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열도 비파호와 해동제국기에 나오는 비파호

한부울 2009. 11. 2. 23:06

강호시대와 비파호 http://blog.daum.net/han0114/17049753

스메루산과 부사산(富士山) http://blog.daum.net/han0114/17049587 

일본은 지금의 열도에 존재 한 것이 맞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493 

조와국(瓜蛙國)과 일본 http://blog.daum.net/han0114/17049452 

네덜란드 나막신과 일본의 게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532 

일본은 바다 밖으로 만리나 떨어진 곳에 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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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 비파호와 해동제국기에 나오는 비파호 그리고 남경 비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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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보신전쟁)이전까지 일본은 어디에 있었는가?

현재 열도의 지명들은 그들이 과거 거쳐가고 살았던 곳에서 익히고 가슴에 품어 있던 지명, 나라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집시처럼 생활하던 곳에 있던 지명들을 끌어 모아 만든 곳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때문에 여기저기 흡사한 지명과 본래의 내용과 다른 부분이 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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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견별록(聞見別錄)  

남용익(南龍翼)1628(인조 6)∼1692(숙종 18)1655년 통신사의 종사관《부상록(扶桑錄)》


일본 주계(州界)

동산도(東山道) 8주

 

近江州。東南距琵琶湖。西抵山城。北抵若狹。屬郡二十四。沃野平廣。幾至數百餘里。 水田三萬三千四百二町五段


근강주(近江州) : 동남쪽으로는 비파호(琵琶湖), 서쪽으로는 산성, 북쪽으로는 약협(若狹)에 이르며, 소속된 군은 24군이니, 비옥(肥沃)한 들이 넓어서 거의 수백여리에 이름. 수전이 3만 3천 4백 2정 5단.

 

[클릭원본]

                                                       [해동제국기 일본국본도] 

 

근본적으로 다른 지도를 지금 열도와 흡사하게 만들기 위하여 짜집기 한 것이다.

 

'海東諸国紀(해동제국기)' 지도는 '異称日本伝(이칭일본전, 松下見林, 1688년)'에 수록된 내용이다. 지도에 일본어도 첨부가 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1471년(성종 2)에 신숙주(申叔舟)가 편찬한 일본에 관한 저서로서 일본지도가 수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근세기에 일본인들이 강탈하여 의도한 것에 따라 어떻게 수정 또는 보완, 사실과 다르게 조작하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열도와 지도는 비교 할 수 없을 만치 엄청난 괴리를 보이고 있다.

아래 지적하였듯이 호수 크기도 문제지만 왜경(京都, 東京)의 위치도 정확하지 않으며 비파호에서 흘러나오는 강 줄기가 태평양쪽 일본입장에서 동해라고 해야 하는데 남해로 합류된다고 합류지점을 남해도라고 한 것도 이상하고 지도에는 호수와 연결된 수로의 넓이가 적어도 1㎞ 이상일 것 같은데 태평양연안 만나는지점 하류가 0.7㎞ 상류쪽은 겨우 200 미터미만 넓이의 보통 강수로일뿐만아니라 호수와 바다가 연결되는 과정도 지도처럼 굵은 직선의 흐름이 아니다.

어디 차이나는 점이 이것 뿐이겠는가?

부사산(후지산) 위치도 다르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볼때 당시 해동제국기를 편찬한 시대의 일본실체와 지금 열도의 일본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비파호 역시 지금의 열도 비파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長30里 ÷ 2.45= 12.24㎞ =실측 63.5㎞

廣18里 ÷ 2.45= 7.34㎞ =실측 22.8㎞


일본국 동산도 근강주에 비파호의 길이(장)가 30里, 넓이(廣) 18里를 키로(㎞)로 환산하면 각 12.24, 7.34가 된다.

그러나 현재 두산백과자료에는 길이가 63.5 키로 이고 넓이 또한 22.8 키로 이다.

같은 땅에서 같은 호수가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이처럼 차이가 날 수 없다.

해동제국기 지도보다 실제가 길이로는 5배가 길고, 넓이 또한 3배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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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남경의 비파호 그것과 열도 비파호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남경은 중일전쟁당시 30만명을 무차별 학살한 곳이다.

그럼에도 열도에서 신생국을 만들면서 무엇이 아쉬워 남경 비파호와 같은 이름을 열도에 명명했을까?

그들이 바로 대륙 남경 즉 장강 이남을 근거로 한 난민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남경시 장강 변에 하관(시모노세키)구가 있다.

