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홍콩, 마카오, 상해 원래위치가 맞는가?

한부울 2009. 11. 14.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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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마카오, 상해 원래위치가 맞는가?

 

1.홍콩(영어:Hong Kong, 중국어:香港, 병음: Xianggang 한국어 한자음: 향항, 광둥어: Heūng gong)

2.마카오(포르투갈어: Macau, 중국어 간체: 澳门, 정체: 澳門, 병음: Aòmén 오문)

3.상하이(중국어:上海, 병음: Shanghai상해, 상하이어: /zɑ̃'he/ 쌍해, 의미:海之上洋)

 

홍콩(Hong Kong), 마카오(Macau), 상하이(Shanghai)는 대륙도시들 중 평소 많은 의문점을 낳고 있었던 도시들이다.

香港, 澳門, 上海

무엇인가 친숙하게 여겨지면서도 어떤 세력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고쳐지거나 만들어진 지명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漢文音은 지금처럼 북경표준어라고 하면서 이리저리 뒤 틀어놓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가 읽는 발음과 대체적으로 일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19세기 서양지도를 보면 지명음역(音譯)이 우리 발음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위 세지역은 자연스럽게 파생한 지명이 아니란 느낌이 있다.

홍콩(Hong Kong)이라는 음역(音譯)이 香港(향항)과 다르고

마카오(Macau)의 음역도 澳門(오문)과 다르며 오히려 마(馬)고, 마조 가 더 가깝다.

상하이(Shanghai)의 발음역시 상해(上海)의 서양식 발음이 아니다.

과거 역사를 접하다 보면 위 세 지역이 우리민족과 이상하게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옛 독립투사들의 행적인데 거의 다 홍콩, 마카오, 상해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영화를 보더라도 홍콩아가씨, 마카오신사, 상하이 눈, 상하이 박, 상하이의 밤,...기타등등 많다. 

그 외 지역에도 독립투사들이 있었겠지만 대체적으로 일본군과 일본 경찰의 독사같은 삼엄한 감시가 덜하다는 이유로 자유롭게 활동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이참에 독립이란 본 뜻이 무엇인가 잠시 짚어 생각 할 필요성도 있는 것 같다.

본래 우리 독립투사들은 대륙조선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분리하고 어지럽히는 서세와 일제를 대항한 동양문화적 자주적인 성질의 독립운동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제에게 묶이면서 궁극적으로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투사로 각인되었지만 기실 독립이라는 진정한 의미자체는 대륙조선을 서세로부터 구하고 새롭게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운동이었다고 본다.

그야말로 일제는 분수도 모른체 주제넘게 나섰고 서세 대리역을 자청하면서 어부지리를 취하였고 그 바람에 천지를 모르는 일본 개들이 아귀가 되어 설쳤던 것이 아닌가도 여겨진다.

때문에 그들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쳐되며 서세에 비일붙어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대륙조선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범죄행위가 정당화 되었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지금의 중공정부도 그렇지만 그 당시 국민당정부 역시 대륙조선의 부활운동을 반기지 않았다.

여기서 안의사 유체회수 이야기를 잠시해보자.

안타깝게도 여태까지 안중근의사 유체를 우리는 찾지 못하고 있다.

정확하게 안의사 유체가 어디에 있는지 위치조차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놓였다.

안의사는 일제가 서세에 비일붙어 대륙조선을 망하게 한 장본인이고 그것도 부족하여 감히 상국인 대륙조선을 통째로 삼켜버릴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울분하고 격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등박문을 대한(삼한)이름으로 척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영웅적인 행동은 화하족인 객가인 세력에겐 무조건 반가울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안의사를 홀대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겉으론 대일항쟁의 표본이라고 하면서 안의사를 치켜세우지만 속내는 다르다는 말이다.

다시 돌아가서..

처음에는 삼한과 서세의 전쟁에서 삼한이 패퇴 그 공간을 화하가 차지 하면서 나중에 삼한과 화하의 갈등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삼한의 잔존세력들이 한반도로 쫓겨 들어오면서부터 지명이 엉키게 된 것이다.

두고 온 지명들이 어떻게 변했을까?

찾아야 할 지명들은 많지만 대표적인 지명이 바로 부산, 제물포, 인천, 강화이고 원산이다.

대륙사적 문제에서 바라다 볼 때 우리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곳은 여기저기 많다.

그 중에서도 근세기때 관계설정을 깊이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홍콩, 마카오, 상해이다.

상해는 한문이 주는 뜻대로 해석한다면 분명 지금의 상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있다.

상해가 위상(上)에 바다해(海)이니 바로 해 위 상에 존재하여야 할 도시이다.

지금의 상해는 위치적으로 좌해(左海),서해(西海),구해(口海),하해(河海),하해(下海)라고 해야 맞다.

위키자료에 상해를  해지상양(海之上洋)이라 별칭했다고 한다.

현재 지명으로 상양(上洋)은 광둥성(广东省 阳江市 阳西县)에 상양진(上洋镇)이 위치한다.

상해(上海)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海之上洋” 바다의 상 또는 대양의 상 즉 큰바다 위쪽에 위치한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상해가 있어야 할 도시라면 지금 홍콩 즉 광주가 되어야 한다.

홍콩도 향항(香港)이 되어야 하는데 난데 없이 전혀 비슷하지 않는 홍콩으로 발음한다.

마카오역시 유럽풍이다.

서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지역에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 영국지역에 있었던 지명이 그래도 옮겨진 것이 아닐까?

오래되었다고 하는 사진자료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상해, 마카오, 홍콩이란 사실을 뒤받침한다고 단정하기가 어렵고 서세와 일제가 공모하여 역사재편짜기 과정에서 치밀하고 철저하게 바꿔치기한 결과로 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가 없다.

