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식물

빈랑나무(檳榔, betel palm)와 삼한역사

한부울 2012. 4. 2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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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랑나무(檳榔, betel palm)와 삼한역사

 

인도에 자생하는 맨드라미꽃 http://blog.daum.net/han0114/17049504

일본은 지금의 열도에 존재 한 것이 맞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493

일본규(日本葵, Phoenix roebelenii)원산지 위치?

http://blog.daum.net/han0114/17050564

해조(海棗 Date palm, Phoenix dactylifera)

http://blog.daum.net/han0114/17050050

 

빈랑나무는 삼한역사와 밀접하게 관계되는 나무이다.

왜냐하면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수많은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아야 할 삼한역사는 지구어디 한 군데 편중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더군다나 세계삼한역사를 찾다 보면 자꾸 삼한역사가 북아메리카에 나타나는 사실은 아무래도 북아메리카대륙을 삼한역사 속에 넣지 않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빈랑(檳榔) Areca catechu, 베틀팜(Betel palm)이라고 하는 식물 역시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빈랑은 구충제로 많이 쓰이는 약제인데 조선초기에 일본과 대마주, 그리고 유구국에서 조선왕에게 이 빈랑을 많이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세종 즉위년(1418)-일본국 비전주(肥前州)의 중[佛弟子] 길견창청(吉見昌淸)이 사람을 보내어...호초·정향(丁香)·빈랑(檳榔) 각 2근을 바치다.

세종 3년(1421)-일기주 만호(一岐州萬戶) 도영(道永)이 사람을 보내어...빈랑(檳榔) 15근을 바치다.

세종 5년(1423)-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정성(宗貞盛)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빈랑(檳榔) 1백 26근을 바치다.

세종 6년(1424)-구주 원의준(原義俊)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쳤는데...빈랑자(檳榔子) 10근이었다.

세종 6년(1424)-축주 자사(筑州刺史) 등원만정(藤源滿貞)이 사람을 보내어... 빈랑자(檳榔子) 10근을 바쳤다.

세종 9년(1427)-일본국 일기주(一岐州)의 지주(知主) 원조신중(源朝臣重)이 사람을 시켜...빈랑(檳榔) 3근을 바쳤다.

성종14년(1483)-유구국왕(琉球國王) 상원(尙圓)이 신사랑(新四郞)을 보내어...별폭에...빈랑자(檳榔子) 1백 근을 바쳤다.

안남(安南)에서는 늘 빈랑(檳榔)을 씹는데 손[客]을 대하여도 그만두지 않았으며, 이[齒]는 마치 옷[漆]을 칠한 듯이 다 검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과연 실제 일본, 대마도 그리고 유구, 안남이 조선국에 조공을 바칠 때 근원지가 지금 동남아시아인가 하는 문제이다.

열도에 일본이 있다 하여 그것이 근원지라고 여길 사람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최소한 본 블로그에서 만큼은 수십차례 그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때문에 역사상 일본과 대마도가 지금의 열도라고하고 또는 오키나와라고 하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 있다. 

아직도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의 사고가 문제라고 본다.

믿도록 갇다 바쳐도 받아 믿지 않으니 알 수 없다.

그러나 빈랑나무의 자료들을 보면 명쾌하지 않는 부분이 없지 않다.

빈탕나무, 야자과의 상록교목으로서 그 열매는 빈랑이라고 하는데 모든 자료에서 열대 아시아산이라는 사실을 약속이나 한듯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

열대성기후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인도제도 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아메리카 대륙이 고스란히 빠졌고 중앙아메리카지역을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아시아의 동인도제도의 기후가 중앙아메리카 대륙의 서인도제도와도 똑같다는 이치에서 나올 수 있는 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왜 근대역사는 아시아 동인도제도에 이 빈랑이 나온다고만 명시했을까?

그것은 지금 아메리카대륙을 신천지라 하여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꾸몄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근세기에 벌어진 지명이동과 역사, 문화이동의 결과가 의도적이고 고의적이며 무엇인가 목적에 접목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자료사이트 Discover Life 에는 이 빈랑나무가 열대아시아 말고도 북아메리카 동부에 플로리다주(Florida) 서부에 워싱턴주(Washington), 켈리포니아주(California), 네바다주(Nevada)와 카리브 제도(Caribbean) 쿠바, 도미니카공화국(Dominican Republic) 또는 프에르토리코(Puerto Rico) 외 기타섬과 중아아메리카에 코스타리카(costarica)와 과테말라(Guatemala) 그리고 태평양 중앙에 하와이(Hawaii) 와 사모아(samoa), 피지(Fiji)를 분포지로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빈랑의 대표적인 학명:Areca catechu L 를 나타내는 분포지도에서 말이다.

