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탐모라국은 지금 대만이다.

한부울 2009. 9. 13. 16:39

 

탐모라국은 지금 대만이다.

 

현대과학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아시아고려, 대륙조선 역사 찾기가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으로 인하여 수준 높은 역사탐구가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근세기에 동양사 재편과정에서 한통속이 된 서세와 일제에 의하여 교묘하게 이리저리 옮겨놓고 숨겨놓은 역사 위치가 구글 지도로 인하여 세세하게 밝혀지고 있는 사실도 이와 같은 과정에서 크게 고무되고 있다.

그러나 국력이 그들보다 못하고 과학적인 구사력도 그들에게 미치지 못한 현실에서 아직도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과거 어마어마한 유라시아 영토를 경영한 바 있는 역사주체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으로 최종 연결된다는 사실은 어떤 경우라도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럼에도 조상님들의 고고한 발자취를 아예 찾을 수도 없도록 만들어진 현대사에서 실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주체 할 길이 없다.

그러나 천지신명께서 도우사 과학발전은 바다 속 깊이 파묻혀 있는 해저유물을 안방에서 검색 분석할 수 있고 땅 속 깊이 파묻혀 있는 지하유적 등까지 현지에 직접가보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닥아 오고 있다.

지금까지 은밀한 곳에 그들이 숨겨놓고 감춰놓은 유적이나 유물들은 엄청날 것이다.

그들이 숨겨놓은 것 중 중요한 몇 가지만 내놓는다면 이렇듯 수고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쉽게 내놓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

그것들을 우리가 온전하게 찾아내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적합한 방도를 찾는 일도 이참에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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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書卷八十一 列傳第四十六 東夷


百濟


百濟之先,出自高麗國。其國王有一侍婢,忽懷孕,王欲殺之,婢云:「有物狀如雞子,來感於我,故有娠也。」王舍之。後遂生一男,棄之廁溷,久而不死,以爲神,命養之,名曰東明。及長,高麗王忌之,東明懼,逃至淹水,夫餘人共奉之。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爲東夷強國。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曆十餘代,代臣中國,前史載之詳矣。開皇初,其王餘昌遣使貢方物,拜昌爲上開府、帶方郡公、百濟王。


其國東西四百五十里,南北九百余里,南接新羅,北拒高麗。其都曰居拔城。官有十六品:長曰左平,次大率,次恩率,次德率,次杆率,次奈率,次將德,服紫帶;次施德,皁帶;次固德,赤帶;次李德,青帶;次對德以下,皆黃帶;次文督,次武督,次佐軍,次振武,次克虞,皆用白帶。其冠制並同,唯奈率以上飾以銀花。長史三年一交代。畿內爲五部,部有五巷,士人倨焉。五方各有方領一人,方佐貳之。方有十郡,郡有將。其人雜有新羅、高麗、倭等,亦有中國人。其衣服與高麗略同。婦人不加粉黛,女辮發垂後,已出嫁則分爲兩道,盤於頭上。俗尚騎射,讀書史,能吏事,亦知醫藥、蓍龜、占相之術。以兩手據地爲敬。有僧尼,多寺塔。有鼓角、箜篌、箏、竽、篪、笛之樂,投壺、圍棋、樗蒲、握槊、弄珠之戲。行宋《元嘉曆》,以建寅月爲歲首。國中大姓有八族,沙氏、燕氏、刀氏、解氏、貞氏、國氏、木氏、苗氏。婚娶之禮,略同于華。喪制如高麗。有五穀、牛、豬、雞,多不火食。厥田下濕,人皆山居。有巨栗。每以四仲之月,王祭天及五帝之神。立其始祖仇台廟于國城,歲四祠之。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皆有城邑。


