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경복궁(景福宮)

한부울 2009. 9. 19. 18:42

경복궁과 자금성 화재이력 http://blog.daum.net/han0114/17049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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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아래 사진은 1906년에 촬영한 경복궁이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500년 전통역사가 살아있는 조선의 궁전이 아무리 한반도라고 하지만 이렇게 허술하였다니 참으로 민망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잡초가 우거지고 전혀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곳처럼 음산한 경복궁 궁전

1865년(고종2년) 음력 4월 2일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1868년 6월 말에 공사를 마쳤다는데 3년이 걸렸다.

동양의 제일 궁전으로 건축하여 실추된 왕권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으로 새롭게 건조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당백전을 끌어 모았던 대원군의 말과 다르게 3년 공사로 마칠 수 있는 궁전이라면 과연 어떤 규모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1597年(萬曆二十五年) 紫禁城大火,焚毀前三殿,後三宮。

複建工程直至1627年(天啟七年)方完工。 


임진왜란 개전 년도인 1592년에 경복궁이 소실되었다고 반도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북경 자금성 역시 임진왜란 끝나기 1년 전(1597) 대화재가 발생하여 전소하였다고 하고 다시 재건한 공정기간이 1627년까지이니 30년이나 걸렸다고 나온다.

이 정도 되어야 중건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경북궁을 1868년에 중건하였는데 이런 모습이라니...

참으로 철종朝 부터 조선역사는 수수께끼투성이다.


또 한가지 경복궁 진위 문제에서 사진있는 뒷 산 배경을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붉은 원이 그려진 사진 말고 그 아래사진은 서안 지금의 장안이라고 생각되는 배경으로서 경복궁 배경 산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산세가 크지만 완만한 흐름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배경의 산 모습은 중앙이 뾰쪽하여 확 들어난다.

바로 이 산이 서울 북악이다.

그래서 한반도 경복궁임을 알 수 있다.

 

과연 경복궁은 한반도에 있는 궁이 맞는가?

1906년에 촬영했다면 한일 합방전인데  잡초가 우거진 음산한 궁전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서안 장안의 경복궁은 어디에 있는가?


한반도 경복궁은 옛 한반도에 그 당시 남아 존재하였던 궁전이라고 보이며 그것을 일단 수리하고 보완하여 일제가 경복궁이라고 지칭하였고 그것을 우리가 비판없이 받아들이게 된 연유라고 본다.


조선말 경복궁은 아래 1880년에 촬영되었다는 사진( 대원군의 중건 후 모습)의 배경이 과연 어디인지 확실하게 밝혀진다면 그곳이 바로 실존한 경복궁이 있었던 곳이다.

서안일 가능성이 많다. 

 

 

 

 

 

                                       [위의 사진은 1906년에 촬영한 한반도 경복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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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 

 

景福宮。 【在白嶽山南。】 燕寢曰康寧殿, 東小寢曰延生殿, 西小寢曰慶成殿, 又其南曰思政殿, 【視事之所】 又其南曰勤政殿, 【受朝之所】 內門曰勤政內, 東門曰日華, 東閣樓曰隆文, 西閣〔樓〕曰隆武。 永濟橋【在勤政門外。】、弘禮門【在永濟橋南。】、慶會樓【在宮西垣內, 環樓爲池。】、東宮【在建春門之內】、宮城。【周回一千八百十三步。】 東門曰建春, 西曰迎秋, 南曰光化。【門樓二層, 樓上懸鍾皷, 以限晨夕, 警中嚴。 門南左右分列議政府、中樞院、六曹、司憲府等各司公廨。】

 

경복궁(景福宮)【백악산(白岳山) 남쪽에 있다.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 동쪽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전(延生殿), 서쪽 작은 침전을 경성전(慶成殿), 또 그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정사를 보는 곳. 】, 또 그 남쪽을 근정전(勤政殿)【조회를 받는 곳. 】, 안문[內門]을 근정(勤政), 안 동문(東門)을 일화(日華), 동각루(東閣樓)를 융문(隆文), 서각루(西閣樓)를 융무(隆武)라 한다.  영제교(永濟橋)【근정문 밖에 있다. 】홍례문(弘禮門)【영제교 남쪽에 있다. 】경회루(慶會樓)【궁 서쪽 담안에 있는데, 둘레가 못으로 되어 있다. 】동궁(東宮)【건춘문(建春門) 안에 있다. 】
 
궁성(宮城)【둘레가 1천 8백 13보(步)이다. 】동문(東門)을 건춘(建春), 서문(西門)을 영추(迎秋), 남문(南門)을 광화(光化)라 한다.【문루(門樓)가 2층이요, 누 위에 종고(鍾鼓)를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리어 때알림을 엄하게 한다. 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議政府)·중추원(中樞院)·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 각사(各司)의 공해(公廨)를 벌려 놓았다. 】

 

경복궁(景福宮)은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이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이다. 풍수 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창건 


1395年, 朝鮮太祖李成桂令鄭道傳監督修建宮殿。

景福宮所在的位置,原有高麗肅宗修建的宮殿,忠肅王時加以擴建,辛禑王和恭讓王遷都漢城時曾居於此。

至朝鮮王朝開國,尚有延興殿等建築保存完好。

但其面積狹小,李成桂下令在高麗故宮遺迹的基礎上加以擴建,並興建新的建築。

1396年1月, 修建工程開始, 同年9月初步竣工, 命名為「宮城」。

周圍1813步,有四門,正南為光化門,門外東西設兩府、六曹、台院。正北為玄武門。正東為建春門。正西為迎秋門。

宮城內有宮殿建築500多棟, 正殿曰勤政殿。

此後約200年, 作為朝鮮王朝的正宮使用

 

[클릭원본]

                                            [대원군의 중건 후 모습....1880 경북궁]

 

 

                                                            [서안 구글모습]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태조실록 6권 3년 9월 9일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은 이때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勤政門 : 남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 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 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 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 때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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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경복궁의 역사적 사실

 

1. 태조때

 

경복궁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직사각형의 윤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남에 광화문, 정북에 신무문(神武門), 동에 건춘문(建春門), 서에 영추문(迎秋門)을 세웠다. 근정전(勤政殿)은 수조지소(受朝之所)로서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남북이 길고 동서축이 짧은 직사각형 터전에 조성하였으며, 보평청(報平廳)의 남쪽에 위치한다.

