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심천(深圳)은 부산이고 임진왜란이 발발된 곳인가?

한부울 2010. 3. 6. 01:39

1797년 영국이 해도탐사 한 부산은 한반도 부산 맞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446

동지나해가 Blue Sea 였고 COREA SEA 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856

전나무(檜木 Fir=Abies) http://blog.daum.net/han0114/17049803

대륙 심천(廣州)에서 무한(漢陽)까지 연결되었던 수로(水路)
http://blog.daum.net/han0114/170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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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뉴스 기자가 보았다던 부산 앞바다가 심천(深圳) 앞바다 인가?

안타깝게도 더 정확한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위 사실을 입증할만한 유리한 자료는 없다. 

하지만 나름대로 분석할 때 김해라고 판단되는 대륙 광주와 심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김해라 판단되는 대륙광주 앞바다는 수심이 일단 얕다.

그러나 그 당시 런더뉴스 기자 서양인들이 보았던 심천앞바다는 수심이 깊고 둥글게 자리 잡고 있으며 입항하는 선박들을 빨아드리는 것 같은 모습이라 했으며 많은 선박들이 풍랑에 대비 안전하게 대피 할 수 있도록 돼 있는 천혜의 항구라 하였으며  검은 바위돌 흑암각(黑岩角)이 배가 들어오는 오른쪽 정면에 있다 하였다.

 

지금 심천(深圳)은 1914년 후 개명된 이름인데 1914까지 신안(新安)이라 했다 한다.

民國三年(1914年), 全國省市名稱統查後 河南省新安縣同名

위 자료를 보면 국민당정부시절인 1914년에 전국 성시(省市) 명칭을 통합조사하면서 하남성 신안(新安)현과 명칭이 동일하다고 하여 보안현(寶安縣)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보안현(寶安縣)이라 하다가 지금의 심천이로 바뀐 것 같다.

일단 심천은 매우 수심이 깊다는 뜻이다.

심천(深圳)은 한문으로 깊은 도랑이란 뜻이 있다.

 

심천(深圳)의 옛이름 신안(新安)은 나전칠기와 통영(統營)과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다.
나전칠기는 당나라때 발전되고 신라에 전래된 것은 733년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나전칠기는 명청시대때 노릉과 신안(新安)이 유명하였다고 하였다.
신안(新安)의 토산물로 소금이 있고 철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新安古城(公元1573-1841年)深圳市的前身又曾名为新安县(신안?)。公元1573年,中国明朝政府扩建东莞守御千户基地,建立新安县,并建县治于南头,辖地包括今天的深圳市及香港区域。经济以产盐茶叶香料稻米为主。

지금 심천역시 소금이 유명하다.
고구려기록에 나전칠기는 섭라(涉羅)에서 생산되었다는데 부여는 물길에게 빼앗기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어 이 두가지 물품이 궐내에 들어오지 못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대륙심천자료를 보면 심천에 대붕소성(大鹏所城)이 있는데

大鵬城在明朝洪武二十七年(1394年)建成。在明代反抗倭寇(왜구)和葡萄牙(포르투갈)入侵, 清代抗击英殖民侵略者。

이 대붕소성은 명나라 1394년에 축성되었고 명나라시절때 반항하던 왜구와 포르투갈이 침입해 들어왔다 하였으며 청대때는 영국식민침략자에 대항하여 항거하였던 장소로 설명하고 있다.

위 기록도 왜구(포르투갈)의 난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구와 포르투갈이 명나라 언제쯤 침입했는가가 분명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한반도에 넣고 피해가기 위한 중공역사관계자들의 방어책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명나라때 왜구와 포르투갈이 침입하였다면 분명 만력의 역이라고 하는 임진왜란이다.

대륙사는 만력의 역(萬曆之役:1592~1598)이라 하여 반도사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형태적으로 다르게 부르고 있다.