平陳之歲,有一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其船得還,經於百濟,昌資送之甚厚,並遣使奉表賀平陳。高祖善之,下詔曰:「百濟王既聞平陳,遠令奉表,往復至難,若逢風浪,便致傷損。百濟王心跡淳至,朕已委知。相去雖遠,事同言面,何必數遣使來相體悉。自今以後,不須年別入貢,朕亦不遣使往,王宜知之。」使者舞蹈而去。開皇十八年,昌使其長史王辯那來獻方物,屬興遼東之役,遣使奉表,請爲軍導。帝下詔曰:「往歲爲高麗不供職貢,無人臣禮,故命將討之。高元君臣恐懼,畏服歸罪,朕已赦之,不可致伐。」厚其使而遣之。高麗頗知其事,以兵侵掠其境。


昌死,子余宣立,死,子餘璋立。大業三年,璋遣使者燕文進朝貢。其年,又遣使者王孝鄰入獻,請討高麗。煬帝許之,令覘高麗動靜。然璋內與高麗通和,挾詐以窺中國。七年,帝親征高麗,璋使其臣國智牟來請軍期。帝大悅,厚加賞錫,遣尚書起部郎席律詣百濟,與相知。明年,六軍渡遼,璋亦嚴兵於境,聲言助軍,實持兩端。尋與新羅有隙,每相戰爭。十年,復遣使朝貢。後天下亂,使命遂絕。


其南海行三月,有耽牟羅國,南北千餘里,東西數百里,土多麞鹿,附庸於百濟。百濟自西行三日,至貊國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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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지금 대만 스스로 유구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면 탐라가 유구라는 얘긴데...

사료로 보았을 때 이주, 단주는 분명 유구인 것 같은데 이주가 대만인가는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지금의 대만은 과거 이름이 어떻든 간에 수서에서 말하는 지형조건상 탐라가 확실하다.

 

台灣(台,tāī) : 청 강희제 때(1683년) 대만을 통일한 후 福建省이 관할했다. 1885년 타이완은 정식으로 중국의 20번째 성으로 편입되었다. 타이완의 호칭은 “瀛洲<史記>”, “夷洲<三國志>”, “琉球(唐, 宋, 元代)”로 불리다가 명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台灣”으로 불리게 되었다.

 

영주(瀛洲)란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며 제주도의 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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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鵲)태자=昔脫解설과 한반도=大漢國설로 본 수서(隋書),통전(通典)의 가치

[우리역사의비밀]2007-05-28 19:23:20


1)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대한 첫 번째 기사(記事)

그런데, 이 수서(隋書)에 백제(百濟) 부문에서는 탐라국(耽羅國)의 이칭(異稱)인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대해서 두 번이나 나옵니다.


원문(原文)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3

◉平<陳>之歲, 有一戰船漂至海東<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百濟>, <昌>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賀平<陳>. <高祖>善之, 下詔曰: 「<百濟王>旣聞平<陳>, 遠令奉表, 往復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迹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遠, 事同言面, 何必數遣使來相體悉. 自今以後, 不須年別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使者舞蹈而去.


진(陳)이 평정된 해(589년)에 전선(戰船) 한척이 떠돌다 바다의 동쪽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닿았다. 그 배가 수(隋)나라로 돌아올 적에 백제(百濟)를 경유하니, 여창(위덕왕)이 필수품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냈다. 아울러 사신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진(陳)나라를 평정함을 축하하였다. 고조(高祖 : 수문제를 뜻함)가 이를 착하게 여기어, 조서를 내려 말하길,


“백제왕이 이미 진(陣)이 평정되었음을 듣고, 먼 곳에서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하였으나, 왕래(往來)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서 만약 풍랑(風浪)을 만난다면 인명(人命)이 손상될 것이오. 백제왕의 진실한 심정은 짐이 잘 알고 있소, 서로 거리는 멀다 하여도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어찌 반드시 사신(使臣)을 자주 보내와 서로 다 알아야 되겠소. 이후로는 해마다 따로 조공(朝貢)을 바칠 것이 없소. 짐도 역시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알아서 하시오”라고 하였다. 사신(使臣)이 춤을 추고, 돌아갔다. 즉 수(隋)나라 전선(戰船)이 표류하다가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도착한 것을, 이때 탐라국을 지배하던 ‘백제’가 긴 여행에 필요한 필수품을 가득 실어서 주자, 수(隋)의 고조(高祖)가 고마워서 “우리가 이처럼 위급사항에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이니, 앞으로 조공(朝貢)을 안 해도 되고, 서로가 사신(使臣)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고, 또 이 이야기를 들은 백제 사신(使臣) 역시 조정(朝廷)안에서 ‘춤을 추는’ 파격적인 행동으로 응수(應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사(記事)를 보고 “수(隋)나라 전선(戰船)이 지금 제주도(濟州道)에 도착한 것을 위덕왕(威德王)께서 구출한 것이구만...”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2)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대한 두 번째 기사(記事)


