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옛 기록으로 본 백두산(白頭山)과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반론

한부울 2009. 10. 24. 21:38

우어표(牛鱼鰾)와 압록강, 백두산 http://blog.daum.net/han0114/17049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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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록으로 본 백두산(白頭山)과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반론

[우리역사의 비밀:문상욱] (2009-10-21 12:58:17) 

                          

※ 본인은 네티즌 자유 게시판은 사용치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토론되는 내용 중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건에 대해서만 반론 형식의 글을 올렸습니다. 오늘의 이 건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현재의 백두산과 압록강은 분명 반도 북방에 있으며, 이는 옛 말로 대신하면 “화이(華夷)”를 나누는 경계입니다. 그러면 반도는 화(華)입니까. 이(夷)입니까. 역사서는 기록하기를 남쪽은 “화(華)”요, 북쪽은 “이(夷)”라고 했거든요.


21세기의 백두산과 압록강, 15세기의 백두산과 압록강! 이는 분명 다를 수 있습니다.

옛 기록으로 보는 백두산(장백산)과 압록강은 반도(半島)북방에 있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다른 곳에 있었는가?

식민사관에 의해 이름만 반도 북방으로 옮겨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 [네티즌 자유 게시판에서 대명일통지를 인용한 글(원문) 예문] :

“在國城

[1]西北一千四百五十里

[2]一名馬訾水

[3]原出鞨靺

[4]之長白山

[5]水色如鴨頭故名西南流與鹽難水

[6]合南入於海

[7]闊三百步, 朝鮮特爲天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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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당시의(15세기) 조선왕조 황도(皇都)로써 반도(半島) 한양(漢陽=漢城)이 맞는가?

[2]압록강은 황성(皇城)에서 서북쪽 방향이 올바른 것인가?

[3]압록강을 일명 마자수(馬訾水)라고 한다. 왜 압록강을 馬訾水(마자수)라 한 것일까?

[4]말갈(靺鞨)이 장백산 주위에서 세거(世居)했는가? 그들의 본거지가 “장백산(長白山)이 맞다”면 그 장백산이 “반도(半島)의 북방에 있는 산이다”라는 옛 기록과의 고증은?

[5]산해 경에는 『북방에서 서방』 또는 『서북방에서 서남방』으로 이들(말갈=숙신)의 영토를 지리적 방향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종족들이 살고 있었던 땅과 기본적인 방향설정도 잘못된 것이 아닌가?

[6]대륙의 몇 종류 사서(자치통감. 통전. 구당서 등) 기록을 보면 “말갈(靺鞨)”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다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본거지를 대륙 서북방지역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이러한 기록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현재 님의 해설은 원전과 전혀 다른 방향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합당한 설명은? 

[7]15 세기경의 장백산(長白山)이 현 반도(半島) 북방의 백두산이란 고증은 무엇인가?  당시의 백두산(白頭山)이 장백산(長白山)이라는 이칭(異稱)으로 불린 것은 맞을 지라도 그 산이 왜 반도(半島) 북방에 있어야 하는가?

[8]염난수(鹽難水)라는 하천이 압록강의 지류(支流)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염난수가 반도 북방의 압록강 지류란 것을 어떻게 고증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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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중요한 산이나 하천 등의 위치를 파악하려면 최소한 위 몇 가지 즉 지리, 지형적인 고려사항은 필수 조건일 것이다.


반도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장백산이란 산의 기록을 찾아 우선 지리적인 방향과 지형적인 특색과 그곳을 의지해 살아가는 종족(種族)들과 특산물, 동, 식물의 분포 등을 고려해야함은 기본적인 일이다.


우선 백두산은 그 산에 있는 수목과 암석들이 하얀 색깔을 띠고 있으며, 이곳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몇 가지를 보면


※ 글의 전체적 내용은 대체적으로 반도의 지형, 지세와 부합된다는 결론 같은데 이러한 설명은 <고지도 모음 란>의 일제가 가르친 역사 지도 집에서 찾아보니 똑같은 모양새가 되는데 ?


