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린 (mandarin) ; 중국관리 http://blog.daum.net/han0114/17048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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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은 한문으로 풀어 보면 으뜸 산이란 뜻이다.(元 으뜸 착할 원, 山 메 능 산)
분명 원산에 빼어난 산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원산이라고 하는 아래 1887년 삽화를 보면 Gensan 이라고 나오고 무대는 조선 땅인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삽화의 풍경에서 기후라든지 인물 모양새와 옷차림새라든지 전반적으로 한반도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여름에 남서풍(南西風)이 부는 젠산(Gensan, dƷén sɑ:n)을 왜 元山(Wonsan, yuánsan)를 이라 했을까?
원산을 영어발음으로 "wonsan"이라 알고 있다.
한반도 원산은 온대기후로서 태백산맥이 가로 막고 있는 산악지대라 옷을 벗고 다닐 만큼 습하고 더운 곳이 못된다. 주로 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동해방면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북동 또는 동북풍의 고온건조한 바람으로서 높새바람 정도이다.
그렇지만 삽화에서 원산(元山 Wonsan, yuánsan)이라고 하는 젠산(Gensan)은 아열대이거나 열대지방이라 보인다. 또한 삽화 풍향계 그림에서 화살표 방향이 남서쪽 방향을 가르키고 있어 태평양과 인도양에서 부는 무역풍인 남서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분명 한반도 원산이 아닌 것이다.
러시아가 1861년에 대마도침입하고 이어 원산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했다는 연대기록을 보면 러시아 역시 동남아지역에 진출하면서 일본 가까이에 있었을 대마도에 침입하고 대마도 가까이에 있었을 대륙조선의 영토 원산에 들어와 통상요구한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우리는 대마도 뿐만아니라 원산을 지금 한반도와 연결하고 한반도에 근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일본이 동남아 아열대지방에 근거하였던 사실로 보아 대마도역시 동남아 아열대지방을 벗어 날 수가 없으며 원산역시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왜 元山(Wonsan)을 영어로 Gensan 이라 했을까?
그리고 아래 삽화에 보면 원산이란 Gensan 부둣가 풍향계가 설치된 건물 풍경에 뒷모습을 하고 관모를 쓰고 있는 조선병사와 흑인원주민이 함께 그려져 있다.
Gensan이라고 하는 삽화에 흑인원주민이 그려져 있다는 것은 분명 한반도가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조선 원산이라고 하는 Gensan은 도대체 어딜까?
필리핀 최 남단에 제너얼 산토스(General Santos)란 도시가 있는데 다른 이름으로 "Gensan" 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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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4월 2일 GRAPHIC
1887 China Squadron Gensan Corea, Corean Mandarin
1887년 4월 2일 같으면 지금 한반도 원산이라고 보았을 때 초봄날씨이다.
아래 삽화처럼 사람들이 반소매차림으로나 반 바지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닐 수가 없다.
사람들이 얼굴색과 모양새가 동북아인이 아닌 인도인 모습인데 조선인들처럼 담뱃대를 물고 있다.
이 삽화그림에서 기후가 한반도 기후가 아님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조선인 관리는 분명 한복차람의 갓을 쓴 조선인인데 조선인관리를 태우고 가는 가마 옆에 사람들을 제지하고 통제하는 군인들은 조선포졸 모자를 쓰고 있지만 바지 모양새가 인도북북인들 옷차림처럼 이상하다.
열대 또는 아열대로 느껴지는 이 삽화의 장소가 조선 땅 Gensan 이라고 하는데...
흑인(원주민)? 부두에 있는 풍향계(weather cock)의 풍향은 남서풍?
[태평양의 무역풍]대서양에 비하면 태평양은 구역이 넓기 때문인지 무역풍도 복잡하다. 예를 들면 북태평양 서부의 괌섬에서는 겨울에는 북동풍이지만 봄에는 동북동풍으로 변하고, 여름에는 남동~남서풍이 불며, 가을에 다시 동북동풍이 된다. 그러나 동부의 하와이섬에서는 연중 북동~동북동풍으로 풍속은 여름에 더 강하다. 이것은 북태평양의 중위도고기압이 겨울철 서부에서는 아시아대륙의 고기압에 겹쳐지고, 동부에서는 아메리카대륙의 고기압대에 겹쳐져서, 동서로부터 중앙 태평양을 쐐기 모양으로 뻗어나가나, 여름철에는 북태평양고기압으로서 하나로 되는데, 중심이 동부에 있기 때문이다. 서부에서는 여름철에 오스트레일리아대륙의 고기압이 적도를 넘어서 북상해 오기 때문에 폴리네시아 방면에서 남쪽으로 쏠린 바람이 불게 된다. 따라서 연중 대개 정상적인 무역풍은 동부뿐이고, 서부에서는 반년마다 변하는 계절풍이 존재한다.
