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니콜라스 트리가울트 김니각(金尼阁)이란 이름은 대륙조선인 이름이다.

한부울 2010. 4. 1. 12:38


세계 저명하고 유명한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핵심(역사적으로 사라지게 만든 대륙조선)을 피해가려고만 하는데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마치 사라지고 없는 전설의 섬 아틀란티스를 묘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중국이름이 김니각 Jīn Nígé (金尼阁)이라고 하는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니콜라스 트리가울트 Nicolas Trigault (1577–1628)

같은 시기 독일태생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가 1604~1608년 사이에 그렸다고 하는 한복 입은 남자는 대륙조선과 관계가 있다 해야 맞다.

철릭(天翼)은 그 당시 대륙조선인들이 입었던 평상복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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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입은 남자, 과연 그는 누구인가?

[뉴스엔] 2010.01.03 11:47 입력


1983년 영국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타난 '한복 입은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


1월 3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크리스티 경매장에 공개된 한 점의 그림에 얽힌 비밀을 공개했다.


당시 경매 최고가를 기록하며 유럽 미술계는 물론 한국 역사학계까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이 그림은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작품으로 드로잉 기법으로 그려진 한복을 입은 남자였다.


제작진은 애초 균형 있게 표현된 남자 그림에는 제목이 없었다고 전했다. 그런 탓에 더욱 비밀을 품은 그림으로 화제의 대상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17세기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 그림 속 모델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인물을 상징하는 요소들을 더했고 이 묘령의 그림에는 범선 흔적이 있는 것을 근거로 그는 낯선 이방인일 것이며 그가 입고 있는 옷 역시 그 나라의 전통 의상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게티 미술관 큐레이터는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그림을 알아야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그림 속에는 한복 입은 남자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모델로(간단하게 그린 예비 작품)에는 터번을 두룬 아랍인이 그려져 있었고 루벤스가 갑자기 한복을 입은 남자를 그리게 된 이유에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 됐다.


일각에서는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이 선교사였던 하비에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린 작품이었고 각 나라의 이방인 그려 넣기 원해 한복 입은 남자를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조선을 최초로 유럽에 알리게 된 하멜 표류기편의 저자 하멜은 화가 루벤스가 살았던 시기와 다른 세대를 살았고 이로써 그 시대 루벤스는 한복을 입은 전형적인 조선인을 그릴 수 없었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을 갖게 됐다.


리암브로키 박사는 그림 속 남자는 "조선인도, 한복도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루벤스가 니콜라스 트리가울트라는 중국 선교사를 드로잉 한 것이라고 밝혔다.

 

                                                            Nicolas Trigault


Nicolas Trigault (1577–1628) was a French Jesuit, and a missionary to China. He was also known by his latinised name Trigautius or Trigaultius, and his Chinese name Jīn Nígé (金尼阁).니콜라스 트리가울트는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로서 라틴어로 Trigautius or Trigaultius 로 중국이름으로는 김니각 Jīn Nígé (金尼阁)으로 잘 알려졌다.


왜 중국이름이 하필 김니각인가?

김니각(金尼阁)이란 이름은 대륙조선인(서양인들이 지금 중국이라고 인식했을 뿐이다)이었다는 반증하는 것이다.


이에 부산대 곽차섭 교수는 선교사들이 17세기 초 중국 의복 입을 가능성 희박하며 그림 속 남자가 입고 있는 한복은 철릭과 흡사한 옷이라고 설명했다. 철릭은 조선시대 사대부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된 옷이다.


또 인류 문화학자인 토비아스 휴비네트는 17세기 이탈리아에는 알비마을에 코레아 성을 쓰는 사람들이 200명 정도 집단 거주했고 그 집성촌에 있던 조선 남자 그렸을 것이라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곽창섭 교수는 한복 입은 남자는 안토니오 코레아라고 주장했다. 곽 교수는 최초 유럽 땅 밟은 한국인은 안토니오 코레아이며 프란체스코 까를레티가 쓴 책 '나의 세계일주기'에 따르면 안토니아 코레아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가게 된 인물이다.


결국 한복 입은 남자는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제작진은 "비밀의 단서는 그림 속에 서 있는 남자에게 있다"며 미스터리로 남은 '한복입은 남자'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한편 '서프라이즈'에 출연하는 재연배우 김하영과 이중성이 매주 주요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랭크되는 등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번주 '진실 혹은 거짓'에서는 용의자, 장만옥 포에버,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 등이 방송됐다.


김지윤 뉴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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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년 6월 28일 ~ 1640년 5월 30일)는 독일 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이다. 루벤스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역동성, 강한 색감, 그리고 관능미를 추구하는 환상적인 바로크 스타일의 대표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루벤스는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사실을 바탕으로 그린 역사화, 그리고 교회 제단을 위해 그린 반종교개혁적인 세 폭 제단화로 유명하다.