우선 백두산(장백산)에 대해서 본인이 <고려. 조선토론방>에 올려놓은 자료를 예를 들어 반론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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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類簒云 : 天下大水有三, 一曰黃河, 一曰長江, 一曰鴨綠, 又曰黃河與鴨綠, 夾北幹龍, 流於遼海, 以此觀之, ( )謂鴨綠, 似是發源於中國之西北, 以東流. 入於遼海, 黃河( )也, 昔我國鴨綠, 其大不可, 比幷於黃河長江, (中略), 女眞起( ), 有鴨綠, 此卽我國鴨綠江也.) :

《유찬(類纂)》에 이르기를, “천하의 대수(大水)가 셋이니, 하나는 황하(黃河)이고 하나는 장강(長江)이고 하나는 압록(鴨綠)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황하와 압록은 북쪽으로 계속 이어진 산을 끼고 요해(遼海)로 흘러든다.” 하였다. 이것을 본다면 이른바 압록이라는 것은 중국의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요해로 흘러드는 강일 듯하니, 이는 곧 황하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우리나라의 압록강으로 말하면 그 크기는 황하나 장강과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 《유찬》에서 말한 압록강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주자(朱子)가 일찍이 세 개의 큰 강물에 대하여 논한 것이 있는데, “여진(女眞)이 일어난 곳에 압록강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곧 우리나라의 압록강일 것이다.】


①《유찬(類纂)》에 이르기를, “천하의 대수(大水)가 셋이니, 하나는 황하(黃河)이고 하나는 장강(長江)이고 하나는 압록(鴨綠)이다.”

② “황하와 압록은 북쪽으로 계속 이어진 산을 끼고 요해(遼海)로 흘러든다.”

③ 이것을 본다면 이른바 “압록이라는 것은

<중국의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요해로 흘러드는 강>일 듯하니, 이는 곧 황하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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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 숙신씨의 나라가 그곳에 있다.


▶ “山海경” 이곳에서 기록하기를 <대황(大荒) 중에 불함산이 있다>고 하였을 때 중요한 것은

➊ 산해경이라는 책속에서 설명하는 지역이 어디인가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산해경속의 지역은 중원 대륙과 그 동서남북지방이며, 현 하북성 동쪽지방과는 관련이 없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 山海경을 보면 하북성 동쪽에 대한 山, 하천 등 그 어떤 설명도 없다.

❷ 또 하나 이곳에서 말하는 <대황>지역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大는 크다. 넓다 등이며, 荒은 蕪 也라 했으니 거칠다. 풀이 땅을 덮다 등으로 사용되며, 대륙 측의 사서를 해설하는 옛 학자들은 <대황>지대를 “어둡고 춥고 황막하며, 거친 지방”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곳은 나무는 많지 않고 땅에 수초가 있을 뿐인 곳으로 설명하며, 유목 종족도 겨울에는 동굴 속이나 땅을 파고 그 속에서 산다고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또 대황지대는 북쪽과 서북쪽의 북해(北海)와 한해(瀚海)에 가까운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❸ 이러한 설명으로 <대황지대>를 본다면 <대황> 지방은 하북성 동쪽지방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따라서 반도 북방지방에 있는 현재의 백두산이 옛 기록에 나오는 불함산이나 장백산이나 백두산이 될 수 있을까?


▶ <불함산(不咸山) :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다. 만주어의 ‘bulkan’에서 비롯되었는데 ‘bul’은 하늘을, ‘kan’은 임금을 나타내는 말로써, 불함산은 곧 천산(天山)을 뜻한다. 백두산은 이 밖에도 長白山, 徒太山, 徒大山 등으로 표기된다.>.....이 글은 <民族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한 해동역사 <注>에 나오는 말이다. 즉 불함산은 백두산을 말하는 것으로 만주어인 “불간”에서 나오는 말로 “불”은 하늘을, “간”은 임금을 나타내는 말이며, 곧 天山(천산)을 뜻한다고 하였다. 이럴때 < 백두산은 곧 천산(天山)이다>라는 것이다.