1888년 상해가 개항되기전에 찍은 오래된 사진자료가 존재한다면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역사재편짜기 과정의 일환으로 상해를 만들어 옮겨놓고 싶어 하는 지역을 미리 선정하고 사진을 찍어 상해라고 표시하면 상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사진을 무수히 현상하여 뿌려대면 본래지명과 상관 없이 자연스럽게 상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근세기에 사진한장, 지도한장 이렇게 만들어진 역사가 대중들의 눈을 속이며 정사로 취급되게 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금의 열도를 일본영토로 둔갑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설령 그곳이 다른 지명으로 불려 진 곳이라고 하여 뭇사람들이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기억은 결코 오래가질 못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러한 기억은 희미해지고 없어진다는 엄연한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860년이전까지 서양 지도를 보면 한반도에 제주, 부산, 인천, 강화, 원산 등 지명음역이 그대로 표기된 지도는 하나도 없다.

물론 그 이후 미국의 지도가 나오면서 이러한 점이 수정되어 발행되었다.

즉 한반도와 열도에 지명 심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 당시 역사지축을 흔들며 막강세에 있었던 서세라 할지라도 대상의 나라가 역사성이 깊어 오래된 지명이 존재한다면 당연히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 국제적인 범례이고 순리였음에도 1860년 이전 그들의 지도를 보면 한반도의 지명 모두가 그들식 표기였다.

그 당시 그들의 지명 명명방식은 뜻을 존중하는 전통적 동양식 명명방식과 다른 카우보이식 먼저 발견한자의 이름을 따 붙이는 몰상식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 지명의 고유 의미나 뜻을 파악하거나 추적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당연히 우리 말로 불려져야 할 지명이었지만 난해하여 불려질 수 없는 그들만의 표기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가 무주공산처럼 여겨졌다는 이야기다.

이런 지경이 였으니 그들의 발길이 닿은 대륙지명인들 어찌 온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항해시대라고 하면서 탐험적 업적을 내세우지만 그들이 활동한 근세기는 강탈의 시대이고 아귀같은 탐욕의 시대였다.

그러한 서세의 파고를 겪었던 마카오, 홍콩, 그리고 상해가 온전 할 수 없다.

어쩌면 마카오와 홍콩은 서세들의 강탈의 기지, 탐욕의 기지가 되어버린 인도근역, 특히 동남아 근해(말-)에 있어야 할 지명이 아닐까 한다.

상해역시 남지나해 해남 위 상(上) 지금 광주(홍콩)지역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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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上海, Shanghai: 海之上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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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부의 장강(長江)하구에 있는 도시이다.


1949년 상하이의 면적은 636km²였다. 1958년, 장쑤 성의 상하이(上海), 바오산(중국어 간체: 宝山), 자딩(嘉定), 쑹장(松江), 난후이(南匯), 칭푸(靑浦), 펑셴(奉賢), 충밍(崇明), 진산(金山), 촨샤(川沙) 10개현이 상하이에 편입되면서 상하이 시 직할구의 범위가 5910km²로 확대되었고, 2003년 말에 이르러 상하이 면적은 6340.5km²가 되었다.


역사


춘추시대에는 오나라의 동쪽지역에 속했으며, 전국시대에는 초나라에 속했다. 일찍이 초나라 춘신군(春申君)의 봉토였으며, 그 흔적은 현재 상하이를 관통하는 황푸 강(黃浦江)의 옛 명칭인 춘신강(春申江)과 상하이에 대한 약칭 중 하나인 선(申)에 남아 있다. 서기 4, 5세기 진나라 때 쑹장(松江)(지금의 쑤저우허(蘇州河))과 임해 일대의 주민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고, 대나무로 “후(扈)”라고 부르는 낚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또 당시 장강의 지류가 바다로 이어지는 곳을 “두(瀆)”라고 불렀기 때문에, 쑹장 하류일대(현재 쑤저우허와 황푸 강이 만나는 지대)를 “후두(扈瀆)”라고 불렀다. 후에 “후(扈)”를 “후(滬)”라고 부르게 되었다(이 또한 상하이의 약칭 중 하나이다). 상하이는 우쑹장(吳松江) 하류에 위치해 있어 “상하이푸(上海浦)”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당나라 중엽에는 화팅(華亭) 현의 일부였고, 송나라 말에 상하이 진(鎭)이 형성되었으며, 1292년 상하이 현(縣)이 되었다. 명나라가 흥성하던 1553년에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 성을 쌓았고, 난징(南京)지구 쑹장 부 관할이 되었다. 쑹장 부 관할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큰 면방의 중심지였다. 청대에는 명의 제도를 답습하여 장강 이남의 쑹장 부에 귀속시키고, 상하이 세관을 설립했다.


上海自南宋咸淳三年(公元1267年)设镇,嘉靖三十二年(公元1553年)筑城以来,至1842年鸦片战争后上海开埠,进而发展成为20世纪上叶东方首屈一指的国际都市,再到目前的再度勃兴。如同上海的大半地区都是从海洋变成陆地一样,上海的变迁也堪称“沧海桑田”的历史。在19世纪和20世纪,在上海曾经陆续发生过一系列影响到中国命运的重大政治事件。


史前文明


上海陆地形成于地质史的近期。6000多年前,上海市域内只有西部的青浦、松江、金山三地基本成陆。这些陆域都属于古太湖淤浅后形成的湖沼(特别是青浦、松江一带)与湖滨平原。从那时一直到中原的西周时代中后期,期间的陆地都形成得非常缓慢,距今3000年前,嘉定、闵行、奉贤三地的西部大部或局部形成。此时,包括市中心区在内其他区域仍处在海平面之下。


