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Amur 黑龍江)은 본디 아무(Amu Darya 阿木河)이다
[조선사연구회:최두환칼럼]06.12.23 13:30
지명이동 후 현재 아무르
지명이동 되기 전 아무르
우리는 력사를 배우면서 철석같이 믿는 것은 선생님에게서나, 교수님에게서 교실에서 얻은 지식이다. 그런데 그 지식이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진실에 바탕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시간의 축적된 분노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입만 열면 거짓말이 술술 나오며, 자기의 생각과 달리 하는 사람에게 삿대질하며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지 현상을 빚어냈다고 본다.
그런 참지 못하는 분노일지라도 정말 진실에서 바탕이 된 분출이라면 이내 동정심에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이기 때문에.
여기에 우리는 학교에서 공들여 배운 내용이 거짓으로 판박이 한 것을 아직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A를 B라 대치하고, C를 D로 대치하여 놓으면, 우리는 B와 D만을 인식하게 되고, A와 B의 본질을 구태여 알려고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귀찮다는 것이며, 결가만 알면 될 것을 시간낭비하면서, 정력을 허비하면서 그것을 캐어본들 그 결가가 말해주니 알 필요가 없다고 단정해버리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역서 우리는 철석같이 지도에 잘 그려져 있고, 그렇게 잘 알고 있고, 그렇게 상식적이며, 남들이 다 하는 객관적인 사실 하나를 보자.
러시아 극동 지역에 흑룡강(黑龍江)이 있다. 이 강을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르(Amur)”강[동경 110도에서 동경 140도까지 흐른다]이라고 한다.
도대체 이 “아무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그런데 파미르고원이 있는 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에서 아랄해로 들어가는 강이 있는데 그 강이 “아무 다리아(Amu Darya)[동경 75도에서 동경 55도까지 흐른다]이며, ”阿木河․阿姆河“라고 한다.
여기서 “아무르(Amur)”와 “아무(Amu)”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1) 李满住(?~1467) : 明代建州女真首领。祖父阿哈出(明赐名李思诚), 父释加奴(明赐名李显忠). 永乐元年(1403),明置建州卫,以阿哈出为指挥使。二十二年李满住得明廷许可,从辉发河凤州迁居婆猪江一带. 宣德元年(1426) 袭父职为建州卫都指挥佥事. 正统三年(1438)移居灶突山东浑河上游的苏子河流域. 五年, 建州左卫凡察童仓(董山)等 从朝鲜阿木河迁来与其一处居住. 七年, 明从建州左卫中析出建州右卫,形成建州三卫. 满住势力最强, 为建州诸卫之首. 同年为都督佥事, 十三年升都督同知. 他合建州三卫之力, 势力大增, 成为明朝和朝鲜的大患, 乘间寇掠无常. 景泰․天顺(1450~1464)间, 满住时而归顺明廷, 送还所虏人口, 赴京服罪, 岁时进贡; 时而阴纵抄掠, 假称达子, 寇钞辽东, 俘虏边民,杀伤官军, 蹂躏边境, 荼毒生灵. 成化三年(1467) 明约朝鲜共同出兵, 夹击建州卫. 九月斩杀李满住及其本古纳哈等, 余部逃散, 建州女真遭受严重挫折. 五年, 其孙完者秃袭职为都指挥佥事, 依前朝贡.[login.wiki.cn/wiki]
여기에 “리만주”가 1440년에 “조선의 아무하(阿木河)”에서 이사하여 와서 “건주위(建州衛)”에 살았다는 것이다. 이 리만주는 건주녀진의 두목으로서 조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이 “아무하”와 관련이 있는 사실을 또 보자.
(2) 女真族 : 永乐九年(1411年),阿哈出逝世,由其子释家奴袭官. 大约永乐十八年(1420年),释家奴去世,由其子李满住承袭,统辖建州卫. 因为凤州经常遭到蒙古的侵扰, 永乐二十年(1422年)九月, 建州左卫猛哥帖木儿向明廷请求迁往他地定居, 永乐帝敕谕准许复还朝鲜阿木河地面居住. 永乐二十一年(1423年), 猛哥帖木儿率部众回到朝鲜境内阿木河驻牧, 但是仍同明朝政府保持密切的臣属关系, 为明廷悉心任事. 宣德八年(1433年)十月, 猛哥帖木儿协同明军镇压杨木答兀叛乱遇害. 永乐二十年(1422年), 建州卫李满住也向明廷请求迁往别处安居. 永乐二十一(1423年)初, 明廷准许李满住迁往婆猪江多回坪等处居住. 永乐二十二年(1424年)四月, 李满住率部众到达婆猪江的西岸兀刺山南麓瓮村一带居住. 宣德八年(1433年)六月, 李满住因遭朝鲜侵袭, 由瓮村迁到兀刺山北的吾弥府(即辽宁省桓仁县古城子). 正统三年(1438年)初, 又率部迁徙到浑河上游, 六月又移住灶突山(即辽宁省新宾县烟筒山), 随之而来的还有他的叔父猛哥不花领有的毛怜卫. [www.hanminzu.com/bbs/dispbbs.asp]
이 사료에서 역시 녀진족의 뿌리는 위의 (1)에서와 마찬가지로 리만주의 할아버지 “아하추(阿哈出)”이라고 했으며, 역시 “朝鲜阿木河地面居住”[조선의 아무하(阿木河) 지역에 살았다]고 했다. 이때는 조선이 건국 된지 30년 정도 지난 시점이다. 그렇다면 이 “阿木河”의 “阿木”가 “Amur"이겠는가? 아니면 ”Amu"이겠는가?