그러나 탐모라국(耽牟羅國)에 대한 두 번째 기사(記事)가 수서(隋書) 백제국 부분에서 또 한번 거론되고 있습니다. 


원문(原文)

#隋書卷81-列傳第46-百濟-07/07

◉其南海行三月, 有<躭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云.


그 ‘남쪽 바다’로 삼개월을 가면, 탐모라국(耽牟羅國)이 있는데, 남북(南北)이 천여리(千餘里)이고, 동서(東西)가 수백리이다.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부용(附庸)한다. 백제에서 서쪽으로 삼일(三日)을 가면 맥국(貊國)에 이른다.


여기서 탐모라국(耽牟羅國)의 지형의 모습이 나옵니다. 즉 남북(南北)으로 1,000여리 되고, 동서로는 수백리가 되는 지형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대만(臺灣)이 꼭 이런 지형입니다. 섬 전체가 남북(南北)으로 길게 되어있는 형태인 것이지요. 반면 제주도(濟州道)

는 동서(東西)로 긴 모양입니다.

[우리역사의 비밀: 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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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台灣)
남북거리 379.03㎞x 2.45= 928.6里

동서거리 133.93㎞x 2.45= 328.1里

 

 

 

                                                 野生的台灣梅花鹿已經瀕臨絕跡


 

                               대만 원주민·비남족의, 달의 형상을 한 석주. 1896년경 촬영.

 

台灣是個盛產麞鹿海島 대만은 노루와 사슴이 넘치게 생육되는 해도이다.

 

[클릭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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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洲


夷洲,是陳壽所著之《三國志·吳書·孫權傳》中所提到的一個地名,大部分的中國大陸學者和部分台灣夷洲 學者認為就是今天的台灣,但是也有一些台灣學者對於這一說法提出質疑。


現存史料中的相關記載

在《三國志·吳書·孫權傳》中,有以下這樣的一段敘述:


黃龍二年春正月,魏作合肥新城。詔立都講祭酒,以教學諸子。遣將軍衛溫、諸葛直將甲士萬人浮海求夷洲及亶洲。亶洲在海中,長老傳言秦始皇帝遣方士徐福將童男童女數千人入海,求蓬萊神山及仙藥,止此洲不還。世相承有數萬家,其上人民,時有至會稽貨布,會稽東縣人海行,亦有遭風流移至亶洲者。所在絕遠,卒不可得至,但得夷洲數千人還。


由於該段敘述語焉不詳,從這段文字描述當中,並無法確知文中所指的「夷洲」和「亶洲」是在那裡。不過,沈瑩(三國時代吳國丹陽太守)在其所著的《臨海水土志》(約完成於西元268年至280年之間),對於「夷州」(並非「夷洲」),又提供了以下的線索:


夷州在臨海郡東南,去郡二千里。土地無霜雪,草木不死。四面是山,眾山夷所居。山頂有越王射的正白,乃是石也。此夷各號為王,分劃土地,人民各自別異,人皆髡頭,穿耳,女人不穿耳。作室居,種荊為蕃鄣。土地饒沃,既生五穀,又多魚肉。舅姑子父,男女臥息共一大床。交會之時,各不相避。能作細布,亦作斑文。布刻畫,其內有文章,好以為飾也。……

 

史明對於該段記載有以下的詮釋:


從「夷州」這個名詞,可以想像乃是夷人所住之異地,並且距離位於長江河口的臨海郡有二千里之遠,氣候風土都比長江一帶溫暖,所以也能看出比東吳更位於南方、所住的夷人。從種族上看來,當然與漢人不同,風俗習慣也有不同於漢人的記載。因此,根據這些記載的內容來說,往往會使後代的學者輕易的斷定夷州就是指現在的台灣。


值得注意的是,沈瑩所著該書,本是已散失不全,只因為在宋代的《太平御覽》卷780《東夷傳》引用其一部份,所以才流傳下來。


認為夷洲是台灣的說法


最早引用該段史料,並論證夷州就是台灣的,可能是台灣日治時期時對台灣歷史研究貢獻卓著的日本學者伊能嘉矩。在他的成名著作《台灣文化志》中,他正是引用沈瑩的該段文字,以此來推斷其所描繪的「夷州」應該是現今的台灣(見伊能嘉矩 1985,25-6)。以後,又有日本學者市村瓉次郎、和田清等人,利用《臨海水土志》中之記事,和《隋書·流求傳》的記載相互比較,而同意依能嘉矩這樣的解釋方式。在1950年代,台灣中央研究院的人類學者凌純聲,也是繼續從沈瑩的這段敘述中著手,另外再配合民族誌的資料,而論證夷州應該是台灣才對。


在這些屬於學術研究範疇的考證出版以後,就逐漸有大量屬於政治宣傳性質的著作,開始「引用這個結論」而直接宣稱夷州就是台灣。比如說,在中央研究院近代史研究所學者郭廷以的《台灣史事概說》(1954),以及大陸學者陳碧笙的《台灣人民歷史》(1993) 中,他們也都引用沈瑩的該段敘述,而宣稱夷州就是台灣。1993年由中華人民共和國國務院台灣事務辦公室國務院新聞辦公室所提出的《台灣問題與中國的統一》白皮書中採用「台灣古稱夷洲」的説法,並有以下這樣的說明:


台灣自古即屬於中國。台灣古稱夷洲、流求。大量的史書和文獻記載了中國人民早期開發台灣的情景。距今一千七百多年以前,三國時吳人沈瑩的《臨海水土志》等對此就有所著述,它們是世界上記述台灣最早的文字。公元三世紀和七世紀,三國孫吳政權和隋朝政府都曾先後派萬餘人去台。


認為夷洲不是台灣的說法


然而,台灣的一些學者認為以目前所知的而言,只能推斷「夷洲『有可能』就是台灣」,但是,並無法確實肯定這個陳述。對這個陳述質疑的相關理由,至少有以下幾點:


1. 史明(1980,25)指出,如果就《三國志》中的記載而言,「夷洲」這個名稱,正和「亶洲」一樣,「從古時代就是屬於那種不能確定到底是指何處的一種傳說地名之類」。我們可以再看一次陳壽(nd)關於亶洲的記載:「亶洲在海中,長老傳言秦始皇帝遣方士徐福將童男童女數千人入海,求蓬萊神山及仙藥,止此洲不還(重點是加上的)」。

2. 若把「山頂有越王射的正白,乃是石也」這一段記載與今日的台灣聯繫起來,在歷史上或地理上、更是找不出可以憑信的任何痕跡(史明 1980,25)。

3. 如果把中國古籍中有關夷人的記載整理一下,同時也參考《山海經》的「甌在海中閩在海中」這樣的敘述,就可知昔古時代從長江流域要到福建地方,也是要依靠海上交通來完成的。「所以夷州極可能是對散居於華南沿海各島」(郭弘斌 2003) 。

