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반환-병인양요가 벌어진 강화는 지금의 중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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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 말하는 장강(長江)!
그곳은 과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1. 충청도는 나라의 문 입구인 장강의 상류로서 양령(兩嶺)이 모이는 곳이라 험조하며 장강상류에 충주가 있다.
古代朝鲜八道之一忠清道传统又称湖西地方,即为今日韩国境内日之忠清北道、忠清南道。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조선팔도 충청도를 옛 이름으로 호서(湖西)라고 했다.
한반도에 호서란 말이 어울리는가?
호남이란 지명도 호수다운 호수가 있어야 어울리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반도 호남 위 어디에도 최근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 말고는 없다.
그런데 호서라니 이상하지 않는가?
호서가 있을 곳은 바로 대륙이며 호남, 호북, 호서로 불리던 곳은 동정호(洞庭湖)와 파양호(鄱阳湖)를 깃점으로 지칭 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때문에 대륙지형상 호서는 장강 상류지역이 된다.
또 충청도가 나라의 문호란 말은 한반도 지형에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한반도 충청남도는 내륙중앙에 위치하여 문호란 말과 어울리지 않으며 서해 항구라고 해봐야 장항항(長項港)이 전부인데 장항은 원래 갈대밭으로서 일제강점기 1937년에 수축공사가 완성되어 일제의 수탈기지로 이용되었던 항이다.
한반도 충주는 장강(長江)상류가 흐르는 곳이 아니라 남한강 상류라고 할 수 있는데 중요하다고 해봐야 1985년에 완공된 충주댐이 있을 뿐이고 험조(險阻)란 말을 붙일 곳이 없다.
험조(險阻)란 말은 대륙장강상류처럼 깍아지른 벼랑 끝으로 험준한 협곡이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급류가 곳곳에 있어 배가 지나가는데 장애가 많고 지나기가 어려운 곳을 지칭하는 것인데 한반도에 그러한 곳은 눈 까집고 찾아봐도 없다.
2. 선조28년(1595) 유성룡은 우리나라의 땅은 오랑캐(胡虏)의 땅과 서로 엇물려 있고 가운데 큰 강(長江)을 끼고 있는데 얼음이 언 뒤에 오랑캐의 기병이 얼음을 타고 돌진해 올 수 있다면서 대개 장강(長江)이 얼면 평탄한 길이 되어버리니 오랑캐가 말을 타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으므로 중원에서는 요하(遼河)에 빙장(氷墻:어름벽돌)을 만든다고 하면서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진언한다.
3. 임진왜란 시 사헌부가 건의하기를 서울 즉 한강을 지키려면 장강상류를 지켜야 한다면서 상류에 충주와 원주를 방어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다.
4. 선조25년(1592)선조가 임진란을 피해 피란길에 올라 용만(龍灣)에 도착하여 한탄하기를 “나라의 운명이 험난하여 내가 이제 올데까지 다 왔으니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앞으로 어디로 가겠는가.”하였다는데 용만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감숙성(甘肃省) 난주(蘭州) 용만촌(龙湾村)이란 곳이 있다.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 갔다는 것은 난주(蘭州)가 아닐까 한다.
5. 숙종11년에 강도(江都) 즉 강화도에 축성하는 문제에서 장강상류를 막지 않으면 성이 있은 들 무슨 소용인가? 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江都(江華島)와 장강은 연결되는 곳에 존재한다.
6. 황도는 장강하류에 있다.
7. “오랑캐가 장강상류에서 삼강(三江)의 옥재(屋材)들을 헐어서 뗏목을 만들어 가지고 물 흐름을 따라 내려오면 그들의 방장(方張)한 세력을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에서
삼강(三江)은
청해삼강원(青海三江源)과
사천삼강(四川三江)과
四川省 廣元市 旺蒼縣 三江鎮
四川省 成都市 崇州市 三江鎮
四川省 樂山市 井研縣 三江鎮
四川省 巴中市 巴州區 三江鎮
중경삼강(重庆三江) : 嘉陵江、渠江、涪江이 있으며
삼강병류(三江併流:指發源於青藏高原的怒江、金沙江和瀾滄江這三條大江在中國雲南省西北部穿過橫斷山脈的峽谷,并行數百公里而不交匯的自然奇觀,為世界自然遺產)도 있다.
