천시에 三叉江, 三叉河, 三叉水 라고 하고 三分水 라고도 하는 삼차강(三叉江)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고 그 바다를 지금도 남해라고 한다.

차(叉)는 한어 사전에는깍지 낄, 작살-차, 가로막다. 막히다. 차단(遮斷)하다. 벌리다. 펼치다. 등 뜻이 있다.

삼차강(三叉江)은 세 갈래 깍지 낀 것처럼 교차되는 강이라는 뜻일게다.

***********

三叉河 三分水 三叉水


고려시대 기록에 의하면 낙동강은 하류(下流)에서 삼차수(三叉水)로 흘렀다. 낙동강 물이 하구(河口)에 이르러 삼각주(三角洲) 하중도(河中島)를 형성하면서 바다를 밀어내고 모래섬 사이로 세갈레 물길이 흘러 내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보면 고려시대 예종 때 김해도호부사로 와 있던 한충(韓沖)이 본도가 땅이 넓어서 다스리기가 어려우므로 임금에게 상주하니 하룻밤 사이에 낙동강이 세갈레로 갈라져서 삼차강(三叉江)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있다. 한충(韓沖)이 꿈에 천상(天上)에서 세가락의 비녀, 즉 삼차(三釵)를 얻었는데 깨어나서 이 강에 던졌더니 강물이 세갈레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한 줄기는 감동포(구포)에서 소요도(所要島)의 동쪽에 와서 바다로 들어가고, 한 줄기는  출두도(出頭島)의 동쪽에서 덕두도(德頭島)의 서쪽에 와서 바다로 들어가고, 한 줄기는 대저도(大渚島)의 서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삼차수(三叉水) 삼분수(三分水) 또는 삼차하(三叉河), 삼차강(三叉江)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강 동쪽 구포의 감동창(甘同倉)이 있던 나루터 언덕 위에 누각(樓閣)을 지으면서 삼차수와 칠점산(七點山)의 경관이 한 눈에 펼쳐져 보이는 곳이라 삼칠루(三七樓)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广东 吴川 三叉江

中国广东省吴川市的河川(三叉江)


감강(鉴江,  鑒江) 풀이하면 거울 강이다.

복건성(福建省)과 광동성(广东省)에 위치한 강.


吴种市地势南低北高,最高点为海拨172米的尖山岭。主要河流有鉴江、袂花江、三叉江、梅江等“四江三河”,海岸线长48公里。土特产有沙螺(고둥소라)、海蜇(해파리)、米蟹(게)、禾花雀(참새);矿产资源主要有石墨、玻璃砂(glass sand)、高岭土(흰회색진흙)、石英(차돌)、花岗岩等。


吴川始置县于隋开皇九年,唐属罗州,宋属辨州,元属化州路,明清属主州府 1952年与梅茂县合并为吴梅县,1953年复 析吴川县,1994年设立吴川市(县级)。


吴川山脉: 吴川有3个小山岭,第一个是尖山岭又名特思山。位于吴川市西部的塘缀镇与湛江市的龙头镇交界处,海拨172米,该山表土1米以下全部是花岗岩。东西面坡度为30度、北面陡峭、南麓延伸约1公里,坡度较缓,约为30度。第二个是高山岭(又名丽山),位于吴川市板桥镇北部与化州市杨梅镇交界,海拔56米。这山风景秀丽,景色迷人。吴川八景之一的“丽山樵唱”就在这里。第三个是大座岭,位于浅水镇,面积约3平方公里,海拔56米。还有一个就是唐缀镇的大坳岭,海拔53米。除上此之外,其余山丘均在海拔10~30米之间,坡度一般在5~10度。


资源:吴川,物华天宝,资源丰富。这里气候温和,山青水秀,土地肥沃。盛产稻、糖蔗(사탕수수)、花生(땅콩)、黄麻、西瓜(수박)、柑橙(orange)、龙眼北运菜等农产品。万亩生态保护区,是各种珍禽、候鸟的天堂,有“天上人参”之称的禾花雀就是云集于此。水产品以海蜇、沙螺、米蟹著名。矿产资源有石墨矿(흑연)、钛铁矿(Titan)、黄金矿以及石英、花岗岩、高岭土、玻璃砂等。

*************************************

선조 28년 을미(1595,만력 23)  7월8일 (기묘)

별전에 나아가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다


成龍曰: “賊雖撤去, 南邊之空虛, 難以守之, 此誠可慮。 如巨濟, 則金應瑞入據; 熊川、加德等處, 則白士霖等可以守之, 而大槪倭人, 以我國所附之人甚衆, 以流入元居等人, 分類作鎭云云。 因其形勢, 以爲土兵, 兼作耕墾, 則可以防守矣。 大槪留防軍士事, 不可不變通矣。 今計, 以土兵爲防守, 以平時所賦之物, 不爲捧納, 以其物分給土兵, 則軍情必甚喜矣。”