 

2. 창건이후

 

경복궁 공사는 1398년(태조 7) 1월에 궁성을 쌓을 터전을 간심(看審)하기 시작하여 2월에 책임자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가 임명되고 문무 각품(文武各品)에게 쌓을 돌을 바치게 하여 진척되었다. 6월에 궁성 남문(光化門)을 착공하고, 7월에 경기좌도와 충청도 군인 3,700명으로 공사를 진행시켰다. 8월에 무인난(戊寅亂)이 벌어지고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자 공사는 모두 중단되었다가 1399년(정종 1)에 재개하여 완성하였고, 1426년(세종 8) 10월에야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이 정하여졌다.

 

근정전 앞 제1문이 홍례(弘禮), 제2문이 광화(光化), 근정전의 동쪽 협문(夾門)이 일화(日華), 서쪽이 월화(月華), 궁성 동쪽이 건춘, 서편이 영추, 근정전 앞 돌다리를 영제(永濟)라 하였다. 정종이 개성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서 경복궁은 공궐(空闕)이 되고 집들은 창고 등으로 이용되어, 1405년(태종 5)부터 1413년까지 근정전 서랑(西廊)이 사기(史記)를 장치(藏置)하는 사고(史庫)로 이용되고, 1406년부터 1412년까지는 군량미의 비축창고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1412년 4월 경회루(慶會樓)를 개조하고, 태조 때의 궁궐 북서쪽에 있는 소규모의 건물을 궁궐 서쪽으로 옮겨 지었는데, 연못도 새로 파고 누각도 새로 지었다. 태종은 서울에 다시 도읍을 옮기면서 창덕궁(昌德宮)을 지어 머물렀기 때문에 경복궁은 계속 빈 궁궐로 남아 있었으나, 명나라 사신의 접대 등은 경복궁에서 하였고 그들과의 연회를 위하여 경회루의 확장이 절실하여졌다. 이 작업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고, 물 가운데 큰 집을 짓는 일의 기술상의 어려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태종은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완성하도록 하였다.

 

한편 세종은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다. 따라서 경복궁 여러 건물의 보수가 시행되어 1429년에사정전(思政殿:태조 때의 報平廳)과 경회루의 중수공사가 착공되어 사정전은 4월에 중수공사가 완료되었으나 경회루는 계속되었다. 이 때의 작업은 《성종실록》에 세종시소창(世宗時所創)이라 할 만큼 대규모이고 완벽한 시공이 진척되었다.

 

1430년에 광화문의 개구(改構)의 역사(役事)가 시작되어, 1431년 4월에 완성되었으나 전혀 새롭게 지었던 모양이다. 또 1432년 문소전(文昭殿)을 새롭게 지었는데, 이는 정월에 착공된 것으로 선공감 제조 안순(安純) ·홍리(洪理)와 예조판서 신상(申商), 지리(地理) 이양달(李陽達)이 원묘(原廟)의 터전을 궁의 북쪽에 잡아 공역을 일으켰다. 원묘 문소전(원래의 仁昭殿)과 광효전(廣孝殿)이 따로 있었던 것을 모아 한곳에 통합 경영하기 위한 공사였는데, 후전(後殿) 5칸, 정전(正殿) 3칸(四面에 補)의 규모로 그 해 11월에 완공되었다.

 

이듬해인 1433년에 강녕전(康寧般)이 좁고 어두워 임금 처소로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여 고쳐 짓기 시작하여 9월에 준공하였다. 또한 이 해에 궁성 북쪽에 있다가 없어진 북문을 다시 짓는 작업을 진행하여 신무문(神武門)을 다시 두었다.

 

1437년 7월에 과학적 구조물인 신루(新漏)가 제작 완료되어 사용하게 되었으므로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준공시켰고, 또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고심하여 완성시킨 자격루(自擊漏)를 설치하기 위하여 1438년 1월에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완성하였다. 그 해 5월에는 정선방(貞善坊) 종부시(宗簿寺) 서쪽 언덕 위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문소전(文昭殿)의 북동쪽으로 옮겨 짓는 일이 완료되었으며, 1456년(세조 2) 3월 후원(後苑)에 취로정(翠露亭)을 짓고 연(蓮)을 파종하였는데, 총책임자는 금천군(錦川君) 박강(朴薑)이었다.

 

1461년 11월에 수리도감(修理都監)을 열고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를 도제조로 삼아 세자궁(世子宮) 짓는 일에 착수하여 이듬해 12월에 준공하였으며, 1473년(성종 4) 7월경 경회루 수리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3월에 완료되었고, 이 때에 근정전 ·홍례문 ·광화문에 청와(靑瓦)를 덮고자 하는 논의가 대두되었으나 반대에 부딪혀 중지되었다.

 

1474년 8월 경회루 공사가 다시 시작되니 수리만으로는 흡족하지 못하여 헐어내고 다시 짓는 공사를 시작, 1475년 5월 준공하였다. 이 때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이 해 10월에는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분을 위하여 옛 세자궁을 수리하여 연은전(延恩殿)을 설치하였으며, 1505년(연산군 11) 11월에 경복궁의 보루각(報漏閣)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간의대(簡儀臺)도 철거하였다.

이듬해 연산군은 경회루 못에 만수산(萬壽山)을 만들고 못 안에 수십 척의 배를 띄우고 흥청(興淸) ·운평(運平) 등과 더불어 즐겼다. 그러나 1543년(중종 38) 정월에 큰 불이 나서 동궁이 불탔고 그 복구가 아직 착수되기도 전에 경복궁에 다시 불이 나니 1553년(명종 8) 9월이었다.