다르게 불렀다 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임진왜란과 또 다른 난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한반도에서 벌어졌다는 임진왜란은 근세기에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거의 100%이고 대륙에서 벌어진 만역의 역이 왜구와 포르투갈이 심천으로 부터 쳐들어온 사실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역(役)은 그저 힘이 들었고 수고스러웠다는 표현일 수밖에 없다.

위 한어자료에도 난(亂)이라 하지 않고 그저 반항(反抗)이라 하였듯이 그냥 역이란 표현을 쓸 정도로 국가전체를 위협하는 것이 아닌 반항정도로 가볍게 보았던 일이다.

그런데 반도사는 한반도 전역이 쑥대밭이 되는 전란으로 묘사하여 침소봉대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그 만큼 일제가 임진왜란의 성격을 확대하려고 하였으며 왜구란 존재를 부각하려고 애쓴 흔적이다.

또 일제가 왜구를 물린 친 이순신장군을 스스로 영웅시하여 왜구의 침입역사가 조선역사의 막대한 피해를 주는 대재란으로 엄청난 위기였음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고 조선왕조가 침략 받을 수밖에 없는 허약함을 알리고 한일합방으로 이어지는 정당성을 구축하면서 일본이 열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근거로서 충분히 이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우리가 아는 임진왜란은 포르투갈은 전문에서 빠지고 오직 열도에 존재하는 왜구만이 한반도 부산진성을 침략하고 동래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시작되는 전란이다. 하지만 실제는 포르투갈이 모든 전쟁비용을 대고 왜구는 용병으로서 역할을 다했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런 왜구가 같은 시대, 시기때 포르투갈과 함께 대륙 심천으로 침략하여 들어 갔다고 한어자료에서 기록하고 있으니 한반도 임진왜란은 허구 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대륙에서 만력의 난이 발생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자료로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륙사에서 말하는 만역의 역(萬曆之役1592~1598)인 반항(反抗) 난이고 발생된 장소가 한반도 부산진성, 동래성이 아니라 대륙심천일 가능성이 거의 99%가 된다.

또 대마도는 지금의 해남일 가능성이 많고 근역에 있는 베트남 북부지역과 필리핀이 왜구 본산지가 아닌가 한다.

심천을 상륙한 왜구(포르투갈) 주력은 큰 강을 이용 동정호쪽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좌로는 서강을 이용 산악지대로 곤명쪽으로 들어 갔을 것이며

우로는 동강을 이용 대륙동부쪽으로 빠졌을 가능성이 많다.

이처럼 우리의 반도역사가 얼마나 허구의 역사인가를 알게 한다.

모르면 바보이고 알려 하면 그래도 바보는 면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 역사학자가 있는가?

이런 개연성이 충분한 사실을 놓고 무엇이라고 할지 궁금해진다.

 

 

 

 

 

대륙 광동성 광주 앞바다는 서강 상류로부터 흘러드는 토사가 쌓여 해저 바닥이 얕아지므로서 위성사진으로 보아도 바다 심도를 나타내는 색깔이 연한색으로 나타나 얕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심천 앞바다는 색깔이 매우 진한 암청색이라 수심이 광주 앞바다보다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인이 부산을 보았다던 1858년 기사이니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세월이 흘렀다.

 

흑암각(黑岩角)

 

 

大鵬城在明朝洪武二十七年(1394年)建成。在明代反抗倭寇(왜구)葡萄牙(포르투갈)入侵,

 

대붕소성(大鹏所城)으로 임진왜란시 왜구와 포르쿠갈이 침입했다고 하고 있다.

왜구가 부산을 침공한 곳이 바로 이 곳일 가능성은?

 

부산진(釜山鎮)전투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첫 번째로 벌어진 전투로 병력, 식량, 무기 등 모든 것이 부족했던 조선군이 완패하고 부산진성은 함락되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포함된 제1군이 병력 1만 8700명과 병선 700척을 이끌고 부산 영도(影島)에 상륙한다. 전투는 오전 5시~7시에 첫 전투가 벌어졌다.(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록) 부산진성을 지키는 장수 부산진 첨사 정발을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으며, 오전 10시~12에 2차 전투 끝에 4시간 만에 부산진성은 함락되었으며, 부산진 첨사 정발은 머리에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부산진성 안의 군민들 역시 끝까지 저항했고 그 결과 군민 3000명이 모조리 죽거나 학살되었다.


