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한해(瀚海) 원정출진을 명한 정조대왕의 조칙(詔勅)

한부울 2009. 12. 17. 16:04

항애산(杭愛山)-연연산(燕然山) http://blog.daum.net/han0114/17048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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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주요地震리스트(1138~1910) http://blog.daum.net/han0114/17049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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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瀚海) [hàn hǎi]사막(沙漠).

중국사전을 보면 한해를 사막이라고 풀이하고 혹은 바이칼호수라고 하고 있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정조대왕의 윤음-纶音[lún yīn]조칙(詔勅).조서(詔書).천자(天子)의 조칙(詔勅)이라 하여 남한산성에 출진토록 명한 글에서 하경복(河敬復), 황형(黃衡), 최윤덕(崔潤德), 어유소(魚有沼) 같은 사람들이 어명을 받들어 출정에 나서서 멀리 사막을 원정하고 한해(瀚海)를 건너 연연(燕然)에다 자신의 공을 새겨...라고 하고 있는데 정조대왕이 스스로  천자신분이 되어 윤음 하였다는 사실이고 천자신분에서 조칙을 내렸다는 것은 바로 대륙조선의 황제가 내린 것이라 어느 누구도 간섭 할 수없다는 것이며 바로 정조대왕자신이 중국천자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명확한 자료이다.

더불어 사막인 한해(瀚海)와 연연(燕然)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분석한 바로는 몽골 항애산맥의 항애산이 燕然山(연연산)인 것으로 파악되지만 그 또한 명확한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중요한 것은 정조대왕이 그 곳까지 원정 군대를 파견하였다는 자체가 대륙조선의 영역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A)표시는 구르반퉁구트(古爾班通古特 :Dzoosotoyn Elisen Desert)사막이다.

위는 정조대왕의 명을 받들어 남한산성에서 원정군으로 출정한 장수들이 임무를 완수하고 공을 연연에다 새겼다고 하는 기록에서 이 출정상황을 그려보면 첫째 한반도에서 출발하는 진군경로가 있을 수 있고 또 하나는 신강 즉 키르키스탄 쪽에서 들어가는 진군경로를 생각 할 수 있다.

먼저 진행로를 한반도에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하였는데 그와 같은 상황을 설정하는 자체가 반도사를 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도사엔 한반도의 조선이 감히 청의 영역을 사전 허가 없이 정조대왕 명(조칙) 만으로 거침없이 밟고 들어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조대왕이 명한 진군행로는 한반도가 아니라 키르키스탄 쪽에서 들어가는 형세가 되어야 맞다. 즉 윤음을 할 수 있는 천자 신분에 있는 정조대왕이 거 하던곳과 조선 장수들이 정조대왕의 명을 받고 출발한 남한산성 있을 법 한 곳

그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신강영역 키르키스탄이 될 수밖에 없다.

사마르칸트, 키르키스탄, 신강쪽에서 들어가는 진군경로를 기록 그대로 세분하여 분석할 때 하나는 사막이라고 하는 한해을 건너 연연이라고 하는 항애산에 도달하는 상황을 설정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구르반퉁구트사막을 건너 항애산를 거치지 않고 바로 한해라고 하는 바이칼호수를 건너 그 밖에 있어야 할 연연산에 공을 새겼다고 하는 상황을 설정 할 수 있다.

과연 어떻게 진행된 상황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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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瀚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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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弘齋全書) 제28권

1799년(정조 23) 정조대왕의 문집으로서 이만수(李晩秀) 등이 편집하기 시작하여 총 190편으로 정리하였으며, 정조 사후에 말년의 저술들을 덧붙여 심상규(沈象奎) 등이 1801년에 재편집하였다. 1814년에 간행되었다.  