4. 柏楊否定夷洲是台灣的說法,在《柏楊版資治通鑑》18,《三國鼎立》(1985)中指出夷洲是琉球,亶洲是日本。


史明(1980,26)對於「夷洲到底是不是台灣」的這個問題,提出了以下的結論,即這個名稱「只能當做研究古代台灣的一種參考而已。若想進一步予以論斷,必得重新覓取明確的資料才有可能」。或者用Wen-hsiung Hsu(1980, 5)的看法來講,「夷洲」(I-chou)這個名詞,「可能是,也可能不是台灣」。類似的看法,還可以見之於戴天昭(1996,3);郭弘斌(2003);林柏維(2003);以及梁嘉彬(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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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灣歷史綱要


三國時代的吳國黃龍二年(西元230年),吳王孫權派遣將軍衛溫、諸葛直率領l萬名官兵“浮海求夷洲及亶州”,到達了夷洲。夷洲在什麼地方歷來都有爭論,有的認為在今天日本或沖繩,但大多數學者認為夷洲即今日台灣。有的學者指出:“夷洲之方向,地勢,氣候,風俗與台灣極相似,舍台灣外無可指,且近時日本人曾在台北發現指掌型之古磚,推其時代即屬於三國,故夷洲之為台灣,絕無疑義。”有的學者認為,成書于西元264年至280年的《臨海水土志》所記的夷洲,在地理方面無一不與今日之台灣相合,如方位:“夷洲在臨海東南”,臨海郡北起浙江寧海一帶;氣候:夷洲“土地無雪霜,草木不死";物產:“土地饒沃,既生五穀,又多魚肉”;文化特徵:如鑿齒,“女已嫁,皆缺去前上一齒”,台灣北部的泰雅人,直到明清時期,仍有此風,男女青年相愛,男“鑿上顎門旁三齒授女,女亦鑿三齒付男,期某日,就婦室婚,終身依歸以處”。又如獵頭,勇士“戰得頭,著首還,中庭建一大材,高十余丈,以所得頭差次挂之,歷年不下,彰示其功”。台灣土著居民長期保持這種風俗,“所屠人頭,挖去皮肉,煮去脂膏,涂以金色,藏諸高閣,以多較勝,稱為豪俠雲”。據上所述,《臨海水土志》描述的夷洲就是當時台灣的情況。吳國孫權派遣官兵前往夷洲,規模很大,時間很長,前後經歷一年之久,衛溫、諸葛直到達夷洲後,由於疾疫流行,水土不服,“士眾疾疫死者十有八九”,不得不帶領數千名夷洲人返回大陸。這是中國軍隊第一次到達台灣。同時,由於這次行動,使丹陽太守沈瑩有可能通過到過夷洲的官兵和由官兵帶回的夷洲人,詳細地了解夷洲的情況,寫出《臨海水土志》,留下了世界上有關台灣情況最早的記述。


隋煬帝于大業三年(西元607年)下令羽騎尉朱寬與海師何蠻一同入海,經過艱難的航行,終於到達流求(台灣)。因“言不相通,掠一人而返”。第二年,隋煬帝又令朱寬再去慰撫,但“流求不從”,僅取其布甲而返。大業六年(西元610年),派遣武賁郎將陳稜及朝請大夫張鎮州率領東陽(今浙江金華、永康等地)兵萬餘人,自義安(今廣東潮州)起航,到高華嶼,又東行二日到程鍾嶼,再航行一日,便至流求。當地土著居民“初見船艦,以為商旅”,相繼前來貿易。這說明當時已常有大陸商人在那裏通商,所以當地居民見到船艦才習以為常。陳棱要求當地酋長歡斯渴刺兜投降,遭到拒絕,於是隋軍“虜其男女數千人,載軍實而還”


隋代稱台灣為流求,但《隋書》中的流求指的是什麼地方,歷來有不同的看法。早在19世紀末,荷蘭學者施列格(Gustave Schlegel)在《古流求國考證》中從地理方位、王居及民居、政治、衣飾、兵器、戰爭、學術與宗教、外貌風俗及習慣、喪事、動物等l2個方面,詳細論證古中國地理家記載之流求,即今日之台灣。此外,大陸、台灣和日本的許多學者也都主張流求即台灣。但也有少部分學者認為流求即今日之沖繩。如果用《隋書·流求傳》與《臨海水土志》互相印證,並與台灣土著居民的生活形態相對比,可以看出其中的歷史淵源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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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台灣을 부르던 칭호


