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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 추존왕 혁현과 재풍은 朝鮮 추존왕 익종과 흥선을 모방한 것인가?

한부울 2009. 8. 22. 18:21

조선 익종은 아들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제24대 재위 1834~1849)와 양자라지만 익종사후 신정왕후가 대원군아들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제26대 재위 1863~1897)를 세웠고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태황제와 손자 순종황제를 세웠다.

청나라 순현친왕 혁현 역시 차남 재첨(載湉)가 광서제이고 5남 재풍(載灃)은 순친왕이며

순친왕 재풍 역시 청 마지막 12대 황제 선통제(宣統帝 재위 1908~1912)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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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 추존왕 혁현과 재풍은 朝鮮 추존왕 익종과 흥선을 모방한 것인가?


조선 추존왕 문조(文祖) 또는 익종(翼宗) 순조10년 음력 8.9(1809.9.18)~순조30년 음력

5.6(1830.6.25)는 


헌종(憲宗)의 아버지로써 조선의 추존왕·황제이다. 자(字)는 덕인(德寅)이며 휘(諱)는 영(旲), 정식 시호는 文祖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寓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로 재위에 오르지 못한 추존왕 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긴 시호를 가지고 있다. 세자시절 사망하였기 때문에 흔히 효명세자(孝明世子)로도 불린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자로 태어나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음력 10월에 세자빈(신정왕후: 고종 수렴청정)과 가례를 올렸다. 1827년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의 인물을 중용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30년에 서거하였다.


사후에 아들인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 뒤 그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였으며 이후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載晃)이 그의 입승대통을 이어받아 高宗으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899년에는 양자인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재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역 내에 위치한 수릉(綏陵)이다.


아버지 :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790~1834)

어머니 :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1789~1857)

왕비 :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1808~1890)

아들 :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1827-1849) 제24대 재위 1834~1849

양자 :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1852~1919) 제26대 재위 1863~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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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 음력 11.16(양력12.21)~1898.음력 2.2(양력 2.22)은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가, 추존왕이다.

 

 


이름은 이하응(李昰應)이다. 부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영조의 5대손이자 남연군(원래는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후에 양자 입적)과 군부인 민씨의 넷째 아들이며, 고종의 친아버지이다.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907년 헌의(獻懿)를 시호로 받아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으로 추봉되었다.


흥선(興宣)은 청나라 순친왕 재풍(載灃)과 이력이 닮았지만 항렬(行列)이 응(應)이니 일단 재(載)의 위인 것 같으나 나이로는 할아버지뻘이다. 그러나 재풍의 아버지는 혁현(奕譞)이고 혁(奕)자 항렬이다. 기록상 전주이씨가 아니라 물론 비교할 순 없으나 동질성이 보인다.

흥선(興宣) 계보에 특이 한 것은 어머니, 부인, 며느리 三代가 민씨(閔氏)도 모자라 며느리 민(閔)황후는 흥선 모친 본관인 여흥(驪興)이라는데 그저 신기 할 다름이다.

또한 마지막 고종 자 순종은 명휘(척:坧)는 보이는데 이름이 없다.

항렬을 따져 볼 수 없게 했다.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1788년 - 1836년)

어머니: 군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 ? - 1831년)

형 : 이창응(李昌應, 흥녕군(興寧君), 1809년 - 1828년)

형 : 이정응(李晸應, 흥완군(興完君), 1815년 - 1848년)

형 : 이최응(李最應, 흥인군(興寅君), 1815년 - 1882년)

아내 :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년 - 1898년)

아들(적장자) : 이재면(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년 - 1912년)

손자(적장손) : 이준용(李埈鎔)

아들 : 고종(이재황(李載晃), 1852년 - 1919년 1월 21일)

며느리 민황후1851.음력 9.25~1895.음력 8.20(양력10.8)아명은 자영(玆暎)본관은 여흥(驪興)이다. 경기도 여주군 출신

장녀 - 조경호와 혼인

차녀 - 조정구와 혼인

소실 :

서장자 : 이재선(李載先, 완은군(完恩君), ? ~ 1881년)

서녀 - 이윤용(이호준의 서자)과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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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순현친왕 혁현(愛新覚羅 奕譞:1840.10.16-1891.1.1)


 

 

 

 순현친왕 혁현(醇賢親王 奕譞)


항렬로 따져서는 흥선 대원군과 동급이다.