8. 조사석이 말하는 문수산성(文殊山城)도 지금에 감숙성(甘肃)장액(张掖)에 문수산이 있다.
9. 고종3년(1866) 강화도에 있었던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양이들에게 침입을 받아 어진(御眞)을 이봉(移奉)하는 조치까지 취하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면서 강화도가 천연요새지임에도 믿을 수 없고 장강(長江) 역시 더는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며 어진을 모시는 일에 이봉(移奉)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것을 전교하는 글이 있다. 이것은 강화도가 장강에 속해있음을 나타내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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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4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윤11월 4일(갑신)
비변사가 충청도를 잘 단속하여 순무할 것을 청하다
○備邊司啓曰: “忠淸道, 國之門戶, 防備之急, 亞於兩南。 如忠州則乃上游之重, 且居兩嶺之會。 忠州若失, 則長江之險, 不足恃也。 且兵興以後, 道內稱義兵者, 無慮五十餘陣。 雖其討賊無效, 而所領之軍, 則其數甚多, 皆係精壯, 不服官家調發。 且有僧將弘靖、性靖之軍, 各千餘名, 散在道內, 而皆無人統屬, 各自進退, 非徒無益禦敵, 亦不無潰散意外之慮, 不一而足。
비변사가 아뢰기를,
“충청도는 나라의 문호(門戶)이므로, 그 방비가 급한 것이 양남(兩南)에 버금갑니다. 충주로 말하면 상류(上流)의 중요한 곳이고 또 양령(兩嶺)이 모이는 곳이니 충주를 잃으면 장강(長江)의 험조(險阻)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또 병란이 일어난 뒤로 도내(道內)의 의병이라 일컫는 것이 무려 50여 진(陣)인데, 비록 적을 토벌하는 데에 별 공효는 없었으나 거느린 군사는 수효가 매우 많고 다 정예(精銳)하고 건장하여 관가의 징발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또 승장(僧將) 홍정(弘靖)·성정(性靖)의 군사 각각 1천여 명이 도내에 흩어져 있는데, 다 통속(統屬)하는 사람이 없어서 각각 스스로 진퇴(進退)하는지라, 적을 막는 데에 보탬이 없을 뿐더러 궤산(潰散)함이 없지 않으니, 뜻밖의 염려가 많습니다.
양남(兩南); 호남 과 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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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68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10월 22일(신유)
평안도 군안 작성·얼음 위의 요새 설치·성 수비·포루 등에 대한 유성룡의 의견
江邊形勢, 最爲險要。 我國之地, 與虜地, (大)〔犬〕牙相錯, 中挾大江, 合氷之後, 虜騎雖乘氷馳突, 而山崖險阻, 洞壑成磎之處, 可以設險。 如滿浦高山里之間, 有所灘, 賊由黃城以出, 則必從此路, 出於伐登浦。 高山里下禿魯江口、渭原林里及郡後鴨綠江口、山羊會、童巾江口、碧潼ㆍ碧團大小吉號里等處, 皆係緊要云。 此外, 亦必有可守可據之處, 在於主將, 臨時處置如何? 氷上設險之事, 前於備邊司之啓略陳矣。 大槪長江若合, 則化爲坦途, 虜之馬足, 不可遮遏, 故中原於遼河, 爲氷墻, 此則人力多入。 且長江一望之地, 亦難處處設之。 惟於江口峽束之處, 兩岸斗絶, 而中通一條路, 則可以橫鑿, 品防於氷上, 而於氷穴, 列植多枝之木, 與氷水堅結, 滿江設爲六七重, 則虜騎不敢輕進, 而我軍從兩岸, 多發火器, 可以却虜。 此乃可行之策。 大抵虜兵, 長於弓馬, 而不事火器。 若我軍多備鳥銃、火箭、雜砲, 預爲精習, 而臨機善用, 則虜兵雖多, 似當制之。
강변은 형세가 가장 험요(陜要)합니다. 우리나라의 땅은 오랑캐의 땅과 서로 엇물려 있고 가운데 큰 강을 끼고 있는데 얼음이 언 뒤에 오랑캐의 기병이 얼음을 타고 돌진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벼랑이 험조(險阻)하고 계곡이 깊은 곳에 요새를 설치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만포(滿浦)와 고산리(高山里) 사이에 물길이 험한 곳이 있는데 적이 황성(黃城)을 경유하여 나오자면 반드시 이 길을 따라 벌등포(代登浦)로 나오게 됩니다. 고산리 아래 독로강 어귀, 위원(渭原)·임리(林里) 및 군(郡)의 뒤쪽 압록강 어귀, 산양회(山羊會) 동건강(童巾江) 어귀, 벽동(碧潼)·벽단(碧團)과 대소 길호리(吉號里) 등처가 모두 긴요한 곳이라 합니다. 