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 비파호와 해동제국기에 나오는 비파호 http://blog.daum.net/han0114/17049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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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시대와 비파호
일본은 미스테리 같고 수수께끼 같은 나라이다.
그들의 역사 근거지가 어디인지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일본이란 나라의 역사적인 구성원 역시 아직까지 무엇인지도 뚜렷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러한 부분도 그들 작품의 결과이다.
삼한의 역사를 보면 신라 때부터 왜구가 나온다.
일본구성원을 기어코 따져본다면 대체적으로 남아시아 해안과 인도양과 동남아해양을 근거로 한 백제의 난민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대륙 주류에서 축출당한 비주류라고 보이고 그러한 비주류가 자연 발생적으로 해적이 되어 왜구 또는 해구라고 불리던 도적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왜구는 바다 해적만 아니라 육지에 출몰하던 도적떼일 수 있다.
그들은 근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시기 천동지변(天動地變)기를 발판으로 그들의 역사가 어느 날 갑자기 주류로 둔갑하고 포장되어 생성 된 것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지금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16세기 항해시대에 해적신분에서 서세 예수회원들과 자연스럽게 접촉되면서 점차적으로 조직화되었고 나름대로 정치집단화 하면서 왜구무사정치집단이란 조직이 완성 되었을 것이며 서세 예수회의 비호아래 전위대 역할을 자임하고 서세가 구축한 식민지 영역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세력화하면서 근세기 역사에서 비주류에서 주류로 떠올랐다고 보인다.
그들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라고 보이는데 대륙조선의 남부에 존재하였고 대륙조선의 흥쇠에 따라 이동하였을 것이고 이동경로는 아프리카동부에서 인도, 뱅골만, 말라카, 수마트라 자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륙남부 광동과 복건, 절강, 마지막으로 열도로 이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임진왜란은 인도남부, 동남아, 말라카, 뱅골에 속한 왜구들이 대륙조선을 반하고 포르투갈에 중용되어 준동한 것인데 결국 포르투갈을 등에 업은 왜구들은 대륙조선에 패퇴하여 포르투갈과 함께 대륙조선 영역에서 쫓겨났으며 이후 대신 네덜란드가 포르투갈 영역을 승계차지하고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인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왜구집단지에 수많은 난민이 양상 되어 혼란이 일자 새로 집권한 덕천가강(德川家康)은 예수회 포르투갈과 완전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패퇴한 전범인 풍신수길(豊臣秀吉)과 그 일당을 처단하여 대륙조선에 충성맹세 한 결과 덕천가강(德川家康)에게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란 작위가 내려짐과 함께 막부정부가 생성되고 왜구들을 양민으로 양성화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고 보인다.
대륙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울릉도와 독도에 있는 왜구들을 축출하여 더 이상 조선영역에 근접치 못하도록 하였으나 그 후 10년 되는해 덕천가강(德川家康)의 노력으로 마음을 돌린 대륙조선은 기유약조(1609)를 맺게 하였고 외교까지 재개되면서 왜관을 대륙양자강 이남지역 일부를 할양하여 설치 근거토록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러한 관계는 명치정권 이전까지 제한된 범위 안에서 교류가 허용 되었을 것이다.
그때부터를 에도강호시대라 하였을 것이다.
강호시대(江戶時代)라고 하는 에도시대(1603년~1867년)는 에도막부 즉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정권을 잡은 시기를 말하는데 대륙조선과 관계개선을 완료하고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작호와 함께 기유약조를 맺어 왜관을 세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면 그것을 강호에 막부를 열게 한 시기라 하여 에도시대 즉 강호시대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위 기록에서 나오는 강호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의 열도일까?
왜구무장 세력들이 동남아시아 아열대지방에서 점차 동쪽으로 이동해 들어가면서 지금 열도로 이동한 시기를 대체적으로 명치정권이 왜구무사집단들을 장악한 1872년 이후부터라고 여겨지는데 그 이전에는 대륙남부를 열도 이동 거점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추측도 그들이 완전하게 이동하였다고 보는 시기는 아니다.
왜구무사정치주도세력들이 완전하게 이동한 시기는 1945년 태평양전쟁으로 미국의 핵폭탄 맛을 본 이후 미국의 지휘아래 지금의 열도로 강제 이동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내용은 절대적이지 않겠지만 핵폭탄이 터진 곳이 지금 열도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가 아니라 대륙이었다는 루머가 있어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일이며 설령 그런일이 아니더라도 승전국인 미국 지휘아래 영역 질서가 지금처럼 비로소 정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호시대.
강호는 말 그대로 강과 호수 시대란 뜻이다.
강호(江戶) 즉 에도는 지금의 도쿄(東京)를 말한다고 했다.
