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장영실(蔣英實)은 혼혈인이다.

한부울 2009. 10. 25. 12:13

티무르제국과 조선의 관계? http://blog.daum.net/han0114/17048289 

중앙과학관 혼천시계 340년 만에 복원 http://blog.daum.net/han0114/17049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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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을 혼혈인이라고 기록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원(元)나라 유민 출신으로서 소주. 항주사람이라고 하였다.

소주, 항주는 上有天堂下有蘇杭,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강소성남부)와 항주(절강성북부)가 있다고 하는 지금 대륙의 도시 이름이다.

그런데 영문 위키 자료에는 원(元)이 아니라 그냥 china 이다.

china가 원(元)인가? 고려인가?

고려라고 해야 한다.

즉 원 고려연합체제의 천제국이었다.

원 고려는 다민족국가체제이다.

우리는 고려인이라고 하면 한반도 몽골리안만 생각한다.

원고려는 다민족의 국가이기 때문에 색목인과 회회인들도 관리에 등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를 이은 조선도 마찬가지다.

이 기록에서 장영실을 실제 아버지가 원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혼혈인이라고 하는 것은 착오이다.

그 시대에 존재한 고려를 거대한 다민족 국가체제란 사실을 간과하고 단순히 한반도만을 대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에서 몽골리안들이 권력의 주체가 되어 국가를 경영하였겠지만 사회전반적인 구성원 또는 관료, 관리들은 색목인이나 회회인들이 대대로 이어 어느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원나라는 고려연합체제에 귀속된 국가이고 다민족 국가체제라고 이해 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장영실과 장영실 아버지는 원나라 유민이라고 하여도 반드시 몽골리안이라고 할 수 없다.

역사기록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장씨들은 어쩌면 몽골인이 아닐 수도 있다.

장영실 초상은 근세기에 만들어진 이미지 일뿐 모든 자료에서 세세하게 나타나듯이 아마도 조선세종대 중심영역이 중앙아시아를 근거로 한 것이라고 보았을 때 장영실의 아버지는 동유럽인이나 유라시아인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어 기록에서 혼혈인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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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蔣英實)


장영실(蔣英實, 1390~1450년)은 조선 전기의 관료이며 과학자이자 발명가이다. 경상남도 동래군 출생, 본관은 아산이다.


생애 :《세종실록》에는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유민의 소주(쑤저우)·항주(항저우) 사람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는데, 기술이 뛰어나 태종이 아끼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전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산 장씨 종친회에서는 출생은 1390년(공양왕 2년)경이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장서(아산 장씨 시조)의 8세손으로 고려 말 전서였으며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조선 관노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한다.


Jang Yeong-sil's birth is recorded only in the genealogy of the Jang family and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ccording to these records, his father, Jang Seong-hwi, was the 8th generation of the Jang family who came from China. Jang Seong-hwi was the 3rd of 5 brothers and all of the brothers previously were ministers of Goryeo. There are many historical records about his elder brother, Jang Seong-bal, who was born in 1344 and his grave located at Ui-seong in the province of Gyeongbuk. The Annals state that his mother was a gwangi (gisaeng), thereby their (Yeong-sil's and their mother) social status was a gwanno, (a servant in civil service district courts). Yeong-sil's talent was so excellent that he was sent to the royal court. From above, we may infer that Yeong-sil was born in a family of high official status but when General Yi Song-gye unleashed a coup d'etat, which gave rise ot the Joseon Dynasty, Jang Seong-hwi became a political prisoner and Yeong-sil and his mother became gwannos.[위키]


그의 아버지 (Jang Seong-hwi)는 중국 출신이었던 Jang 씨 가문의 8대손이었다. 

아버지 Jang Seong-hwi는 5명의 형제중 제3남이었다.

그의 모든 형제는 이전왕조 Goryeo 담당 장관이었다. 

...Yi Song-gye 장군이 쿠데타를 유발했을 때 Jang Seong-hwi는 정치범이 되었으며 그의 가족은 관노가 되었다.


장영실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취미와 재주를 가졌으며 동래현 관청에서 일하는 노비가 되었고 그의 훌륭한 재주를 세종대왕이 인정하여 장영실을 발탁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세종 4년) 윤사웅, 최천형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 나이 약 34세 때인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다.[2]


그 후, 세종대왕의 명에 따라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 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이 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 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 혜정교(惠政橋)와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규표(圭表) 등이 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였다.


1434년(세종 16년)에는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을 수 있었다.


특히 1438년(세종 20년) 경복궁 뜰에 혼천의를 간수하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울 때 이 모든 공역을 감독했다. 그는 서양보다 근 2세기나 앞서서 측우기를 만들었다. 그밖에 여러 기기를 제작 감독하는 등 기계·건축·과학 발전에 공이 컸다.


천문기구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하다가 나이 약 61세였던 1442년 3월(세종24년),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을 다녀오던 중 기술자로서 정3품 상호군(上護軍) 장영실이 책임을 지고 있던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100대와 파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한다. 이후 장영실의 기록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장영실은 당시 세종대왕이 직접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하였고, 수많은 기기를 제작하였다. 미천한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종3품관 대호군(大護軍)에서 정3품관 상호군(上護軍) 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다. 장영실은 이순지와 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당대의 훌륭한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다.


장영실이 제작한 기구


해시계 : 앙부일구(仰釜日晷)는 1434년 조선 세종대왕 16년에 만들어진 해시계이다

혼천의(渾天儀) : 천체관측 기구로 '혼의' 또는 '선기옥형'이라고도 불린다. 해와 달, 오행성의 위치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물시계(일명 자격루) : 1434년 7월 1일 조선 세종 16년에 장영실, 김조 등과 함께 만든 물시계의 일종으로, 시간마다 종이 울리도록 한 국가 표준시계이다

현주일구:휴대용 해시계로 정초·장영실·김빈·이천·김돈 등이 만들었다

옥루(玉漏): 조선시대의 천상시계(天象時計)이며 자동물시계의 하나이다. 장영실이 1438년(세종 20년) 1월에 완성하여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다

대간의(大簡儀): 천문대용 관측기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해시계와 별시계의 기능을 하나로 모아 고안하여 낮과 밤의 시각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게 하여 장영실 등이 만든 주야간 시계이다.

천평일구(天平日晷)· 해시계일종, 시표(時標)와 시반(時盤)이 수직을 이루도록 기둥에 추를 매달아 십자(十字)의 중심에 걸리게 하고, 남북을 정하기 위하여 지남침을 두었으며, 시표는 세선(細線)이 3각형을 이루어 접을 수 있도록 하였다.

수표(水標) : 높이 약 3m, 폭 약 20cm, 부정 6면이며 방추형 석주로 되어 있다.

수표는 세종 23년(1441)에 측우기가 발명되고 강우량의 측정법이 과학적으로 제도화되면서 하천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설치된 하천 수위계(水位計)이다.

 

Korean celestial globe first made by the scientist Jang Yeongsil during the Joseon Dynasty under the reign of King Sejong.

 

                            Scaled model of Jang Yeong-sil's Self-striking water clock.

 

A Korean sundial first made by Jang Yeong-sil during the Joseon Dynasty, displayed in Gyeongbokg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