윤음(綸音) 3

수어경청(守禦京廳)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출진(出鎭)하도록 명한 윤음


予嘗以爲軍營無百年之制。國可富而兵可精。民可支而財可足。古者軍無常隷之營。營無恒定之制。有事則牙璋發六師。事已則士卒樂耕稼。如是也。故芻輓不勞。壁壘增彩。國初兵制亦然。三府爲二司。二司爲五衛。衛有五部。部有四統。而宰樞十人。爲摠管都副分釐之。歲周則遞而已。如河敬復,黃衡,崔潤德,魚有沼諸人之受脤啓行。遠出沙漠。梁瀚海而銘燕然。功在盟府。名留編者。何嘗髣髴於近日五營之爲而有是哉。此所以初元朝參。問汰冗足食之策也。首及於五營。拈出守摠二營之存罷。而雜議於廷臣者也。摠戎緊關。亞於訓御不須說。邇來卄載之間。略有心籌之揣摩。姑合鄭重縝密。而苟欲先嘗而少試之。孰先於守禦之爲營乎。自今罷守禦廳。大抵使名之或內或外。營府之乍出乍入。多係朝論之彼此甲乙。後敢有發言於刻印者。勻石在王府


나는(정조대왕:天子) 일찍이 ‘군영(軍營)을 백 년 동안 유지함이 없어야만 나라가 부강해지고 병력이 정예로우며 백성들이 지탱하고 재력이 넉넉해진다’고 생각하였다. 옛날에는 군제(軍制)에 항상 예속되어 있는 군영이 없고 군영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제도가 없었으며, 일이 생기면 아장(牙璋)으로 육사(六師)를 내고 일이 해결되면 사졸들이 즐겁게 농사짓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꼴과 곡식을 운송하면서도 수고로운 줄을 몰랐고 벽루(壁壘)는 빛을 더하였던 것이다.


국초(國初)의 병제도 그러하여, 삼부(三府)가 이사(二司)가 되고 이사가 오위(五衛)가 되었는데, 위에는 오부(五部)가 있고 부에는 사통(四統)이 있으며 재추(宰樞) 열 명이 총관(摠管)을 맡되 도총관과 부총관으로 나누어 다스리다가 1년이 되면 체차될 따름이었다. 하경복(河敬復), 황형(黃衡), 최윤덕(崔潤德), 어유소(魚有沼) 같은 사람들이 어명을 받들어 출정에 나서서 멀리 사막을 원정하고 한해(瀚海)를 건너 연연(燕然)에다 자신의 공을 새겨 맹부(盟府)에 공이 있고 간편(簡編)에 이름을 남긴 것으로 말하자면, 어찌 일찍이 요사이 오영(五營)에서 하는 것과 같이 하여 이렇게 된 것이겠는가. 이것이 즉위 후 첫 조참에서 쓸모없는 군영을 없애어 식량을 충분하게 할 방도를 물으면서 가장 먼저 오영을 언급하고 수어청총융청 두 군영의 존폐를 끄집어내어 조정 신하들에게 다각도로 상의하게 했던 까닭이다.


简编 [jiǎn biān]1. 약본(略本). [내용이 비교적 간략한 저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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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애산(杭愛山)-연연산(燕然山) http://blog.daum.net/han0114/17048339  


瀚海:사막(沙漠).

瀚 hàn 넓을, 사막이름-한

海 hǎi 바다-해

 

词语解释

◎ 瀚海 hànhǎi

(1) [Baikal Lake]∶同翰海

瀚,瀚海,北海。《广韵》

瀚海阑干百丈冰。唐 岑参《白雪歌送武判官归京》

(2) [Gobi Desert]∶蒙古大沙漠的古称

孤城当瀚海,落日照祁连。陶翰《出萧关怀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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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地名。其含义随时代而变。或曰即今 呼伦湖 、 贝尔湖 ,或曰即今 贝加尔湖 ,或曰为 杭爱山 之音译。 唐 代是 蒙古高原 大沙漠以北及其迤西今 准噶尔盆地 一带广大地区的泛称。亦多用为征战、武功等典故。《史记·卫将军骠骑列传》:“﹝ 霍去病 ﹞封 狼居胥山 ,禪於 姑衍 ,登临 瀚海 。” 南朝 梁 虞羲 《咏霍将军北伐》:“ 飞狐 白日晚, 瀚海 愁阴生。” 唐 高适 《燕歌行》:“校尉羽书飞 瀚海 ,单于猎火照 狼山 。”