아무래도 우리들이 알고 있는 상식에서는 만주가 한반도 북쪽에 있고, 건주 녀진도 마찬가지이므로, 이 “阿木河”는 누가 보더라도 “Amur”, 즉 통상 말하는 “흑룡강”이라 할 것이다.
알파벳트 “r” 하나의 차이가 지리적으로 최소한 40도의 공간을 벌여놓고 있다.
과연 그럴까?
(3) 芦林兽吼—以狮子为“贡献”之中西亚与明的交往: 在明代的对外关系中, 中西亚以狮子为“贡献”的交往显得格外的突出. 今阿富汗赫拉特市的“哈烈”城首开记录, 以后, 朱氏皇帝相继从今乌兹别克撒马尔罕市之“撒马儿罕”, 今伊朗设拉子市之“失刺思”․伊思法罕市之“亦思弗罕”․阿巴斯港市之“忽鲁谟厮”, 土耳其科尼亚市之“鲁迷”, 也门亚丁市之“阿丹”, 沙特阿拉伯麦加市之“天方”等国得到狮子. 狮子数量之多以及输入的频繁, 在中国中世纪的历史上名列前茅. 缘于亲眼目睹, 明代士人对于这种猛兽的外形․特征的描述,可谓亦细亦微․惟妙惟肖. 随着狮子“贡献”而带来的日益严重的财政和外事问题的出现, 永乐․宣德之际朝臣的歌颂变成了天顺․嘉靖期间朝臣的劝谏.
* 该狮子, 原先栖息于“迭里迷”城, 今乌兹别克苏尔汉河(Surhandar)省首府铁尔梅兹(Termez)市南“阿木河”, 今阿姆河亦喷赤河岸 … 陈诚․李暹《西域番国志·哈烈》:“狮子生于阿木河边芦林中. 初生时目闭, 七日方开.[engine.cqvip.com/content]
(4) 阿木河是李朝的境外河,李朝在史料中有明确记载。世宗十五年十月,辽东都指挥裴俊率领军马在猛哥帖木儿等保护下,往斡木河,招取杨木答兀管下人口。在斡木河地面遭杨木答兀等女真人的截杀。[王冬芳, “关于明代中朝边界形成的研究”『中国边疆史地研究』1997年 第3期; www.meet-greatwall.org/gwsd/wen/zcbj.htm]
위의 사료 (3)(4)는 사자(獅子)를 중국과 거래한 내용을 설명한 것이다. 명(明)나라 때에 중서(中西)아시아에 있는 아프가니스탄(阿富汗), 이란(伊朗), 터키(土耳其)에 그 사자가 서식지이며, 여기에 “阿木河”, 즉 “阿姆河”가 나온다. 그곳은 동경 110도 이 동쪽에 있는 만주가 아니라, 바로 동경 75도 이 서쪽에 있는 강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위의 사료 (1)(2)의 이만주가 있었다는 “阿木河”는 동경 110도 이동의 지역이 아니라, 동경 75도 이서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5) 以阿木河回回降民分赐诸王百官。『元史』[218.14.151.84/lishi/shiji/23yuanshi]
이런 사실에서 곧 “아무하(阿木河)=아무하(阿姆河)=아무(Amu)=아무르(Amur)”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이것은 본디 중앙아시아에 있는 “아무 다리아(Amu Darya)”를 동쪽으로 끌어와서 “아무르(Amur)”강이라고 붙이고, 거기다가 “흑룡강”이란 이름까지 덧붙여놓아 력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6) 세종실록 지리지/함길도/길주목/경원도호부편(서기 1454년) : “영가 사오리(英哥沙吾里)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백두산(白頭山)이 있는데, 산이 대개 3층으로 되었다. 꼭대기에 큰 못이 있으니,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豆滿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압록(鴨綠)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흑룡강(黑龍江)이 된다. 그 산에 사는 새와 짐승은 모두 흰빛이며, 산허리 이상은 모두 속돌[水泡石]로 되어 있다. 부(府)의 서쪽으로 80리에 오음회현(吾音會峴)이 있고, 25리에 대령(大嶺)이 있으니, 이름이 ‘청산(靑山)’이며, 그 서쪽으로 10리에 큰 산이 있으니, 이름이 ‘다갈산(多曷山)’이다. 부의 남쪽으로 35리에 굴포(堀浦)가 있고, 동쪽으로 5리쯤에 창기(倉基)가 있는데,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前朝]에서 북벌(北伐)을 할 때 조전(漕轉)하여 위수(委輸)하던 곳이라 한다.”
