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목은 이색(李穡)은 대륙사람인가?

한부울 2010. 1. 26. 23:30

려강(丽江), 려수(丽水), 향연(香橼) http://blog.daum.net/han0114/17049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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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李穡)은 대륙사람인가?

 

돌아가리라...

어디로 돌아간다는 것일까?

한반도로?

그러나 시 내용은 한반도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이 눈꼽만큼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일제가 조작한 사서라 하여도 대수롭지 않게 보는 버릇이 생겼다.

으레 그렇겠지 하는 단념이다.

그렇지만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고전번역원에 자료를 보면 특히 들어나기 좋은 상징성이 있는 글자에 꼭 덧붙여 붙임 말에서 한반도에 귀속된 부분을 증빙이라도 하려는 듯 첨가하여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당한 거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 그처럼 무리가 따라야 할까?

여기 목은은 고려 말 문신인 이색(李穡)이 지은 시(詩)다.

그런데 이색(李穡)이 대륙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시가(詩歌)이다.

제목 歸來 “돌아가리라”란 七言古詩인데 대륙조선이란 존재감에서 난망(難望)에 빠져 혼란 속에 있는 우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 일깨워주는 귀중한 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색의 이 시는 1392년 반 이성계파로 몰려 유배되는데 아마 장흥으로 유배되면서 작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현보(禹玄寶)는 해양(海陽)으로 귀양가고, 이색(李穡)은 장흥부(長興府)로 귀양가고, 설장수(偰長壽)는 장기(長鬐)로 귀양가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연변(沿邊)의 주군(州郡)으로 귀양가게 된다.

이색은 유배에서 풀려 1396년 려강(驪江)으로 가다가 의문의 죽음을 한다.

먼저 여강이 어딘가?

려강(驪江)은 고려의 강이란 의미로서 지금의 운남성 麗江(丽江市)이다.

려(麗)는 고구려나 고려를 의미하는 오래된 단어이다.

이 려강시(丽江市)에 고려式 古 家屋들이 즐비하다.

물론 古城도 있다.

이곳에 이색이 피서차 가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이색은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겠다고 그토록 시를 읊었을까?

그가 노래한 시에 들어 있는 장소는 온통대륙이다.

이색은 대륙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인가?

아니면 그곳에 고려가 있었기 때문인가?

아래 5가지 지명은 모두 대륙이라고 판단되는 지명들이다.

 

1.분양분(汾陽市)山西省中部、呂梁山的東麓,太原盆地西沿

2.오호(五湖)

洞庭湖:洞庭湖位于中国湖南省北部,长江荆江河段以南,是中国第三大湖

鄱阳湖:鄱阳湖(鄱)是中国第一大淡水湖,也是中国第二大湖

太湖:位于江苏、浙江和安徽三省交界处,长江三角洲的南部

巢湖:中国第五大淡水湖。位于安徽省中部

洪泽湖:中国第四大淡水湖。在江苏洪泽湖区位图省西部淮河下游

3.도연명의 출신지 江西省 九江縣 南西시상(柴桑)을 말한다.

4.長江鏡淨-긴 강물은 거울 같고...인가? 아니면 양자강인 장강(長江)이라 읽고 장강(長江)은 거울 같아..로 해석해야 하는가?

5.

歸來歸來莫留滯 돌아가야지 지체 말고 어서 돌아가야지

驪江春水葡萄醅 여강의 봄물이 진한 포도주처럼 푸르리라

 

결국 이색(李穡)이 돌아가려고 한 곳은 거울과도 같은 장강과 연결된 려강(驪江)이다.

려강(驪江)이 어딘가 바로 고려의 물이 흘러들어가는 고려의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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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1328년~1396년 영덕군)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로 인해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고, 3년간을 유학하다가 아버지의 상(喪)을 입자 귀국하였다.


1352년(공민왕 1) 그의 학문의 경향과 정견(政見)의 윤곽을 피력한 의견서를 왕에게 제출하였고,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갑과(3등 이내)로 급제하였으며, 다시 정동행성 향시(鄕試)에 장원(1등)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뒤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에 올랐으며,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가 되자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김구용(金九容)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1371년(공민왕 20) 정당문학이 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다시 1373년(공민왕 22) 한산군(韓山君)에 피봉되었다가, 다시 1377년(우왕 3)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공양왕 때 판문하 부사(判門下府使)가 되었고, 그 후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함안(咸安) 등에 귀양 갔으나 돌아와 다시 한산부원군에 피봉되어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使)로 임명되었다.


정몽주가 피살되자 관련되어 다시 금천·여흥·장흥(長興府:1392)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1395년(조선 태조 4)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여 예를 다하여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 다음 해인 1396년 피서차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여주의 신륵사에서 급병으로 갑자기 사망했으므로 그 사인(死因)에 대하여는 후세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이 여흥(驪興)에 있는 신륵사(神勒寺)에서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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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시고(牧隱詩藁) 제13권  

시(詩)

 

돌아가리라 / 歸來篇


欲歸未歸今幾年 돌아가려면서 못 돌아간 게 지금 몇 해 인고

功成名遂身不退 공과 명성 이루고 몸이 물러나지 않으면

自古未見能圖全 예로부터 온전히 신명 보전한 걸 못 보았네

汾陽突兀掩千古 분양은 우뚝하여 천고 이래 으뜸이라

直與白日懸中天 곧장 일월과 함께 중천에 환히 빛났으니

當時靜坐待盧杞 그 당시 조용히 앉아 노기를 접대할 적에

至今可想心中煎 마음 졸였던 걸 지금도 상상할 만하구려

范蠡五湖掛明月 범려의 오호에는 밝은 달이 걸렸었고

陶潛三逕迷寒煙 도잠의 삼경에는 찬 연기가 희미했네

何曾一毫累靈臺 어찌 일호나마 마음에 누됨이 있었으랴

應爲世人消禍胎 응당 세인을 위해 화의 조짐을 없앴으리

歸來兮歸來 돌아가자 돌아가자

長江鏡淨自澄澈 깨끗한 긴 강물은 거울같이 절로 맑고

高山壁立仍崔嵬 철벽처럼 선 높은 산은 그대로 우뚝한데

珍禽叫呼樹陰合 진기한 새 지저귀는 곳엔 나무 그늘이 짙고

錦鱗游泳天光開 물고기 헤엄치는 곳엔 하늘빛이 탁 트였네

野僧携手入寺去 스님과 서로 손잡고 절에 들기도 하고

溪友踵跡披簑回 도롱이 입고 계우의 뒤를 따르기도 해라

飮酒何嘗患無偶 술을 마시자면 어찌 짝 없을까 걱정되며

有客何嘗期不來 나그네 어찌 일찍이 안 오길 기약했으랴

逍遙卒歲復何望 소요하며 세월 보내면 됐지 또 무얼 바라랴

文墨自足登雲臺 문묵으로 운대에 오른 걸 의당 만족해야지

君看汗馬諸子孫 그대는 보았나 전쟁 공신의 여러 자손들을

盛滿自古難栽培 가득참은 예로부터 기르기 어려운 거라네

人生乘化有脩短 인생의 수명은 의당 길고 짧음이 있는데

白頭何不歸去來 백발의 나이에 어찌 돌아가지 않을쏜가

歸來歸來莫留滯 돌아가야지 지체 말고 어서 돌아가야지

驪江春水葡萄醅 여강의 봄물이 진한 포도주처럼 푸르리라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