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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과 자금성 화재이력

한부울 2009. 9. 22. 18:34

경복궁(景福宮) http://blog.daum.net/han0114/17049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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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울에서 경복궁을 위로 보았을 때 한강 흐르는 모습은  영어로 W 형태로 확연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1760년(영조 36)도성도와 경성도(1801∼1822)는 그러한 모습이 일체 보이질 않는다.

옛 화가들이 아무리 눈쌀미가 없었다고 하지만 이런식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경성도, 도성도와 지금 서울형태는 같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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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과 자금성 화재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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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城圖 《廣輿圖》

 

明堂圖와 유사한 윤곽으로 그려진서울지도.

1760년(영조 36)에 慶熙宮으로 개칭된 慶德宮이 원래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조대 전반기의 사정이 반영된 서울지도를 베껴 그린 것으로 보인다.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백악산(북악산)에서 한번 뭉쳐 솟아오르고 그 아래 옛 서울인 도성이 펼쳐져 있다. 서쪽 인왕산 자락이 왼쪽을 가려주고 있고, 가림막이 될만한 산이 없는 동쪽에는 假山 두 군데가 묘사되어 있다. 가산은 허한 지기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얕은 흙언덕을 의미한다. 전혀 높지 않은 가산이 그려진 것은 물론 서울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해당하는 곳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목멱산(남산)이 북한산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그려진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북악산 아래 경복궁의 터와 6조를 비롯한 관아 건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인왕산 자락에는 사직과 경덕궁이, 응봉 자락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가위치하고 있다. 백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開川:청계천)은 도심을 흐르다가 도성을 빠져나가면서 한강에 합류된다. 도성에 딸인 小門 가운데에는 興德門과 廣熙門이 이미 상당히 무너진 상태였음이 표시되어 있다. 지도의 아래쪽에는 두모포에서 서강에 이르는 京江(한강)이 그려져 있다. 경강 주변으로 주요 나루터와 광흥창 등의창고와 망원정 등의 명승지가 표시되어 있다.

해설 : 서울대 규장각 - 배우성

 

 

京城圖《東國輿圖》


1801∼1822년19세기 초엽의 지도책으로 추정되는 《동국여도(東國輿圖)》중에 포함되어 있는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을 그린 지도.


북한산성과 도성과의 거리는 서울의 고지도에서는  거의 무시되는 예가 많으나, 이 지도에서는 공간적인 위치와 넓이가 비교적 현대적인 지도에 가까워졌다. 북한산 줄기와 백악, 인왕, 낙산, 목멱산을 포함하는 내사산(內四山), 그리고 한강과 그 수계(水系)를 자세히 나타내 서울의 자연적인 입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연적인 조건을 이용한 도성과 북한산성, 궁궐과 서울의 상징적인 인공물이 조화있게 표현되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도성 내부의 주요 간선도로와 사대문에서 홍제원을 거쳐 서북쪽으로 가는 의주로(義州路), 혜화문(惠化門)에서 수유리를 거쳐 동북쪽으로 가는 경흥로(慶興路), 수구문(水口門)에서 한강진을 거쳐 남쪽으로 가는 동래로(東萊路) 등 주요 간선도로와 연결 경로를 잘 나타내고 있다. 현재의 여의도에 해당하는 곳에 율도(栗島)라고 표시되어 있어, 밤섬과 여의도는 원래 사주(砂洲)로 접속되어 있던 모래섬이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해설 : 이찬, 양보경 <서울의 옛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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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들에서 지금의 여의도를 비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첫째, 두번째 그림은 경성도를 확대한 것이다.

맨 아래 그림은 구글로 본 현 서울 위성에서 본 모습이다.

첫째 지금 여의도라고 하는 율도 위치는 전혀 일치하지 않고 무엇인가 많이 어긋나 보이며 현재 서울 한강에서 없는 섬이 경성도 오른쪽에 있다. 그 섬 역시 여의도 만큼 큰 섬이다.

그러한 섬이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말이 되는가?

당시 화가들이 없었던 섬을 일부러 그렸겠는가?

지금 서울은 위 도성도(都城圖, 廣輿圖1760)와 경성도(京城圖, 東國輿圖1801∼1822)에 나타나는 서울이 분명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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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남산이라고 하면 서울에서 가장 상징적인 존재로 받아들이지만 역사적으로 따진다면 솔직히 의문투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일제가 만든 한반도 역사 정 중심에 서울 즉 한양, 한성, 경성을 설정함에 있어 그 당시에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겠지만 지금도 도대체 남산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적잖은 시비꺼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남산이다.

남산은 조선초기부터 신성한 영산이라고 여겨져 목멱산(木覓山) 종남산(終南山)·열경산(列慶山) 등으로 불리었다는데 이름이 주는 거대한 상징성과는 현재 남산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산세자체가 너무 보잘 것이 없어 도저히 조선 초기 건국의 기초를 다졌다는 영험한 산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많다.