史前时期主要依靠考古发掘来了解当时的人类生活与文明发展。根据现有的考古成果,上海最早的文明是马家浜文化(距今6000年)。接着是嵩泽文化(据今5500年),2004年春季的青浦嵩泽文化墓葬考古发掘中,发现了上海最早的人类遗骸。然后是良渚文化(距今4200年),它的晚期已经相当发达,以玉器最为著名。马家浜-嵩泽-良诸文化,有着传承的关系。良诸文化已经到了原始社会的晚期。良渚文化衰亡得很快,衰落原因假说目前主要有:


1.洪水说;

2.发展受阻或遭受入侵说。


最后是马桥文化(距今3200年)。这种文化的出土文物较良诸文化相比,数量和质量都下降了,而且文化风格上更加受到闽江流域考古文化以和山东岳石文化(东夷)的影响。


值得注意的是,1999年,专家在松江的考古中发现了广富林文化,据近期研究[1]这是一个来自中原的人群,大约在距今4000年前到达了太湖流域,并在随后的几百年内渐渐融入当地而消失。


上海早期成陆地区的文明,作为江南地区文明有机整体的一部分,具有着一定的发展水平。由后来春秋时期的历史情况推测,在史前时期的末期,这些文明很可能已经逐渐地纳入南面的越或西面的吴这两个地区强权的势力范围,甚至某种程度的统治之下。


相关年代参考:夏(距今约4100年-3700年);商:(距今约3700年-3150年);西周:(距今约3150年-2850年)


东周至唐


上海春秋属吴国东境。战国时期,周元王三年(越王勾践二十四年,公元前473年),越国灭吴,上海地区属越。战国中期,楚灭越,又归属楚。楚考烈王十五年(公元前248年),战国四公子之一春申君黄歇受封于吴,上海属于其封地,贯穿现代上海的黄浦江也称春申江,故上海别称为“申”。


秦统一后,置会稽郡于吴县(治今江苏省苏州市)。今嘉定区西部属于娄县(治今江苏省昆山市东北),今松江县、青浦县及闵行区冈身以西地区在由拳县(治今浙江省嘉兴市南)境;今金山县及奉贤县冈身以西地区属海盐县(治今金山县张堰镇南)。


西汉初期,上海地区层分属于楚王韩信、荆王刘贾、吴王刘濞领地。两汉时期归属娄、由拳、海盐3县。三国两晋时期,上海地区分属吴郡娄、嘉兴、海盐3县。


南北朝时期建制变动平凡,上海地区均隶属于扬州。隋朝灭南朝陈,上海地区分属苏州和杭州。今嘉定区、青浦县大部、松江县西北部属昆山县。今松江县大部、金山县西北部、青浦西南等地属吴县。今金山县大部、奉贤县部分地区属盐官县。


到唐代中叶,今上海地区的农业、渔业和盐业已经有一定的发展,于天宝十年(751年)设立华亭县(县城即今松江区松江镇),属于苏州管辖,是上海地区建县之始。华亭县辖境约在上海地区吴淞江故道以南,川沙—惠南—大团一线以西地区。上海地区隶属昆山、华亭两县。


宋元


北宋初年,苏州南部分设秀州(州治在今浙江省嘉兴市),华亭县即归属改属秀州管辖。这时华亭县以东的海滩,已经成为重要盐场,“人烟浩穰,海舶辐揍”,商业日益发达。宋宣和元年(1119年),随着松江(吴淞江,即苏州河)航道重新疏浚,县城以北松江南岸的青龙镇发展成为繁华一时的商业中心(今青浦区境内)。据宋诗人梅尧臣在《青龙杂志》中记载,青龙镇有二十二桥、三十六坊,还有“三亭、七塔、十三寺,烟火万家”,时人誉称“小杭州”。但当年作为华亭一个海口的上海,仍然是个荒凉的渔村。到南宋末年,由于吴淞江上游的淤浅,青龙镇逐渐丧失了作为长江口良港的地位,而日趋萧条冷落。这时,贸易中心转移到华亭县东北部,青龙镇下游70公里处的一条小河上海浦的西侧,那里由渔村变成初具规模的小镇。南宋咸淳三年(1267年),正式设立上海镇,并派镇将驻守。


此后不久,蒙古军队攻入江南,南宋灭亡。1277年(至元十四年),元朝在上海镇设立市舶司,与广州、泉州、温州、杭州、庆元(宁波)、澉浦(海盐)合称全国七大市舶司。本埠市舶司的衙门设在后来的上海县署内,即今小东门内方浜中路以南的光启路上。同年,又将华亭县升格为松江府。


1292年(至元二十八年),元朝正式设立上海县,县治在今天上海市中心黄浦区(包括原南市区),隶属于松江府,这是上海建县的开始。


 

                                      中文版《几何原本》中的插图,利玛窦和徐光启


徐光启墓明代,上海地区大体上吴淞江(苏州河)以南归属南直隶松江府管辖,起初设有华亭县和上海县,后来增设了青浦县;吴淞江以北归属南直隶苏州府管辖,设有嘉定县及崇明县。


到了明代永乐年间(15世纪初),为了解决吴淞江长期淤积、通航不畅的问题,政府主持进行了一项称为“江浦合流”的大型水利工程,即拓宽黄浦江和吴淞江的下游,原来吴淞江的下游成为黄浦江的入海水道,而吴淞江则成为黄浦江的一条支流。从此以后,黄浦江成为这一地区主要的航运通道。


到弘治年间(1488年-1505年),上海县已经是“人物之盛、财赋之多,盖可当江北数郡,蔚然为东南名邑。”,县治形成5条主要街道:新衙巷、新路巷、薛巷、康衢巷、梅家巷[2],到嘉靖年间,县治的街坊已经增加到61个,形成纵横交错的道路网[3]。上海地区商肆酒楼林立。


