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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과 도광제가 동일인물인가?(1)
조선왕조를 보면 어쩐지 정조이후(재위:1776~1800) 왕조 이어짐이 불분명하다.
22대 정조는 영조로부터 죽임을 당한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이다.
21대 영조는 조선왕들 중 가장 오래 재위한 임금이다.
재위기간이 52년이다.
그러한 장기집권 한 제왕치고는 자손이 빈곤하다.
정조역시 아들이 2자인데 장손은 5세 요절하고 둘째가 순조가 된다.
순조(재위:1800~1834)역시 2남이 있었으나 장남인 익종은 헌종을 낳고 순조보다 4년을 앞세워 죽는다.
조선말기 왕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손들이 변변치 않았다.
이것이 바로 청과 혼입의 징조이다.
물론 정조 역시 독살설이 존재한다.
정조이후 왕조가 정확하게 들어나지 않고 기록으로만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인조반정이후 양자호란도 그렇지만 특히 조선 말엽 아편전쟁이후 사건들이 이상하게 한곳에 집중되거나 겹쳐져 있어 그들의 타깃이 된 대륙조선이 과연 온전할 수 있었겠는가 먼저 생각하게 한다.
사실 현종과 도광제가 재위한 시기가 동서양 역사의 큰 분기점으로서 요동치는 시기이고 전체 역사흐름을 한순간 뒤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임에 틀림이 없다.
헌종은 그렇다 하더라도 도광제의 정확한 연대이력이 나오질 않고 여러 가지 정제되지 않은 설만 무성 할 뿐이다. 또한 청나라 역사는 양자강유역과 강남지역, 남경지역과 광동지역을 한정하여 사건이 이루지면서 크게 부각된 면이 많다. 그러나 한반도조선이 아니라 대륙조선이라고 본다면 전역에서 발생한 민란, 지진, 홍수, 병충해 등을 기록하고 있고 특히 천주교 탄압부분을 크게 부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청대역사가 신강지역과 양자강 이남지역만을 한정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양자강이남지역은 대체로 청이란 근거가 있을 수 있으나 신강성 부분은 아무래도 고려천자국의 역사를 조선 말기에 역사음모세력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혼입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헌종과 도광제 연대표를 보면 대체적으로 헌종은 대륙사정을 열거한 것 같고 도광제는 대외적인 사건을 열거한 것 같다. 때문에 헌종 연대표와 도광제 연대표를 합치면 바로 정확한 대륙역사가 보이는 것이며 이상한 괴리가 어느 정도 사라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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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도에 그렸다고 하는 일본인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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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憲宗, 1827년~1849년) 23세 요절
특히 청말 시대 왕조에는 야사로 전해지지만 황제독살음모가 비일비재하다.
왜 헌종이 졸한 년도가 청나라 도광제 죽은 해와 1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가?
조선 헌종 조선의 제24대 국왕
재위 1834년~1849년
부친 익종(翼宗)1809.9.18~1830.6.25 외동인지 불분명하다.
모친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조씨
정비(正妃) :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김씨
계비(繼妃) :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홍씨
왜 효(孝)가 청나라 황후에도 붙여지는가?
후궁(後宮) : 순화궁 경빈 김씨(純和宮 慶嬪 金氏)
후궁(後宮) : 숙의 김씨(淑儀 金氏)
궁인(宮人) : 궁인 김씨(宮人 金氏)
옹주(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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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원자를 세자로 책봉(순조). 정조 죽고, 세자 즉위(순조). 대왕대비(영조계비 정순왕후), 수렴청정을 함.
1801년 정순왕후(貞純王后) 대왕대비 김씨(金氏)의 명에 따라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실시. 서얼소통 시행, 내사노비(內寺奴婢) 폐지 등 제도 개혁.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등 30여 명의 교도가 처형되는 ‘신유교난(辛酉敎難)’ 일어남.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 일어남.
이때 북경예수회가 조선의 관할이었다는 사실이 서양 잡서에서 많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신유교난은 동양세력이 서양종교에 가하는 탄압의 시초이다.