나머지 아종들은 전부 근세기 19, 20세기에 붙여진 학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여기서 확실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것은 빈랑은 꼭 동남아시아 동인도제도라 불리는 곳에만 원산지 로 분포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분명하게 같은 기후환경조건에서 따져보아도 서인도제도가 존재한다.

이 빈랑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기후환경조건이 갖추어진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서인도제도에 일본과 대마도 그리고 유구, 안남(安南)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안남(安南)에서 빈랑(檳榔)을 씹는데 손님(客)을 면전하여도 그만두지 않았으며, 이(齒)는 마치 옷(漆)을 칠한 듯이 다 검었다 라고 하여 지금의 베트남이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서인도제도에서 위치가 이동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베트남에 원주민들에게 이 빈랑을 씹어 검은 치아를 확인 할 수 있겠끔 얼마든지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근대사가 실제 진실의 역사를 거스린 것이라면 분명 이러한 현상도 거스린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본래의 환경은 숨겨지고 감춰 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확인되고 실제 영역이 중앙아메리카라고 밝혀진다면 신대륙발견은 새빨간 거짓말의 역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근거만 있다면 현재 우리가 세계사로 인정하고 있는 근세기사는 하루아침에 정통성이 사라 질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이 하늘같이 믿고 있는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이기에 충격이 없을 수 없으며 인류가 한동안 맨붕에 빠져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근대사는 모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할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세계삼한역사 부활을 확인하는 시점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Areca]

                                                       [Areca catechu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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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랑나무(檳榔, betel palm)

학명:Areca catechu

 

                                                          Fruiting specimen


Scientific classification

Kingdom: Plantae

(unranked): Angiosperms

(unranked): Monocots

(unranked): Commelinids

Order: Arecales

Family: Arecaceae

Genus: Areca

Species: A. catechu

Binomial name

Areca catechu L.


Areca catechu is the areca palm or areca nut palm, (Malay: Pinang), a species of palm which grows in much of the tropical Pacific, Asia, and parts of east Africa.


檳榔(Areca catechu),與椰子同屬棕櫚科常綠喬木,主幹可長至廿公尺。「檳榔」一詞源於印尼語「pinang」。檳榔原產於馬來西亞,分佈區域涵蓋亞洲斯里蘭卡、泰國、印度等熱帶地區、東非及大洋洲. 除了入藥外, 亞洲有許多地區, 例如: 台灣、湖南、海南島、越南、菲律賓、馬來西亞及印度, 均有嚼食檳榔的風俗。

 

                                             19th century drawing of Areca catechu


키가 25m 이상에 이르며 가지가 갈라지지 않는다. 잎은 깃털 모양으로 갈라진 겹잎이며 아랫부분이 잎 집으로 되어 원줄기를 둘러싼다. 꽃은 흰색이며 육수(肉穗)꽃차례를 이루어 핀다. 빈랑자(betel nut)라고 하는 열매는 지름이 3cm로 둥글거나 타원형인 것 또는 긴 것까지 다양하며 노란색·붉은색·오렌지색 등인데,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열매를 씹고 있다. 빈랑자는 타닌과 알칼로이드를 함유해 두통·설사·피부병·구충 등에 쓰며, 어린잎은 식용한다. 인도, 스리랑카, 타이, 말레이시아, 필리핀 제도 등에서 재배하고 있다.


베텔[betel] 檳郞子[Arecae Semen]

areca nut, pinang, penang이라고도 함.

씹는 껌이나 다른 씹는 제품에 사용되는 2가지 식물에서 나는 열매.

 

Areca nuts from India

 

                                      Areca Palm at Kolkata, West Bengal, India


아시아 남부와 동인도제도에서 널리 재배된다. 세계인구의 1/10 정도가 베텔을 습관처럼 씹는다고 한다. 빈랑자(betel nut)는 야자나무과(椰子─科 Palmae)에 속하는 빈랑나무(Areca catechu)의 씨이며, 나도후추잎(betel leaf)은 후추과(Piperaceae)의 나도후추(Piper betle)에서 얻는다.


