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인도 아유타국, 아리랑과 타밀민요 탈라뚜(Thalaattu)

한부울 2010. 3. 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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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밀어(Tamil 泰米尔语,坦米尔,淡米尔)가 신라 이두(吏讀)인가?

 

이 자료에서 아유타국(인도 갠지스 강 중류 아요디아 설, 사천성 안악현 설)왕녀 김수로왕 왕비 허황후를 타밀어족(인도남부와 스리랑카)이라고 한다. 또한 신라건국시조 박혁거세도 타밀어족이라고 하고 불구내(弗矩內) 거서간(居西干)왕호까지 타밀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타밀어는 신라를 모태로 하는 언어이고 인도전역을 통괄하던 언어였을 것이란 추측이 선다. 이후 시대상황이 변하면서 점차 쇠퇴 지금의 인도 남부지역으로 축소되었을 가능성도 재기 된다.


이태리 제노바 출신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호와 니냐호·핀타호 이름의 함선 3척으로 팔로스항을 떠나 카나리아제도를 거쳐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서쪽으로 항해하였으나 10월 12일 새벽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산살바도르 섬이라고 이름 붙여진 바하마제도의 한 섬 이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도착 한 섬을 바로 동남아시아(인도:인디아)의 일부라고 판단하였다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그 당시 항해술도 완전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 남쪽 귀퉁이 백제와 신라 틈새에 끼여 제대로 힘도 못쓰고 신라에게 끝내 병합이 된 나라 가야(가락국)의 시조(42∼199) 김수로왕에게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왕녀 허황옥(許黃玉)이 부모의 뜻에 따라 시집을 가게 되어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서양인들이 항해술이 뛰어나 온천지를 휘잡았다고 하는 15세기 이후 18세기까지 동남아 보르네오 섬을 벗어나 이동(以東)쪽으로 나서지 못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분명 그들이 더 이상 진전 할 수 없도록 막아서는 거대한 힘이 존재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항로길이 그렇게 용이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전할 수 없도록 막아선 세력이라면 대륙조선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콜럼버스가 어렵게 아메리카 인도제도를 발견하고 난 후 스페인계 탐험가들이 남아에리카 남단을 둘러 태평양을 거쳐 필리핀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1626년에서 1642년까지 16년 동안 대만을 점령했다는 기록은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 스페인이나 네덜란드가 대만(Formosa)을 점령 하였다고 하지만 스페인(1626년~ 1642년)의 점령기간이 겨우 16년이고 1642년에는 스페인이 네덜란드에서 쫓겨나 네덜란드 (1642년~1662년)가 차지하였다는 시간도 역시 20년 정도이다.


두 나라가 대만을 점령했다는 시기는 합해 겨우 36년 정도이다.

1662년 남명 잔재세력이던 정씨 왕국이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정권을 세운지 23년만(1683년)에 청나라의 군대에 의해 망한다.

청이 복권하는 형태이지만 대륙조선이라고 해야 한다.

대륙조선이 아닌 외부세력이 대만을 점령한 시기는 합해 57년 뿐이다.

이 57년은 근세기 거대한 역사음모속에 그들의 명칭인 Formosa가 졸지에 말레이 반도에 있었을 대만으로 변형시키는 결정적인 빌미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판단이 된다.

대항해 시대 때 유럽에서 아시아를 식민화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나섰던 두 지류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유럽에서 동쪽으로 진행하는 지류가 있었고 또 하나는 유럽에서 서쪽으로 진행하는 지류가 있었다.


유럽에서 동쪽으로 진행한 나라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로서 그들 모두 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를 점령 기반으로 동남아시아로 들어가 몰루카 제도(Molucca island)와 보르네오까지는 접수 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이동(以東)쪽으로 진전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하며 유럽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던 나라 스페인 등은 아메리카를 발판으로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 태평양을 지나 겨우 필리핀에 도착하는 것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상황을 우리는 조심스럽게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 지금의 남지나해 그 주변지역은 아마도 거대한 중국(조선)의 영역으로 둘러쳐져 있어 유럽세가 동쪽으로 목표를 두었던지 아니면 서쪽으로 목표로 하였던지 간에 그 지역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면이다. 어찌되었던 1832년~1842년 사이 프랑스 지도를 보면 대륙 남지나해와 동지나해를 Mer de coree(한국해)라 표기하고 통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아편전쟁이 일어난 시점인 1842년까지는 그들이 중국(조선 corea)의 허가 없이는 근접할 수 없었던 곳으로 알고 있었다고 보이고 그 당시 서양인들에게 보르네오 필리핀을 넘어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인정되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강하다.