황사영백서가 왜 유명한가?
처음으로 조선을 서양세력에 의하여 망하게 해야 할 왕조로 묘사했기 때문에 서양입장에서도 의외로 받아들여져 유명하게 된 사건이다.
1802년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화를 입은 이들에게 증직(贈職).
1804년 순조의 친정시작, 김대왕대비 수렴정치 폐함. 평양에 대화재, 공해 여사 600여 호 소실.
1805년 정조실록(正祖實錄) 인간됨.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 시작.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한중록(恨中錄)》 완간
1806년 러시아 투르크 영토를 침공, 전쟁(~1812) 시작. 무굴왕조 악바르 2세 즉위(~1837).
1806년 전라도 영광(靈光) 등 40여 군현에 흉년. 기아자 약 50여만명 발생. 정부 2만 5000석의 구휼미를 배급.
1807년 황해안 대해일(大海溢)로 패해도 극심. 유구인 99명 제주도에 표착. 대마도(對馬島)에 통신사(通信使) 파견 요청 거절하자, 왜관(倭館)의 왜인들 난동을 벌임.
1807년 풀턴의 증기선 시험운전.
물론 시운전이란 중요한 것이다.
수만리 먼 동양 대륙으로 가게 될 증기선을 시험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험이다.
때문에 시운전하였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10년 되는 해 영국군함 알세스토호˙리라호가 충청도 마량진(馬梁津)에 들어와 한반도 서해안의 지형을 조사하고 해도를 만들었다는데 그곳은 다름이 아닌 목표로 둔 대륙이어야 하고 정확하게 하자면 대륙남해 廣州(홍콩, 마카오)을 근거로 하여야 한다.
표류를 하였다면 바다뿐만 아니라 강에서도 있을 수 있다.
대륙 동해안 양자강하류(상해, 녕파)일수도 있다.
廣州(홍콩, 마카오)을 목표한 것이라면 그곳 해역, 해도를 정확하게 분석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증기선을 만들어 위험을 감수하면서 엄청난 자원이 산재한 대륙을 옆에 두고 특별할 것도 없는 산악지대 한반도를 염두에 두었겠는가?
증기선을 만들고 처음으로 동양으로 들어 닥친 곳이 마량진이다.
1808년 북청(北靑)˙단천(端川)에서 민란 발생. 《만기요람(萬機要覽)》 완성.
1809년 함흥에 대화재. 필리핀 루손섬의 원주민 3명, 제주도 표착 9년 만에 송환.
1811년 곡산 등 민란 일어남. 홍경래(洪景來)의 난(평안도 농민전쟁) 일어남. 역법(曆法)을 개정, 시행.
1812년 4월19일, 홍경래 전사, 난이 평정됨. 효명왕자 호(昊), 왕세자에 책봉됨(훗날의 익종).
1813년 공충도(公忠道)를 다시 충청도로 개칭. 제주도 토호 양제해(梁濟海) 등의 민란 일어남.
1814년 함경도 일대, 경상도 지방에 대홍수.
1814년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 시운전.
1815년 경상도 함안(咸安) 등지에 대홍수. 을해교난(乙亥敎難).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 남공철(南公轍)의 《금릉집(金陵集)》 24권 121책 완간.
1816년 영국 군함 알세스토호˙리라호가 충청도 마량진(馬梁津)에 옴. 이로 인해 서양 해도(海圖)상에서 한반도 서해안의 지형 분명해짐. 한성과 경상도 일대에 홍수.
1817년 삼남지방에 대홍수. 김정희(金正喜),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 발견, 68자의 비문 판독. 해인사에 대화재.
1818년 경상도 유생(儒生)들, 상소(上疏)로 채제공(蔡濟恭)의 신원을 요구. 정약용, 유배지 강진(康津)에서 《목민심서(牧民心書)》 완성.
1819년 충청도 공주˙전라도 전주 등지에 대홍수. 전국적 호구˙인구조사 실시. 호수:153만 3515호, 인구:651만 2349명.