[인도양의 무역풍]인도양에서는 무역풍이 계절풍에 의해서 흩어지는 정도가 태평양보다 뚜렷하다. 적도 이북에서는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히말라야산맥 남쪽에서 냉각된 공기가 북동풍이 되어 해상으로 불어 나가지만, 6∼9월경에는 남인도양으로부터 남서풍이 불어 들어오므로 북동무역풍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남서풍은 남인도양의 남동무역풍이 적도를 넘어서 북상하여 방향을 바꾼 것이다. 남인도양에서는 연중 부는 남동무역풍이 있다.
India southwest summer monsoon onset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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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은 조선 표시가 선명하다.
그러나 부산(FUSAN)은 조선 표시가 없다.
무엇때문일까?
굳이 조선이라 표시하지 않더라도 익히 알 수 있는 국제무역항이라서?
Foreign mail postcard FC4 from Fusan to Gensan and on to Vladivostok in Russia
Fusan I.J.P. & T.O Meiji in brown: 17. VII. 1894
Gensan Maruichi 27 7 18
Remark: the use of this 2 Sen postcard for the routing from Fusan to Vladivostok is rare.
현재 한반도 원산이라고 하면 지리적으로 원산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편왕래는 흔히 있을 법한데 드문 것이라고 하니 어찌 된 것인가?
일본이 발행한 만국우편엽서인 것 같고 1894년 상단에 우편인이 부산(FUSAN)이라 찍혀있고 아래 하단에 조선 원산(元山)이라고 표시된 우편인이 찍혀 있다. 만약 Gensan 이 어딘가 밝혀지면 지금의 블라디보스톡과 부산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있을 것이다.
1. FUSAN-元山-Vladivostok (현재 한반도기준)
2..元山-FUSAN-Vladivostok (1.예상)
3..元山-Vladivostok-FUSAN (2.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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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General Santos(abbreviated G.S.C. or Gensan.; Filipino: Lungsod ng Heneral Santos, Cebuano: Dakbayan sa Heneral Santos) is a city in the Philippines.
자료에 이 도시의 역사기록이 1939年2月27日부터 있다.
조선과 관계가 만약 있다면 그 전의 역사기록이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 19세기 이 도시 기록을 찾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다.
연대표 (원산과 관계된 시대상황)
1859년(AD) 일본, 가나가와[神奈川]˙나가사키˙하코다테[5館] 등 개방, 영국˙러시아˙프랑스˙네덜란드˙미국에 무역허용. 포르투갈과 수호통상조약 체결.
1861년(AD) 중국 청나라 동치제(同治帝) 즉위(~1874),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설치. 대마도(對馬島)에 러시아 함대 침입.
1861년(AD) 인도북서에 대흉년 발생.
1861년(AD) 창덕궁으로 환어. 러시아 함대, 함경도 원산항(元山港)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
1862년(AD) 미국 장군 워드, 중국에서 상승군(常勝軍) 조직,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등과 태평군을 평정. 양무운동(洋務運動) 일어남. 프랑스, 사이공 조약에 의해 베트남으로부터 코친차이나의 3개주(州)를 할양받음.
이때부터 대륙조선 상층내부로 부터 외세를 업은 반대세력이 등장했고 상승군(常勝軍)은 그와 같은 세력이며 명치유신을 기반으로 하는 왜구무사정치세력과 함께 대륙조선 견제세력으로 치밀하게 양성했다고 보여 진다. 또한 프랑스가 차지한 코친차이나는 대륙조선의 영토로서 우리가 금방 알 수 있는 지명일 수도 있다.
코친차이나(cochin-china)는 겉으로 들어날 수 없는 대륙조선이란 사실을 숨겨야만 하는 베트남 남부 지명들을 두리 뭉실 뭉쳐 만든 호칭이라고 보여 진다.
(cochin 이란 단어는 corea 와 china 의 합성어 일 수 있다.)
1862년(AD) 충청˙전라˙경상도 곳곳에서 잇단 민란 일어남.
1861년 인도북서에서 발생된 대흉년과 연결될 수 있다.
1863년(AD) 중국의 태평군 쓰촨[四川]에서 전멸함으로써 세력 거의 소멸. 미국, 상하이에 조계(租界)를 설치. 캄보디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됨. 일본 조슈한[長州藩],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이국선에 포격. 영국함대가 일본 규슈[九州] 사쓰마[薩摩]를 포격.