서양인의 항로 즉 진로가 대륙조선(중국)으로 인하여 막혀있었던 시기는 대체적으로 1797년 전이라고 보이는데 그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경쟁적으로 함선을 건조하여 본격적으로 나섰다고 보이며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조선 동해와 부산해안을 측정하였다고 기록된 것이 대륙동쪽 즉 동지나해로 진출할 수 있는 시발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797년 영국이 해도탐사 한 부산은 한반도 부산 맞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446

동지나해가 Blue Sea 였고 COREA SEA 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856 

 

그로부터 정확하게 43년이 흘러 1840년은 7월17일 제1차 아편전쟁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모든 것이 일거에 역사가 뒤 틀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네덜란드가 지금의 열도에 빈번하게 들락거렸다는 기록과 하멜이 한반도 제주도에 표류하였다는 기록이 1797년 이전이라 할 때 전부 꾸며내거나 본래 지명이 아니게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만은 말레이 반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레이폴리네시아어족이라고 하지만 너무 멀리 동 떨어져 있어 꿰맞춘 느낌이 많다.

지금의 대만은 우리가 조선지리서에 늘상 등장하는 친밀한 지명일 가능성이 있고 서양인들이 근세기에 들어 동양전체를 지배하면서 Formosa 라 명칭과 함께 대만으로 칭하여 낯설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1910년 대륙조선이 망한 후 전면에 등장한 국민당정치세력들이 1914년(전국성시명칭통계조사)에 서양이 가공한 지명들을 바탕으로 그대로 받아 더욱 사실화하였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Javanese 과 Japanese 는 같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696

세계인종분류 http://blog.daum.net/han0114/17018071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Malayo-Polynesian languages100% confidence)

술루-필리핀군 (75%)

사마바조어군 (100%)

필리핀어군 (100%)

인도-멜라네시아어 (98%)

보르네오어군 (65%)

 

핵심 말레이폴리네시아어군(Nuclear Malayo-Polynesian languages 75%)

 

                                                  서부 말레이폴리네시아어군

 

그렇게 보았을 때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왕녀 허황옥(許黃玉) 선단이 용빼는 재주가 있어 근세기 서양인들도 극복하지 못한 어려운 배길을 항해술이 없었던 시기 서기42~199년경에 항해하여 한반도에 도래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야 사학계에서 가야의 본거지는 알타이 지역이라고들 말한다.

그곳이 바로 철 생산지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신라도 그곳에 근거한 것으로 나오고 유라시아와 중앙아시아를 포괄하여 존재한 자취가 있다.

또한 학명으로 본 식물학적인 행적을 분석할 결과 corea(고구려, 고려)의 흔적도 바로 그 곳이란 느낌이 강하게 존재한다.


그렇다면 가야국의 허황후는 인도에서 티벳을 넘어 알타이지역으로 들어 간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다.

아유타국에서 북진하는 경로도 큰강을 이용 수로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많다.

때문에 선박을 이용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렇다 지금은 모든 것이 가능성일뿐이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허황후가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반도사가 아니라 대륙사적으로 보아야 할 문제이고 대륙사적으로 이 문제를 냉정하게 탐방하여 하루빨리 의문의 고리를 명백하게 풀어내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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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2000년 2월 캐나다로 이주, 토론토에서 발간되는 한국일보에서 근무하다가 현재 토론토에 가장 오랜 역사의 한인동포 주간지 '캐나다 경제신문'에서 일하는 김정남입니다,


그동안 지난 2006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몇몇 한인들과 의기투합 '한국타밀연구회’(Korean Society of Tamil Studies)를 처음으로 발족시켜 서울의 경향신문 뉴스메이커(현재는 경향 위클리로 개명했음)에다 '가야 초대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는 인도 타밀 출신이다’, ‘석탈해도 인도 타밀지역에서 왔다’, ‘ 일본 최초의 여왕 비미호는 가야인이다’등 3편의 발굴기사를 게재, 역사학계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수많은 네티즌들의 불로그에 전재(轉載)되고 있습니다.


다음이나 네이버, 야후등 포탈사이트의 종합검색에 '토론토 김정남'을 입력하시면 제가 쓴 연구 발굴기사들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또, 지난 2006년 외교통상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에서 공모한 제1회 세계 생활백서 콘텐츠분야에서 ‘잃어버린 왕궤(王軌)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이민생활 수기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인도 남부 타밀인들의 집단 거주지역인 타밀나두주(州) 주도(州都) 첸나이(영어식 이름은 마드라스)에 소재한 마드라스대학교과 제휴하고 있는 아시아연구소에서 지난해 2008년 1월 개최한 세계타밀학 심포지움에 한국인으로서 처음 초청받아 언어, 역사, 풍습 등에서 한국과 타밀간의 친연성(親緣性)에 대한 저의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잘 알다시피 타밀어는 현재 인도에선 힌두어등과 함께 18개 공용어(Official Language)에 속하며 싱가포르에서도 영어, 중국어, 말레이시아어와 함께, 스리랑카에선 싱할리어와 함께 공용어입니다. 또 말레이시아어 및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말레이시아에선 타밀어는 공용어는 아니지만 중국어와 함께 신문방송 및 상업거래 등에서 사용되는 상용어 (Commercial Language)입니다.