대홍수가 일어나 엄청난 혼란이 발생한 시국에 생뚱맞게 인구조사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전국적이라 함은 무엇인가 은폐하려는 것이고 충청도 전라도 피해상황에서 사상자를 조사했다고 볼 수 있다.
1819년 영국, 싱가포르를 영토로 삼음.
1821년 평양 지방에 괴질 유행, 10여만 명 사망. 국가재정 궁핍 상태에 빠짐.
1822년 호적법을 강화함. 인삼밀수출 엄금, 위반자 사형에 처함.
1823년 충청도·경상도 일부에 홍수. 경기·충청·황해도 등 5도 유생들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서얼(庶孼)의 임용을 요청.
1824년 정하상(丁夏祥)이 베이징에 가 교황에게 사제 파송을 요청. 감자씨 전해짐. 유희(柳僖),《언문지(諺文誌)》(1권1책) 등을 완성.
1825년 무신의 승교(乘轎)를 금함. 정하상·유진길(劉進吉)등, 교황청에 서한 발송, 조선천주교의 수난사실을 보고.
1826년 6월에 지진 발생.
1827년 왕세자(익종) 대리청정. 호적법 정비. 서울(한성)에서 야간통행금지 실시. 전라˙경상도 각지에서 천주교도 탄압사건 일어남(정해교난). 평안도˙함경도˙전라도 일대 등, 전국적으로 홍수피해 막심. 지진 발생.
1828년 법사(法司)˙반족(班族:겨우 양반소리나 얻어듣던 힘없는 양반머슴)의 백성들에 대한 재산침해를 엄금. 삼남(三南)지방에 병충해 극심.
1829년 영종(英宗)˙진종(眞宗)˙정종(正宗) 3대 왕의 어필집(御筆集) 발간. 남공철, 영의정 사퇴. 경희궁에 대화재 발생, 여러 전각소실. 작자미상의《이두편람(吏頭便覽)》완성.
1830년 선정비(善政碑) 남립(濫立) 금지. 효명세자(孝明世子) 병사, 왕세자 책봉.
1831년 경희궁 중건 완료. 로마 교황청이 천주교 조선대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승인되고, 안동 김씨들이 천주교를 많이 믿는등 크게 성장했다.
1832년 개성(開城)출신 무과 급제자의 임용 허용. 영국 상선 로도 아마스트호, 몽금포(夢金浦) 앞 바다에 나타나 외교사상 처음 통상을 요구. 순조, 경희궁으로 천궁.
1834년에 순조가 승하하자 8살의 나이로 헌종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순조의 비, 純元王后金氏)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다.
1834년 폐습·사치를 금함. 창덕궁의 숭문당·양화당 등 많은 전각들 준공.
1835년 전국에 전염병(大疫)유행.《순조실록》편찬 위해 실록청(實錄廳) 설치. 청주성 화약고에 낙뢰. 세곡방납(稅穀防納)의 폐를 바로잡음. 왕, 창덕궁으로 환어(還御).
1836년 프랑스인 신부 모방, 의주(義州)를 거쳐 밀입국. 소의 밀도살, 금광(金鑛)의 잠채(潛採)를 금함.
1836년에는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 사건 충청도에 있던 남응중이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敎難)로 모방신부 등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천주교 선교사들과 유진길, 정하상등의 평신도들이 새남터에서 대거 처형
이때 청은 아편수입으로 머리 아파할 때이고 관리를 파견 아편 엄금책을 상주시키면서 임칙서(林則徐)가 광동에서 아편소각사건(虎門銷煙)이 일으킨다.
1839년 평안·황해·경상도에 홍수. 조인영(趙寅永)이 제진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헌종이 반포함. 오가작통법 실시.
1840년 양반들의 상민(常民)착취 엄금. 영국선 2척, 제주도에서 소 등 가축을 약탈해 감. 대왕대비(純元王后 金氏)수렴청정 중단, 헌종의 친정 시작. 풍양조씨(豊陽趙氏)의 세도정치 시작됨.
1842년 순천부(順川府) 송광사(松廣寺)에 화재. 《천세력(千歲曆)》 발간.