대륙조선 내에 미국 세력 힘이 본격화 되면서 확대되는 과정에서 대륙조선의 남쪽 변방경계만을 두드리는 영국과 프랑스와 달리 대륙조선 지배층을 통제하거나 관리하고 대륙조선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기지화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때부터 동남아에 근거하던 일본막부정권 대륙추종세력들이 프랑스, 영국 등에 쫓겨 대륙조선의 양해로 대륙 동남쪽으로 이동하고 막부정권 반대세력 명치정권 왜구무사집단세력들이 동남아에 남아 새로운 정권(명치유신)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서세와 타협하였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1866년(AD)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號), 군민(軍民)에 의해 불탐.
프랑스 함대, 양화진(楊花津)에 내침. 해군대령 올리비에가 이끄는 프랑스군, 재차 내침, 강화도 점령, 양헌수(梁憲洙) 등이 대파.
예수회 탄압을 빌미로 서세가 대륙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대륙조선은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저항을 하였고 그런 저항이 심화되면서 미국과 충돌, 프랑스와도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867년(AD) 영국 직할지(直轄地) 말레이해협식민지 성립. 일본에서 에도막부[江戶幕府] 멸망
일본 에도막부는 대륙조선을 추종하던 정권으로서 동남아에 진출하려는 외세를 일선에서 방위하던 일본 무사 세력 군이라고 추정되고 동남아에서 결국 미국함대 포격을 받아 크나큰 데미지를 입고 와해되면서 대륙남부 이동 쪽으로 쫓겨나는 과정이라고 추정
1871년(AD) 인디언 최후의 저항투쟁인 아파치족의 반란(~1886) 야기
이 역시 대륙조선의 세력으로서 대륙본토에 들이닥친 환란으로 촉발된 긴박한 상황이 미국 인디언에게 전달되어 나름대로 최후의 저항이 발발된 것이라고 보여 진다.
1872년(AD) 중국, 네덜란드˙영국과 수마트라 조약(불간섭협약) 체결
중국이라고 함은 바로 대륙조선이라고 판단되는 상황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이란 청은 정치적인 성향으로 보았을 때 친 서방 세력임을 부인 할 수 없다.
당시 상황에서 서세와 절대적 적대관계가 존재해야 하지만 매 협약에 이홍장만 내세우고 나머지는 청은 없다. 이홍장은 세기의 협약전문가로서 서세와 관계되는 모든 협약에 등장하는 뛰어난 사교술을 가진자라고 여겨지지만 어찌 보면 대륙조선을 급속하게 쇠락하게 한 장본인일 수 있다.
그의 애첩인지 마누라인지 모르지만 조선인이라는 설이 있다.
때문에 서세와 협약하던 주체는 분명 대륙조선이라 할 수 있으며 이홍장과 함께 설정되는 청 세력들을 따져보면 결국 친서방계의 인물이고 궤를 같이 하였던 세력 또한 일본 명치정권 세력 군이다.
태평군을 막기 위해 미국이 조직한 상승군(常勝軍)역시 따져보면 증국번(曾國藩)과 그의 부하˙이홍장(李鴻章)이 포함 될 수밖에 없는 관계로 설정할 수 있다.
1873년(AD) 비하르와 벵골 지방에 흉년계속(~1874). 일본, 그리스도교 전교 해금(解禁)조처 내려짐.
일본이 취한 이 조치는 기존 막부정권과 정 반대되는 것이어서 이런 조치를 취한 일본 명치정권 세력들은 대외적으로 친서방 정책을 공표하는 것으로서 대륙조선을 상대로 악역을 맡고 이를 위하여 서세와 본격적으로 타협하고 협력하겠다는 모종의 시그널로 해석이 되는 조치이다. 그들은 절치부심 열등감을 극복하는 신일본을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표시이다.
1879년(AD) 강수관(講修官) 홍우창(洪祐昌),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와 원산(아열대지역?)개항예약 의정서(議定書)에 조인.
1880년(AD)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수신사(日本修信使)에 임명. 원산(아열대지역?)에 일본영사관 개관. 하나부사, 일본 국왕의 친서(親書) 고종에게 전달. 삼군부(三軍府)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
원산이 얼마나 큰 도시 길래 북경, 천진, 상하이, 홍콩과 같은 영사관을 개관하고 난리인가?
청이란 나라는 이미 1861년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설치하였던 반면에 대륙조선은 20년이 지난 후까지 거부하다 마지못하고 이때 설치한 것이다.