이는 타밀인들이 일찍부터 동남아시아지역으로 대거 진출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타밀어는 비록 독립된 나라의 언어는 아니지만 인도, 스리랑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등 4개국에서 신문방송을 비롯 사업과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세계 굴지의 언어입니다.


타밀어를 쓰는 인구는 우리의 한글을 사용하는 7천5백만과 비슷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비록 한국 타밀연구회(Korean Society of Tamil Studies)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한인동포 몇사람들로 출범했으나 한국은 물론 전세계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한국과 타밀간의 역사적, 언어적, 인종적 유관성을 연구 조사하는 순수한 비영리 동인회인 만큼 회원 가입은 무료이고 회원들은 인터넷을 통해 상호간의 의견들을 주고받으며 한국과 타밀간의 관련성에 대해 연구합니다.


본연구회는 앞으로 다음과 같은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1. '한국어-타밀어 비교사전' 출간

2. '타밀 역사와 문화' 출간

3. 2천년전 타밀에서 한반도까지 바닷길 추적-범선(帆船 sailing ship)을 타고 허 왕후의 항해 재현(再現)

4. 소녀 허황옥, 3개월동안의 대장정을 그린 가상 소설 공모및 영화제작..... 미스 허,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 어떻게 지냈나? 왜 가야를 택하게 됐는가?

5. 타밀 현지 방문, 지속적 현장 조사 연구

6.. 한국-타밀 역사및 언어적 유관성에대한 세미나 개최

7.. 한국- 타밀간의 음악, 무용등 문화 에술 축제 개최


한국 타밀 연구회에 참여하고 싶으신 분들이나 충고와 조언을 해주실 분들은 다음의 전화나 이메일로 연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캐나다 토론토 전화 : (416)512-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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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난 몇 년 간 추적한 끝에 새로 발굴한 연구조사 성과인지라 좋은 충고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민요 '아리랑', 인도 및 스리랑카의 타밀 자장가 '탈라뚜'에서 왔다!

반복구 "아리라 아리라 아라리요" 가 똑같아

"도리도리, 짝짜꿍, 곤지곤지 ,죔죔, 까꿍"등 아기 몸짓 단어들도 완전 일치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는 최고의 구전 민요 '아리랑'의 대표적 반복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와 똑같은 소절이 나오는 노래가 있다. 인도 남부및 스리랑카 북부에 집단 거주하는 타밀족의 대표적 자장가 '탈라뚜(Thalaattu)'에 나오는 후렴구 "아리라 Arira 아리라 Arira 아라리요(Arariyo, 또는 아라리로 Arariro)"이다.'탈라뚜'도 본래 타밀어로 "우는 아이 달래는 노래"라는 뜻으로 우리말의 '달래다'와 발음 및 뜻이 같다. 따라서 우리의 '아리랑' 이 타밀 자장가에서 유래했음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우선, 필자가 구입한 타밀 자장가 '탈라뚜(Thalaattu)' CD를 직접 들어 본 결과 우리 '아리랑'과는 곡조가 좀 다르지만 가사의 일부가 같았다.


아라로 Araro 아라로 Araro 아리라로Ariraro

아리라 (Arira) 아리라 (Arira) 아라리요 (Arariyo) (또는 아라리로 Arariro)


아루 (Aru) 아디투 (Adithu), 니 (Niy) 알루다이 (Aluthay)

(누가 때렸는지, 너는 우는구나)

칸 (Kan), 마니예 (Maniye) 칸(Kan) 우랑구(Urangu)

(눈, 검은 눈을 감고 자거라)


아라로 Araro 아라로 Araro 아리라로Ariraro

아리라 Arira 아리라 Arira 아라리요 Arariyo(또는 아라리로 Arariro)


타밀 자장가의 "아리라 Arira 아리라 Arira 아라리요Arariyo ( 또는, 아라리로 Arariro)"는 아기가 울면서 잠들지 않자 달래기 위해 후렴구로 반복되고 있다.


과연 '아리라'는 무슨 뜻인가?


우리 '아리랑'의 어원에대해 많은 설들이 난무하듯이 타밀학계에서도 여전히 논란중이다. 대다수 타밀학자들은 아무런 의미없이 아기를 달래기위한 자장가의 후렴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부 타밀학자들에 따르면 "어떤 것의 일부를 짤라내다(to cut off)"라는 뜻의 '아리기라두(arigirathu)'와 "끊임없이 애원하며 마음을 괴롭히다(to vex, or to tease by incessant entreaties)'라는 뜻의 '아리끼라두(arikkirathu)'의 공통분모인 '아리(ari)'는 '상이(相異)함의 아픔'을 시사, 우는 아이를 향한 엄마로서의 안타까운 마음고생을 일컬어 반복 표출했다는 것. 이는 우리말에서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다"를 뜻하는 '아리다(arida)'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더구나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아 외치는 우리말의 '아파!'도 현대 타밀어 '아빠!(appa, an exclamation of pain, grief, or surprise)'와 똑같다는 것에 경악할 수밖에 없다.


