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이여송(李如松 1549 ~ 1598 )은 대륙조선의 장수이다.

한부울 2009. 8. 28. 22:15

이여송이 조선인인데 조선에 파병되었다?

이것을 진짜 믿으라고 하는 것인가?

이미 조선이 대륙조선이란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이때 이것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정말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조부뿐만아니라 부친까지 조선인인 그가 조선에 파병되었다는 엉터리같은 일제가 남긴 기록만으로 명이란 나라의 장군이라고 설정하는 것부터가 픽션이다.

반도사가 이런 형국이니 믿을 바가 못 된다고 하는 것이다.

뻔 한 사실을 반도사란 틀에 맞추려하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설정이 필요한 것이다.

더 이상 논 할 가치가 없는 이력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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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 李如松 ( 1549 ~ 1598 )


중국 명(明)의 장수(將帥)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명(明)의 2차 원병(援兵)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별칭 : 자(字) 자무(子茂), 호(號) 앙성(仰城)

시호 : 충렬(忠烈)

출신지 :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톄링[鐵嶺]

국적 : 중국 명(明)

활동분야 : 정치


자(字)는 자무(子茂), 호(號)는 앙성(仰城)이며 철령(鐵嶺, 지금의 遼寧省 鐵嶺) 출신이다. 조선(朝鮮) 출신인 이영(李英)의 후손(後孫)이며, 요동총병(遼東総兵)으로 랴오둥[遼東] 지역의 방위에 큰 공을 세운 이성량(李成梁, 1526~1615)의 장자(長子)이다. 철령위(鐵嶺衛) 지휘동지(指揮同知)의 직위(職位)를 세습하였다가, 1583년(萬曆 11년) 산시총병관[山西總兵官)이 되었다. 1592년(萬曆 20년), 간쑤성[甘肅省] 닝샤[寧夏]에서 발배(哱拜)의 난이 일어나자 제독(提督)으로 토벌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동생인 이여장(李如樟)과 함께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도독(都督)으로 승진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 임명되어 조선(朝鮮)으로 파병되었다.


43000여의 명군(明軍)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이여송(李如松)은 휴정(休靜, 1520~1604), 김응서(金應瑞, 1564~1624) 등이 이끄는 조선(朝鮮)의 승군(僧軍), 관군(官軍)과 연합하여 1593년 1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倭軍)을 기습해 평양성(平壌城)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며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黄海道), 개성(開城) 일대를 탈환(奪還)했지만, 한성(漢城, 지금의 서울) 부근의 벽제관(碧蹄館)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이 이끄는 왜군에 패하여 개성(開城)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함경도(咸鏡道)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이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말이 떠돌자 평양성(平壌城)으로 물러났다. 그 뒤에는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화의(和議) 교섭(交涉)에만 주력하다가 그 해 말에 유정(劉綎, 1558~1619)의 부대만 남기고 명(明)으로 철군(撤軍)하였다.


명(明)으로 귀국한 뒤에 이여송은 태자(太子) 태보(太保),중군도독부(中軍都督府) 좌도독(左都督) 등을 역임하였으며, 1597년(萬曆 25년)에는 요동총병(遼東総兵)이 되었다. 1598년 4월, 타타르[韃靼]의 토만(土蠻)이 랴오둥[遼東]을 침공하자 이여송은 4000여의 경기병(輕騎兵)만을 이끌고 정벌에 나섰다가 복병을 만나 전사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영원백(寧遠伯)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충렬(忠烈)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동생인 이여매(李如梅)가 요동총병(遼東總兵)의 직위가 승계되었다.


이여송의 후손들은 랴오닝성[遼寧省]에서 철령(鐵嶺) 이씨(李氏)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살아왔다고 전해지며, 그의 후손 가운데 일부는 명(明)이 멸망한 뒤 조선(朝鮮)으로 피신하여 농서(隴西) 이씨(李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여송의 가계(家系)는 성주(星州) 이씨(李氏)에서 갈라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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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량(李成梁, 1526년 - 1615년) 이여송의 부친


자(字)는 여계(如契). 일찍이 명나라로 건너간 조선인(조선으로부터 망명한 여진족이라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이 낮다.) 이영(李英)의 자손으로, 요동철령위(랴오닝 성 톄링)의 지휘첨사의 자리를 대대로 세습하고 있었지만, 융경(隆慶) 4년(1570년)에 요동총병이 되어, 당시 침입이 격렬했던 여진족에 대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이성량은 군비를 확충하면서, 건주 여진(建州女眞), 해서 여진(海西女眞) 등에 나누어져 있던 여진족이 명과의 교역권을 둘러싸 싸우고 있는 것에 기입해 내부 분열을 도모한 것으로, 요동의 안정에 큰 공적을 올렸다. 이 시기, 이성량의 후원을 얻어 세력 확대에 성공한 것이 후의 청(淸)의 태조(太祖) 누르하치(努爾哈赤)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요동을 통괄해, 지방의 실력자로서 할거 한 이성량은, 한편으로 군비의 유용 등 독직이나 전단이 많아, 만력(萬曆) 19년(1591년)에 탄핵 되어 실직되었다. 잠시 복직했지만, 만력 36년(1608년)에 파면되었다.


소생으로는 임진왜란으로 일본군과 싸운 이여송(李如松)과 역시 임진왜란과 살이호 전투(薩爾滸)에 참가한 이여백(李如柏)등 9명의 자식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들 일가를 이가구호장(李家九虎將)이라 불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