2.指沙漠。 唐 陶翰 《出萧关怀古》诗:“孤城当瀚海,落日照 祁连 。” 郑观应 《盛世危言·邮政上》:“ 元宪宗 于瀚海中间,沿途设卡。” 陈毅 《长城词》:“革命真有千般巧,各族人民团结了,瀚海戈壁将变宝。”

3. 唐 都护府名。 贞观 中置 瀚海都督府 ,属 安北都护府 。 龙朔 中以 燕安都督府 改号 瀚海都护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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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瀚海 hànhǎi

(1) [Baikal Lake]∶同“翰海”

瀚,瀚海,北海。——《广韵》

瀚海阑干百丈冰。——唐· 岑参《白雪歌送武判官归京》

(2) [Gobi Desert]∶蒙古大沙漠的古称

孤城当瀚海,落日照祁连。——陶翰《出萧关怀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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杭爱山,位于蒙古国中部,长约700公里,一般海拔3000米左右,蒙古主要河流色楞格河发源于此,向北流入俄罗斯贝加尔湖。杭爱山脉是北冰洋流域与内流区域的主要分水岭。杭爱山在汉代中国称为燕然山,位于蒙古高原的西北,离雁门关大概在1800公里左右,是历代中国军队可以深入漠北追击游牧民族的极限。杭爱山以北,中国人称为“极北”,基本上被视为蛮荒地带。


총융청의 긴요함이 훈련도감과 어영청에 버금간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사이 20년 동안에 대략 마음으로 헤아린 바가 있었으나 우선은 정중하고 진중하게 처리해야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먼저 조금 시험해 보고자 한다면 수어청 군영을 두고 어느 것을 먼저 하겠는가. 지금부터 수어청을 혁파하도록 하라. 대저 수어사라는 이름이 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는 것과 영부(營府)가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것은 대부분 조정의 논의가 일치를 보지 못하고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연관된다. 이 뒤에 만약 결정된 사안에 대해 발언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국가의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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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융청(摠戎廳)


임진왜란을 계기로 새로이 편제된 5군영(五軍營)의 하나. 1623년 인조반정 후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1624년(인조 2) 서울 외곽 경기 일대의 경비를 위하여 설치되었다. 내·외 2영(營)으로 나뉘어 수원(水原)·광주(廣州)·양주(楊州)·장단(長湍)·남양(南陽) 등 진(鎭)의군무를 맡아보았다. 총융청에는 사(使)·중군(中軍) 각 1명, 천총(千摠) 2명, 진영장(鎭營將) 4명, 파총(把摠) 2명, 초관(肖官) 10명과 교련관(敎鍊官) 15명, 기패관(旗牌官) 2명, 군관 2명, 감관(監官) 2명, 수문부장(守門部將) 1명, 한량군관(閑良軍官) 150명이 있었다. 1757년 북한산성을 맡아 다스리던 경리청(經理廳)이 이관됨에 따라 관성장(管城將)·파총 각 1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수첩군관총(守堞軍官摠) 2명, 군기감관(軍器監官) 1명, 소임군관(所責軍官) 3명, 부료군관(付料軍官) 20명, 성문부장(城門部將) 3명이 이속되어 북한산성 중심의 경기 북부 수도 외곽 방어를 담당하였다. 총융청은 1846년(헌종 12) 총위영(摠衛營)으로 개칭, 1849년 다시 총융청으로 복귀되고 1882년(고종 19) 잠시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되었다. 1884년 친군영제(親軍營制)가 성립되면서 폐지되었다.


“燕山”和“燕然山” 

 

《马》诗中“燕山月似钩”中的“燕山”,有的参考书说是指现在河北省北部的燕山,有的说是指蒙古人民共和国境内的杭爱山(又名燕然山)。到底哪种说法正确呢?