혹 강호(江湖)를 강호(江戶)라고 바꾼 것은 아닌가?
워낙 바꾸고 고치고 조작하는데 명수들이니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왜 강(江) 옆에 호(湖)가 아닌 호(戶)를 붙였을까?
호(戶)는 일본사전에 ①문. ②집의 출입구. 대문. ③좁은 해협가 란 뜻으로 풀이된다.
강 입구, 강 출입구 이다.
강구, 호구이다.
[클릭원본]
또한 해동제국기 일본국본도를 보면 옛 수도 즉 도쿄는 지금의 고베 바로 위 내륙지역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도쿄는 그 위치에서 동쪽으로 많이 치우쳐 바다를 끼고 있어 아무리 보아도 일본국본도와 위치상 차이가 난다.
지금 열도 도쿄는 해동제국기 일본국본도의 수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의 역사에서 강호시대라 함은 바로 양자강 이남지역 대륙조선으로부터 할양받은 왜관 즉 몇 개 도시(?)와 연결된 호수가 있는 곳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한다.
대륙조선연구회 최두환 박사가 미국인 제임스 릴리(James R. Lilley)가 지은 책 아시아 비망록에 나타난 일본과 고베에 대하여 란 제목의 컬럼에서
키우키앙 이란 어딘가? 물음을 전제로
“키우키앙은 일본어의 발음이 아니다.
그 소리대로 적어보면, [kiukiang]→[chiuchiang]→[jiujiang]로 발음이 변화되는 지명일 것이다. 그곳은 양자강 유역에서 찾으면 九江(구강)이다.《규장 전운옥편》에서 그 발음을 찾아보면, 九:[규], 江: 水出岷山[걍]이며,《강희자전》에서 보면, 九: 擧有切, 己有切, 즉[규], 江: 古雙切, 즉[걍]이다. 그렇다면 키우키앙은 九江이며, 일본의 고베라고 불려 질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라 했고
고베(Kobe)란 무엇인가? 란 물음에서는 “왜 한자로 일본어에서는 神戶라고 할까? 그것은 임의로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ko)]는 [湖/后/後]에서 찾을 수 있고. [베(be)]는 [邊/口]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한자로 이루어진 지명은 九江 바로 동쪽 바로 파양호 북쪽 湖邊(호변) 또는 湖口(호구)가 된다. 실제 湖口란 지명은 파양호의 입구[鄱陽湖之口]로서 장강의 요새지[長江要塞地也]라고 했다. 바로 이곳이 일본의 고베였던 것이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강호시대 고베(神戶)는 대륙 호구(湖口)라는 말이다.
상당히 일이가 있는 이야기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곳을 일본인들이 거주지로 사용하였다고 단언 할 수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 에도막부정권이 정식으로 대륙조선의 허가를 받아 할양 받은 곳으로 풀이 할 수 있어진다.
그와 덧붙이고 싶은 사실 또 하나는 비파호(琵琶湖)와 석종산(石鐘山)이다.
석종산(石鐘山)은 호구에 있는 산인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장강요새지라 하여 “江湖锁钥”강호쇄약
石鐘山地理位置重要,号称“江湖锁钥”,历来为兵家必争之地
즉 자물쇠와 열쇄라 칭했다 한다.
매년 봄 고베시 차이나타운에서 열리는 남경(南京) 축제가 열린다는데 왜 하필 남경축제인가?
고베가 대륙호구 즉 군사요충지라고 하였는데 1853년 미 해군 동인도함대의 사령관 페리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우라가(浦賀)항에 들어가 개방을 요구하였다고 하지만 결국 일본으로 들어가는 군사요충지인 호구 이곳을 군작전상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라가라고 하고 있지만 고베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결국 1868년에 고베(湖口)가 개방하게 되었다.
영국은 1840년 아편전쟁을 통하여 광동 해구(海口)를 열게 하였고
즉 미국은 1853년 장강 입구(湖口)를 정리한 것이 된다.
다음은 비파호(琵琶湖)호다.
비파호는 지금 열도 시가현(滋賀縣)중앙부에 있는 일본 최대의 호수로서 면적 673.9km2,
길이 63.5km, 최대너비 22.lkm, 최대수심 103.6m 규모를 자랑하며 고베(神戶) 바로 위에 위치한 제일 큰 호수이다. 이 호수는 고베 북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대륙 호구(湖口)가 고베라고 할 때 호구(湖口)남쪽에 파양호(鄱阳湖)가 있다.
파양호(鄱阳湖)는 세계 7대 중요한 습지 중의 하나이자 중국에서 가장 큰 담수호이다.