영도(影島)는 부산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절영도라고도 한다. 면적은 약 12㎢, 해안선의 길이는 20.5km이며 최고점(봉래산)의 높이는 395m이다


부산진성(釜山鎭城): 규모는 둘레 511.8m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부산포성(釜山浦城), (범천)증산성(甑山城), 고하야가와성(小早川城)이라고도 불린다. 부산포(바닷가)의 수군진영에 부산진성이 수축된 것은 동국여지승람 동래현의 관방이 말하고 있다. 거기에 의하면 동래현에서 21리(里) 떨어져 있는데 성 둘레가 1,689척(尺) 높이 13척이라 했다. 이는 1490년에 완성을 본 부산진성을 말한 것 같다. 부산진성은 수군 첨사가 관장하였기 때문에 부산진 첨사영성이라고도 했다. 당시는 바닷물이 성의 남문까지 와 닿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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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ed London News


런던뉴스에서 취재기자를 파견하여 기사화 한 것은 유럽국가간의 분쟁, 혹은 만국박람회, 국왕의 대관식 등 역사적인 사건에 국한되었고 중국이나 일본 등 동양기사는 탐험가들이나 상인들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기사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신문에 기록된 날짜는 지금처럼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사안에 따라 몇 년 혹은 몇 십 년이 걸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런던뉴스의 날짜는1858년판이지만 실재로 동양을 여행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이전일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다음은 런던뉴스'의 부산항의 모습과 한국인들에 대한 기사내용;            

부산성의 해안은 전면이 잘 다듬어진 검은 바윗돌로 돼있으며 선박의 정박지는 수심이 깊고 둥글게 자리 잡고 있어 입항하는 선박들을 빨아드리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박들이 풍랑에 안전하게 대피 할 수 있도록 돼 있는 항구였다.

정면에 보이는 작은 동산은 가느다란 전나무들로 덮여 있었으며 항구 주위의 높지 않은 산들은 계단식으로 평평하게 만들어진 논밭이었다.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로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가 있었다.

성내는 미끈한 긴 겉옷을 걸치고 윗부분이 아주 높은 이상한 검정색 모자를 쓰고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이상한 모자는 대나무를 잘게 쪼게 마치 쇠줄처럼 엮어 만든 것처럼 보였다. 머리는 뒤로 꼬아 묶어 논 모습이었고  너무 높아 불안한 모자를 지탱하기 위해 끈으로 턱 밑을 묶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광주리처럼 생긴 아주 큰 모자(삿갓인 듯)를 쓴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옷은 흰색이거나 표백처리를 하지 않은 삼배옷이 대부분이었고 여자용 옷처럼 소매가 축 늘어지고 가장자리가 넓게 열려있었다. 허리에는 띠를 두르고 바지 아래는 발목을 묶었으며(댓임) 면 스타킹(버선)을 신고 짚으로 엮은 이상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우아한 수레(가마인 듯)와 밝은 그들의 표정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으며 낯선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완고하거나 배타성이 적어 보였다. 그러나 부산성을 방문해 보고 싶은 우리의 노력은 거친 돌로 막힌 방파제와 해변가의 군중들로 인해 한 발자국도 배 밖으로 내 디딜 수 없었다. 우리가 내민 상륙허가 신청서를 받아 부산성 당국자들에게 전해 주는 것도 거절되었으며 심지어는 우리와 동행한 중국인 통역과의 대화하는 것도 기피했다.”

 

런던뉴스의 날짜는1858년판이지만 실재로 동양을 여행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이전일수도 있다는 이야기다를 했다.