1.夷洲:


在陳壽的《三國志》<孫權傳>中曾提到:公元230年(黃龍2 年) 東吳孫權遣將率領甲士萬人浮海進征夷洲,俘虜數千人而還。這裡的夷洲,有許多學者認為就是指今天的台灣。

然而,《三國志》中有關「夷洲」的敘述卻不多,僅見於〈吳書〉所記載:「(黃龍) 二年春正月, …遣將軍衛溫, 諸葛直將甲士萬人浮海求 夷洲及亶 (ㄉㄢˇ) 洲。…但得夷洲數千人還。」

 

                                                             [三國志孫權傳]        

  

另外,南北朝時期的沈瑩,在其 《臨海水土志》,則對夷洲有更詳盡的描述:「夷洲在臨海(浙江台州一帶)東南,去郡二千里,土地無霜雪,草木不死,四面是山。眾山夷所居,…各號為王,分劃土地人民,個自別異。人皆髡頭穿耳,女人不穿耳。作室居眾﹐荊(一種多刺的灌木)為蕃障。土地饒沃,既生五谷(穀)﹐又多魚肉。舅姑男婦﹐臥息共一大床,交會之時,各不相避。能作細布,亦斑文刻畫。…用鹿酪[骼?]為矛以戰鬥,磨礪青石以作矢鏃刀斧…如有所召,取大空材以著中庭,以大杵旁舂之,聞四五里如鼓,民人聞之均馳赴會。…歌似犬嗥,以相娛樂。得人頭,砍去腦,取其面肉,留置骨。…中庭建一大材,高十餘丈,以所得頭差次掛之,歷年不下,彰示其功。」


沈瑩的敘述,確實有相當的程度與台灣早期原住民的生活情況相符,而許多學者主要也是引用沈瑩的敘述來證明夷洲是指今天的台灣。不過,除了沈瑩的記載之外,卻沒有更多的史料來證明夷洲就是台灣,因此,也有不少學者仍對夷洲即台灣的說法存疑。 

 

                                                           [臨海水土志之記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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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流求:


流求也是台灣的舊稱,又有琉球、留仇、留求、流虯、小流求等別稱。

根據《隋書》〈東夷列傳〉記載:西元7世紀初大業年間,隋煬帝曾派朱寬兩次到流求國,結果因語言不通而僅掠奪一人及布甲而返。

兩年後,不死心的隋煬帝再派陳稜(音ㄌㄥˊ)、張鎮州率兵,從義安(今廣東潮州)渡海攻擊流求國,雙方大戰,流求人不敵,結果聚落被毀,有數千男女被俘虜。只是這場軍事行動過後,中國大陸和流求國間,似乎又沒什麼聯繫了。

 

                                                             [隋書中的流求國]  

       

何以見得流求就是指今天的台灣呢? 依據《宋史》〈外國列傳〉記載:「流求國在泉州之東,有海島曰澎湖。」再根據元朝馬端臨之《文獻通考》所載:「流求國,居海島,在泉州之東。有島曰彭(澎)湖,煙火相望,水行五日而至。」無論從地理位置,或是船行航程來看,流求很有可能是今天的台灣。

 

                                                          [文獻通考中的琉球]  

 

                                                              [宋史中的流求國]     

 

                                                           [新元史中的琉求]   

 

當年隋朝軍隊與流求住民的決戰戰場,有學者考證第一次可能在今天的鹿港一帶,第二次則在大甲溪一帶。流求即台灣的說法,目前已為大多數學者所接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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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雞籠山、北港: 


《明史》<外國傳>中有「雞籠山」:「雞籠山在澎湖嶼東北,故名北港,又名東番,去泉州甚邇。地多深山大澤,聚落星散。無君長,有十五社,社多者千人,少或五六百人。無徭賦,以子女多者為雄,聽其號令。雖居海中,酷畏海,不善操舟,老死不與鄰國往來。」