应当是指现在河北省北部的燕山。作为山的名字,“燕山”在我国古代以至现代都只有一个。蒙古人民共和国境内的杭爱山,我国古代称为燕然山,不称燕山,在唐诗宋词中说到杭爱山时都称作“燕然”,如“萧关逢侯骑,都护在燕然”(王维《使至塞上》);“浊酒一杯家万里,燕然未勒归无计”(范仲淹《渔家傲》)。


燕山地处古代幽州,也是边关要塞。据史书记载,燕山一带自汉末魏初,一直为外族所占,因其地处偏远、征戍不绝,所以常常把它当作边塞的代称。作者李贺所处的贞元、元和之际,正是唐代藩镇作乱最为猖獗的时期,而幽州燕山一带又是藩镇肆虐最久、为祸最烈的地方。


认为燕山指燕然山,主要是因为对这首诗的一、二两句“大漠沙如雪,燕山月似钩”理解不全面,认为幽州没有“大漠”。其实,这两句只是描写边塞地区的冷峻和肃杀景象,“大漠”和“燕山”都是边塞的代称,并不是实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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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반퉁구트(古爾班通古特 :Dzoosotoyn Elisen Desert)사막

 

 


구르반퉁구트사막(古爾班通古特砂漠)은, 중화 인민 공화국 新疆維吾爾自治区의 북부, 准噶爾(즐갈) 분지에 있는 사막이다. 남서로 파라과노(婆羅科努 보로호로) 산맥, 남동으로 博格達(보그다) 산맥이 이어져, 북부에 烏倫古(우룽르) 하가 흐르고 있다.


The Dzoosotoyn Elisen Desert (officially: Gurbantünggüt Shamo; 古尔班通古特沙漠; Pinyin: Gu'erbantonggute Shamo) is a remote, arid, and rugged area of the Xinjiang Autonomous Region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The nearest population center to this sparsely populated land is the city of Ürümqi. The desert is the second largest desert in China, after Taklamakan Desert, which is also located in Xinjiang. The desert is approximately 50,000 square kilometers (19,000 mi²), and located around 300 to 600 meters above sea le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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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일어난 몽골 항애산 대지진이 고종 실록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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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年 蒙古 杭爱山 地震 

1905年7月9日,蒙古杭爱山地震。这次地震发生在蒙古杭爱山脉北麓,震级8.3级。过了14天,在其西边100千米处又发生了一次8.3级地震,这两次地震的极震区相接。象这样在不长的时间内连续发生两次 8级以上地震的例子,在欧亚大陆上还是罕见的。由于这两次地震发生在人口稀少的地区,因而灾情并不严重。但在地面上,两次地震联合造成了达350千米长的断裂带(两次地震断裂相接)。该地震断裂是沿着原有的老断层发生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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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6권, 42년(1905 을사 / 대한 광무(光武) 9년) 8월 30일(양력)

지진이 일어나다

地震 

지진(地震)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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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07 09 Mongolia (khangai 항애산 지진)- M 8.4

세계주요地震리스트(1138~1910) http://blog.daum.net/han0114/17049685 

 

高宗 45卷, 42年(1905 乙巳 / 대한 광무(光武) 9年) 2月 10日(陽曆)

지진이 일어나다

十日。 地震。

지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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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 46卷, 42年(1905 乙巳 / 대한 광무(光武) 9年) 8月 30日(陽曆)

지진이 일어나다

地震。

지진(地震)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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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조선왕조실록 지진 기록인데 불행하게도 기록자체가 아주 간단하다.

지진!

그러나 이 지진이란 두자 단어 속에 1905년 몽고 항애산(杭爱山)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몽골땅 그것도 한반도에서 2,573㎞( 6,300리)수천리나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대지진 상황을 왕조실록에 함부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아닐터인데 간단(자세한 기록은 빼버렸다고 보이고)하지만 이처럼 기록하였다는 것은 그 곳 역시 조선 관할지였기 때문이라고 해석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