上海设县后240多年中,一直没有城墙。直到1553年(嘉靖年间),为抵御倭寇,才赶工在2个月内修筑了椭圆形的上海城墙,全长4.5公里,高7米,开有6个城门,其中东面临黄浦江开3个城门:宝带门(俗名小东门)、朝宗门(大东门)、朝阳门(小南门),这3座城门和西面的仪凤门(老西门)都设有水门。城外开凿有宽约20米的护城河。城内与其他太湖流域城市一样,河网密布,街道大多临河而建。城内最主要的河道是直通大东门与老西门的肇嘉浜,东通黄浦江(在今外马路与复兴东路南面的白渡路口),西面可达松江府城。此外尚有方浜、薛家浜等。


明代,松江府辖境为全国最大的棉纺中心。

 

                               The walled city of Shanghai during the Ming Dynasty

 

清朝初期

 

                                                Shanghai in the Qing Dynasty


1685年康熙廿四年,于1683年光复台湾后,于上海设置关税司,分摊取代部份福建泉州关税司功能。清初,上海的行政区又进行了沿革,逐步形成了今天上海的规模。清朝沿袭明制归属江南省松江府,设江海关。


晚清时期


鸦片战争


在鸦片战争后期,1842年,英国军队曾经占领了上海,然后沿长江西进,夺取京杭大运河与长江交汇处的镇江,切断清朝政府来自南方的财源,迫使道光皇帝同意谈判。1842年8月29日,中英《南京条约》在南京签订,规定除原有的广州口岸外,新开辟上海、宁波、福州、厦门四处为对外通商口岸(简称“五口通商”),允许英国侨民前去居住、经商(后来又有10多个国家陆续取得此项权利)。


开埠初期(1843年-1853年

 

No. 4 of Hundred Thousand Scenes (十萬圖之四). Painting by Ren Xiong, a pioneer of the Shanghai School of Chinese art; ca. 1850

 

1842년 8월에는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은 굴욕적이고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하였고, 1843년 10월에 후먼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인의 주거지와 임대조건에 대하여 합의하여 상하이 시내에 거주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1843년 11월 14일 첫 번째 영국 영사인 죠지 발푸어가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11월 17일에 정식으로 상하이의 개항을 선포하였다. 이후 100년 동안 상하이에 조계지가 존재하게 되었다.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에 중국과 영국 사이에 체결된 난징조약(南京條約)에 따라 상하이는 1843년 중국의 5개 대외 무역항 중 하나로써 개항되었고, 영국과 미국, 프랑스는 계속해서 상하이에 거류지를 형성했다.


今日的徐家汇天主教堂上海开埠:1843年11月17日,首任英国驻沪领事巴富尔抵达上海到任,标志上海正式开埠。当年从广东来了最早的一批英国洋行:怡和洋行、宝顺洋行、和记洋行等,他们发现上海是五口中最靠近丝绸和茶叶产地的一个港口,看好它的发展前景。当时中国主要的供出口的生丝是产于浙江省湖州南浔镇附近的辑里丝,从南浔到上海的内河航运极为便利。英国领事和上海道台经过协商以后,划给英国商人经商居住的地段是县城以北的黄浦江西岸,从洋泾浜(1916年填没成为爱多亚路,即今延安东路)向北到李家庄(今北京东路)的一片荒滩——外滩,不久,沿着江边供纤夫拉纤的泥泞的道路旁,建成了最初的一批洋行建筑,一般为2层外廊式建筑。李家庄以北到苏州河的地块上则建起了英国领事馆。在上海开埠的第一年,除了商人和领事以外,1843年,属于伦敦会的英国传教士也迅速进入上海。


英租界:清朝政府希望根据以往在广州的惯例,在上海也同样实行华洋隔离居住的政策,于是在1845年11月29日,由上海道台和英国驻沪领事共同商定了第一次土地章程(也称“地皮章程”)。这份土地章程被视为上海租界存在和运作的依据法理。次年,在上海的英国侨民成立了自治机构——道路码头委员会,并修筑界路(今河南中路)以明确租界的西部界限。上海开埠初期,英租界内严格实行华洋分居,界内只有少数世居此地的中国农民,英美等外国侨民共有约300人,其中绝大部分是英国人。界内修筑成方格形的道路网。 


青浦教案与英租界的第一次扩展:1848年,伦敦会的英国传教士前往青浦县传教,引起纠纷。作为补偿,11月27日,英租界第一次扩充,西界从界路(河南中路)扩充至周泾浜(今西藏路),面积也相应扩展到2800多亩。 


美国人进入上海:1844年,中美《望厦条约》签订,内容参照了中英《南京条约》。此后,美国的传教士和商人也开始前来上海。与英国侨民以商人为主不同,美国侨民中传教士的比重较高,包括1845年来到上海的美国圣公会、1847年来到上海的美南浸信会、1848年来沪的美南监理会、1850年来沪的美北长老会等。由于传教士的目的是向中国居民传教,所以他们并不聚居在租界,而是分散居住在县城内外的各个角落,如美南浸信会的晏马太立足于老北门外护城河边,美南监理会立足于不远处的郑家木桥,美北长老会立足于大南门外。美国圣公会在城内立足后,1848年,主教文惠廉又请求上海地方官府允许美国侨民在虹口开辟租界,但并未正式划定界限。上海开埠初期,虹口美国租界由于有苏州河的阻隔,甚为荒凉,只在江边建成少数的船坞、码头,和为水手们服务的娱乐场所。1846年,第一名美国商人吴利国(Ltentry G.Wolcott)进入上海,被委任为代理领事,在英租界九江路自己的洋行升起美国国旗,这是租界内第一面升起的外国国旗(当时英国领事馆还设在上海县城内),此事引发了英国领事的干涉。此后,绝大多数美国洋行都设在苏州河以南的英租界内。19世纪美国在上海最著名的商业机构是旗昌洋行。