이밖에도 반드시 지킬 만하고 웅거할 만한 곳이 있을 것이니, 주장(主將)이 임시하여 어떻게 조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얼음 위에 요새를 설치하는 일은 앞서 비변사의 아룀에서 대강 진달하였습니다. 대개 장강(長江)이 얼면 평탄한 길이 되어버리니 오랑캐가 말을 타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으므로 중원에서는 요하(遼河)에 빙장(氷墻:어름벽돌)을 만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력이 많이 들고 또 그 넓은 장강에 또한 곳곳마다 설치하기가 어려우니 강어귀 산협(山峽)이 모인 곳에 두 언덕이 우뚝이 솟아 있고, 그 가운데 한 가닥의 길이 통한 곳이면 얼음 위를 가로 뚫어서 방책(防柵)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음 구멍에 가지 많은 나무를 벌여 세워 굳게 얼어붙게 하여 온 강위에 6∼7겹을 설치하면 오랑캐의 기병이 감히 함부로 진격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 군사가 두 언덕으로부터 화기를 많이 발사하면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행할 수 있는 계책입니다. 대저 오랑캐 군사는 활쏘기와 말 달리기에 능한 장기가 있고 화기에는 힘쓰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 군사가 조총·화전(火箭)·잡포(雜砲)를 많이 준비하여 미리 정밀히 연습하고 기회에 임하여 잘 사용하면 오랑캐의 군사가 아무리 많더라도 제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선조 임진왜란시 왜구 이외 오랑캐(胡虏)라는 또 다른 적이 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로(虏) 적을 경멸하여 일컫던 말인데..왜구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 오랑케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양이(洋夷) 즉 포르투갈과 연관된 용병이나 사병으로서 양자강 상류 조선 충청도가 있는 서쪽에서 들어오는 적을 대비하자는 내용이다.
오랑캐 군사는 활쏘기와 말 달리기에 능한 장기가 있고 화기에는 힘쓰지 않는다는 것은 조총을 들었다고 하는 왜구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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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91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8월 27일(을유)
기동 타격군의 창설, 한강 상류의 방비 점검 등을 사헌부가 건의하다
欲守都城, 先守長江, 乃爲今日長策, 上流防備之事, 不可置之尋常, 而忠州以下原州以上守灘諸具, 不成模樣, 極爲寒心。 請別遣御史, 馳往巡審, 仍令檢飭, 以重上流之形。
서울을 지키려면 우선 장강(長江)을 지키는 것이 오늘날의 상책이니 상류를 수비하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충주(忠州) 이하와 원주((原州) 이상의 한강유역을 방어할 여러 가지 기구가 형편없이 갖춰지지 않았으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별도로 어사를 파견하여 빨리 달려가 세밀히 살펴보고 또 엄중히 단속하여 상류의 형세를 엄중히 하도록 하소서.
서울을 지키려면 장강 상류를 지켜야 한다면서 상류에 충주와 원주를 방어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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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무자)
상이 유생 양산숙을 공조 좌랑에 임명하고 호남·영남에 유시하는 교서 2통을 내리다
龍灣一隅,天步艱難, 地維已盡, 予將何歸? 人情已窮, 理宜思復。 秋涼乍動, 邊地早寒。 瞻彼長江, 亦流于東。 思歸一念, 如水滔滔
“나라의 운명이 험난하여 내가 이제 올 데까지 다 왔으니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앞으로 어디로 가겠는가. 인정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데 변방은 벌써 추워진다.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려는 한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왕성하다.”
