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서안 흥경궁공원(兴庆宫公园)은 조선 흥경궁(興慶宮)이 아닐까?

한부울 2010. 2. 14. 00:37

서안 흥경궁공원(兴庆宫公园)은 조선 흥경궁(興慶宮)이 아닐까?

서안에 있는 흥경궁 공원을 보면 서안(장안성)옆에 있을 릉(陵)자리로서 손색이 없다.

서안흥경궁공원의 한어자료를 보면 我国文史典籍中所提及的“龙池”,多指唐代长安皇家宫殿兴庆宫内(今西安市兴庆宫公园)的“龙池”。역사고전에서 언급하는 용지는 당나라때 장안황가(皇家)궁전 흥경궁 내에 있는 용지(龙池) 라 했다.

용지(龍池)는 대궐 안에 있는 연못 이름으로 궁중을 가리킨다.

 

下李奎報所製 ‘興慶池紫草繁, 淸香撲鼻似蘭蓀。 莫言此草能醒醉, 未解君王色醉昏。

’ 詩于政院曰: “此詩指意何如?” 承旨權鈞等啓, “有譏嘲之辭, 不足取也。” 又下御製詩曰

欺忍朝廷悖理深, 誰私奎報使傳吟? 人臣義在忠誠厚, 莫學淸時慢主心。令承旨賡進。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흥경지(못:용지)가에 지치[紫草]가 번성하여

맑은 향기가 코를 찔러 난초와도 같더라

이 풀이 취한 것을 깨게 한다 말하지 마오

군왕이 여색에 혼취한 것은 풀지 못하여라

라는 시를 상(上:임금. 연산군)이 정원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시의 뜻은 무엇을 가리킨 것인가?”하였다. 승지 권균(權鈞) 등이 아뢰기를

“기롱하고 조소(嘲笑)한 말이 있으니, 취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하니, 또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기를, 조정을 기만하였으니 이치에 어긋남이 심한데 누가 규보에게 사를 써서 전하여 읊주리게 하였던가? 인신의 의리는 충성이 두터운 데 있는 것이니 청명한 때 임금을 만홀히 여기는 마음 배우지 말라하고, 승지에게 영하여 차운(次韻)하여 바치게 하였다.

위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2년 병인(1506,정덕 1)2월24일(갑술)

"이규보 시의 뜻을 묻고 어제시를 내려 차운하여 바치게 하다" 란 기록인데 연산군 실정에 빗대는 것과 같은 시(詩)라 여겨 불쾌하게 여기는 문장이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고려문신으로 자는춘경(春卿)이고 호가 백운거사(白雲居士)며 본관이 황려(黃驪)이다.

그의 시 구절 중 興慶池紫草繁, 淸香撲鼻似蘭蓀

興慶池(龍池)가에 지치(紫草)가 번성하여 맑은 향기가 코를 찔러 난초와도 같더라...라는 구절에서

흥경지와 지치 즉 성취초가  나온다.

 

또 이규보 李奎報/동국이상국전집 제4권 서(序) 성취초(醒醉草)편에

《유사》에 “흥경지(興慶池) 남쪽 언덕에 풀 몇 포기가 났는데, 자주 빛 잎에 향내가 맑았다. 한 사람이 술에 취하여 그 옆을 지나다가 술이 저절로 깨어 버린 일이 있은 뒤로는 취한 자가 그 풀잎을 따서 향내를 맡으면 즉시 깨어나므로 이름을 성취초(醒醉草)라 했다.” 한 것을 보면 자초(紫草)가 술을 깨도록 할 만큼 향기가 강했다는 시구이다. 

이규보는 흥경지에 온통  자초(紫草)향기가 넘쳐나는 듯 읊고 있었던 것이다.

장릉은 인조 아버지 원종(元宗 1580년~1619년)과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년~1626년)의 묘로서 일찍이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에 장사하였다가 변란(정묘호란1627)을 피해 경기 김포현으로 천장하였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 김포현 편에서 기록하고 있다.