开辟法租界:1844年10月,中法《黄埔条约》签订。1848年,法国领事开始驻扎上海。1849年4月6日,上海道台宣布将紧邻县城北门外,北到洋泾浜的986亩土地辟为法租界。不过,法国来华经商的商人始终寥寥可数。因此,开埠初期的法租界虽然拥有良好的区位条件,却几乎没有什么开发。只在江边有一两个法国的洋行(主要经营瑞士钟表),法国领事馆寄居在天主教会的一处中国式平房内(四川南路),县城北门外的小街上(河南南路)有两排中国人的房屋。其他地方则仍然保持着乡村本色。 


耶稣会开辟徐家汇教会区:与之相比,来自法国的天主教传教机构则显得相当庞大。耶稣会早在上海开埠之前的1842年,鸦片战争尚未结束时,就已经秘密潜入上海附近浦东、松江等地的乡村。1847年,他们选中上海西郊的村庄徐家汇建立江南传教区的总部,此后在附近地段陆续建成包括大、小男修道院,2所女修道院(拯亡会和圣衣会),藏书楼,气象台,土山湾印书馆,男子中学,女子中学,育婴堂等数十个教会机构,形成一大片教会区。以此为基地,将教务开展到江苏、安徽2省。1851年建立了一座公用的中型教堂圣依纳爵座堂,外形属于希腊风格,可能是中国第一所西式教堂。教堂以耶稣会的创始人依纳爵命名


上海租界形成国中之国


上海1850年代和上海1860年代


1854년 태평천국전쟁 중에 자치행정기구를 설립하면서 공식적으로 청나라 정부의 행정과 사법관할권 밖의 독립된 조계지가 되었다. 그 후에, 상하이는 2개의 상하이 조계지와 중국지방정부가 분할 관리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상하이 황푸 구(黃浦區), 징안 구(靜安區), 훙커우 구(虹口區), 양푸 구(楊浦區)는 상하이 공동 조계였고, 창닝 구(長寧區)는 상하이 공동 조계 밖에 구역이었다. 또 루완 구(盧灣區)와 쉬후이 구(徐匯區)는 프랑스의 조계지였다.


자베이 구(閘北區)와 난스 구(南市區)는 중국이 관리하던 지역이었으나 조계 때문에 연결할 수 없는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개항 후 상하이는 극동에서 가장 번창한 항구로써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시아의 유일한 국제도시로 발전하였다. 상하이는 조계 때문에 전화가 미치지 않았고, 독립적인 위치에서 충분한 국제관계를 향유할 수 있었고, 이것이 근대 상하이의 번영을 가져왔다.


小刀会起义:1853年9月7日,活跃于广东和福建籍水手中间的秘密会社小刀会发动起义,占领上海县城,烧毁了上海县衙和海关等处,杀了上海知县,囚禁了上海道台。1855年2月17日,小刀会退出上海县城。 


泥城之战:1853年3月,太平天国占领南京。4月12日,上海租界内的外国人迅速做出反应。在英、法、美三国领事的倡导下,召开上海租地西人大会,通过由侨民组织万国商团(义勇队)的决议,实行武装中立,以维护租界的安全。1854年4月4日,清军企图通过租界进攻占领县城的小刀会起义军,万国商团在英、美海军的协助下以武力强行阻止清军过界,史称泥城之战。 


工部局成立:1854年7月11日,上海外国租地人举行大会,通过第二次土地章程,成立独立的市政机构——工部局,建立警察武装。

  

太平天国东进对上海的影响:1860年8月17日,太平天国军队首次攻打上海。1862年1月11日,太平天国军队第二次攻打上海。1862年8月,太平天国起义军第三次攻打上海;太平军仅攻至今日城隍庙及石库门一带即攻击受阻,无功退返。 


法租界自设公董局:1862年5月1日,上海法租界公董局成立 为了保全上海法租界的独立性,法国驻沪领事爱棠宣布法租界退出工部局,代之以上海法租界公董局。


英美租界合并:1862年11月,在沪外国商人提出将上海开辟为自由市的计划,不受制于任何国家。此项计划由各国领事报呈各国驻中国的公使,最后被各国公使以不得干涉中国内政为由驳回。1863年9月21日,美租界与英租界正式宣布合并。 


成立会审公廨:1864年5月1日,上海会审公廨成立。1869年,洋泾浜设官会审章程公布。 


근대

 

                                                       1888년 개항된 상하이


1912년 중화민국 성립전후에는 청나라의 구세력이 아직 철저히 제거되지 않았고, 새로운 세력조차 미숙한 상태였다. 중앙에서 지방까지 군인이 정권을 잡았고, 정부와 사회는 무질서하고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그 시기에도 상하이의 조계는 평화로웠고, 경제와 인구 등 각 방면에서 오히려 빠른 발전을 보였다. 1912년부터 1936년까지를 상하이 조계지가 번영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중화민국 초년에 조계 외에 자베이와 난스 지역은 장쑤 성에 포함되었다. 1927년 중화민국정부는 조계지 이외의 지역을 상하이 특별시를 세우고, 중화민국과 행정원을 직속 관할로 귀속시켰다. 동시에 장쑤 성의 상하이 현(上海縣)과 바오산 현(寶山縣)의 17개 도시를 편입했다. 1930년 7월 상하이 시로 개칭했다.


20세기 초, 상하이에는 중국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사건이 계속 발생한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 대회가 상하이에서 개최되었으며, 이것으로 인해 중국공산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어 1922년 7월과 1925년 1월 중국 2대와 4대 대표대회가 개최된다. 1925년 5월 30일, 일본계 방적공장의 공장주가 파업노동자를 총살했고, 이에 상하이 학생과 시민들은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가인 난징루(南京路)에 모여서 항의를 했다. 이에 대한 영국경찰의 발포로 오삼십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전국적인 반영(反英)운동을 야기했다.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자베이에서 4·12 사건(四·一二事件)이 발생했다. 국민혁명군이 노동자 규찰대에 대해 무장해제를 강행하여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중국공산당은 분열되었다. 그 후에도 중국공산당(1921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비밀리에 성립)의 중앙기관은 공동 조계 중립구역인 윈난루(雲南路)에 숨어 있다가 1933년 강서 해방구가 안정된 후에 그곳으로 옮겨왔다.


