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태평천국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4999
동학(東學) http://blog.daum.net/han0114/1704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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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와 홍수전은 같은 인물이 아닌가?
최제우(1824~1864)
동학(東學)의 창시자로서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이다. 그리고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이다. 아버지는 옥()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 진립(震立)은 임진왜란·병자호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사후에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를 받았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한 유생으로 2번 상처를 하고 과부이던 한씨를 만나 63세에 최제우를 낳았으나 이미 동생의 아들 제녕(濟寧)을 양자로 들여 그는 서자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혼인했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농사에는 마음이 없었으며 화재까지 당하여 집안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3년상을 마친 뒤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면서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익히고,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1844년(헌종 10)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1855년(철종 6) 3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승려로부터 〈을묘천서 乙卯天書〉를 얻고 난 후 더욱 수련에 힘썼다.
1856년(철종 7)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처자를 거느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온 뒤에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을 계속했다. 이무렵 어리석은 세상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쳤다.
1860년 4월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공중으로부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사람들에게 포교할 준비를 했다.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천(天)·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경(敬)·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2년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여러 가지 소문도 떠돌게 되고 지방의 유림과 친척 중에도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서학(西學:천주교)을 신봉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하여 이듬해 3월 경주로 돌아갈 때까지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해 있었다. 피신중에 자신의 도가 서학으로 지목되는 것을 반성하고 표현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으며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論學文)》 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 (安心歌)》·《교훈가 (敎訓歌)》·《도수사 (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제자 중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전도에 힘쓰게 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1862년 9월 이술(異術)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혐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몰려와 최제우의 가르침이 민속(民俗)을 해치지 않는다고 증언하면서 석방해줄 것을 청원하여 경주진영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무죄로 석방했다. 이후 그는 신도들에게 세상의 오해를 받기 쉬운 언행을 삼가하도록 경계했다. 한편 그가 무죄석방되자 사람들은 관이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해 포교가 더욱 용이해졌다. 신도가 늘어나자 그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접은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으며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 11월 왕명을 받은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3명과 함께 경주에서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 일행에 의해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효수형(梟首刑)에 처해졌다.
1907년(융희 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두산백과]
연대기
1824년경주군 현곡면에서 출생
1833년(10세) 모친 별세
1840년(17세) 부친 별세
1842년(19세) 울산 밀양박씨와 결혼
1844년(21세) 장삿길에 나서 이후 10년간 전국을 주유
1854년(31세)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경주 용담집에 들어앉아 구도의 사색 시작. 음력 10월 부인의 고향인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로 이사
1856년(33세) 양산 천성산 내원암으로 가 49일간의 입산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별세로 47일 만에 중단.
1857년(34세) 다시 천성산 적멸굴로 가 49일 입산기도. 기도를 마친 후 생업으로 용광업을 경영.
1858년(35세) 용광업 그만 둠.
1859년(36세) 울산을 떠나 경주 용담으로 귀향.
1860년(37세) 음력 4월 5일 한울님을 만나는 종교체험.
1861년(38세) 음력 4월경 주문과 심고법을 만들어 수행하는 방법을 정하고 교리체계를 세움.
1861년 음력 6월부터 용담으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포덕(布德) 시작. 음력 7월에 <포덕문> 지음.
1861년 음력 8월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이 수운이 가르치는 도를 서학으로 몰기 시작. <안심가> 지음.
1861년 음력 11월 경주 관아에서 수운의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짐. 수운은 용담을 떠나 울산, 부산을 거쳐 전라도 남원으로 감. 음력 12월에 남원에 당도. 이후 남원의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6개월간 체류.
1862년(39세) 음력 7월 경주로 돌아가 박대여 집에 은신. 음력 8월 측근들에게 포덕에 나서라고 권유.
1862년 음력 9월 29일 경주진영에서 수운 체포. 수운은 음력 10월 5일 석방되어 용담으로 돌아옴. 음력 11월 9일 흥해 매산리로 피신. 음력 12월에 최초로 접주들을 임명.