즉, 타밀 자장가에선 우는 아이를, 우리 '아리랑'에선 떠나가는 연인 때문에 마음이 아파 "아리라 아리라 아라리요"라는 말을 반복한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자장가나 이별가등은 우는 아이나 헤어지는 연인 등에게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전 세계 어떤 인종이든지간에 거의 모두에게 나타나고 있어 유사성이 적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지방색의 특성이 농후하다. 되풀이 말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이나 연인 등을 달래며 회유하려는 생각 속에서 태고의 원시적인 주술(呪術) 흔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일본의 아리랑'이라고 할 만큼 일본의 대표적인 민요 '이츠키 자장가(五木 子守唄)'.이 노래는 부잣집 식모로 팔려간 어린 소녀들이 하루 종일 아기를 업고 돌봐야 했던 형편을 한탄하는 슬픈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는 뜻밖에도 우리 '아리랑'의 정서와 아주 흡사하다. ‘오로롱 오로롱 오로롱바이’로 시작되는 가사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와 거의 똑같이 들린다. 때문에 ‘이츠키 자장가’는 임진 및 정유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구마모토(熊本)현의 이츠키(五木)라는 오지에 들어가 모국 조선을 그리며 부른 노래일 것이라고 한일관계를 연구하는 두 나라 전문가들의 공통된 연구결과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에서나 불려지는 자장가나 이별가등에 후렴구가 비슷하게 나타날 수가 있다는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아리랑'과 타밀 자장가의 반복 소절이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더구나 아직 말 못하는 타밀아기들에게 가르치는 몸짓 단어들이 우리가 사용하는 "도리 도리,짝짜꿍, 곤지곤지 ,죔죔, 까꿍"등과 발음 및 뜻이 완전히 똑같다. 아래의 비교표를 보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린아이를 매로 때린다는 뜻의 '맴매'도 옛 타밀어 단어와 완전히 일치하는 데 오늘날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말

현대 타밀어

설명

1. Dhori Dhori

(도리도리)

1. Dhori Dhori

(도리도리)

어린아이가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동작.

 

돌다(돌리다)가 의태어화 되었다는 것.

2. Chak Cha Kkung

(짝짜꿍)

2. Cha Cha Ko

(짜짜 꼬)

젖먹이가 손뼉을 치며 재롱 피우는 동작

3.Konji Konji (곤지곤지)

3.Konju Konju (곤주곤주)

젖먹이에게 왼손 손바닥에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댔다 뗐다 하는 동작.

4.Joem Joem(죔죔)

4.Jam Jam(잠잠)

젖먹이가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

 

흔히들 발음하는 '잼잼'은 죔죔’(죄암죄암)의 잘못이다.

5. Obuba (어부바)

5.Abuba (아부바)

어린아이의 말로 아가에게 등에 업히라는 뜻으로 내는 소리.

6.Kkakkung(까꿍)

6.Kkakkung(까꿍)

어린 아기를 귀여워하며 어를 때 내는 소리.

7.Maemmae(맴매) 

7.Maemmae(맴매) 

어린 아기의 말로, 매로 때리는 일을 이르는 말. (옛날 타밀어로서 현대 타밀어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다.)

 

우리말의 '때리다'는 현대 타밀어로도

'타꾸'(thakku) '타뚜'(thattu) 또는

'테리끼'(terikki)인데 발음과 뜻이 거의 같다. 특히 '테리끼'(terikki)는 '막대기등 어떤 물건을 세차게 급히 내리치다, 내던지다'의 뜻

(to dash or throw off a thing, such as a stick or a book, by a quick motion).


동시에 아이들과 관련된 전통 풍습 몇 가지도 완전히 일치한다.


우리의 전통풍습

타밀 전통풍습

아기를 출산했을 때 부정을 타지 말라고

외부인의 출입을 자제시키려고 집문 앞줄에

나무 잎을 달아놓은 전통 관습도 타밀과 똑같다. 우리는 남아(男兒)일 경우 고추나 솔가지를 여아(女兒)일 경우 숯 등을 달아놓는다.

타밀 전통 관습도 똑같다. 다만 열대지방에

사는 터라 고추나 솔가지대신에 망고열매나 나무 잎을 달아놓는다

우리 전통관습들 중에 어린이가 밤에 잠자다 오줌을 싸면 그 다음날 아침에 키를 머리에 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소금을 얻어 오는 관습이 있다.

타밀도 똑같은 관습이 있다.