빈랑나무는 인도, 스리랑카, 타이, 말레이시아, 필리핀 제도 등에서 재배하고 있는데 가지가 달리지 않는 가느다란 줄기는 키 12~15m 정도, 둘레 약 45㎝에 달한다. 깃털 모양으로 6~9갈래로 갈라져 옆으로 퍼지는 매우 큰 잎들이 나무 꼭대기에 달린다. 열매는 크기가 작은 달걀만하고 껍질은 섬유질이며 그 안에는 씨가 들어 있는데, 씨 속의 배젖은 단단하고 겉에 회색과 갈색의 점이 찍혀 있다. 빈랑나무의 열매는 완전히 익기 전인 8~11월에 거두어들여 껍질을 벗기고 물에 넣어 끓인다. 그 뒤 얇게 썰어서 햇볕에 말리면 암갈색이나 검은색이 된다. 빈랑나무 열매를 씹기 위해서는 작게 조각내어 나도후추잎으로 싸는데, 타액을 분비시키고 자극적인 알칼로이드를 방출시키는 패각회나 추남(Chunam) 알갱이를 함께 싼다. 어떤 경우에는 카르다몬, 심황, 그 밖의 다른 향료를 넣어 맛과 자극을 더해주기도 한다. 이것을 씹으면 붉은 벽돌색 침이 다량 흘러나오며 이침은 입, 입술, 껌을 오렌지 빛 갈색으로 동시에 물들인다. 습관적으로 이 열매를 씹는 사람들의 이빨은 검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열매의 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이빨을 검게 염색했기 때문이다. 빈랑자는 품질이 낮은 아선약의 원료인데, 주 알칼로이드는 아레콜린(arecoline)으로 수의사들이 구충제로 쓰는 약품이다.


藥品名:  檳郞子[Arecae Semen]

 

 

主要 成分: Arecaidine, Guvacoline, Fatty oil, Arecolin, Guvacine, Tannin

基源 : 종려과(Palmae)식물인 빈랑(Areca catechu L.)의 種子.

性味·歸經: 性味 : 溫, 辛, 苦    歸經 :胃, 大腸

效能 : 殺筮 - 多種 腸寄生蟲 疾病消積 - 食積氣滯 脘腹脹痛 大便不爽 痢急後重理氣行水 - 脚氣 水腫

主治 : 片蟲, 蟯蟲,食積氣滯, 脚氣疼痛,條蟲病, 蛔蟲,血吸蟲, 腹脹便難

處方例

用量·用法 :  6 - 12g, 煎服한다.

禁 忌 : 氣虛下陷한 者는 적합하지 않다.

藥理 作用 : 1.健胃作用 2.抗眞菌作用 3.縮瞳作用 4.驅蟲作用 5.抗 Virus作用


應 用 :

A. 驅蟲

1. 빈랑에는 寄生蟲을 驅除하는 작용이 있으며 약리 연구에서도 증명되어 있다. 빈랑은 蟲體에 弛緩性麻痺를 일으키고 약간의 瀉下作用이 있으므로 복약 후 12∼24시간 이내에 蟲體를 體外로 배출할 수 있다. 빈랑은 기타 驅蟲劑에 비하여 효력이 강하며 驅除하는 寄生蟲 종류도 많지만 특히 寸蟲에 대한 효과가 좋다. 안전하고 유효한 驅蟲藥의 하나이다.

2. 빈랑을 驅蟲에 쓸 때는 단독으로 쓰는 경우가 많으나 複方으로 써도 좋다. 단독으로 쓸 때 1회의 용량은 성인은 5錢부터, 소아는 3錢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8錢까지 증량해도 무방하나 최대 1兩을 초과하지 않도록 한다. 얇게 썰어 진하게 달인 액을 저녁 식사 전에 1회 혹은 朝夕으로 나누어 空腹에 복용하면 다음 날 아침 약간 설사를 하는데糞便 중에 마비된 蟲體를 볼 수 있다. 3일간 지속한 후 糞便을 검사하여 치료효과를 판정한다.