선조가 피란길에서 호남·영남에 유시하는 교서에서 말하기를 “나라의 운명이 험난하여 내가 이제 올 데까지 다 왔으니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앞으로 어디로 가겠는가.”
여기서 용만은 지금의 감숙(甘肃) 난주(兰州) 용만촌(龙湾村)이라는 데가 있다.
한반도에 용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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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6권, 11년(1685 을축 / 청 강희(康熙) 24년) 4월 14일(계묘)
강화의 축성을 의논하다
○癸卯/時有江都築城之議, 遣判府事閔鼎重、兵曺判書趙師錫, 審察形勢, 至是還。 上引見而問之, 鼎重曰: “國家以江都爲保障築城之擧, 勢不可已。 或以爲 ‘江都所恃, 專在長江, 長江失守, 有城何益?’ 此言似是而實非。 孝廟時, 故相臣李浣力主築城之議曰: ‘皇明之世, 常有虜警,倉卒入關門, 進薄皇都, 而猶能憑城固守。 假令國家猝有變入江都, 而不築城, 以自固, 駐蹕於土墻之間, 一朝虜撤三江屋材, 作筏而順流, 則方張之勢, 孰能遏之?’ 孝廟甚以爲切緊。 浣之言, 今不可忽。 願上詢于廟堂。 苟以爲築之便, 臣請以禁衛營物力自當。” 蓋鼎重方爲禁衛都提調故也。 上曰: “卿言甚是, 當與諸大臣共議。” 師錫曰: “臣愚以爲, 文殊亦不可不築。 蓋我國之於文殊, 猶高麗之於白馬也。 今若築城於文殊, 則道路無礙, 可以轉達江都。 文殊亦不可不築。” 上然之。
당시 강도(江都)에 성(城)을 쌓아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기에, 판부사(判府事) 민정중(閔鼎重)·병조 판서(兵曹判書) 조사석(趙師錫)을 보내어 자세히 형세(形勢)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이때에 돌아왔다. 임금이 그들을 인견(引見)하고서 물으니, 민정중이 말하기를,
강도(江都)는 강화도이다.
“국가에서 강도(江都)를 보장(保障)으로 삼고 있으니, 성(城)을 쌓는 일은 형세가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혹자(或者)는 ‘강도에서 믿는 것은 오로지 장강(長江)에 있으니 장강의 수비(守備)가 아니되면 성(城)이 있은들 무엇이 이익되리요?’ 합니다만 이 말은 그럴 듯하나 실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효종(孝宗) 때에 옛 상신(相臣) 이완(李浣)이 이곳에 성(城)을 쌓는 의논을 힘써 주장하기를 ‘황명(皇明:숙종)의 세상에 항상 오랑캐의 경보(警報:긴급한 사태를 알리는 통지 또는 신호)가 있어서 창졸간에 관문(關門)에 들어 닥쳐 황도(皇都:숙종이 거하는 도시)를 침노하더라도 오히려 성(城)을 의지하면 굳게 지킬 수 있습니다. 가령 국가에 갑자기 변(變)이 있어서 강도에 들어가더라도 성(城)을 쌓아 고수하지 아니하여 흙담 사이에 주필(駐蹕:임금이 행행하는 도중에 잠시 머무르거나 숙박하다)하였다가 하루아침에 오랑캐가 삼강(三江)의 옥재(屋材)들을 헐어서 뗏목을 만들어 가지고 물 흐름을 따라 내려오면 그들의 방장(方張)한 세력을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하니, 효종께서 이 말을 매우 절실(切實)하고 긴요(緊要)하게 여겼습니다. 이완의 말은 지금도 홀시(忽視)할 수 없습니다. 주상께서는 묘당(廟堂)에 물으십시요, 진실로 성을 쌓는 것이 편의(便宜)하다고 여기면 신은 금위영(禁衛營)의 물자(物資)와 인력(人力)으로 자당(自當)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니, 이는 민정중이 바야흐로 금위영의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금이 말하기를,“경의 말이 매우 옳으니 마땅히 여러 대신들로 더불어 함께 의논하겠다.”