1842년 15살이 되던 해에 직접 정치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풍양조씨와 안동김씨간의 세력다툼이 시작되었다. 헌종이 죽은 뒤(1849), 안동김씨가 또 다시 세도 정치를 시작하였다.
헌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 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또 수재와 전염병 때문에 삶이 점차 어려워져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헌종 대에 사회적 혼란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아편전쟁이 끝나 남경조약(1842.8.29)이 이루어졌다.
남경조약의 골자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와 광저우(廣州), 샤먼(하문:廈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다섯 개 항구를 개항한다는 것이다.
1843년 송광사 중건. 공주(公州)의 대동미(大同米)착복한 이양옥(李陽玉) 처형
1844년 김정호(金正浩)의《오대주도(五大洲圖)》완성. 김정희(金正喜)가《세한도(歲寒圖)》 그림.
1844년에는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사건 이원덕(李遠德) 등, 원경(元慶)을 받들고 모반을 획책하다 처형됨. 민진용 역시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임금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
1845년에는 영국군함 사마랑호가 조정의 허락 없이 제주도와 서해안을 측정하고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
1846년에는 프랑스 세실 해군소장, 천주교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 끌고 충청도 외연도(外煙島) 정박, 왕에게 항의 서한 전달. 대규모 천주교 탄압 한국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 등이 순교하는 된서리를 맞았다(병오박해). 안동김씨가 탄압받은 것도 바로 이 시기다.
1846 정월. 正式解除 對 天主教的禁令。청은 천주교 금령을 해제하는 조치를 취한다.
1847년 프랑스 군함 글로아르호(號), 지난해 세실 소장이 전한 국서에 대한 해답을 받고자 서해안으로 들어오다가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에서 좌초. 정부는 청나라를 통해 그 답신을 전달(서양과 의 첫 외교문서).
1848년 정부, 아편흡연을 엄금.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재개.
1848년에는 외국의 배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황해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다. 바로 이때부터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었지만,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에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않고 각 당의 권력 장악에만 신경 썼다.(반도사) 9년 동안의 친정 기간 동안 진외가 안동김씨와 외가 풍양 조씨의 권력투쟁에 휘말렸던 헌종은 국내는 물론 조선주변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 다가오는 열강 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하였다.
1849년 음력 6월, 23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헌종이 죽자 은언군(恩彦君) 인의 증손 원범(元範) 즉위(철종).《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편찬.
1850 정월 道光帝在圓明園去世。도광제 원명원에서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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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宣宗道光皇帝(1782.9.16~1850.2.25) 68세
중국 청조의 제8대 황제
재위: 1820년~1850년
嘉慶帝의 제2자 민녕(旻寧)
皇后
1. 孝穆成皇后(? - 1808)鈕祜祿氏
2. 孝慎成皇后(? - 1833)佟佳氏
3. 孝全成皇后(1808 - 1840)鈕祜祿氏
이상하게도 헌종 모인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와 태어난 시기가 같다.
4. 孝静成皇后(1812 - 1855)博爾濟吉特氏
5. 庄顺皇贵妃(? - 1866)
6. 彤贵妃(? - 1877)
7. 和妃(? - 1836)
8. 祥妃(? - 1861)
9. 佳贵妃(? - 1890)
10. 成贵妃(? - 1888)
11. 常妃(? - 1860)
貴人那氏
皇子
1. 奕緯 (1808 - 1831)(母和妃)
2. 奕綱 ( 1826 - 1827)(母孝靜成皇后)
3. 奕繼 (1829 - 1830)(母孝靜成皇后)
4. 奕詝 (1831 - 1861)母孝全成皇后) 함풍제
5. (1831- 1889)(母祥妃)
6. 공친왕 (1833 - 1898)母孝靜成皇后)
7. 1대 순친왕, 광서제 부친(1840 - 1891)(母莊順皇貴妃)
8. 奕詥 (1844 - 1868)(母莊順皇貴妃)
9. 奕譓 (1845 - 1877)(母莊順皇貴妃)
皇女
1. 端悯固伦公主 (1813 - 1819)(母孝慎成皇后)
2. 어려서 사망(早殤,母祥妃)
3. 端顺固伦公主 (1825 - 1835)(母孝全成皇后)
4. 寿安固伦公主 (1826- 1860)(母孝全成皇后)
5. 寿臧和硕公主 (1829 - 1856)(母祥妃)
6. 寿恩固伦公主 (1830 - 1859)(母孝靜成皇后)
7. 어려서 사망(早殤,母彤貴妃)
8. 寿禧和硕公主 (1841- 1866)(母彤貴妃)
9. 寿庄固伦公主 (1842 - 1884)(母莊順皇貴妃)
10. 어려서 사망(早殤,母彤貴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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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역
1782八月初十日,綿寧在擷芳殿出生。
1796,以鈕祜祿氏為嫡福晉。정실을 맞이하다.