이것은 친서방성향이 있는 청과 대비되는 의미이고 대륙의 주인이 바로 조선이라는 사실이다.
1880년(AD) 중국, 독일과 수호조약 체결. 미국과도 이민조약 체결. 이홍장이 북양해군(北洋海軍)을 창설.
서세가 양성한 세력으로서 일찍이 일본명치 정권이 있었고 또 하나는 1880년 창설이 된 청나라고 대칭되는 북양해군이란 군벌이 있다. 서세가 이런저런 이유로 대륙조선으로부터 뜯어낸 자금을 다시 대륙조선을 와해시키려 반대세력을 키우는 자금으로 사용하였고 그 자금을 서세로 부터 공급받은 이들 군벌들은 마침내 대륙조선을 쇠락케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특히 북양군벌은 이 과정에서 이중플레이를 한 세력이라고 보인다.
대륙조선에 서방정보를 제공하면서 뜯어내고 외세로부터는 군벌로서 무기와 함선을 공여 받는 식으로 존재 한 것이라고 보인다.
서세에 빌붙어 힘을 키워가던 이들 군벌들은 대륙조선에서 떨어지는 힘의 공백을 차지하려 서로 눈치를 살피며 욕심을 키우다가 청일전쟁이라는 충돌(黃海海戰)이 야기되는데 이는 서세가 의도적으로 이들 신성세력 간 충돌을 방치한 면도 없지 않다고 하고 있다.
청일전쟁이라고 하는 황해해전(黃海海戰)은 서양 자료에서 전쟁이 아니라 그냥 충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황해(黃海)도 우리가 알고 있는 황해가 아님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이권을 위해 힘겨루기 하였고 그들 영역다툼으로 벌어진 충돌에 의한 피해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쟁 피해보상 전부를 대륙조선이 부담하여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가고 만다.
명치군벌과 북양군벌간의 충돌((黃海海戰)에서 승리한 명치군벌이 요구한 피해보상액은 그 당시 시세로 따져 일본 전체1년 예산의 몇 배라하였으니 한 밑천 단단히 잡은 것이다.
이 피해보상을 대륙조선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조선의 재정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이러한 피해보상액 요구에 대해서 서방 비난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대륙조선은 엄청났던 재정에서 알 수 있듯이 같은 편이라고 여기던 이홍장등 날군벌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떼끼고 서세들에게 동서남북 쉴새없이 침입하여 피해보상액이라 하여 일방적으로 요구하면서 강탈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취급도 않던 왜노출신인 명치군벌에게까지 사기로 뜯기는 마당에 있었으니 이런 식으로 그 많던 재정 다 날려 버리고 쇠락의 길을 걸은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 당시 또 하나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한반도에 일제(명치군벌) 허수아비 조정 만들기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을 것이고 그 프로젝트로 소요되는 자금을 일본자체 재정으로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이홍장과 함께 대륙조선에 사기를 쳐 뜯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다.
대륙조선으로 받은 피해보상금으로 재정자본을 충분하게 축적한 일제는 서세와 동등하게 금본위제도를 도입하고 신용을 높여 재정유입을 원활하게 하였다는 이야기다.
이 여유자금으로 한반도에 궁성을 만들고 여기저기 이미테이션(imitation)건축물들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청일충돌(黃海海戰)후 일본 명치정권과 북양군벌 이홍장 간에 시모노세키(下關港, 赤間關, 馬關)밀약은 대륙조선을 배제한 꼼수를 부린 밀약이라 할 수 있고 당시 밀약을 완수한 이홍장에게 대륙인들은 반역자라고 비난이 컸음도 우리는 그 때 상황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만주계 이홍장은 대륙조선을 해상에서 방위하라는 주 임무를 띤 군벌이지 청이란 나라가 존재 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일본이 대륙조선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 분명하다.
대륙조선이 분명히 근세기까지 존재하였음에도 자취가 묘연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 당시 대륙조선에서 친조선 정권인 막부정권을 몰아내고 서세의 힘으로 들어선 명치군벌들을 절대적으로 적대시 하였을 것이고 대륙조선 상층부 누구라도 거의 상대하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대신 만주계 친일, 친서방 세력들을 앞세운 것이 바로 이홍장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대륙조선은 군함이나 병선을 가지지 못하고 상선정도는 소유한 것으로 나온다.
이 또한 아마 서세가 대륙조선이 직접 관리 할 수 있는 병선이나 군함을 사들이지 못하도록 Kartell 하였을 것이란 추측이다. [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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