결국 백두산은 불함산이며, 천산(天山)이라는 얘기다. 반도 북방에 있는 백두산을 언제 우리가 “천산”이라고 불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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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長白山 : <古名不咸山亦名太白山亦名白山亦名徒太山亦名太末山>


1) 山海經大荒之中有山名不咸在肅慎氏之國: ≪山해경;大荒(대황:대막:한해;북해를 말하는 것이다)의 가운데 불함산이 있으며 숙신氏국이 있다.≫

2) 晉書肅慎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 : ≪진서;숙신氏는 일명 읍루이며, 불함산의 북쪽에 있다.≫

3) 魏書勿吉國南有徒太山魏言太白 : ≪위서:물길국의 남쪽에 사태山이 있다. 魏(위:북위=원위를 말함) 에서는 태백이라 한다.≫

4) 北史靺鞨國南有從太山者華言太皇 ; ≪북사:말갈국의 남쪽에 태산者들이 있다. 화언(중국=중원의 말로)으로 태황이다.≫

5) 新唐書靺鞨居肅慎地粟末部居最南抵太白山亦曰徒太山與髙麗接 : ≪신당서;말갈이 있는 곳은 숙신氏의 땅이다. 속말말갈들이 거하고 있는 곳은 최 남쪽 태백산이 닿는 곳에 있다. 태산은 또 사태山이라 하며, 고려(高麗)와 접하고 있다≫

6) 新唐書渤海大氏度遼水保太白山之東北阻奥婁河樹壁自固 : ≪신당서:발해 대氏가 요수를 건너(度) 태백산의 동북쪽 오루河의 막다른 곳에 나무성채와 벽을 단단히 쌓고 보전했다.≫

7) 通典挹婁即古肅慎其國在不咸山北 : ≪통전 : 읍루 즉 옛 숙신 그 나라는 불함산의 북쪽에 있다≫

8) 太平寰宇記挹婁國在不咸山北夫餘北千里 (案通考云在夫餘東北千里) : ≪태평환우기:읍루국은 불함산의 북쪽에 있는데 부여 북쪽 천리에 있다 (통고에 따르면 부여의 동북 천리에 있다고 하였다)≫ (후한서에 부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미 이곳에 여러 번에 걸쳐 올려놓은 것이 있으니 생략한다)

9) 契丹國志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乃白衣觀音所居其山禽獸皆白 : ≪글란國지:장백산은 冷산(냉) 동남 천여리에 있다. 장백산은 백의관음이 그곳에 거하고 있으며, 그 산의 금수(날 짐승)들은 모두 백색이다.≫

10) 金史女真地有長白山 : 금사 : 금사에 따르면 여진의 땅에 장백산이 있다.

11) 金史㑹寧府㑹寧縣有長白山 : 금사 : 회녕부 회녕현에 장백산이 있다.

12) 明一統志長白山在故㑹寧府南六十里横亘千里高二十里其巔有潭周八十里 : ≪명일통지:장백산은 옛 회녕府 남 60 리에 있다. 횡으로 천리에 뻗쳤으며, 높이는 20리이며, 산꼭대기에는 주위가 80 리에 이르는 못이 있다. (巓 : 산꼭대기 전)≫

13) 上諭長白山係本朝祖宗發祥之地.案長白山在吉林烏拉城東南横亘千餘里東自寧古塔西至奉天府諸山皆發脈於此山巔有潭為鴨緑混同愛嘑三江之源古名不咸山亦名太白山亦名白山亦名徒太山亦名太末山其名長白山則自金始也 : 장백산은  본조(金을 말함)조종의 발상지이다. 장백산은 길림. 오랄城의 동남에 있으며, 횡으로 천리에 뻗쳤으며, 동으로 녕고塔, 서로는 봉천의 여러 산으로 뻗는 줄기이다. 산꼭대기에는 못이 있으며, 이곳에서 압록강, 혼동江, 애호江 等의 세 강의 발원지이다. 옛 이름은 불함산이며, 또 태백산이며, 또 백산이며, 또 사태山이며, 또 태말山이며<古名不咸山亦名太白山亦名白山亦名徒太山亦名太末山>, 그 산의 이름은 금시조로 부터이다.