천장을 늦춘것은 인조 어머니 인헌왕후 졸한 시기가 1626년이라 바로 1년 후 정묘호란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결국 장릉은 원래 흥경궁이 있었던 흥경원(興慶園)이었다는 이야기다.

조선에서 장릉이라 한 흥경원과 지금 서안의 흥경궁은 같은 것인가?

그 당시 정말 흥경궁을 장릉이라고 이름을 변경 한 것인가?

후세 일제어용학자들이 실록을 뜯어고쳐 대륙조선을 한반도조선으로 둔갑시키면서 부득이 흥경원을 정릉이라고 이름붙여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한다.

반도사에 대한 신뢰성문제는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수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

당나라때 서안 흥경궁공원(兴庆宫公园)은 조선 흥경궁(興慶宮)이 아닐까?

 

 

 

**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京畿) 

김포현(金浦縣)

[능침]장릉(章陵) 성산(城山)의 양지쪽에 있는데, 원종(元宗) 대왕의 능이다. 기일은 12월 29일이고,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기일도 바로 이어 정월 14일이다. ○ 영참봉(令參奉)이 각각 한 사람씩이다. ○ 처음에는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에 장사 하였는데, 인조가 즉위하여 흥경원(興慶園)이라 명칭하였고, 5년에 이곳으로 옮기고, 10년에 추숭(追崇)하여 장릉(章陵)이 되었다.

**********************

醒醉草:草名。旧说醉人嗅之即醒。 五代 王仁裕 《开元天宝遗事·醒醉草》:“ 兴庆池 南岸,有草数丛,叶紫而心殷。有一人醉过於草傍,不觉失其酒态。后有醉者摘草嗅之,立然醒悟,故目为醒醉草。” 《ZDIC.NET 汉 典 網》


동국이상국전집 제4권

이규보 李奎報/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서(序)

성취초(醒醉草)

《유사》에 “흥경지(興慶池) 남쪽 언덕에 풀 몇 포기가 났는데, 자주 빛 잎에 향내가 맑았다. 한 사람이 술에 취하여 그 옆을 지나다가 술이 저절로 깨어 버린 일이 있은 뒤로는 취한 자가 그 풀잎을 따서 향내를 맡으면 즉시 깨어나므로 이름을 성취초라 했다.” 하였다.

興慶池南紫草繁 흥경지 남쪽 언덕에 자초가 무성해

淸香撲鼻似蘭蓀 코 찌르는 좋은 향내 난초와 같네

莫言此草能醒酒 그 풀이 술 깨운다고 자랑 마소

未解君王色醉昏 색에 취한 군왕은 깨우지 못하는 걸

*************************

광해 46권, 3년(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10월 11일(정축)

정릉동 행궁 이름을 경운궁으로 고치다


○辛亥十月十一日丁丑以改貞陵洞行宮名爲(爲興慶宮, 傳于政院曰: “此乃前代宮號也, 似爲不妥。 可合宮號多數書啓。” 遂改爲)啓慶運宮。

정릉동 행궁 이름을 고쳤다. 〈흥경궁(興慶宮)으로 하려고 했는데, 정원에 전교하기를,

“이것은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써서 아뢰라.”

하였다. 드디어 고쳐서〉 경운궁(慶運宮)이라고 했다.

*******************

인조 1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23일(계축)

예조가 이현궁 명칭의 개칭을 청하여 계운궁으로 정하다

○又啓曰: “連珠府夫人梨峴宮擇日奉移事, 恭俟命下而至今不爲移寓, 且仍稱梨峴宮, 似爲未安, 今當以東別宮稱之何如?” 答曰: “東別宮, 亦未妥當, 更思以啓。 以興慶、啓運、連珠別宮入啓, 以啓運啓下。


또 아뢰기를,

“연주 부부인을 이현궁으로 택일하여 옮겨 모시는 일에 대하여 하명을 기다렸는데, 아직까지 옮기지 못하였고, 또 그대로 이현궁이라 칭하는 것도 미안한 것 같습니다. 이제 동별궁(東別宮)으로 개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

“동별궁의 명칭 또한 타당치 못하다. 다시 생각하여 아뢰라.”하였다. 이에 흥경(興慶)·계운(啓運)·연주(連珠) 별궁(別宮)으로 입계하니, 계운으로 계하하였다.