 

이로써 1394년에 창건한 강녕전 ·사정전과 세종 때의 흠경각(欽敬閣)이 모두 회신되고 말았다. 곧 복구공사에 착수, 동궁까지 복구가 시작되어 이듬해 8월에 흠경각이 중건되고, 9월경에는 대내(大內)의 모든 전각들을 복구하였다. 선수도감(繕修都監)에서 공사를 맡았고, 제조는 영의정 심연원(沈連源) 등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년 4월에 왜군이 쳐들어와 13일에 부산성이 함락되더니 29일엔 충주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하여지고 30일에 임금은 창황히 파천의 길에 올랐는데, 임금이 성문을 빠져나가자 뒤미처 난민들이 불을 지르기 시작하여 도성은 불바다가 되고 경복궁도 모두 불타버려, 태조 이래의 경복궁은 이때 터전만 남긴 채 소멸되고 말았다.

 

복구논의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터전만 남긴 채 소실되자 1606년 11월에 경복궁 복구가 논의되었으나 실천되지 못하였고, 1616년 말과 1617년에도 중건이 논의되기는 하였으나 역시 중지되었다. 현종(顯宗)도 재건을 염원하긴 하였으나 공역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며, 단지 1669년(현종 10)에 신덕왕후(神德王后) 부묘 때 그 제주소(題主所)를 강녕전 터에 장전(帳殿)을 설치하여 봉안한 바 있을 뿐이다. 숙종도 황폐한 경복궁에 가서 살피면서 감회에 젖었으며, 영조도 또한 그 복구를 생각하고 1772년(영조 48)에는 문소전 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으나, 끝내 경복궁의 중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재건

 

경복궁의 중건은 1865년(고종 2) 4월 2일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대원군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졌다.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도제조에 조두순(趙斗淳)·김병학(金炳學)을 임명하고 제조로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김병기(金炳冀)·김병국(金炳國)·이돈영(李敦榮)·박규수(朴珪壽)·이재원(李載元)·임태영(任泰瑛)·이경하(李景夏)·허계(許棨)·이현직(李顯稷)·이주철(李周喆)이 차하(差下)되었다.

4월 4일에 개기(開基)를 위한 영건고유제(營建告由祭)를 거행하고 4월 8일에 대왕대비는 10만 냥을 중건역비로 하사하였으며, 4월 12일에 경복궁을 중건할 터전의 친심(親審)이 있었다. 이에 앞서 4월 8일에 궁성을 쌓고 5월 2일에는 광화문을 비롯한 궁성문의 상량 날짜를 정하였다.

 

담장과 문의 석축부분은 임진왜란 때 재화를 면하고 남아 있어서 이것들을 헐고 다시 지어야 하였다. 중건공사에 소용되는 경비를 원납전(願納錢)이라 하여 거두었는데, 4월 말까지 1차로 수납된 것은 일반인이 바친 75만 7086냥 4전 9푼과 왕족들이 기부한 7만 6450냥이었다. 이후 이 기부금의 징수는 계속되었으며, 6월 20일에 강녕전·연생전의 정초(定礎), 10월 9일에 입주(入柱), 10월 10일에 상량하였다. 10월 24일에는 함원전(含元殿)·인지당(麟趾堂)이 입주되고, 11월 16일에는 상량이 있었으며 12월 24일에는 천추전(千秋殿)의 정초가 있었다.

 

이듬해 3월 6일에는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5일 밤 이경(二更)에 동십자각 근처 훈국화사(訓局畵師)의 가가(假家)에서 불이 나서 목수간 800여 칸과 다듬은 재목들이 타버리고 말았다. 1867년 2월 10일에도 불이 나서 재목을 불태웠다. 그래도 공사는 진척되어 3월 27일에 경회루의 상량이 준비되고 5월 2일에는 수정전(修政殿) 상량문의 제술관(製述官)을 선정하였다.

 

8월 18일에는 전각과 문의 이름들을 지었고, 11월 8일에는 완성된 건물의 당호(堂號)를 지었다. 11월 14일에 백관들이 경복궁 출입시 승지(承旨)는 영추문을, 문관은 정문인 광화문의 홍예문 중 동쪽문을 이용하게 하고 무관은 서쪽으로 드나들도록 제도화하였다.

 

1868년(고종 5) 6월 10일 경복궁 재건공사가 사실상 끝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임금의 이어(移御)에

대비하여 병조에서 입직(入直)을 준비하였고, 7월 2일에 드디어 임금은 대왕대비를 모시고 새 궁궐에 이사하니 비로소 경복궁은 정궐(正闕)로서의 위엄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1869년 9월 16일에 경복궁 재건을 위하여 설치되었던 영건도감이 철폐되었는데, 이 때에 집계한 원납전 등의 내용은 내하전(內下錢) 11만 냥, 단목(丹木) 5,000근, 백반 5,000근, 왕족이 바친 돈이 34만 913냥 6전, 일반인들의 원납전 727만 7780냥 4전 3푼과 백미 824석이었다. 준공된 전각은 합계 5,792칸 반이었다.

 

4년간 공사에 5792칸을 만들었다.
30년 걸릴 공사를 4년만에 준성했다?

 

중건이후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1872년 4월 7일 신무문(神武門)을 개건하고 1873년 봄부터 건청궁(乾淸宮)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와 서향각(書香閣)을 본떠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해 12월 10일 사시에 순희당(純熙堂)에서 불이 나서 인지당·자경전·복안당·자미당·교태전·복도·행각 등 합계 364칸 반이 연소되는 대화가 있었다. 이듬해 정월부터 복구공사가 착공되었으나 공비의 부족으로 지지부진, 1875년 3월이 되어서야 공사가 본격화하여 1876년 4월에 대체적인 복구공사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4일에 또 불이 나서 먼저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니, 침전 일각 830여 칸이 소진되고 말았다. 이 재해의 복구는 상당히 늦어져서 1888년 2월 25일에야 교태전·강녕전·인지당·자미당의 상량문의 제술(製述)이 있었다. 1890년 6월에 경성전(慶成殿)의 화재가 있었으나 곧 진화되었다.