14) 성호사설 제3권 천지문(天地門) 생숙여진(生熟女眞) : 백두산 줄기가 북막(北漠)에서 나와 남쪽으로 달려서 분수령(分水嶺)에 이르고, 다시 꺾이어 동쪽으로 나와서 가로 천리에 뻗쳤으니, 옛날에 불함산(不咸山)이라고 일컬은 곳이다. 그 속칭이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鄰)이니, 가이민(歌爾民)은 장(長)이고, 상견(商堅)은 백(白)이며, 아린(阿鄰)은 산(山)이다. 이렇게 해서 일명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했다.          

15)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 유득공 : “《산해경(山海經)》의 불함산(不咸山)은 지금의 장백산(長白山)인데 귀국의 북쪽 경계에 있습니까?” “그렇소, 이 산 이름은 백산(白山) 또는 개마산(蓋馬山), 또는 백두산(白頭山)이라고도 하는데, 중화[華]와 우리나라[東] 말로써 비교하여 해석하면 ‘개마’가 ‘백두’인 것입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한 조선의 학자이다. 이 분의 말씀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은 <불함산은 장백산이며, 장백산은 백산이며, 백산은 백두산이고, 백두산은 개마산>이라 한데 있다. 즉 개마 산이 백두산이라고 할 때 후한서등의 여타 대륙의 사서 속에는 “개마산”은 평양 서쪽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16) 연원직지 제1권 출강록(出疆錄) ○ (1832, 순조 32) 11월 21일 압록강기(鴨綠江記) : 강은 의주성 서쪽 5 리에 있는데, 그다지 길거나 넓지 않다.《당서(唐書)》에, “고려의 마자수(馬訾水)가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색깔이 오리 머리 같으므로 압록강(鴨綠江)이라 이름했다.” 고 하였다. 이른바, 백산(白山)이란 곧 장백산(長白山)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불함산(不咸山)이라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이라 한다. 이 백두산이 여러 강의 발원지(發源地)가 되니,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다. 《황여고(皇輿考)》에는, “천하에 세 큰 물이 있으니, 황하(黃河), 장강(長江), 압록강이 이것이다.” 하였다.   

17)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2권 순일편(旬一編) 백두산(白頭山) : 이 산은 무산부(茂山府) 서쪽 306 리에 있다. 옛날 이름은 불함산(不咸山)이다. 중국 사람들은 장백(長白)이라 부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백두(白頭)라 부르는데, 산이 매우 높아 사계절 내내 얼음과 눈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진서(晉書)》에, “숙신 씨(肅愼氏)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 하였고, 《금사(金史)》 세기(世紀)에, “대정(大定) 12년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봉하여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이라 하고, 곧 그 산 북쪽에 사당을 세웠다. 명창(明昌) 연간에 다시 책봉하여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라 하였다.” 하였다.《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동쪽의 영고탑으로부터 서쪽의 봉천부(奉天府)에 이르는 사이의 여러 산은 모두 이 산에서 맥(脈)이 나온다. 산꼭대기에 못이 있으니, 압록(鴨綠)ㆍ혼동(混同)ㆍ토문(土門) 세 강의 발원지이다. 금(金)나라 때 사당이 훼손되었는데, 본조에서 높여 장백산의 신령이라고 하였다.         

18) 청사본기 태조편에 : <太祖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姓愛新覺羅氏,諱努爾哈齊。其先蓋金遺部。始祖布庫里雍順,母曰佛庫倫,相傳感朱果而 孕。稍長,➡定三姓之亂,眾奉為貝勒,❈居長白山東俄漠惠之野俄朵里城,號其部族曰滿洲。 滿洲自此始。元於其地置軍民萬戶府,明初置建州衛>.....(三성)三姓의 난을 평정하니 무리들이 패륵(貝勒 : 부족장)으로 받들었다. 장백산 동쪽의 아막혜의 들에 있는 아타리 성에서 살았다. 그 부족을 “만주”라 했는데 이것이 “만주”의 시초이다. 원나라 때는 이 땅에 만호부를 설치했으며, 명나라 때는 건주위를 설치했다.