루벤스는 유럽 전역의 여러 귀족들과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유명했던 안트베르펜의 화실을 운영했으며, 그는 인문학자이자 미술품 수집가,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기사 칭호를 부여받은 외교관이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삶 (1600-1608)-한복 입은 남자 작품완성


1600년에 루벤스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의 요람인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는 베니스에서 잠시 머무르며 티티안과 베로니스, 그리고 틴토레토의 작품을 감상했으며, 이후 빈센조 I 백작의 성이 있는 만투아에 정착했다. 베로니스와 틴토레토의 색감과 구도는 루벤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이후 그의 성숙기의 스타일은 티티안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빈센조 백작의 후원을 받으며 1601년 루벤스는 피렌체와 로마를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예술작품과 이탈리아의 거장들의 작품을 모작하며 공부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라오콘과 그의 아들(Laocoon and His Sons)이 특히나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와 함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는 당시 큰 화제가 되고 있었던 매우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작품을 그리는 카라바조의 작풍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 후 루벤스는 그리스도의 무덤이라는 카라바조의 작품을 모작했으며 그의 후원자인 빈센조 백작에게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루브르 박물관)을 구입하라고 추천하기도 했다. 또,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 있는 도미니칸 교회에서 로자리오의 마돈나(Kunsthistorisches 박물관, 베니스)를 구입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 로마에서 머물 무렵, 루벤스는 처음으로 그의 세 폭 제단화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St. Helena with the True Cross로, 로마의 교회 예루살렘의 산타 크로스를 위해 그려졌다.


루벤스는 1603년, 외교 임무를 맡아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그는 펠리페 3세에게 보내는 빈센조 백작의 선물을 갖고 있었다. 스페인에 머물며 그는 펠리페 2세가 모았던 수많은 라파엘로와 티티안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루벤스는 또한 마드리드의 프라도에 머물면서 말을 타고 있는 러마의 백작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는데, 이 작품은 티티안의 작품 Charles V at Muhlberg (1548년작, 마드리드의 프라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보인다. 이 여행은 그가 예술과 외교술의 재능을 함께 발휘했던 첫 번째 여행이었다.


루벤스는 1604년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며 이후 4년간은 만투아로마의 제노바에서 지냈다. 제노바에서 루벤스는 Marchesa Brigida Spinola-Doria(내셔널 미술전시관, 워싱턴 D.C.)등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이때의 작품들은 훗날 안토니 반 다이크나 조슈아 레이놀드, 그리고 토마스 게인즈보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Belkin (1998): 75.</ref>ref> 또한 루벤스는 도시의 성들을 삽화형식으로 그리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606년에서 1608년, 그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화가 중 한사람이 되었으며 이 시기에 그는 당시 도시에 새로 지어진 가장 세련되고 유명했던 발리셀라의 산타마리아 교회(Santa Maria in Vallicella or, Chiesa Nuova)를 위해 제단화를 그리게 된다. 작품의 주제는 당시에 그 지역에서 가장 칭송받던 성인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성모 마리아와 그의 아들을 숭배하는 모습을 그리기로 결정된다. 첫 번째 작품은 한 폭만을 사용하여 그린 제단화였으나, 세 폭에 그려진 두 번째 작품으로 교체되었다. 이 두 번째 작품은 "발리셀라의 산타 마리아"의 성스러운 모습을 재현했으며 제거가 가능한 구리 덮개가 곁들여졌고, 중요한 축제일에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이탈리아에 미친 루벤스의 영향은 굉장히 거대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Pietro Paolo Rubens"라는 서명을 한 편지와 서신을 여러 장 썼다. 편지에서 그는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쓰고 있으나, 그의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위키]


한복 입은 남자

 

 

 


작가 :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종류 : 종이에 검은색과 붉은색 초크로 드로잉

크기 : 38.4x23.5cm

제작연도 : 1606~1608년 /1617년(폴 게티 미술관)

소장 : 미국 LA 폴 게티 미술관


17세기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의 거장 피터 폴 루벤스(1577~1640)의 작품 《한복 입은 남자》는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한국인 그림'으로 루벤스의 인물 드로잉 중 매우 세심한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이 작품은 1983년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드로잉으로는 최고가인 32만4000파운드(당시 약 3억8000만원)에 낙찰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작품 속 인물이 누구인지, 어떻게 이탈리아까지 가게 되었는지, 또 루벤스와 만나게 된 경유는 무엇인지 등 잇따른 의문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이어져 왔다.