 

                                                         [明史中的雞籠山]    

      

雞籠山,在今天是指位於九份與金瓜石的界山,而在明代,則主要是指台灣北部地區,進而成為全島的名稱。值得注意的是,當時雞籠山與日本、琉球、呂宋、朝鮮、安南等國,都被列在<外國傳>中。

 

                                                             [雞籠山相關位置]     

 

                                                                 [雞籠山]    

 

                                                              [明史中的雞籠山]

 

                                                               [雞籠山今貌] 

 

北港,又有笨港、魍港、蚊港之別稱,主要是指今天雲林北港與嘉義新港一帶,與雞籠山一樣,在明代以一個地區成為全島之名稱。

 

                                                            [北港相關位置]     

 

                                                       [以北港為名的台灣地圖]     

 

                                                                  [笨(北)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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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東番:


明初將台灣稱為「東番」,乃指東方番民之意。

明代的陳第著有《東番記》一書,書中主要描寫當時台灣原住民的生活情形,為目前研究早期台灣早期原住民的重要一手資料。

 

                                                                  [東番記]

 

[東番]    

 

據《明史》的記載,永樂年間鄭和下西洋時,東西洋各小國無不對鄭和爭相獻貢,只有東番遠避不至,鄭和因而討厭東番,而要求東番住民頸部掛上銅鈴,把東番比擬為狗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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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大員:

大員,又有大圓、台員、大灣、大冤、台窩灣等別稱。

在陳第的《東番記》中,已經出現了大員的名稱。另在明末周嬰所著之《遠遊編》,載〈東番記〉一篇中,則稱台灣為台員。

大員、大圓、台員、大灣、大冤、台窩灣這些都是來自平埔族的譯名,是原先住在一鯤身島(今台南安平)一帶的平埔族土著的一個部落的名稱(社名)。與雞籠山、北港一樣,以一個地區成為全島的稱呼。

 

                                                               [大員相關位置]    

 

                                                                      [大員]    

 

                                                                 [大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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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FORMOSA(福爾摩莎)


目前一般西方人除了Taiwan之外,還習慣稱台灣為Formosa,事實上,Formosa的名稱,早在16世紀中葉就已經出現,現在我們請李筱峰教授為我們說明Formosa這名稱是怎麼來的。     

 

                                                      [以福爾摩莎為名的台灣地圖]    

 

                                                           [立霧溪口今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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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高砂國:


日本戰國時代末期,稱台灣為「高砂國」,又稱為「高山國」。

日本高砂國說法來源一說源自當時打狗(今高雄)一平埔族之部落名稱塔加沙古社﹔一說是打狗港土名「打狗山仔」。

 

                                                                   [打狗山]      

 

                                                                  [柴山今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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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東寧:


鄭經撤入台灣後,改國號叫做─「東寧王國」 自稱「東寧國主」,東寧也成為台灣的舊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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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ESE have been going to Taiwan since the time of the Three Kingdoms (三国时期) nearly 2000 years ago. But the island wasn't called Taiwan then. The island was called "Yizhou (夷洲)" and it later became called "Liuqiu (琉球)". It wasn't known as Taiwan until 1727.

 

蓬莱、贷舆、员峤、瀛洲、岛夷、夷州、琉求


1.海外仙山- 《列子.汤问篇》
2.岛夷 - 《禹页》
3.夷洲 - 汉代至三国
4.流求 - 隋至元代称
5.小流求 - 明朝初年朝初年,中山国王察度到京城纳贡(中山国是冲绳)被封为流求,后来发现东南沿海有一块面积更大的岛屿,改称中山国为大流求,台湾为小流求 6.东都东宁- 郑成功
7.埋冤 - 连横的《台湾通史》
8.高砂 - 日本人称
9.Formosa - 1554年葡萄牙制图家罗伯.欧蒙( Lopo-Hemem)绘制「世界地图」局部首次出现台湾(Formosa)一名
台湾 - 明代万历时官方正式用台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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