3. 체질이 강한 사람은 빈랑을 단독으로써도 되지만 허약한 사람은 山査 . 白朮 . 麥芽 등 健胃藥과 같이 써야 한다.鉤蟲症은 貧血이 따르므로 그 점을 주의하여 빈랑을 복용시키기 전에 補血藥을 쓸 필요가 있다. 寸蟲에는 南瓜子를 넣어 쓰면 蟲體를 직접 분해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고, 蛔蟲의 양이 많을 때는 苦練皮와 같이 쓰면 좋다.

4. 빈랑은 氣味가 苦澁하여 胃粘膜에 약간 자극을 주므로 1회에 1兩을 복용하면 약간의 嘔吐 . 惡心 . 食慾不振 . 泄瀉 등이 보이나 특별한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陳皮나 大棗를 약간 넣어 쓰면 곧 없어진다.

5. 빈랑은 絲狀蟲의 치료에도 유효하다. 이때는 赤芍 . 紅花 . 茯笭을 넣어 쓴다. 혈액검사에서 絲狀蟲菌이 발견되면 즉시 빈랑을 쓰면 좋다.

6. 빈랑은 학질치료에 효과가 있는데 이때는 常山 . 柴胡와 같이 쓴다. 하지만 빈랑자체에 학질原蟲을 죽이는 효과가 있는지의 여부는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


B. 消積止瀉

빈랑은 消積機能이 강하여 소화불량에 기인하는 胃腸積滯 . 上下腹部脹痛 . 大便不爽에 쓴다. 여기에는 木香 . 靑皮 . 大黃 등과 같이 쓴다. 便秘 . 腹痛에는 枳實 . 大黃을, 설사와 痢疾에는 木香 . 葛根 . 神曲을, 痢疾 초기에 복통이 있고 糞便에 粘液이 섞일 때는 木香 . 黃連 . 黃柏을, 여름철의 水樣性 泄瀉 . 消化不良에는 藿香 . 神曲 . 麥芽 등을 같이 넣어 쓰면 좋다.


C. 其他應用

1. 빈랑에는 理氣作用이 있으므로 睾丸炎 . 陰囊腫痛의 치료에 쓴다. 여기에는 小茴香 . 川練子 . 橘核 등과 같이 쓴다.

2. 빈랑에는 祛濕利尿의 효과가 있으므로 吳茱萸 . 木瓜 . 車前子 . 蘇葉 . 橘皮 등을 넣어 脚氣治療에 쓴다. 또 實證의 浮腫에는 澤瀉 . 木通 등을 넣어 쓰면 효과가 현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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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왜,  유구 등이 성종 대 까지 공물로 조공을 바친 것으로 나오는데 이후부터 그런 기록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인가?

나라에 큰 변고가 있었다는 말이다.

중종반정이 그냥 반정이 아니라 변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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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권, 즉위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10월 29일(을사)

일본 비전주 중·일향주 태수·관서도 축전주 석성 관부가 칼·향 등을 바치다

○乙巳/日本國肥前州沙彌吉見昌淸遣人獻劍六把, 求布及虎皮等物, 賜苧麻布各五匹、虎皮五領。 日向州太守源氏島津元久遣人獻香十斤、黑木百斤、川芎十斤、鉛五十斤、桂心、丹木各百斤、漆壺甁一對、丁子香四箇, 賜紬布五匹、緜布百七十五匹。 關西道筑前州石城官府平滿景遣人獻香三十斤、藤五百本、胡椒、丁香、檳榔各二斤、紫檀百本, 賜緜布百五十匹。

일본국 비전주(肥前州)의 중[佛弟子] 길견창청(吉見昌淸)이 사람을 보내어 칼 6자루를 바치고 베(布)와 호피 등의 물건을 요구하므로, 모시와 삼베 각각 5필과 호피 5장을 하사하였다. 일향주(日向州) 태수 원씨(源氏) 도진원구(島津元久)가 사람을 보내어 향 10근, 흑목(黑木) 1백 근, 천궁(川芎) 10근, 납[鉛] 50근, 계심(桂心)과 단목(丹木) 각 1백 근, 심호병(深壺甁) 한 쌍, 정자향(丁子香) 4개를 바치니, 명주 5필, 무명 1백 75필을 하사하였다. 관서도(關西道) 축전주(筑前州) 석성 관부(石城官府) 평만경(平滿景)이 사람을 보내어, 향 30근, 등(藤) 5백 본, 호초·정향(丁香)·빈랑(檳榔) 각 2근, 자단(紫檀) 1백본을 바치므로, 무명 1백 50필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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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3권, 3년(1421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8월 6일(병신)