1932년 1월 28일 일본이 중국동북에서 일으킨 만주사변(九一八事變)후에, 상하이에서 일본 승려가 중국 노동자에게 구타당한 것을 구실로 제1차 상하이사변을 일으켰다. 상하이 자베이 구에서 중국과 일본 양국의 격렬한 군사 충돌이 한 달 남짓 계속되었고, 국민정부가 잠시 낙양으로 옮겨가기까지 했다. 1937년 8월 13일에 장중정(蒋中正)이 중국군 70만 명을 동원하여 상하이 부근에서 일본군과 대전을 치른다. 이 중일전쟁(제2차 상하이사변)에서 중국군은 큰 대가를 치렀지만 끝내 일본군에 패하고, 일본군이 무력으로 상하이 조계 외의 지역을 점령한다. 이 기간에 상하이 공동 조계의 북쪽 절반, 즉 지금의 훙커우 구와 양푸 구는 일본군의 방어지역과 일본 세력의 범위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조계시대의 끝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상하이 조계를 공격했고, 상하이는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다. 후에 일본은 조계를 그를 돕던 왕징웨이(汪精卫) 정권에 반환했고, 미국과 영국도 조계지를 포기했다. 1942년부터 조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서 100년간 지속되던 조계시대는 끝이 났다.


1945년 상하이는 중화민국이 점령하여 관할하게 되었고 1949년 5월까지 상하이는 국민정부가 통치하였다. 그 후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국군과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 사이에 대규모 내전이 발생한다. 1949년 5월 28일, 인민해방군이 국군을 패배시킨 후 상하이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 기간에 국민정부와 중국국민당, 외국기관, 그와 관련된 많은 인원과 재산이 상하이를 떠났다.


한국의 독립운동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까닭에 독립지사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고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설립되었다.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진 것도 상하이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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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문(澳門 :Ma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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澳门(收听:普通话读音、粤语发音、葡萄牙语发音),全称中华人民共和国澳门特别行政区(葡萄牙文:Região Administrativa Especial de Macau da República Popular da China)简称中国澳门


마카오에 포르투갈인이 도래하여, 중국의 명왕조의 교역에 나서는 것은 16 세기 초 1513년의 일이다. 당초는 동남아시아의 식민지에서 중국 근해에 래항하고 있던 포르투갈인은 마카오에 거류지를 확보하여 중국이나 일본에 대한 무역 거점으로 삼았다. 마카오는 또 일본이나 중국에 대한 카톨릭교회의 포교의 거점이기도 하여, 일본의 禁教 후 마테오·리치등의 예수회 선교사를 북경에 보냈다.


「1557년 포르투갈령 마카오 식민지 성립」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잘못, 혹은 사실을 현혹한 것이다. 실제로는 포르투갈은 이 해에 명왕조로부터 후기 왜구토벌에 대한 명에 협력한 것으로서 마카오의 영구 거류권을 인정받은데 지나지 않는다. 명 과 청의 시대를 통해서 마카오는 중국에서 영토주권을 가졌고 중국의 해관이 설치되어 중국관리가 마카오에 자유롭게 출입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측의 행정기구로서는, 인도 副王이 관리하는 포르투갈령 인도에 속하여 카피탄·몰(Capitao Mor)이 책임자였다. 1583년에 시(cidade)에 승격하고, 다음 해에는 의회가 설치 승인되었다. 카톨릭의 포교구는 1579년에 마카오주교구가 독립했다. 후술과 같이 중국과 일본 중계무역의 거점으로서 번영했던 것으로서 유명하지만,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에의 무역·포교에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17 세기의 명, 청 교대기에 청이 대만의 鄭氏政権 대책으로서 遷界令을 발해 무역을 금지하였고 일본역시 쇄국하여 포르투갈 배를 내쫓았기 때문에, 이시기에 마카오는 몰락했다. 그 후 정씨가 청에 항복하자)무역은 재개된다.


천계령이란 청(淸)나라 초기에 연해의 경계를 정하고 이것을 역내(域內)로 옮긴다는 뜻으로, 소위 해금(海禁)을 더욱 강화한 해금령(海禁令)으로서 목적은 해상권을 장악이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의 행정권을 중국인 관리로부터 탈취하여, 완전하게 식민지화한 것은 1849년의 일로, 아편전쟁에 의해 영국이 홍콩식민지를 획득하는데 자극된 것이었다. 그 후 1862년이 되어 처음으로 중국도 마카오에 포르투갈 통치권을 인정하여 1887년에 우호통상조약을 체결 마카오를 제3국에 양도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영구적으로 점유하는 것을 승인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포르투갈이 얻은 것은 어디까지나 통치권뿐이라 마카오의 주권은 중국 측에 있던 점이다. 이때부터,「마카오는 사실상 포르투갈령이 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이때 주체는 분명 대륙조선이다.


제2세계대전에서는 포르투갈이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마카오는 동아시아에서의 중립항이 되어 경제적으로는 번영했지만 중국인의 난민들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전후의 1951년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해외 현으로 하여, 포르투갈계 주민지배로 식민지 지배를 계속하려고 했지만, 1966년에 중국계 주민에 의한 반포르투갈 투쟁(마카오 폭동)이 일어났다.


마카오 폭동이후, 중국 측에서의 영향력과 반환압력이 높아지는 중, 1974년에 포르투갈 본국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 정권 교체가 실현, 좌파계의 신정권은 해외 식민지의 방폐를 선언했다. 1976년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해외 현으로부터 특별령으로 고쳐 입법회를 설치하는 등 행정에 있어서의 본국으로부터의 대폭적인 독립성을 인정했다.