1863년(40세) 음력 3월 다시 용담으로 돌아옴. 음력 5월 하순부터 적극적으로 교화활동. 음력 7월에 최경상(해월)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
1863년 음력 12월 10일 조선 왕조의 관군에게 체포됨.
1864년(41세) 음력 3월 10일 대구에서 참형(斬刑)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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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전(1814~1864)
太平天國最早期諸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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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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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王 |
天王 |
東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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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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翼王:石達開 |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은 청(淸) 인종(仁宗) 가경(嘉慶) 19년(1814년 1월 11일) 광동 화현(花縣) 관록촌(官祿村)에서 태어났으며, 아명은 화수(火秀), 본명은 인곤(仁坤)이다. 농민집안 출신인 홍수전은 7세부터 서당에 입학하여 학문을 배우다가, 16세 때에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와 형을 도와 농사를 지었다.
18세 때에는 고향 마을의 서당 훈장 노릇을 하였다. 그 후 여러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계속 낙방하였다. 1836년 그는 과거 응시차 광주(廣州)에 갔을 때, 길거리에서 한 기독교 선교사를 만나 <<권세양언(勸世良言)>>이란 책을 얻게 되었다. 1837년 봄 그는 세 번째 과거에 낙방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정신적인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큰 병을 얻어 40일간 몸져눕게 되었다.
이때 그는 꿈속에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한 노인(후에 하느님이라고 일컬음)을 만났는데, 그 노인으로부터 보검과 함께 요마를 제거하라고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1843년 그는 마지막으로 광주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또 다시 낙방하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는 7년 전에 광주의 길거리에서 얻었던 기독교 포교서 <<권세양언>>을 읽고 사상적으로 깊이 심취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신은 하느님 뿐이라는 사상을 이용하여 세상의 다른 모든 우상과 요마를 물리치고,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손으로 평등하다는 설교를 이용하여 백성을 압박하는 봉건 계급관념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여 세상을 구제한 종교적 전설을 이용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차남이자 예수의 동생이라 일컬으면서 종교조직인 '배상제교(拜上帝敎)'를 창설하였다.
가장 먼저 배상제교에 가입한 풍운산(馮雲山: 1822~1852)은 홍수전의 동창이자 고종사촌으로 홍수전과 매우 친밀한 사이었다. 그는 홍수전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여러번 낙방한 후 실의하여 서당에서 훈장노릇을 하다가 배상제교의 조직책과 선교자를 맡았다.
처음에 홍수전과 풍운산은 고향 부근의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믿을 것을 권하였다. 얼마 후 홍수전은 풍운산, 집안 동생 홍인간(洪仁?) 등과 함께 그가 몸담고 있던 서당의 공자 위패를 철거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서당의 훈장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1844년 봄, 홍수전은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풍운산과 함께 광서(廣西) 귀현(貴縣) 사곡촌(賜谷村)으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해 9월 풍운산은 다시 계평현(桂平縣) 자형산(紫荊山) 지역으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1월에 홍수전은 화현으로 돌아가서 선교활동에 필요한 배상제교의 교리 저술 작업에 착수하였다.
1845년부터 홍수전은 2년여에 걸쳐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 <원도각세훈(原道覺世訓)> 등을 완성하고 배상제교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기독교리와 유가사상을 융합하여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정직한 사회를 건설하자고 호소하였다.
1844년 가을, 풍운산은 단신으로 자형산 지역에 간 후 농민들에게 하느님을 믿을 것을 선교하였다. 풍운산의 각고의 노력 끝에 1847년 상반기에 이르러 자형산 지역의 신도는 이미 3000여명에 달하여 하나의 통일된 조직체계를 형성한 후 '배상제회(拜上帝會)'라 일컬어졌다.