▶ 위의 본문은 청사 본기 태조편의 첫 문장이다. ❈표 한 곳을 보면, 분명히 기록하기를, 장백산(백두산)의 동쪽 아(俄)타리성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백두산(장백산)동쪽지방은 어디인가. 바로 반도 조선의 함경도 지방이다. 이곳에 명(明)나라가 “건주(建州)위”를 설치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명나라에서는 현 遼녕성 심양(瀋陽)에 “건주위”를 설치했다고 하였으니 백두산 동쪽지방과는 일천리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록한 원문과 이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 따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19) 만주원류考 ; <金史世紀云金始祖居完顔部其地有白山黑水白山卽長白山黑水卽黑龍江> 〓 金史 세기에 따르면 金始祖가 거주한 "완안부"의 그 땅은 "백산과 흑수"가 있는데 백산은 장백산이요, 흑수는 즉 흑룡강이다. 대금이 일어난 곳은 東土山川으로 "大金"의 정사에 따르면 "金"이 먼저 일어난 곳은 말갈부로 옛 숙신지의 땅이다. 본시<珠申後改稱滿珠而漢字相沿訛爲滿洲其實卽古肅愼爲珠申之轉音更足微疆域之相同矣>〓 주신(珠申>이었으나 후에 개칭되어 滿珠이나 한자음이 같은 것을 쫓아 滿洲이다. 그 실인 즉 옛 숙신이다. 珠申은 전음으로 바뀌었는데 그 강역은 서로 같았다. <東夷之說因地得名如孟子稱舜東夷之人文王西夷之人此>=동이의 설에 따르면, 동이의 지명을 득한 것은 맹자가 칭하기를 "순"임금은 東夷人이고, "문왕"은 西夷人이다. 따라서 "순"임금이든 "문왕"이든 간에 같은 종족 즉 夷族이나 동쪽에 있으니 "東夷"요, 서쪽에 있으니 "西夷"일 뿐이다.


▶ 만주원류考에서는 "만주(滿洲)는 본시 만주(滿珠)이다. 우리 국가(후금)가 동쪽지방에서 가업을 이루기 시작하였으므로 서장(西藏)에서 매년 단서(丹書)를 올릴 적마다 '만주사리대황제(曼珠師利大皇帝)'라 호칭한다."고 하였으니 만주는 曼珠(만주)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많고 많은 나라들 중에서 왜 하필 서장에서 불렀다는 것만을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


❶ (貝勒居長白山東鄂多理城建號滿洲是為國家開基之始以國書考之滿洲本作滿珠二字; (패)貝륵이 거한 곳은 장백산 동쪽의 (악)鄂다리城이다. 건호는 "滿洲"이며. 국가를 처음으로 여는데 초석이 되었으며, 國書(국서)를 상고해 보면 만주는 본시 "滿珠"의 두 글자이다.
❷西藏獻丹書皆稱曼珠師利大皇帝翻譯名義曰曼珠華言妙吉祥也又作曼殊室利大教王經云釋迦牟尼師毘盧遮那如來而大聖曼殊室利為毘盧遮那本師殊珠音同: "西藏의 獻단서"에서 모두 칭하기를 "滿洲사리대황제'이며, "만주실리"라 했다. "대교왕경"에 따르면, "석가모니비노차나여래"이다. 또 "대성만주실리"는 "비노차나"는 근본적으로 "사수주"와 음이 같다. 이렇게 서장에서 칭하던 것을 기록한 것을 보면 본시 만주는 서장과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畏: 두려워할 외. 遮: 막을 차. )

➌ 불함산(백두산=장백산)은 부여 북쪽천리(동북천리)에 있다 하였다(후한서). 이 불함산은 고려와 접하고 있다는 말은 고려가 반도나 동북삼성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또한 장백산은 화언(당시의 중국 언어)으로 “태황”이라는 것은 이 산의 이름이 “태황山”이라는 말이다. 언제 장백산을 “태황山”이라 불렀는가.