 

다만 머리에 씌우는 '키(=winnow)'는 현대

타밀어에선 "술라구(sulagu), 무람(muram),

타다(thada)"등으로 소금(salt)은"

우뿌(uppu)"라고 불려진다. 하지만

 

고대 타밀어로 '키'는 'Ki(키)' 또는 'Chi(치)'라고 했으며 '소금'도 옛날 타밀어로

Sogum('소금' 또는 '소흠'으로 발음)이라고 했다.


우리의 전통 풍습및 문화 형성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친 중국에서도 조차 이같은 단어나 관습이 없는 데 바닷길로 저 멀리 떨어진 인도 남부및 스리랑카 북부 타밀인들의 것들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것은 분명 타밀과 우리와의 중대한 연결고리가 되는 어떤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필자는 이미 국내의 모 매체에 발표한 연구 추적 기사에서 가야 초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許黃玉)과 신라의 네번째 왕 석탈해, 그리고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를 키운 6촌장 대부(代父)등이 모두 타밀출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따라서 타밀인들이 가야및 신라의 초창기 왕실 지배층을 장악하면서 타밀전통의 자장가 '탈라뚜'를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남녀이별가로 슬며시 전용돼 불려졌다는 추정을 낳게한다.


일부 학계에선 일반 백성들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부인 알영(閼英)을 찬미하여 ‘알영 알영’하고 노래 부른 것이 '아리랑 아리랑'으로 변하였다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알영왕비가 알영정(閼英井) 계룡(鷄龍)의 옆구리에서 탄생했다는 그 우물로 올라가는 알영 고개가 아리랑 고개로 음변하였다는 설까지 나오고 있다.


아무튼 한반도의 많은 '아리랑'들 가운데 진도와 밀양, 정선 등 3대 주요 '아리랑'이 발생한 지역은 남해와 동해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열린 공간인 만큼 배를 타고 와 정착한 도래인(渡來人)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타밀인들은 동서교역의 중간에 위치한 인도양의 인도남부 및 스리랑카섬 북부지역에 거주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기원전부터 서쪽으론 로마제국등과, 동쪽으론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중국 남부지역등과 왕성하게 해상교류를 해온 터라 마침내 한반도 남부에까지 도달했다는 추측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만약 삼한인들이 한반도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대륙 즉 인도 북방을 근거로 한 것이라면 자연스러운 것일 뿐 한반도라 하여 억지로 꿰맞출 필요가 없는 오히려 모호한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논리이다.


또, "아리라 Arira 아리라 Arira 아라리요 Arariyo ( 또는 아라리로 Arariro)"가 들어간 노래를 부르고 "도리도리, 짝짜꿍, 곤지곤지 ,죔죔, 까꿍"등을 구사하고 있는 인종은 타밀족과 바로 옆에 이웃해 살고 있는 싱할리족이나 텔루구족, 칸나다족등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타밀족만의 독특한 노래와 언어이기에 타밀족들의 한반도 도래는 더더욱 분명해 보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삼한이 역사적으로 한반도로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대륙을 터전으로 근거하였다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로 충분하다.


이미 KBS TV에선 지난해 2008년 봄 소설가 최인호씨와 함께 인도 및 동남아시아, 일본등 여러나라들에서 현장 취재한 '최인호의 역사추적-제4의 제국 가야’(담당 PD 김형석)를 통해 유전자 분석에 권위자인 서울의대의 서정선교수가 서울에 거주하는 타밀인들의 혈액등을 체취하고 가야의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의 DNA와 비교분석한 결과, 가야 왕족의 DNA가 몽골계가 아니라 인도 타밀 계통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혀 과학적 신빙성을 뒤받침해주었다.


필자는 'Winslow's English -Tmail Dicitionary'와 'Percival's Tamil-English Dictionary' 라는 권위있는 타밀어-영어 사전 두 권을 뒤져 현대 우리말과 현대 타밀어간에 무려 5백여개나 되는 단어들을 찾아냈는데 인터넷 상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민족 대부분이 속한다는 몽골계의 언어들로서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 심지어 터키어등에선 우리말과 유사한 단어들이 겨우 1백여개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들 언어 전문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 이미 밝혀진 지 오래다.


더 나아가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데이어 백제 및 고구려를 물리치고 한반도를 통일한 뒤에도 계속 타밀어가 스며든 신라어를 고구려어나 백제어보다 더 많이 사용하다보니 오늘날까지도 우리말에 타밀어와 거의 같은 단어들이 수백개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이나 일본, 몽골등 동아시아 나라들 가운데 유독 우리 민족만 하얀 옷을 입어 백의(白衣)민족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무얼까?


인도대륙은 날씨가 너무 더워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하얀 천의 옷을 입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인도인들이 한반도 남쪽에 도래, 지배계층이 되면서 하얀 옷을 입던 관습을 전하는 바람에 한반도에서도 날씨가 차가운 데도 불구하고 하얀 옷을 입는 전통이 굳어졌다는 가정도 충분히 가능하다.


