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 속 4·19 확대조명 해야

한부울 2010. 4. 19. 20:26

현대사 속 4·19 확대조명 해야

[한겨레신문] 2010년 04월 18일(일) 오후 09:49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에는 그 사건에 대한 사회의 평가와 관점이 내포돼 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4·19는 그 대표적 예다.


<국사> 교과서의 4·19 서술은 시기에 따라 달라져왔다. 1960년대에는 대체로 4·19의거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4·19의 의미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본문에서는 4월혁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4·19의 성격도 학생운동에서 시민혁명까지 다양하게 서술했다. 또 4·19 이후의 사회혼란과 이를 통제하지 못한 민주당 정부의 무능이 강조돼 있다. 일부 교과서들은 이를 간첩의 준동이나 불온한 데모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5·16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됐다. 1970년대 <국사> 교과서가 국정으로 바뀌면서, 4·19의 의미를 축소하고 5·16을 혁명으로 정당화하는 서술은 강화됐다. 4·19를 의거로 규정하면서 그 의미를 학생 중심의 반독재운동으로 한정했다. 4·19 이후의 사회를 극심한 혼란 상태라고 보면서, 학생과 일부 정치세력이 공산주의에 동조하거나 공산당의 책략에 빠져서 안보상의 중대한 위기에 놓였다고 서술했다. 이러한 혼란에서 나라를 구한 것이 5·16혁명으로, 5·16은 4·19 정신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이런 서술은 대체로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6월항쟁 이후인 1990년대 교과서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한 민주화의 움직임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4·19의거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 주체를 학생에서 국민 전체로 확대했고, 4·19 이후의 혼란을 서술하면서도 북한에게 이용당했다거나 좌익 이념을 받아들였다는 기술은 사라졌다.


4·19에 대한 서술이 크게 달라진 것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에 간행된 교과서부터다. 4·19를 ‘의거’에서 ‘혁명’으로 격상했고, 그 성격을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주요 계기가 된 민주혁명으로 보았다. 4·19의 주체도 학생과 시민으로 구체화했다. 이에 반해 5·16은 군사정변으로 규정했다.


2002년 시작된 현행 교육과정에는 고등학교 2·3학년 선택 과목으로 <한국 근·현대사>가 생겨나 4·19의 전개 과정이나 이후의 사회 변화를 더 자세히 그리고 있다. 일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들은 4·19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이후에도 계속 실천 계승해야 하는데 실제 역사 전개는 그렇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2011년부터 역사교과서에 도입되는 새 개정교육과정과 그에 따른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안’은 4·19의 성격을 따로 설명하고 있진 않다. 4·19에 대한 기술은 현행 교과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교과서의 4·19 서술은 이전과 비교할 때 상당 부분 제자리를 찾았지만, 아직도 바뀌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 대부분의 교과서는 4·19의 전개 과정을 3·15 부정선거에서 이승만의 하야까지 서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4·19의 혁명 이념을 실현하려는 노력은 그 이후 사회까지 이어졌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4·19 이후 분출된 여러 계층과 단체의 주장을 혼란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4월혁명의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4월혁명을 이승만 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대한 수동적인 반발로 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해방 이후 축적된 민주의식이 깔려 있었다. 즉, 4·19는 자유당의 부패와 3·15부정선거에 대한 수동적 반발이 아니라, 해방 이후 축적된 국민의 힘과 민주의식이 부정선거를 계기로 발현된 능동적인 사건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