上曰: “監司可爲乎?” 成龍曰: “雖善爲者, 物力不足, 或事勢有所未及, 不如體察使之通諸道而爲之措處也。 金海、梁山兩邑之間, 有三叉河、七點山, 其下, 賊大作屯田, 又大作長廊, 以二十人作隊耕耘云。 賊若退去, 則其屯田可以收穫而爲兵糧, 而無人守之, 必爲土賊所收。 若使高彦伯守之, 則猶可爲, 而無糧道, 則軍人必有掠奪之弊, 勢不得保存矣。” 上曰: “誰可守之? 若賊退, 則不可不急急防守也。 近日水戰等事, 不得爲之者, 仍以失巨濟故也。 如熊川、天城、加德等處, 盡爲空虛之地, 亦不可不趁時入據。 若賊退, 則以李舜臣, 防守於巨濟可也。”

성룡이 아뢰기를“왜적이 비록 철수한다 하여도 텅 빈 남쪽 변방을 지키기가 어려우니, 이것이 참으로 염려됩니다. 거제는 김응서(金應瑞)가 들어가 점거하고 웅천(熊川)과 가덕(加德) 등 지역은 백사림(白士霖) 등이 지킬 만합니다. 대개 왜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저들에게 붙은 사람들이 매우 많으므로 흘러 들어온 사람과 원래 살던 사람을 분류하여 진(鎭)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형세를 인하여 토병(土兵)을 만들고 겸하여 농사를 짓고 개간하게 하면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변방에 머물며 방어하는 군대의 일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계획을 세워 토병으로 방어하게 하되 평소에 내던 공물(貢物)을 봉납(捧納)시키지 말고 그 물건을 토병에게 나누어 주면, 군사들이 반드시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監司)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성룡이 아뢰기를,

“비록 잘하는 자라도 물자가 부족하여 혹 일의 형편상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체찰사가 여러 도(道)를 통해 조처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김해(金海)와 양산(梁山) 두 읍의 사이에 삼차하(三叉河)와 칠점산(七點山)이 있는데 그 밑에서 왜적들이 대대적으로 둔전을 개간하고 또 큰 행랑을 지어놓고는 20명씩 부대를 편성해 농사를 짓는다고 합니다. 왜적이 만약 물러가면 그 둔전을 수확하여 군량을 만들 수 있는데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반드시 토적(土賊)들이 거두어 갈 것입니다. 고언백(高彦伯)을 시켜 지키면 그런대로 되긴 하겠는데 식량이 없으면 군인들이 반드시 백성을 약탈하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어서 형편상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누가 지킬 만한가? 왜적이 물러가면 급히 방수(防守)하지 않을 수 없다. 근일 수전(水戰) 등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거제(巨濟)를 잃었기 때문이다. 웅천(熊川)·천성(天城)·가덕(加德) 등 지역도 모두 텅 비었으니, 또한 때맞추어 들어가 점거하지 않을 수 없다. 왜적이 물러가면 이순신(李舜臣)에게 거제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옳다.”...

*****************************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4권  

지리고(地理考) 14

산수(山水) 2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낙동강은 그 근원이 안동(安東) 태백산(太白山)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여러 물을 모은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 예천군(醴川郡)의 남쪽에 이르러서 오른쪽으로 속리산에서 나오는 저곡천(豬谷川)의 물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대구의 북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금호강(琴湖江)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영산현(靈山縣)의 경계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진강(晉江)이 무주(茂朱)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부터 꺾어져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김해부(金海府)의 동쪽에 이르러서 흩어져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이 송도(松島), 울산(蔚山), 부산(釜山)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경략(經略) 형개(邢玠)가 군사를 출동시키는 일에 대해 상의하면서 말하기를,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군영은 부산에 있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영은 서생포(西生浦)에 있다. 부산을 격파하고자 할 경우에는 육로로는 반드시 양산(梁山)의 서북쪽을 경유해야 하는데, 이곳에는 높은 산과 험한 고개가 있어 단지 말 한 필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몹시 험악하다. 남원(南原)(삼가 살펴보건대, 원(原) 자는 연문(衍文)인 듯하다)을 경유할 경우에는 삼랑(三浪)의 큰 강이 있어서 곧장 김해(金海)와 죽도(竹島)로 통한다. 이 두 곳은 모두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요충지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삼랑은 아마도 낙동강 하류의 삼차하(三叉河)를 가리키는 듯하다.