그렇다면 일단 1차아편전쟁(1839~42)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서양인 이방인들에게 극도로 경계심을 나타냈던 것이라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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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深圳)

 

 


심천(深圳, Shēnzhèn)은 중화인민공화국 광동성의 부성급시로서 면적은 2,020 평방킬로미터이고 인구는 약400만 명으로 1980년에 설치되었다. 이중 경제특구는 시내의 391.71 평방킬로미터를 차지하고, 중국인이라도 출입허가가 필요한 지역으로 중국에서 가장먼저 개방한 경제특별구역이다. 홍콩(23,125달러)과 마카오에 뒤이어서 소득이 높다. 2003년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136,071위안(약16,430달러)으로 중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지역이다. 1979년 덩샤오핑은 인구 30만 명의 농촌과 어촌이었던 곳을 특별구역으로 지정하여 개혁과 개방의 실험을 수행하였고 이는 중국전체의 성공모델이 되었다. 경제 특구로 지정된 후, 막대한 외국투자를 유치하여 제조업이 주로 발달하였지만 최근에 정보통신산업이나 서비스업도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수출액에서는 홍콩을 제치고 상하이에 비슷해져가고 있다. 1990년에는 증권거래소가 설치되어 상하이 증권거래소와 함께 외국인이 투자할 수 있는 주식을 취급한다. 홍콩에 비하여 물가가 싸기 때문에 홍콩주민은 인접한 심천(深圳)의 쇼핑타운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범죄율이 높다고 알려지고 있다.


주나라 대까지의 심천(深圳)은 백족의 갈래로 여겨지는 남월 부족의 거주지였다. 중국의 사서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기원 전 214년의 진나라 때이며, 영남 지구인 남해, 계림, 상군의 세 군이 설치되었을 때 심천(深圳)은 남해군으로 구분되어 중원과의 문화 교류가 시작되었다.


현재의 심천(深圳)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이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331년의 보안현 설치이다. 동진은 이 땅에 6현을 설치하였으며, 그것을 관할하는 군으로 동관군을 설치해 현재의 심천(深圳), 동관 및 홍콩을 관할하여, 군청이 현재의 남두 지구인 보안현에 설치되었다.


송나라 때가 되면서 보안현은 남방 해상교역의 거점이 되었고, 제염업이나 쌀, 차의 재배로 번영을 시작했다. 원나라 때에는 진주의 산지로서 사서에 등장했고, 명나라 때가 되면서 동관수오천호소(東莞守御千戸所) 및 대붕수오천호소(大鵬守御千戸所)가 설치됨과 동시에 신안현이 설치되어 1573년, 심천(深圳)은 화남 지구의 정치 중심이 되었다.


청나라 말기가 되면서 난징조약과 베이징조약으로 신안현의 일부가 되어 홍콩섬 및 구룡반도를 영국이 조차하게 되면서 신안현이 분할되었고, 홍콩과의 국경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중화민국이 시작되면서 1913년에 신안현은 보안현으로 개칭되었다.


深圳市 又稱為「鵬城」位于中國南方珠江三角洲东岸,隶属中華人民共和國廣東省

深圳大鵬街道有一所600多年的 “大鵬古城”, 所以簡稱“鵬”。地理上南鄰香港的新界, 北接東莞、東接惠州, 西部与珠海澳門隔著珠江口。深圳的移民,特別是其他省份的移民远远超過原住民數量, 所以普通話成为最通用的語言, 而客家话和廣州話是主要本地語言;围头話, 大鵬話等也是本地語言。


考古成就表明,早在6700多年前的新石器时代中期,就有土著居民繁衍生息在深圳土地上。深圳的城市史已有1673年。

  

地名由来


“深圳”地名始见史籍于1410年(明永乐八年), 于清朝初年建墟。当地的方言客家话俗称田野间的水沟为“圳”或“涌”。深圳正因其水泽密布,村落边有一条深水沟而得名。深圳又称鹏城。


百越部族(史前-公元前214年)夏、商年代,深圳是百越部族远征海洋的一个驻脚点。居殖在深圳沿海沙丘谷地区域的百姓,是百越部族的分支—“南越部族”。他们以捕鱼、航海维生,甚少农垦。