 

                                                          [남경대학살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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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지만 고려문종30년 때 기록으로 나오는 비파는 당비파(唐琵琶)인데 즉 한국비파 고려비파이다.

비파호는 비파를 닮았다고 하는 호칭이다.

 

                                               한국의 당비파(唐琵琶) : 唐(三韓)


비파호(琵琶湖)  

  

 

 

 

 

일본 시가현[滋賀縣] 중앙부에 있는 일본 최대의 호수.


위치 : 일본 시가현

면적 : 673.9㎢

길이 : 63.5km

넓이 : 22.8km


면적은 673.9km2, 길이는 63.5km, 최대너비는 22.lkm, 최대수심은 103.6m이다. 단층함몰호(斷層陷沒湖)로 동쪽 연안은 유입 하천이 많아 호안평야가 발달하였으나, 서쪽 연안은 아도강[安曇川] 하류의 삼각주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산지가 호안까지 뻗어 있다. 현(縣) 전역의 물을 받아들여, 남단부에서 요도가와강[淀川]의 상류 세타강[瀨田川]을 통해 오사카만[大阪灣]으로 배수한다.


시가 현 면적의 1/6를 점한다. 유출하천은 세타 강(瀬田川)이지만, 흘러가면서 우지 강(宇治川)에서 요도가와 강(淀川)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사카만으로 빠져나간다. 또 호수의 물은 교토시가 요도가와 강수역의 수도수로 사용되기 때문에 비파호 소수가 교토로 흘러 들어간다. 호수 중 가장 협소한 지역에 놓은 비파호 대교를 기준으로 북호(北湖)와 남호(南湖)로 구분하기도 한다. 비파호에 둘러싸인 각지자체는 크게 호남(湖南), 호동(湖東), 호북(湖北), 호서(湖西)로 나누고 그중 호남은 고가 지역과 나누어지기도 한다.


호수를 둘러싼 산지로부터 흘러가는 원류로, 게이한신의 물병으로서의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 또 예부터 수상교통로로 이용되어 철도가 놓이기 전에는 교토, 오사카에서 간토, 호쿠리쿠로 가는 수상로로 이용되었다. 아울러 “급하면 돌아가라”라는 속담은 현재 구사쓰와 오쓰 간에 놓였던 “야하세를 건너(矢橋の渡し)”를 읊은 와카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호수에는 어패류가 풍부하여 어획량이 많고, 전국 하천에 방류하기 위한 새끼 은어 및 민물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다. 호수의 물은 연안평야의 관개용수로 이용되며, 비파호(琵琶湖) 용수로에 의해 상수도 ·발전 ·공업용수로 이용되어 하류의 게이한신[京阪神:京都 ·大阪 ·神戶]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한편 호수와 연안 일대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사적 ·명승 ·문화재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여 예로부터 경승지로 알려져 왔고, 가장 먼저 국정공원으로 지정되었다.[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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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제국기 


해동제국기 日本國本圖를 보면 방향뿐만 아니라 실체에서도 전혀 현 열도와 비슷하지도 않는 정체불명의 지도임을 알 수 있다.


1471년(성종 2)에 신숙주(申叔舟)가 편찬한 일본에 관한 저서.


필사본. 2책. 규장각도서. 일본의 지세(地勢)·국정(國情), 교빙왕래(交聘往來)의 연혁·사신관대례접(使臣館待禮接)의 절목(節目) 등에 걸치는 일본국기(日本國記)·유구국기(琉球國記)·조빙응접기(朝聘應接記) 등을 기록한 책으로, 책머리에는 해동제국총도(海東諸國總圖)·일본본국도(日本本國圖)·서해도구주도(西海道九州圖)·일기도도(壹岐島圖)·대마도도(對馬島圖)·유구국도(琉球國圖) 등 6장의 지도가 첨부되었다.


1473년 권말(卷末)에 전산전부관인양심조·궤향일정서계(饋餉日呈書契) 등이 부재(附載)되었고, 이듬해 예조좌랑 남제(南悌)가 제포지도(齊浦之圖)·부산포지도(富山浦之圖)·염포지도(鹽浦之圖) 등 3매를, 1501년(연산군 7) 성희안(成希顔)이 유구의 사자에게서 들은 일본의 국정을 열기한 것을 각각 첨부하였다. 조선 전기의 한일(韓日) 관계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일본의 역사·지리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도쿄대학본[東京大學本]과 일본의 내각문고본(內閣文庫本) 및 도쿄문구당본[東京文具堂本] 등 많은 이본(異本)이 전하며, 1933년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 제2집으로 영인(影印)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