1847년 8월 홍수전은 새로 만든 배상제교의 교리를 가지고 자형산 지역으로 가서 풍운산과 합류하였다. 그들은 즉시 배상제회의 각종 종교의식과 계율을 제정하여 조직의 확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해 10월 홍수전과 풍운산은 신도들을 이끌고 상주(象州) 감왕묘(甘王廟)로 가서 그곳의 지주들이 숭배하는 감왕의 신상(神像)을 전부 부셔 버렸다. 당시에 감왕은 어머니를 죽인 포악하고 음란한 흉신(凶神)이었으나 그 지역 사람들은 재앙을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그를 섬기고 있었는데, 홍수전과 풍운산 등이 그러한 감왕의 10대 죄상을 선포한 후 대지팡이로 신상을 부셔 버렸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홍수전과 배상제교의 명성이 크게 알려져 배상제회에 가입하려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났다. 배상제교 신도들이 각지에서 사당의 우상을 파괴하자 토호세력들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토호세력들은 배상제회 신도들을 종묘사직을 파괴하고 청나라 조정을 반대하는 불법 단체로 간주하였다. 1848년 1월 계평현의 토호 왕작신(王作新)은 자위 병력을 동원하여 풍운산과 노육(盧六) 등을 체포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홍수전은 급히 광주로 달려가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명운동을 벌였다. 이때 배상제회의 핵심 인물인 양수청(楊秀淸)과 소조귀(蕭朝貴)가 등장하여 홍수전을 도우면서 배상제회의 조직을 다시 다져나갔다.
1848년 겨울 풍운산은 자형산 배상제회 신도들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풍운산은 석방되자마자 즉시 광동으로 달려가서 홍수전을 만났다. 1849년 7월 홍수전과 풍운산은 다시 자형산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초여름에 계평에서 평남현(平南縣) 산인촌(山人村)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광서 지역에서는 각지에서 천지회(天地會)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배상제회의 역량도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자형산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귀현(貴縣), 동쪽으로는 평남(平南), 등현(藤縣), 남쪽으로는 육천(陸川), 박백(博白), 북쪽으로는 무선(武宣), 상주(象州) 및 광동의 신의(信宜), 고주(高州), 청원(淸遠) 등지에 이르기까지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배상제회의 신도들은 대부분 한족(漢族), 장족(壯族), 요족(瑤族)의 빈곤한 농민, 광부, 노동자들이었으며, 소상인과 실의한 농촌 지식인들도 일부 있었다.
1850년 7월, 홍수전은 총동원령을 발포하여 전국 각지의 신도들에게 11월 4일까지 금전촌(金田村)에 집결하도록 호소했다. 이때 집결한 인원은 약 2만여명에 달했다.
1851년 1월 11일(道光 30년 12월 10일), 홍수전은 38세 생일에 배상제회 신도들을 이끌고 금전(金田)에서 봉기를 일으켜 국호를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 하였다.
금전에서 출발한 태평군은 먼저 교통의 요지인 강구진(江口鎭)을 점령하였다. 이때 천지회의 나대강(羅大綱)과 소삼랑(蘇三郎) 등이 수천명을 거느리고 태평군에 합류함으로써 태평군의 위세는 더욱 강대해졌다. 청나라 정부에서는 급히 양강총독(兩江總督) 이성원(李星沅)을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삼고, 호남제독(湖南提督) 향영(向榮)을 광서제독(廣西提督)으로 삼은 다음, 광동, 광서, 운남(雲南), 귀주(貴州), 호북(湖北), 복건(福建) 지역의 병력 1만여명을 이끌고 태평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태평군은 이들을 맞아 대황강(大湟江)에서 대파하였다.
3월 태평군은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무선현(武宣縣)에 진입하였다. 3월 23일, 홍수전은 무선현(武宣縣) 동향(東鄕)에서 스스로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군사(軍師)와 오군주장(五軍主將) 제도를 신설하였다.
그리고는 양수청을 좌보정군사(左輔正軍師)에 임명하여 중군주장(中軍主將)을 맡게 하고, 소조귀를 우필우정군사(右弼又正軍師)에 임명하여 전군주장(前軍主將), 풍운산을 전도부군사(前導副軍師)에 임명하여 후군주장(後軍主將), 위창휘(韋昌輝)를 후호우부군사(後護又副軍師)에 임명하여 우군주장(右軍主將), 석달개(石達開)를 좌군주장(左軍主將)을 맡게 했다.