秦皇设郡(公元前214-公元331年)秦始皇统一中国后,于公元前214年在岭南设置了南海、桂林、象郡三郡,谪徙50万人开发。时属南海郡的深圳,便融入了中原文化。 

东晋建县(公元331-1573年)深圳市最早的前身为宝安县。宝安作为县建制始于公元331年(东晋咸和六年)。朝廷置辖地六县的东官郡,辖地大概为今天的深圳市、东莞市和香港等范围。郡治在宝安县(南头)。宋朝时期,深圳是南方海路贸易的重要枢纽,盛产食盐、香料。至元朝,又以出产珍珠著名。

公元1394年(明洪武二十七年),在今深圳境内设立了东莞守御千户所及大鹏守御千户所。

有600多年历史的南头古城,曾是晚清前深港澳地区的政治中心。

新安古城(公元1573-1841年)深圳市的前身又曾名为新安县(신안앞바다?)。公元1573年,中国明朝政府扩建东莞守御千户基地,建立新安县,并建县治于南头,辖地包括今天的深圳市及香港区域。经济以产茶叶、香料稻米为主。 

县境分割(公元1842年-1898年)公元1842年7月至1898年4月期间,中国清政府与英国相继签订《南京条约》、《北京条约》和《展拓香港界址专条》,港岛、九龙和新界割让、租借给英国。至此,原属新安县的3076平方公里土地中,有1055.61平方公里脱离其管辖,深圳与香港从此划境分治。

复名宝安(公元1913年-1979年)公元1913年(民国二年),广东省新安县复称宝安县,现址仍在南头。


民國以後


民國三年(1914年), 全國省市名稱統查後, 為避免與河南省新安縣同名, 改名寶安縣。抗日戰爭期間, 縣治曾遷至東莞縣石馬鎮。1949年10月19日, 寶安縣人民武裝力量進入南頭


대붕소성(大鹏所城)

 

 

 

 

 

 


中國廣東省深圳市龍崗區大鵬街道一個面對大亚湾的古老的城村。被列入中國歷史文化名村和第五批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是深圳八大景點和爱国主义教育基地之一。大部分的原居民都是移民了去香港荷蘭英國。村民在這個村說大鵬話。著名的歷史文物是龍井,賴府,劉府,四個城門,等等。


大鵬城在明朝洪武二十七年(1394年)建成。在明代反抗倭寇(왜구)葡萄牙(포르투갈)入侵, 清代抗击英殖民侵略者。在清朝開始有水師提督。在2008年亞洲電視節目開心到鎮遊覽了大鵬城。


土地物产

盛产龙岗(龍崗)“三黄鸡(黃鷄)”、南头荔枝(여지)、南山桃(복숭아)、石岩沙梨(돌배나무)、坪山金龟桔和龙华(龍華)方柿(감나무)等农副产品。沙井蚝(굴)是深圳的另一大特产。栖息、繁衍的国家级野生保护动物有虎纹蛙(호랑이문체개구리)、蟒蛇(이무기)、猕猴미후(獼猴)、大灵猫(大靈猫사향고양이)、金钱豹(표범金錢豹)和穿山甲(천산갑鯪鯉). 等

 

 


图解

a、鹅公湾

b、大鹿港

c、黑岩角

d、墨鱼湾

e、望鱼岭

f、头崖

g、墨鱼溪

h、山坳

i、西贡

j、西冲沙滩西起点

k、西冲沙滩东起点

l、东西冲海岸线路段山路分叉处

m、东冲沙滩

n、东风澳养殖场

o、大深湾

p、马料河口

q、大水坑

r、高山角

s、过店

t、过店到大雁顶与大水坑的分叉路口

u、大雁顶

v、马料河源头

w、夹火坳

x、高排坑溯溪起点

y、东冲村桥头

z、鹿嘴坑溯溪上大雁顶和穿越老虎座的分叉路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