일기주 만호 도영이 조공을 바치다

 

○一岐州萬戶道永遣人獻丹木一百斤、肉豆蔲二十斤、貝箱一介、麒麟血十兩、檳榔十五斤。 其子宮內大郞亦因使人獻書, 因獻土宜。

일기주 만호(一岐州萬戶) 도영(道永)이 사람을 보내어, 단목(丹木) 1백 근과 육두구(肉豆蔲) 20근, 패상(貝箱) 1개, 기린혈(麒麟血) 10냥쭝, 빈랑(檳榔) 15근을 바치고, 그 아들 궁내대랑(宮內大郞)이 또한 사람을 보내어 편지와 토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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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2권, 5년(1423 계묘 / 명 영락(永樂) 21년) 10월 4일(신해)

대마주 태수 종정성이 토산물을 바치다

○對馬州太守宗貞盛使人來獻土物, 致書于禮曹曰: 貴國聖德神功太上太宗殿下去歲游雲之日, 以霄壤阻遠, 不致薦悼蕪辭, 今月專价至, 得審知。 以我先考執問, 故中腸不勝宿草之餘哀, 冀照。 香七斤, 麒麟血十三斤, 檳榔百二十六斤, 丹木三百七十斤。

命禮曹參議成槪復書曰: 書至, 乃知足下繼承先志, 專人陳慰, 良用爲感。 所獻供祭之資, 謹啓收納。 土宜正布二百五十匹, 就付回价。

貞盛又致書曰: 欽惟貴國聖皇踐阼, 下情慶忭無窮。 虔賀配天之運, 普及遠裔之民。 弊邑産物, 具在別幅。 胡椒一百斤, 龍腦一斤四兩, 靑沙槃四十四箇, 靑沙桶一箇, 藤一百八十二本。

回賜正布一百七十匹。 貞盛, 貞茂之子也。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정성(宗貞盛)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예조에 글을 보내기를,

“귀국의 성덕 신공 태상 태종 전하(聖德神功太上太宗殿下)께옵서 지난해 승하하옵신 날에는, 하늘과 땅이 막히고 멀어서 변변치 못한 말로 슬픈 뜻을 드리지 못하였더니, 금월에 보내신 사절이 이르러, 저의 선고(先考)775) 가 죽은 것을 집문(執問)하심을 살펴서 알았으므로, 마음속으로 해가 묵은 남은 슬픔을 억제할 길이 없나이다. 보시고 살피시기 바랍니다. 향(香) 7근(斤), 기린혈(麒麟血) 13근, 빈랑(檳榔) 1백 26근, 단목(丹木) 3백 70근을 예물로 올립니다.”하였다. 예조 참의(禮曹參議) 성개(成槪)에게 명하여 답서하기를,

“서간이 이르니, 비로소 족하가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사람을 보내어 위문을 진달하니 자못 감사하오. 헌납한 제사에, 쓸 물자는 삼가 계주하여 수납되었소. 토산물로서 정포(正布) 2백 50필을 회환하는 사신에게 부치는 바이오.”하였다. 정성이 또 글을 올리기를,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귀국 성황께옵서 왕위에 오르시니, 하정(下情)에 경사스럽고 기쁨이 무궁하옵니다. 하늘과 더불어 덕을 합하신 운수가 널리 먼 변방의 백성에까지 미치심을 경건히 축하하오며, 폐읍(弊邑)의 산물은 별지[別幅]에 갖추어 올리나이다. 호초(胡椒) 1백 근, 용뇌(龍腦) 1근 4냥쭝[兩], 청사반(靑沙槃) 44개, 청사통(靑沙桶) 1개, 등(藤) 1백 82본입니다.”하였다. 정포(正布) 1백 70필을 회사(回賜)하였다. 정성은 정무(貞茂)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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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4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6월 16일(기미)