21) 왕조실록 ; 정조9년 을사(1785, 건륭 50) 4월19일(무술) 기록중에서 : <원문 : 奉命往祭北海廟堂及盛京福昭陵,興京永泰陵。北海廟堂,在於長白山,以淸朝發祥之地,倉建廟堂云>.....신(사은사로 서장관이었던 이 정운을 칭)이 길에서 흠차사신(欽差使臣)을 만나서 탐문하였더니, 내각(內閣) 시독학사(侍讀學士) 윤찬도(尹贊圖)가 어명을 받들고 북해묘당(北海廟堂)과 성경복소릉(盛京福昭陵)·흥경영태릉(興京永泰陵)에 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북해 묘당은 장백산(長白山)에 있는데, 청조(淸朝)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묘당을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 근대조선의 정조대왕 시절에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던 “서장관 이정운”이 청에 다녀와서 정조 대왕에게 복병한 기록이기 때문에 여러분께서는 믿을 수 있을까. 문제는 청나라의 발상지를 말하는 대목이 영 시원하지 않은 헷갈리는 내용이다.


즉 “북해(北海)묘당”이 장백산(백두산)에 있는데 이곳이 <청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묘당(廟堂)을 세워 기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위의 서론편을 보면 백두산(장백산)동쪽지방이면 반도조선의 함경도지방인데 반도조선 함경도 땅에 청나라의 묘당이 있다? 또 이곳이 북해지방이다? 헷갈리는 기록임에 틀림이 없으나, 이는 아주 정확한 기록이다.


현대의 역사해설에서 청나라의 서울(皇都=京師)을 북경이라 하고 있음에 비춰보면 백두산 동쪽이면 “동해묘당”이래야 맞는 말이다. 그러나 노트북의 L.C.D 모니터에 “구멍이 나도 좋다”하고 쳐다봐도 “동해묘당”이 아니라 “북해묘당”이다. <북해>는 어느지방을 말하는 것일까. 백두산이 북해에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22) 왕조실록 ; 정조11년 정미(1787, 건륭 52) 2월 25일(계해) 기록 중에서 : 이 기록은 위 3번에 기록한 것보다 2년 후의 것이다. 즉 동지에 청나라에 서장관(동지사)으로 다녀온 “이면긍”이 정조대왕에게 복명, 설명한 기록이다.


▶ 당시 청에서는 “황청개국방략(皇淸開國方略)”이라는 청나라 창업 전반에 걸친 기록書를 편찬하고 있었는데 당시에 출판되지는 않았으나 청나라 대신들의 말에 의하면.....“그 제1권은 ‘발상세기(發祥世紀)’라 하며 대강 ➡사막(沙漠)에서 처음 일어나던 때의 일을 기록하였는데 그 말에 이르기를, ‘장백산(長白山)은 높이가 2백여리며 1천여리를 뻗쳐 있으며, 산 정상에 연못이 있어 이름을 달문(闥門)이라고 한다. (원문 : 其第一卷曰發祥世紀, 槪紀➡沙漠肇起時事. 其言曰: 長白山高二百餘里,綿亘千餘里,山之上有潭,曰闥門.周八十里(중략)”

이렇게 정조대왕에게 설명을 했다는 말이 된다.

                     

➡ 반도 조선에 있는 “백두산=장백산”이 있는 함경도 지방이 A.D 1,787년 당시에 사막(沙漠)지대는 결코 아니었다. (이는 왕조실록이나 연행記 기록을 보면 백두산 쪽에서 아름드리만한 나무를 벌채하여 강을 통해 흘러보낸 것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했기 때문에 이곳은 절대 사막이나 삭막 또는 대황지대, 대막지대가 될 수 없다). 감히 조선의 군주(황제) 정조대왕에게 말도 아니 되는 거짓 복명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즉 백두산=장백산과 청의 발상지는 “북해”지방의 사막지대와 가까이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청(淸)의 발상지와 초 거점地는 반도조선 백두산 동남지방이 될 수 없으며, 이는 <산해경>에서 말하는 “불함산이 백두산=장백산이며, 대황지대에 있다.”라는 기록과 똑같은 것이다.