작품을 살펴보면 남자는 머리를 상투처럼 틀어 올리고 관모를 쓰고 있다. 얼굴 생김새는 몽골리안 계통에 가까우며 눈에 쌍꺼풀이 있고 수염은 짧게 깎았다. 양 볼과 코, 입술, 귀 등에는 약간의 붉은 색 초크를 사용해 생기를 불어넣었다. 입고 있는 옷은 조선시대 사대부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 구별 없이 널리 애용되었던 철릭(天翼)이라는 의복이다. 양손은 교차하여 반대편 소매 속에 넣었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모습이다. 주인공이 먼 곳에서 온 방문객임을 강조하려는 듯이 배경에는 희미하기는 하나 여러 폭의 돛을 단 범선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탈리아의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Francesco Carletti)가 남긴 《나의 세계일주기》라는 여행기에 기초해 볼 때 안토니오 코레아(Antonio Corea)일 가능성이 높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잡혀 왔다가 카를레티를 따라 로마까지 가게 된 인물로, 루벤스는 로마에 머물던 1606년부터 1608년 사이에 그곳에 있었던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를 직접 만나 초상화에 담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화된 견해이다. 이 작품은 루벤스의《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1618)에 영감을 주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조선 사람으로 보이는 인물이 등장한다.


현재 이 작품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폴 게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한복 입은 남자 A Man in Korean Costume》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왔던 이 그림은 폴 게티 미술관으로 옮겨지면서 《조선 남자 Korean Man》라는 제명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 그림의 주인공을 단지 '한복을 입은 어떤 남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조선 남자'라고 보는 해석상의 진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에 관련해서는 여전히 많은 의문과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이 '안토니오 코레아'가 아닌 '제 3의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한편 오세영 작가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을 집필하였다.[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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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때 상황이다.


첫째 광해군에게 보고된 내용인즉 역성이었다는 암시다.


광해군은 내시(內侍)를 내보내어 '역성(易姓)이면 종묘가 불탈 것이고 폐립(廢立)이면 종묘가 무사할 것'이니 살피고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장작더미 불길이 이미 궁에 연소되어 마치 종묘가 불길에 쌓인 것처럼 보이어 내시는 본대로 광해군에게 보고하였다. 광해군은 크게 탄식하여 내시와 함께 북문으로 도망을 쳤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여 자수궁(慈壽宮)으로 가는 도중에 정몽필(鄭夢弼)을 만나 그에게서 말을 얻어 안국신(安國信)의 집으로 가 숨었다.


둘째 광해군이 반정군을 피해 달아나는 상황인데 철릭을 입고 변장하였다는 내용이다.


광해군은 여기서 다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고자 안국신(安國信)이 상중(喪中)에 입던 흰 개가죽 남바위를 얻어 쓰고 생포(生布:가공하지 않은 베) 천릭(天翼)과 삼띠 짚신 차림으로 변장하였다


남바위-이엄(耳掩)·난이(暖耳)


겨울에 쓰는 방한모(防寒帽)의 하나. 이엄은 부녀자용인 아얌[額掩(액엄)]과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남바위는 조선 초기부터 사용하였으며 상류층 남녀가 쓰다가 서민층이나 예복, 구군복의 벙거지 밑에까지 착용 범위가 넓어졌다. 귀와 머리 부분을 가리지만 머리 위쪽은 트여 있고 조바위와는 달리 가장자리에 모피를 대었으며 뒤를 길게 하여 뒷덜미를 덮도록 하였다. 이마를 덮는 앞부분에는 술·구슬·매듭 등으로 장식했다. 재료로 겉감은 비단, 안감은 비단이나 면직을 사용하였으며 안에는 털이나 융을 대거나 솜을 두기도 하였다. 남자는 검은색 겉감에 초록색 안감, 여자는 남색과 자색 겉감에 초록색 안감, 어린이는 녹색 겉감에 적색 안감을 주로 사용하였다.


철릭 天益·天翼


철익의 (綴翼衣)는 철릭(綴翼) 혹은 천익(天翼)이라한다.

저고리와 치마를 따로 만들어 허리에서 붙인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양의 겉옷.

 

조선시대 무관이 입던 공복으로 한자 이름에 따라 철릭天益은 궁중용, 철릭天翼은 무관용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겉옷이 아닌 속옷(관복의 밑받침 옷)으로 쓰일 때는 첩리帖裏로도 불렀다.

취음(取音)하여 천익(天翼)이라 쓴다. 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형태로 길이가 길고 허리에는 주름을 잡았다. 소매는 두리소매이고 고름을 달았으며, 곧은 옷깃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교차시켜서 앞을 여미었다. 당상관(堂上官)은 남색을, 당하관(堂下官)은 홍색을 입었다. 철릭과 주립(朱立)으로 된 군복(軍服)을 융복(戎服)이라 하여 주로 무신이 입었으나 문신도 전시(戰時)에 왕을 호종 (扈從)할 때에는 입었다. 시대에 따라 흰색, 붉은색, 남색 등이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