 

1896년(건양 1) 2월 16일 경복궁의 수리공사에 착공하고 97년 5월 20일에는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慶運宮)에 이건하였다. 1899년 9월 21일에 영보당(永保堂)에 불이 나 28칸이 소진되었다. 그후 고종이 주로 경운궁에 시어하게 되면서 경복궁은 소강상태로 들어가는데, 이것으로 경복궁의 공역은 일단 마무리되고 또 나라가 멸망함으로써 궁궐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1917년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한 대내 일곽이 불에 탔다. 이것의 복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일곽을 헐어다 재건에 썼다. 이때에 철거된 전각은 교태전·강녕전·연길당·경성전·연성전·인지당·흠경각·함원전·만경전·홍복전 등 400여 칸에 달하였다. 그후 일인들은 광화문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들을 철거하거나 이건하였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하여 공진회 건물 등 낯선 건축물을 지었다. 또 각 지역의 석탑 등의 석조물을 반입하여 요소에 배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하도록 하였다.

 

8·15광복 이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안의 북동쪽에 건축되었으며, 6·25전쟁 때 문루가 불탔던 광화문육축의 석대를 궁 남쪽에 옮겨 시멘트로 문루를 세웠다.


1996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2009년까지 총 1,789억 원이 투입되어 경복궁 복원사업이 이루어진다. 1995년에는 강녕전이, 1999년에는 자선당 등이 복원되었으며, 2001년 10월에는 흥례문(홍례문)이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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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 삼조


추정 배치도와 건물 이름에 담긴 뜻을 알면 경복궁 배치의 원리를 해석할 수 있다.

궁전은 회랑으로 둘러싸인 3개의 중정으로 구성되었다. 남북 중심축 위에 정문, 금천교,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이 앞뒤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맨 앞 중정 안에는 금천교만 배치되고 가운데 중정에는 정전인 근정전만 배치되었다. 맨 뒤 중정에는 편전인 사정전과 침전인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등이 배치되었다.


3개의 중정을 앞뒤로 연속시킨 복합 중정형 배치의 원형은 무엇인가 주례고공기의 궁실 제도에 관한 규정에서 '삼문 삼조'라는 조항을 관련지을 수 있다.


삼조=맨 앞부터 외조, 치조, 연조로 연속되는 3개의 중정을 궁실 제도의 원초적 형식으로 규정 한 것이다.


연조=왕과 왕비, 왕실 일족이 생활하는 거주 구역으로 침전이 있다.

치조=왕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공공 구역으로 정전과 편전이 자리한다. 정전은 조례를 거행하고 법령을 반포하며 조하를 받는 곳이고, 편전은 왕이 중신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곳이다.

외조=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있는 구역이다.


삼문은 외조의 정문인 고문(외문),외조와 치조 사이의 치문(중문), 치조와 연조 사이의 노문을 말한다. 그러나 경복궁은 삼문 삼조의 바탕을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정전의 좌우에 대칭으로 세워진 검물 이름에 문무, 일월, 생성의 의미를 부여함으로 자연의 질서와 법칙에 순응하여 문무를 모두 숭상하는 정치를 펴야 한다는 유교적 이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정명에 담긴 이와 같은 유교적 명분은 한성의 4대문과 그 중앙에 위치한 종루의 이름 짓기에도 반영되어 인의예지신의 오상을 오행 방위에 해당하였다.


창건 경복궁는 왕권 강화 이전 유신들의 추구하던 재상 중심의 정치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궁궐의 전체 규모가 몇 백 칸에 불과하다. 왕실 가족의 전유 공간인 연조에 세채의 침전밖에 없다. 궁성 안의 일을 도맡을 관청으로 상의원, 사옹방, 상서사, 승지방, 내시 다방 등 최소한의 부서만을 두었다. 건국과 동시에 군사 기능을 담당하였던 중추원과 중앙군 소속의 무반을 통솔하던 삼군보(군령과 군정을 총괄하던 군사 기구) 등을 궁안에 둔 것은 왕조 초기의 상화을 반영한 것이다.


정도전의 말"궁원의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위엄을 보여 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한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검소란 덕 있는 것이고 사치란 커다란 악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띠 집과 흙섬돌로 꾸민 경우에는 마침내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요대경실을 꾸민 경우에는 위망의 화란을 구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중략)

 

법궁 체재의 완성

태종대의 보완


태종 4년에는 급기야 환도 준비의 일환으로 이궁인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경복궁을 대신하게 되었다. 태종 11년에는 이른바 명당수를 금천으로 끌어들였다. 태종 12년에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기 위하여 원래 있던 작은 누각을 헐고 그 서쪽에 새로 경회루를 세워, 그 둘레에 넓은 못을 파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경회'는 임금과 신하의 합일을 뜻하는 말로,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쓴 일은 유명하다.