일본국 구주 원의준이 토산물을 바치다

○九州原義俊使人獻土宜。 扇子一百把、蘇木二千斤、金襴一段、銅五百斤、犀角二本、朱折敷二十片、絹一十匹、砂金一裹、丹砂四斤、檳榔子一十斤, 回賜正布五百三十匹。

구주 원의준(原義俊)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쳤는데, 선자(扇子) 1백 자루, 소목(蘇木) 2천 근, 금란(金欄) 1단, 동(銅) 5백 근, 서각(犀角) 2본, 주절부(朱折敷) 20편(片), 견(絹) 10필, 사금(砂金) 1봉지, 단사(丹砂) 4근, 빈랑자(檳榔子) 10근이었다. 돌아가는 편에 정포(正布) 5백 30필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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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5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8월 21일(계해)

축주 자사 등원만정이 금란·비단·광견 등을 바치다

○筑州刺史藤源滿貞使人獻金襴一段、羅一段、光絹二匹、生綃十匹、摺扇一百把、檳榔子一十觔、土黃二十筒、胡椒一十觔、犀角二頭、朱盤大小四十片、銅五百觔、蘇枋一百五十觔、紅綃一段、大刀十把、黃丹五觔, 回賜正布五百五十匹。

축주 자사(筑州刺史) 등원만정(藤源滿貞)이 사람을 보내어 금란(金欄) 1필, 비단[羅] 1필, 광견(光絹) 2필, 생초(生綃) 10필, 접는 부채[摺扇] 1백 자루, 빈랑자(檳榔子) 10근, 토황(土黃) 20통(筒), 호초 10근, 서각 2개, 주반(朱盤) 크고 작은 것 40편(片), 구리 5백 근, 소방(蘇枋) 1백 50근, 홍초(紅綃) 1필, 대도(大刀) 10자루, 황단(黃丹) 5근을 바쳤으므로, 정포(正布) 5백 50필을 회사(回賜)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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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35권,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1월 13일(임인)

일본국 일기주의 지주 원조신중에게 《대반야경》 등을 회사하다

○日本國一岐州知主源朝臣重使人求《般若經》, 且請重字印, 仍獻土物硫黃二千斤、檀香一百斤、龍腦五兩、黃(岑)〔芩〕五斤、陳皮一十斤、檳榔三斤、赤銅五十斤、大刀五腰, 回賜《大般若經》一部、圖書一顆、正布八十三匹。

일본국 일기주(一岐州)의 지주(知主) 원조신중(源朝臣重)이 사람을 시켜 《반야경(般若經)》을 구하고, 또 중자인(重字印)을 청하며 인하여 토산물인 유황(硫黃) 2천 근, 단향(檀香) 1백 근, 용뇌(龍腦) 5냥쭝, 황금(黃芩) 5근, 진피(陣皮) 10근, 빈랑(檳榔) 3근, 적동(赤銅) 50근, 대도(大刀) 5자루를 바치므로, 《대반야경(大般若經)》 1부(部), 도서(圖書) 1과(顆), 정포(正布) 83필을 회사(回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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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61권, 14년(1483 계묘 / 명 성화(成化) 19년) 12월 18일(정축)

유구 국왕 상원이 신사랑을 보내어 내빙하고 서계를 올리다

○琉球國王尙圓, 遣新四郞來聘。 其書契曰:

南北萬里, 海路險難, 舟船逞還, 不敢容易。 是以不克累年修聘禮, 而思慕盛德, 未嘗一日相忘, 高明所照, 必諒此心矣。 成化十四年初秋, 護送漂流人兩三輩, 還着於貴國之次, 奉投不腆土宜, 聊表微忱, 辱報以件件之珍産, 所謂璚瑤之報也。 一一寶秘, 豈勝感愧乎? 方今以新四郞爲專使, 以耶次郞爲副使, 致塵露謝忱, 兼啓區區之願望也。 雖新四郞者, 非我國人, 嘗能盡皇華之美, 以達于殿下。 由是今亦以爲專使也, 亮察亮察。 我國累世, 推誠佛敎, 締緝伽藍, 設金像, 安毳徒, 專莊嚴福慧, 然三寶之內, 猶以未具法寶, 爲觖典也。 是故前此, 求(昆)〔毘〕盧法寶一藏, 報書諭曰: “因諸處求去已盡矣。” 今更切望以一藏, 付回介, 俾南極不毛之地, 永霑佛化。 仍求綿紬五千匹、緜布五千匹, 蓋成(昆)〔毘〕盧法寶殿創建之資者也。 希令我願滿足, 荷恩莫大焉。 瑣瑣方物若干, 具在別幅。 伏惟照領, 餘冀珍重。 不悉。