1979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포르투갈의 국교가 수립될 시즘에 마카오의 본래의 주권이 중국에 있음이 확인되었다. 1986년부터, 중국이 영국과의 사이에 진행하는 홍콩반환 교섭과 평행하여 마카오 반환 교섭이 개시되었고 다음 1987년, 양국은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1999년에 행정권이 중국에 반환되는 것에 서명했다.


마카오에는, 마카오 기본법을 실질상의 헌법으로서 운용하는 1국2제도가 적용되어 포르투갈에서 계승한 현행의 사회제도를 반환 후 50년에 걸쳐 유지하게 하였다. 반환은 1999년 12월 20일에 실현, 마카오는 중국의 특별 행정구가 되었다.[위키일본]


澳门历史是指澳门的发展史,介绍由史前时期到2000年代澳门的历史。


葡萄牙占领前

 

                                                           1639年的澳门地图


1970年代共四次派出考古工作队,在路环黑沙公园等地发现了石器,时间约为新石器时代至西周时期,并将澳门出土的彩陶与内陆地区所出土的文物比较,更显示与邻近地区的文物属相同的文化系统,源自长江流域的大溪文化。1995年,香港中文大学和澳门大学师生在路环所挖掘出的完整工作坊,初步断定为三至四千年前的古迹。根据这些出土文物,一致显示中华民族的祖先乃是最先在澳门地区一带活动和稳定地居留。


自古以来,澳门一直是中华民族居住之地,古称濠镜澳,与香山的历史关系极其密切。早在春秋战国时期,香山已属百粤海屿之地。秦始皇统一中国时,澳门就正式纳入中国版图,属南海郡地的番禺县。到晋朝元熙2年(420年),澳门属新会郡封乐县地。而其后隋朝开皇10年(公元590年),香山由东官郡改属宝安县地。自南宋开始,澳门属香山县。据史料记载,宋末名将张世杰与军队曾在此一带驻扎;宋幼主赵昺于1279年在澳门海域里淹死。早期在澳门定居的人在此形成小村落,倚靠捕鱼与务农种植为生。


葡萄牙占领


鸦片战争前

 

                                               19世纪画家钱纳利笔下的圣保禄学院


15世纪和16世纪是地理大发现时期,葡萄牙的黄金年代。葡萄牙人欲在中国建立一个殖民据点,以“佛朗机”(Frank)之名,经过多次对中国的调查,选定了屯门,并在1517年入侵屯门,占领了一段时间后被中国取回。葡萄牙人欲在漳州建立据点失败而回,转回广东珠江口外活动,后来退至澳门。葡萄牙人正式在澳门定居的时间,古书众说纷纷,大约是在1553年左右,以船遇风暴,货物被水浸湿为由要求濠镜借地凉晒货物,官员一口答应,自此便赖著不走。当时葡萄牙人与受贿的中国官员汪柏签定密约,把佛朗机改称为葡都丽加,以混淆人民视听。这密约是口头协议,不是书面条约。1554年明政批准汪柏的请求,允许葡萄牙人在广东沿海进行贸易,条件是每年须向明政府进贡[2]。当时葡萄牙人已开始在澳门进行贸易和修建洋房居住。当时明朝实行闭关锁国的政策,所以传教士未能获准进入中国传教前,都停留在澳门。1583年,利玛窦与罗明坚神父获准入居广东活动,同年亦成立了澳门议事会进行葡萄牙社区的自治管理。

 

               Macau and its position in Portuguese and Spanish global trade routes

 

만약 포르투갈이 마카오까지 들어 갈 수 있었다면 동남아반도 강수로나 육지를 타고 들어 갔을 가능성이 많다. 동남아 해역에서 필리핀 이동(以東) 포모사(Formosa)까지 들어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스페인이 동시대에 필린핀을 점령했다면 오히려 스페인이 먼저 동지나해에 들어 갔을 가능성이 더 크고 일찍부터 열도에 일본이 실제 존재했다면 스페인은 네덜란드보다 먼저 일본과 연결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열도 나카사키는 1870년 이후 옮겨진 것이고 네덜란드 무역선이 들락거리던 나카사키는 네덜란드의 점령지인 동남아에 위치하여야 맞다. 여러말 할 것 없이 열도 나카사키 가까이에 네덜란드의 영역 즉 점령지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 곳에 나카사키가 위치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The mission of the Jesuits used Macau as a point of departure & formation during 16th century

 

  Ruins of St. Paul's, the façade of what was originally the Cathedral of St. Paul built in 1602.

明政府早期对葡萄牙人严格管治,葡萄牙人不能买卖土地、每年需缴付500两白银予明政府及其后的清政府为地租、房屋修建虽经过明政府批准,甚至摧毁葡萄牙人自行修建的城墙,限定只能居住在澳门南方,由果亚亲王管辖。到1616年,葡萄牙任命卡洛告为澳门总督,但并没有到任。直至1623年,葡萄牙任命马士加路也为另一任澳督,并正式到澳门到任就职,由于最初只负责澳门防务,因此其官邸设于大炮台。1640年当葡萄牙摆脱西班牙统治后,因澳门未曾投降于西班牙,于是被授“天主圣名之城”(Cidade do Nome de Deus)的称号。


清政府沿用明制,继续行使在澳门的主权和治权。1685年成立粤海关,执行在澳门的关税主权。1743年发生澳门葡萄牙人杀害中国商人事件,1748年又有另一名中国人遇害。事后制定了12条治澳法令,要求葡方严格遵守。1783年4月4日葡萄牙海事暨海外部部长以葡萄牙女王名义发布《王室制诰》后,议事会逐渐失去其大部分权力,而作为葡萄牙国家代表的澳门总督的权力则不断扩充膨胀。


完全占据及扩张时期

 

                                                       葡属澳门徽章(1935-1951)


