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학자들에 의한 학명의 폐해
두 발로 누비며 쓴 노학자의 식물이야기
한국식물의 고향
[일조각]이우철 저
백두산 한라산 울릉도 등 360여 곳 활동 무대 삼아
그중 대표적 자생지 7곳 선정해 특산·희귀식물 다뤄
식물과 친해지려면? 식물 채집에 나선 초보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한국식물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식물의 대표적 자생지는? 그곳에 어떤 식물들이 나고 그들이 지닌 특성에 따라 붙여지게 된 이름에 얽힌 사연은? 이 책 '한국식물의 고향'은 이런 궁금증들에 대한 해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책은 평생 식물 연구에 몸담아온 이우철 교수가 한국식물의 대표적 자생지인 한라산·울릉도·지리산·속리산·설악산·금강산·백두산 등 7개 지역을 중심으로 그곳에 자생하는 특산식물과 희귀식물의 식생장소와 분포 그리고 식물에 얽힌 일화를 들려준다. 50년 가까이 우리나라 식물의 본적(고향)을 조사하는 호적계원으로 활동해오다 2005년 '한국 식물명의 유래'를 세상에 내놓은 필자가 이번에는 '한국식물의 고향'을 통해 기존에 다룬 식물의 학명·국명·어원의 유래뿐만 아니라, 필자가 식물의 자생지를 몸소 찾아다니면서 겪은 일화와 식물명에 얽힌 이야기를 생생하게 엮어놓았다. 특히 식물 가운데 보양재로 세계의 이목을 끈 지리산 가시오갈피나무, 일본 국화國花이기 전 우리나라 특산식물이었던 한라산 왕벗(벚)나무, 전문성이 부족한 한약 채취자의 잘못으로 지역에 따라 실물實物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삼지구엽초 등등 식물에 얽힌 사연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게 전해준다.
식물명에 얽힌 한일역사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 근대적 학문으로서 식물학의 기초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립되었다. 이는 한국식물인 금강초롱꽃의 학명 Hanabusaya asiatia Nakai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금강초롱꽃의 학명에서 보이는 Hanabusaya는, 1914년 당시 본격적으로 조선 방방곡곡을 다니며 식물을 조사한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이 그가 조선을 자신의 독무대로 식물 조사를 할 수 있게 발판을 마련해 준, 일본 공사(외교관)인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렇듯 '한국식물의 고향'은 고희를 넘은 노학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식물을 통한 생생한 근대 역사의 단면도 보여주고 있다.
한국식물분류의 기원을 세운 일본 학자 나카이
한국식물학자 1세대는 모두 일본 학자 나카이의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끄러운 역사지만 나카이 이전에는 국내 식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카이는 1914년 조선식물 촉탁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비용을 받아 전국을 누비며 식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야망이 크고 냉정한 사람으로, 제자들이 희귀한 식물을 채집해 가지고 가면 “두고 가라”하고는 말 한마디 없이 자기 이름으로 발표해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잘못 쓰이고 있는 식물명과 그에 따른 과제
현재 울릉도 저동 계곡에 고초냉이의 자생지 보호구역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이 ‘고초냉이’가 아니라 ‘겨자냉이’라고 필자는 밝히고 있다. 고초냉이는 나카이(1935)가 경기도 광릉에서 채집한 표본을 가지고 한국특산식물로 명명한 것인데, 정태현(1956)이 '한국식물도감' 초본 편을 출판할 때 울릉도에 재배하고 있던 일본산 겨자냉이를 울릉도의 특산인 고초냉이로 잘못 기록한 데서 기인했다. 또 다른 사례를 들면 예전에는 한약재로 사용되는 음양곽이 지역에 따라 그 실물實物이 달랐다고 한다. 중부 설악산 지역에서 채취되어 팔리는 것은 ‘돈잎꿩의다리’이고, 남부지방에서 같은 이름으로 팔리는 것은 ‘노루오줌’이었다는 것. 이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시골노인들이 들은 풍월로 실무를 잘못 알고 뜯어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같은 오류는 비단 음양곽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비일비재로 있을 수 있어 한의학계에서 풀어야 할 시급한 일이라 일침을 놓고 있다. <본문 122, 176쪽>
엉터리 속설로 고사 상태에 빠진 식물 이야기
망개나무는 한국, 일본, 중국에 분포하는 희귀식물로 한국에서 1923년에 채집되어 천연기념물 148호로 지정 보호돼왔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나무의 수피를 삶아 먹으면 애 못 낳는 여인이 애를 낳을 수 있다는 헛소문을 내어 사람들이 마구 껍질을 벗겨가기 시작했다. 결국 이 나무는 1960년에 고사하고 말았다. 필자는 이 사례를 통해 보호가치가 있는 식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보호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본문 152쪽>
저자 소개
이우철李愚喆
국내 식물학자 1세대인 故정태현 선생의 제자 이우철 교수는 50년 가까이 전국의 산과 들, 섬 등 360여 곳의 식물 자생지를 찾아다니며 식물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 식물의 학명, 국명, 이명, 특징 등을 정리한 '한국식물명고'를 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5,000종에 가까운 국내 고등식물군의 이름을 이명異名과 속명俗名 그리고 표준명칭을 밝히고 그 기원까지 설명한 '한국 식물명의 유래'(2005)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남북한과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에서 사용하는 관속管束 식물의 명칭을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식물 이름은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바뀌는 표기법을 적용하지 말아야 하며, 식물의 가장 첫 명칭을 표준명칭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해 학계의 귀추가 주목되기도 했다.