23) 동사강목 “조선의 명호편”을 보면 ; “동방(東方)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기슭이고 백두산은 선비산(鮮卑山)으로부터 뻗어 내렸으니 그 근본은 곤륜(崑崙)의 별지(別支)이다. 후한(後漢) 당시 그 산 밑에서 일어난 동호(東胡)부락이 그 산의 이름을 따 선비國이라 이름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기자(箕子) 세대에 요지(遼地)의 태반이 그의 봉역(封域)에 있었는데, 그 산이 선비산 동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조선이라 하였다.


▶ 백두산은 곤륜산의 별도의 지맥이라는 말이며, 선비산으로 부터 뻗어 내렸다는 말은 반도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또한 동방(東方)이란 백두산의 기슭이란 말은 백두산 동쪽지방을 말하는 것이리라. 결국 위의 글을 도식으로 옮기면 ;


❶ 곤륜산 - 선비산 - 백두산 = 동쪽 - 동방(동국)이 되며,

❷ 곤륜산 - 선비산 - 백두산 = 요지(요의 땅) = 조선의 땅 

❸ 곤륜산 - 선비산 = 동호(선비)


위에서 보다시피 선비산 동쪽은 모두 동호라 하며, 동호는 바로 조선이다. 선비산은 곤륜산의 별도의 산이며 , 이 산은 알타이 산【금산 : 알타이 산맥 ; 러시아 및 신강성과 외몽고 접경지역을 서북에서 동남으로 뻗어 내렸다】이다.


24) 성종12년 신축(1481, 성화17) 10월17일(무오)기록에 “<그 후 야율씨(耶律氏)가 서쪽으로 만 里를 달렸으나 완안씨(完顔氏)의 남하로 패망하였고, 其後, 耶律氏西走萬里, 完顔氏南下而斃,>라 했으므로 금나라의 창업자들인 ”완안씨“ 들의 거점지가 반도 북방이 될 수 없음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며, 요나라를 멸망시킬 때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군한 것이 아닌 북쪽에서 남하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켰다는 말은 중원 북방과 서북방에서 일어난 금나라가 그 남쪽지방에 있던 요나라를 공격, 멸망시켰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그 금나라의 시조가 백두산 주위에서 초 발흥했다면 백두산, 장백산은 당연히 금나라의 창업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북방이나 서북방지대에 있어야 함은 당연한 것인데?


만약 금나라의 “완안씨”들이 반도 백두산 주위에서 시원, 발흥하여 금나라를 창업한 후에 요나라를 공격, 멸망시켰다고 했을 때 위의 왕조실록기록대로라면 백두산이나 그 서쪽지방인 (요)遼녕성 등지에서 남하(南下)하여 요(遼)나라를 공격......했다는 말은 바로 반도고려 땅을 공격했다는 말이며, 반도 땅에는 고려가 아니라  요나라가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사실일까?


25) 왕조실록 인조2년 갑자(1624, 천계 4) 9월 28일(기묘) 기록속에 : 함경 감사 이창정(李昌庭)이 치계하기를, “신이 순행차 삼수(三水)에 도착하여 관방(關防)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백두(白頭). 장백(長 白) 두산이 모두 눈에 들어왔습니다. 부로(父老)에서 물어보니 ‘백두산은 우리 지경에서 거리가 겨우 4∼5일정(日程)이고 장백산은 더욱 가깝다.”고 인조대왕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나 유학자들의 문집 속에 나오는 백두산과 장백산은 모두 하나의 산을 말하고 있는데 당시의 함경감사가 직접 백두산 근처에 가 그곳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노인에게 물으니 백두산과 장백산은 따로 따로 있는 산이라는 것이다.