(편집자 주석: 흑룡강은 " 백두산에 비세우고, 흑룡강에 말 물먹이니" 라 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 유자광의 상소문 속에서도 보이는데, 또한 아목하(阿木河)와 같은 이름이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아목이(阿穆爾)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 같은 강을 말한다.)
이렇게《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를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사람까지도 [흑룡강(黑龍江)=아목하(阿木河)=아목이(阿穆爾)]라고 했는데, 아목하는 아무하, 아목이는 아무르이다. “木”을 “목”으로 발음할 것이 아니라, “木果”을 “모과” 또는 “무과”처럼하듯 “무[mu]”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조선의 지명은 두말할 것 없이 중앙아시아의 서쪽 지역에서 찾아야 될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명이 옮겨진 것은 지난날 “천산산맥”이 발음되는 “天山山脈”[동경 75도]과 “千山山脈“[동경 123도]의 이동과 같은 맥락이다.
(7)斡木河,也叫吾音会,女真语汉译,即今图们江右岸朝鲜境内的阿木河。建州卫人每次朝贡,常得到赏赐的丝织品,明朝派遣官员到这里巡抚时也常带去丝织品,这形成了所谓贡赏贸易。『明代通往东疆丝绸之路开原东陆路至朝鲜后门—开县作家网』; www.kzzj023.com/index/Article.asp
[알목하는 오음회라고도 하는데, 녀진어를 한어로 번역한 것이다. 즉 지금의 도문강 서쪽 언덕이 조선 경내의 아무하이다. 건주위 사람들은 매번 조공을 하였으며, 항상 견직물을 받아갔으며, 명조에서는 관원을 파견하여 이곳에서 순무할 때에도 항상 견직물을 가져갔다. 이것은 이른바 공상무역(貢賞貿易)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 사료는 사료 (6)에서 언급된 사실을 중국에서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지만, 그곳이 이제는 동경 110도 이동에서 찾을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알목하(斡木河)=오음회(吾音会)= 아무하(阿木河)]임을 알 수 있고, 이것이 아무르(阿穆爾)=흑룡강(黑龍江)=Amur=Amu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파미르고원에서 서쪽으로 흘러 아랄(Aral)해로 들어가는 이 아무하(阿木河․阿姆河․斡木河․吾音会․阿穆爾․黑龍江․Amur․Amu)는 참으로 많은 이름을 가졌으며, 많이도 변신을 거듭하여 끝내는 조선을 아시아대륙에서 동쪽 끝 반도로 밀어붙여 만들어 놓았다. 아니 창작하였다.
결국 아시아가 본디 조선이었음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고대조선과 근세조선의 갈림길의 시기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대의 살아있는 력사의 현장임을 알 수 있다. 살아있을 때 힘을 실어야 한다.
이런 력사는 아마도 서구렬강들이 그들의 력사나 문화가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폭력으로, 무력으로 협박하여 분해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 소양과 문화수준이 없는 사람들이 겉치레를 하여 고상한척 하면서 문화계에 뛰어들어 활동하는 사람을, 요즘의 유행어로는 “된장녀[젠장녀]”니, “고추남”이니 하지만, 본디 “부용풍아(附庸風雅)”라는 말이 있다. 이런 부용풍아로써 문화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 더더욱 부용풍아로써 력사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풍아(風雅)”의 문화 속에서 조선을 다시 세계에 빛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니까. [최두환]
'세계삼한역사 > 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시(古詩)로 보는 장강(長江) (0) | 2010.01.27 |
---|---|
장강(長江)은? (0) | 2010.01.25 |
서쪽변방[西邊]-위화도, 대마도 조선서쪽변방? (0) | 2009.12.23 |
파미르고원 (帕米尔高原;Pamir Mountains) (0) | 2009.12.19 |
세계주요地震리스트(1138~1910) (0) | 2009.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