한국식물분류학회장을 지냈으며 강원대학 생물학과 교수 및 자연과학대학장, 강원대학 자연사박물관장, 도쿄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그는 현재 강원대학 생물학과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책 속으로
식물은 그 종류에 따라 각각 정해진 생활형生活型을 가지고 있어, 사계절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하므로 같은 장소라도 한 달에 1회 이상, 1년간 그 식물이 나타내는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마치 사람이 서로 친하다면, 멀리서 걸어가는 뒷모습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고 밖에서 부르는 목소리만 듣고도 식별할 수 있듯이, 식물과도 친해지려면 어린 개체나 성장기에 있는 것이든, 꽃이 피고 져서 열매를 맺은 것이든, 그 상태만 보고도 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관찰을 통해 그들이 지닌 시기별 특색을 올바르게 파악해야 한다.―20쪽
나카이는 야망이 크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재미있는 일은 그의 제자로 경성전문학교에 있던 모리T. mori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식물을 연구하였으나 나카이의 그늘에서는 빛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중에 동물로 전공을 바꿔 담수어(민물고기)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54쪽
왕벗나무의 원산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은 1911년 경(메이지明治 말 또는 다이쇼大正 초)
부터이다. 당시 도쿄에 사는 어느 원예사가 이 식물을 많이 증식시켜 판매해 일본 전역에 퍼뜨렸고, 그 꽃이 아름다워 일본 국화國花로 지정된 이후에도 그 원산지를 몰랐으나 교토대학의 고이즈미G. Koidzumi(小泉源一)라는 식물분류학자가 당시 아오모리靑森에 주재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 포리U.J. Faurie 신부의 제주도 한라산 채집품 중에서 이 식물과 일치하는 것을 찾아냄으로써, 원산지가 한반도 남단에 있는 제주도라는 것이 밝혀졌고(Koidzumi, 1913), 그 뒤 일본의 모든 책에는 그 원산지가 한국의 제주도로 기록되었다. ―105쪽
일찍부터 가시오갈피나무 근피根皮는 양기를 돕는 보신재로 알려져 왔으나(안덕균, 1998), 1960년대에 소련의 우라지보스크에 있는 가시오갈피연구소에서 “가시오갈피나무 성분의 효능은 인삼보다는 훨씬 좋고 산삼에 버금가는 것으로 우리들은 이것으로 우주인 식량을 만든다.”라는 발표를 함으로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래서 세계각지에서 그 식물의 원료를 구입하겠다는 주문이 쇄도했으나 소련에서는 원료가 귀하다는 이유로 팔지 않고 엑기스를 추출하여 황금과 같이 비싸게 판매하였다.―145쪽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 Epimedium koreanum)는 음양곽淫羊藿이라고 불리는 정력에 좋은 보약재로 유명하다. 음양곽이라는 약명이 생기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만주의 양을 치는 목장에서 양치기 소년이 가만히 보니 수컷이 산을 넘어갔다 와서는 암컷과 흘레를 하고 다시 넘어갔다 와서는 다른 암컷과 흘레를 반복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그 숫양의 뒤를 따라가 보니 삼지구엽초를 뜯어 먹고 와서는 그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 이 이야기가 퍼져 삼지구엽초가 이 같은 약명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한다. ―176쪽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자연자원 보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산삼(Panax ginseng)의 진품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은 이곳뿐일 것이다. 그 이유는 산삼은 하늘이 보이지 않는 우거진 원시림 속의 낙엽이 발목까지 빠지는 환경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이 같은 원시림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곳은 백두산뿐이기 때문이다.―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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