그러나 청 이름 혁현(愛新覚羅 奕譞)이라 짐작 할 수 없게 했다.


청의 도광제의 제7자로, 초대순황태자. 어머니는 장순황귀비. 아들은 載湉(광서제), 載澧(제2대순황태자, 선통제의 친아버지), 재순, 재도 등. 시는 현.


1850년, 형 함풍제가 즉위 하자 순친왕에 봉. 1861년에 동치제가 즉위 하면서 도통, 어전 대신, 령 시를 명령받아 황태자에 올랐다. 1874년, 동치제가 아이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면서, 제의 어머니 서태후는 자신의 여동생을 어머니로 하는 奕譞의 제2자 載湉을 동치제의 아이로서 즉위 시켰다(광서제). 奕譞는 친자식의 즉위와 함께 관직을 물러났지만, 1884년의 청불전쟁의 처리를 둘러싸고 이복형인 恭親王(愛新覺羅·奕訢) 軍機大臣이 파면되면서 대신 기용되어 해군을 통괄했다.


道光帝 황자

隱志郡王奕緯(母和妃)

順和郡王奕綱(母孝靜成皇后)

慧質郡王奕繼(母孝靜成皇后)

咸豐帝奕詝(母孝全成皇后)

惇勤親王奕誴(母祥妃)

恭忠親王奕訢(母孝靜成皇后)

醇賢親王奕譞(母莊順皇貴妃)

鍾端郡王奕詥(母莊順皇貴妃)

孚敬郡王奕譓(母莊順皇貴妃)


혁현 아들

一子:載瀚,嫡福晉葉赫那拉·婉貞所生,同治四年乙丑正月初六日辰時生,五年丙寅十月十一月初三日未時卒,年兩歲。 

二子:載湉嫡福晉葉赫那拉·婉貞所生,即光緒帝。 

三子:未命名,嫡福晉葉赫那拉·婉貞所生,光緒元年乙亥正月初八日子時生,初九日午時卒。 

四子:載洸,嫡福晉葉赫那拉·婉貞所生,光緒六年庚辰十月二十六日酉時生,十年甲申四月二十四日申時卒,年五歲。 

五子:載灃側福晉劉佳氏所生。宣統帝生父,攝政王,襲醇親王。 

六子:載洵,側福晉劉佳氏所生,過繼給瑞郡王奕誌為嗣。清末海軍大臣。 

七子:載濤,側福晉劉佳氏所生,一開始過繼給貝子奕謨為嗣,後改繼給鐘郡王奕詥為嗣。清末軍諮府大臣。 


혁현 딸

一女:嫡福晉葉赫那拉·婉貞所生(名義上),第一側福晉顏扎氏所生(實際上)。

咸豐十一年辛酉三月初二日申時生,同治五年十月十八日辰時卒,年六歲。 

二女:側福晉劉佳氏所生,三歲殤。 

三女:側福晉李佳氏所生,死年二十八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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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순친왕 재풍(愛新覚羅 載灃:1883.2.12-1951.2.3)

 

                                                    순친왕 재풍(醇親王 載灃)


재풍(愛新覚羅 載灃:1883.2.12-1951.2.3)는 청의 황족. 제2대순황태자이다.


醇親王奕譞의 삼남으로, 광서제의 남동생. 청조 제12대(마지막) 황제 선통제와 그 제·부걸의 친아버지에 해당된다.