대륙삼한계가 근세기 대륙조선이 몰락하면서 한반도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삼한계(타밀계) 사람들도 함께 들어 왔을 것이란 추측도 같이 해 볼 수 있다.


이번 연구 추적 기사를 작성하는 데 있어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州)의 두번째 대도시 마두라이(Madurai) 인근 데바코타이(Devakottai)에 소재한 SSA 대학에서 타밀어를 강의하는 저명한 언어학교수 카루빤체티 무티아( Karuppanchetty Muthiah. 63세)박사를 비롯, 토론토의 타밀 힌두교 승려들, 타밀인 협회및 여성봉사단체등의 주요 책임자들 수십명의 증언이 크게 기여했음을 밝혀둔다.


김정남 (한국타밀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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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국의 열여섯 살짜리 공주 허황옥(許黃玉)은 부모님의 꿈 이야기


지난 10월 말 경부고속철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구간에서 신라 초대왕 박혁거세(BC69~AD 4)를 키웠던 진한 6촌장의 사로육촌 중 고허촌의 유적이 대량 발굴되면서 이들의 정체 규명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알에서 태어나 왕궁에서 키워지다가 자력으로 만주지역에 고구려를 세우고,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은 알에서 태어난 지 반나절 만에 성인이 돼 보름 지나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모든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 사로육촌의 6촌장 손에 13년간 키워지고 나서 신라의 초대왕으로 추대된다.


진한 6촌장 인도 타밀 출신 추정


필자는 가야 초대 왕비 허왕후 및 신라 제4대 석탈해왕의 설화 속에 언어적 유사성 및 해양교류 등을 추적한 결과, 이들이 인도 남부의 타밀 출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박혁거세의 설화에 나오는 주요 명칭들이 당시 타밀어와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다. 더구나 윷놀이와 제기 등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도 타밀어 명칭과 놀이 형태가 완전히 똑같다. 박혁거세의 대부 격인 6촌장이 타밀 출신이라 자신들의 언어와 풍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인도 남부 및 스리랑카 북부 출신으로 토론토에 거주하는 20여 만 명의 타밀인들 가운데 타밀인협회 및 여성단체 관계자, 힌두교성직자, 교수, 교사 등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 취재하고 타밀어 사전 및 역사서 등을 참조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타밀어에서 ‘자력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운 좋은 왕’ 또는 ‘행운을 가져다 주는 왕’을 지칭하여 ‘박히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히야거사이(Pakkiyakosai)’라고 불렀는데 이를 우리말로 표현한 것이 바로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6촌장들이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박처럼 둥근 알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은 ‘박(朴)’, “세상을 밝게 한다”하여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는 한자어 작명을 한 것이다. 인도가 원산지인 ‘박’은 당시 타밀어와 우리말이 아주 똑같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수라이카이(Suraikai)라고 불리고 있다.


또 박혁거세에게 붙인 ‘왕’의 명칭 거서간(居西干)도 당시 타밀어 ‘거사간(kosagan)’과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울러 6촌장들의 이름 또한 당시 타밀인들의 이름과 유사하다. 박혁거세 알을 처음으로 발견한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는 타밀어로 ‘훌륭한 지도자(Good Leader)’를 뜻하는 소벌두라이(Sobolthurai)와 거의 같다. 알천 양산촌의 알평은 아리야판(Aryappan)과, 자산 진지촌의 지백호는 치빠이코(Chippaiko)와, 무산 대수촌의 구례마는 구레마(Kurema)와, 금산 가리촌의 지타는 치타(Cheetha)와, 명활산 고야촌의 호진은 호친(Hochin)과 각각 일치한다.


이들의 출신에 대해 학계에선 “이곳(서라벌)에 오래 전부터 조선의 유민들이 내려와 여섯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쓰여 있는 여러 역사서의 내용과 유물 등을 분석하여 박혁거세 및 6촌장 모두를 북방유목민출신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박혁거세와 6촌 주민들이 북방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서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라고만 전해오는 6촌장 만큼은 허왕후나 석탈해와 마찬가지로 당시 막강한 해상력으로 아시아 전체를 누비고 다니던 인도의 타밀 출신으로 추정된다.


둘째, 박혁거세의 탄생지 근처에 있는 우물 ‘나정’은 타밀어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을 뜻하는 ‘나중(nazung)’과 거의 일치한다. 타밀어의 나주쿠(nazukku)는 “땅을 파헤쳐 이랑이나 도랑을 만들다”(=make a shallow furrow)라는 뜻의 능동형 동사인데 그 수동형동사 ‘나중구(nazungku)’는 ‘이랑이나 도랑이 만들어지다’ (=be ploughed with shallow furrows)라는 뜻이다. 여기서 “파헤친 도랑이나 이랑”이라는 뜻의 명사 ‘나중(nazung)’이 바로 박혁거세의 우물 ‘나정’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2005년 8월 문화재청은 깊은 도랑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박혁거세의 탄강전설이 깃든 경주 시내 우물 나정을 발굴한 성과를 공개하는 현장 설명회를 가졌다. 발굴팀은 현장 조사에서 확인된 나정의 정중앙 8각형 건물지(한 변 8m, 지름 약 20m) 주변에서 이 8각형 건물지보다 앞서 축조되었음이 분명한 도랑, 즉 구거 같은 대형 구상 유적을 확인했다. 이로써 박혁거세가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역사상 존재했던 인물로 자리매김된 것이라고 문화재청측은 설명했다.