세종 대의 완비


태종은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았으나 세종은 재위 3년이 되던 해부터 자주 경복궁에 이어하여 궁전을 수리하고 세종 8년에는 집현전 문신들에게 문과 다리 이름을 명명하게 하였다. 이때 정해진 문의 이름은 홍례문, 광화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등이며 금천에 걸쳐진 다리의 이름은 영제교로 하였다. 이 일은 경북궁 창건 후 30년 후의 일이다. 정문의 명칭도 오문에서 홍례문으로 바뀌었다. 궁전과 행랑으로만 된 초기의 경복궁은 이때 비로소 궁성과 함께 궐문을 갖춘 명실상부한 궁궐이 되었다. 세종 8년에 근정전을 수리하고 ,9년에는 동궁인 자선당을 창건하였다. 10년에는 건춘문을 수리하고  11년에는 경회루와 사정전을 중수하였으며 15년에는 강녕전을 수리하고 아울러 북문을 신설하여 궁성 4문 체재를 완성하였다. 같은 해 천후 관측소인 간의대를 궁성 서북 모퉁이에 세우고 16년 4월에는 홍례문 밖에 있는 동대를 궁성 서북 모퉁이에 세우고 16년 4월에는 호례문밖에 있는 동서랑을 의정부 육조와 여러 관청이 숙직하거나 대기하는 곳으로 삼았다. 같은 해  8월에는 시간을 측정하는 보루각을 세우는 한편 융문루와 융무루를 수리하였다.17년 9월에는 주자소를 궁궐 안에 설치하였다. 20년에는 강녕전 서쪽에 천체 운행의 관측을 위하여 흠경각을 세움으로 과학 문명의 첨단 시설을 궐 안에 모두 갖춘 셈이다.25년에는 언문청을 설치하여 우리글을 완성시키는 산실로 삼았다. 후궁영역을 넓히기도 하였다. 세종 22년에는 왕과 왕비가 동궁으로 옮긴 뒤, 3년 만인 세종 25년에 처음으로 교태전을 후궁 영역에 건립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상서사와 춘추관을 궐 안에 새로 지었고, 5월에는 여러 문의 이름을 새로이 명명하였다. 세종 말년인 31년(1449) 6월에는 이른바 정궁안에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 등이 갖추어졌다.  뒤쪽 후궁 안에 소실로 함원전, 교태전, 자미당, 인지당, 종회당, 송백당, 청연루등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대에 침전 구역과 편전 구역이 분명하게 나누어지게 되었다.

 

법궁의 발전


세조 때에는 수리도감을 설치하여 경복궁을 수리하였고 예종 때에 숙직 군사를 위햐여 선공감에서 영추문 안에 가가(임시거처) 10칸을 지었다.


성종 때에는 제조와 낭청을 따로 임명하여 근정전을 새로 칠하고 경회루를 중수하는 등 크게 수리하였다.


후원은 정종 대에 상림원으로 불렸다. 세종이 후원의 새와 꽃을 모두 민간에 나누어 준 뒤로 버려졌다. 그러다가 새로 서현정(활쏘는 곳), 취로정(농사 관찰하는 곳, 세조 2년 3월 5일 준공), 관정전, 충순당(궁장밖에 위치)등이 지어지면서 다시 후원으로 가꾸어졌다.


궐내 관서는 승정원, 홍문관(승정원 서쪽의 옛 집현전), 상서원(보루각 남쪽), 춘추관(상서원 서쪽), 예문관(승정원 서쪽), 승문원(롱례문 밖), 교서관(사옹원 남쪽의 내관), 사옹원(승정원 남쪽의 내사옹), 내의원(관상감 남쪽), 상의원(영추문 안), 사복시(영추문 안의 내사복), 사도시 (내의원 남쪽), 관상감 (상의원 남쪽), 세자시강원, 전설사(홍례문 종쪽), 전연사 (홍례문 서쪽), 내반원(경회루 남문 서쪽), 오위도총부(광화문 안)등으로 임진왜란 때까지 경복궁 안에 있었다.

 

1553년 화재


명종 8년(1553년) 9월에는 실화로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 이때에 동원된 인력이 부역이 2,200명이었고 품팔이꾼이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때에 건립된 경복궁을 그린 ‘한양궁궐도병’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명종 8년 (1553) 9월 14일에 일어난 불로 근정전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는 창건 이래 최대의 참사가 일어났다. 중건 할 때 예조판서였던 홍섬

(1504~1585년)왕명을 받들어 지은 '경복궁중신기'에는 중건 전후의 사실이 명종실록 보다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1. 중종 때 불탄 동궁을 짓기 위하여 공사를 하던 중 명종 8년9월 13일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남으로는 사정전 남랑, 동으로는 강녕전 외동랑, 북으로는 청연루 남월랑, 서북으로는 함원전 영태문 북으로는 교태전, 서남으로는 경회문 등이 불타고 오직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이 남았다.


2. 경복궁 대내에 설치된 선수도감의 조직은 영의정을 도제조로 좌찬성, 이조판서, 공조판서를 제조로 삼아 동궁조성도감과 하나로 합치되, 낭료 가운데 일을 잘 주관할 사람을 뽑아 분조로 일을 맡기고 도청으로 삼았다. 작업장은 8소로 구성되었는데 동궁은 재료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3월에 먼저 공사를 시작하여 9월에 마쳤다.


3. 공사 규모가 커서 대부분 부역에 의존하였으나 재료는 물길 가까운 곳에서 조달하고 모자란 것은 가원도와 함경도에서 샀다. 노동력은 동원된 군인과 승도가 2,200명이고 대가를 받고 일한 사람이 1,500명이었다.


4. 중건된 건물은 전이 강녕, 사정, 교태, 경성, 연생 다섯, 당이 자미, 양심 둘, 각이 흠경 하나, 합이 비현 하나 등 문랑청방을 모두 합하여 370여 칸이었다.


임진왜란


1592년 선조가 피란할 때에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궁궐들을 난민들이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유성룡의 《서애집》에는 "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을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이 궁중으로 침입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도 약탈했다."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으나 이는 목격담이 아니라 전해들은 것으로,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집적 목격한 것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계사년(1593년) 4월 20일이었는데, 이 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후였다. 그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에 기록된 종군승(從軍僧) 제다쿠의 《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직후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의 전각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기록들로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은 왜군과 조·명 연합군의 전투가 거듭되면서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환도 후에는 월산대군의 옛 집(광해군 3년 이후로 경운궁, 지금 덕수궁 일부)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경복궁과 궁은 누가 없앴는지 우리는 우리 민중이 자신의 노비문서를 태우기 위해 여러 가지 약탈하기 위해 궁을 태웠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은 누가 만들었는지 일제제국주의 시대 사관이 아닌지 그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있다.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시점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계사년(1593) 4월 20일이 있고 , 이대는 이미 종묘도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채였다. 왜군이 한성에 입성하였을 때인 1592년 5월 2일에 경복궁은 온전히 서서 주인 잃은 빈궁궐의 허허로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한성마저 탈환당하는 패전을 거듭하던 왜군들이 퇴각 하면서 종표와 궁궐을 비롯한 도성 시설을 방황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던 것은 아닐까?왜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한 종군승 석시탁의 '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직후에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 온전하게 남아 있던 경복궁의 모습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597年(萬曆二十五年) 紫禁城大火,焚毀前三殿,後三宮。

複建工程直至1627年(天啟七年)方完工。 

 

위는 기록은 대륙 자금성 대화재 기사인데 공교롭게도 임진왜란시기이다.