1814, 九月,封為智親王。지친왕으로 봉해짐
1820, 七月,仁宗去世,綿寧繼位,更名旻寧。[청, 도광제(선종)]명녕→민녕
1825 이 무렵부터 아편밀수에 의해 은 유출시작.
1833 영국 사적독점상업회사(私的獨占商業會社)인 동인도회사의 대 중국무역 독점권 폐지.
1838 아편수입 4만상자
1838 6월, 黃爵滋·林則徐 등 아편 엄금책 상주.
1839 6월, 임칙서(林則徐) 광동파견-아편소각사건(虎門銷煙) 開始。
10월, 아편전쟁 수행을 영국하원이 결의.
1840~42 1차 아편전쟁 英艦封鎖廣州珠江口,鴉片戰爭正式開始。
英艦北上, 六月 攻陷浙江定海 영국군이 광주를 봉쇄., 七月 抵達天津附近, 其後返回廣東。
九月 林則徐被革職。琦善與英方全權代表義律商議和約,
1841 正月,英軍佔領香港。道光帝不承認《穿鼻草約》,二月琦善被革職,押京審理。
1841 평영단 사건[(廣東省(광동성) 三元里(삼원리)에서 일어난 반영(反英)사건]
1842 七月. 英軍兵臨南京, 清廷同意議和,《南京條約》立。 南京조약 조인.
十二月 義律單方面公佈《穿鼻草約》。
영국 상인을 지원하기 위해서 파견된 영국의 동양함대는 광둥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가까운 톈진에 출몰하였다. 그 당시 영국 상인들이 양자감 유역을 근거로 하였음에도 무엇 때문에 동양함대가 천진에 있어야 만 하는가?
천진은 지금의 북경이 아닐 수도 있다.
광동에서 일어난 사건을 천진에 있는 동양함대가 북경을 압박하였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상당한 모순이 일단 생긴다.
물론 이리저리 둘러되는 변명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가 아닌 근대에서 배를 움직임에 있어 경제적인면과 효율적인면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을 때 그것은 마치 곡예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북경의 천자가 있었는지 아니면 지방세력정도가 있었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이야기고 당시 상황을 제대호 대처했다면 전술적으로도 절대 있을 수 없는 허황된 짜 맞추기인 것이다.
영국이 처음부터 북경을 노린 것이 아니라 양자강지역을 노리고 들어간 것이다.
동양함대가 필요하였다면 이러한 노림수를 뒤받침하기 위한 것이고 폭을 좀 좁혀 본다면 아편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을 것인데 지금의 천진에 동양함대가 있었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이치적으로 괴리가 분명하게 있다.
그 때 동양함대가 정박하던곳에 대륙정치적주체세력이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천진은 지금의 천진이 아닐 수 있다는 가정이 생긴다.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은 동양함대가 정박한 곳 지금의 천진에서 물리적으로 북경을 압박했다면 그래서 그곳에서 주요한 상대의 주체가 조약을 하여 북경조약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양자강 부근에 있는 난징(남경)조약이라고 한다.
1843 八月,《中英五口通商章程》立。
1843 [상제교]홍수전가 일어남 1843년 광둥성〔廣東省〕 화현(花縣) 객가(客家)의 농민 출신 홍수전이 상제교(上帝敎;拜上帝敎)를 창시, 공양학파-위원<해국도지>간행
1844 7월, 미국과 望厦조약 10월, 프랑스와 黃捕條約 체결.