서울시 자료인 아래 옛 도성의 그림은 친절하게 한글로 경복궁 창덕궁..등등 식으로 설명을 붙인 그림이 있지만 설명자체가 불실하기 짝이 없다.

왜 이렇듯 친절하게(?) 이름을 붙였을까?

거짓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안할 수고를 한 것이다.

원래지형과 산세 그리고 강흐름자체가 전혀 아닌데 어디어디라고 한들 맞아 들어 갈 수가 없다.

어림잡아 여기 저기 설명을 갇다 붙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렇게 따진 다면 남산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한강 흐름도와 남한산성 위치문제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러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처음 역사바꾸기한 놈들이 뉘우치고 밝히고 이실직고 하지 않으면 논쟁만 가열 될 뿐 우리로서 얻을 것은 없는 혼란 그 자체인 것이다.

모조리 때려 잡아도 시원찮을 놈들...

친일파, 친일사학자 그 조무래기들이 아닌가?

 

 

 

 

 

경복궁 창건(1395년)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 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그런데 390칸이나 되는 전각을 1년에 준공했다고 하니 아무리 주야작업을 하였다고는 하나 이거 믿을 수 있는 이야긴가?


창덕궁창건 1405년(태종 5년) 태종(1400년~1418년8):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

 

1919년 창덕궁 인정전사진과 진찬의궤 그림을 보면 첫째 추녀위에 사래 모습이 현격하게 차이가 있다. 한쪽은 우리가 한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밋밋한 형태의 모습이지만 진찬의궤 그림을 보면 사래 끝 모습이 위로 치 솟았다. 이러한 형태는 대륙남방 즉 남경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의 모습이다. 치미 또한 1919년 사진은 있는 둥 없는 둥 하지만 진찬의궤 그림은 날카롭게 하늘로 치 솟았다. 그리고 아래 받침대 기지 또한 진찬의궤 그림을 자세히 보면 3층 3단으로 높여져 계단이 길어지고 계단 정 중앙에 대리석 문양을 길게 얹어 위엄있게 보이지만 1919년 사진은 달랑 단층이라 일반 한옥같은 초라한 모습이다.

 

1919년 사진에 나오는 인정전은 아무래도 일제 총독부가 한반도 기존 건물에 이름만 갇다 붙인 가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19년 일본 동경 반도신문사(東京半島新聞社)에서 발행한 기념 사진]

 

                                                        [진찬의궤 인정전도]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창덕궁 창건 때 지은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복구되었다. 이후 순조 3년(1803) 선정전(宣政殿) 서행각(西行閣)에서 난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이듬해에 중건된 후, 철종 7년(1856) 해체·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 앞뜰의 품계석(品階石)은 정조 6년(1782)에 설치된 것이다. 인정전 좌·우로는 동행각(東行閣) 36칸과 서행각(西行閣) 38칸이 딸려 있다.

 

인정전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조금 가다가 동쪽으로 꺾이며 난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 마당으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꺾여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을 지나면 나타난다. 인정전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사방을 둘러친 행각들이 꽉 찬 듯한 공간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행각과 조응하며 커 보인다.

 

창덕궁은 500여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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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대 (재위기간 1418~1450년)의 법궁 체제

 

[자금성]

1416年(永樂十四年) 明成祖頒詔遷都北京,下令仿照南京皇宮營建 北京宮殿。

1420年(永樂十八年)北京宮殿竣工。

1421年  五月遭雷擊發生大火前三殿被焚毀。

1440年(正統五年)重建前三殿及乾清宮。


창경궁 창건 1483년(성종14년 재위:1469년~1494년.12)

1483년(성종 14년) 동궐(東闕)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자금성]1459年(天順三年)자금성 營建西苑


1553년(명종 8년)9월 큰 호재가 나서 강녕전, 사정전, 흠경각등이 화재.

명종 8년 (1553) 9월 14일에 일어난 불로 근정전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는 창건 이래 최대의 참사가 일어났다.


경복궁 명종(재위기간1545~1567년)대의 재건

1543년(중종 38) 정월에 큰 불이 나서 동궁이 불탔고 그 복구가 아직 착수되기도 전에 경복궁에 다시 불이 나니 1553년(명종 8) 9월 이었다. 이로써 1394년에 창건한 강녕전 ·사정전과 세종 때의 흠경각(欽敬閣)이 모두 회신되고 말았다. 곧 복구공사에 착수, 동궁까지 복구가 시작되어 이듬해 1544년 8월에 흠경각이 중건되고, 9월경에는 대내(大內)의 모든 전각들을 복구하였다. 선수도감(繕修都監)에서 공사를 맡았고, 제조는 영의정 심연원(沈連源) 등이었다.