바로 왜란으로 인해 불태워졌다는 곳은 한성에 있는 경복궁이 아니라 바로 자금성일 가능성이 높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작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다리를 지키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돌을 다듬어 담을 쌓았는데 높이가 여덟 자이고 귀퉁이마다 방향에 맞추어 네 마리씩 전당이 있다. 돌로 된 기둥 아래위에 용을 조각하였다. 지붕에는 유리기와를 덮고 잇단 기와 줄마다 푸른 용 같다. 서까래는 매단 나무인데 서까래마다 1개씩 풍경이 달렸다. 채색한 들보와 븕은 발에는 금과 은을 돌렸고 구슬이 주렁주렁 달렸다. 천장 사방 벽에는 오색팔채로 기린, 봉황, 고아작, 난, 학, 용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는데 계단 한가운데에는 봉황을 새긴 돌이 그 좌우에는 단학을 새갠 돌이 깔려 있다. 여기가 용의 세계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_인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왜군이 입성당시는 경복궁은 불에 타기는커녕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질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갖고 있어 종곤왜승의 놀라움과 탄성을 자아냈던 곳이다. 그리고 왜군이 입성하였을 때 돌로 쌓은 경복궁 안에 무수한 전각과 행랑이 있었으나 이름을 알 수 없도록 현판을 모조리 떼어낸 상태였다.


대원군의 중건


1865년(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 같은 해 4월 13일 공역이 시작되어 1868년 6월 말에 공사를 마쳤으며,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移御)가 이루어져 정무를 개시하였다.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공사를 마치기까지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7년이 넘게 걸렸는데, 경복궁에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정원, 홍문관 등 기타 여러 관아가 정비되어 있었다.


중건된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그 뒤 몇 차례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곡하였다. 고종 32년(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하고,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

 

고종 이전의 중건 논의


'경복궁 중건'이라는 조선왕조 후반기 최대의 건축 과제는 이후 270여 년 동안인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물론 경복궁은 중건을 가장 먼저 책임져야 할 왕인 선조는 중건 계획을 구체적인 단계까지 입안하였다.'선조실록'에 실린 여러 기사에 의하면 춘추관에서 중건에 필요한 자료, 곧 창건 때의 자료와 성종 때의 수리 기록인 '경복궁조성의궤'와 명종 때의 중건 기록을 한데 묶어 등서로 만들어 왕과 주무 관청인 공조에 바쳤다. 그러나 중건 계획은 전쟁의 피해 극심으로 중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풍수적으로 경복궁터가 깋지 못하다는 풍수적인 믿음도 한몫했다. 결국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하여 준비한 재료로 창덕궁을 중건하였다.


광해군은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하는 데 그치지 앟고 인경궁과 경덕궁(경희궁)을 창건하며 재위 말년까지도 경복궁 중건을 회피하였다. 그 결과 인조반정 이후 인경궁이 헐렸어도 도성 안에는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등이 동서로 있어 경복궁을 중건할 현실적인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고종 대의 중건

중건 과정


고종 2년 (1865) 4월 2일의 전교 이후 중건 공사는 혹심한 재정적 궁핍을 겪으면서도 2년 7개월 만인 고종 4년 (1867)11월에 거의 완공되었다.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270여년만의 이어가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8개월 후인 고종 5년 7월 2일이었다.


중건공사는 궁성>내전>외전>외전>경회루>별전>행각>순으로 진행 되었다.신무문 밖 후원에 새로운 건물인 융문당, 융무당, 비천당, 등을 창건한 것은 1868년(고종5)이었으며 ,정부 기관의 시무처인 궐내 각사를 계속 지어나갔다. 이듬해 궁성 북부에 다시 건청궁을 지었다.1873년 12월에는 대비전인 자경전이 소실되어 1876년(고종13)4월에 자경전이 중건되고 교태전, 자미당, 인지당, 등의 개건이 완료되었다.1873년 11월불이 났다. 총 830여 칸이 소길되고 조선 후기 궁중 문화의 유산도 대부분 소실되었다. 대보와 동궁의 옥인만을 겨우 건졌을 뿐 모든 보와 부신을 잃었다. 이 때 잃어버린 건물은 1888년(고종25)에 가서야 복구되었다.


일제강점기


1910년에 한일합방 이후 경복궁은 훼손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1910년 이후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 큰 화재가 나서 침전이 모두 불타버리자,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이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함원전, 경성전 등을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헐어내어 창덕궁의 침전 복구공사 재목으로 썼으며, 1918년부터는 왕권의 상징인 근정전,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을 유물 전시실로 이용하였다. 1916년부터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하였다. 총독부 청사 신축을 두고 조선 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인들까지 맹렬히 비난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27년 9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이 밖에도 일본인들은 1929년 5월에는 융무당(隆武堂), 융문당(隆文堂) 등을 헐어 한강로에 용광사를 지었으며, 1932년에는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다. 1940년에는 건청궁터에다 미술관(옛 전통공예전시관)을 지으며 수많은 내전 건물들을 헐어버렸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경복궁에 남게 된 건물은 1865년(고종 2년)에 건설한 건물로 건춘문, 천추전,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고, 1867년 건설한 건물로는 근정전, 사정전과 주변 회랑 및 행각, 제수합,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 경안당 등이 있으며, 1873년에 지은 건물로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 있다.