1846 正月,正式解除對天主教的禁令。
1850 正月,道光帝在圓明園去世。
공양학파가 추구한 공양학(公羊學)는《공양전》에 바탕을 두고 공자의 사상을 연구하면서, 왕조의 교체와 사회의 진화를 설명하고 정치를 비판한 학문으로서 중국 한나라 때에 창시되고 청나라 말기에 캉유웨이(康有爲)가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공양전》과 곡량전(穀梁傳)은 사실(史實)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고문(古文)으로 기록사실의 배후에 숨은 공자의 이념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금문(今文)으로 적혀 있으나 공양학파는 古文을 부정하고 오로지 금문에만 의존하여 자유로운 해석과 새로운 이념을 대담하게 내세웠기 때문에 ‘금문학파’라고도 한다. 청말에는 공자의 춘추 공양 학파가 생겨나면서 배타와 중화사상이 더욱 고조되어 갔다.
역사분기점인 시기에 후세 사가들에 의하여 대륙조선 붕괴을 학문적 합리화하고 청을 조선에 혼입, 역사만들기에 근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학설이다.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은 황제가 죽으면 건청궁(乾淸宮) 뒤의 정대광명(正大光明)의 현판 뒤에 숨겨져 있는 쪽지를 보고 후계자를 공포하는 제도
태자밀건법 역시 후세 사가들의 음모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것이고 말 그대로 투명하지 못한 문제성이 많은 제도이다.
만약 이런 제도하에 황통이 이어졌다면 믿을 것이 없어진다.
쪽지에 적혀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 황실의 존엄이 생기겠는가?
물고 넘어질 소지가 많고 사사건건 시비의 소지가 많은 것이다.
정통성에 의한 존엄은 밀약이 아니라 투명해야 함은 진리이다.
애당초 선종 성황제[宣宗 成皇帝:도광제]는
4명의 황후와 7명의 후궁에게서 모두 9남 10녀를 두었다.
문종은 선종의 4자이다.
선종의
첫째황후인 효목성황후(孝穆成皇后)는 선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죽었고
효신성황후(孝愼成皇后)는 공주만 두었으며
셋째황후인 효전성황후(孝全成皇后)가 문종 현황제(文宗 顯皇帝: 함풍제)를 낳았다.
효전성황후는 1840년 문종이 10살 때 죽었고 어린 문종을 대신 보살펴준 사람은 당시
황귀비(皇貴妃)였던 박이제길특씨(博爾濟吉特氏-후에 효정성황후로 추존)였는데 그녀에게는 역시 아들이 3명 있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아들이 황제의 여섯째아들 공친왕 혁흔(恭親王 奕訢)이었다.
적자는 물론 문종(文宗)뿐이었지만, 문종보다 공친왕이 더 똑똑하다는 평판이 조정대신들과 선종의 생각이었다. 적자계승이라는 원칙에서 선종이 병석에 눕자 후계자로 누구를 지명할지가 조정의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선종은 두 아들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에 공친왕의 사부들은 공친왕에게 황제가 여러 가지 국사에 답변만 잘하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반면에 문종의 사부들은 문종에게 황제가 국사에 대해서 묻더라도 일체 답하지 말고 눈물만 흘리며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만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황제가 두 아들 불러 과연 국사에 관해 묻자, 공친왕은 거침없이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으나 문종은 울면서 황제의 병세 악화가 자식인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다. 선종은 문종을 일컬어 "천하의 효자"라면서 칭찬하고 며칠 뒤 선종황제는 조정대신을 불러놓고 문종을 후계자로 발표했다.
고종이 신정황후 섭정에서 처음 벗어 날 때 눈물로 한사코 거절하여 천하의 효자소리를 들었던 일과 비슷하다. 문종 함풍제의 부인이 그 유명한 서태후(西太后)라는 것은 철종대가 아무래도 온전 할 수 없는 시대상황이라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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