[자금성]1557年(嘉靖三十六年)紫禁城大火, 前三殿、奉天門、文武樓、午門全部被焚毀, 至1561年才全部重建完工。


선조 25년 4월 1592  임진란에 경복궁을 비롯한 모든 궁궐이 소실


[자금성]1597年(萬曆二十五年)紫禁城大火, 焚毀前三殿後三宮。複建工程直至1627年(天啟七年)方完工。


창덕궁 선조 38년(1605년)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년)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


경운궁(慶運宮)은 덕수궁인데 임진왜란 뒤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는데,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창덕궁, 창경궁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에 마무리되었다.


1617년(광해군 6년)~1620년 사이에 서궐(西闕) 경덕궁을 세웠다.


1623년에는 인조가 경운궁(慶運宮) 서궁(西宮)에서 즉위하였다.


경희궁 창건 광해군(1608년~1623년 3)

서궐(西闕) 경희궁의 전신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경덕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이곳에 왕기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왕기를 없앤다는 뜻으로 광해군 9년(1617) 6월에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인경궁과 함께 공사가 진행된 관계로 재력의 소모가 막대하여 공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왕 15년 3월계해 반정(癸亥反正)으로 폐위되고 말았는데, 그 뒤 경덕궁은 인조가 인목대비를 받들어 일시 이곳에 이어한 일이 있었고 그 후에는 역대 왕들이 수시로 이 궁에 거처한 일이 있었으므로 경덕궁은 왕궁의 하나로 손꼽힐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영조 36년(1760)에 경덕의 궁명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동음이라 하여 이를 피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관청의 필요에 따라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설은 유지되고 궁궐로서의 외양은 지키고 있었다. 광무 5년인 1901년에서 1904년 사이에는 당시 고종이 임어 하고 있던 경운궁과 연결하기위해 운교가 연결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경희궁은 광무연간까지 궁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자금성]

1644年(崇禎十七年),李自成軍攻陷北京,明朝滅亡。李自成向陝西撤退前焚毀紫禁城,僅武英殿、建極殿、英華殿、南薰殿、四周角樓和皇極門未焚,其餘建築全部被毀。同年清順治帝至北京。明末清初任職工部40年官員周九依十分之一縮小比例模型,重建紫禁城成功,此後歷時14年放大原比例復建,將中路建築基本修復。 


창덕궁(昌德宮)인조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 조선 인조 25년 1647년에 재건

인조(1623년 ~ 1649년. 5) : 창경궁 화재 ; 이괄의 난 1624년(인조 2)


[자금성]1683年(康熙二十二年)開始重建紫禁城其餘被毀部分建築,至康熙三十四年基本完工。1694 


창덕궁숙종 30년(1704년) 12월에 대보단이 조성

 

[자금성]

1735年(雍正十三年)清高宗(乾隆帝)即位,此後六十年間對紫禁城進行大規模增建和改建。 

1813年(嘉慶十八年)天理教教徒林清率起義軍攻打紫禁城。 


경희궁은 순조 29년(1829) 10월 경희궁은 화재로 인하여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순조 31년(1831)에 다시 중건 되었고 철종 10년(1859)부터 11년 사이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순조31년(1831)에 다시 중건 창덕궁, 창경궁 대화재로 소실 후 복원


[자금성]1860年(咸豐十年)英法聯軍佔領北京 


1873년(고종10년)12, 경복궁 자경전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876년(고종13년)11, 경복궁 대화재가 발생하여 내전 830여 칸이 소실되었다.

 

                 [뒷배경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지형이다.1896년 덕수궁(德壽宮=경운궁)신축]

 

경운궁(慶運宮)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곳이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자금성]

1900年(光緒二十六年)八國聯軍攻陷北京。 

1911年 武昌起義爆發, 清帝退位。但按照與中華民國簽訂的優撫條件,仍然居住於紫禁城內。

1923年(民國十二年)建福宮發生火災。 

1924年(民國十三年)馮玉祥發動「北京政變」驅逐清帝溥儀。 

1925年(民國十四年)10月10日(中華民國國慶),在原紫禁城的基礎上建立國立故宮博物院。

1933年(民國二十二年)國立故宮博物院文物南遷,以躲避日本侵略。 

1948年(民國三十七年)國立故宮博物院南遷部分文物約有2/3運往台灣。 

1949年2月,解放軍佔領北平後,不久成立故宮博物院。

1956年,陸續有人提出故宮改建計畫,後因種種原因擱置。 

1961年,經政務院批准,北京故宮被定為全國第一批重點文物保護單位。

1987年, 北京故宮被聯合國教科文組織列入「世界文化遺產」名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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