위의 말대로라면 반도조선의 영토에서 장백산이 더 가깝고, 백두산은 더 멀다는 것이다. 즉 백두산은 조선의 땅에서 4-5일을 가야 도착하는데, 장백산은 이 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말이다. 즉 <2개의 산이 있다>라는 것이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26) 위의 백두산=장백산과 관계되는 여러 기록을 모아 놓았으나 정말 그게 그것 같고 아주 헷갈립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불함산=백두산=장백산=백산>이란?


① 먼 북쪽지방에 있고,

② 산고(山高)가 높아 사시사철 눈과 얼음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산이며,

③ 용암 분출, 화산 폭발 등으로 인한 산 정상에 넓은 호수가 있으며,

④ 이 호수로부터 물이 흘러 세 개의 강물의 근원지가 되며,

⑤ 이 산을 포함한 산맥은 횡(東西)으로 뻗쳐 남과 북으로 화(華)와 이(夷)를 구분했다는 것이며,

⑥ 이 산의 동쪽지방에서 금나라의 시조 “완안씨”가 발흥했으며,

⑦ 역시 백두산 동쪽지방에서 청나라 개국시조의 발상지라는 것이며,

⑧ 이 산 주위는 대황지대(大荒)이며, 사막지대(沙漠)이며, 황막한 곳이었고

⑨ 이 산이 있는 곳은 “북해”지방이니 청나라 시조를 기리는 “북해묘당(北海廟堂)”을 만들어 조상들을 길이길이 받들어 모실 수 있었던 곳이며,

⑩ 조선의 북변과 동북면에 대막지대와 사막지대가 연 이어져 있다 했으므로 이러한 곳에 백두산이 있어야 하고,

⑪ 선비산 동쪽에 백두산이 있다 했으므로 선비가 일어난 서북방(중원서북지대)지대 주변에 백두산이 있어야 타당하고,

⑫ 청의 태조 발상지가 사막지대였으니 백두산 주위는 사막지방이라야 옳은 것이고,

⑬ 백두산이 장백산이며, 불함산이라면 산해 경속에 대황의 땅 가운데에 있다했으니 대황의 삭막지방에 있어야 하며,

⑭ 청이 발흥했다는 건주위는 명태조가 설치한 삼위(三衛)지방에 있다 했으니 선비의 땅과 토곡혼의 땅에 있어야 하며,

⑮ 서장(티베트)에서 부를 때 “만주사리대황제”라 했으니 본시의 만주지방 주위에 있어야 하고,

⑯ 산해경에 불함산의 북쪽에 숙신이 있다 했으니 그 방향을 따라 가면 <서쪽에서 북쪽)간 그 사이에 있어야 하고,

⑰ 부여 북쪽에 불함산이 있다 했으니 부여가 있었던 내몽고 최 서쪽의 북쪽지방에 있어야 하며,

⑱ 왕조실록의 기록과 같이 요나라가 서쪽으로 만리(萬里)를 개척하였으나 금나라가 남하(南下)하여 망하게 했다는 기록에 따라 금(金)나라는 서북방과 북방지역에 있었으므로 그 발상지가 백두산 주위였다면 서북방과 북방지역에 백두산이 있어야 한다.


※ 이렇게 수많은 의문점에 대해 심사숙고를 해보고 결론을 내리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반도 북방에 백두산(장백산)이 있고, 이곳에서 압록강이 흘러 서해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은 대한민국 다섯 살, 여섯 살 어린이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대명일통지속에 조선이 반도에 있었다고 했다(?)면 반도(半島)에 있었다는 조선왕조의 실록인 위 왕조실록속의 내용은 또 무엇입니까? 본인이 알고 있기로 이곳은 “잃어버린 조선의 역사를 찾자”는 취지에서 만들어 놓은 공간이 아닌가요. 반도와 똑같은 지형, 지리라면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것일까요?

 

2009년 10월 21일

글쓴이 : 문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