別幅, 香五十斤, 胡椒五百斤, 桂心千斤, 鬱金百五十斤, 檳榔子百斤, 肉豆蔲百斤。

 

유구국왕(琉球國王) 상원(尙圓)이 신사랑(新四郞)을 보내어 내빙(來聘)하였는데,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남북(南北)만리에 바닷길이 험난하여 배로 왕래하기가 쉽지 아니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해 동안 빙례(聘禮)를 닦지 못하였습니다만, 성덕(盛德)을 사모하여 일찍이 하루도 서로 잊을 수 없었으니, 고명(高明)하심으로써 환히 알고 계시는 바이므로 반드시 이러한 마음을 양해하실 것입니다. 성화(成化) 14년 초가을에 표류(漂流)하는 두세 무리를 호송(護送)하여 귀국(貴國)에 돌려보내는 편(便)에 후하지 못한 토산물을 받들어 올려서 작은 정성을 표하였었는데, 물건마다 진귀한 생산품으로 보답하여 주셨으니, 이른바 훌륭한 선물로 보답한다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보배롭게 간직하였으니, 어찌 감사하고 부끄러움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신사랑(新四郞)을 전사(專使)로 삼고 야차랑(耶次郞)을 부사(副使)로 삼아 작은 예물을 바쳐서 정성을 나타내며 겸하여 구구한 소원을 아룁니다. 비록 신사랑이란 자는 우리나라 사람은 아닐지라도 일찍이 능히 황화(皇華)의 아름다움을 다하여 전하(殿下)에게 도달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번에도 전사(專使)로 삼았으니, 밝게 살피소서. 우리 나라는 대대로 불교(佛敎)에 정성을 바쳐서 가람(伽藍)을 짓고 금상(金像)을 설치하고 취도(毳徒)를 두어 장엄(莊嚴)과 복혜(福慧)를 오로지 하였으나, 삼보(三寶)가운데 법보(法寶)를 갖추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여깁니다. 이 때문에 앞서 비로 법보(毘盧法寶) 1장(藏)을 구하였더니, 답서에 유시(諭示)하기를 ‘여러 곳에서 구해 갔기 때문에 이미 다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1장을 돌아오는 사신편에 부쳐 주어서 남극(南極)의 불모지(不毛地)가 불화(佛化)에 영구히 젖게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하여 면주(綿紬) 5천 필과 면포(綿布) 5천 필을 구하는데, 이는 대개 비로법보전(毘盧法寶殿)을 창건하는 자본입니다. 바라건대,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여 주신다면 은혜를 입음이 막대하겠습니다. 자질구레한 방물(方物) 약간이 별폭(別幅)에 갖추어 있으니, 살펴서 받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끝으로 진중(珍重)하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하였다. 별폭은 향(香) 50근(斤), 호초(胡椒) 5백 근, 계심(桂心) 1천 근, 울금(鬱金) 1백 50근, 빈랑자(檳榔子) 1백 근, 육두구(肉豆蔲) 1백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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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05권, 39년(1544 갑진 / 명 가정(嘉靖) 23년) 10월 25일(경인)

의녀와 의원이 왕의 병세에 대하여 말하다

○議政府、中樞府、六曹、漢城府堂上及大司憲鄭順朋等問安, 傳曰: “知道。” 是日醫女長今出言: “去夜三更, 上入睡, 五更, 又暫入睡。 且小便暫通, 大便, 則不通已三日。”云。 醫員朴世擧、洪沈入診脈, 則左手肝腎脈浮緊, 右手脈微緩。 更議藥劑, 五苓散加麻黃、防己、遠志、檳榔、茴香, 五服以進。