연문(衍文) 필사, 판각, 조판이 잘못되어 문장의 중간에 더 많이 들어간 글자나 글귀

*******************

삼분수(三分水)

****************************

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김해 도호부(金海都護府)


土宜, 稻、粟、菽、麥、蕎麥、桑、麻。 土貢, 蜂蜜、黃蠟、鹿脯、沙魚、乾蛤、牛毛、藿、魚膠、紙、篠簜、鹿皮、狐皮、狸皮、獐皮、水獺皮。 藥材, 烏魚骨、白茯苓。 土産, 沙鐵、【産府東甘勿也村。】銀石。【産府北沙邑梯山, 試驗不中用。】鹽所二, 皆在府南。 磁器所一, 在部東甘勿也村。【下品。】


토의(土宜)는 벼·조·콩·보리·메밀·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녹포(鹿脯)·모래무지[沙魚]·건합(乾蛤)·우무[牛毛]·미역·어교(魚膠)·종이·가는 대[篠]·왕대[簜]·사슴가죽·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수달피(水獺皮)이며, 약재는 오징어뼈·백복령이요, 토산(土産)은 사철(沙鐵)과【부(府) 동쪽 감물야촌(甘勿也村)에서 난다.】 은석(銀石)【부(府) 북쪽 사읍제산(沙邑梯山)에서 나는데, 시험해 보니 쓰기에 맞지 아니하였다.】 이다. 염소(鹽所)가 2이니, 모두 부 남쪽에 있고,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부 동쪽 감물야촌(甘勿夜村)에 있다.【하품이다.】


三分水。[高麗初, 置東南海道都部署使, 置司金海。 厥後都部署使韓沖以東南海道地廣, 奏請分爲慶尙、全羅、楊廣三道, 報可之。 日府東黃山江水衝激五十餘里, 分三浦入海, 俗呼爲三乂水。]

삼분수(三分水)[고려에서 처음으로 동남해도 도부서사(東南海道都部署使)를 설치하고, 사(司)를 김해(金海)에 두었는데, 그 뒤에 도부서사 한충(韓沖)이, 동남해도가 땅이 넓은 까닭으로써 경상·전라·양광(楊廣) 세 도로 나눌 것을 아뢰어 청하여, 가하다고 보(報)하는 날에 부(府) 동쪽 황산강(黃山江) 물이 50여 리를 세차게 대질러 부딪쳐서, 세 포(浦)로 나누어 바다로 들어가니, 시속에서 세 갈래 물[三叉水]이라고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경상도(慶尙道)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풍속]습속이 억세고 간소하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신증』 석전(石戰)을 좋아한다. 매년 4월 초파일부터 아이들이 무리로 모여서 성 남쪽에서 석전을 연습하고 단옷날이 되면 장정(壯丁)이 다 모인다. 좌우 패로 갈려져서 기를 세우고 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놀고 돌을 비 쏟아지듯 던져서 승부가 결판난 다음이라야 그만둔다. 비록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서 수령도 금하지 못한다. 경오년에 왜(倭)를 정벌할 때에 돌을 잘 던지는 자를 선봉으로 삼았더니, 적군이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였다.


[산천]삼분수(三分水) 전해 오는 속설(俗說)에, 낙동강(洛東江) 물이 남쪽으로 흘러 부 북쪽 뇌진(磊津)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옥지연(玉池淵)ㆍ황산강(黃山江)이 되며, 또 남쪽으로 흘러 부 남쪽 취량(鷲梁)에 와서 바다에 들어가며 예성강(禮成江)과 합류하니, 바닷물이 국맥(國脈)을 옹위하고 지겸(地鉗)이 서로 응한다. 이로 인해 고려 문종(文宗) 때에 본부(本府)를 오도 도부서 본영(五道都部署本營)으로 삼았다. 그 뒤에 도부서사(都部署使) 한충(韓冲)이, 도내(道內)가 넓고 멀다고 조정에 아뢰니, 3도로 나누어 각각 본영을 설치하였는데, 그날 저녁 황산강 물이 세 가닥으로 갈라져서 바다로 들어갔으므로 삼분수 또는 삼차수(三叉水)라 하였다고 한다. 양산군 칠점산(七點山)이 두 갈래진 사이에 있다.


[누정]○ “칠점산(七點山) 앞에 저녁 노을이 비끼고, 삼차수(三叉水) 나루터엔 푸른 물결 일어나네. 봄바람 부는 2월에 금주(金州)의 길손은 꼭 강남(江南) 길을 가는 듯하네.” 하였다.


[제영]칠점산여화(七點山如畵) 우균(禹均)의 시에, “칠점산은 그림 같고, 삼차수(三叉水)은 공중에 닿은 듯하다.”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