5월 이성원이 죽자 청나라 정부에서는 다시 대학사(大學士) 새상아(賽尙阿)를 흠차대신으로 파견하여 3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태평군을 포위 공격하게 하였다. 태평군은 동향(東鄕)에서 철수하여 상주(象州)로 진격하였다가, 다시 상주에서 계평(桂平)을 공격하여 정부군을 격파한 후 평남(平南)으로 동진하였다. 9월 태평군은 평남 관촌(官村)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태평군은 승세를 타고 계속 진격하여 단번에 영안주성(永安州城: 광서<廣西> 몽산<蒙山>)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홍수전이 봉기를 일으킨 이후 처음으로 점령한 도시였다.
홍수전은 영안에서 천력(天曆: 태평천국의 역법)을 공포하고 각종 제도를 제정하였다. 12월17일 홍수전은 여러 왕들을 봉하는 조령을 반포하고, 양수청을 동왕(東王), 소조귀를 서왕(西王), 풍순산을 남왕(南王), 위창휘를 북왕(北王), 석달개를 익왕(翼王)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진일강(秦日綱)을 천관승상(天官丞相), 호이황(胡以晃)을 춘관무상(春官巫相)에 임명하고, 그 나머지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도 각각 관직을 내렸다. 이로써 태평천국은 중앙 조직의 추형을 갖추게 되었다. 이듬해 봄, 그는 <태평조규(太平條規)>를 반포하여 태평군(太平軍)의 군율로 삼았다.
1852년 4월 4일 태평군은 영안주성을 포위하고 있던 정부군을 물리친 후, 6월 3일 전주(全州)를 점령하였다. 이때 남왕 풍운산의 전사는 태평군의 전력과 사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그럼에도 태평군은 호남(湖南)으로 계속 진격하여 6월 12일 도주(道州)를 점령하였다.
1853년 3월, 홍수전과 양수청 등이 이끈 태평군은 남경(南京)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청나라 조정과 대치하는 태평천국 정권을 정식으로 수립한 홍수전은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천경(天京)이라 개칭하였다. 이때 홍수전은 토지균등을 원칙으로 하는 <천조전묘제도(天朝田畝制度)>를 공포하였다. <천조전묘제도>란 태평천국의 새로운 왕조로서의 이상을 구체화한 것으로, 천하의 토지는 천하의 사람이 함께 경작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따라서 토지의 사유를 금하고, 토지는 국가소유로서 경작자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며, 수확의 잉여분은 국고에 납입시키며 개인적인 축재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1853년 3월 말 새로 임명된 흠차대신 향영(向榮)이 남경 교외에 진을 치고 태평군에 대한 반격 준비를 하였으며, 4월에는 다른 흠차대신 기선(琦善)도 양주(揚州) 부근에서 태평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청나라 정부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 태평군은 북벌과 서정(西征)을 감행하였다.
천경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홍수전과 양수청 등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먼저 천진(天津)을 점령한 다음 지원군과 합류하여 북경을 공격하기로 협의하였다. 1853년 5월 임봉상(林鳳祥), 이개방(李開芳), 길문원(吉文元) 등에게 2만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벌을 개시하게 하였다. 그들은 양주에서 안휘를 거쳐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10월 말에 천진 서남쪽의 양류청(楊柳靑)에 도달했다. 깜짝 놀란 청나라 조정에서는 북경의 경비를 강화하였으며, 함풍제(咸豊帝)도 열하(熱河)로 피난갈 준비를 하였다. 청나라 정부에서는 황급히 정예병력을 소집하여 북벌군을 방어토록 하였다. 천진 지역의 관료, 지주, 부호들도 스스로 무장세력을 조직하여 북벌군의 공격에 대항했다. 11월 북벌군은 정해(靜海) 일대로 퇴각하였다. 때는 엄동설한이라 대부분 남방인들로 구성된 태평군은 북방의 혹한을 견디기 어려웠고, 게다가 식량과 무기마저 떨어져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오는 정부군을 맞이하여 막대한 병력의 손실을 입었다. 1854년 2월 북벌군은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탈출하였다.