하였다. 조사석(趙師錫)이 말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문수산성(文殊山城)도 쌓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대개 우리나라에서 문수산성은 마치 고구려(高句麗)의 백마산성(白馬山城)과 같습니다. 이제 만일 성(城)을 문수산(文殊山:甘肃张掖)에 쌓으면 곧 도로(道路)에 지장(支障)이 없어서 가히 강도(江都)에 전달(轉達)될 것입니다. 문수 산성도 함께 쌓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었다.
위는 숙종대기록인데 강도 즉 강화도에 축성하는 문제에서 숙종은 민정중(閔鼎重)·조사석(趙師錫)과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민정중은 숙종에게 강도(江都)에 축성하여도 장강상류를 막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다는 말이 있다면서 그래도 성을 축성하는 것이 대비책이라 하였고 숙종을 황명(皇明)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항상 오랑캐의 경보(警報:긴급한 사태를 알리는 통지 또는 신호)가 있어서 창졸간에 관문(關門)에 들어 닥쳐 황도(皇都)를 침노하더라도 성(城)을 의지하면 굳게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문장에서 황도가 장강 하류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게 하는 기록이다.
“오랑캐가 장강 상류에서 삼강(三江)의 옥재(屋材)들을 헐어서 뗏목을 만들어 가지고 물 흐름을 따라 내려오면 그들의 방장(方張)한 세력을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에서 삼강(三江)은 지금 감숙성 근원에 청해삼강원(青海三江源)과 사천삼강(四川三江)과 중경삼강(重庆三江)이 있어 그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조사석이 말하는 문수산성(文殊山城)도 지금에 감숙성(甘肃)장액(张掖)에 문수산이 있다.
青海三江 : 展开中国版图,您会发现,作为中华民族生命之源的长江、黄河与澜沧江都发源于同一片神秘的土地——青海三江源
四川三江 : 汶川三江生态旅游区位于阿坝藏羌自治州汶川县南部三江乡境内,西河、中河、黑石河在此汇合故称三江。景区总面积188平方公里,距成都仅9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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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권, 3년(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10월 7일(임진)
강화도에 모신 어진은 남전의 해당한 실에다 봉안하도록 하다
又敎曰: “沁都一區, 兩聖朝睿算攸在。 而樓櫓城池, 不幸爲洋匪所侵據。 至有御眞移奉之擧, 傷痛震迫。 安所止屆? 今其長江天塹, 有不足恃。 且殿宇亦入灰燼, 則還奉之禮, 極爲審愼。 謹遵國朝已行之例, 長寧殿不必重建, 移奉本仍爲奉安於南殿當室。”
또 전교하기를,“강화도(江華島) 한 섬은 두 선대 임금이 슬기로운 계책을 남긴 곳임에도 불구하고 누각과 성이 불행하게 양이(洋夷)의 침입을 받아 어진(御眞)을 이봉(移奉)하는 조치까지 취하게 되었다. 아프고 몹시 슬픈 마음은 어찌 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장강(長江)과 천연요새지도 더는 의지할 수 없게 되었으며 또 전우(殿宇:神佛를 모신집)도 불에 타 없어졌으니 도로 제자리에 어진(御眞:임금의 초상화나 사진)을 모셔가는 의식을 매우 신중하게 잘해야 할 것이다.
삼기 국조(國朝)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를 따라 장녕전(長寧殿)을 중건하여 이봉할 필요는 없으며 그냥 남전(南殿)의 해당한 실에 봉안(奉安)하라.”하였다.
병인양요가 지금 장강에서 벌어진 사건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글인데 고종은 병인양요로 인하여 어진(지금은 전하지 않는 어진인데 병인양요까지는 보존하였다고 보인다.)을 이봉조치까지 하였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장강과 천연요새지라고 하는 강화도를 더 이상 의지 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어진을 모시는 일에 이봉(移奉)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할 것을 전교하는 글이다.
병인양요:1866년(고종 3)에 대원군(大院君)의 천주교도학살과 탄압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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