 

해방 이후


해방 이후 경복궁 내에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 후생관(용산으로 이전하기 전의 국립중앙박물관), 제2별관(옛 문화재연구소) 등이 건립되고 서북쪽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였다. 광화문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문루가 타버리고 석축만 남아있던 것을 1963년에 원래 위치 쪽에다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였으며, 조선총독부 청사는 1995년에서 1996년에 걸쳐 문민정부가 철거하였다. 이후 1990년에 들어서 대한민국 정부는 20년 계획으로 단기 복원 계획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9년까지 원래 규모의 40퍼센트 수준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건축물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남쪽으로 정전, 편전, 침전과 후원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채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입구(前朝)

 

興禮門(흥례문)光化門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정문이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현재 2012년 복원공사를 위하여 철거 중이다.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천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영추문(迎秋門)은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한 문으로,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영추문이라 이름하였다. 문 밖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주로 일반 관료들이 드나들었다. 영추문의 천장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궐내 각사가, 문 밖에는 궁궐에 물자를 조달하는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興禮門

흥례문(興禮門)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東西十字閣

 

총독부청사의 건립으로 궁장이 몽땅 헐려나간 뒤에도 동십자각(오른쪽 표시)은 그대로 남았던 반면 건너편의 서십자각(왼쪽 표시부분)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 이 사진을 보더라도 전차선로가 지나는 탓에 궁궐의 서남쪽 모서리가 둥그스름하게 변해버린 상태라는 것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경복궁의 서십자각이 버젓이 남아 있던 시절의 풍경이다. 왼쪽이 서십자각이고, 오른쪽이 광화문이다.


동십자각은 그러한 몰골로나마 확연하게 그 존재가 남아 있는 것과는 달리 광화문 너머 저 건너편의 대칭되는 지점에 있어야 할 서십자각(西十字閣)은 그 흔적조차 전혀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경복궁의 서남쪽 모서리를 아무리 둘러봐도 그저 둥그스름한 담장이 이어지고 있을 뿐 그곳에 동십자각과 똑같은 문루가 서 있었다고 짐작할 만한 단서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위 서십자각이 남아 있는 사진은 산세와 지형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서울 경복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위와 같은 모습의 광경은 찾으려면 대륙에서 마땅히 찾아야 할 것이다.

사진이 주는 분위기가 벌써 서울 경복궁과 차이가 있다.

 

永濟橋,橫跨於興禮門與勤政門之間,名為禁川的護城河上的石橋便是永濟橋。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 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하다.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다.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게 되면서 45년 동안 폐쇄되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維和門

奇別廳


외전

 

외조, 외전은 궁궐의 정문에서는 가장 가깝지만 연조로부터는 가장 바깥쪽이므로 외조라고 한다. 정치를 보관하는 관청이 자리 잡고 있는데 동궁에 딸린 관청 가운데도 외조에 속하는 것이 있다. 이 관청을 궐내 각사라 한다. 이것은 문직 공서, 무직 공서, 잡직 공서로 나뉜다.

 

勤政門,國家舉行重要儀式或典禮時,正門才會被開啟。在平時,文武官需各別從兩側的日華門與月華門通行。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정문과 행각은 고종 4년(1867년)에 근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금천교, 어구, 흥례문을 비롯하여 이곳도 해체ㆍ철거되었는데,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고 이 일대를 재건하면서 원래 모습을 찾았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勤政殿,國寶第223號。為朝鮮君王舉行登基大典或召開宮廷宴會時的地方。接見外國使臣也均在此殿進行。殿前偌大的廣場上,有著一座座的品階石於東西兩側整理排列著。文官居東;武官居西,並依照階級高低排列。

근정전은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法殿)이었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주변 회랑이 단랑(單廊)이었으나, 현재의 근정전은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상ㆍ하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어진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御道) 좌우로 문ㆍ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쌍의 품계석이 놓여있다.

 

한반도 근정전은 진찬의궤 근정전도와 차이가 있다.

 

건물 제일 밑 하단 그 위 상단 계단의 기울기와 길이가 현격하게 차이가 있다.

건물이 올려진 받침대가 있어 모두 3단이다.

그런데 한반도 근정전은 2단이 고작이다.

건물이 세워진 하단부에 받침대가 없다.

때문에 한반도 근정전은 낮아 보이고 진찬의궤의 근정전은 상당이 높아보인다.

또한 자금성 대화전에서 볼 수 있는 계단 중앙에 대리석 거대한 규모의 문양이 보인다.

한반도 근정전과 창덕군 인정전은 원래 궁이 아닌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 근정전]

                                                         [진찬의궤 근정전도]

 

                                                       [자금성 대화전 계단 문양]

근정전 건물 외관은 충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어좌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의 병풍이 있다. 천장 중앙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 발톱이 7개인 칠조룡(七爪龍) 한 쌍을 만들어 달았으며, 건물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본래 건물 안에는 의장기물이 가득 장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隆文樓

隆武樓


資善堂,東宮殿閣之一。與丕顯閣一同位於勤政殿東側,故名東宮。朝鮮時期曾有過繼照堂、春坊(世子侍講院)、桂坊(世子翊衛司)等建築,但均被日軍焚毀。 

자선당(資善堂)은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다. 입구를 바라봤을 때 오른쪽 방에 세자가 살았으며, 맞은 편인 왼쪽 방에 세자빈이 살았다. 일제시대때 건물전체가 일본에 건너가 이왕가박물관으로 쓰이다가 해방후 다시 찾아오려했으나 고베 대지진때 무너지는 바람에 현재는 새로 지은것이다.


丕顯閣,東宮殿閣之一。為世子與世子嬪的居所。

비현각(丕顯閣)은 크고 밝은 전각이란 뜻으로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思政門

思政殿,位於勤政殿的後方。為朝鮮君王與臣下平日議政、商討國事的主要殿閣。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사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이는 누구나 높고 영광되고자 아니하고 위태롭고 악하고자 하였겠습니까마는,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계책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千秋殿,位於思政殿西側的便殿。為朝鮮世宗大王與眾學者們發明韓國文字的地方。

천추전(千秋殿)은 왕의 편전(便殿)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사정전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萬春殿,位於思政殿東側的便殿。與千秋殿同樣設置有暖坑,以便於冬季時使用。 

만춘전(萬春殿)은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이다.