아버지의 사후, 세습이 용서되어 순황태자를 습봉했다. 아버지에게 이어 서태후의 신임을 받아 義和団의 란 후에는 독일 공사 살해에 대한 사죄사로서 독일에 파견된다. 입헌 군주제의 창립에 종사해, 형(오빠)·광서제의 만년에는 섭정왕이 되었다. 1908년에 부의가 즉위 하자 監国摂政王으로 취임해 군국의 권한을 장악 해, 형(오빠)·광서제의 戊戌変法을 잡았다고 해, 원세개를 실각시켰다. 또, 군기처에 변하는 내각을 내각 조성 했지만, 辛亥革命이 시작되자 隆裕 황태후의 명령에 의해 원세개에 전권을 譲등 되었다.


청조 멸망 후는, 청조 황제의 천황, 황후, 황태자등의 칭호를 보관 유지해 자금성에 사는 일이 용서된 부의의 후견역이 되었다. 하지만, 1932년에 부의가 일본의 관동군에 의해 만주국 황제에 추대해졌을 때에는, 전도를 의심해 이것에 반대해, 그대로 북경 시내의 저택에 이주해, 만주국과는 구별을 분명히 했다.


이 때문에, 제이차 세계대전 종결후도 전쟁 범죄에 거론되는 일 없이, 중국 공산당 정권하에서도 은퇴 생활자로서의 생활이 보장되어 북경에서 그 생애를 닫고 있다


순친왕 재풍은 醇賢親王혁현의 다섯번째 아들이다. 혁현의 장남은 광서제 재첨으로 재풍은 그의 아우이다. 측복진 유가씨에게서 태어났으며 광서제가 자식이 없이 죽자 장남인 부의가 황제가 되었다. 슬하에 4남 7녀를 두었다.


이력


1883年 正月初五日出生於北京太平湖醇親王府內, 為醇賢親王奕譞之第五子。

其二兄載湉入繼咸豐帝為嗣,繼承同治帝入承大統,是為光緒帝。 

1890年 11月21日, 襲封醇親王。1894年 全家移居什剎海後海北河沿醇親王府(北府)。

1901年 1月, 授閱兵大臣。5月, 授頭等專使,

赴德國為庚子德國駐北京公使克林德被殺一事進行道歉。 

1907年 5月, 授軍機大臣上學習行走。

1908年 1月, 任軍機大臣。同年10月, 因光緒帝病卒無嗣, 以其長子溥儀入嗣繼承皇位, 是為宣統帝, 同時被授為監國攝政理朝政。

1911年 12月6日,辭去監國攝政王職位,以醇親王退歸府邸。

1934年 赴東北滿州國, 月餘後返回北平。

1951年初, 因多年老病感受風寒, 於2月3日病故。葬於北京西郊福田公墓。


아들


一子 溥儀(1906-1967)字 耀之, 號 浩然, 改名 溥 浩然。宣統帝, 娶兩名妻子, 無子女。 장남 공종 민 황제 선통제 부의

二子 溥傑(1907-1994)字 俊之, 改名 溥 俊之。娶嵯峨浩, 生兩女 차남 부걸

三子 溥倛(1915-1918)不滿三歲夭折

四子 溥任(1918-今) 字 友之, 改名, 金 友之。娶金瑜庭, 生三子兩女。


 


一女 韞媖(1909-1925)嫁郭布羅·潤良, 無子女。

二女 韞和(1911-2001)改名, 金 欣如。嫁鄭廣元, 生一子三女。

三女 韞穎(1913-1992)字 蕊秀,改名, 金 蕊秀。嫁郭布羅·潤麒, 生兩子一女。側福晉 鄧佳氏, 名號不詳。十八歲時和載灃結婚。

四女 韞嫻(1914-2003)改名, 金 韞嫻。嫁趙琪璠, 生一對子女。

五女 韞馨(1917-1998)字 蕊潔, 改名 金 蕊潔。嫁萬嘉熙, 生三子一女。

六女 韞娛(1919-1982)字 蕊樂,改名 溥 韞娛。嫁完顏·愛蘭, 生一子四女。

七女 韞歡(1921-2004)小名 姞, 字 蕊莟, 號 璧月, 改名 金 志堅。嫁喬宏志, 生兩子一女。

 


載灃(坐者)和兒女合影

後排:韞媖、載灃、溥傑

前排:韞馨、韞穎、溥任、韞娛、韞歡、韞和、韞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