*******************

인조 12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4월 1일(계유)

양주 산소의 원호에 대해 망을 갖추어 입계할 것을 명하다


○朔癸酉/上下敎于政院曰: “山所兩處, 皆當有園號。 楊州山所園號, 先爲備望, 入啓之意, 言于藝文館。” 於是, 藝文館以興慶園首擬, 啓下。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산소 두 곳에 모두 원호(園號)가 있어야 할 것인데, 양주(楊州) 산소의 원호에 대해 먼저 망(望)을 갖추어 입계하라고 예문관에 이르라.”하였다. 이에 예문관이 흥경원(興慶園)으로 수의(首擬)하여 계하(啓下)되었다.

*******************

인조 16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6월 4일(기해)

흥경원을 천장하는 일을 택일하여 거행하도록 하교하다

○己亥/上下敎曰: “興慶園遷葬事, 因變亂停止。 以時勢言之, 則似難更議於今日, 但應用諸具, 曾已措備, 今無加備之物。 若過今歲, 則數年之內, 更無吉年, 不可不及時爲之。 令該曹擇日擧行。” 禮曹請復設禮葬都監。

상이 하교하기를,

“흥경원(興慶園)을 천장(遷葬)하는 일이 변란(정묘호란-丁卯胡亂1627년 인조 5년에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으로 인하여 정지되었다. 시세로 말하면 오늘날에 다시 의논하기가 어려울 듯하나, 사용되는 제구(諸具)를 전에 이미 준비해 놓았으니 지금 더 준비할 물건이 없다. 올해를 넘기면 수년 안에는 다시 길년(吉年)이 없으니 이때에 하지 않을 수 없다. 해조로 하여금 택일하여 거행하게 하라.”하니, 예조가, 예장 도감(禮葬都監)을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

*****************

인조 17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8월 10일(계묘)

흥경원 계묘에 맞춰 망곡례를 행하다


○癸卯/上具緦服, 出御便殿, 行興慶園啓墓望哭禮。

상이 시복(緦服)을 갖추고 편전(便殿)으로 나아가 흥경원(興慶園) 계묘(啓墓) 시간에 맞추어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

인조 26권, 10년(1632 임신 / 명 숭정(崇禎) 5년) 3월 11일(무신)

대원군과 대원부인의 시호를 올리고 묘호를 논의하다

○大臣及二品以上會賓廳, 追尊大院君諡號曰, 敬德仁憲靖穆章孝; 大院夫人號曰, 敬懿貞靖仁獻, 改興慶園曰, 章陵。 上下敎曰: “廟號何不議上耶?” 回啓曰: “成廟奏請後, 加八字號, 始加廟號。 禮曹所稟, 只是諡號而已, 廟號則前有姑勿入廟之敎, 故今不議上矣。” 答曰: “知道。”

대신 및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대원군(大院君)의 시호를 ‘경덕 인헌 정목 장효(敬德仁憲靖穆章孝)’라 하고, 대원부인(大院夫人)의 호를 ‘경의 정정 인헌(敬懿貞靖仁獻)’이라 하고, 흥경원(興慶園)을 장릉(章陵)이라 고쳤다. 상이 하교하기를,

“묘호(廟號)는 왜 의논해 올리지 않는가?”하니, 회계하기를,

“성종 때는 주청한 후 8자 호를 가하고 비로소 묘호를 올렸습니다. 예조가 품한 바는 단지 시호뿐이었으며 전에 우선은 입묘(入廟)하지 말라고 하교하셨기 때문에 지금 의논해 올리지 않은 것입니다.”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