홍수전과 양수청은 임풍상 등의 북벌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즉시 증립창(曾立昌), 진사보(陳仕保), 허종양(許宗揚)에게 7천 병력을 이끌고 북벌군을 지원토록 했다. 그러나 북벌 원정군도 도중에 임청(臨淸)에서 청나라 정부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였다. 천경에서는 다시 진일강(秦日綱)을 파견하여 북벌군을 지원하게 하였으나 서성(舒城) 양가점(楊家店)에서 정부군에게 패하였다.
북벌군은 2년 동안 분전을 거듭하면서 수십 개의 주현(州縣)을 점령하여 장강(長江) 유역에서는 그 위세를 크게 떨쳤지만, 청나라의 군사력이 막강한 경기(京畿) 지역에서는 후방의 원활한 지원을 받지 못한데다 지휘부의 계속된 실책으로 정부군의 완강한 대항을 격파하지 못하였다. 태평군은 북벌을 전개한 동시에 서쪽으로도 진격하였다. 서정의 전략 목적은 3대 군사 요충지인 안경(安慶), 구강(九江), 무창(武昌)을 탈취하여 장강 중류를 손에 넣음으로써 천경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853년 5월, 천경에서는 호이황(胡以晃), 뇌한영(賴漢英), 증천양(曾天養) 등을 파견하여 천여척의 배를 거느리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안휘와 강서를 공격하게 하였다. 6월 안경을 점령한 후 계속 서진하여 남창(南昌)을 공격하고, 9월에 구강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안휘의 대부분을 점령한 태평군은 승세를 타고 호북으로 진격하여 한구(漢口), 한양(漢陽), 무창을 점령하였다.
1854년 4월~5월 사이에 태평군은 청나라 정부를 대표하여 진압에 나선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의 군대와 정항(靖港)과 상담(湘潭)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그후 태평군은 증국번의 군대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1856년 3월에 강서 지역의 50여개 주현(州縣)을 장악하였다. 3년에 걸친 서정 끝에 태평군은 3대 군사 요충지인 무창, 구강, 안경을 확보함으로써 태평천국 정권을 공고히 하였다. 서정군이 강서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태평천국의 지도부는 천경을 포위하고 있던 정부군을 물리쳤다. 이때에 태평천국은 천경에 도읍을 정한지 3년째 되면서 군사력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승리감에 도취된 태평천국의 지도부는 자만에 빠져 초기의 혁명정신을 망각하고 권세와 향략 추구에 열중하였다. 특히 홍수전과 양수청은 천경에서 대단위 토목공사를 일으켜 화려한 천왕부(天王府)와 동왕부(東王府)를 축조하였다. 천왕 홍수전은 민간에서 많은 여자를 선발하여 자신의 비빈으로 삼았으며, 동왕 양수청은 출궁할 때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의장대열이 수천명에 달하였다.
홍수전은 천경에 있는 동안 궁궐에만 틀어박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군정대권은 모두 양수청이 장악하고 있었다. 양수청은 혁명 초기에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였지만 천경에 도읍을 정한 후에는 자만과 권위의식에 젖어 위로는 홍수전을 핍박하고 아래로는 다른 장수들에게 강압을 행사하였다.