송문산(松门山)을 경계하여 남북으로 갈라졌으며, 북쪽은 강물 입구이고 길이 40km,너비 3-5km, 가장 좁은 곳은 약 2.8km에 달하고 남쪽은 호수의 주요부분으로 길이 133km,너비 약 74km에 달한다. 파양호의 남북길이는 173km, 동서너비는 약 74km, 평균너비 16.9km, 해안선길이 1200km, 호수표면적 3283㎢,평균 물깊이 8.4m, 가장 깊은 곳은 25.1m 정도, 용적은 약 276억㎥에 달한다.
또한 당나라 때 파양호에 있었는데 중공정부가 1987년에 다시 중건하여 세웠다하는 비파정(琵琶亭)이 있다.
대륙 파양호의 비파정(琵琶亭)과 열도 고베 위 호수를 비파호(琵琶湖)라 명명한 것에서 아이로니컬하게도 비파(琵琶)가 똑같다. 고베에 남경가(南京街) 축제라든가 비파(琵琶)호 같은 것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귀속본능이라고 하는 심리적 상황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겐 비파란 명칭은 대륙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의미에 단어라고 생각된다.
어느 민족이든 어릴 때나 전에 살았던 곳, 그 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지상정(人之常情)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랐던 곳에 진한 향수(鄕愁)가 있다.
인간들에게 기억되고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문신과 같은 것이다.
오죽하면 향수병을 앓다 죽겠는가?
우리역시 대륙 땅을 그리며 축조한 마리산의 참성단(塹星壇) 역시 같은 이치에서 볼 수 있다.
비파정(琵琶亭)역시 우리사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만기요람에도 기록되어있다.
대륙조선 땅에 있었던 누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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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
이안눌(李安訥)의 집 : 낙선방 묵사동(墨寺洞)에 있는데, 비파정(琵琶亭) 위에 시단(詩壇)이 있다. ○ 위에 훈국(訓局) 군병들의 무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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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요람 군정편 2(軍政編二)
1808년에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 등이 왕명을 받들어 찬진(撰進)한 책
훈련도감(訓鍊都監)
연습(鍊習)
사습(私習) 마군과 보군의 각 부ㆍ사ㆍ초에서 1개월에 3차씩 실시하고, 10월에 가서 좌ㆍ우 마병과 좌ㆍ우부 이 각기 계획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를 뽑아서 한다.
○ 처음과 최종의 연습은 모두 비파정(琵琶亭 :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에서 기술을 시험하며, 중간 연습은 모화관(慕華館)에서 진법을 포열(布列)하며, 난후초ㆍ7색군ㆍ부ㆍ사의 취수는 3차를 모두 연미정(燕尾亭)에서 실시하고, 장막군은 가좌동(加佐洞)에서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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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륙사적을 다시 한 번 보아야 할 문제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백제인인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를 西文首와 東漢首로 부르면서 일본문화의 시조라고 떠받든다.
또한 공공연하게 스스로 渡來人이라 하면서 일본왕조가 백제부류라고까지 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일본이란 국명을 백제가 주었다하여 백제와 모든 역사적 배경을 깔고 모든 문화적 정체성을 백제로 부터 찾으려 하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조선인이라고 비하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수용하고 부둥켜안으려는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혼란스럽다.
이것은 일본인 스스로 삼한은 인정하지만 조선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무언가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 방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즉 한반도 역사가 조작 된 것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한반도 역사가 전반적으로 조작됨과 동시에 그 기조아래 일본역사가 동시에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역사적인 모든 구성면에서 보면 억지스러움이 산처럼 쌓였다.
의문을 제시 할 때 이유를 붙이거나 변명하는 예를 보면 전부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만들어 놓고 조작한 엉터리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무조건 밀어붙이기 우격다짐이다.
이러한 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이 진실이 아닌 조작과 거짓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 고치기는 이미 전력이 있고 이력이 나 있어 세계학계에서도 신뢰를 주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실체가 분명치 않고 근원도 없는 그들과 전혀 관계없을 일본이란 국명이 생성이 되었다. 동남아지역을 무대삼아 해적질로 떠돌던 왜구무사정치집단이 세력화 한 것임을 결코 속일 수가 없다.
마치 백제와 분리하면 존재 할 수 없을 것 같이 모든 역사에서 연관성을 엮어놓고 일본이란 존재를 나름대로 들어 내 세우려 한 것은 들어나지 않고 있는 백제역사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내용이 있을 법하고 그러한 기조위에 나름대로 철저한 계산아래 일본역사가 움직였을 가능성이 많다.
그들이 이처럼 역사문제에서 이율배반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백제란 역사자체가 진실을 찾을 수 없는 혼돈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혼돈도 그들의 음모를 바탕으로 한 얄팍한 계산에서 나온 결과이다.
미국이 일본을 강제적으로 열도에 집어넣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정말 미스테리고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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