알영 부인 이름도 타밀이름과 유사


셋째, 박혁거세의 또 다른 이름인 ‘불구내’는 현재 타밀 나두주(州) 땅에 있던 당시 타밀인들의 촐라 왕국 바닷가 마을 ‘부르구나이(Purugunai)’와 거의 일치한다. 필자는 신라 4대 왕 석탈해의 고향이 동서양 무역으로 크게 흥했던 고대 국제도시 나가파티남(Nagapattinam)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도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부르구나이가 있다.


박혁거세의 후견인 6촌장들이 이곳을 출발, 동아시아를 향해 떠났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신들의 고향 이름을 박혁거세의 별명으로 붙여 막강한 영향력의 흔적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부르구나이는 현재 벨란간니(Velankanni)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가톨릭 교회 ‘안네 벨란간니(Annai Velankanni)’가 들어서서 명소가 됐다.


넷째, 고구려의 주몽이나 가야의 김수로왕과 마찬가지로 박혁거세도 알에서 태어나지만 혁거세의 알이 박에 견주어졌다는 점이 다르다. 박은 우리말과 당시 타밀어가 그 발음과 뜻에서 똑같다. 박은 현대 타밀어로는 수라이라이(Suraikai)라고 불린다. 박은 인도나 아프리카 등 열대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인도에서 건너온 6촌장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 필수품 중 하나인 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타밀인들은 일년내내 무더운 날씨를 견디려고 박을 파낸 표주박 등으로 만든 물통을 허리에 차고 다니며 목을 축이곤 했다. 이 물통은 타밀어로 단니 쿠담(Thaneer Kudam)이라고 불리며 호리병박으로 만든 작은 물통은 수라이 쿠담(Surai Kudam), 호박으로 만든 큰 물통은 푸사니 쿠담(Pusani Kudam)이라고 칭한다.


다섯째, 신라 이전의 나라 이름인 ‘서나벌’은 당시 산스크리트어 및 고대 타밀어로 황금을 뜻하는 ‘서나(Sona)’와, 벌판(field)을 의미하는 ‘벌’ 또는 ‘펄(Pol)’이 합쳐져 황금밭(Gold Field)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말에서 ‘벌’의 옛말이나 거센말은 ‘펄’인데 고대 타밀어와 마찬가지로 “매우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한다. 아울러 ‘서라벌’도 ‘아름다운(nice)’을 뜻하는 ‘서라(Sora)’가 ‘벌(Pol)’과 합쳐져 ‘아름다운 들판’을 뜻해 새 나라의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민속놀이 명칭도 거의 비슷


여섯째, 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BC 53 ~?)부인은 아리영이라고도 불리는 데 타밀 여성이름 아리얌(Ariyam)과 거의 일치한다. 아리얌은 아리야말라(Ariyamala)의 줄인 이름으로 기원전 타밀 왕국역사에 나오는 캇타바라얀(Kaththabarayan)왕의 부인 이름인 데 이를 신라 초대 왕비 이름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계룡의 왼쪽 옆구리에서 태어난 알영부인이 얼굴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이 생겼다는 내용도 인도 힌두교 신화에서 지혜와 총명의 여신(Goddess of Learning and Wisdom) 사라스와티(Saraswati)가 백조(swan)의 부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설화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결국 알영부인은 용모와 인품이 뛰어나 백성들에게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릴 정도로 추앙받았다는 것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 타밀인들이 사라스와티를 숭배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힌두교와 관련된 것들이 우리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곧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이진아시왕의 별칭)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김수로왕의 별칭) 두 사람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는 데 이들 모두 힌두교와 관련 있다.