字庫,設天、地、玄、黃、宇、宙、洪、荒、日、月、共計十間字庫。


내전(後廷)

 

내전은 왕과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왕의 침소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도 내전에 있는데 대왕대비, 즉 왕의 어머니의 거처이다.

 

정궁은 궁궐을 뜻하기도 하지만 좁게는 궁궐내에서 편전과 왕의 침전이 있는 구역을 가리킨다. 후궁은 정궁 뒤쪽에 있는 궁전을 가리킨다. 왕비의 침전은 왕의 침전 뒤편에  따로 지어지면 (경복궁, 경희궁)후궁에 소속되나 왕과 왕비의 침실을 한 건물에 두면(창덕궁 대조전) 정궁으로 본다. 그러나 후궁은 왕비의 침전을 제외한 내명부 소속 궁녀들의 생활 영역 전체를 뜻한다.


경복궁의 후궁지역은 북궐도형에서 보면 강녕전, 교태전, 자경전으로 이어지는 침전 구역의 동쪽과 동궁의 북쪽에 해당된다. 자경전 동쪽과 남쪽은 집희당, 춘소당(침방), 취운당(수방),응향당, 함정당, 계응당, 자운당, 보월당, 복회당(생물방), 난지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자경전 이북에 자리잡은 화락당, 벽혜당, 대향당, 정훈당, 건기합, 요광당, 벽월당, 영보당, 제수합, 등 수많은 건물은 여러 직능을 맡은 궁녀들의 거처와 일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제수합 한 채만 남아있다.


嚮五門


康寧殿,君王的寢殿。內有十二間居室。在平時,大殿尚宮及內侍均於此殿內待令。

강녕전(康寧殿)은 왕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으로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초익공 팔작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으며,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 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 복원하였다.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 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령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지었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魏)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 너의 벗한 군자를 보니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다. 잘못이 있어도 멀리 하지 아니하고 너의 방에 함께 있으니, 방 한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라고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정도전,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慶成殿,位於康寧殿西側的小寢殿。

延生殿,位於康寧殿東側的小寢殿。

延吉堂

膺祉堂

兩儀門


交泰殿,王妃的寢殿。因位於整座宮闕的中央,故又名中宮殿。而中殿一詞也常用來代稱王妃。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인 중궁전으로, 강녕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교태란 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으로 주역에 있는 괘 이름이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위치하고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 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본래 교태전 건물은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지어 대조전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재건하였으나,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 중건 때의 것이다.


元吉軒

含弘閣

建順閣


峨嵋山

아미산(峨嵋山)은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돋운 작은 가산(假山)이지만,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맥이 북한산, 북악을 지나 경복궁에서 멈춘 장소이다. 아미산에는 괴석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이 가운데 보물 811호인 아미산 굴뚝이 있다.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혹은 31단으로 쌓고,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落霞潭

涵月池

風旗台

欽敬閣,用來放置能確立時刻、測量方位等科學儀器的殿閣。

含元殿,朝鮮初期開展佛教活動的場所。

萬歲門


慈慶殿,王大妃、大王大妃之居所。 

자경전(慈慶殿)은 왕비의 정침(正寢)인 경복궁 교태전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로 높여져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교태전에서 옮겨와 주로 머물던 곳이 자경전이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로, 현재의 자경전은 조대비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지은 뒤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한 것이다. 전면 마당 동ㆍ남ㆍ서쪽에는 각각 동행각, 남행각, 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자경전 뜰 앞 왼쪽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다.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만(卍)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자경전 후정 담의 중앙부에는 자경전 십장생(十長生) 굴뚝이 있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단 앞으로 나와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어있다.[23] 벽면 상부에는 소로 및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고 십장생 무늬로 장식하였다.


福安堂

清讌樓

協慶堂 

十長生煙突 

荷池

齊壽閣

興福殿,此殿是為後宮與其內命婦而建造的殿閣,位於交泰殿北側峨嵋山後方。 但已於戰亂中遭日軍幾近全數焚毀,至今尚未復原。

咸和堂

緝敬堂


修政殿,為一處修建於一廣大基石高台上的大型殿閣。朝鮮時期,殿閣周圍曾設有弘文館、檢書廳、賓廳及承政院等闕內各司。 

수정전(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엔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1456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버려져 있었다.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으로 추정되는 이 전물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주변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관청이 있었다.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문서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과 역대 왕들이 쓴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慶會樓,為一座二層樓的建築,四面環水,景色優美。為朝鮮君王招待外國使節時所使用之樓閣。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국보 제224호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대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지금의 경회루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1867년에 새로 지은 건물로,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크고 사각진 인공 연못 안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원래 경회루는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완성하였다. 태종은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며 경복궁에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 장소를 마련하고자 이 누각을 지었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잘 견딜 수 있도록 한 점, 거대한 건물을 간결한 구조법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 장소를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인왕산, 북악산, 남산 등 주변 경관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도록 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 대 방지(方池)의 물과 당주를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이 높이 평가할 만하다.


醉香橋


香遠亭

향원정(香遠亭)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荷香亭

集玉齋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協吉堂

八隅亭

冽上真源

恭默齋

肅聞堂

敬思閣


泰元殿,坐落於景福宮的西北角。為奉行國喪與祭祀的殿閣。亦曾被當作殯殿及魂殿來使用。 

태원전(泰元殿)은 왕의 비빈들이 살던 곳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임금의 화상)이 봉안됐던 곳이자,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으로도 활용되었다. 빈전은 빈소의 높임말로,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그러나 태원전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어, 그 자리에 일본군과 미군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바로 뒤인 관계로 97년까지 한국군도 주둔해 있었다.[27] 현재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고종때 태원전의 건축이유는 왕의 적통이아니라 입양된 고종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위해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永思齋

維正堂


乾清宮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에 지어졌으며, 1909년 이전에 철거되었다가 복원되어 2007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長安堂 

正化堂

秋水芙蓉樓

坤寧閣

玉壺樓

正始閣

四時香樓

福綏堂

綠琴堂 


附屬建築


建春門

迎秋門

玄武門

景武台(青瓦台)

七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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