1856년 8월 홍수전은 양수청의 강요에 못이겨 그를 '만세(萬歲)'에 봉하였다. 이로써 홍수전과 양수청 사이에는 갈등이 심화되었다. 홍수전은 어쩔 수 없이 양수청의 요구를 수락하기는 하였지만, 즉시 강서(江西)에 있던 위창휘와 단양(丹陽)에 있던 진일강에게 밀서를 내려 천경으로 돌아와 양수청을 대응하게 하였다. 홍수전의 명령서를 받은 위창휘는 심복 3000명을 이끌고 급히 천경으로 달려갔다. 9월 1일 밤 위창휘는 동왕부를 기습하여 양수청과 그 일족들을 포위한 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천명을 몰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석달개는 무창에서 천경으로 돌아와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인 위창휘를 힐책했다. 위창휘는 석달개의 충고를 듣기는커녕 오히려 석달개를 죽이려고 하였다. 깜짝 놀란 석달개는 밤에 천경을 탈출하였으나 그의 처자식과 노모는 모두 위창휘에게 피살되었다. 이러한 위창휘의 무분별한 도살 행위에 극도로 분노한 태평군 병사들은 위창휘를 토벌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일으켰다. 10월 말 석달개는 안경(安慶)에서 군대를 일으킨 후 홍수전에게 민의에 따라 위창휘를 죽일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홍수전은 위창휘와 진일강 등 200여명을 죽이고 2개월간 지속된 '천경사변(天京事變)'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11월 석달개는 천경으로 돌아가 홍수전을 보좌하여 조정을 다스리면서 '의왕(義王)'에 추존되었다. 그러나 더욱 의심이 많아진 홍수전은 석달개도 믿지 못하고 그의 무능한 두 형 홍인발(洪仁發)과 홍인달(洪仁達)을 안왕(安王)과 복왕(福王)에 봉하여 석달개를 견제하였다. 석달개는 이 일에 불만을 품고 천경을 떠났다.
태평천국 지도부의 내분으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계속된 정부군의 반격에 태평군은 맥없이 무너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초기 혁명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왕들과 많은 장병들이 전사함으로써 홍수전은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이때 젊은 장수 진옥성(陳玉成), 이수성(李秀成)과 홍인간(洪仁?)의 보좌를 받으면서 다시 힘을 얻은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재건을 기도하였다.
1859년 홍수전은 홍인간을 간왕(干王)에 봉하고 태평천국의 조정을 관장하게 하였다. 홍인간의 급성장에 여러 장수들이 불복하자 홍수전은 다시 진옥성을 영왕(英王), 이수성을 충왕(忠王)에 봉하였다.
1860년 6월 태평군은 다시 소주(蘇州), 가흥(嘉興), 태창(太倉), 가정(嘉定), 상숙(常熟), 청포(淸浦), 송강(松江) 등지를 점령하면서 다시 위세를 떨치는 듯 했으나, 1861년 4월부터 9월까지 격렬하게 전개된 안경(安慶) 전투에서 증국번의 군대에 패하면서 그 날개를 접어야만 했다. 9월 5일 안경에서 포위된 1만 6천여명의 태평군은 군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안경의 함락으로 외부 장벽을 상실한 천경은 군사적으로 더욱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안경이 함락된 후 강북 지역의 모든 근거지들도 하나씩 함락되었다.
제2차 아편전쟁 후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 정부와 연합하여 태평천국의 진압에 나섰다. 연합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 태평군은 패전을 거듭하였으며, 이로써 수세에 몰린 태평천국은 천경과 인근의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거의 전지역을 연합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이때 천경은 이미 사방으로 포위를 당하여 고립에 빠졌다. 안으로는 식량이 떨어지고 밖으로는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자, 이수성은 홍수전에게 성을 버리고 탈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홍수전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천경을 지키다 1864년 6월 1일 향년 51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홍수전이 죽은 후 그의 장남 홍천귀복(洪天貴福)이 왕위를 계승하여 유천왕(幼天王)이 되었으나 7월 19일 천경이 함락되었다. 대부분의 태평군은 천경을 사수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일부의 병력과 함께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 유천왕과 홍인간도 강서에서 체포되어 죽었으며, 이수성도 천경을 탈출할 때 증국번에게 피살되었다.
1851년 1월 11일 금전봉기(金田起義)부터 1864년 천경이 함락될 때까지 14년 동안 농민전쟁을 이끌면서 18개 성, 600여개 도시를 점령하였던 홍수전의 태평천국봉기는 지도부의 분열과 오만으로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흑룡강c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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