힌두교의 주요신 시바(Shiva), 부인 파르바티(Parvati), 두 아들 가네쉬(Ganesh)와 무루간(Murugan)을 각각 고대 타밀어로 ‘이비가지(Ibigaji)’ ‘정견(Chongyon)’ ‘뇌질주일(Noejil Juil)’ ‘뇌질청예(Nojil Chongye)’라고 불렀다. 이 구절은 조선 중종 25년(1530)에 펴낸 동국여지승람의 증보 개정판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최치원의 ‘석리정전’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곱째, 박혁거세왕은 재임 17년(기원전 40년)에 알영부인을 대동, 6부를 순시하며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농토를 충분히 이용하도록 하였다(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고 전하고 있다. 즉, 삼과 누에로부터 얻은 실로 길쌈해서 삼베옷과 비단옷 등을 해입었고 벼농사를 비롯한 곡식생산에 주력했다는 이야기다. 또 제3대 유리왕은 추석 때 길쌈놀이를 실시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우리말의 비단, 삼, 길쌈, 벼, 풀 등은 고대 타밀어와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경악할 정도로 너무나 똑같은 농경사회의 주요 명칭들을 다음의 비교표로 정리했다. 뿐만 아니라 새해 첫날 우리가 즐기는 윷놀이, 제기놀이, 쥐불놀이, 팽이놀이 등 민속놀이도 당시 타밀어로 각각 ‘윷노리(Yuddh, Yuth Nori)’ ‘제기노리(Jegi Nori)’ ‘추불 노리(Chupul Nori)’ ‘ 팡이 노리(Pamgi Nori)’로 불리며 그 형태도 완전히 똑같다. ‘놀이’는 고대 타밀어로 ‘노리(Noori), 또는 노루(Nooru)’로 불렸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빌햐야들(Vilaiyattu)’로 불린다. 다음의 비교표를 보면 타밀인들이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바로 이웃 사람으로 느껴진다.


고인돌 문화 인도에서도 발견


현대 타밀어에서도 우리말과 똑같은 말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아빠(아빠), 암마(엄마), 안니(언니)” “난(나), 니(니)””니, 인거 바!(니, 이거 봐!)””니, 인거 와!(니, 이리 와!)””난, 우람(난, 우람하다)””난, 닝갈비다 우람(난, 니보다 우람하다)””난, 비루뿜(난, 빌다)””바나깜(반갑다)” 난, 서울꾸 완담(난, 서울로 왔다)””모땅(몽땅)””빨(이빨), 무크(코), 깐(눈깔), 코풀(배꼽), 궁디(궁덩이)”등 거의 똑같은 단어와 어구들이 적지 않다.


이는 박혁거세 부부의 대부격인 6촌장들이 인도 타밀의 것을 한반도에 소개한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그 이전에 중국대륙을 통해 벼나 보리농사가 이미 도입됐다고 하더라도 농사 관련용어 및 민속놀이 등은 타밀출신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하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우리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타밀인들이 한반도까지 도달했던 또 다른 증거는 박혁거세와 석탈해 등 신라 초기의 왕들의 난생설과 경주와 포항 등 신라지역에서 대거 발견되는 고인돌 등에서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고고학계의 원로인 한양대의 김병모 교수에 따르면 벼농사, 난생신화,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 등의 지리적 분포가 인도-동남아시아-한반도 남동부 해안지역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인도 문화의 영향을 시사했다. 김교수는 또 “신라주민은 진한-신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 중에 중국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고조선의 유민들, 그리고 고구려에게 멸망한 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으로 구성돼 있다”고 지적했는데 필자는 토착 농경인들을 이끌던 6촌장들이 타밀출신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들이 경주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


인도 남부 해안지대의 타밀인들은 기원전 수세기부터 서쪽으론 로마제국까지, 동으로는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활발하게 진출하다가 대만 북쪽으로 흐르는 흑조 난류를 타고 북상, 급기야 한반도까지 도달한 것이다. 타밀인들은 사로 6촌 가운데 동해안과 접한 금산가리촌에 도착한 뒤 내륙으로 들어가 경주의 사로 6촌을 개척,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타가 통치한 영일만 부근 금산가리촌은 현재 동해안과 접한 경주시 감포읍과 양남면, 양북면 등 3개 지역 모두를 포함했다.


또, 필자가 인도 타밀 출신으로 간주하는 신라 제4대왕 석탈해의 알이 담긴 궤짝도 동해를 표류하다가 동해안의 아진포에 당도하는데 이 곳이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 아진포라고 석씨전국대종회가 밝히고 있어 이래 저래 금산가리촌은 당시 인도 타밀인들의 도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경주 덕천리 유적 발굴작업에서 출토된 목관묘 11기와 청동기 항아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문토기, 그리고 매장된 사람의 지위가 높음을 알려주는 오리모양 토기 11개와 말과 호랑이 모양의 허리띠 고리 등이 당시 인도 타밀의 역사적 유물들과 비교, 추적해 정확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6촌장들은 물론 박혁거세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 제3대 유리왕은 서기 32년 육촌을 육부로 개편하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6촌의 각 촌장들은 자동적으로 각 성의 시조가 된다. 소벌도리는 최(崔)씨의, 알평은 경주 이(李)씨의, 구례마는 손(孫)씨의, 지백호는 정(鄭)씨의, 지타는 배(裵)씨의, 호진은 설(薛)씨의 조상이 된다.


김정남〈타밀학회장·캐나다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