의정부·중추부·육조·한성부의 당상 및 대사헌 정순붕 등이 문안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이날 의녀 장금(長今)이 나와서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상께서 삼경(三更)에 잠이 들었고, 오경에 또 잠깐 잠이 들었다. 또 소변은 잠시 통했으나 대변이 불통한 지가 이미 3일이나 되었다.’고 했다. 박세거와 홍침이 들어가 진맥하니 왼손의 간신맥(肝腎脈)은 부(浮)하며 긴(緊)하고, 오른손의 맥은 가늘고 느렸다. 다시 약제(藥劑)를 의논하여 오령산(五苓散)에 마황(麻黃)·방기(防己)·원지(遠地)·빈랑(檳榔)·회향(茴香)을 첨가하여 다섯 차례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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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23권, 17년(1691 신미 / 청 강희(康熙) 30년) 12월 5일(을유)

진주사 민암·강석빈 등이 복명하여, 저간의 사정을 아뢰다

○乙酉/陳奏使閔黯、姜碩賓等復命。 上引見, 問彼中事情。 黯謂: “五使之來, 無可深虞。” 上卽命召入他大臣言其故, 還寢遣使探情之擧。 上又以六臣褒奬事問黯。 黯對曰: “孔子周臣而贊夷、齊, 雖以皇明方孝孺, 我東鄭夢周事觀之, 固無嫌於褒奬節義, 況光廟後世忠臣之說, 亦可見懲意?” 碩賓等所陳亦如之。 上頗樂聞焉。 上聞安南使臣, 亦以朝貢之燕, 問其衣冠制度。 黯對: “以頭着黑紗帽, 而以白銀爲揷角穴, 身服紅錦有紋團領, 而胸背繡龍形, 制樣小於我國之制, 帶率皆黑衣而着黑巾, 巾制甚高, 無論尊卑, 盡被頭髮, 恒嚼檳榔, 對客不輟, 牙齒皆黑。 若着漆然, 其儀形, 大抵慓輕, 而接待之際, 頗知禮讓。 臣聞故判書李晬光, 嘗遇安南使臣, 有贈詩之事, 與之唱酬, 則亦能稍解文字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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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사(陳奏使) 민암(閔黯)·강석빈(姜碩賓) 등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저들의 사정을 물으니, 민암이 다섯 사신이 오는 것은 깊이 염려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곧 명하여 다른 대신(大臣)을 불러들여 그 까닭을 말하고, 사신을 보내어 사정을 정탐하는 일을 도로 그만두게 하였다. 임금이 또 육신(六臣)을 포장(褒奬)하는 일을 민암에게 물으니, 민암이 대답하기를,

“공자(孔子)는 주(周)나라의 신하인데도 백이(伯夷)·숙제(叔齊)를 찬양하였습니다. 명(明)나라의 방효유(方孝孺)와 우리 동방의 정몽주(鄭夢周)의 일로 보더라도 본디 절의(節義)를 포장하는 데에는 혐의할 것이 없는데, 더구나 세조(世祖)께서 후세의 충신이라 하신 말에서도 숨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하고, 강석빈 등이 아뢴 바도 같았는데, 임금이 자못 즐거이 들었다. 임금이 안남(安南)의 사신도 조공(朝貢)하러 연경(燕京)에 갔다는 말을 듣고, 그 의관(衣冠)의 제도를 물으니, 민암이 대답하기를,

“머리에는 검은 사모(紗帽)를 썼는데, 흰 은(銀)으로 뿔[角]을 꽂는 구멍을 만들었으며, 몸에는 무늬가 있는 붉은 비단의 단령(團領)을 입었는데, 흉배(胸背)는 용(龍)모양을 수놓았으되 만듦새가 우리나라의 제도보다 작았습니다. 거느린 사람들은 거의 다 검게 입고 검은 건(巾)을 썼는데 건의 제도는 매우 높았으며, 존비(尊卑)를 막론하고 죄다 머리털을 풀어 헤쳤습니다. 늘 빈랑(檳榔)을 씹는데 손[客]을 대하여도 그만두지 않았으며, 이[齒]는 마치 옷[漆]을 칠한 듯이 다 검었습니다. 거동은 대저 가벼웠으나 접대할 때에는 예양(禮讓)을 자못 알았습니다. 신이 듣건대, 고(故) 판서(判書) 이수광(李睟光)이 전에 안남의 사신을 만나서 시(詩)를 지어 준 일이 있다고 하는데, 함께 창수(唱酬)하여 보니 또한 능히 글을 조금 알았습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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