1840年,第一次鸦片战争爆发之后,英国战船驶至澳门关闸,强行登陆,香山的清朝驻军曾作勉强抵抗。1842年清政府与英国签订《南京条约》割让香港后,完全暴露清政府的弱点,葡萄牙派代表与清朝钦差大臣爱新觉罗耆英谈判,要求豁免地租银,可享有条约中五口通商的权利,葡萄牙军队可以驻防澳门半岛。可是到最后除了五口通商外,其它要求一一被拒,继续维护中国在澳门的主权。1845年11月20日,葡萄牙女王玛丽亚二世单方面宣布澳门为自由港,除容许外国商船停泊进行贸易活动外,更拒绝向清朝政府缴付地租银。1846年4月澳督亚马留上任后,随即推行一系列殖民统治政策。1846年5月,亚马留宣布对澳门华籍居民征收地租、人头税和不动产税,把只对葡萄牙居民实行的统治权,扩大到华籍居民,又下令所有停泊在澳门的中国船只都对向理船厅登记交税。其后从1849年开始,亚马留更停止向清政府缴付地租银,并限令中国海关撤出澳门,又派兵入侵望厦村,强迫村民搬迁祖宗坟墓,服从的付洋银,不服从的挖掘后把骸骨投入海中。亚马留在澳门的所作所为激起人民反抗,沈志亮等7人杀死亚马留,葡方为报复,率兵入侵望厦村。1851年,葡萄牙占领氹仔。1864年,葡萄牙再占领路环。1883年,葡萄牙再占领望厦、青洲。1887年,清政府与葡萄牙先后签订《中葡会议草约》和《中葡和好通商条约》,条约列明葡萄牙有权“永驻管理澳门”。

 

     Macau in 19th century; Vue générale de Macau painted by Auguste Borget (1808-1877)

 

                                                             Macau, ca. 1870

1922年发生了捷成事件,暴露了殖民统治者的真面目,宣布军队可任意开枪、捕人和强迫店铺供应货物,宣布68个工会为非法团体,使当时澳门人口由不足十万人一度减少至只有两万余人,虽然随后几年大部份居民逐渐回流返澳门,但澳门工运仍然受滞达20年。


1517년 - 포르투갈인 광동 래항. 

1535년 - 명왕조, 香山県濠鏡(마카오)에 市舶司를 설치. 

1557년 - 포르투갈, 마카오에 영구 거류권 획득. 

1580년 - 스페인 국왕 Felipe II, (1527.5.21-1598.9.13)가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 

1582년 - 마카오, Felipe I에의 충성을 선언, 이후 마카오 - 마닐라무역 시작된다. 

1583년 - 마카오 시정의회 설치. 

1586년 - 포르투갈 국왕, 마카오의 자치도시 자격승인. 

1603년 - 네덜란드 함, 마카오로부터 고아(Goa)로 향하는 산타·카타리나호 나포. 

1613년 - 최초의 마카오 총독 임명. 

1622년 - 네덜란드 함대, 마카오를 공격하여 팽호제도(澎湖諸島)로 변한다. 

1638년 - 일본, 포르투갈 배 래항 금지. 

1640년 - 포르투갈, 스페인지배로부터 이탈. 마닐라 무역정지. 

1647년 - 포르투갈 사절 나가사키에 래항, 무역 재개를 바라지만 거절. 

1650년 - 청군廣州 입성. 

1662년 - 淸朝, 遷海令발포, 마카오의 무역을 금지한다(1664년). 

1670년 - 포르투갈 사절, 북경에 조공(강희제)

1685년 - 淸朝, 대외 무역을 재개. 

1685년 - 포르투갈 배, 일본인 표류민을 나가사키에 반환하지만, 무역재개는 거부된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에 대한 계속되는 조선의 감시가 있어서가 아닌가 한다.

만약 명과 청이 조선이 아니라면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선 입장이니 무역을 재개해도 관계없었을 것이다.


1727년 - 포르투갈 사절, 북경조공(옹정제) 

1753년 - 포르투갈 사절, 북경조공(건륭제)


위키일본 자료를 보면 유독 청을 앞세우는 면이 많다.

청을 앞 세운다기 보다 만들어놓은 황제들을 앞세우는 느낌이 많이 든다.


1808년 - 나폴레옹 전쟁 중 영국함대가 마카오를 보호아래 두기위하여 래항하지만 청의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거절한다.


여기서 영국은 대륙조선에게 이빨을 깨문 것이다.

  

1849년 - 포르투갈, 마카오 독립을 선언, 마카오 총독 Ferreira do Amaral 암살.

 

1848로 Parliamentary 마카오총독에 지명되었다, 거기서 그는 중국 거주자에 의해 중국정부의 종용에 대비하여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과세하기 위해 중상하게 되면서 살해되었다.


1851년 - 포르투갈, 타이파섬(Taipa, 氹仔島)을 점령.


타이파 섬(Taipa, 氹仔島)는 마카오를 구성하는 가운데 가장 작은 섬이다


1862년 - 텐진조약으로 중국, 마카오가 포르투갈식민지인 사실을 승인. 

1864년 - 포르투갈, 코로아네섬을 점령. (Coloane, 路環 古稱 鹽灣、鹽灶灣, 九澳島)

1941년 - 태평양전쟁 발발, 마카오 중립항으로서 번영. 

1943년 - 일본군, 마카오를 보호령 화. 

1949년 - 중화 인민 공화국 성립. 

1966년 - 마카오 폭동. 

1974년 - 포르투갈 본국에서 카네이션혁명, 해외식민지 방폐 선언. 

1979년 - 중국·포르투갈 외교관계 수립. 

1980년 - 마카오 총독 북경방문. 

1987년 - 마카오 문제에 관한 중국 포르투갈 공동성명 발표. 

1999년 - 마카오 반환, 특별행정구 성립.


마카오를 포르투갈령으로 승인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 대륙조선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